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데츠 언덕의 남쪽에서 로트르슈차크 탑으로 올라가는 길, 건물과 건물벽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남자 두명 어깨를 맞대고

 

걷기도 힘든 너비지만, 이 길 끝을 향한 관광포인트들의 화살표가 저리도 수다스러우니 한치의 의심없이 가는 거다.

 

 그래피티라기엔 조금 아쉬운 낙서들이 붉은 벽돌담의 회칠을 이리저리 긁어놓고 있었고, 다행히 골목은 조금씩 넓어지고.

 

 

언덕을 올라간다는 실감이 나는 게, 조금씩 자그레브의 구시가부터 야금야금 붉은 지붕들이 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았다 싶었는데 성 마르크 성당이랑 그 너머 성모승천 대성당이 보인다. 저기가 자그레브의 또다른 언덕

 

카프톨의 꼭대기인 셈이고, 지금 걸어 올라가는 중인 언덕인 그라데츠를 오르면 자그레브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로트르슈차크 탑을 비롯해서 성모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스톤 게이트 등을 볼 수 있다.

 

 제법 높이 올라왔다 싶어서, 뒤로 돌아 밟아 올라온 계단들을 보려는데 문득 눈이 마주친 아가씨. 손을 흔들어주니 흔쾌히 답해준다.

 

 그리고 왠지 알루미늄 호일을 꼬깃꼬깃 구겨서 만들었거나 껍데기를 씌운 듯한 이 조각상은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시인이라는

 

'안툰 구스타브 마토사'라는 분을 기려 세워진 거라고 한다. 아니, '세워졌다'는 표현이 어폐가 있다 싶은 게 워낙 친근하고 격의없는

 

느낌의 조각이라 그런 거 같다. 그는 자그레브의 삶을 즐기고 자유로이 살다갔던 보헤미안이었다고 하니 이게 맞겠다.

 

 그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자그레브 시내. 그가 보았던 도시와 지금의 도시는 얼마나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기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삶이 더 척박해지고 속물스러워지고, 게다가 많이 고유의 것들을 잃어버렸을 텐데. 다행히 짧은 체류를 했을 뿐인

 

외지인의 눈에는 꽤나 훌륭하고도 단단한 문화자산들을 갖고 있는 특색있는 나라로 보였지만 말이다.

 

두둥. 아직 3월 중순이라 봄이라고 하긴 애매한 시기지만, 여튼 푸릇푸릇해진 풀밭 너머로 보이는 게 로트르슈차크 탑.

 

그라데츠의 남문을 지키기 위해 세운 감시탑이라고 하는데, 무려 13세기에 지어진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단다.

 

수백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정오에 대포를 발사해서 시간을 알려준다는데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각, 대포 소리는

 

들은 기억이 없지만 여전히 귓가에 남아있는 건 저 씨디도 발매하신 프로 아티스트 할아버지의 연주 소리.

 

 

사실 여기는 이렇게 걸어오는 것도 방법이고, 남쪽의 일리차 거리와 연결되는 케이블카를 올라오는 것도 방법이다.

 

여하간 탑의 조그마한 입구를 들어서면 한산한 기념품샵과 매표소가 있고. 10쿠네(약 2천원)을 내면 저 문 너머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게 된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형 계단은 우선 건물 외부를 타고 오르게 된다. 발음도 어려운 로트르슈차크 탑과 옆 건물 사이의 빈 공간을

 

따라 나선 계단과 함께 하늘로 치솟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 한 그루, 그리고 한켠에서 수줍게 나부끼며 응원중인 빨래들.

 

그리고 탑의 실내로 들어섰더니, 마침 자그레브의 젊은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탑의 조그마한 창문들로부터

 

은은하게 비쳐들어오는 흐릿한 햇빛이 탑 내부의 하얀 벽면과 반들거리는 나뭇바닥에 사정없이 반사되면서 분위기가 그럴 듯 하다.

