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페 꼼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권 출간기념, 도정일 평론가의 강연.

'순교자'란 책,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 32살의 김은국이 쓴 소설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 그리고 종교적 위안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한 극한까지 뻗어가는 이야기였는데, 한국인 출신으로 최초로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작품이었달만큼 강력하다. (서평은 http://ytzsche.tistory.com/1453)

 

그런 책을 번역했던 역자 도정일, 문학평론가이자 시민운동가이기도 한 그가 '이 시대에 문학읽기는 왜 중요한가'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고, 난 끝내 손을 들어 질문도 하고 나름의 답이나 공감도 얻었고. (사실 답없는 질문에 정답없는 대답이었다지만)

 

 

내 질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Q1. 책의 역자로서 도정일 평론가는 도스토옙스키와 까뮈, 멀찍이는 욥에 이르는 실존주의 철학에 '순교자'라는 작품과 김은국 작가를 연관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 대위'와 '신 목사'라는 사람은 그런 실존적 질문 앞에 직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또다른 등장인물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위는 니체식으로 그런 실존적 질문을 극한까지 몰고 나가려 하지만, 신 목사는 그들 일반 대중들을 위해 끝까지 존재의 이유, 포장지를 씌워주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포인트나 문제의식이 신 목사에게 많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측면에서 앞서 언급한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의 포인트나 결이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Q2. 또 하나로는, 그렇게 '진실을 알아버린', 매트릭스를 비겨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린' 신목사나 이대위와는 달리 일반 대중과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신목사가 그들을 위해 진실을 가려주고 위로를 제공하려 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엘리티시즘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렸을 때 봤던 '백 년 동안의 고독',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랄까, 혹은 소개글이랄까.

 

게다가 연애감정을 단순히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만으로 묘사하는 단순한, 그래서 그만큼 거짓된 이야기들이 창궐한 세상에서

 

이렇게 정서적 혼란이 난무하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란 걸 짚어주는 것 자체로도 위로가 되는 글이다.

 

 

 

 

이별 통보하며 던진 말 "널 지독히 사랑해!" (프레시안, 2012-05-11)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연재를 시작하며

사랑에 빠진 젊은 당신에게 묻는다. 행복하세요?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청년이라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말씀 앞에서 청년은 기가 죽는다. 그리고 한탄한다. 실은 나 사랑에 빠진 죄로 피를 뚝뚝 흘리며 고통 받고 있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할꼬?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에 빠져 있는데, 이 혼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선남선녀가 첫눈에 반해서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연애담의 다가 아니듯이,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연애 심리의 다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종종 극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더욱 곤란하게도 그들은 혼란의 정체조차 모른다. 연애는 기묘한 인간 심리가 난투극을 벌이는 장이다.

훌륭한 소설들은 이런 미친 듯한 기묘한 심리들을 발견하고 묘사했다. 이 연재는 명작 소설에 나타난 기이한 연애 심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각 이야기의 서두에는 민, 경, 희, 연, 도 등 익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설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이다.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혹은 고통 받는 독자이다. 그들은 소설에서 비슷한 증상(?)을 발견하고 공감하거나 위로 받거나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그들의 실제 연애담을 먼저 이야기하고, 본문에서 그와 관련된 소설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또한 질문한다.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경증인가? 판타지인가? 유일한 구원인가? 이 질문 앞에서도 명작 소설들은 이미 멋진 답안들을 제출하였다. 연재를 진행하면서 이 답안들, 유식하게 말해서 '사랑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훔쳐보는 즐거움도 누릴 것이다.

사족

그런데 필자 양반, 왜 이런 글을 쓰세요?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본 게임 전에 하는 말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우선 연애 때문에 마음 아픈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당신의 기묘한 심정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명작 소설이 아픈 마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담은 '마음의 백과사전'임을 보이고 싶었다고, 아울러 소설을 깊이 읽는 한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이런 식의 소설 읽기를 통해서 점점 독자를 잃어가는 소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기적도 아주 가끔 꿈꾼다고만 이야기해 두겠다.

 


첫 번째 상담

민이 연인에게 결별을 고했다. 일방적으로. 사람들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민을 부러워했는데. 그녀의 연인은 보기 드물게 자상했다. 어디에 가든, 그는 그녀와 동행했다. 우습게도 그는 혼자 있는 그녀가 혹여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들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녀의 안부였고, 그녀는 사소한 걱정이나 부끄러운 험담을 그에게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였고, 그는 그녀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쏟아지는 질문에 그녀는 침묵으로만 응대했다. 그와 그녀의 이별 후유증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을 읽는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해했으므로 드디어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붉은 화인으로 남은 청춘의 한 때, 그녀가 빠져든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어리석음을 애도하면서 혹은 찬란함을 질투하면서.

그때, 난 천국에서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어. 천국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외줄 아래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야.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다리가 늘 후들거렸어. 끝장나게 행복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했단 말이지. 그 상태를 더 이상 지속할 힘이 없었어. 무엇보다 외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

사랑은 왜 그렇게 피곤한 걸까? 그리고 그 피곤한 사랑을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정열과 고독, 그 기이한 함수관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불안감은 침대 안에서가 아니고는 평화를 찾지 못하리라.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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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사랑할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말장난이 아니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체험적 진실이다. 이 소설의 레베카와 아마란타 역시 사랑 때문에 외롭다. 그들은 동시에 피에트로 크레스피를 사랑하지만, 레베카는 사랑을 차지하고 아마란타는 그러지 못한다. 정황이 다르기에 그녀들의 외로움의 색깔은 다르지만, 이는 사랑의 짝패인 고독의 두 가지 전형적 사례이다.

