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검은 정장에 검은 바이크를 몰고 다니는 건 언젠가부터의 로망이 되고 말았었다. 출퇴근 이외의

주말이라거나 노는 날 서울 시내를 가볍게 바이크로 드라이브하는 것 역시 말할 것도 없고. 다소간의 우여곡절과

주변으로부터의 드라마틱한 허락 절차를 거쳐 이제야 공개하는 내 두번째 바이크이자 현재 라이딩중인 애마.

HONDA의 ZOOMER다.

나름의 드레스업을 거쳐 세차까지 싹하고 나선 사진을 찍었다. 어디선가 사진을 보고서 한눈에 반해버렸던

혼다의 줌머. 50CC바이크라 순정상태에서 최고속도는 60km/h정도라는 게 거의 유일한 단점인 거 같다.

카울이 최소한으로 남은 채 철제 프레임이 겉으로 드러난 독특한 바디도 매력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오밀조밀

잘 맞아떨어지는 디자인 자체가 역시 혼다구나 싶은 거다.

튜닝을 좋아하는 분들이나 스피드업을 원하는 분들은 애초 프레임이 드러나 있는 줌머란 모델 자체가

자유로운 튜닝의 여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모델이라고 하지만, 애초 기계류와 가깝지도 않고 메카닉에

대해 왕성한 호기심이나 부지런한 관리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터라 튜닝은 아직까지는 전혀 생각이 없다.


다만 번호판도 안 달려있고 정말이지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그야말로 순정상태의 줌머를 구해온지라 약간의

드레스업은 필요하겠다 싶어서 네모박스 모양의 카울 양쪽에 혼다 발광스티커 붙여주고, 패션번호판으로

고심해서 고른 체게바라 번호판 붙여주고, 뒷휀다쪽에 노터치 경고스티커 붙여주고 끝.


아니다, 카울 위에 붙어있는 혼다 마크, 그 위로 약간의 생채기가 나있길래 거기에도 스티커 하나 붙였구나. 해골마크.

사실은 왠만하면 탈것이니만치 신품을 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혼다의 줌머는 2009년인가를 끝으로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모델인지라, 채 일만킬로미터도 달리지 않은 2007년형 모델을 고르고 골라서 산 것.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이유는 줌머의 연비나 이산화탄소배출량이 일본의 가혹해진 기준을 맞추지 못해서라고 얼핏

들었는데, 줌머의 공인 연비는 리터당 30Km, 정속주행시 75km라던가. 측정결과 대충 리터당 35-40km 나오는 듯.

그리고 중고로 업어와서 무브볼이니 벨트니 에어필터 삼종세트 갈아주고 나서는 잔고장없이 잘 타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자전거도 마찬가지지만 바이크 타기에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인 거 같다. 일단 바이크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배달하시는 분들이나 아이들이 워낙 엉망으로 타고 다녀서 굉장히 안 좋은데다가, 기후 역시도

춥거나 덥거나 비오거나 눈오거나. 그에 더해서 도로 사정도 딱히 좋지 않은 거 같은 게 강남의 테헤란로조차 쉴새없이

파헤치고 임시로 덮어놓고 철판을 깔아놓고 하여 아무래도 바이크 운전에 적잖은 장애가 되는 거다. 때로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움푹 파이거나 잔뜩 턱이 생겨있는 도로란 참.


드레스업하기 전에 몇 장 찍어뒀던 것도 올려보자면, 정면 아래측에서 올려본 모습. 가뜩이나 조그맣고 높이도

낮은 바이크를 올려보고 찍느라 허리가 뿌사지는 줄 알았다. 근데 두개의 부리부리한 헤드라이트가 참 이쁘네.

순정 그대로의 모습. 출퇴근길에 정장 입고 탈 생각만 아니었다면 사실 검정색 말고 펄이 약간 들어간 파랑이나

아니면 샛노랑 혹은 하양색을 원했을 텐데, 어떤 옷차림이든 소화가 가능한 건 역시 검정이다.