 

슬쩍 내다본 창문 너머로는 방금 올라온 완만한 계단길이,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들고 나온 아가씨의 손수레가,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그리고 사랑을 속삭이느라 여념이 없는 커플이 보인다.

 

그리고 일리차 거리에서부터 올라온 케이블카가 도착해서 사람들을 쏟아내는 출입구. 사실 그렇게 케이블카를 타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진 않던 게, 나선 계단을 따라 탑을 뱅글뱅글 오르는 중에 계속해서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저 문이 열리고

 

관광객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던 거 같다. 그렇겠다 싶은 게, 운영 거리도 짧거니와 걸어서도 충분한데 뭐.

 

 

조금씩 눈높이가 둥실둥실 떠오르는 게 느껴지려나 모르겠지만, 한층한층 오를 때마다 탑의 네면에 한개씩 있는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사진으로 담다보니 사진에서 보이는 풍경들의 눈높이가 점점 지상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러다가 이렇게 자그레브 시내의 붉은 지붕들이 어떤 식으로 디테일하게 타일들을 짜맞춘 건지 궁금증을 풀기도 하고.

 

이만큼 높아진 시선에서야 비로소 붉은 지붕들 너머로 하얗게 반짝거리는 성 마르크 성당의 일부를 보고 설레이기도 하고.

 

아래에서 강아지들을 끌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궁금해하며 사진을 담기도 하고.

 

아까 자그레브 대학교의 미대생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던 저 아가씨는 그새 아이스크림 아저씨랑 한담을 나누는 중이다.

 

 

그래도 케이블카가 운영되지 않는 건 아니어서, 이렇게 두 개의 레일을 따라 파란색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는 걸 보기도 했다.

 

주변의 낡고 붉은, 그렇지만 그 디테일한 까끌까끌한 질감이 살아있는 지붕들과 완전히 정반대인, 반짝이는 파란, 매끄러운 케이블카.

 

계단은 계속됐고, 그 때마다 자그레브의 신예 작가들의 사진을 빠짐없이 감상하고 게다가 네 면의 조그마한 창문에서 보이는

 

자그레브 시내의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나 걸리고 있었지만, 조금씩 시야가 멀리까지 트이는 걸 실감하며

 

기꺼이 만끽하는 중이었다. 계단도 그렇게 가파르거나 높지 않아서 힘들지 않고.

 

 

이런 창문들이 사각탑의 네 면마다 하나씩. 위로 올라가니 제법 외풍이 세차게 몰아닥쳐 창문을 아예 잠궈놨던데,

 

굳이 그걸 살짝 열고는 유리창의 방해 없이 맨눈의 자그레브를 구경하고 싶었다.

 

 

층수로 치면 4층쯤 되려나. 이제 왠만한 자그레브 시내의 건물들은 얼추 눈아래로 들어온다 싶을 즈음.

 

대포가 나타났다. 이게 매일 정오마다 발포되어 시간을 알려준다는 대포, 리얼 대포다. 대포가 있는 유리방 벽면에 붙어있는

 

온갖 삼엄한 금지 표시들만 봐도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런 대포를 향해 창문 너머로부터 쏟아지는 이 나른하고도


따스한 햇살은 좀. 반칙 아닌가 말이다.

 

붉게 칠해진 바퀴는 단단히 고정되어 반동을 최소화했고, 어느 하나 녹슨 부품이 보이지 않는 대포의 철제 바디는 보기만 해도

 

왠지 군대의 살상병기가 갖는 위용을 그대로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그런 대포가 자그레브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려주는 유용한

 

알람 시계로 활용되고 있다니 꽤나 교훈적이랄까 바람직하고도 건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사진이 너무 많아 일단 여기서 끊고 로트르슈차크 탑 위에서 보이는 풍경은 다음 포스팅으로.

 

맛보기 삼아 한장만 올리자면, 이 탑 위의 전망대에서는 성 마르크 성당의 자수같은 지붕이랑 아이 컨택이 가능하다.