우선 사랑에 응답 받지 못한 아마란타의 외로움은 쉽게 납득된다. "변소를 닫아 잠그고 안에 들어앉아서 절망적인 정열의 고뇌를 쏟아버리려고 정열적인 편지를 써서는 그 편지들을 트렁크 깊이 감추"(81쪽)기를 반복하는 아마란타의 고독한 정열. 응답 받지 못한 정열은 고독을 부추기고 고독은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외사랑이 깊어질수록 저 홀로 타는 정열의 불길은 거세어진다. 응답을 받았으면 평범했을 정열은 종종 응답을 받지 못했기에 더욱 광포하게 날뛴다. 걷잡을 수 없게 된 정열 때문에 점점 더 사랑을 얻기 어려워지고, 더 고독해진다. 아마란타는 고독하기에 정열적이고, 정열적이어서 더욱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아마란타 못지않게 사랑을 얻은 레베카도 외로우니, 어쩌면 더욱 처절하게 고독하다. 레베카는 피에트로 크리스피의 편지를 매일 기다린다. 우편배달부는 2주에 한 번씩 온다. 그런데 실수로 다른 날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매일 오후 4시마다 배달부를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날 우편배달부가 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와야 할 날에 오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 레베카는 "절망에 미칠 것 같아서 레베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통과 분노로 흐느껴 울면서 흙을 닥치는 대로 손으로 퍼서 집어삼켰고, 매끈매끈한 지렁이를 막 씹어먹었으며, 달팽이 껍질이 입안에서 아삭아삭 바스러졌다. 레베카는 동이 틀 때까지 먹은 것들을 토해냈다. 열병에 걸린 듯 레베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79쪽)

광란에 빠진 레베카는 실연을 당했거나 외사랑에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이다. 피에트로는 극진하게 레베카를 사랑했다. 편지가 오지 않는 경우도 피에트로가 무성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우편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편지는 대개 정기적으로 도착했다.

이렇게 보면 레베카의 광적인 절망은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것이 된다. 드높은 인격과 향기로운 미덕을 갖추신 분들은 레베카를 맹목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맹목적인 탐욕이란 사랑이 필연적으로 거느리는 것, 사랑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사랑의 응답은 언제나 모자란다. 충만하다 못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사랑의 응답도 필경 결핍만을 부각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야차와도 같이, 사랑에 빠진 자는 악무한의 굶주림에 시달린다. 사랑에 빠진 자의 이런 허기를 마르케스는 '고독'이라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속뜻을 품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 레베카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사랑에 빠진 아우렐리아노뿐이었다.

열애 중인 연인은 고독이라는 인간의 천형을 사면 받는가?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열정의 노예가 된 사람은 연애 중에 오히려 더한 외로움을 느낀다. 아마란타와 마찬가지로 레베카의 사례에서도, 고독은 정열의 크기에 비례해서 깊어진다.

정열이 깊을수록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많아진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자연스럽게, 만족하기보다는 결핍을 느끼기 쉽다. 그러니 고독할 수밖에. 또한 그는 고독하기에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결핍을 느끼면 그것을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어지간해서는 체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맬망정 배고픔을 잊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열이 고독을 부르고 고독이 정열을 부르는 이 원환(圓環).

냉혈한인 그녀, 사실은 두려워서 사랑을 포기한 연약한 영혼

여자는 거리낌 없이 그를 만져댔고, 그는 그 여자의 손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쾌감보다는 두려움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38쪽)

상대의 마음은 대체로 나와 같지 않고, 마음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른바 '맺어지기' 전 결별의 요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사랑이 '맺어지기'란 구우일모(九牛一毛)나 다름없는 진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운 '맺어짐'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과연 기쁜가? 진실을 토로하라면 그때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 아마란타는 레베카와 피에트로의 결혼을 극성스럽게 방해하고 레베카를 독살할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레베카는 피에트로와 헤어진다. 아마란타가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레베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피에트로와 아마란타는 자주 만나서 조용한 사랑을 키워간다.

피에트로는 미쳐 날뛰는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따뜻하고 고요한 사랑에 도취하여 아마란타와 결혼하려고 결심한다.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쫓겨서라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따르자는 뜻"(125)에서. 그런데 청혼을 받은 아마란타의 대답은 어떠했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당신하고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앞으론 다시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요." (126쪽)

이제 피에트로는 흐느껴 울며 비굴하게 애원한다. 비 오는 밤이면 아마란타의 침실을 바라보며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목소리"(127쪽)로 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설득한다.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절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 석탄불에 손을 지진다. 평생 화상의 흔적 위에 시꺼먼 붕대를 감고 산다.

