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인디포럼 월례비행 작품은 박준석 감독의 '낯선 물체'.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카메라 무빙, 그리고 내러티브보다는 메타포가 갖는 의미를 전개해나가는데 집중한 작품이었다.

 

전체 비용이 백만원 들었다나, 밥값 오십 포함해서. 물론 배우들의 개런티같은 비용은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을 거다.

 

그야말로 핸드헬드 8미리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영화를 찍는 '시네마 키드'의 날것 같은 모습으로 찍은 영화랄까.

 

 

그렇지만 영화의 참신함이라거나 아이디어, 그런 독립/예술 영화 특유의 강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감독이 조탁해낸

 

화면의 아름다움 역시 여느 대작영화나 상업영화-그런 식의 구분이 유의미한지는 차치하고라도-에 뒤지지 않았다.

 

한시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사방에서 야금야금 짚어내는 학교 건물의 구석구석 장면, 그리고 그 공간들을 다시

 

치밀한 프레이밍을 통해 사방에서 조망하여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의 스틸샷으로 잡아내는 공력이라니.

 

 

빛이 사라진 눈길의 남자가 있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텅빈 듯한 건물 안을 청소하고 있다. 세피아톤의 가라앉은

 

화면, 숨죽인 듯 절제된 카메라 무빙, 그리고 엉성하게 휘두르는 대걸레의 쓱싹이는 소리만 가득한 공간 안으로,

 

문득 '낯선 물체', 커다란 공 하나가 통통 튀며 굴러들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가만히 공을 굽어보다가 가만히

 

두 팔 가득 공을 품에 안고는 건물 안의 통로와 방들을 살핀다..굳이 말하자면 이런 식의 내러티브가 가능하려나.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에는 확연히 갈리는 듯한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 중 전반부를 영화 속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의 예술적 자아가 어떤 경로로 성장했는지, 마치

 

개인의 삶과 그 와중의 인간관계를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으로 가득한 건물 안에서 응축해보여주는 듯한 압축된 회상신이랄까.

 

그리고 그런 포부와 기대를 배반하는 현재의 열악한 환경과 무딘 재능 따위로 얼마나 답답한 상황인지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

 

 

낯선 물체. 그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에 다가온 하나의 소소한 계기라거나 고민 한줌이라고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문득 세상이 낯설게 보이고 당연하던 것들에 새삼 의문이 제기되는 계기.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처음에 주인공을

 

깨어나게 했던 그 '낯선 물체' 공 하나가, 영화 마지막엔 두개로 늘어나는 것. (감독 말로는 돈만 더 있었으면 화면 가득

 

'낯선 물체'를 채워넣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늘어난 고민, 혹은 의식된 무게감만큼 감독은 성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시간여의 상영 이후 감독이랑 이송희일 평론가, 김곡 감독과 대담하는 시간이 또 그만큼의 시간동안 있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결과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영화의 해석을 하나씩 짚어보고,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이야기를 더불어 버무리며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 이 포스팅의 목적 중 하나, 홍콩 찜사쪼이 해변을 따라 조성된 '스타의 거리Avenue of Stars'의 홍콩 영화배우들 중

 

한국인들이 알만한 스타들, 유덕화, 임청하, 홍금보, 성룡, 오우삼, 서극, 주윤발, 장국영, 주성치, 장만옥, 장백지, 양가휘,

 

곽부성, 여명 등의 손도장을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고를 덜 수 있도록 하는 것.

 

 

스타의 거리가 시작되는 즈음, 영화 필름을 옷 대신 걸치고 선 여신의 자태가 당당하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 홍콩섬 완짜이와 센트럴의 개성있고 거침없는 고층빌딩의 스카이라인.

 

필름 롤의 형태로 된 금색 조형물이 길가에 세워져 있는가 하면,

 

큐사인을 위한 보드가 이 거리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스타의 거리, Avenue of Stars.

 

바닥에 돈이라도 떨어뜨린 양 다들 바닥만 굽어보고 걸어가는 사람들, 그 틈에서 아예 철퍽 주저앉아 바닥을 짚은 사람도 많다.

