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하카타역에 내릴 즈음 아슬아슬하게 해가 남아있다 했더니, 숙소에 짐을 놓고 다시 나오니 그새 깜깜해졌다.

 

하카다역, JR선이나 신칸센을 탈 수 있는 후쿠오카의 구도심 중심지다.

 

퇴근시간,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의 모습은 여기나 한국이나.

 

 

역사 앞에 차곡차고 주차되어 있는 차들에서 번지는 불빛, 그리고 그 너머 그리 높지는 않은 건물들로 이뤄진

 

스카이라인에서 터져나오는 불빛들.

 

 

조리개를 바싹 조이고 바라본 후쿠오카 시내의 밤 풍경.

 

후쿠오카에 와서 라멘을 놓치고 갈 수는 없는 일. 돼지뼈를 푹 고아서 완전 찐득한 국물까진 아니었지만 이정도만 되도.

 

 

다음날 아침, 250엔의 전철을 타고 세네 정거장, 후쿠오카 공항으로 향하는 참이다.

 

게이트에서 비행기로 탑승하는데 문득 눈에 띈 에바항공의 헬로키티 비행기. 저걸 타는 건 아니었고.

 

사실 저런 건 본인이 직접 타는 것보다 누가 타고 있는 걸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다. 대부분의 통유리창 까페가 그렇듯.

 

내가 탔던 티웨이항공의 소박한 기내식. 음...저가항공사의 합리적인 비용 절감책이 반영된 부분이다.

 

그리고 한국, 인천공항에 새초록한 잎사귀들이 돋아났다.

 

 

유후인을 목적으로 했던 2박3일의 여정, 유후인을 만끽하기에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정이었지만,

 

후쿠오카 시내 관광을 더하기에는 분명 짧았던 기간이었다. (사실 모든 여행은 늘 너무 짧다. 늘 짧다.)

 

 

1일차. 후쿠오카 도착, 유후인 도착 (늦은 점심) 온천 (저녁) (밤마실 조금)

 

2일차. (아침) 유후인 마을 구경. (점심) (이른 저녁) 후쿠오카 이동. (늦은 저녁) (도심 구경 조금)

 

3일차. (여유있는 아침) 후쿠오카 출발. 서울 도착. (점심)

 

 

 

 

 

 

 

 

아마 도요호텔에서 투숙객들의 편의를 위해 일본어판 관광안내지도 일부를 복사해서 비치해놓은 듯 하다.

한국에서 들고 갔던 가이드북에 나와있지 않은 세부 사항이라거나, 세세한 골목같은 경로를 탐색할 때 꽤나

쏠쏠하게 도움이 되었던 지도였다. 축척이 1:4000이니까 거의 50미터 버전의 내비게이션하고 비슷한 수준아닐까.

후쿠오카 시내 관광을 계획중인 분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듯.





하카다역 인근 숙소에서 가까운 전철역까지 걷다 보면 몇군데씩 새로 생겼다는 '신장개업'의 빠찡꼬게임장들을

볼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바다이야기가 성행했고, 지금도 변종 업소들이 성행하고 있다지만 나와는 별로 인연이

닿지 않는 장소들인 터, 도박장이라고는 몇년전 강원카지노랜드 가서 슬롯머신 하다가 만원정도 기부하고 온 게

전부였다. 시끄러운 소음이 공기중에 붕붕 떠다니고, 그렇지만 아직 신장개업중인지라 약간 어설픈 기류가 흐르는

그 곳에 들어서니 왠 배용준사마와 최지우히메가 보인다.


오...역시 이들이 일본에서 좀 먹히긴 하나 보다 싶기도 하고, 게임기 자체가 온통 겨울연가, 그 둘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 걸 보니 좀 살짝 질리기도 하고. 대체 저건 무슨 게임일까 잠시 궁금해하다가 돌아서고 말았다.

그 옆라인에 늘어선 또다른 게임기..마치 바다이야기처럼 스크린이 있고, 뭔가 그림이 움직이는 것 같던데 역시

좀처럼 어케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바글대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옆에서 살짝

어깨너머로 배워서 직접 땡겨보기라도 했을 텐데, 워낙 사람도 없고 휑뎅그레한 분위기여서 금방 문밖으로 나섰다.