아마란타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외롭게 했고, 질투심에 불타게 했으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리고 여전히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피에트로의 청혼을 고집스럽게 거절했을까? 피에트로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마란타의 어머니 우르슬라는 이렇게 분석한다.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의 마지막 분석 과정에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여인이었음이 분명해져서, 우르슬라는 아마란타에 대해 동정을 느꼈고, 피에트로로 하여금 부당한 고통을 받게 만든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자신이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시 사건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마침내는 아마란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280쪽)

그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다고 한다. 냉정하다는 평판과 달리 누구보다도 마음이 여린 아마란타는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에 굴복한 가엾은 영혼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피에트로를 깊디깊게 사랑했으나, 사랑의 동반자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꼿꼿한 직립이 가능한 굳은 땅 위인가, 천길낭떠러지 옆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좁은 비탈길 위인가? 마음이 연약하고 깊은 이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깊은 사랑과 동시에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은 이렇게 되뇐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토록 모자란 나를. 그는 언젠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사랑은 변하게 마련이니 결국 나는 사랑을 잃게 될 것이다. 잃은 후의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나. 게다가 미쳐 날뛰는 정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열이 벼려 낸 내 안의 칼이 그를 찌르면 어쩌지.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많다.

사랑에 빠진 자가 모두 사랑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경우 그는 사랑의 성취 바로 앞에서 비겁하게 몸을 사리고 도망쳐 버린다. 사랑의 깊이와 두려움의 깊이는 비례하므로, 피에트로를 죽음으로 이끈 아마란타의 냉혹함은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아마란타는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사랑의 심연을 두려워했을까. 그랬을 수도.

어쩌면 두려움은 행복 자체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란타는 눈앞에 다다른 행복 앞에서, 단지 행복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오랫동안 꿈꿔 왔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어떤 이는 환희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행복이란 워낙 드문 것이기에, 사람은 그것을 만나면 낯설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모른다.

행복은 과거와 미래 속에서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과거에 행복했다고 다소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미래에 행복하기를 기대할 뿐이지, 현재 행복하다고는 거의 느끼지 않는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 2007년), 197~200쪽).

지금 이곳에서 행복은 항시 부재중이다. 없어야 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행복은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인데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이므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줄기차게 추구해온 욕망의 정점에 아무것도 없음을. 그 텅 빈 정점을 보는 순간 느낄 참혹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에, 꿈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에 도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꿈꾸는 대상이 허상이었음을 인정하기 두려워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마르케스를 만나면서도 되풀이 두려움을 느낀다. 여러 해에 걸쳐서 거듭 사랑을 고백하고 정성을 기울인 게리넬도에게 아마란타는 "자기 자신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면서, "죽는 그 날까지 혼자서 울면서 고독하게 평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하고는"(187쪽)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녀의 이런 처사가 그동안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사람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후 우르슬라는 피에트로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깊은 사랑과 두려움의 싸움에서 두려움이 사랑을 이긴 결과라고 이해한다. 사랑이 깊기에 사랑이 사랑을 죽인 것이다.

내적 분열, 사랑의 핵(核)

그는,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만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39쪽)

인간의 마음은 본디 분열적이다. 무엇을 하고 싶을 때 동시에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이러한 내적 분열을, 연애하는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게 체험한다. 사랑하면서도 밀어내고, 도망치면서도 사랑한다. 아마란타가 게리넬도를 대하는 모습은 내적 분열하는 연애 심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게리넬도에게서 과거 피에트로에게 느꼈던 정열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쓴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정열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을 만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게리넬도를 거절한 후에도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에게 전쟁에 대한 최근의 형세를 알려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으나 밖으로 나가서 그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겨우겨우 그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160쪽)

사랑의 빛깔은 형형색색이라, 격렬한 정열이 아니어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심정도 있고,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으면서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심정 또한 있다. 이런 분열적인 심정은 노년에도 그대로여서,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노인을 만나면서 추억으로 마음이 아파질 때면 공연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서 그를 괴롭힌다.

 

ⓒ프레시안(손문상)

/박수현 문학평론가

쁘띠 프랑스, Petite France 곳곳에서는 쁘띠 프린스, 어린 왕자의 자취를 찾을 수가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작가 중 하나인

생떽쥐베리 재단의 공식 라이센스를 갖고  '쁘띠 프린스'를 초청해 '쁘띠 프랑스'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 것.


어린 왕자는 평소 자신의 조그마한 별 구석구석을 잘 관리해주었다던가. 별을 꺠뜨릴 수 있는 바오밥나무 씨앗을 솎아내고,

화산이 막혀서 폭발하지 않도록 잘 청소도 해주고. 장미꽃의 진딧물을 잡아내고 유리케이스를 씌워주기도 하고.

생떽쥐베리가 어린 왕자에게 그려줬던 양 한마리. 병든 양, 염소같은 양, 뿔이 난 양 따위를 걸러내는 날카로운 선구안을

가진 어린 왕자가 맘에 들어했던 건 사실 상자 속에 들어있던 양이었는데. 그 상자는 여기에서 못 본 거 같다.

별들을 여행하던 어린 왕자가 만난 어른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고, 술에 취했으며, 쓸데없는 일을 벌여놓고는

스스로 만족하려 애쓰고 있거나 우울함에 빠져있곤 했다. 더이상 나와 전혀 관계없는 딴세상 이야기라 말할 수 없는 것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버는일? 밥먹는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건 정말 어려운거란다."


"안녕, 잘 있어" 어린왕자가 말했다.
"안녕, 잘가.... 참, 내 비밀을 말해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그건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사막을 아름답게 하는 건, 사막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어서에요..."
"맞아. 집이나 별이나 사막이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야."
"아저씨가 내 여우와 의견이 같아서 기뻐요."



"널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우선 넌 나와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있는 거야.
곁눈질로 널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은 오해의 씨앗이거든.
그러면서 날마다
너는 조금씩 더 내게 가까이 앉으면 돼."

