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희망버스를 다녀와서 느꼈던 것 중 하나. 자칫, 과거의 촛불집회가 그랬듯 '광장에서의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이벤트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모인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며 '봉사활동', 혹은 벼랑 끝의 목숨인 김진숙을 구하러 가는 '구조활동'으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정말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가는 건지. 그 '희망버스'가 그런 생각들을 표출,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촛불집회를 꺾었던 건, 막아선 경찰 앞에서 '폭력/비폭력'을 운위하며 스스로 동력과 가능성을 소모해버린

대중의 두려움, 그리고 어느 정도 기존 편견에 기댄 '시위꾼'들에 대한 염증에 따른 정당/시민단체 등 운동

지도세력에 대한 불인정. 그 두가지 아니었을까. 희망버스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 같다. 185대에 자발적으로 타고온 사람들이니만치 나름의 의견, 입장은 있을 테고 존중하지만 .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야기가, 그저 듣기 쉽고 편한 이야기만 하다 끝내자는 이야기와 같지는 않다.

지금껏 진보진영의 세력들이 대중과 유리되어왔다는 비판이, 그들이 갖고 있는 견해와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지는 않다. '시민'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지도부'의 존재와 모순되는 것은 분명

아닌데, 누구 하나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을지 모른다.


지도부가 없고 모두가 주체라는 말은, 뒤집으면 정제된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백인백색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 요구사항과 승리조건을 정돈해서 내밀지도 못하는 모래알같은 군중이란 말과도 같다는 말이다.

차벽이 막았을 때 돌파할지 말지의 문제는, 스스로의 법을 무시하며 초법적으로 군림하려 드는 국가권력에

저항할지 말지의 문제였다. 폭력/비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저항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하고, 어렵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문은 터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여기 왜 모였습니까. 어떤 점이 당신을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앞으로 이끌었습니까. 무엇이 달성되면 돌아가겠습니까. 장애인과 동성애자와 두리반,

유성기업, 콜트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저항'이, '분노'가 향한 끝은 어디입니까.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비슷한 생각을 써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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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희망버스, '촛불판 명박산성' 넘을까(미디어오늘)


희망버스와 '광우병 촛불집회', 불평등·불공정의 '차벽' 넘어 희망 홀씨 주목

[0호] 2011년 07월 12일 (화) 허완 기자 nina@mediatoday.co.kr

전국 각지에서 194대의 버스에 나눠 탄 7천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 ‘정리해고 분쇄’와 ‘구조조정 중단’을 함께 외쳤다. 9일 부산에 집결한 ‘2차 희망의 버스’는 700여 명이 동참했던 ‘1차 희망의 버스’를 넘어 그렇게 뜨거운 연대의 불길을 지피며 하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187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들은 ‘3차 희망의 버스’를 다시 출발시키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3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는 “기성 노동운동과 정당, 시민운동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보완하고 대체해 주고 있다”고 말했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된 노동자들이 함께 정리해고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풀어나간다는 의미가 희망버스에 있다”고 밝혔다. 박유기 금속노조 위원장도 “이제 노동운동도 과거 수동적이거나 선전선동, 상투적인 조직으로는 안 된다”며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주축이 됐던 이번 행사의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 '2차 희망의 버스' 서울지역 출발 지점이었던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한 참가자가 '슈퍼크레인' 티셔츠를 팔고 있다. ⓒ허완 기자

한겨레는 11일자 사설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와 나눔, 희망버스>에서 “이들의 마음은 이제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자를 넘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함께 해결해가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했다. 경향신문도 같은 날 사설 <촘스키, 강경진압, 그리고 ‘희망의 연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들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불쌍하다고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문제’로 여기고 해고노동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2차 희망의 버스’가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현상’이자 ‘대안 운동’의 하나로 떠올랐지만, 현장에 있던 참가자들 사이의 ‘온도차’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9일 저녁 거센 빗줄기를 뚫고 부산역에서 출발해 약 4㎞를 걸어 영도조선소를 향해 가던 시위대의 눈앞에 육중한 경찰 ‘차벽’이 나타나자, 참가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 부산역에서 시작된 행진을 마치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와 불과 700여 미터 떨어진 봉래 로터리에 도착한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공권력의 성채'였다. ⓒ허완 기자

차벽 맨 앞에 자리를 잡은 몇몇 단체와 시민들은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평화행진 하겠다는 데 이게 뭐하는 거냐”, “카메라 끄라고(채증을 중단하라는 뜻) 이XX들아!”, “폭력 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와 욕설이 난무했다. 참가자들은 차벽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붙였다. 깃대로 차벽 위에 있던 전경들을 공격하거나, 주먹으로 차벽을 거칠게 두드리며 거세게 항의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일부 참가자는 물병을 던지거나 거리에서 통째로 뜯어온 안전펜스를 타고 올라가 차벽 위에 설치된 채증용 카메라의 선을 뽑기도 했다. 이들은 양 옆 인도를 막고 있던 경찰들과 쉬지 않고 몸싸움을 벌이며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차벽에서 멀리 떨어져 행렬 뒤 편에 자리 잡고 있던 참가자들에게서는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예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와 준비해온 음식 등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도 많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원생 이 모(26)씨는 “왜 저렇게까지 해서 (저지선을) 뚫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가볍게 몸을 흔드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그 사이 방송차에서는 “방송차가 뒤로 이동하니 앞자리로 이동해서 빈자리를 채워달라”거나 “젊은 남성분들은 앞쪽으로 나와 저지선을 함께 뚫자”는 방송이 이따금씩 흘러 나왔다.

▲ 일부 참가자들이 인도를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뚫고 진입을 시도하면서 거친 몸싸움이 이어졌다. ⓒ허완 기자

경찰이 경고방송 끝에 물대포와 최루액, 색소포 등을 쏘아대자, 차벽 앞에서는 점점 더 거센 ‘분노의 몸짓’이 이어졌다. 한 쪽에서는 ‘폭력은 안 된다’며 이를 저지하는 참가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 긴박하게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새벽 두 시경, 일부 참가자들이 ‘희망의 계단’을 쌓기 시작했다.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손길이 뒤에서 앞으로 벽돌과 소금포대 등을 연신 날라댔다. 경찰의 차벽을 넘어 85호 크레인으로 가자는 이들의 열망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계단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강경 진압’으로 반응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은 순식간에 시위대를 50여 미터 뒤로 멀찌감치 밀어냈다. 결국 차벽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형성된 ‘전선’은 다음날 정리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 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새벽에 발생한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연행된 50명의 석방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혼선도 빚어졌다. 주최측은 10일 아침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행자가 석방되기 전에는 희망 버스 단 한 대도 서울로 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참석자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대안은 있는 거냐”고 되물었다. 일부에서는 짐을 챙겨 농성장을 이탈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목격됐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체 행사’를 갖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주최측과 참가단체 대표단이 회의를 거듭하면서 오전 한 때 프로그램 진행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도 두세 번 연출됐다. 무엇보다 한 번 ‘밀려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힘은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맨 앞줄에 서있던 한 참가자는 “이럴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 시민들은 행진을 가로막은 차벽에 다양한 구호를 담은 손팻말을 붙이며 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허완 기자
▲ 대치가 이어지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물병을 던지는 등 강하게 저항하자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액, 최루액을 섞은 색소포 등을 뿌리기 시작했다. 차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물대포가 참가자들을 조준하고 있다. ⓒ허완 기자