드레스업 이전의 모습. 그러고 보니 전후좌우 골고루 빠짐없이 잘도 찍어놓았다.

타다 보니 정말, 연비좋고 잔고장없고 조용하고 가볍고 작아서 점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다만 조금 아쉬운 건

역시 60km에서 끊겨있는 속도계처럼 제한적인 속도..한강다리 위를 건널 때 맞바람이라도 맞으면 아무리 땡겨도

50전후에서 헤멘다거나, 오르막길이 좀 경사가 있다 하면 40아래로 내려가는 속도라거나 하는 50cc 자체의 한계.

게다가 조작이 너무 편하다는 것도 가끔은 운전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 같기도. 매뉴얼 바이크로 시작한 탓이겠지만.


그래서 실은, 이걸 세컨드 카로 하고 125cc 이상의 출력이 나는 매뉴얼 바이크를 한대 갖고 있음 최고의 조합일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뭐 올해는 이미 바이크 시즌 오프인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대로.


줌머의 실제 사이즈를 견주어 보기에 좋은 사진. 자전거랑 비슷한 높이에 그리 크지 않은 체구.



 
혼다 줌머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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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 AF69E형 49cc 수냉 4스트로크 단기통

최고출력(ps/rpm) : 4.2ps / 8,500rpm

최대토크(kg*m/rpm)) : 0.41kg*m / 5,500rpm

점화방식 : CDI식 배터리 점화

연료공급형식 : PGM-FI(전자제어 연료분사식)

시동방식 : 셀 스타터식 (킥식)

변속방식 : 무단변속식

전장 : 1860mm

전폭 : 735mm

전고 : 1025mm

휠베이스 : 1265mm

서스펜션(전/후): 텔레스코픽/유니트스윙

브레이크(전/후): 기계식 리딩/트레일링

전장 : 1,860mm

전폭 : 735mm

전고 : 1,025mm

휠베이스(축간거리) : 1265mm

시트고 : 735mm

지상고 : 145mm

차량중량 : 87kg

건조중량 : 84kg

승차 정원 : 1명

연료 탱크 용량 : 4.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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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처음 '코르다 사진전'의 사전광고가 코엑스몰 인근에 쫙 깔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건

체게바라의 사진이었다. 무슨 사진전인지 몰랐지만 체게바라의 얼굴을 앞세워 그 이미지를

팔아먹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인가 싶으면서, 대학 내내 가방에 달고 다니던 체게바라의 배지를

두고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새 애들 그저 다들 멋져보이니까 하나씩 달고 다니지.

맞네 아니네 다투기보다 그냥 묵묵히 있기로 했었다. 체를 좋아하고 체로 대변되는 혁명정신이

좋은 거고, 난 호치민과 로자와 레닌의 생애와 지향이 좋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었다.


사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99년, 그리고 이삼년후 갑자기 '체게바라 평전'이 출간되고 영화배우

문소리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며 방송에서 이 책을 소개했던 이후쯤 한국 사회에 나타난 체의

얼굴은 마치 68혁명 이후 미국에서 체를 '자본주의적으로' 소모하는 것과 딱히 다를 것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잘 생겼고, 획득했던 학력자본과 문화자본을 과감히 포기했으며,

쿠바를 끝내 혁명하는데 성공하고는 다시 제3세계로 달려가 그야말로 '세계혁명'의 야망을

품었던 사람이니, 그런 팬덤을 불러일으켰단 건 사실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1.

코르다사진전, 아마도 '코르다'라는 사진작가의 작품전인가 본데, 아무래도 그가 '체게바라와

쿠바'의 사진으로 이름을 알렸나보다, 그걸로 어필하려는가보다 하고 좋게 넘어가주기로 했다.