 

어느 영화감독의 모습을 형상화한 듯, 메가폰을 쥐고 생생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눈빛에 힘이 실려있다.

 

 

아마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카메라를 쥐고 있는 카메라감독의 손모양이나 표정도 생생한 편이고.

 

그리고 장백지. 그녀의 손은..작고 이쁘기도 하구나.

 

이소룡의 명판은 있지만, 아쉽게도 그의 손도장은 없다. 있을 리가 없나..어디라도 손도장 하나쯤 남아있을 법 한데.

 

성룡. 역시 그는 장난스럽게도 살짝 삐뚜름하게 양손을 짚었나보다.

 

게다가 이렇게 사인을 남겼는데, 마지막에 앙증맞은 하트 그림도 그렇지만 '성룡'이라는 한글도 눈에 들어온다.

 

아침나절이지만 뜨거운 햇살 때문에 사람들이 양산인지 우산인지를 전부 받쳐들고 걷고 있었다.

 

주윤발. 이 아저씨는 왜 손도장을 안 남겼을꼬.

 

유덕화. 꽤나 많은 여성팬들, 특히나 아주머니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쉽게 찾았다.

 

양조위. 그도 역시 양손을 살짝 어긋나게 짚고는 사인을 남겼다.

 

이소룡의 이미지하면 딱 떠오르는 그 포즈. 그대로 멈춰선 이소룡이 홍콩의 해안가를 지키는 중이다.

 

조명기사와 마이크 담당이 위치를 잡고서, 그 가운데쯤엔 의자가 하나 놓여있어서 꼬맹이들이 줄을 섰다.

 

오우삼.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지만, 그의 이름은 헐리우드에서도 명성을 높인지 오래다.

 

곽부성. 다소 후줄근해 보이는 그의 입성은 도무지 왜 그가 인기있는지 알쏭달쏭하게 만들었지만 여하튼.

 

 

 

스테판 초우. Stephen Show. 누구인가 했다. 다름 아닌 주성치. 요조가 좋아하는 주성치, 아쉽게도 손도장이 없다.

 

Jet Li, 영어이름이 좀 만화 캐릭터 같은 게 이연걸의 이미지에도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그는 통배권을 시전하듯 손도장을 찍었을까.

 

그리고 여명. 아마도 내가 왔다갔다 스타의 거리를 왕복하는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기념사진을 찍어간 곳을

 

고르라면 여기가 아닐까. 특히나 아주머니 팬들이 꼭 한번씩은 이렇게 손이라도 맞대어 보고 자리를 뜨셨다.

 

그리고 장국영. 음..여전히 그가 자살한 곳에는 기일에 맞춰 하얀 국화가 소복하게 헌화된다고 한다.

 

그리고 서극. 한때 그의 무협영화를 빠짐없이 챙겨봤었는데.

 

그리고 놓칠 수 없는 배우, 임청하. 아아. 내 어렸을 적 그녀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뷰잉 데크. 밤에 '심포니 오브 라이트'가 시작할 즈음인 8시경이면 발 디딜 틈조차 찾기 쉽지 않지만 지금은.

 

 

성룡과 홍금보의 손도장을 보고 환히 웃으며 기념촬영중인 사람들, 사실 저 손도장이 진짜 본인 거인지는 '신뢰'의 영역이다.

 

 

그리고 바닥에 박힌 채 하루하루 마모되어 가는 셀레브리티들의 손도장은 관심없이

 

그저 가족들과의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려는데 더욱 열심인 사람들. 사실 이 편이 훨씬 남는 게 많지 않을까.

 

(특정 스타의 열광적인 팬이 아니라면 말이다. 팬이라고 해도 온기조차 사그라든 손도장이 뭐...별 건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성화를 진짜 봉송하는데 쓰였던 것일까, 아님 그저 기념 조형물일까.

 

건너편 고층빌딩들을 압도하는 높이와 존재감으로 우뚝 섰다.

 

스타의 거리 끝까지 갔다가 다시 설렁설렁 돌아나오는 길, 시시각각 뜨거워지는 햇살에 익어간다는 느낌이 들 무렵

 

다행히도 스타의 거리 끄트머리에 있는 뷰잉 데크, 그리고 시계탑이 나타났다. 버블버블 게임에서 본 듯한 저 투명하고

 

동그란 유리막 안에 들어간 건 야간에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위한 조명 도구들.