“판을 크게 키워놓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판을 이끌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소리 공연과 랩, 마임 등 흥겨운 ‘연대 공연’이 이어지던 10일 오전,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으로 한진중공업 사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지금처럼 느슨한 연대로는 경찰의 저지선도 뚫을 수 없고, ‘판’을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상위 단체가 대규모 투쟁을 조직할 여력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만 기대기에는 (투쟁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송경동 시인은 11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밥을 먹으러 가는 데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기 마련”이라면서 “그럼에도 ‘밥을 먹으러 가자’는 데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시인은 “기존의 운동들이 많이 관성화되어 있고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운동 중심’을 넘어서 보편적인 ‘사람의 문제’에 기반을 두어 공개적으로 (희망의 버스를) 제안하고 연대해나가는 운동이 힘을 갖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송 시인은 다양한 목소리가 한 데 어울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전술적 의견 차이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투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큰 결정들은 현장에서 의견을 종합해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희망의 버스’ 내부에 이견이나 분란이 있다고 보는 것이나 운동조직과 일반시민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관점도 잘못된 것”이라는 게 송 시인의 생각이다.

▲ 경찰의 진압은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시위대를 저지선에서 멀찌감치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민은 부상을 당했고, 50여 명이 연행됐다. ⓒ허완 기자

한편, ‘희망의 버스’에서 2008년 여름의 거리를 장식한 ‘광우병 촛불집회’를 연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가 집회를 주도했다는 점과 ‘느슨한 연대’가 지속됐다는 점 등 당시의 촛불집회와 ‘희망의 버스’가 여러모로 닮았다는 지적이다. 2008년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는 송선주(22) 씨는 물대포와 최루액 등이 등장한 경찰의 강제 진압, 결국 ‘차벽’을 넘어서지 못한 ‘2차 희망의 버스’의 고민 등 “현재 상황이 2008년에 ‘명박산성’을 앞에 두고 시위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 협상에 반대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촛불집회는 당시에도 ‘새로운 운동’, ‘대안적 운동’ 등으로 불리며 뜨거운 여론의 관심과 호응 속에 거리를 물들였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광장에 나왔고, 자유롭게 떠들었다.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했고, 즉석에서 토론이 오고가기도 했다. “웹 2.0 세대가 시위를 ‘놀이’로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다”, “대중지성, 집단지성이 세상을 바꾼다”는 등의 찬사도 이어졌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동시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권력을 향해 냉소와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그 뜨겁고 맹렬했던 기세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었다.

▲ 경찰의 차벽 앞에서 피켓을 들어보이는 '2차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의 모습. ⓒ허완 기자

2008년 촛불집회 직후 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백승욱 중앙대학교(사회학) 교수는 당시에 썼던 <경계를 넘어선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다>라는 글에서 “(집회가) 축제로 끝난다는 것은 이 집회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이미 머물러 있던 경계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지키면서 불만만 표출하는 차원에 머문다는 의미”라면서 “촛불집회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이 집회가 ‘축제’가 되어 ‘카타르시스로’ 끝나는 일”이라고 썼다. 백 교수는 이어진 글에서 “2008년 촛불집회가 부딪힌 가장 큰 한계점은 광장의 저항이 자신의 생산·재생산 공간(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확산되고 이전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촛불집회가 “참가자들 사이에 놓인 경계들(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노동자와 현지인, 남성과 여성, 고학력 노동자와 저학력 노동자 등)을 넘어 구체적인 연대로 나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희망의 버스’의 미래를 좌우할 고민이자 과제로 남아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희망의 버스’를 제안한 송 시인도 “(한진중공업 사태가) 이 곳 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과 이 일이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보다 긴밀하고 보편적으로 퍼져야 한다”며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산 등 그간 진행되어 왔던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의식”을 언급했다. 이는 ‘한 번 왔다가 가는’ 투쟁의 현장에서의 삶과 일상 생활에서의 삶이 서로 변화를 주고받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엇갈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인 셈이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단순한 ‘동정’이나 ‘안타까운 마음’, ‘막연한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 버스'가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도 숙제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사실상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큰 힘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차 희망의 버스'가 안고 갈 희망만큼이나 그 등불이 되고 있는 김진숙지도위원에 대한 부채감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한 곳은 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부당한 임금체계를 개선하고, 특수고용직으로 규정된 학습지 교사를 정규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려 12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작년 겨울 파업을 벌였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30여 명은 ‘희망 자전거’를 타고, 2년 전 직장을 잃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1일 평택을 출발해 도보로 ‘희망의 버스’ 대열에 합류했다. 사측의 직장폐쇄에 맞서 일괄복귀를 요구하며 두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 100여 명도 달려왔다.

‘희망의 버스’가 활짝 열어젖힌 ‘연대의 장’은 분명 다양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지만 “광장에 모인 개인들은 과연 ‘연대’하고 있었던 것 것일까? 아니면 함께 모인 사람들과 그저 함께 있기만 했던 것일까?”(백승욱 교수)라는 질문은 이번에도 필요해 보인다. 과연 ‘희망의 버스’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더 많은 곳으로 실어 나를 수 있을까?

▲ 참가자들은 대오를 해산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꼬박 밤을 지샜다. 그 사이 새벽이 밝아왔다. 농성 대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차벽도 밤새 자리를 지켰다. ⓒ허완 기자


공지영 작가의 트윗. "대체 일만명이 한국 제2도시 도심서 밤새 시위를 하는데 한줄도 한장면도

보도되지 않는다. 이건 전두화시대 수준의 후퇴다. 기자들의 순종이 지속된다면 이는 80년 이전

혹은 역사에서 없던 암흑으로의 전무후무한 후퇴로 보인다."


정말이다. 딱히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이, 제돈을 주어가며, 소중한 휴일을 포기하며, 이백여대

가까운 버스를 타고, 봉고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모인 일이다. 그렇게 모인 만여명의

사람들이 한진중 85호 크레인 위에서 185일째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그녀를 응원하러, 죽지 말라고,

모인 참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라거나 비정규직 철폐! 같은 가다듬어진 주장도

넘실거렸지만,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정권과 자본과 언론이 말라죽이는 사람 하나 살리러 간 길이었다.


그게 기사꺼리가 안 된다고? 좀처럼 본 적 없는 그런 높은 수준의 연대라거나,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이 만 명이 자발적으로 모인 거라거나, 심지어 노암 촘스키가 지지발언을 보낸 그 '사건'이?