"..."
"..."

"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가면 갈 수록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거야.
네 시가
되면 이미 나는 불안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난 행복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나는 해 지는 풍경이 좋아.
우리 해지는 구경하러 가..."
"그렇지만 기다려야 해."
"뭘 기다려?"
"해가 지길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이다.

"지금은 슬프겠지만
그 슬픔이 가시고 나면(슬픔은 가시는 거니까)
넌 언제까지나 내 동무로 있을거고,
나와 함께 웃고 싶어 질꺼야."

"사막은 아름다와.
사막이 아름다운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그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다 아저씨에게 웃고 있는 듯이 보일거야."

"누구나 다 친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잊는다면 나도 숫자 밖에는 흥미가 없는 어른들과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그렇게 되면 황금빛이 물결치는 밀밭을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밀밭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 테니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에요.
별이 아름다운 건 보이지 않는 꽃이 있기 때문이에요.
꽃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정성을 들인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네가 나를 기르고 길들이면 우린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돼.
넌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난 너에게 둘도없는 친구가 될테니까."

"누가 수천,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서
 하나밖에 없는 어떤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야."

자그마한 종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저 버섯같이 생긴 녀석이 '바오밥나무'를 표현하려 했단 건 나중에 알았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매우 간단한 거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너는 그것을 잊으면 안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는 거야.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불안 - 8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은행나무

문득 불안해질 때가 있다. 내가 뭔가 길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진 건 아닐까.

지금 살고 있는 게 제대로 사는 거 맞는 건가. 남들은 다들 잘 살고 있는 거 같은데 난 왜 아직도 이런 걸까. 왜 나만.

남들보다 뒤쳐지는 건 아닐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너무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건 아닐까. 뻔한 삶이 되는 건 아닌가.

흔히들 하는 말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혼란감에 젖어들면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일종의 발작과도 같다. 아무 문제없는 듯이 평온하게 혹은 무탈하게 지나던 일상에 '불안'이라는 돌멩이가 하나

던져지고 나면 그 파장은 삽시간에 전신을 훑고 오르내리며 점점 큰 울림을 일으킨다. 강변 테크노마트를 흔들었다던

공진현상의 생체적 발현인지도 모른다. 앙상하게 헐벗은 겨울나무가 문득 불어온 칼바람을 온몸으로 버티며 그저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듯, 그렇게 불안감과 뒤이은 자학, 자괴감, 패닉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불안의 대부분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온다. 알랭 드 보통은 그걸 '지위'에 대한 불안이라 말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그렇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피고, 남들이 어떤 가치를 좇아 달리는지 살피고, 남들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

살피면서, 그들을 따라 어깨 나란히 달리며 같은 것을 좇고 심지어 보다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너무도 당연해서 다들

의식조차 않고 '평범한', '주류적인' 길을 따라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다가, 문득 불안해지는 거다.


남들보다 더 갖고 더 사랑/존중받고 싶다, 라는 마음.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질리 없는 그 만족감,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가 눈앞에 나타나는 무한한 쳇바퀴 위를 달리는 것 자체도 지치는 일인데, 자기보다 앞서는 남들이 보이는 것은

더더욱 힘빠지고 좌절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이러다가 쳇바퀴 위에서 아예 탈락하고 낙오자, 패배자, 루저 낙인이

찍힌 채 게임 오버되는 건 아닐까 싶어 가슴이 타들어간다. 더구나 실체도 불분명한 '능력'으로 열세우는 현대사회에선.


특히나 한국에서는 더더욱 심해지는 거 같다. 중고등학교부터 성적으로 줄세워지고, 직장에 들어가면 연봉으로

줄세워지며, 이후엔 결혼이니 사는 곳이니 집 따위로 다시 줄세워지는 끝없는 비교의 연속. 천박하고 단순한 잣대일 수도

있겠지만, 알랭 드 보통이 말하듯,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창궐한 이 시대에는 남들보다 앞서고 성공하는 건

도덕적으로도 올바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거다. 그 결과 대부분의 경우 불안에 불안이 더해진다.


알랭 드 보통이라고 뾰족한 답을 갖고 있진 않다. 다만 그 불안감을 만들어내는 음습하고 악의적인 기반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는 성공과 실패, 명예와 수치의 기준선을 바꾸고 개념을 흔들어보려 한다. 그런 작업들은

사실 철학과 예술,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뿌리깊게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것들이기도 하다. 주류적인 가치관과

위계감각에 기대지 않고, 나름의 가치와 철학을 갖고 중심을 세워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이미 걸었던 길을 따르는 과정.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이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능력이 있으면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마련이라는 '능력주의' 아닐까. 한국의 경우 IMF 더욱 노골적으로 재물과 부유함만을 쫓아 달리는

물신주의는 굉장히 단순하고 명료한 기준 하나를 제시한다. '스펙'이라 이야기되는, 연봉과 가격으로 말해지는 화폐숫자들.

그렇지만 다들 체감하듯 그 '능력'이란 건 대개의 경우 우연적이고 필연적이다. 운, 그리고 환경과 조건의 영향이다.


여기가 자기최면적인 자기계발서가 파고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이 멈춘 지점이기도 하다. 별 생각없이도

남들만 따라가면 그뿐인 편하고 자연스러운 길, 물론 그길을 가다보면 만성적으로 불만에 휩싸이고 주기적인 공황상태에

빠질 지언정 그로부터 벗어나 곁길을 트고,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러난 행복을 찾는 길이란 건

말이야 쉽지, 참 난감하고 막막한 일이다. 종교적인 메시지나 자기최면을 거는 진통제 같은 메시지 말고, 뭐 없을까.