 

 

스타의 거리 초입, '심포니 오브 라이트'의 뷰잉 데크, 시계탑, 그리고 스타 페리 선착장은 그냥 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이제 스타 페리를 타고 홍콩섬으로 넘어가보려는 참인데, 글쎄, 홍콩 영화배우들에 굉장히 홀릭되어 있다거나 손도장을 꼭

 

맨눈으로 봐야겠다 하는 사람 아니라면 얼추 위의 사진들로 대리만족이 가능하지 않을까. 일정이 바쁘다면 이렇게 스킵하시길.

 

 

 

 

 

이미 두 편의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 네 장의 초대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영화 네 편을 보거나, 데이트를 두 번 하거나.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 영화다운 '시작은 키스(원제 : delicacy)'를 보고 난 참이었고, 조금 지치고 살짝

 

실망했던 참이었다. 홍상수식의 갈림길을 빙자한 순환도로라거나 미묘하고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영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초대권 한 장은 남기고 일요일날 아트하우스 모모의 마지막 영화였던

 

'블루 발렌타인'을 보기로 했다.

 

 

맞다. 어떤 노래는 듣게 되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거다. 어떤 사람은 만나게 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런 노래가,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현자같은 소리만 주워섬기거나, 이런저런 연애의 온갖 일반론들을

 

꿰차고 있는 척 해도,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는 그런 상대. 흔히 천생연분이라거나 소울메이트라거나 운명이라거나,

 

혹은 영원과 불멸을 다짐하는 그런 상대를 만나고 나면, 방법이 없다. 그런 인연 앞에 서고 나면, 마치 여태 어느 인류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밟는 기분으로 사랑에 빠지고 마니까.

 

 

뜨거운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평소에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 따위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과의 이런 순간들이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도 모두 옛 허물과 과오와

 

부끄러움을 태워버리고 불사조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겠다 믿었을지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그녀를 잡아주는 그의 손길, 한순간의 불편한 침묵도 끼어들지 못하는 남김없는 대화. 베르나르가 소설 '개미'에서 말했던

 

더듬이를 포갠 개미들의 완전소통이란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어렴풋이 알 거 같은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택시와 버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브루클린 다리 교각 위에 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름다운 건 더없이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뿌듯하고, 거침없이 자랑스러운 그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이 뭔지 맛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그와 그녀는 감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맞다. 어른들의 경험이라봐야 누추하고 실패한 인생을 반추했을 뿐,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황홀한 건지, 한 순간 남김없이 충만함으로 가득했는지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런데.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도가니를 달구는 화력이 점점 떨어진 건,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땔감이 부족해서였을까.

 

착하고 유머러스하고 순수하던 그는 그대로 가정적인 남편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 안아주었던 그였고,

 

그의 마음은 좀처럼 변함없이 그녀를 향한다. 아마 그는 변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금은 덜 세상에 찌들도록 자신이 조금

 

더 세상에 찌들거나, 그녀가 조금은 덜 독해지도록 자신이 조금 더 독해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때의 천진한 마음과 순진함을 지켜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뿐일까. 그가 조금 변했다고, 아니면 그녀가 조금 변하지 않았다고 해결될 문제였을까. 과연 이런 당황스러운

 

피로감과 거리감은, 그와 그녀의 잘못인 걸까. 무엇이 모자라 그토록 펄펄 끓던 도가니에 냉기만 감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나 그녀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와 그녀는 만났고, 사랑했으며, 기꺼이 서로를 책임지고 동반하려

 

함께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와 그녀는 서로가 상대로부터 뻗쳐나온 냉기와 거부감으로 손끝 하나 마음대로

 

옴쭉달싹 못하게 된 상황임을 깨닫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귀처럼 싸우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듯,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균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싸우지 않으려 애써

 

웃음을 짓고 노력해보아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찾아냈던 사랑의 이유들, 유머러스하고 천진난만하고 밝고 착하고. 그런

 

장점들은 그대로 단점이 되어 증오의 이유가 된다. 대체 왜. 대체 왜일까. 어쩌면. 사랑 따위 처음부터 환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유효기간 만년짜리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작해야 반평생 버티면 성공했다 쳐주는 게 사랑일까. 애초에

 

그와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감지했던 온갖 위험 신호와 불길한 징조를 외면하고 조롱했던 벌을 받는 걸까.