180여일째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계절 세개를 보내며 한진중공업의 불법적이고 악의적인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고 있는 그녀, 김진숙과 한진중 노동자들이 보이지도 않았으니 새삼

놀라울 것도 없지만, 언론이 잘했다면 MB가 대통령되는 따위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놀랍다.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고 눈물짓고 빵빠레 울리던 언론, G20개최로

수십조의 경제효과가 기대된다며 앵무새처럼 읊어대던 언론, MB의 말 하나 토씨 하나까지 금칠해서

홍보하느라 지면과 이미지가 넘쳐나는 언론, 4대강이니 민간인사찰이니 정권에 골치아픈 이슈가

있으면 알아서 축소보도하는 언론, 삼성과 한진 따위 대기업들의 횡포와 불법행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입다물면서, 틈만 나면 국민들을 훈계하고 교육해서 '공정사회'에 걸맞는 '국격'돋는 언론.




정말이지 "You are not 언론"이다. 방송은 전멸하다시피했고, 그나마 지면으로는 몇개 살펴볼만한

기사가 남은 게 다행일까. 얼마전 올렸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그들은 살아내려와야 한다. 에

이어, 7월 9일에서 10일까지 무박 2일에 걸친 2차 희망의버스 사진들과 참가기. 언론이 제대로 한다면

굳이 왜 카메라를 들고 가서 400mm 폭우 속에서 비맞으며 고생했겠나. 언론 따위, MB보다 더럽다.
 


9일 오후 1시, 시청 앞과 서울 시내 곳곳에서 2차 희망의 버스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가

출발하며 시청을 지나는데 시청앞 광장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 주말에 놀러나온 길에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경찰차들이 보였다. 희망버스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뜻이 통한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버스를 대절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라 버스회사나 색깔 따위는 제각각이었는지라 앞에 '희망버스'

몇 호차, 이렇게 싸인지를 붙이는 걸로. 이제 전국에서 모인 185대의 버스가 김진숙님에게 간다니 두근두근.


4시, 휴게소에서 쉬는 중, 저마다 계란과 떡볶이와 과자들같은 간식거리를 나누느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지경이다. 걱정스러운 건 부산에 내리붓는다는 장대비. 엠비의 인공강우는 아닌지 의심이..어제도

비가 엄청시리 내리고도 계속 쏟아붓는다. 부산은 어떤지, 김진숙지도님은 괜찮은지, 마음이 더 부산해진다.


그와중에 부산역에서 크레인으로 가는 길목인 영도다리를 막았다느니, 한진중공업 앞에 물대포부대가

깔리고 새까맣게 닭장차와 전경들이 깔렸다느니. 나는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읽고 있었다. 저자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그의 책 중 한대목. "평생을 일해도 집한칸 지닐 수 없는 세상에 널 살게 할순 없지

않겠느냐..비정규직은 울고 정규직은 잔업과 성과금에 영혼을 파는, 오로지 이 두가지의 선택이 네 미래가

되게 할 순 없지 않겠느냐.(김진숙, 김주익열사 추모시)"

7시, 부산역 광장에 모이고 나니 이미 사람이 가득하다. 걱정했던 것처럼 400mm 폭우가 내리고 있는

부산이었지만 역앞 광장에서 울려퍼지는 문화제의 익숙한 마이크소리와 후끈한 분위기. 전국에서 195대,

서울에서 66대가 출발했다는 소식에 버스안에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었는데 정말 많이도 모였다.

'WELCOME TO BUSAN웰컴 투 부산'이라 적힌 촌스러운 구조물을 넘어, 역앞 광장을 그득하게

메우고도 역사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까지 꽉꽉 들이찬 사람들. 이들을 움직인 건 '김진숙', 그리고

그녀와 크레인을 함께 지키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

그녀는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서적 23선 중의 한권이기도 한 '소금꽃나무'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김진숙,소금꽃나무)"


그녀와 한진중공업의 투쟁은, 위험천만한 고공농성은 단순히 감성으로, 휴머니즘과 드라마로 소모할

꺼리가 아니다. '노동'의 제몫찾기, 한줌 제한 나머지는 모두 노동자라는 자각이 중요한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희망의 버스'는 그들에 대한 구조활동이나 봉사활동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다. 일상화된 정리해고와 자본과 공권력의 야합 앞에 위협받는 유리병같은 일상을.


비는 참 오지게도 왔다. 폭우 속에서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 3호선 버터플라이 등의 공연에 이어

1차 희망의 버스를 만들어냈던 시인 송경동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낭송이 있었다. '크레인 위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었던가,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던 결코 짧지 않던 시는 순간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진정성과 '불순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행진 시작. 촛불집회 때 보였던 우비가 다시 보인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던 촛불소녀.

정말 올해 맞을 비는 전부 맞은 거 같다. 촛불소녀의 촛불이 우의 속에서 흔들림없듯, 사람들은

장마철 폭우가 우박처럼 아프게 내리붓는 와중에도 흔들림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김진숙 그녀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그녀의 일과 한진중공업의 일이 전해지고 난 후 가장 가벼운 마음이었는지도.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까지의 코스가 예정되어 있지만,

경찰들이 조선소 앞에 까맣게 진을 치고 있다느니, 영도다리를 봉쇄했다느니 불길한 소문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래도 교통 안내판에는 '부산역->영동한진'까지 행진이 예정되어 있다고

나와있어서, 어쩜 김진숙지도님을 볼 수 있겠구나, 조금은 안심되던 때.

내가 겪은 부산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편에 서서 공권력과

용역깡패들,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병원 1층 로비를 개방해서 화장실도

쓰고 전화기 충전도 하도록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차 창문을 열고 왜 괜히 길막히게

부산까지 와서 난리냐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는 사람도 있었다. 뭐, 다 그런 거 아닌가. 다양한 목소리.

그런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국회'라는 그릇에 넣고, 그 안에서 전체 국민의 삶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게 초등학교 수준의 '정치'에 대한 설명이랄까. 그래서 이렇게 이름 중의 '정의'를 갖고 말장난하며

'justice21'이라느니 홈페이지 주소를 광고하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왜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노동일

한번 해본 적 없는 화이트칼라, 그 중에서도 잘 나가고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만 있는지.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는 저 플래카드가 마냥 곱게만 보이지는 않는 거다. 일단은 선거가

굉장히 중요하고, 의정활동에 대한 감시도 중요하다지만, 그거로는 뭔가 2% 이상 부족하다.

계속해서 행진 중. 몇 년만에 거리행진인지. 미처 꺼두지 않은 빨간 신호등이 반짝거리고, 차들이

씽씽 달려야 할 차선 위를 걷는 느낌은 꽤나 매혹적이다. 비가 미친 듯이 내리붓고 있지만, 평소

생각지도 못하던 공간에서 기존의 규칙과 상식을 깨뜨린다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아, 거리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부터 한진 영도조선소까지의 행진은 신고를 마친 합법 집회.

