1984 (반양장)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문학동네


솔직히 그런 책들이 있다. 제목을 워낙 많이 들었거나 그 핵심 아이디어라며 쉽사리 인용되는 한두가지 개념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미처 읽기도 전에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고 마는 책. 예컨대 '빅브라더'같은 단어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하루키의 1Q84를 두고 '아이큐84(IQ84)'라며 이상하게 읽어대는 어떤 문학평론가를 조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하루키가 1Q84라며 비튼 제목의 원전 격이랄 조지 오웰의 '1984'를 여태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굉장히 멋진 책이다. 하루키를 무지 좋아라 하지만, 그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아마 2984년쯤에도 살아남아 찬사를 받을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일 거라는 데 걸겠다. 물론 두 작품은

제목 빼고는 별로 주제도, 내용도 겹치지 않으니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1Q84를

제목으로 내건 하루키가 1984의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고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뭐랄까, 두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불현듯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이 떠올랐다. 사회주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한번의 혁명, 한번의 전복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애써 이뤄낸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 '영구혁명론'의 대강인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1984년의 세상은 그런 영구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세상인 거다. 다만 그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러니까 기득권층, 더 적나라하게는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다.


1984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빅브라더'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다. 권력을 쥔

상층계급에 대항해서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의 수식을 내건 중간계급이 하층계급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상층계급으로 자리이동하고 다시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성되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식의, 커다란 순환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은 그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보유하려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하기 위해서 집적되어야 하는 부를 족족 소진시키고,

중간계급을 각성시키기 위한 지식을 황폐화시키겠다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전략. 그게 지배계급의, 지배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에 의한 '영구혁명'의 목표다.


듣기엔 우습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온 인류를 먹여살리고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경이로운 수준에

오른 생산력은 주변국과의 쉼없는 전쟁을 위한 총과 대포를 위해 소모된다. 현재의 세상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한 나침반이자 전거로서 기능해야 할 과거의 역사, 과거의 지식은 매시간 새롭게 씌여진다. 늘 전시체제 하에서

동원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없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며, 배급되는 신발과 면도날의 질과 양이

불과 일년 전에 비해서도 양호해졌는지를 따지지 못한다. 그들은 전쟁의 광기에 불현듯 휩싸이면 빅브라더를

위해 만세를 부르며, 집안 화장실마저 감시하는 사상경찰 하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권력이 자원을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쪽으로 소모해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건 2010년 지구에서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한국만 해도, 온 국민을 먹여살리고 북녁의 주민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소하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무기를

구매하고 국외와의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시키며 4대강 같은 무익한 사업에 쏟아부으며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권력과 언론간 '반복과 차용'의

근친교배를 통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들. 천안함 사태가 그렇고, G20가 그렇고,

사대강 사업이 그렇고, FTA옹호론이 그렇다. 그 와중에 국내이슈를 덮어버리는 애국 마케팅도 절묘하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그렇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괜히 그를 '디스토피아'의 무시무시한 재현자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다. 이들, '빅브라더'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버리려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구조를 고착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사고 자체를 개조하려 든다. 기계에서

자동으로 배열된 몇가지 단어로 짜맞춰진 시와 노래만을 유포하고, '섹스를 더럽게 변질시켜' 억압된 성욕을

전투적인 증오심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키는 거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둔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그 자체를 새롭게 정리한다. 어휘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생각의 폭을 좁히고, 결국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인간을 만드는 것이 빅브라더가 생각하는 혁명의 완수.


빅브라더의 생각대로 될까.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들, 깊은 사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관념어들이 없어지면, 정말 인간이 변화할까. 그리고 신발깔창처럼 제작되는 노래와 시들이 재래의 예술을

대체하면 인간의 문화는 황폐해지고 말까. 성욕을 억압하면 인간들이 까칠해져버려서 전투적으로 변하고

전시상태의 비인간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전통적 가정을 하나의 상호 감시단위로 변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될까.


모르겠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주인공 윈스턴조차 찢겨진 시체의 팔목을

무심히 발로 차내어 버릴만큼 황폐해졌고,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곡괭이로 살해하고 말겠다 다짐할 만큼 살벌하다.