텐진 쪽으로 가다가 마주친 영화관, 건물 둥근 모서리에 입구가 펼쳐져서는 이런저런 일본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왠지 간판도 그렇고, 외관도 그렇고 중후하달까, 고풍스러운 느낌이 짙었다. 사실 우리나라도 한 십년전만 해도

종로나 명동즈음의 영화관은 다 저런 느낌 아니었던가 싶은데, 급속히 멀티플렉스관들이 생겨나면서 볼 수 없게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가끔 일제강점기나 6,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정도.

텐진으로 가는 길,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웠고, 야트막한 하천에는 커다란 네온사인 불빛들이 늘어지게 비쳤다.

살짝 비가 내리더니 땅바닥이 금세 촉촉해졌고, 텐진 한 가운데쯤 보도에 박힌 방향 표시판은 공항, 역사 등등의

방면을 안내하며 밟히고, 비에 씻기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다시 하카다역 근처로 돌아나오는 길. 빗방울이 묻어 울룩불룩해진 차창 너머로

어릿하게 굴절되어 들어오는 불빛들. 왠지 모르게 사람을 애잔하게 만들었던 외국의 낯선 밤거리.

하카다역 근처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들어가려 했다. 일본에 온 김에 제대로 된 이자카야에서 오꼬노미야끼 같은,

일본식 안주들과 따뜻한 사케를 마시고 싶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서울에선 열걸음마다 채이는 이자카야 술집이

역 근처에선 좀체 찾을 수가 없던 거다. 어찌어찌해서 들어간 술집에선 오꼬노미야끼 같은 것 대신 꼬치류를

주로 팔고 있었다.


게다가 메뉴판은 온통 일본어뿐,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이어서 옆사람들 먹는 것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켜

음식을 주문해야 했다. 다행히도, 옆자리에 앉았던 분이 후쿠오카에 와서 사신 지 오래되셨다는 한국분이셔서,

그분의 도움을 받아 몇가지 안주류를 무난히 주문하는데 성공. 팽이버섯베이컨말이꼬치, 닭고기꼬치, 관자꼬치,

게다가 실패였다고 후회하고 만 고래고기까지. 울산 사는 군대 선임이 늘 고래고기를 한번 맛보여주겠노라고

약속만 하고 여지껏 못 지켰던 터여서, 늘 고래고기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이 넘실대던 터였다. 그렇게 과거의 오랜

욕구를 따라 질러버린 고래고기는, 시커먼 색의 고기가 가지런히 잘려서 한 열 점 나왔던가. 어찌나 짜던지, 또

어찌나 고기가 퍽퍽하던지 한입 살짝 베어물 때마다 사케 한모금을 머금어야 했다.

정말 맛있던 건 이 가리비 구이..랄까. 속이 옹골찬 가리비 하나를 큼직하게 몇조각으로 썰어서는 버터를 조금

넣고 조개구이집에서 굽듯 철판 위에서 굽는 거다.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게다가 탱탱거리면서 쫀득거리는

가리비의 식감이란. 손님들이 들고나고 주문하고 호출할 때마다 큰소리로 이럇사이마세~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어쩌구~ 라고 경쾌하게 떼지어 외치는 종업원들의 외침 속에서도 홀연히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리비.

한참 먹고 마시다가 문득 바라본 자리 앞 철판에선 김을 걷어낸 삼각김밥 모양의 주먹밥이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저건 또 뭘까..이미 어느 정도 배도 찼고 술도 오른 상태였지만 한국 돌아가서 저런 걸 또 언제 맛볼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고는 싸가기로 했다.

찰지게 모양잡힌 하얀 삼각밥이 철판 위에서 몇번씩 뒤집어지는 동안 꺼뭇꺼뭇하게, 또 누릇누릇하게 익혀졌다.

그리고 얼추 지금쯤 꺼내지 않으면 타지 않을까 싶은 타이밍에 맞춰, 주방장 아저씨가 앞뒤로 간장을 발라주고는

철판에서 건져냈다.