사실 한진중공업, 김진숙이나 다른 해고노동자들의 문제는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다. 콜트 노동자들,

유성기업 노조, 발레오공조 노조, 그리고 노조조차 갖지 못한 삼성 같은 곳에서도 무한반복되듯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들. 구조조정과 등치되는 정리해고, 허울만 좋은 법 뒤로 벼랑끝으로 밀려나는

노동자들. 그 와중에 일종의 '대표성'을 띄고 그나마의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 한진중공업. 이번

싸움을 꼭 승리로 만들어 김진숙과 한진중공업이 웃을 수 있도록 해야 할 이유기도 할 거다.

한진중공업 노조가 사측과 독단적으로, 법적 효력도 없는 타협에 합의하고 나서는 여기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거리 곳곳에는

그들의 반칙과 기만을 숨기려는 플래카드들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전국에서 모인 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니 손팻말이니, 그런 것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85호 크레인 사수! 노동자민중 생존권 쟁취! 정리해고 철회! (크레인) 강제진압 반대!"

한시간쯤 걸었을까. 걱정하던 영도다리는 허무할 정도로 금방 넘어버렸다. YS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모두들 영도다리에서 빠져죽자느니 어쨌다느니, 그런 어줍잖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해 유명했던

영도다리가 여기였구나, 느끼기도 전에. 아마도 모두들 여기쯤 경찰이 봉쇄하지나 않았으려나,

김진숙지도님을 보지 못하고 막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맘이었을 거다.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멈췄다. 명절날 고속도로에서

그렇듯, 꽉 막힌 도로사정은 사람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이제 조금씩 장대비

앞에 무릎을 꿇어가고 있었다. 잔뜩 물기를 머금은 렌즈로 앞으로 바라보니. 차벽이다.

언제부터 여기서 버티고 섰을까. 물대포차가 가운데 버티고, 양쪽으로는 차벽이, 그리고 채증용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된 닭장차가 그 옆으로, 남은 부분은 완전 무장한 전의경들이 메웠다. 아니 근데, 이들이

왜 정당하고 적법한 행진을 막고 섰을까?? 불법으로 노상을 점거하고 합법 행진을 막고 있는 경찰들이다.

차벽 앞에서 당황해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럴 수 밖에 없다. 조직된 대오도 아니고, 몇몇 학교와

조직을 포함한 개인들이 제각기의 판단으로 참여한, 지도부 없는 무리인 거다. 부산역에서부터 물처럼

흘러흘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까지 흐르려던 물줄기가 까만색의 살벌한 경찰들에 가로막혔다.

그 앞에서 '같이 살자',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85호 크레인에 희망을', '다시 소금꽃을 피우고 싶다'

따위 손팻말을 든 건 해고노동자들의 가족들. 나중에 경찰들이 폭력진압하며 연행해 간 가족들도

저기에 있었다. 해고되어 크레인에 오른 노동자분의 아내와 17살짜리 딸이었다던가.


'소금꽃'이란 김진숙 그녀의 '소금꽃나무'란 책 이름에서 비롯했을 거다. 배 안에서 용접하고 페인트칠

하며 온통 땀에 절어버린 조선 노동자들의 옷위에는 늘 하얗게 소금이 맺혀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소금꽃'을 매달고도 든든한 노동자들이 바로 '소금꽃나무'라는 그녀의 표현.


건물 위는, 사진기자들이 저렇게 진을 쳤다. 이미 그들은 전선이 여기에 생기리란 것을, 경찰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리란 것을 알고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아 아우성쳤던 걸 거다. 뭐, 곤봉과 방패가

번쩍거리고 물대포가 최루액을 뿜는 그런 풍경을 노리는 까마귀떼나 하이에나 같단 생각도 들었지만,

여하간 저만치 진을 쳤으니 보도는 잘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지금.

폴리스라인, 되먹지 않은 글자 위에 '정리해고 박살내자',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빨갛고

파랗게 나붙었다. 법도 무시한 네놈들의 폴리스라인 따위. 페인트로 단정하고 세련되게 칠해진

글자들 따위, 우리들의 촌스럽고 싸구려(지만 접착력은 끝내주는) 스티커로 덮어버리겠달까. 

차들 틈새로 어렴풋이 보이는 너머 풍경. 여기서 700미터쯤만 가면 바로 김진숙과 한진중 해고자들이

농성 중인 85호 크레인이 나타난다고 했었는데. 경찰들은 아무 법적 근거없이 여길 막아서고 심지어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들면서 스스로의 정체를 노출하고 말았다. 한진중공업의 사설 경비업체 나부랭.

그런 경찰 따위. 어디에서 났는지 '폴리스 라인', '이선을 넘지마시오' 따위가 적힌 형광색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차단대가 차도 한켠에 우르르 쌓여있었다. 그리고 차벽 앞에서 그걸 한두개씩 빼어서는

깔개로도 쓰고, 저렇게 무더기 위에 철퍽 앉아서 지친 다리를 쉬는 사람들. 스스로 공정하고 본연의

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찰의 권위 따위 궁둥이 밑에 깔려도 싸다.

차벽 앞에서부터 버글버글하게 모인 사람들.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였고, 비바람에 쉼없이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그리고 이유없이 진로가 막힌 것에 대한 분노 한덩어리였다.

비상출동했다는 닭장차, 예외없이 골고루 '강제진압 중단하라'는 스티커가 붙었다. 사실 크레인에 대한

강제진압이 시시때때로 시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중단 요구였는데,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와 행진중인 사람들에 대한 강제진압 역시 중단하라는 요구로 커져버렸다. 경찰이, 한진중공업이,

무엇보다 이 정권이 일을 그렇게 키우고 있었다.

차벽과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우선 막아놓고는, 틈새는 몸빵. 죄없는 전의경을 앞세워 길목을

틀어막은 그들이다. 그리고 길을 트라며 달려드는 시민들과 방패로 받아치는 전경들의 몸싸움이

벌어진 뒤쪽에서 잠자리떼처럼 흉물스럽게 공중으로 부양하는 것들, 뒷날의 사진채증을 위한

캠코더나 카메라 장비들인 거다. 그리고 선무방송. '지금 일부 집회참가자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 진압하고 전부 연행하겠다'던가. 누가 불법인가.

완강한 차벽 앞에서,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 여기에 왔으며, 누가 우리를 막고 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노랗고 하얗고 파란 우의를 입고서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흐르는 빗물에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부가 있었다면, 좀더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 않을까 아쉽긴 하지만, 각자의 단위별로, 참여한 버스별로 진행된 이야기.

성소수자들도, 장애인들도, 두리반으로 모인 인디 음악인들도, 모인 자리였다. 이왕이면 좀더 멋지게

전체의 목소리와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전통적인 노동문제뿐

아니라, 성소수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장애인 문제 같은 다른 문제들도 산재해 있음을, 상식이라 믿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 하나하나 누군가의 밥그릇과 생존을 위협하는 질곡이자 장애물일 수 있음을 나누는

자리였다면 더욱 멋졌을 거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철회되고, 비정규직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멋진 세상이 되겠지만,

좀더 당당하고 신나려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거 같다.