 

 

우리는, 나와 당신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평행선이었던 걸까. 어쩌다 한번 사다리 타듯 옆길을 타고 완벽하게

 

합쳐졌지만 어느 순간인가 다시금 옆길로 새버리고, 처음부터 그랬듯 각자의 길을 따라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긋고 있을 뿐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는, 앞으로 절대 다시 겹치지 않을 순간들을 저주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찰나의 순간이나마 완벽하게 겹쳤던 잠깐의 순간을 기적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그런 겹침의 순간은

 

결혼 따위 인습적 구속이나 사회적 책임감 따위, 사랑이 아닌 '부부애'나 '정' 따위로 지속되진 않는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어른해진 눈길을 붙잡는 건 크레딧 가득 번쩍거리며 터져오르는 불꽃놀이 불꽃들.

 

그 불꽃들은 그와 그녀가 사랑하던, 그에게 그녀가 전부였고 그녀에게 역시 그가 전부였던 그런 시절의 풍경들을

 

하나씩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다시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있었다. 허름하고 난잡한 해수욕장의 싸구려 불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낀 적은 없었다. 왠지 그저 슬프고 안쓰럽단 느낌, 부질없단 느낌 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저 정도 불꽃을

 

피워낸 불꽃놀이 폭죽이라면, 내가 그런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웠길 바랄 뿐.

 

 

 

 

 

 

 

 

 

 


"강릉을 넘어 현실에까지 범람한 그와 그녀의 사랑. 그들의 로맨스는, 그들의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ytzsche.



강릉과 非강릉, 영화와 현실의 공간.

강릉은 그런 곳이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파랗기만 한 바다에 연한 이 자그마한 소도시는, 외지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나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곳이다. 특히 여름에 바다를 찾는 향락객들에게는, 강릉이란 극중 민아의 자조섞인

표현처럼 일종의 '피서지용 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필요할 때 찾아와선 며칠 후엔 훌쩍 내버리는.


영화사 조대표도 잔뜩 지친 채 그렇게 불쑥 강릉으로 향한다. 딱히 일정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바다를 보겠다

떠난 길이었으니 그에게 강릉은 일종의 비현실이었다. 그리고 투숙한 호텔에서 20년전 강릉에서 만나 하룻밤을 지냈던

민박집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그녀, 민아를 만나 함께하며 강릉은 20년만에 로맨스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그와 그녀 역시 스치는 손길 하나에, 미묘한 뉘앙스를 흠뻑 적신 단어 하나에, 그렇게 감정이 부풀어오른다.

그건 그가 호텔 로비에서 만나는 남자 맛사지사와 여성고객의 흥정 따위를 모두 성적인 의미를 함뿍 담아 읽어내린다거나,

그녀 역시 그를 조심스레 만지려 들며 그를 욕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러운 거다.



강릉에서의 로맨스, 강릉에서만 가능한 로맨스.

문제는 그들이-그의 생각대로라면-부녀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드문드문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감정을 벌여놓는다. 그건 그가 강릉이란 곳을 대하던 태도에서 비롯할지 모른다. 여긴 '피서지'니까,

현실과는 다른, 영화 속과 같은 허구의 공간. 현실의 문법과 규율이 깨지는 그런 비현실의 공간. 이미 그는 20년전에도 그랬었다.


어쩌면 그녀도 그와의 사랑이 순간의 불장난이라거나, 두시간여만에 크레딧이 올라가며 끝나버릴 영화같은 기억으로 끝날 거라

지레 겁먹고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픈 상처를 갖고 있던, 그리고 아마 그런 아픈 상처의 결과로 태어난 그녀다.

혹은 그녀는 아직 어려서, 깨질지언정 한번 그와의 이야기 마지막 페이지를 보겠다는 당돌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는 같다.