글쎄. 책장을 넘기다 드문드문 맘에 와닿는 구절들은 있었다.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던 건,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것들이 어느 시점엔가 나 혼자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불안감, 조바심에 대한 것들이었단 사실. 알고 보니 나 혼자만

갖고 있던 불안과 열패감이 아니라 모두에게 잠재해 있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와 같이 그 쳇바퀴에서 내려서서 다른 길과 가치를 모색할 준비가 되었거나 모색하고 있다는 것.


어쨌거나, 불안과 싸우는 건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불안을 지워내고 걷어낼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불안감의 정도를 통제하고 그에 잠식되지 않을 만큼 스스로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는 게 관건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와중에 필요한 건, 주어진 잣대와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의 기준과 가치를 발견하고 세워내려는

노력,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함께 일구어갈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계속해서 교류하는 것 아닐까.



* 아래는 책에서 발췌한 몇몇 구절들.


"세상의 선은 역사적으로 거창하지 않은 행동들 덕분에 확장되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반은 드러나지 않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덕이다."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즉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힘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자꾸 보게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임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들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그들이 냉혹하게 유혹의 책략을 썼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 만큼 허영심이 컸다는 사실에도 화가 난다...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들, 우리를 기리는 기념비나 행렬이 없다 한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돈과 실용적인 직업이 영혼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또는 스탕달의 말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감각"을 향유하는 능력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보헤미아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월든'의 소로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그래서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살았다."



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 (반양장) - 10점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모명숙 옮김/문학동네
#1. 카사노바의 귀향.


카사노바의 귀향. 제목부터 흥미롭다. 모든 남성의 로망이랄 수 있는 '카사노바', 그가

로망일 수 있는 이유는 끝내 어느 사랑하는 이의 품속에서 죽어가겠다며 호기롭게 외칠 듯한

그의 그치지 않는 모험, 정확하게는 사랑을 찾아 정복하고 다음 상대를 찾는 모험 때문인 거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귀향이라니. 어딘가 있을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니 이건 배신이다.


말하자면 뭐가 있을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내달려 무조건 일로직진하며

새롭고, 자극적이고, 신선한 사랑을 찾아 나서야 이름값을 한다고 여겨지는 카사노바가 어느순간

어라, 그런데 고향에 뭔가 있었지, 하며 고개를 돌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보는 순간이다. 후회하고,

추억하고, 되돌이키고, 상실감에 젖고, 센티멘탈해지는 그런 순간. 그런 '카사노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직선이라 멋졌던 그의 궤적이 어느 순간 꺾이고 늘어져 애초의

지점을 돌아보게 되는 건 차라리 발기불능의 문학적 은유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더이상 그의

마력적이던 육체가, 정신이 갓 사랑에 눈뜬 시골처녀의 마음 하나 흔들지 못하게 된 엄연하고

잔혹한 '시간'의 세례를 받는 순간이 있었으리란 점을 떠올리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이 지독히도 시니컬하고 잔인한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더이상

과거의 영광과 자랑스러운 '정복'의 순간들을 재현할 수 없는 늙은 카사노바, 그의 자유정신은

꺽인지 오래고 그의 젊음이 사라지며 매력 역시 사라지고 말았지만 삶은 이어진다. 어떻게 살 텐가.

과거의 금송아지 풍월이나 읊으며 살기에는 억울하고, 뒷방 늙은이로 순순히 물러나기에는

여전히 피가 끓어오르는 상황.


어쩌면 그는 최악의 수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또다른 젊음의 매력에 편승해서, 그를 협박하고

그녀를 마구잡이로 차지하고 마는 그런 순간이란 건, 여태까지의 그가 걸었던 나름의 정합적인

궤적과 평판에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씌우는 셈인지도 모른다. '카사노바'라는 이름이 갖는

나름의 신화와 명예를 스스로 남김없이 더럽히고 용서할 수 없는 지경으로 퇴락시킴으로써,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 이름을 이젠 스스로 매장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카사노바'로 불렸던 사람이 뒤집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맞닥뜨리게 될 좌절감과

배신감,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결과로 빚어지게 되는 비참함과 자괴감, 자기파괴로 치닫는

부정적인 흐름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는 건 더이상 우뚝 솟은 직선의 지향을 갖지

못한 구부러진 남성의 질시와 자기 혐오. 삶이 우스꽝스러워지고 말았다.



#2. 꿈의 노벨레.


이 작품은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의 원작이 되었다고 하며, 한나절 꿈을 통해 단조롭고

평온한 일상에 얼마나 크고 근본적인 균열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숱한 문학적, 영화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작품은 굉장히

짧고 등장인물의 동선과 행동 역시 굉장히 압축적으로 보인다.


마치 한 순간의 꿈처럼 일상에 파열구를 내고 만 가면무도회, 그곳에서 만난 '그녀'의 뒤를

캐는 과정에서 남자는 줄곧 전날밤 아내가 고백했던 꿈 이야기를 곱씹는다. 아내가 꿈꿨다던

한순간의 도발적인 유혹, 그와의 평온한 일상을 뒤엎어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려 했다는

고백은 그로 하여금 무언가 자신도 '백업'해둘 만한 공간을 찾게 하는 건 아닐까.