숙소에 돌아가 포장된 삼각주먹밥을 풀고는, 가져갔던 위스키 미니어처병을 홀짝대며 안주삼아 맛을 봤는데 역시

조금 과하게 먹는게 아닌가 싶긴 해도 먹을 땐 먹어주는 게 남는 거란 확신이 들었더랬다. 겉은 누룽지처럼 살짝

딱딱하면서도 간장 때문에 달콤짭조름하고, 속은 밥알들이 쫀득하게 찰싹 엉겨있고. 꽤나 맛있었다.


그치만 주점을 나서면서 살짝 기분이 찜찜했던 건, 왠지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4000엔이 약간 넘을

정도로 나왔는데, 물론 다른 단품 안주들에 비해 월등히 비쌌던 고래고기나 가리비구이를 시켰고 잔술도 꽤 많이

시켰다고는 해도..은근히 머릿를 굴려 예상했던 금액과 적잖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맛있게 마시고

먹었으니 됐다고 치고 금세 머릿속에서 휘발시켜 버렸다.

그보다 조금 전 술에 기분좋게 취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하카다역 옆 굴다리를 지나는데 별 생각없이 한장

찍어본 사진, 카메라도 같이 술을 마셨었던 겐지 사진 속 불빛들이 온통 일렁인다.

 




 

"아사히 비~루 코~죠", 내 발음이 이상했는지 호텔 프론트의 직원들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후쿠오카에 오기 전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사히 맥주를 무한정 마실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 있다고, "아사히 비루 코죠"라고 이야기하면 다들 알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사히 맥주공장이 하카타역
 
근처에 있다는 걸 아는 직원도 거기에 무료 시음을 제공하는 견학 코스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랬다.

다행히도 난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고, 호텔 로비의 공중전화를 써서 직접 통화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사전에

예약을 하고 가야하는데다가 영어가 가능하다고 했으니. 092-431-2701. 얼마를 넣어야 할지 몰라 우선 있는 잔돈

탈탈 털어넣었다. 요금이 툭툭 떨어지면서, 안내 아가씨와의 통화가 시작. 위치를 파악하고, 시간을 정하고.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한국어가이드를 대동한 한국인들 단체 관광객들과 같은 시간으로 예약해 주었다. 원래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만 설명이 제공된다던가. 오픈시간은 오전 9시반부터 오후 3시까지였고, 난 3시 10분전에

도착하기로 했다.

비오는 날은 맥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아사히 생맥주를 포함한 술 자체를 워낙 좋아라~하는 터라

딱히 개의치 않고 호텔을 나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우중충한 날을 맞아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 붙여져 있던

조그만 우산 판매 광고. 참...아기자기한 글씨에, 아기자기한 광고. 일본이다.

드문드문 젖어 있는 도로 위를 건너기 전. 숙소는 하카다역 근처 '도요(東洋) 호텔'이란 곳이었고, 하카다역에서

로컬 트레인을 타고 남쪽으로 한정거장 내려가면 '다께시타(竹下)'라는 곳이 나온다고 했었다. 관광안내소에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다케시타'라길래 왠지 낯익은 단어다 싶어, 아 다케시마? 그러면서 '竹島'를 써보였더니 그게

아니라 죽하(竹下)였다. 어쩐지...'다케시마'란 이름의 역이 뜬금없이 후쿠오카 내지에 있을 리가 없지.

이게 바로 다께시타 행 티켓. 원래 커다란 기차역이 그렇듯 잔뜩 혼잡한데다가 공사까지 여기저기서 진행중이어서

더욱 정신없던 하카다역에서 무조건 역무원에게 다가가 가는 길을 물었더니 쉽게 해결해 주었다. 티켓 사는 곳도,

기계에서 티켓 사는 방법도, 그리고 차를 어디서 타야하는지도 자상히 지도받은 후에 기차를 기다리기 시작.

참, 티켓은 편도에 320엔. 왕복 640엔이었으니...고작 한정거장 가는 건데 한국물가로 치면 무지 비싼 거려나...

그치만 후쿠오카 내에서 버스 한번 타는 데도-시내 중심구간에 한정되어 운행하는 100엔버스를 제하고는-220엔,

혹은 그 이상인 걸 감안하면, 사실 전혀 비싸단 느낌도 없이 표를 샀었다. 이미 환율에 대한 건 고작 사흘만에

환율이 백원씩 폭등하는 엔화의 강세에 질렸을 때, 피눈물을 흘리며 환전하면서 맘을 접었기 때문인지도.