그와 그녀는 줄곧 손에 소니 핸드캠과 라이카 카메라를 쥐고 다닌다. 경포에서 주문진을 돌아다니는 길에, 그들은 쉼없이

서로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저장한다. 일층에 미용실이 있는 이층 양옥집에 대한 엇갈린 기억이라거나, 새로 찍으려 하는

영화에 대한 즉흥적이고 암시적인 이야기들이라거나, 그러는 그들은 분명 그 예술적인 세계의 감독이나 배우처럼 굴고 있었다.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로맨스의 물결.

그녀가 그에게 먼저 고백한 때, 그는 그 직전 분명 그 타이밍에 마음을 전하려 결심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도망갔을까.

왜 강릉을 벗어나 자신이 속한 거대한 도시 서울로 한달음에 되돌아왔을까. 그녀의 고백에 퍼뜩 놀라 겁먹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게 '로맨스'로서 어울리는 짧고 아름다운 결말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울에 돌아와 안심했을까.


아마 그는 굉장히 찝찝하고 부끄럽고 지쳐버린 채 돌아왔을 거다. 어디선가 내 아이가 나도 모르게 자랐다는 상상,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핏줄이 당기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상상이 허용되던 다소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불쑥

냉혹하고 단정한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똑같이 그 공간에서 도망나와 문제를 피해버렸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영화같다'고 표현하는 식이라면, 여기서 그의 이야기 한토막은 크레딧을 올리며 끝내야 하는 타이밍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화는 끝이 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해주는 데서

폭발하는 거다. 강릉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었던 그들의 영화같은 사랑이 비로소 그 속박을 끊고 현실까지 넘쳐들어오는 순간.


로맨스와 현실의 혼재, '강릉'이란 알리바이가 필요치 않은 사랑.

물론 대책없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녀는 그의 딸인 게 분명해지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나이차는 스무살.

그들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과 기름같이 겉돌던 로맨스와 현실을 비로소 뒤섞을 수 있게 되었다. 강릉과 非강릉의 벽을 넘어서.


어쩌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아닐까.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생각하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영화에선

그게 '강릉 vs 非강릉'의 공간으로 표현되었다면,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거나, 연애 초 콩깍지와 리얼한 실재모습은 다르다는

식으로, 결혼 전과 후가 다르단 식으로 칸막이를 세워 놓고는 '(짧아서 아름다운) 로맨스 vs 현실'의 구도를 만들곤 한다.


아닐 수도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도 않고, 로맨스의 마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만치

뭐 하나 뚜렷하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건 확실하다. 우리의 로맨스는, 우리의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다음 장면으로 함께 넘어갈 수 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아마도 백년후에 크레딧을 올리는 비법.


각자 만들어가는 영화의,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라면. 배우와 감독이라면.



영화, 참 쉽게 만들었구나 싶은 게 첫 소감.


요새 3D가 트렌드라니까 한번 오토바이 경주씬이나 괴물이 육박하는, 쪼끔 맛보여줄만한 장면 좀 넣어주고,

여름 휴가 혹은 방학을 맞이한 관객들 많을 테니 일단 안전하게 '액션 블록버스터' 간판 내걸어주고,

한국에서 좀체 안 된다던 SF 크리쳐 영화장르를 '괴물'이 깼으니 비슷한 수준에서 괴물 하나 빚어내고,

그리고 빵빵한 투자사와 배급사 확보해서 온동네 영화관 다 확보해냈으니 훨씬 유리한 출발선에 선 데다가,

마지막으로 개봉 일자나 개봉 과정에서의 막판 작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노이즈마케팅까지.

아, 게다가 뻔뻔스럽게도 마지막에 슬쩍 우겨넣은 뜬금없는 7광구에 대한 '민족주의 마케팅'..역겹더라.