사진전 첫테마는 그의 스튜디오. 쿠바에서 광고사진으로 잘 나가던 그의 작업공간을 보여주고

있어 체게바라는 역시나 미끼였나 싶었지만, 이후 보여준 두번째 세번째 테마를 거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리더들', '민중'이라는 이름의 두세번째 테마에서 보였던 건 쿠바 혁명을 지도하던 카스트로와

체를 비롯한 다른 전사들의 긴박하고 웅장한 혁명 활동과 나른하고 깨알같은 일상의 모습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눈높이를 맞춘 채 광장을 가득 채워 혁명을 지지하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피델 카스트로, 털이 북실북실한 그는 여전히 '미국의 골칫덩이' 쿠바를

지켜내며 농업중심의 산업사회, 복지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젊은 날의 그 역시 왕성한

열정과 패기로 새로운 쿠바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


#2.

그 중에서도 가장 맘에 남았던 것은, 쿠바 어딘가를 여행하던 피델이 사탕수수밭에 그야말로

'철푸덕' 소리나게 주저앉아 쉬던 풍경. 그 격의없는 인간적인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사진

곳곳에서 드러나는 피델의 인간적인 면모는 소탈하면서도 적극적이고,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눈빛을 지닌 그런 사람. 이렇게 허름한 입성으로 아무렇게나 몸을 던지며 남들 보기에는

무모하기만 했던 쿠바 혁명을 이루어낸 사람이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런 대중의 사랑을 등에 업을 만큼의 그릇이었던 덕분에 혁명도 성공시킨 거일려나.


그러고 보면 사실 코르다의 이번 사진전에서 '체게바라'를 전면에 내세운 건 역시 일종의

낚시,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코르다 사진전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도록 그는

피델과 가까웠고 그만큼 많은 사진을 남겼던 거다. 피델이 소련에 방문했을 때도 함께 했고,

그가 기지개를 켜거나 잠을 잘 때도 늘 사진을 남길 수 있을 만큼 가까웠던 사이였다니

사진작가로서 그의 이력엔 커다란 축복이었을 터.


#3.

사실 그는 모나리자 다음으로 전세계에서 많이 복제된 체게바라의 얼굴사진을 찍은 작가니까

그의 이력에 미친 공험으로 따지자면 피델이나 체나 오십보백보. 코르다는 그들과 같이

혁명쿠바의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라 하는 것이 공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코르다가 전하는

체에 관한 짧막한 일화 하나가 소개되어 있었고, 다시금 체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체, 당신이 쿠바에서 최초로 만든 사탕수수 수확기를 운전하는 모습을 찍으러 이 먼 시골까지

왔어요. 코르다 당신은 사탕수수를 수확해본 적 있나요? 아뇨, 솔직히 농사일은 한번도. 그럼

일주일동안 칼을 들고 직접 수확을 해 본 후에 내가 수확기를 운전하는 사진을 찍도록 하죠.


그렇게 일주일 후에야 찍었다는 이 사진. 체는 드디어 쿠바의 농업에 과학을 접목해내었다는,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게 되었다는 감격을 사진에 온전히 담고 싶었던 것이리라.

책상물림하는 도시 인텔리와 일반 노동자, 농민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추구하던 그에게는 코르다에 대한 그런 요청이 자연스럽고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4.

그가 광고사진으로부터 사회에 대한 관심이 묻어나는 사진을 찍게 된 건 나무토막을 인형처럼

소중하게 품에 보듬고 있는 꼬마여자아이를 만나고 나서라고 한다. 아바나 교외의 어느 시골로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 카메라를 총처럼 들이대는 낯선 이의 방문에 놀란 아이는 저 나무토막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괜찮아 다독거렸다고 했다. 코르다는 저 사진을 찍으면서, 혹은 찍고 나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 아이의 세상은 광고 속 화려한 환타지와는 달리 윤택하지도 풍요하지도,

최소한 공정하거나 안전하지도 않은 사회였다고, 문득 미안해진 걸까.