그녀가 아니어도, 그녀와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의 일상이 아니어도, 자신은 또다른 위로를

찾을 수 있으며 혹은 더 나아가 그곳에야말로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찾고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 환상. 대부분의 경우 그런 환상은 지금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믿는 쐐기가 흔들거릴수록 더욱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거 같아서 하는 얘기다.


상대가 흔들리면, 나도 흔들린다. 아무리 서로의 믿음이 깊고 사랑이 단단하다고 해도,

일상을 가로지르는 그대와 나의 두 축이 부르르 진동하는 순간 비열하고 약삭빠른 이성은

어느새 저만치 고개를 처박고 새로운 '환상'을 찾아 위로를 구한다. 그런 한 순간의 꿈,

동양의 꿈 이야기가 돌고 돌아 현실의 안온함을 지켜낸다면, 이 소설 '꿈의 노벨레'는

돌고 돌아 현실의 그런 Fragile함을 드러낸다.





단편소설은 차라리 시와 같다, 라고 한 옮긴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작가는 자신의

단편소설에 놓인 단어, 문장, 문단들을 어느 하나 허투루 놓지 않은 채 자그맣지만 더없이 날카롭고

위험한 덫을 하나 엮어놓는다고 상상할지 모른다. 글을 읽던 사람들을 조금씩 홀리게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까지 유인한 뒤에, 작정한 순간 휙, 하고 독자의 다리를 잡아채는 쾌감을 좇는 거다.


독자가 단편소설을 읽으며 바라는 것 역시 바로 그 정반대의 쾌감, 뭔가 마조히즘적인 쾌감일지 모른다.

어디에 덫이 숨어있을지 더듬어보고 예측해 보는 쾌감, 아니면 그 덫이 얼마나 잘 위장되어 있고

예기치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덮칠지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쾌감. 그 덫은 꼭 생각지 못한 반전일 필요는

없고, 분절되어 있는 의미와 단어들이 어느순간 단단히 연결되어 있거나 정렬해 있는 걸 뒤늦게

깨닫는 종류의 것이어도 좋겠다.


사실 그래서 단편은 대개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지도 모른다. 호흡이 유장하지도 않고 스토리가 

거대하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외려 뼈대만 튼튼히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사람들은 

단편소설의 몇 장 되지도 않는 페이지를 쉽게 넘기는 거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복잡하게 전개될 여지도

없고 중층적으로 꼬이기도 쉽지 않은 고작 몇 장의 이야기니까 말하자면 '맵'은 뻔한 상황, 작가들은

이야기를 Zipping하면서 좀더 함축하고 응집하려 들지만 독자는 대개 결말에 쉽게 와닿아 '덫'을

찾아내고 흔들어보인다. 겨우 이거야, 하고 실망하며.


그런 게 내가 늘 단편의 숲을 거닐며 혼자 해보는 상상. 사냥꾼이 만들어낸 조그마한 사냥터의 출구를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 조그마한 메추리 같은 새가 되어, 이왕이면 멋진 덫에 더없이 멋지게

걸려넘어가 주겠어, 하는 다짐을 해보는 거다. 몇 개 등장하지 않는 소재와 대사, 단어들을 요리조리

뒤집어 보며 맛보고 확인하는 훌륭한 독자가 되어 차근차근, 이왕이면 멋지게 잡아채이겠다는 다짐이다.

그런 점에서, 쑤퉁이 지은 '다리 위 미친 여자'라는 단편집에 실린 열네 개의 사냥터 중 여섯 개는 정말

굉장히 좋았고, 두 개는 조금 약했으며, 나머지는 괜찮았다.


내가 좋았던 단편을 나열해 보자면, '다리 위 미친 여자', '좀도둑', '술자리', '신녀봉', '대기압력',

'집으로 가는 5월' 정도인 듯. 다들 제각기 생김과 쾌감이 다른, 그리고 중국의 현대사가 새겨둔 상흔을

깊게 간직한 덫을 숨기고 있던 소설들. 한국에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중국에서만 가능한 소설을

맛보고 싶다면 한번 시도해보아도 좋을 듯.

다리 위 미친 여자 - 8점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문학동네
읽고 나면 그 소설의 한 장면이 유난히 남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읽고 나서 소설에서 쓰인 소재나

묘사의 대상이 된 행동이나 장면을 재연하고 싶어지는 작품이 있다. 예컨대 체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을 읽고 나서 나도 어디 한번 다시 체스에 재미붙여 볼까, 하는 식인 거다.


스토리는 그렇다. 아무런 영특함을 갖추지 못한 시골뜨기가 유독 체스에는 재능을 보여 급기야

세계 챔피언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대양 위의 한 유람선에서-맞닥뜨린

상대는 나치 치하에서 수개월간 독방 고문을 겪으며 체스를 독학했던 지식인인 거다. 활자 중독에

빠져 있다 해도 좋을 지식인이 수개월간 아무것도 못 읽고 고작 체스 교본 한 권만을 갖고 있었으니

그는 그 한 권을 달달 외우고 머릿속에 체스판을 구현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경지.

그들의 경기는 역시나 일반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서 펼쳐지지만, 끝내 무너지는 건 

실제 체스판과 말이 없으면 수를 생각하지도 못하는 혐오스런 챔피언이 아니라 지식인이란 반전까지.