뭐 다 좋다. 이야기의 개연성이고 흡인력있는 전개고 나발이고 간에, 아마도 이 영화가 따르고 싶었던 듯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간지나는 껍데기만 따르고 싶었다 치더라도, 재미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봉준호의 '괴물' 때보다 발전한 CG기술이라도 현란하게 과시하던가, 뭐라도 스케일크게

뻥뻥 터뜨리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원이 인상쓰고 뛰어다니는 것 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렸을 적 봤던

'에일리언1'의 시고니 위버가 보여줬던 연기나 그 영화 자체의 아우라와는 전혀 비교조차 불가한 수준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실수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괘씸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어 굳이 영화평을 적는 것. 비슷하게 생긴 괴물딱지가 나오는 것 빼고는

봉준호의 '괴물'이 도달했던 해석의 다양성이나 세상에 대한 은유 같은 깊이보다는 그저 이런 괴물 한번

만들어내서 뛰어다니게 할 수 있어, 를 과시하는데 그치는 '디워', 혹은 '용가리' 쪽에 가까운 얼개와 스토리다.

애초 그런 수준의 영화라고 딱 깨고 이야기를 했으면 괘씸하지나 않지, 무섭지도 긴장감 돋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괴물이 뛰어다니는 걸 보며 뭔가 크게 낚였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나마 3D로 보지 않은 게 다행.


이런 영화, '피할 수 없는 놈과의 사투'가 시작된 게 아니니까 엔간하면 피해가는 게 좋겠다.






IU에 지친 남자: 심형래'감독'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돈주고 본다는 건, 그것보다 진중권에 이빨을 드러내는 건 얼마나 천박하고 상스러운 짓인지. 불량품보고 불량품이라는데, 자기는 보고 싶지 않아 안 보겠다는데 뭘 잘못했지?



A: '불량품 논란에도 130만 돌파'라. 문화의 과잉소비이거나, 방학인데 애들볼 영화가 딱히 없고 해리포터 시리즈가 덜 재밌어졌다 해도 납득불가능한 수치. 근데 내가 왜 창피할까요.



A: 진중권이 대체
A: 뭐라했길래 난린가 볼라고 트윗 찾아보는데
A: 넘 많아

IU에 지친 남자: 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별거 없어
IU에 지친 남자: 한번 불량품 판 곳 다시 안 간다고
IU에 지친 남자: 안 볼거라고
IU에 지친 남자: ㅋ

A: 그 한마디에
A: 그난리였어?
A: 이슈메이커로서는 대한민국 최고네
A: ㅋㅋ

IU에 지친 남자: 그니까
IU에 지친 남자: 근데
IU에 지친 남자: 그 영화를 보고 싶어 너는?
IU에 지친 남자: 영화관에서?

A: 아니
A: 디워도 안봤어
A: 그냥
A: 무관심

IU에 지친 남자: 좀 이해가 안 돼

A: 진중권이 돈받은거야.

IU에 지친 남자: ㅋ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노이즈마케팅?

A: 심형래가 제발 한마디만 해달라고

IU에 지친 남자: 하지만 이미 그 전에
IU에 지친 남자: 100만이 넘었다구

A: 헐

IU에 지친 남자: 그 싸구려 B급 영화에
IU에 지친 남자: ㅋ

A: 문화과잉소비.
A: 방학이고
A: 애들볼영화가 없었나...
A: 해리포터가 재미없어서?
A: 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ㅋㅋㅋㅋ
IU에 지친 남자: 기껏 진중권 까는 게
IU에 지친 남자: 니가 영화를 만들어봤냐
IU에 지친 남자: 영화만든 심형래의 고충을 아냐
IU에 지친 남자: ;

A: 영화평론가도 아닌게 왜그러냐며.ㅋㅋ

IU에 지친 남자: 아 정말? 그럼 자기들은 왜 떠드나..
IU에 지친 남자: 근데 진중권 미학자자나..;;;; 영화의 미학을 이야기한 거 아냐?ㅋ

A: 애국심에 불을 질렀다기에도, 헐리우드만 가고 해외 수출만 노린다면 전부 먹어주나.

IU에 지친 남자: 심형래 나온 영화에 대한 향수로 해석해야 할까.
IU에 지친 남자: 뭐, 디워를 빼고 생각하면
IU에 지친 남자: 그의 계보는 분명히 있지
IU에 지친 남자: 우뢰매 영구와 땡칠이 따위

A: 그치만 그런 향수를 수백만이 자극받는다고?