체게바라를, 피델 카스트로를, 쿠바를, 새삼 2010년의 한국에서 여러 장의 사진으로 늘어놓는

이유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굳이 이 시점에 이 공간에서 이런 전시를 하는 목적이자

문제의식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큐레이터가 어떤 식으로 기획했던 간에, 백이면 백 모두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진전을 읽어내고 감동을 남겨가겠지만, 나의 버전은 그렇다. 체의 그럴듯한

껍데기, 피델의 (알고보면) 역시 그럴듯한 껍데기를 볼 게 아니다. 화보사진같이 멋지지는 않지만

그들이 함께 나섰던 행동의 순간, 역사의 먼지를 털고 다시 한번 그들의 이미지 뒤에 숨은

가치와 자유 정신을 봐야 하지 않을까.


#5.

체게바라가 남미의 정글에서 정부군에 살해당하기 직전에 했던 말이라고 한다. "I know you have

come to kill me. Shoot, coward! You are only going to kill a man." 마찬가지로 그는 코르다와

피델 사이에 서서 이렇게 경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You are only going to see a celebrity!"


사실 체를 좋아한다 해서 모두가 총을 들고 제3세계 정글로 달려가 괴뢰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거나 당장 사회에 기생하는 기득권세력을 척살해야 하는 것도 아닌 거다. 체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이미 달라졌고, 권력은 일부 키맨에 쥐어진 게 아니라 전체 시스템에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짙은 쌍꺼풀의 털많은 젊은 백인남성 '체'을 알고 좋아하고 이해하는 만큼

그보다 훨씬 오랜 삶으로 신념을 증거하고 생활을 변혁시킨 외꺼풀의 쪼글쪼글한 동남아남성

'호치민'도 알고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리고 그들과 같은 열정으로 지금 세상을

바꿔내려 '계란으로 바위치기'하는 사람들을 알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융캉제 가는 길, 햇살이 박살난 채 사방으로 흩뿌려진 도로 위를 스쿠터로 달리기엔 너무 엄혹하다. 여자들은

긴 옷을 따로 걸치거나 팔토시를 하거나, 잠바를 거꾸로 걸쳐 입거나 해서 노출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쓰는 게

뻔히 보인다. 게다가 얼굴까지 꽁꽁 싸매고 달리곤 있지만, 아무래도 태양을 피하기는 힘든 듯.

융캉제라는 곳은, 가이드북을 아무리 보아도 대체 뭐하는 동네인지 딱히 감은 오지 않던 그런 곳이었다.

융캉제라는 묘하게 거칠고 리드미컬한 이름 역시 상상력을 자극할 뿐 그 공간에 대한 아무 힌트도 주지 않았고,

사실 가이드북엔 여기의 '빙관', 망고빙수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었고.
이렇게 허름하고 푸근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온갖 음식점과 샵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어서, 뭐랄까

대낮 버전의 야시장이랄까, 한국으로 치면 인사동쯤 되겠지 싶은 느낌.

골목을 거닐다 발견한 오편함, 아마도 빨간 게 급행, 파란 게 보통 우편을 위한 함인 건가. 그렇게 보기에는

양쪽 모두 구멍이 두 개씩 있어서,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색깔 빼고는 대체로 쌍둥이스러운 두 개의 우편함.

융캉제의 어느 골목에서 마주친 체게바라와 마오쩌둥의 초상, 이런 식의 제3세계 혁명지도자들을 기리는 샵은

동남아에서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타이완 타이페이에서도 만날 줄이야. 근데 사실 이 샵에서 파는 물건들이 이

두 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라는.

그리고 또다른 혁명가, 오사마 빈 라덴의 초상도 다른쪽 귀퉁이에 붙어있었다. 미국의 골칫덩이, 세계의 불안정성과

폭력성을 자신의 폭력으로 폭로하는 그는, 테러리스트이자 혁명가라 불릴 만 하다.

그렇게 걷다보니 저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굳이 가이드북을 꺼내들 필요도 없겠다. 노란 색깔로 칠해진 벽면,

우글거리는 사람, 여기가 그 유명하다는 '빙관(아이스 몬스터)'. 융캉제의 보석.ㅋㅋ

의자가 몇개 있긴 하지만, 편안히 앉아서 먹을 공간조차 없어서 대부분 입석이다. 높다란 테이블 위에 망고빙수를

올리고 허겁지겁 먹는 걸 보고, 대체 뭐길래 이렇게들 줄 서서 먹는 걸까 했는데 먹어보니 알겠다. 망고도 잔뜩

들어있고 얼음도 곱게 갈려있고, 놓칠 수 없는 맛이다.

