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 夜
黃景仁(淸)

텅 빈 집 밤 되니 더욱 썰렁하여

뜰에 내린 서리나 쓸어보려다가

서리는 쓸겠는데 달빛 쓸어내기 어려워

그대로 달빛과 어우러지게 남겨두었네.


달빛 밝고 공기차가운 겨울날만큼 술맛 나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조금만 숨을 내불어도

짙고 풍성하게 뱉어지는 입김 덕분인지 부자가 된 듯한 풍요로운 마음이 되는 데다가,

시크한 듯 하면서도 왠지 정겨운 달이 내려봐준다는 기분에 살짝 달뜨기도 하는 거다.


지금부터는 밤하늘 말고, 술자리에서 달이 뜨는 이야기.

손바닥만한 사이즈, 네모진 박스 두개를 배달받았다. 제법 고급스러워보이는 검정색 종이로

포장된 내용물은 터진 옆구리로 언뜻언뜻 비치긴 하되 껌껌해서 잘 안 보이고,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전면에 뜬 달 그림. 초승달에서부터 점점 배가 부르더니 보름달이 되는 그런 달.

'달 아래 벗삼아 완월장취하련다'라는 문구가 박혀있는 옆구리를 톡 열었더니 까맣게

생긴 술잔이 톡 튀어나온다. 완월장취라..달과 놀며 오래도록 취하겠다는 의미일 텐데,

참 멋스런 표현이지 싶다.

그런데 잔 모양이 살짝 이상하다. 보통 잔과 다르게 잔 내부가 슬쩍 경사가 져서는 불룩

튀어나온 느낌이랄까. 슬슬 미끄러져 내려가던 경사가 툭 꺽여서 잔 바닥까지 급전직하하는

그림인데, 이걸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이건 아마도 술을 덜 마시게 하려는 배려일까 싶더라는.

아무래도 그냥 속이 완전히 비어있는 술잔에 비해서 절반이나 들어가려나 싶다.

일단 막걸리를 가득 채웠다. 채우고 나니 여느 잔이나 다를 바 없지만 아무래도 포장지

앞면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달의 모습을 본 지라 새삼스럽다. 이건 보름달, 보름달 두 개가

두 개의 잔에서 떠오른 셈이다.

이런 식의 대작은 가끔 해보는 일, 마치 내 오른손과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술잔

두 개를 따라두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번갈아 마시는 거다. 오른손군이 술잔을 쥐어 슬쩍

잔을 부딪혀 건배를 하더니 조금 잔을 비웠다. 어라, 달이 조금 홀쭉해졌다.

아직 반달이라기엔 뭐하지만 보름달이라기에도 많이 부족해진, 종종 하늘에서 봤던 달.

오른손군의 선방에 뒤이어 왼손양도 조금 입술을 축였다. 역시 조금 이지러진 보름달,

조금 더 배가 불러야 이제 보름달이 되고 소원을 빌겠구나, 싶은 타이밍에 보이는 달이다.

오른손군은 좀더 과격하게 마시더니 반달이 되어버렸다. 오른쪽이 둥근 반달, 상현달.

마시다 보니 술이 아니라 달을 마시고 있는 느낌이랄까. 조금씩 술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검은 잔에 완연히 떠오르는 건 조금씩 홀쭉해지고 있는 달의 모습이다. 왼손양은 이제

그믐달만 남긴 상태, 오른손군은 술잔 위치가 바뀌어서 왼쪽이 둥근 하현달이 조금

이지러졌다.

두 잔 모두 비운 상태, 라지만 조금 술이 밑에 남아서는 스마일~ 하고 있다. 저렇게 살풋

흔적만 남은 달의 모습은 차라리 누군가의 웃는 입술이나 웃는 고리눈을 생각나게 한다.

까만 잔에 하얀 빛깔을 띄는 막걸리나 탁주 계열이 담겨 있는 것만으로도 꽤나 운치있는

그림이 나와서 술맛이 절로 난다지만, 까만 잔에 투명한 술이 담긴다고 해서 그 운치가

덜할 것 같지도 않다. 조금 은근하게 숨어있는 달의 모양을 그려보며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술먹는 재미가 한결 더 쏠쏠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이 잔을 들고 어디론가 나가서

술동무를 찾을 때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려는데, 선잠에 취한 듯 나른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창구 안에서

겸연쩍은 듯이 반색을 한다. 며칠전 눈이 오고 나서는 평일에 사람 구경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어쩐 일이냐며, "학생, 밥은 먹고 다니나" 했다. 경주시내를 돌고 오릉을 거쳐

남산 서북쪽의 포석정까지 걷느라 조금은 지쳐있었는데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금세 훈훈.