IU에 지친 남자: 그것도 아무래도 아닌 거 같지? 이건 미친 거야
IU에 지친 남자: 그냥
IU에 지친 남자: ㅋ

A: 우리나라는 미친나라자나
A: 지금 130만이 넘었대
A: 후덜덜이다.

IU에 지친 남자: 응
IU에 지친 남자: 진짜. 쪽팔리다

A: 영화는 안봤지만
A: 안봐도 뻔하긴 하니.ㅋ


IU에 지친 남자: 천박하고 상스럽고
IU에 지친 남자: 보는 거 자체까지 뭐라 할 수야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백만이 훌쩍 넘는단 거
IU에 지친 남자: 게다가 진중권 한 마디에 미친 듯이 달겨들어 입닥치라고 비난하는 거




* 약간의 재구성을 거친, 배부른 오후의 객쩍은 한담.
영화는 극중 영화감독지망생 영재, 그의 말대로 다소 "산만하고 수다스럽고 정신없이"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영화 제작을 위한 자금 걱정을 하다가 뜬금없이 '아~ 스크린쿼터', '아~ FTA'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나,

네그리의 '제국'을 읽으며 사회의식을 가진 문화활동을 하라던 고참이 눈앞의 부조리에 침묵하는 모습,

노동해방 조끼를 입은 노조원을 개잡듯 두드려잡는 꼰대의 광적인 소란까지. 아, 정신병력이 있는 친척이

있냐는 의사 질문에 대한 대답에 빵 터졌다. "사촌 형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어요." 정신없이 사방팔방을

손가락질하고 시니컬하게 뒤틀어놓는다. 온갖 사회문제에, 꼰대들의 고루함과, 기존 영화판에까지.


그런 감성과 지적질들이 맞고 틀렸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한다. 워낙 정신없이 사방으로 벌려진 이야기에다가

그의 이야기는 대개 맥락도 없고 지긋한 깊이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수다스런 이야기는 외마디다.

외마디의 집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가 문득 실어증에 걸리면서 비로소 핵심으로 가닿는다. 입닥치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여태 제대로 '말을 들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만들려면 우선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고 남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되짚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는 그와

함께 했던 그녀와의 관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결국 은하, 그녀를 해방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은하 3호, 4호로 바뀌어 나가고 동시에 자신도 영재 4호,

5호로 바뀌어 나가며 함께 해나가기에는 이미 그녀는 지쳐있었다. 이젠 자신이 없어, 이젠 마음이 없어.

그렇게 그는 홀로 영재 5호, 6호로 변전해 나간다. 그건 그가 여태 남의 말을 듣거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는

혼자 쉼없이 떠들어댄 대가이자, 그 '양질전환'의 임계점에 이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을지 모른다.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하니까." 해방된 은하, 그리고 새로 함께 하는 은성 역시

똑같이 말해준다. 그가 애초 번다하고 수다스럽게, 마치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부유하는 온갖 말풍선들을

잘라붙인 듯한 화면과 메시지를 모자이크하듯 던져준 건 일종의 힌트 아닐까.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줄곧 머릿속에 쌓이기만 한 채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외마디 수다'로 소모되었던 그런 에너지를 조금 더 잘

가다듬어서, 그런 산만하고 정신없는 실타래로부터 하나하나 잘 정련된 '이야기', '대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하고 조심스런 희망.


새로 함께 하는 은성이 듣지 못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혹은 '톰과 제리'같은 만화처럼,

말이 없어도 그 의미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영화를 감독은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고 나면 그의 정치적

지향과 감수성, 비판의식같은 것들도 좀더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 있을 거 같다. 이 영화에서

다뤄진 것만큼 유쾌하고 발랄한 방식은 고스란히 살리면 좋겠고. 그게 영화속 감독지망생에게 바라는 바이자,

(아마도) 윤성호 감독 본인이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겠다.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었다. 뚝뚝 끊기는 화면, 그 이상으로 뚝뚝 끊기는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상황.

The New World에서 Paradise로 어느샌가 스토리는 전개되지만 사실 그 '어느샌가'란, 꽤나 낯설고 어색한

진행에 일분일초의 흐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끝인지라 다소간 '빠른 진행에 대한 놀라움' 따위는 날아가

버린 '어느샌가'인 것이다.