김진숙지도님에게 전달하려던 희망의 배가, 빗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한진과 경찰, 자본과 국가가 이런 식이라면, 다음번 3차, 4차가 계속 노도처럼 밀려올 테고,

그렇게 길바닥에서 진수식을 가진 종이배가 85호 크레인 앞으로까지 항해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참여연대에서 걸어올린 현수막,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김진숙님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분들. 함께 2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오진 못했지만 그 마음은 서울과 지방 곳곳,

오프라인과 온라인 곳곳에서 넘실거린다.

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색소물대포를 쏴대고, 사람 얼굴을 겨냥한 최루액 물총이 난사되었으며,

방패와 곤봉 앞에 몇사람이 두드려맞고 실려가고 연행되었는가 하면, 급기야 최루액 물대포를 쏘아서

대오 전체를 고르게 적셔주는 만행까지.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있던 말던, 순식간에 사방은 무슨

가스체험실처럼 되어 눈물콧물이 낭자하고 기침소리가 가득해졌었다.

그렇게 심상정 전 진보신당의원이 연행되는 등 50명이 연행되고, 수많은 사람이 최루액과 경찰의

폭력으로 병원에 실려가거나 후송되는 밤을 버텨내고 날이 밝았다. 방송차까지 빼앗기고 나서

좀처럼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끝내 자리를 지켰다. 이 외로운 남도의 끝, 홀로

고립된 채 186일째를 버티고 있는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최루액 대량방사의 따꼼함을 담배연기와

물로 헹궈내며. 폭력경찰 물러가라! 정리해고 철회 투쟁! 의 구호가 밤새 이어졌다.

7월 10일 6시경. 경찰들은 어느새 차벽 뒤로 견찰들 전부 숨어들어간 상태. 사람들은 제각기의 자리에서

독려발언을 이어가고, 인디밴드나 음악인들은 자유발언이나 공연을 통해 사람들을 북돋고 있었다.

이 차벽 너머에는 김진숙지도님과 다른 노동자분들이 고공농성 186일째의 아침을 맞고 있었을 거다.

밤을 꼴딱 새고는 난민처럼 널부러진 이들, 머리 위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엇이 이들을 이런 고단함으로 이끌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생을 자발적으로 사서 하는 사람들.

폭우가 쏟아진다는 걸 알면서, 경찰과 한진이 곱게 보내줄리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알았으면서,

그리고 당장의 밥벌이와 생활에 지쳐 일주일 중의 주말만을 기다렸을 거면서.

7시쯤. 기자회견. 유시민과 정동영이 함께 했다고 했지만, 아침 7시가 넘어 시작된 기자회견에 모습을

보인 건 진보신당의 노회찬 전대표, 조승수 대표와 민노당의 권영길 의원을 필두로 한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참담한 얼굴표정, 그러고 보니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나 백기완 선생님,

가장 앞에 서서 길을 뚫겠다 하셨던 두분은 괜찮으신 걸까.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분들이야말로

희망이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끝나고, 밤새 있었던 우리의 몸짓과 목소리가 공중파나 다른 언론에서 거의

묻혀버리다시피 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리면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일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비를 내어가며 자발적으로 이 먼 곳에까지 와서 한목소리로 한진중공업 사태의 해결을

촉구한다는 것. 그 평화롭고 합법적인 행진을 불법적으로 막고 폭력을 행사하며 진압하려든 것은

언론이 다룰 내용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3차 희망의 버스를. 이라고 할 수 밖에.





한국전쟁은, 어쩌면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국가 형성(Nation-building)의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사회시스템을

깨고 영토와 국민, 그리고 그것들을 규율할 대내적 주권을 장악한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거다.

물론 식민지 조선시대부터 이미 '근대'는 수혈되기 시작했지만, 전쟁은 그야말로 시골무지랭이

촌동네까지도 비켜가지 않고 적나라한 근대국가의 위력과 속성을 뼛속까지 새겨준 셈이다.


밤낮으로 국군과 산사람(인민군)들이 마을을 자신들의 영토라며 선혈이 낭자한 땅따먹기를 하고,

마을사람들이 상대 군인을 돕는 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며 을러대고 핍박하는 모습은

남한과 북한, 두 개의 근대국가가 어떻게 서로에 기대어 세워졌는지 그 적대적 공존의 기원을 보여준다.

게다가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가진 것을 탈탈 털어 바치고 필요하면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는 건,

지금은 이미 너무도 공고해지고 세련되어져버려 잘 보이지도 않는 국가의 폭력성,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같은 대극장에서 연극이 올랐다는 점으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연극 '산불'은

이런 지점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할 연극'이라느니, '리얼리즘 희곡'의

대명사라느니, 그런 홍보 문구들은 자연스레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이데올로기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나 비인간성, 혹은 근대국가의 위선이나 폭력성을 천착하며 쉽지 않은, 가슴

답답해지는 느낌을 가득 안고 나오겠구나 했던 거다. 답없는 질문, 그렇지만 질문 자체로 새로운

프레임이 잡히고 당연했던 상식들을 낯설게 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멋진 경험이랄까.


그런 기대가 좀 컸던 탓일까. 리얼리즘은 커다란 무대 위에 구현된 산골마을의 초가집이나 언덕길,

봄에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과 막판의 산불 이미지가 리얼했다고 붙여질 만한 이름은 아닐 텐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한 어정쩡한 치정극을 본 느낌이었다. 여리고 나약한

인텔리 '선생님'을 두고 이년간 수절했던 두 과부가 욕정과 애정이 뒤범벅되어 만들어낸 삼각관계,

한국전쟁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조건이었을 뿐 꼭 그때가 배경일 필요는 없었을 거 같고,

그나마 사랑 이야기조차 제대로 설득력있게 풀리지는 않은 것 같다.


1부에서는 나름 충실하게 한국전쟁의 비극성과 작위적이지만 흉포한 근대국가의 폭력성을

묘사하려 애쓴 거 같은데,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겨울이 지나고 순식간에 봄이 오며 시작하는

2부에서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물러나고 급작스레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갈등과 절망에

초점이 맞춰지는 거다. 남자의 분노도 여자들의 절망도 공감하기에는 너무 급작스러워서, 이후

온통 무대를 벌겋게 피어오른 산불은 극의 절정이라거나 극적인 결말이라기보다는 그냥 모든 문제를

무화시키고 덮어버리는 느낌이었다. 20분의 쉬는 시간동안 나도 모르게 극이 계속 진행되었던 걸까.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꽤나 재미있었다. 연기도 좋았고, 넓은 무대를 십분 활용한 동선이라거나

그럴듯한 배경과 효과들, 그리고 무대인사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부자의 무게감이나 관록까지.