결이 굉장히 많은 건 사실이다. 체스 게임을 둘러싸고 등장인물 간에 벌이는 심리적 갈등과

등장 인물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머리싸움이 긴박하게 묘사되는 것은 기본이고, '무지하고

교활한 챔피언 vs 생각많고 교양있는 지식인'이란 구도는 나치와 유럽 지식인이라는 역사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듯 보인다. '독방 고문 vs 체스'에서 인류의 무지와 지적 탐구의 대립 구도도

선연하고, 느닷없이 치닫는 결말의 파국이 보이는 냉소와 배신감은 이차 세계대전 말기를 못 견디고

자살한 작가 자신의 비극적인 생의 결말과 맞물려 더욱 극대화되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런 결들을

하나하나 포개보면 초점이 은근슬쩍 하나로 맞춰진다. 8*8의 체스판에 구현된 인간의 정신.


여느 소설과 같이 작품 속에 등장인물이 존재하고 등장인물간의 사건과 그들 사이의 대화도

존재하지만, 이 작품 '체스 이야기'의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스'라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인간의 사고 흐름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처럼 보인다. 나치 치하에서 인간이 겪었던

극한의 고문이나 반이성적인 처사들 모두 그렇게 체스에 몰입해 있는 상황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기

위한 조건인 것 같다. 체스 이외의 다른 점에서는 모조리 무지하고 천박한, 그 속내를 작가가 굳이

드러내지 않는 챔피언 역시 그렇게 체스에 불붙은 인간을 보여주기 위한 불쏘시개 같달까. 심지어

그 지식인에 대한 상세한 묘사조차 그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체스' 플레이어로서 그를 이해하고

설득력있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함은 아닐지.


체스의 공간 속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사고하고 승리를 기획할 뿐인 순수한 인간 이성이 어떻게

작용하고 반응하는지, 그 과정과 깊이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밖의 것들이 전부 곁가지라거나 부수적인 해석은 아니겠지만, 정말이지 그의 작품에서 읽혀지는

체스 플레이어의 심리와 체스 게임 자체의 묘사는 집요하고 섬세하다. 당장이라도 체스판을 펼치고

말을 들먹이고 싶도록. 그렇게 체스판 위를 놀며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과정을 조금 멀찍이

떨어져 주시하고 뜯어보고 싶도록. 그리고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체스' 판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사고와 반응이 다른 인간세계의 일들, 나치의 비인간성, 전쟁의 광기, 무지와 독선의

잔인함..같은 것들마저 모두 포괄하고 마는 거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체스라는 게임이 원래 그런 거 같다.

"(체스는) 절대적으로 우연의 독재에서 벗어나 있고 그 승리의 영광은 오로지 정신에, 아니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정신적 재능에 있었다...체스는 태곳적인 것이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것이요, 그 구도가 메커니즘적이면서도 판타지를 통해서만 작동하며, 기하학적으로 일정 공간에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조합에서는 무제한적이고...그 존재 자체가 어떤 책이나 작품보다 영속적이며,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속하는 유일한 게임이면서도, 지루함을 죽이고 감각들을 예리하게 하며 영혼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신이 이 땅에 가져온 게임"

이렇게까지 격찬을 받는 게임, 그리고 그 게임플레이어의 내밀한 속내를 샅샅이 핥아서 보여주는

소설의 흡인력있는 묘사가 더해졌으니 당장 체스판을 꺼낸다고 해도 이상할 거 하나 없겠다.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반양장)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문학동네
허수아비춤 - 10점
조정래 지음/문학의문학

#0.

올해도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후보로 대두되었다가 끝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나'

버렸다며 언론에서 아쉬워하는 투의 기사를 많이 봤다. 한편 페루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은 페루의

광부들이 애송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꽤나 크다며, 우리도 노벨문학상을 탔으면 국내는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게 되었을 거라는 식의 기사도 있었다. 으응? 뭔가 이상하다. 노벨문학상을 타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널리 사랑받는 좋은 작품이라 노벨문학상을 타는 거 아닌가.


너무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도 여느 다른 상들처럼 세속의 일들에서 자유로운 채 그야말로

'순수한 판단'의 결과만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수상을 둘러싸고 정치적 고려나 호감도나 금전적인 로비까지도

왔다갔다 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 너무 음험한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노벨문학상을 타고 나면 실제로

꽤나 그럴듯한 후광을 덧붙이게 되는 셈이고 그건 곧바로 책의 판매부수와 직결되어 '사랑'받게 될 거다.

(어쩌면 그때쯤엔 나도 고은 시인의 '만인보'라거나 다른 시들을 비로소 찾아서 읽게 될지도.)


#1.

전세계의 작품들을 두고 그해의 가장 걸출한 작품을 선정하는 노벨문학상 이외에, 작품에 덕지덕지 붙여줄

수 있는 조금은 가볍지만 효과는 못지않은 '후광'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뭔가 소란스런 이슈를 만들어내는

노이즈 마케팅이 후광을 만들기 위한 비교적 최신 유행의 '광원'이라면, 워낙 익숙해져 버려서 새삼 이야기하기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강력한 광원은 역시 광고일 거다. 약간의 변종으로는 리뷰기사나 인터뷰기사 따위의 형태를

빙자해 책을 홍보하는 광고성 기사들이 있을 거고.