하카다 역 구내. 후쿠오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도 계속 느끼던 거지만, 되게 한국과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일본어 표지판이나 간판 때문만도 아닌 거 같고. 전반적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살짝 낯선 느낌을 던지는 그 무엇, 끝내 무엇인지 속시원히 모른 채 돌아왔다.

더블체크를 위해 다께시타행 기차 타는 곳을 물었더니 정말 친절하고 열심히 가르쳐준 역무원 아저씨. 타는 곳은

애초 표살 때 가르쳐주신 분 말씀이 맞았는데, 로컬 트레인은 배차간격이 무지 길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거의

20분 간격으로 있는 거 같던데, 덕분에 여유있게 도착하겠거니 했던 예상이 보기좋게 틀어지고 말았다. 이젠 되려

지각했다고 안 들여보내주면 어쩌나, 걱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른 것. 그나저나 역무원 아저씨, 카메라 의식하고는

기차 들어오는 것 무지 열중해서 바라보고 계신다.

하릴없이 20여분을 기다리면서 빗발이 점차 굵어지는 걸 보았다. 비가 내리는 걸 볼 때마다 참..인간들이 어줍잖단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어쩌니저쩌니 잘난척을 하는 인간들이지만 비가 내릴 땐 고작 우산이

전부다. 그런 식의 천조각/비닐조각으로 비를 긋는단 건 진부할대로 진부해졌음에도..별로 더 좋은 대응방법을

고안치 못하는 것 같다. 그치만 역시 일본에선 투명비닐우산이 많이 보였다. 불의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투명 비닐 우산. 모 프로그램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아직 그다지 쉽게 보이진 않는다.

플랫폼 한가운데 버티고 선 스낵코너.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판기. 외국음식에 대한 넘치는 식욕과 호기심은 늘

절제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했고, 일본에서도 역시 곱창라면이니 뭐니 거의 돼지뼈가 흐물거릴 때까지

고아진듯한 느끼하고 진한 라면에 매료되어 버렸댔다.

한국의 '노약자석'은 기실 나이많은 분들을 위한 자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굳이 별도로 '임산부석'이란

표시를 '노약자석' 옆에 붙여야 할 정도로, 눈으로는 '노약자' 혹은 '장애인'석이라고 읽히되 머리로는 '노인'이라고

이해되는 어색한 간극이 곧잘 몇몇 사건들로 드러나곤 한다. 노인에게 자리양보하지 않는다고 폭언, 구타, 그러다

같이 경찰서도 가고, 혹은 배안나온 임산부를 억지로 일으키는 노인에 대한 항거, 분노..그런 이야기들.


일본은 '우선석'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었다. 애기가 있거나, 임신했거나, 노인이거나, 혹은 신체가 불편한 사람을

우선 앉도록 하는 우선석. 노인에게 벌떡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꼭 한국에서만 멋지고 자랑스러운 건

아닐 거다. 그리고 한국의 그것은, 개인의 선택 이전에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미덕'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미덕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카다(博多), 한자음으로는 '박다'라고 읽히는 곳에서 고작 한정거장, 다케시타.

기차에서 내려 빠져나오는데 불쑥 눈에 띈 '우측통행' 표지판. 그리고 얼마전 다른 블로그에서도 봤었지만, 일본도

에스컬레이터 두줄서기는 안 하고 있었다. 한 줄서기가 굳어져 있는 것 같던데 대체 왜 갑자기 생뚱맞게 두줄로

서자고 잘되지도 않는 걸 억지로 밀어붙이는 건지. 이 역시 그 모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거 같은데..글쎄, 성격도

급하고 걸음도 빠른 나로서는 두줄서기는 죽을 맛이다. 괜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그냥 한줄서기가 정착된 이상

거기서 보완책을 마련하는 게 정답아니었을까. 캠페인, 계도, 그런 식의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태도란 참.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지각한 사람은 아사히 맥주를 공짜로 맛볼 기회를 박탈할지도 몰라, 라는 염려로

우산도 안 쓰고 뛰었다. 다행히 기차역에서 내려 한 백미터 정도 걸었더니 바로 앞에 보였다.