이렇게 메뉴판에는 꽤나 여러가지가 나와있기는 한데, 대부분 같은 걸 시켜 먹는 거 같다. 130NTS짜리

망고밀키프리즈, 밑엣줄 가운데 망고 듬뿍 얹혀있는 그림. 타이밍이 되면 두 번쯤 먹고 싶었던.

빙관 앞에서 정신없이 먹어치우고 조금 걸으려다 보니 바로 옆에 이런 조그마한 놀이터 같은 공원이 있었다.

테이크아웃으로 시켜서 여기 앉아 먹을 걸 그랬단 생각이 살짝. 그치만 테이크 아웃으로 가져나오면 커다란

투명 플라스틱 컵안에 꾹꾹 담아주어서, 거기서 바로 먹을 때처럼 용기에 이쁘게 담겨나오진 않는단 단점이 있다.

딱 봐도 남국의 식생이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흐느적대며 바람에 너풀거리는 생기잃은 잎사귀들도 그렇고,

열기를 감당치 못했는지 으깨진 생두부처럼 찌글거리는 건물도 그렇고. 그 와중에 싱싱한 건 어린 아이의 웃음.

택시 타고 융캉제를 빠져나오는 길, 융캉제는 정말 뭐가 딱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동네. 내가 짧게 돌아다닌

탓이 크겠지만, 그냥 주택가가 모여 있는 동네에 음식점이나 옷가게 따위가 좀 쏠려있더라 하는 정도. 아,

딘타이펑 본점도 여기에 있다고 들었는데 굳이 찾아가 볼 생각은 안 들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의 증명서라고나 할까, 택시 뒷좌석에 앉으면 바로 보이도록 조수석 뒤쪽으로 걸려있었다.

타이완의 택시기사 자격증은 요렇게 생겼구나, 해서 한방.

야자수가 미끈하게 자라난 바깥 풍경. 여전히 뱃속에선 망고가 얼음물에 담겨 출렁이고 있어서 마냥 좋던 오후.

그리고 슬쩍 가이드북에서 봤던 듯한, 으리으리해 보이는 처마와 붉은 기둥이 인상적이었던 호텔이 스쳐갔다.

그리고 어딘가쯤에서 발견한 사당. 은근 이런 사당이 도처에서 눈에 띄는 게, 부와 행복을 위해 유연하게 어디라도

기대고 빌 수 있는 중국인, 대만인의 실용성이랄까 유연성을 보여주는 거 같았다.




예비군 1년차때는 군복을 다시 입는 것부터, 총을 쥐는 것도, 경례를 하는 것도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전역(轉役) 1년차의 예비군훈련.


그런데 이제 6년차, 예비군 훈련이 떳떳하게 볕쬐러 나오는 '휴가'라고 느껴지게 되었다.

물론 전투복은 전투하라고 입는 게 아니라 전투력 남김없이 떨어뜨리라고 입는 거고, 전투화는 끈을 바싹

조여매는 게 아니라 개혓바닥처럼 사방으로 아가리를 벌린 채 질질 끌고 다니는 거란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차갑고 불쾌한 총의 폭발음 역시 조금은 더 참을 수 있게 되었고, 다섯 발 중 세 발은 표적에 맞혔으며,

이제 그 '표적'이 언제라도 '사람', 혹은 북괴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바로 연결시키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예비군 6년차, 마지막 훈련을 받으며 이런저런 훈련장 스케치.

되는대로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쇳덩어리 목총을 쑤셔넣고는 하이바를 올려둔 예비군들. 신병 훈련소에서는

특별지급되었던 치토스의 '따조'까지 승인되지 않은 놀이기구라며 뺏어가고 치토스 봉지조차 네모나게 각잡아

접어서는 버렸단 말이다.