 

 

 

 

 

10월 8일, 서울 세관본부 건물 앞 대형스크린에 생경한 포스터가 하나 반짝거리고 있었다. "안아주기할까요?" 안아주기는

뭔지. 무슨 행사인지 몰라도 관세청의 마스코트인 '탐마루', '탐아라', 두 마리 탐지견 인형이 입구를 지키고 선 걸로 보아

꽤나 크고 의미있는 행사인 듯 하다.


"안아주기". 더이상 쓰지 않는 경과 시계 등을 모아서 시아, 아프리카에 보내주기 운동의 약자란다. 그 안에 숨겨진

뜻도 뜻이지만, 그걸 저렇게 절묘하게 줄여서 표현했다는 것도 대단하지 싶다. 시력이 맞지 않거나 유행이 지나버리고 조금

낡아서 어딘가에서 하릴없이 뒹굴고 있던 안경과 시계를 모으는 것과 동시에, 상표권 침해로 폐기될 예정이던 '짝퉁 의류'를

모아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 특히 이번엔 방글라데시 국민들에게 전달하게 된다고 한다.

이번 행사로 수혜를 받게 될 방글라데시가 어떠한 나라인지, 한국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수십점

걸려 있었고, 그 한켠으로는 명품 가방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짝퉁 밀수품이 어떻게 제조되어 한국으로 들어오는지

최근에 있었던 밀수 시도 사건들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도 함께였지만 시선은 계속 가방들에 꽂혀 있었다. 얼핏 보기엔

마무리도 깔끔해 보이고 진품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저 상품들이 전부 짝퉁이라니.

 


그리고 그 옆으론 온갖 종류의 밀수품들. 탄피로 만들어진 장난감에 일본도에 총에, 발기부전제니 비만치료제,

마약 같은 온갖 이상한 약품류와 뱀술에 전갈가루, 호랑이가죽 같은 것들까지 신기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아이템 두 개. '식품사용불가'란 설명이 붙어있는, 마치 조그만 가죽주머니 두개를

매달고 있는 대나무 꼬챙이처럼 바싹 말라붙은 사슴의 생식기랑 '조선'에서 나온 네오비아그라란 약품. 조선말과

러시아어와 중국어와 영어, 무려 4개국어로 그 효능이 광고되고 있던 이 '네오비아그라'.

세관에서 근무했던 선배들이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는 팔각정이 시원하게 앉아잇는 서울세관 청사내 정원 앞에서

기증식이 열렸다. 관세청장과 서울본부세관장, 주한 방글라데시 대사와 명예세관원으로 위촉된 연예인 정보석이

함께 내빈석이 앉아 진행된 기증식에서 방글라데시 대사는 감사패를 빌어 한국 국민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오늘 방글라데시에 전달될 물품들은 총 3천점에 가까운 안경, 의류, 시계들로써, '짝퉁' 의류들에는 연단 옆에 전시된

옷에 그려져있는 태극무늬가 색칠되어 전달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경의 경우에는 케이스에 내외빈과 참가한

학생들이 메시지를 적거나 그림을 그려 전달하게 된다고 하니, 그렇게 사람들의 손을 타고 정을 머금은 물품들이

방글라데시에 전달되면 양국의 국민들은 서로를 한층 가깝고 친밀하게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학생들은 인근의 언북중학교나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희망한 학생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봉사란 게

하나의 스펙처럼 여겨지는 시대지만, 그래도 이처럼 봉사의 의미가 뚜렷하고 그 수혜대상이 분명한 봉사라는 건

많이 할수록 좋을 거라는 생각이다. 안경케이스마다 차곡차곡 학생들의 메시지가 담겨가고, 점점 솜씨가 늘어가는

학생들은 급기야 색색깔로 글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시계, 국내에 유일하게 있다는 동서울대학교 시계학과에서 봉사하러 온 십여명의 학생들은 중고시계를

수리하고 세척하는 작업을 맡아 정말 쉴 틈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끔하게 수리되고 깨끗하게 세척된

시계들이 열지어 테이블 위에서 햇볕을 나른하게 쬐게 있노라면 어디선가 중고등학생 동생들이 나타나 이쁜

종이 케이스에 새것처럼 조심스럽게 잘 말아서 포장작업을 하는 거다.