헐떡이며 들어가니 이미 견학투어는 시작했댄다. 그렇지만 내 뒤에도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이 여유있게 입장하고

있길래, 왠지 마음이 푹 놓였다. 설마 한두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데 안 들여보내주지는 않겠지 싶어서.


처음으로 마주한 견학 포스트는 맥주의 재료를 소개하는 곳이었다. 보리니 뭐니 샘플을 구비하고 있었고, 중국집

간장/식초통처럼 생긴 곳에 담긴 보리는 직접 시식을 해볼 수 있는 깨끗한 것이라고 했다. 몇알 입에 넣고 씹어

봤더니 생각보다 무지 고소하고 달콤했다는.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견학 코스에는 이렇게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 놓기도 하고, 아사히맥주의 연혁을

소개하고 있기도 했다. 저 주홍빛 판대기에 하얗고 커다란 거품이 그려진 건 왠지 환타나 써니텐 오렌지맛스럽지
 
싶었다. 그리고 저 연혁을 차근차근 보기에는 생각보다 움직이는 스피드가 빨랐다. 4,50분만에 견학을 마쳤던 거

같은데, 그렇게 빠르진 않아도 거의 쉼없이 걷기는 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앞에서 저 빨간 옷을 입은 직원분이 일본어로 설명을 해주시면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이끄는 한국인

가이드분이 통역을 해주셨다. 보통 단체여행객은 이럴 때 끼어서 설명을 듣는 배낭여행자들이나 개인여행자들을

기피하고 싫은 티를 팍팍 내던데, 이분들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가이드가 통역해주면서 내뱉는

말풍선들을 내가 혼자 들고 가서 독식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뱉어진 말들은 한없이 잘게 부서져 퍼지는

비누방울처럼 공간가득 채워지는 거 아닌가. 그렇담 그거 좀 같이 들으면 어때서 사람을 눈치주고 노골적으로

가라고 하는지. 뭐, 여기선 그렇게까진 안했지만 다른 데선 많이 겪었던 일이다.

중간에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있는데, 왜지 사람들이 분위기잡고 앉아서 사진찍기 딱 좋은 지점같았다.

저 은빛 알루미늄 컵위에 올라앉은 건 분명 맥주거품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겠지만, 난 그냥 커피 위에 얹혀져있는

휘핑크림이 생각나는 건 왤까. 너무 과장스럽게 표현된 거같지만, 그만큼 아사히 맥주의 거품이 맛있다는 건

어필하고 싶었으리라 관대하게 납득하기로 했다. 이제 견학코스가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난 제한시간내에

최대한 많이 맥주를 마시기 위한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복도 중간중간에 마주친 맥주 모양의 그림. 저런 세세한 곳까지 맥주와 연관된 장식을 채우다니 이곳이 정말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고, 아님 익히 알려진대로 일본인의 꼼꼼하고 섬세한 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진을 보곤 이런 곳까지 신경써서 관찰한 사람이 더 꼼꼼하다고 이야기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를 계속 안내해주었던 밝은 웃음의 인상좋은 아가씨. 견학 코스 중 사진을 찍지 말도록 제한한 곳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사히 맥주가 어떻게 환경보호, 자원재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전시한 곳이었다. 맥주의

펫병으로는 폴리섬유를 짜내어서 직원들이 입고 있는 옷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기타 알루미늄캔, 남은

보리찌꺼기 등도 모두 남김없이 재활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역시 입고 있는 저 옷이 100% 아사히맥주 펫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다. 벌써 근 30여년 이전부터 그렇게 철저한 자원재생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니,

역시 선진국다운 면모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규율 그리고 지원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드디어 무료시음회장 입성. 약 20분정도 진행된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30분 가까이 시간이 주어졌던

것 같다. 누군가 여기에서 맥주를 네 잔 마셨다고 했던가, 난 그 얼굴모를 블로거에게 뜨거운 호승심을 느끼며

최소한 다섯 잔은 마시리라 굳게 다짐하며 들어섰다.