결국 지독한 고문과 자기 부정을 거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오웰의

예측은 옳은 것이었다고 동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겠구나, 역사는 멈추고 말겠구나, 기껍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게 단순히 조지 오웰의 '사고 실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떤 권력도 빅브라더만큼 철저하게 국민들을

통제한 바 없으며, 언어를 조직적으로 퇴화시키는 건 고사하고 문화와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규율하고 억압한

적은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불길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신체에 대한 구속력-생체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고, 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대중문화는 스스로 천박해진지 오래다. 전신을

스캐닝하고 개인정보와 생체정보를 집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란 너무 쉬워졌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하향평준화를 강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적 사고를 단련하기 위한 시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슈들에 선점당한다고 느낀다면, 너무 시니컬한 건가.


다행히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이 암울하고 염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값지다.

자연스런 흥망성쇠의 역사 흐름을 멈춘 채 현재의 지위와 특권을 영원히 장악하겠다는 그들 권력자들의 욕심은,

조지 오웰이 그 결과로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언정, 그 욕심 자체는 지독히도 진부하고 익숙한 거다. 그들은

언제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며, 그들을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를 강권한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4대강은 운하가 아니고, FTA는 모두에게 유리하며, 아랍인은 테러리스트이고,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경찰이고,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란 이야기.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2+2=5, 라디오헤드의 이노래가 1984의 이 대목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이제 끔찍해질 거야, 도망칠 곳은 없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도 이제 너무 늦었어.


Are you such a dreamer
To put the world to rights?
I stay home forever
Where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 lay down the tracks
Sandbag and hide
January has april′s showers
And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ts the devil′s way now
There is no way out

You can SCREAM IT, you can shout
It is too late now

Because...
You′re not there!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You have not bee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WHEN I SAY SOON oohh

I try to sing along
But I get it all wrong
′Cause I’m not
′Cause I’m not

I swat ′em like flies but like flies the buggers keep coming back NOT
But I’m not

All hail to the thief
All hail to the thief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Don′t question my authority or put me in the box
′Cause I′m not
′Cause I′m not

Oh go and tell the king that the sky is falling in

When it′s not
But it′s not
But it′s not
Maybe not
Maybe not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 90년대 말 집회 현장에서 그의 연설을 몇 차례 들을 기회가 있었다. 누구였더라,

옆에서 저 사람이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선도했던 사람이라고 내게 알려줬더랬다. 골리앗 투쟁? 그게

뭐였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 싸움이었는지 알고 난 건 그 후였다.


이미 그때도 조금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골리앗 위에서 '고작' 14일 버텼다고? 그전엔 '고작' 128일동안 투쟁을

이어갔다고? 주변엔 1000일이 가깝도록 싸우고 있는 현장들이 쉽게 눈에 띄는 데다가 망루 위로, 굴뚝 위로,

옥상 위로, 올라가 몇 달을 버티는 소식들도 쉽게 들리고 있으니까 그랬다. 그야말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세례를 받은 초기 세대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의 책은 '그땐 그랬었지'류의 회고를 하지 않는다. 대개 '-한다'라는 식의 현재형 문장을 구사하는

그는, 그의 경험이 여전히 유효함을, 그가 체감한 노-자간의 굵은 갈등이 조금은 세련되어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같은 모양새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1000일 가까이 장기투쟁중인 사업체들이 겪는 이야기나

128일 투쟁했던 현대중공업의 이야기나. 지금 한국사회를 온통 장악한 삼성의 천하무적스러워 좌절스런

이미지나, 90년대 대통령까지 넘보았던 거대했던 현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나.


그러고 보면 '내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노조는 안된다'던 정주영의 현대도 어느새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대대손손 해먹을 기세인 이건희의 삼성도, 지금은 비록 통제불능의 거악으로 보이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갑용은, 본인의 경험을 최대한 적나라하게 살려내어 '작은 실무 교재'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투쟁 교본'.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며 더욱 위축되고 천대받던 노동을 위해 시행착오와

착시현상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도록.