에이 그냥 슬쩍 들어갈 걸 그랬네요, 하며 입장권을 받아든 내가 슬쩍 눙치니까 아줌마는

웃으면서 그랬다. 조그마한 공간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으면 바로 잡혔을 거라.

사실 경주는 고등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으로 찍고찍고 돌아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이들과 놀고 장난치기 바빠서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나지만 워낙

교과서나 다른 곳에서 많이들 보이는 것들이라 대표적인 이미지들은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포석정 내에 이렇게 아지랑이처럼 꼬물꼬물 피어오른 소나무라거나, 다른 그림들이

더욱 신선한지도 모르겠다.

이게 포석정의 대표 이미지랄까, 몇 그루 나무가 장승처럼 버티고 선 공간 안에 구불구불한

수로같은 것이 한바퀴 원을 얼추 그리고 있는 형상.

포석정 입장권에도 조악한 화질로나마 나와있는 사진이 바로 그거다. 왠지 10여년전 내가

고2때 받았던 입장권도 이것과 똑같았던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입장권,

그 안에 그려진 포석정의 계절은 가을이다.

원래는 포석정을 둘러싼 형식적인 울타리 안을 넘어 들어가면 안 되었지만, 아무도 없는

텅빈 포석정에 나를 따라하다가 문화재를 파손시키거나 망가뜨리는 사람은 없겠지 싶어서

슬쩍.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서 봤더니 다소 멀찍이서 보던 것과는 달리 경사진 게 보인다.

수로 위쪽에서 잔에 술을 채워 찰박이는 물 위로 띄우면, 자연스레 아랫쪽으로 내려갈 듯.

그렇게 구불구불 미묘한 동감을 살리면서 술잔이 내려가다가 저 아래쯤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그 술잔을 받았을 사람들이 떠오른다. 재미없게 밋밋한 수로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물결치며 내려가도록 만들어진 수로가 슬쩍 돌아서 한 바퀴.


사실 옛날에는 이보다 훨씬 길었을 거라고 한다. '유상곡수연'이라는 이런 수로의 형태는

한중일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조성했던 형태지만 그 일부나마 남아있는 건 이 곳이 유일하단다.

비단 포석정이 없었어도, 이 곳의 숲이 신라인들이 이곳에서 노닐던 그때도 이렇게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서는 가지로 하늘을 가려주었다면 정말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았을 듯.

돌아나오면서 뭐랄까, 참 좋은 공간인데 포장이 엉망이란 느낌이 들었다. 최근 1박2일에서

경주 '스탬프찍기' 여행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관광지

앞에 선 안내문이나 동선 안내가 워낙 부실한 거다. 게다가 그 장소의 얼굴이랄 수도

있겠고 계속 그 공간의 기억을 남길 만한 기념품이랄 수도 있는 입장권이 이렇게 부실해서야.


한자가 어영부영 섞인 한글로만 설명이 있어 외국 관광객들에게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읽기에도 참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글로 적혀있을 뿐이다.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공간에 대해 필요한 정보가 다 들어갔는지도 의문이다. 경주 시내 문화재들을

시간순으로나 장소순으로 읽어내릴 통합이미지나 번호라도 있으면 훨씬 좋지 않을까.




집에 있는 조그마한 술병 중에 180ml 짜리 사케가 있다. 월계관, 게케이칸의 달콤하면서 담백한 청주.

맛이야 뭐, 가볍고 달달한 맛에 한잔한잔 하다 보면 한 병이 금세 비워진다는 점 정도 이야기함직하다.

이미 사케가 대중화된지는 오래지만 이런 병은 여전히 신기하다. 볼록하게 배가 튀어나온 병에,

하얀색 뚜껑이 얹혀있는게 뭐가 신기하냐면.

뚜껑이 바로 술잔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 신기하게도 이 잔 역시 대략 7잔 분량이 나온다. 마치 어릴 적

소주 한병이 왜 7잔정도의 분량으로 맞춰졌는지를 들으며 신기해 했던 것처럼 다시금 신기했었다.

부모님이 산행가실 때 한번 가져가셨던 적이 있는데, 아주 '대박'이었다고.



보름달을 보며 술 한잔. 소원을 뭘 빌지 생각 중이다.





[술잔#1] 조각만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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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한쪽 끝에 서면, 다른쪽 끝이 보일만큼 자그마한 섬에 가보고 싶다.
내가 가보았던 섬들은 모두 너무도 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김한길이 이야기했던가, 북극곰은 다른 곰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고. 평생 한번 만날지조차 기약없는 만남이므로. 그렇게, 조각만한 땅뙈기에서, 술잔과 오른손의 인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술잔#2] 그녀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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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마주섬에서 시작된다. 설레이며 눈을 마주치고, 술잔과 오른손은 서로가 품고 있는 표정과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과 상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채 두손 떨구고 어설픈 사랑.