우선 첫잔은 아사히 생맥주, "첫잔은 슈퍼 드라이로 마셔주세요"라는 한국어 안내문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두번째

잔부터는 흑맥주를 마시던 생맥주를 마시던, 본인이 원하는 걸 달라고 하면 저 아주머니들이 따라주신다. 왜 이런

무서운 얼굴의 사진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다만 맥주를 청하면 쾌속무비한 속도로 손을 놀리시는 아주머니들이

그저 고마울 뿐. 생맥주도 맛있고 흑맥주도 맛있고.

사전에 인원수에 맞춰 테이블에 저런 안주를 인당 한개씩 배치해 둔다. 그리고 중간에 초콜렛이라거나 기타 안주를

맛보라며 조금씩 더 주는데, 그런 것들은 시음회 공간 한 옆에 있는 매점에서 팔고 있는 것들을 판촉하는 거라고

보면 될 거 같다. 그 매점의 매대에 마련된 시식용 안주들이 눈에 띄길래 새로 술잔 받으러 오고가는 길에 하나씩

집어들기도 했지만, 역시 맥주 본연의 맛을 느끼려면 안주는 없어도 그만이다.

생맥주, 흑맥주, 흑맥주, 생맥주, 흑맥주..기어이 채웠던 다섯잔은 아마 이 패턴으로 비웠던 것 같다. 듣던대로 단체

관광객들 중 술을 잘 안하시는 분들은 꽤나 많아서, 그분들은 주스 한잔만 마시고 금방 일어서시기도 하고, 매장에

무슨 안주를 파나 구경도 하고 그랬다. 그 와중에 다섯잔이라니 좀 심했다 싶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부어라하며

마신 것도 아니고 상당히 여유롭게 마셨는데도 시간이 충분했던 느낌. 정말 30분쯤, 혹은 그이상 시간을 할애해

주었던 거 같다. 그러니 이렇게 사진도 함께 찍고, 주변 사진도 찍을 여유도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사람들이 전부 빠지고 나니 다시 자리를 정돈하고 내일 견학 프로그램을 준비하시나 보다.

어쨌든 이분들은 오늘 우리 3시 견학 일정을 끝으로 시마이.

왠지 나가기가 아쉬워서 매장이랑 근처를 살짝 둘러보았다. 생맥주와 흑맥주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잔을 채우던

저 샘터가에는 이제 사람 한명 보이지 않고, 반대편에 있는 매장은 뭔가 뒷정리로 분주하다.

아까 견학하면서 처음 받았던 브로슈어에 꼽혀있는 한국어 광고글, 대체 누가 쓴 건지 모르겠지만 참 빼뚝거리는

글씨에 꾹꾹 눌러박힌 느낌표들이라니, 정말정말 상품을 팔고 싶은 느낌이 확 전해지는 거 같다. 요컨대, 저

매장에서는 요런 것들을 판다는 거다. 그치만 시식해 본 바에 따르면 글쎄, 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가리키는 대로 문을 나서니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치만 아까와 다른 건 어쨌건 빈속에

맥주를 다섯잔이나 들이마신 내 부유하는 정신상태. 조금씩 후끈해지는 머리와 목덜미에 와박히는 빗방울이

간지러우면서도 시원한 게, 이유없이 유쾌해져버렸댔다. 그냥, 취기가 돌았단 얘기.

다시 다케시타 역으로 갔더니 아까 서두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스탬프가 한 옆에 놓여 있었다. 아사히 맥주공장

기념 스탬프쯤 되려나, 찍을 만한 종이가 잡히지 않아 그냥 하얀 받침대에 하나 이뿌게 눌러 찍고는, 사진으로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의 네모난 도장은 또 무슨 그림이었을까, 미처 못 보고 있었는데 이제 눈에 들어온다.

확실히 살짝 취했었던 겐가.

맥주 만드는 공정. 비단 아사히 맥주만이 아니라 모든 맥주가 이런 공정을 거쳐 만들어질 게다.

들고 온 명함, 후쿠오카에 갈 일이 있다면 꼭 들러볼 만한 코스인 거 같다. 맥주 공장이라는 곳을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아사히 맥주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왠지 갓 제조했을 거 같은 느낌의

신선하고 맛난 맥주를 맘껏 먹을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꽤나 괜찮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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