물론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봉사학생들의 손놀림이 어느 순간 흔들리거나 멈칫하는 순간이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인기를 몰고 다니던 일일명예세관원 정보석. 그의 등장과 함께 학생들은 주위를 포위한 채 사방에서 카메라폰을

꺼내들었댔다. 그 뒤에서 약간은 섭섭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관세청장과 서울본부세관장이 보인다.


내빈들도 직접 '짝퉁' 의류에 태극마크를 그려넣는 작업을 해보았다. 실크스크린으로 미리 속이 비어있는 태극무늬를

옷에 그려넣고, 빨간 물감과 파란 물감으로 태극 마크를 그리는 게 정석이다. 팔에 토시를 끼고 관세청장과 주한

방글라데시 대사는 무척이나 꼼꼼하게 색칠을 해서 이쁜 태극 마크를 완성해 냈다.


자랑스럽게 본인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메이드 인 코리아' 의류를 들고 포즈를 취한 내빈, 그리고 마치 자기들의

삼촌이나 좀 나이든 오빠라도 되는 양 스스럼없이 구는 아이들 틈에서 살짝 빠져나온 일일세관원 정보석과 함께

다시 한번 포즈를 취한 내빈들.


그런데, 잘 생기긴 잘 생겼다. 키도 꽤나 크고 피부도 좋고, 뭔가 일반인 틈에 섞여 있어도 역시 연예인이라 다르긴

다르구나, 라는 느낌이랄까. "멋진 생각! 멋진 나눔! 서울세관본부 화이팅!"이라 적힌 사인을 들고 기념촬영중인

정보석, 이번 행사가 자칫하면 쓰레기로 버려질뻔한 천여점의 의류와 천여점의 안경테, 시계를 되살려 좋은 데

쓰인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개념 연예인 맞습니다.

내빈들, 어른들의 작품이 참 모범적이고 단정한 태극 마크였다면 아이들은 조금씩 톡톡 튀는 개성과 창의성을

보여주는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태극 마크에 더해 주변에 물감으로 풍경이나 사물을 그려넣기도 하고,

조금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더하는가 하면, 마치 현대 미술처럼 난해하기 짝이 없는 물감 떡칠을

통해 본인들의 예술 욕구랄까 표현 욕구를 마음껏 불사르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이 학생들의 심오하고 깊은

예술 세계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주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서울본부세관 지하에는 몰수화물들을 보관해두는 압수창고가 있다.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철문 너머에는 온통,

정말이지 온통 짝퉁 명품 가방과 의류 등속이 가득 보관되어 있었다. 심지어 아무 생각없이 밟고 있던 바닥에 깔린

게 모 명품 브랜드 짝퉁 가방을 만드는 원단 가죽이었다는 걸 나중에 깨닫고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이건 거의,

구찌 벽지를 바르고 루이뷔똥 카펫을 깔고는 샤넬 가방으로 쓰레기봉투를 삼아도 될 수준이었으니.


이런 식이었단 얘기다. 저렇게 우글우글 모여 있으니 아무리 외양이 그럴 듯하고 세련되어 보인다고 해도, 그게

진품이거나 짝퉁이거나 간에, 굉장히 '없.어.보.인.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파는 싸구려 아이템들도 저렇게까지

우글우글 깔려있지는 않은데, 각 종류별로 색깔별로 열맞춰 놓여있는 저것들을 보니깐 참. 허영이었구나 싶다.