그의 책 제목은 참 우직하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 길은 복잡하지 않단다. 마음이 복잡할 뿐. 정말 그런진

모르겠다. 다만 그가 '강성/온건 노조'의 거짓된 구분을 거부하고 '단결'과 '투쟁'만이 노동자의 힘이라고

재이재삼 다짐하며 노동현장에서 투쟁하던 이야기나, 최초의 노동자 출신 구청장으로 재임하던 때 노무현의

공무원 노조에 대한 징계를 거부해 중도사퇴당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궁금해진다.


무섭도록 단순하고, 심플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민주화 유공자'란 이 사람은 앞으로 또 어떻게 살게 될까.

그의 부인은 그를 '계급주의자'라고 칭한다. 국가나 국민 따위의 알량한 실체 없는 거품을 제하고 나면 늘

모든 일은 특정 계급에게 이익이 되고 다른 계급에 손해가 될 뿐이다. 지금의 민주노총은-한국노총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정파적 이해에 갈린 진보정당들 역시-노동자 계급, 밥벌이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육체를

팔고 있는 계급을 제대로 지켜내고 있지 않다는 그의 날카로운 말들이 약이 되길 바란다.



'34년 전인 190년, 평화시장 시다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노동청을 찾은 청년

전태일을 맞은 노동청의 공무원은, 노동운동을 그만두라고 오히려 전태일을 협박했다. 노동청이 노동자를

위하는 곳인 줄 알고, 근로 감독관이 잘못한 업주를 감독하는 노동자의 편인 줄 알았던 전태일은 큰 충격을

받는다...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34년째 되는 2004년 11월 1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위원장은 '공무원

노동자 총파업'을 선언하였다...


'공무원도 노동자'라는 선언으로 이제야 공무원 노동자들은 열사에게 진 빚을 갚았다. 더이상 노동자에게

저항의 대상이었던 공무원, 국민의 심부름꾼이 아닌 정권의 심부름꾼인 공무원은 없다. 공무원 노동조합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공무원 노조는 반드시 합법화될 것이다. 지금 정권에서 되지 않는다면 다음 정권이던

그 다음 정권이던 그들이 노동자란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그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니 노무현 정부여, 나를 고발하라! 누가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되는지 두고볼 일이다."

(2004년 공무원 노조 파업때 파업 참가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를 거부하며 이갑용 구청장이 쓴 글, p.246)

길은 복잡하지 않다 - 8점
이갑용 지음/철수와영희

그래도 한때 한나라당에 대항하는 범야권의 대선주자로까지 거명되던 인물이다.


정부의 역할과 복지정책의 개연성을 높이는 케인즈 경제학조차 '진보'로 분류되는 세상인지라 그랬을 거다.

그는 나름 '케인지안'으로 시장원리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합리적 혹은 (상대적인) 진보적 언사가 심심찮던 경제학자였다.


그는 이미 교육부장관보다 힘이 세다는 '서울대 총장' 자리에서 나름의 검증을 거쳤다고 여겨졌을지 모른다.

'딸깍발이'류의 신화야 바라지도 않지만, 제도권 정치인과는 다른 고고한 학자로서의 기개랄까, 순수함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상대적으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 나름의 신념과 자존심을 꿋꿋이 견지하고 있는 사람일 거라 보여졌다.


그런 것들이 정운찬이 재야 인사나 시민운동 세력으로까지 분류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한나라당에 대항한) 야권,

(보수우익세력에 대항한) 민주세력의 히든 카드로 주목을 끌어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랬던 그가 '서울대 총장', '케인지안 경제학자', 혹은 자신의 말대로 '서민의 삶을 살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허울을 벗고 검증대에 올랐다. 검증대에 오르기까지 그가 보였던 치졸한 언사들과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말장난들은

논외로 하고, 또 어제까지 자신의 편이라고, 최소한 반대편에 서지는 않으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의 경악과 뻘쭘함 역시

눈감아주기로 한다. 문제는, 그의 삶이다. 그야말로 적당한 단어, '공인(公人)' 정운찬의 삶이다.