[술잔#3] 목소리 좀 들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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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동하면 몸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이 간다.
입밖으로 소리내어 사랑을 말하는 순간 손가락은 술잔에 매료되고 말았다. 당신도 날 보고 있었나요..우선, 술잔 당신의 매끄럽고 후끈한 목소리를 좀 들려줄래요. 우리 목소리부터 익혀나가는 건 어떨지. 손길이 닿으면 갸냘프지만 분명한 술잔의 응답. 말꼬리를 땋기 시작했다.



[술잔#4] 살짝 접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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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잔은 위험하지 않다고, 냄새와 향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만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꿈이었던양 떠나버릴 것 같아..오른손은 술잔의 부피와 질감을 확인하기 시작하다. 이 세상에 있었구나, 조각만한 세상에서 병아리오줌만한 인연을 타고. 고마워서.



[술잔#5] 외전. 기어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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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른 유리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니미럴 절라 높네.



[술잔#6] 니 이야기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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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되고, 나도 니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하루가 하루를 지랄같이 소모시켜도 기꺼이 온몸으로 귀가 되어주는 술잔이 있었기에. 서로의 사용설명서를 꼼꼼이 읽어내리며, 조금씩 마카로니 치즈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몇번씩의 구역질과 거부감을 인내한 후에야.



[술잔#7] 어깨 빌려 사람人의 뜻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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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휩쓸려 가라앉지 않으려면 댄스댄스댄스. 끊임없이 똑딱이며 빛바래가는 세상 속에서 오른손의 이정표는 술잔. 생기와 의욕을 말려버린채 기어코 삶의 뒷켠으로 내리눌러버리겠다는 시간을 비웃으며 어깨도 걸어보고. 가벼운 스텝으로 하루하루 생을 더해갈 수 있다면. 하루치 삶의 의미를 아침마다 떠올릴 수 있다면.



[술잔#8] 손잡고 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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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다 힘들면 쉬었다 가기도 하고, 손잡고 가기도 하고.
지겨워서, 힘들어서, 살다가 지쳐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손내밀어 이끌어주기도 하는. 어차피 시작해 버린 인생, 최종 목표는 트루 러브라 외치는 술잔과 오른손. 그 치기어린 말과 행동은 한때..아름답다.



[술잔#9] 기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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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기. 허물어지듯 무너지더라도, 두팔가득 받아줄 술잔이 있다면 나중나중에 다시 일으켜세워볼 요량도 생기겠지. 세상이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 대신 하늘을 빤히 노려봐주는 노랑색눈깔의 술잔.



[술잔#10] 좌우명은 올인(a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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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지 못하겠음 뛰어든다. 이리저리 재봐야 답도 안보이고 머리만 아플터. 맷돌에 장렬히 뛰어든 콩처럼 곤죽이 된채 설설 밀려나올지라도, 올인이다. 눈에 보이고 말이 섞이고 심장이 따라간다면. 오른손과 술잔의 이빨과 이빨이 부딪쳐 불똥이 튄다해도, 좌우명은 올인.



[술잔#11] 완전한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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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길에 도착. 정점에 도달했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갈 길만 남은 건가. 혹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속으로..? 완급의 조절, 호흡의 조절. 산낙지마냥 술잔에 엉겨붙은 오른손은 그저 좋댄다. 일생동안 흔치않을 황홀한 충만감. 손을 위한 술잔. 술잔을 위한 손.



[술잔#12]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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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충실한 게 술잔이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오른손.
어디갔을까,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고 순식간에 말라붙은 술잔.



[술잔#13] 넌 왜..비어 버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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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비견될만한.
넌 왜 비어버렸니.
털썩, 절망한채 바닥에 무너져내리는 오른손.



[술잔#14] 술은 술이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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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만한 인연이 사그라들고, 잘록한 곡선과 짙은 향을 닮은 술잔을 다시금 어디선가 들어올리겠지만. 지나간 시간과 흘러간 이야기들은 사진첩에 봉인된 채 고이 '버려진다'. 찍히는 순간 죽어버리는 밴댕이같은 사진, 그리고 그속에 담긴 기억들처럼. 달그림자가 비치듯 그대의 마음에 잠시 비쳤던 것 뿐이니..슬퍼할 것도, 그리워할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어디선가 오른손의 이야기와 표정을 떠올려 준다면..

술은 눈코입으로 마시고 마음으로 마신다. 그리고 무엇보다...술과 술 사이, 그 비워진 잔 또한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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