다만 막이 내리고 돌아나오면서 뭔가 당황스럽고, 딱히 이야기의 포커스를 잡아서 이해하기엔

모호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희곡의 원저자가 누구던, 어떤 금테가 둘려 있던 간에, 글쎄,

'한국전쟁기'라는 특수하고도 깊숙한 상흔을 갖고 이정도 문제의식 밖에 못 꺼내고 이정도 이야기

풀어낸다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특히나 '한국인이 꼭 봐야 할 연극'이라고 팔고 싶다면.








like 1984

언제나 의심해야 할 것은 '충성'과 '민족', '국가' 따위 단어를 내세워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고

무조건 믿고 따르며 똘똘 뭉치라는 말이다.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라는 그들의

구호,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거대한 텔레스크린으로 화상지시를 하거나 언제라도 도감청을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능력, 정부가 날조하고 의도한 이야기만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들,

음악과 예술이 사라지고 10시면 사람들을 집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통제력, 전쟁/테러/질병/

자연재해 등 '외부의 적'을 계속 만들어내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연장하는 그들의 패턴은 똑같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위계화된 이래 '권력'은 그런 식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통제하고 조종해

왔으니까. 어느 정도의 사실을 가지고 언론과 학계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만들어내고 '상식'을

만들어내는 거다. 영화에서 나왔던 소재는 악의적으로 뿌려진 '신종 바이러스'였지만, 1984에서는

'전쟁'과 '재구성되는 역사'였다. ([1984]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 진행되는 세상, 1984 혹은 현재.)


각시탈 혹은 바더 마인호프

권력에 대항한 '폭력'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맥락을 수긍케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사회통념상' 쉽지

않은 거 같다. 떠올려보면 70년대 독일 적군파들의 무장봉기 및 테러를 앞세운 극좌노선 이야기를

그렸던 '바더 마인호프', 혹은 (한국에서 프로파간다 차원으로 만든 선전물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일성 치하 북한에서 각시탈을 쓰고 무력투쟁의 선봉에 서는 '각시탈' 정도일까. '칠레전투3부작'은

조금 그림이 다르니까 논외로 치고, 당장 떠오르는 대부분의 영화는 '폭력은 나쁜 것'이란 선험적인

판단에서 그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는 어떨까.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테러를 선동하는 그 행동들의 기저에는

단순히 폭력에 대항하는 또다른 폭력, 반폭력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다는 판단이 깔린 채다. 총 앞에

총으로 맞서봐야 상대는 대포와 미사일을 갖춘 거대한 폭력집단. 중요한 건 잔뜩 움츠러 들어있고

마비되어있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자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뇌된 부자유에 대한 불만,

자유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결핍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대가리가 바뀌어봐야 그대로일테니.

폭력에 대한 판단은 그래서 차라리 부차적이다. 굳이 정당화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역사가

바뀌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현실적인 '매트릭스'

물론 이 영화에서 '폭력'이 수반하는 모두의 피와 고통을 진지하게 마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화려한 수식과 세련된 연출력으로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 'Phantom of Opera'의 사회적

버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주인공 V가 부패하고 부정의한 정치권력을 살육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바쳐 이전 시대를 끝내고자 했다지만, 그가 권력자 한 두명을 바꾼 건지 '앙시앙레짐' 체제 자체를

바꿔낸 건지에 대해서는 답도 없다. 폭파해나가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팔다리가 찢겨나가 죽었을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적당한 가벼움과 오락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현실성과 감동을 획득한다.

매트릭스에서 나왔던 빨간 알약, 이번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빨간 알약을 나도 함께 먹은

느낌이 드는 거지만, 그때만큼 막막하거나 멍한 느낌은 없는 거다. 이 세상이 통째로 거짓이란

이야기, 차라리 세상을 떠나 어디 가서 도나 닦는게 낫겠다 싶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세상이 거짓이긴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각본하고 짜맞춘 이야기와 시스템이 그렇다는 거지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부정하진 않으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피해야 할지 알려주니까.


감동의 3단부스터 (아이유 좋아요)

그렇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V의 가면을 쓰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으로 물밀듯 몰려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느리지만 단호한 발걸음이

탱크와 중무장한 군부대 턱앞까지 두려움없이 다가오던 그 때. 수뇌부가 무너진 군병력이

망연자실 손을 놓은 가운데 바리케이트와 방패와 탱크를 넘어 계속 나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1단 감동. 그리고 이윽고 시간이 되자 거대한 국회의사당이 사방으로 불을 뿜으며

폭발해 나가는 그 모습에서 2단 감동. 거대하게 화석화된 권위, 사람들로부터 나왔지만 어느새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국회의사당이 터져나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정말 국회의사당이 무너져내리자 비로소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장면. 감동의 화룡점정, 그야말로 3단부스터였던 거다.

가면 뒤에 숨어서, 가면의 통일성을 빌어 자신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전달하던 그들은 이제 가면이

필요없게 되었음을 웅변하던 장면이었다. 제각기의 얼굴로 제각기의 목소리로,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 자신들의,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만들어낼 거다.


어쩌면, 워쇼스키 형제는 이런 식의 낭만적인 혁명이 진짜로 가능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름답고 깔끔한 혁명이란 영화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렇게

나도 따라 믿고 싶어지는 어느 혁명의 이야기, 브이 포 벤데타.




지나가던 차, 태권도 학원차였다.

효孝와 예禮를 커다랗게 적어두고 태권도를 익히면 저런 것들도 덩달아 키워진다고 말하려는 듯.

그러다 눈에 들어온 건, '이차에는 미래에(의) 영부인과 대통령이 타고 있습니다'란 문구.

여자는 영부인이고 남자는 대통령인 건가, 조금 뭔가 배려랄까 생각이 아쉽더라는.


대통령은 본인의 힘으로 얻는 직업이랄까, 지위가 되겠지만..영부인은 역시 결혼빨인데.

그리고 굳이 하나 더하자면, 대통령이, 영부인이 훌륭한 사람인가? 이미 그들이 그렇지 않단건

숱한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요새같은 때라면 오히려 저런 문구는 자칫 폭력성을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75년 폴 포트가 집권하여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큼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어를

알거나 책을 보는 사람,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 등 지식분자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갇히고 외국과

내통했다거나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 광기가 이어진 게 약 4년.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열등감, 부자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멸시, 구조와 개인에 대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이 뒤엉켰고, 그에 더해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나 트라우마 따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다. 그렇게 잔뜩 난마처럼 뒤얽힌 맥락에서 모두의 모두에 대한 증오만 남지 않았을까.