준비성 철저한 어느 '전우'. 등산갈 때 부모님이 갖고 다니시는 휴대용 방석을 갖고 왔다. 4월이 한참 지났어도

쌀쌀한 날씨인데다가 항상 군대는 '춥고, 졸립고, 귀찮은' 몸뚱이가 문제인 거다. 어찌나 부럽던지.

다른 사람들이 사격 훈련을 마저 마치기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방황하는 예비군들. 후드티를 껴입고 갔다가

입구에선 교관들의 우악스런 손에 벗겨지던 구겨넣어지던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했지만 훈련 중엔 계속 쓰고

다녔다. 나처럼 후드티를 껴입고 온 다른 분께서는 유유자적 독서삼매경.

그래도 연막탄도 쉼없이 피워올리고, 총알도 다섯발씩 주고. 차라리 예비군들의 기초체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루 날잡아 등산을 시키던가, 구보던 웨이트트레이닝이던 하루치 일과를 주는 게 어떨까. 돈 아깝게

모형 건물짓고 연막탄 피우고 그러지 말고. 정말, 예비군 훈련을 그렇게 좀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바꾸면 모두가 좋아할 거 같다.

이런 '북괴'를 상대하려 해도 역시나, 되도 않는 정신교육이나 빌빌거리는 전투기술훈련 따위보다 배나오지

않은 날렵한 체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참 웃기게 생긴 북한군인 아저씨, 그리고 밑에 이리저리 구르는

모형 수류탄들. 그 뒤로 등에 피로를 업은 예비군들.

뭐, 이런 훈련 안내문도 나눠주기 시작하고 이제 예비군도 조금은 서비스 정신을 갖게 된 걸까.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건 이미 숱하게 유출되고 유통된 '모두다 깊디깊은 숙면 중인 안보교육시간'이라거나

'개도 안먹는 예비군 짬밥의 실체'라거나 따위여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릴까봐 두려운 게다.


나는...음, 예비군 훈련에 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스케치에다가 건설적인 대안까지 제시했으니 괜찮을 거다.

괜찮겠지 모.

상병때부터 일년넘게 내 왼쪽 뇌 옆에는 초록빛 체게바라가 있었다. CHE_GUEVARA.

사실은 빨간색이나 흰색으로 하고 싶었는데, 오바로크쳐주던 분이 그럼 잡혀간다며.

난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며, 어차피 엎으나 뒤치나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며.


그러고 보면 그람시나 알튀세르, 최장집을 읽었던 것도 군대에서였다.

얼룩무늬에 쩔고 '다'나 '까' 따위 말투와 마초들에 치여서 삶이 푸석해져버렸다던 오래전 이야기.

그렇지만 지금은 예비군 훈련을 몇 년 더 했음 좋겠을 뿐이고. 아이러니.





예비군 훈련을 가려고 옷을 챙겨입을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그리스로마신화의 한 토막이 있다.

헤라클레스에 죽음을 가져왔던 옷. 그의 아내 데이라네이라가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놓칠까 두려운 나머지

헤라(던가 헤라의 사주를 받은 신이던가의) 꼬임에 넘어가 마법의 힘을 가진 옷을 헤라클레스에게 입혔다던가.

일단 옷을 입고 나니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느껴졌으나, 한번 입혀진 옷은 살에 철썩 달라붙어
 
벗겨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군복이 그렇다. 잔뜩 무거운 군화, 잔뜩 내리누르는 하이바, 그리고 불편하기만 한 나무작대기-총,

그저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운이 쏴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의욕을 상실한다.


예비군 훈련을 다녀오고 나니, 하루가 너무 지쳐버렸다.


"26일임 병장이다. 낼부터 일주일동안 외박이니까, 병장신고도 째고 외박나감서 병장달고 나가게 되었다. 이제부터 11개월-3주라...