중간중간 귀신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의 어색함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지만, 그러한 효과는 러닝 타임 내내

그리고 마지막 황량함과 씨니컬함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의 폭발력을 극대화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한

운명의 귀추를 차갑고 건조한 시선으로 따라가면서, 산다는게 생각만큼 그렇게 드라마틱하거나 극적이지

않음을 잘 보여줬던 거 같다. 우리가 흔히들 지나치는-알던 모르던-온갖 순간들이 갖는 사소한 가능성,

그렇지만 그 가능성이란 것도 그다지 볼품있지만은 않음을 이야기하는 영화. 허하다.


마지막, 세 사람이 제각기 흩어져버리는 장면, 그건 천국보다 낯선-낯설단 것을 방금 막 깨달아버린-세상의
 
무미함과 광막함을 보여줬다. 그들은 꼭 사막 속으로 녹아들어가 사라지고 마는 환영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

늘 존재하는 천국, Paradise의 그것이 엄연히 딱 버티고 선 실재 세계보다 낯익다니. 우린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살고 싶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걸까.


"정말 웃긴다. 새로운 곳에 왔는데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어."

아니, 어쩌면 세상에는 새로운 곳도 새로울 것도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생각조차 없을지 몰라. 뭔가 바랬다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리고 또 소리내어 비웃을 일도 아니지만, 어딜 가나 '내 머리'를 몸뚱이에 박아넣고

다니는 한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괜한 생각.



일요일 9시 반에 있는 시험, 감독관은 8시 반까지 도착해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야 한다. 사실은 김밥

한줄로 나오는 아침을 먹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저번에 시험 감독할 때는 시간을 착각해 응시자들처럼

9시반까지만 가면 되는 걸로 생각해 버려서, 좀 곤란해졌었다.


시험장으로 쓰인 고등학교, 내가 담당한 교실에 마침 시계가 없어서, 각각 90분짜리 1교시, 2교시 시험시간내

살아있는 시계 역할을 맡아야 했다. 10분 지났습니다, 20분 지났습니다,...절반 남았습니다,...5분 남았습니다.

사실 다른 때 같으면 시간 공지도 막판에 20분, 10분 남았을 때나 해주고 더이상 답안지를 바꿔줄 수 없습니다,

정도만 이야기해주는데 오늘은 마침 시계를 차고 오지 않은 사람들이 요청을 해와 성실하게 시계 놀이를

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들고 갔던 '경쟁에 반대한다'라는 책을 읽다가-시험장에서 이런 제목의 책을 읽는단 것 자체가 좀

아이러니라고 느꼈지만-한문단 읽고 시계확인하고 두문단 읽고 시계확인하고, 그러면서 문득 1박2일에서였나

이승기가 벌칙 수행으로 커다란 시계를 들고 다니며 매시간 '세시~!', '네시~!' 큰 소리로 알려주는 장면이

떠올라 버렸다. 왠지 불끈불끈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면서, 30여명의 수험생이 머리를 싸매고 문제를

푸는 상황에서, '여얼~씨~!'라고 천연덕스럽고 용감무쌍하게 외쳐주는 상상에 혼자 킥킥대고, 혼자 당황했다.


어차피 방송으로 중요한 내용은 멘트가 나오니, 최대한 시험 시작 후에는 말을 줄이고 자그마한 소음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험장에서 감독관을 몇 차례 맡아봤지만 가능한 말을 줄이고, 시험치는데

신경이 쓰일 만한 요소, 걸리적댈만한 요소를 미리 차단해주는 게 관건인 거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괜히

감독관이라고 우쭐해서 내 경험입네, 떠들거나 어깨에 힘주며 이래라저래라 지시하거나 하고 싶진 않아서.


2교시까지 끝나고 시험지랑 답안지를 걷어서 나오려는데 나이 많으시던 아저씨 응시생 한 분이 고맙습니다,

이러셨다. 교정을 나서는데 우르르 쏟아진 응시생들의 신발 바닥에 붙은 노란빛깔 은행잎이 이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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