평범한 고등학교였던 곳이 보안본부이자 수용소로 전환되면서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끌려들어가서는 단 6명만

살아나왔다는 대표적으로 무시무시한 수용소,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랭 수용소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꺽어

도착한 건물은 웬지 스산한 느낌, 아침나절의 선선한 공기조차 위축시키는 느낌은 뭘까. 검정개도 웬지, 지옥문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처럼 흉맹스러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다. 맘편히 아침부터 관광할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매미니 뭐니 곤충들의 소리라도 있어야 할 법 한데 온통 조용한, 어딘가 추모공원이나 국립묘지에 온 듯한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무에 그어진 칼자국 하나도 범상해 보이질 않았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에 들어서서 돌아본 바깥의 풍경. 여기가 수용소였을 때도 밖의 건물들은 저렇게 바싹

세워져 있진 않았겠지. 사방에서 총을 든 병사들이 초소에 올라 감시하고 있었을 테고, 서치라이트가 문득

깜빡했다는 듯 한바퀴씩 빙글빙글 돌았을 거고.

기괴한 웃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고 있는 느낌, 눈은 전혀 안 웃고 있는 걸. 아마

이 피비린내나는, 셀수없이 많은 생명이 집중적으로 죽어간 공간에 붙을 표지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해도, 그리려 해도 저렇게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웃지 말라는 표지와 더불어 붙어 있는 규정들, 방문자에게 요청되는 규정인가 하고 읽다가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었다...뭐 하나 제정신박힌 규정이 없지만 특히 6번. 하아...

고문하다 소리지르면 안된다라니, 개꼽창들이 죽도록 갈구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꼬투리잡겠다는 얘기.

1층에 있던 누군가의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조각 하나 없이 앙상한 철망만 남겨놓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

있으니 상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고문기구로 쓰였을까, 팔다리를 묶고 때렸을까, 설마

이게 침대길이보다 신체가 길면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겠지..하며.

뚜얼 슬랭 박물관은 총 4개의 동으로 되어서, 고문실, 살해하기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 고문도구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아마도 수용자들의 생활동쯤 되었나보다. 혹은 고문실이었거나, 고문실도 겸했거나.

낡아빠진 창문틀, 아무런 칠도 안 된 채 나무 그대로의 헐벗은 색깔과 질감을 드러낸 것들, 그리고 저 뜬금없는

농구골대 같은 건, 고문시설. 저기에 사람을 매달아 커다란 물독에 머리를 박아놨다고 한다. 날것의 폭력이다.

상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야만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나, 짐승처럼 저기에

매달린 채 허우적대며 목숨을 구걸했을 사람이나.

아마도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거다. 살해하기 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겁에 질린

그들의 표정이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6월 광주항쟁을 다룬 책들에서 저런 사진들은 처음 접했었다. 겁에 질렸던 표정이었겠지만, 경직되면서 표정은

빳빳하게 굳었고 더이상 생전의 이름으로 신체부위를 하나하나 식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단정히 눕혀져 있는 가죽가방같은 존재들. 사람 한 명 죽인다며 달려오는 살인마에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이라도 하겠지만, 이 엄청난 대규모 도살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듯한 쇠사슬, 수용자들을 둘둘 엮어서 끌고 다니기 편하도록 쓰이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시멘트 건물의 묘한 냉기가 선뜻한 기분을 돋게 만들었다. 2층으로 오르던 길에 발견한 낙서들. 아, 여긴

1975년까지도 아이들이 가득하던 학교였던 거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란이 가득했을 곳.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지옥도를 그려냈을 곳이기도 하다.

누굴까, 간수가 쓰던 책상인 거 같기도 하고. 70년대 후반에 쓰이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 보존된 걸 보면 왠지 섬뜩하다. 아마도 이런 섬뜩함, 인간이 얼마나 흉폭하고

무지하게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런 장소가 필요한 거다.

그 뒷켠에 서 있던, 캄보디아가 잠시 '캄푸챠'라는 국명으로 광기어린 폴 포트 치하에서 신음하던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면면. 이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다.

사실은, 그들의 교조화된 신념이 무서운 거다. 부르조아, 쁘띠부르조아, 인텔리겐챠가 조장한 자본주의와

뿌리깊은 봉건적 질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빈농과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이 단순화된

선악구도의 복수전으로 치달으면서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고, 문명과 인류 지성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런 식의 맑시즘을 빙자한 근본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적 혁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눈먼 광신이 빚어낸 참극은 이토록 생생할지언정, 무엇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심지어 득세하게 했는지 그런 부분은 짚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기득권에 기댔던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 기득권 세력만이 호의호식하며 풍기는 부정부패의 구린내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양극 세계질서의 패권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이런 참극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애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순수해지라느니, 깨끗해지라느니, 그런 도덕군자같은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들이 자라나서 제각기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겨루게 될 테고, 그 와중엔 어쩔 수 없이 갈등과 큰 소리가

빚어지게 되는 거고, 그 문제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 노력하는지가 관건이어야지 시끄럽다고

혹은 '날것의 소란스러움/폭력'이 싫다고 그저 조용히 하라며 무질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 싸우는 거 보고

애들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흔히들 말하는 건, 그래서 대개 무지의 소치다. 정치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용히 입닫고 있다가 이런 대량 학살도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터져서 내전도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마도 수용자들의 숙소로 쓰였던 듯한, 철조망이 한층 삼엄하던 한쪽 건물. 잔뜩 녹슨 철조망이지만 여전히

날선 이빨은 그대로다. 뚜얼슬랭 수용소는 안전하고 독성없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사실

그때의 제3세계가 부딪히고 있는 국제정치적, 국내정치적 문제는 대부분 그대로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미국의 피벗(pivot)으로 제한된, 게다가 무능한 외교, 계층간 부의 격차 심화, 기득권의 부정부패...

안에 들어가니 이건 수용시설이라기보다는, 사육시설이다. 좁디좁게 구획된 공간,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발이나 손에 채워졌을 철제 차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정말 불결하고 간소한 화장실까지.

크메르어인지 뭔가 언어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한쪽 벽, 수용소로 쓰이기 전 아이들이 해둔 낙서일까 아니면

수용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적어둔 글일까. 혹은, 비극이 벌어진 후 찾아온 누군가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긴

추도문일까.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확연히 짧아졌다. 남국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손발도 차갑고 가슴도 냉막하다. 이 공간은 그토록 서늘했다. 서늘하고, 시큰하고.

어딘가 굉장히 폐쇄된 채 어두침침한 공간, 바깥을 내다보기엔 너무 시늉만 해둔 창문, 하얗게 번지는 햇살.

마지막 건물동에서는 78년에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최초로 둘러봤던 한 서양인의 기록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포트의 초대를 받고 당시의 캄보디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그는, 그 거침없는 파괴와 재건의 움직임을

다소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고,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호적이었던.

이런 식으로 당시의 사진과 감흥을 남겼고, 오늘날의 시점-역사적 평가가 어느정도 고착된-에서 다시 평가한

아이디어들을 함께 남겨 놓아서 훨씬 의미심장했던 거 같다. 훨씬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물론 그렇다고 당시라 해서 그 비판의식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유의해 볼 만한 점.