이렇게 발가벗겨진 가방도 있었다. 아마도 내장재가 어떻게 쓰였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삼아

분석대상이 된 게 아닐까 싶었는데, 반질하고 잘 여문 가죽으로 휘감겨 있던 외장과는 달리 칼질이 죽죽 그어져 속의

벌건 내피가 드러난 모습을 보니까 왠지 가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런 것들도 아이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예술혼을

펼치도록 해서 저개발국가나 국내에서라도 쓰임을 찾을 수는 없을까 안타깝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그들이 진품인양 한 것은 미워해도 가방으로서의 쓰임 자체를 미워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관세청이 참 좋은 일 하고 있구나 싶다. 저런 밀수품이나 짝퉁 상품들을 많이 잡아내야 또 그것들이 필요한

곳으로 잘 전달되어 좋은 방향으로 쓰일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도 더욱 많이 잡아내고 더욱 많이 좋은 일들을

하는 관세청이 되었으면 좋겠다. 굳이 거창하게 몇백억씩 돈을 내고 '사회환원'이네 '사회적책임'이네 '국격'이네

어려운 단어를 섞을 필요도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시가 일억원 상당의 물품이 쓰레기가 되는 걸 막고 필요한

곳으로 가서 잘 쓰이게 된 셈이다.



* 본 포스팅은 관세청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덕수궁미술관, 생각해보면 여긴 뭔가 내가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덜렁 카메라 둘러메고 떠나는 곳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라는, 덕수궁미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열고 있었다.

미술관 앞, 몇 개의 부처상들이 놓여있었다. 심상히 여기고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미술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의 연장선상에서 배치된 것들이었다. 작품의 컨셉, 이번 전시의 컨셉은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눈에 보이도록 가시화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지. 그리고 그 아연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어떤 공력을 기울이고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는지. 그걸 보여주려는 전시였달까.


그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게 이 조각상들..이었지 싶다.

덕수궁 미술관을 가는 길엔 산책삼아 한바퀴 돌아보는 덕수궁, 늘 그렇듯 낯익은 듯 하면서도 새로운 구도와

모습들이 드러난다. 내가 방문하는 시간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피사체는 사라지고 배경만 남아버린 이런 풍경.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라는 전시 제목은, 실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라는 백남준의 작품 제목을

따서 지은 거라 한다. 전시회를 한바퀴 둘러보다가 운좋게 만난 도슨트의 설명이 그랬다. 굉장히 로맨틱하고

그럴듯한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백남준의 원제가 더욱 그럴듯하지 않은가 싶었다. 우리가 둥그렇게 생긴

아날로그, 디지털 시계를 내려다보기 전에는 달을 바라보며 시간을 어림잡았을 테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밤하늘에 뜬 달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상념을 잠겼을 거다. 그야말로 태곳적의 텔레비전.

내가 전시를 돌아보는 방식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만, 그런 식이다. 우선 한바퀴 훌쩍 돌아보고 나선 맘에

폭폭 꽂혔던 것들 위주로 다시 한번 돌아보기. 요새는 워낙 도슨트 서비스가 잘 되어 있어서 처음 한 바퀴는

으레 도슨트를 따라 돌며 기본적인 배경지식과 관점을 참고하게 된다.

그냥, 전시를 죽 돌아보고 나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도. 역시 시간은 흐르는구나. 시간은 흐르고,

어찌 되돌이키거나 붙잡거나 고여있을 수 없는 순간들이 지나고, '강이 흐르듯' '시간이 차고 기울고 다시 차듯'

어쩔 수 없는 상처들은 덮거나 지우고  다시 흐르는구나. 나도 흘러야겠구나. 그런.

이 작품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비누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삽시간에 '나이'를 먹는다. 야외에 설치되어

빗물에 씻기고 바람에 씻기고 아이들의 손이 타 금세 지저분하게 녹아내리고 심지어는 갈라지는 조각상.

건물마다, 예술작품마다 제각기의 '수명'이랄까 '나이'가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게 아마 도심속의 덕수궁

미술관에 들어설 때 느끼는 이질감의 정체겠지만, 씬삥의 콘크리트 건물이 뿜어내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훨씬 긴 호흡의 뭔가를 이전 시대의 건축물이나 예술품에서 느끼는 거다. 그 차이. 그걸 응축해서 보여주는

게 이 비누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아닐지.