병역 기피, 탈세, 위장 전입, 논문 게재상의 문제들, 기업과의 유착, 공무원법 위반, 그 모든 탈법 혹은 불법 행위들을

관통하는 것은 부도덕, 그리고 허탈하게도 '능력'의 징표다. 한국에 거주하는 능력자들을 비능력자들로부터 식별해낼
 
수 있는 뚜렷하고도 분명한 지표들이 바로 병역 면제, 탈세 전과, 위장 전입 기록, 유착, 처벌받지 않았던 불법과 탈법의
 
기록들이다.


'능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코스를 필수 정규 과정처럼 밟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능력자'만이 그러한 코스를

밟을 자격이 되는 건지, 그 선후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부도덕하고 반서민적이며 불도저스럽다는" MB의

"능력자"들에 대한 유력한 대항마로 여겨지던 정운찬 역시 오십보 백보로 "부도덕하고 반서민적이며

불도저스럽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똥오줌을 뒤집어쓰고 스스로의 말을 뒤집고 신념을 꺽으며,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돌진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그의 권력욕이라니. 그 와중에 드러나는 부도덕성과 반서민성은

차라리 코미디다.


생각한다. 이건 진보니 보수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들의 행태, 삶의 방식의 문제다. 이땅에서 나름

누구입네, 하고 거들먹댈 수 있는 사람들, 이름을 대면 알 만하다는 사람들(지쳐버린 '딴따라' 말고), 그들이 불리기를
 
원하는 호칭으로는 '사회지도층 인사들', 보다 날 것의 단어라면 (계급화되어가는) '지배계층' 쯤이 알맞을 '노블리스'

계층의 문제다.


진보/보수를 싸잡아 비난하자거나 그런 이념적 지향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공인' 정운찬은 진보도 보수도
 
표방하지 못하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아마추어 정치인에 불과하다. 그가 총리직에 낚여서 허부적대다가 덜컥 노출시켜

버린 '있는 사람' 일반의 도덕과 품위와 교양과 상식의 부재함을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만족과 합리화일지언정

'보헤미안(히피)'의 감수성을 가진 '부르조아'라는 '보보스(BOBOS)'족의 출현조차 이 나라에선 가능할 법하지가 않다.


그가 MB에 대항하지 않고 투항해 버린 것이 유감이었다. 이제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체 이런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기준조차 충족시키는 사람도 찾기 힘들다니, 기껏 그런 사람이 유력한 대항마로 거론되었었다니
 
더욱 암담하다. 진부하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갖지 못한 그들, 최소한 지금 위세부리는

'능력자'들 맞은 편에는 그들보다는 나은 도덕과 품위와 상식을 가진 '능력자'들이 포진하고 있기를 바랬는데.


기득권층, 사회지배층, 상위계층, 지배계급, 사회지도층, 뭐라 불리던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다. '비능력자'로서는,

거기에 관심을 끊어버리고 '니들끼리 놀아라' 해버리던가,....다른 어떤 길이 있을까. 일부 '비능력자'이면서 용케

제도권 정치 내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명박의 지지율이 40%를 넘는 세상이다. 이명박을 무난히
 
집권시킨 세상이다.


사실, '능력자'를 힐난하고 그들의 비상식, 부도덕을 지적하면서도 흘깃대며 그들의 '성취'를 부러워하고 '병역면제'니
 
'위장전입'이니 그들의 경력을 어쨌던 "능력"이라 지칭하는 내 안의 시기심, 질투, 전도된 가치관부터 문제일지 모른다.
 
기득권층은 제 혼자 성립되지도, 유지되지도 못한다. 그곳에 편입되기를 열망하고 해바라기하는 사람들이 떠받치고

있는 거다. 기득권층의 문제란 건, 잠재적 기득권층, 언젠가 기득권층이 될 거라 믿는 사람들의 문제기도 해서, 결국

우리 모두의 욕망과 그 해소의 문제라고 해도 억지는 아닐 거다.


"결국 니가 배아파서 그런 거잖아"란 그들의 비웃음에 뜨끔할 수 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도덕적

순결주의나 '남의 티를 찾기 전에 자신 눈안의 들보를 찾아라' 따위 가르침을 따르고 싶진 않다. 난 어쨌든 "비능력자",
 
"능력자"들보고 니들 좀 똑바로 해라 십장생 개나리들아. 라고 이야기할 거다. 다행히 나이먹는 것과는 달라서,

시간이 지난다고 자연스럽게 '기득권'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니까. 갈수록 이 사회에서 '계층'은 '계급'이 되고 마니까.