11비에 울 B.X. 가게 물건 받아오면서 전투모 한개 사고, 병장 계급장 오바로크치고, 옆에 이름도 박아왔다. 11비에 두돈반짜리 트럭 뒷켠 타고가면서 계속 무얼 박을까 고민 좀 했다. 보통 남들은 대한민국 공군 아무개, HAWK, HIDDEN CARD정도에서부터 자기 이름, 장비명 머 그런거 하던데, 최종진화된 형태의 전투모에-아니지, 전역모가 또 있었군..-무언가 멋진 문구를 박아넣고 싶었단 거다.

짧막하면서도 내게 의미를 던져주는 그런 단어..명사, 함축어, 상징 그러면서도 약간의 자발적 검열과 수정을 거친. 심사끝에 hasta la victoria, siempre는 넘 길어서 짤렸고, ubermensch랑 siege-mental, solidarite정도가 남았더랬다. 군바리로서의 역할과 내 생각, 거기서 분열된 내 생각들, 부끄러움, 자존심, 그런 걸 계속 갈퀴질하며 뻗어나가다 보니..모자에나마 박아넣을만큼 자신있는 단어가 없지 싶었다. 낯부끄러운...생각해보니 군대서 머라하겠다 싶은 단어를 알아서 제하는 것만이 자발적 검열이 아니더라구..어른거리는 치기를 제하고 의미를 줄 수 있는 단어로.

막막해지는 와중에 차는 덜컹거리고, 엉덩이가 쪼개지는듯한 와중 문득 체가 떠올랐다. 체 게바라...현실에서 살되 꿈을 따르는...68의 상징이자 00년대의 '문화적저항'상징으로 전유되고 만. (문화적 저항과 정치적 진보와의 상관관계는?정치가 타인을 아우르는 거/전유하는 거/헤게모니화하는 거/라면, 문화는? 누구나 공공에게 말을 할때 집단을 거명하지, 우리는, 네티즌은, 시민은, 국민은, 여성은, 시민단체는...순간 포섭되는 이름없는 다중..)

CHE GUEVARA를 박아넣었다. 마치 타투처럼. 일단은, 그의 방식만 모방하기로 한다. 치열함의 방식을 다시금.

"우리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빨간색실로 해달라고 졸라 쫄랐는데..안된단다. 걍 광택띈녹색..해서 녹색의 체게바라가 되어버렸다.ㅋㅋㅋ" (2003.9.21)



* 정말 코미디 같은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이메일을 뒤지고 직접적인 증거력도 없는 문구로 언론재판을 한다.

그렇게 노무현을 보냈던 그들이다. 티비에서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말소리를 들을 때, 피에 굶주린 괴물,

앞뒤 안가리고 무작정 제물을 찾아 돌진하는 괴물이 떠오른다.




#1.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베네수엘라, 쿠바..

프레시안에서 체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여정을 좇은 여행 사진전을 열었다. "시가 무엇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 답하겠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지 시에게 묻는다면 시는 그 답을 해줄 것이다." "여행이

무엇인지.." "사진이 무엇인지.." 그런 식으로,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맥락과 관심사를 통해 외부

사물들을 이해한다. 240여장의 사진을 넘기며 그 때 가졌던 감정과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를 두시간여 조곤거리던

다소 지루했던 사진전에서, 나는 그 여정에 거쳐간 국가 이름들이 갖는 이국적인 느낌에 취해버렸다.

아-르-헨-티-나. 베-네-쥬-엘-라. 페-------루. 큐-바.



#2. 외교부의 미운 털.

이번주 월욜에 있었던 한-아랍 소사이어티 창립총회 때 일이다. 외교부 참사관 하나가, 문득 우리 진영 쪽으로

와서 그런다. 당신이 XXX대리에요? 언제 입사했어요? 여자친구는 있어요? 네, 얼마 안됐습니다. 있습니다.

여기서 내 멘토선배가 한 마디, 여자친구가 얼마나 이뿐데요~* 그 참사관 말이 외교부의 직원들 사이에 나에 대한

성토대회가 한시간이나 열렸댄다. 회장의 일정과 필요를 빙자해 끊임없이 귀찮게 한다나. 신입직원답잖게.