다른 작품들은 모두 이미 제작된 작품들을 섭외한 거지만 이 아이들은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다시 제작된

것들이라 했다. 이전 전시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화장실 세면대 옆에 설치되었다던가. 손을 씻고 이 아이들을

문대면서 자연스레 씻겨나가고 지워지는 효과를 의도한 거라 했었다. 멋지다.

덕수궁 내에는 시간의 흐름을 잡아내는 또다른 도구가 있으니, 바로 자격루다. 덩어리 덩어리 분절된 게

아니라 그야말로 '흘러가는' 시간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은 액체, 물이었을 거다. 그러고 보면 전시된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이 가슴을 울렸었다. liquified agony. 에라 모르겠다. 씻겨나가겠지, 라는 식의 제목.



* 도슨트 말로는, 5월 초부터 시작된 이번 전시를 위해 덕수궁 미술관 앞에 설치된 저 비누 조각상들이

불과 한달만에 저렇게 쩍쩍 갈라지고 허옇게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아마 전시가 끝나기 전에

녹아내려버릴지도 모르겠다 했다. 장마철이 다가오고, 유난히 비가 많을 거라는 이번 여름을 생각하면

정말 그럴 거 같다. 전시는 7월 4일까지, 관람료는 덕수궁 입장료 포함 5,000원. 성인 기준이다.





일요일 9시 반에 있는 시험, 감독관은 8시 반까지 도착해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아야 한다. 사실은 김밥

한줄로 나오는 아침을 먹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저번에 시험 감독할 때는 시간을 착각해 응시자들처럼

9시반까지만 가면 되는 걸로 생각해 버려서, 좀 곤란해졌었다.


시험장으로 쓰인 고등학교, 내가 담당한 교실에 마침 시계가 없어서, 각각 90분짜리 1교시, 2교시 시험시간내

살아있는 시계 역할을 맡아야 했다. 10분 지났습니다, 20분 지났습니다,...절반 남았습니다,...5분 남았습니다.

사실 다른 때 같으면 시간 공지도 막판에 20분, 10분 남았을 때나 해주고 더이상 답안지를 바꿔줄 수 없습니다,

정도만 이야기해주는데 오늘은 마침 시계를 차고 오지 않은 사람들이 요청을 해와 성실하게 시계 놀이를

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들고 갔던 '경쟁에 반대한다'라는 책을 읽다가-시험장에서 이런 제목의 책을 읽는단 것 자체가 좀

아이러니라고 느꼈지만-한문단 읽고 시계확인하고 두문단 읽고 시계확인하고, 그러면서 문득 1박2일에서였나

이승기가 벌칙 수행으로 커다란 시계를 들고 다니며 매시간 '세시~!', '네시~!' 큰 소리로 알려주는 장면이

떠올라 버렸다. 왠지 불끈불끈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면서, 30여명의 수험생이 머리를 싸매고 문제를

푸는 상황에서, '여얼~씨~!'라고 천연덕스럽고 용감무쌍하게 외쳐주는 상상에 혼자 킥킥대고, 혼자 당황했다.


어차피 방송으로 중요한 내용은 멘트가 나오니, 최대한 시험 시작 후에는 말을 줄이고 자그마한 소음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험장에서 감독관을 몇 차례 맡아봤지만 가능한 말을 줄이고, 시험치는데

신경이 쓰일 만한 요소, 걸리적댈만한 요소를 미리 차단해주는 게 관건인 거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괜히

감독관이라고 우쭐해서 내 경험입네, 떠들거나 어깨에 힘주며 이래라저래라 지시하거나 하고 싶진 않아서.


2교시까지 끝나고 시험지랑 답안지를 걷어서 나오려는데 나이 많으시던 아저씨 응시생 한 분이 고맙습니다,

이러셨다. 교정을 나서는데 우르르 쏟아진 응시생들의 신발 바닥에 붙은 노란빛깔 은행잎이 이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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