어제 왜관서 부산까지 무궁화 타고 오는데, 무궁화호 정말 많이 감편된데다가 거의 통일호마냥 예전엔 걍 쌩까고

지나가던 소소한 역들까지 서가면서 좀체 속도를 못낸다. 자리도 꽉꽉 차가지고 입석승객도 무진장 많은데다가..

그걸 툴툴댈만큼 선택의 폭이 넓지도 않고 자칫 시간에 맞춰 복귀하기도 힘들만큼 편수가 줄어버린 게 정말이지
 
치명적이다. 오후 통틀어 네 대밖에 없다니.



어젠 TMO를 타고 왔는데, 그것 역시 빈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사실 일병, 상병 때는 출장 다님서, 외박 다님서 편의점서 캔맥주 하나 사갖고 기차서 마셨는데, 이제 머...그런

'군인답지 못한' 행동은 자제하기로 타협본지라 걍 조용히 빈자리에 꽂혀앉았다.

원래 내가 선호하는 자리는 창가쪽에 앞에서 한 5~10째줄 쯤..글구 창가도 시야가 가리지 않고 깨끗이 확보된

자리를 좋아하고 왠만함 옆좌석이 비어있는 곳-누가 앉게 될지 알수 없어 채워지기 전까지 뜬금없는 상상을 펼칠

수 있는-을 좋아한다.



비어있던 자리는 기차칸 뒷구녕쪽에 통로쪽, 옆에 여군이 앉았을 리는 없고 어떤 사납게 생긴 직업군인 아찌.

게다가 결정적으로 내가 앉을 자리 앞좌석의 아저씨가 거의 만땅으로 의자를 뒤로 꺽어버린 채 신문을 보고 있던

거다. 자리에 끼듯 앉아서 잠시 기대...이아찌가 내 존재를 육안으로 식별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사이버네틱 과정을 거쳐 좌석을 최소한 약 30도쯤 당겨주지 않을까 했던 거다.



...잠시 궁리. 왜 안 땡겨줄까. 걍 말을 걸어 양해를 구해 볼까.



근데 걸린다. 그 아찌가 민간인일리는 없고, 얼굴이 절라 삭은 상병이나 일병, 아님 자대배치받은 이병...일리도

없고. 아님 병장이라 할지라도 절케 삭은 병장은 아직 견식한 바 없고. 백방 직업군인인데다 애도 한둘 딸려있을

연세이신데, 병장 나부랑쓰가 제한몸의 평안을 위해 고계급간부님의 복지 및 후생을 제약하려 해서야 쓸

말인가...'군인답지 못하다'.



물론 알 수 없다. 그 아찌가 말이 통하는, 좀 '군인답지 않은'-내 나름의 기준으로는 군인답지 않은 군인은 거개가

제대하고 그 나머지만 '잔류'한다. 왜 그 싱크대 배수구에 붙은 오물통처럼-사람이라면, 내가 얘기했을 때 어이구~

하면서 자리를 땡겨줬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원사, 상사, 중사, 대위,...)간부와 짝퉁말년 윤병장과의

계급차에서 비롯된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은 남는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방포 간부...마치 애초 내가 원했던 좌석이 아닌 '남겨진' 자리 하나에 앉을 수 밖에 없었듯이

내가 투입되어 경험한 군대...는 80년대 육군의 마인드를 강고히 유지하고 있는 터라, 어마어마한 권위의식과

계급의식을 갖고 있다. 추상적으로 부여된 실체없는 계급으로 호칭되는 x원사, x상사..가 아니라, 자신이 어떠한

계급이고 그 계급피라미드에서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하는 의식을 명철히 갖고 모든 언행에 우선적으로

투영시키는 진정한 계급.



그래서, 군용객차칸에서는, 민간객차칸에서 하듯이, 사람에 대한 양해나 뭐랄까 그나마 수평적 입장에서의

이해-전략을 세울 수가 없어서, 걍 두시간 십분동안 좌석 사이에 끼어서 왔다.



- 200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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