같이 하는 행사니만치 그쪽과 우리쪽의 정보가 공유되야 했고, 나 역시 주겠다는 빈말만 계속하며 짜증내는..

무례하고 건방진 외교부 직원들과 계속 독촉하라는 팀장님 사이에서 얼마나 열받아 있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십장생들. 어쨌든 행사는 무사히 마쳤고 다음날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 모두에게 감사 편지를 쓰는 선에서

마무리. "행여 제가 귀찮게 해드렸다면 죄송 운운" 은근히 그런 거 잘한다, 맘만 잘 먹으면. 니들한텐 어디던

모두 을의 입장이어야 한다는 니넘들의 강변, 인정해줄 수도 있다. 내게 그다지 중요치 않으니까 그런

갑-을 장난질은.



#3. 박제가 된 천재..는 아니지만.

이상의 그 표현이 날 향했던 건 두번째다. 첫째는 내가 제대하고 고시공부를 할 때. 대체 내가 정부기관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며 고시공부에 매진하던 날 안타까워하던 식이었달까. 두번째는 엊그제, 출근길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군시절 중대장님. 거기에서 뭘 할거냐며 5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박제가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똑똑하고 말도 잘 하는 녀석'이, 서울대 외교학과란 딱지를 갖고서, 메인 스트림..유학도 다녀오고 뭔가

'그렇게' 비전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냐고 했다. (여전히 난 그 '그렇게'의 의미를 전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참 다른 두 개의 방향..이랄까. 체게바라는 죽고나서야 박제가 되어 맥주병 포장지, 티셔츠, 건물외벽을

장식한다지만..난 벌써 박제가 되어 이후의 쓰임과 이전 기억의 용도를 고민하는 것 같아 착잡하다. 아직

살아있는데. 두 지적 모두 내가 요새 답답해하는 이유를 어슷하게 관통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10년 후, 아니 5년 후, 하다못해 1년 후..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을까.



#4. 내 문제는..

직장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멀찌감치 밀어뒀던 가치들..그것들이 헐떡대며 내 등뒤를

잡아채고 내리찍는 사이에, 지금 이곳이 내게 허한 빈 공간들을 채울 의미있는 뭔가를 찾지 못했다는 것. 애초엔
 
그게 그래도 꽤나 긴 토막의 텀일 거라 생각하고서는, 내가 안정성과 자기관리를 위한 시간 대신 '포기한' 혹은

포기했다고 믿고 싶은 고액 연봉, 커리어 관리, 다이내믹한 분위기을 대신할 뭔가를 찾는 건 마치 휴대폰 배터리

갈듯 금방 될 거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2월, 3월, 4월, 5월. 아무런 대안도, 새로운 공간도,

흥미도 관심사도 발굴하지 못한 채 지나고 있다. 이걸 희생한 대신 얻겠다던 저것..이 아직 손에 잡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게 뭐여야 할지도 전혀. 감이 없는 상태란 게..날 바싹 말려 박제로 만들고 있다.

'신입직원'으로서의 허니문은 이제 끝났고, 누추하고 더러운 현실이 보이면서 대체 내 '위생관념'과 '긍정적인

사고'란 게 얼마나 갖춰져 있을지 본격적인 시험에 들어간다.



#5. 오늘은.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선배와 술한잔 했다. 안티로 가득한 거리의 정치 그리고 단지 '이명박'과 '광우병'에 초점이
 
맞춰진 지금의 패닉 상황이 기회일지, 위기일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난 위기가 맞다고, 아니려면 FTA로

제왕적 대통령제로 초점을 넓혀가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달에 채 백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몇 년째

일하는 사람들, 딱히 대단할 것도 없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아니라 그들은 마음에 찍히는 숫자가 불었을 테다.

문제는, 나처럼 그 어디에도 하루하루 숫자를 불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 사실 입사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걸로 암담해하는 건 건방진 걸지도 모른다. 6시 좀 지나 사무실을 막무가내로 나서서 경복궁 사진전으로 달렸던

건 그런 암담함을 지워내려는 육체적인 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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