아마 그가 자신의 과거 사유를 반성하고 남들 앞에 이렇듯 샅샅이 끄집어내어 재평가하는 이유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위함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 배려를 망각한 채 진행되는 래디컬한 혁명. 누군가의 피와

목숨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의 비정함이나 과격함의 틈바구니에서 개별 인간들을 챙긴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그런 폭력적인 형태의 전복은 가능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경로든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생각하기.

더구나 일국 차원에서의 '변혁'이 가능한지도 문제.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도 참 지난한 문제거니와,

자립경제를 갖춘다고 해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세력이 정상적인 국가 경제발전을 방해하고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이탈하게 했듯.

꽤나 많던 전시물들을 다 돌아보고 문득 답답해져서 수용소의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모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층은 물론 2층, 3층에도 건물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틈에는 전부 꽁꽁

철조망이 둘려 있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혁명 국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집요한 의지일 거다. 사실 이건 모든 국가에서 법을 집행하며 국민을 규율하는

방법이랑 똑같다. 다만 조금 더 날것의 형태일 뿐. 사형수의 자살을 막고 목숨을 붙여놓은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한 거다.

그들 수용자들이 행정적인 이유로, 아마도 세상에서 '제거'되기 이전의 서류 절차를 위해 저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간 2만명, 여섯 명을 제외하곤 전부 저 의자를 거쳐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거다.

참. 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무참히도 해치웠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이나 만 명의 목숨이나 경중을 따질 일도

부등호를 사이에 꼽을 일도 아니지만, 참 적나라하게 막장이었던...

나오기 전, 그들에 대한 위령탑이 서 있는 마당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광기 어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념과 신앙과 이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길. 사람 만 명이나 한 명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그런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민주주의, 사람을 위한 정치체제는 피를 먹고 자란다.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시뻘겋게 피에 물든 장면들 한둘 이상씩은 갖고 있는 거다. 이런 비극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연되고 되살아날 수 있는, 다만 잠복해 있을 뿐인 사건일지 모른다.



#2. 탈주를 잠재운 약빨.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뭔가 '주권'이라는 게 한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강부자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있다고 살풋 실감날라던 때가 있었다. 6월 10일. 백만 가까이의 인파가 어게인, 87년 6월을 외치며 모였었고 이후

6월말까지, 아무 대책도 수습책도 없이 손놓고 있는 정부를 거침없이 압박해 가는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이런 끈덕진 무대책과 무반응이란 건 이 정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요새 강호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는 심각한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온갖 심증과 물증에도 일절 언급을 피하는 청와대'꼬라지하고는.')


어느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고병권은 그게 6월말 7월초, "80년대식 강경진압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경찰 고위직의

말대로 거침없는 폭력이 행사되고 난 후, 각계 종교계인사들이 대거 나서서 '비폭력' 행진을 하면서부터라고 본다.

압도적이고 적나라한 국가 폭력 앞에서 잠시 멈칫했던 시민들의 분노가 채 어떤 모양새를 갖추고 어떻게 분출될지

결정될 그 중요한 시점에 종교인들이 촛불시위대의 지도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급속도로 그 분노와 '폭력성'이

사그라들어 버렸다는 거다.


물론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폭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역사를 움직이는(진전이건 후퇴건)

중요한 동력인 건 틀림없는 데다가, 민주화의 대표적 상징이 되어버린 87년 6월 항쟁이나 80년 광주항쟁 등을 봐도

스스로를 합법화하는 폭력인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폭력은 이번 촛불집회 때의 양상 따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렬'했던 것이 사실이다.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빚어졌고, 그때도 언론들은 법질서

확립 운운하며 떠들었던 터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었고 어쨌든 '우리가 뽑아놓은 대통령'이니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이란 사람들은, 그 습성상 사람들을 자신들이 구제하고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어린양'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사람들의 아픔을 직접 어루만지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짊어질 몫이라며

앞장서서 떠맡고자 한다. 아름다운 마음이고, 감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지상의 법'이다. 그들이

가진 숭고한 인류애, 희생정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을 보려는 자세,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자세..그런 것들은 말이 통하고 눈높이가 맞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내용이다. 누가 잘못했고 어떤 현실적 해법을

구해야 할지,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서 조금이나마 그 왜곡을 풀어내야 하는데, 종교인들은 (거칠게 말하건대)

'모두가 죄인'이고 '폭력=죄'란 구도를 순식간에 형성해 버렸다. 노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물에 빠진 개는 건져

올려봐야 다시 버릇 못버리고 물겠다고 컹컹댈 게 뻔하니, 우선 죽기 전까지 때렷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을 텐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촛불정국이 (단기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못 남기고 만 상황을 보며 마치 1919년 삼일절 독립만세

운동의 귀추가 오버랩되는 감이 있었다. 훌륭하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가진 33인의 '민족대표'란 사람들은 휘황한

문구와 이상적이고 또 그만큼 종교적인 의미와 맞닿는 독립선언서를 쓰고는 채 제대로 낭독조차 안하고서 감옥에

걸어들어간다. 그들의 독립선언서에서 보이는 건 국외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써내린 또다른 독립선언서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일전불사의 자세가 아니라, 어쩌면 조선인민 내부 회람용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자족적이고, 또

타협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비폭력'을 내세우며 상처입고 버려진 국민들을 종교인들이 끌어안는

순간, 정부를 향했던 촛불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안을 보고 모여선 캠프파이어가 되어 버렸다.


잘은 모르겠다. 고병권은 간디와 루터킹목사의 '비폭력'투쟁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최초 촛불들이 공권력과 '빠이와 꽃병'으로 맞대응하기보다 공권력의 구획과 질서를 희롱하면서 겁먹지

않던 그 때의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어쩌면 한층 적나라하고 짐승스러웠던 7월초의 분위기를

넘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쿨하게 그렇게 갈 수 있었다면..비록 자연스레 격한 감정과 액션들이 간헐적으로 분출될

지라도..지레 겁먹고 수위를 통제하려던 것 같았던 데다가 전혀 지엽적이라 느껴지던 폭력/비폭력 논쟁으로

힘을 소진하진 않았을 거 같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힘은 여전히 꽤나 크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맑스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양면적인 면을 가리키는 표현 아닌가. 잘만 쓰면

효능 좋은 약이지만 잘못 쓰면 사람 병신만드는 게 아편인 게다. 신, 그리고 종교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인간들이

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지 않더라도, 종교적인

위로와 정신적인 고양감만으로는 당장 내 살과 뼈를 발라내겠다고 덤벼드는 아귀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건

불문가지다.


선종하신 김수환추기경님의 덕성과 고매한 인격을 의심할 바야 없지만, 그 분이 때로 보였던 보수적이거나

양비론적이고 애매한 입장들이 갖는 효과들은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할 거라 생각한다. 그게 어쩌면 종교인에

짐지워진 하나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지 모른다. 하기야, 신의 말씀이라는 성경, 성서, 코란 등등 조차도

정치적으로 읽힐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읽혀왔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 분 역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앞선 글 : [추방과 탈주(고병권, 그린비)] (이명박) 정부로부터의 '탈주' 선언(1/2)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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