'삼성을 생각하다'라는 책이 광고시장에서 무식하게 밀쳐지면서 도리어 예기치 못한 광고없는 광고효과,

후광을 얻었던 사실 이외에는 딱히 그로부터 예외라 할 만한 사례를 들기가 어려운 거 같다. 대부분은, 광고가

많이 되고 노출이 많이 되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책들이다. 어줍잖은 고만고만한 소설들, 변주를

거듭하는 자기계발서 나부랭이들, 여행블로그보다 못하기 십상인 허술한 여행서적들..정말이지 그 책을

만들겠다며 벌목된 나무들에 미안할 지경인 책들이 범람하고 있으니 광고의 효력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2.

조정래는 어떤가. 그의 전작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어땠던가. 피식민 시기, 한국전쟁기, 산업화의 시기를

예민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소설화했던 그의 작품들은 늘 어김없이 누군가로부터 '위험물'의 딱지가 붙었고

소설의 형태를 빌어 '좌경화', 혹은 '의식화'를 꾀한다는 일부의 비난마저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딱히

광고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시대착오적인 '금서' 목록에 올라있다더라 식의 노이즈 마케팅에 엮이기도 하면서

그 책들은 그나마도 꾸준히 팔려나갔다고 알고 있다.


허수아비춤은 어떤가, 비로소 묻는다. 조정래 정도의 작가가 꽤나 오랜만에 써낸 소설인데 너무 조용해서 하는

말이다. 그가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드디어 2010년 현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셈이니 그 의미도 심상하진

않을 테니 하는 말이다. 그의 신작 발표회에 불편한 얼굴로 왔다갔다는 찌라시 언론의 문화부 기자들이 작정한 듯

침묵을 지키거나 딴지를 걸어 그의 소설에 대해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해버리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너무

과잉반응인 걸까. 의도적인 무시 속에 그의 소설이 조용히 묻혀버리고 마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들은 점점 '지금 여기'의 '살아있는 권력'이 날뛰는 시대로 조여들어온 건 아닐까 싶다.

조금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비판할 수 있는 친일파 문제에서부터 그는 조금씩 난이도가 높은 세력,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세력들로 초점을 옮겨왔고, 그런 비판정신은 곧 한국 현대사의 핵심 모순들을 관통하며 오늘날에

와닿는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참 쉽게 읽힌다. 이미 너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인 거다. 기업을 자기 개인의

커다란 지갑처럼 생각하는 기업의 총수, 정관계에 고루 뿌려지는 떡밥 혹은 보험료의 용의주도한 전달 방법,

기업군을 가능한 세금을 물지 않고 통째로 세습하려는 철저한 사전 준비, 결국, 민주화되었다는 시대에 여전히

북조선스럽고 중세적인 '왕'을 모시는 기업을 고수하려 사회 시스템 곳곳에 돈지랄을 하는 그들의 이야기.


소설을 쓰기 참 쉬웠겠다, 고 읽던 중간에 생각했었다. 이건 뭐, 소재에서 뭔가 극적이고 흥미로울 만한 걸 더 더할

것도 없으니. 건물 깊숙히 감춰져 회장실 바닥에 깔린 커다란 금고, 골프가방과 사과박스에 차곡히 쟁여진 돈다발,

어느새 대기업 앞에서 몽창 썩어버린 검찰과 국세청 등 사정기관들, 집요한 노조파괴공작과 김일성 일가에 버금가는

부자세습의 욕망, 그저 요 몇 년간, 누구 말마따나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그 이래의 몇 년간의 사건들을 슬쩍

일별하기만 하면 그냥 그대로가 드라마틱하고 숨가쁜 소설 하나가 될 거 같은 거다.


그치만 끝장을 넘길 때쯤, 돌이켜 생각하니 조정래가 더하려 한 건, 그리고 실제로 이 소설이 쓰여지는 의미를

다하기 위해 더해져야 할 건 자극이 아니라 각성이었다. 누가 모르나. 지금 재벌들이 세상에 두려울 거 없이 나대며

전횡을 부리고 있어서 상식이 벌떡 뒤집어져 버렸다는 거. 말도 안 되고 어이도 없는 이야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뉴스에서 흘러나오며 건전하게 사는 사람들만 병신 만들고 있다는 거. 울컥울컥, 뉴스 헤드라인만 보고도 혈압이

솟을만큼의 자극은 넘쳐 나는 세상인 거다. 그래서, 혹여 왜 더 소설적으로 매만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냐고

작가를 추궁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겠다. 이미 현실속에서 그들의 전횡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고.


그의 책은, 그런 점에서 차라리 오늘의 기록이다. 책의 띠지에 둘려있듯 '경제민주화의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청사진이 요구되는 오늘의 문제적 상황을 응집해 보여주고 있다. 선정적이고 더러는 의도적인

곁가지치기와 물흐리기의 이야기들은 말고, 그들의 언론과 그들의 권력이 찌끄려대는 '광고'는 말고, 무엇을

대면하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 보여주는 있는 거 같다. 그게 현대사 100년을 숨가쁘게 달려온 그의 소설에서 

정면으로 대결했던 시대의 모순들이 켜켜이 누적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끝판왕.


#3.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처럼, 이 책도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야 할 정당한 관심과

추천사들을 받지 못한 채 적대적인 시선과 의도적인 무시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건 도리어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겨눈 칼 끝이 제대로 그들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 [삼성을 생각한다] 망각되길 거부하는 범죄자의 최후고백.



P.S. 끝판왕인 줄 알고 해치우고 나면 쓰러진 괴물의 비대한 몸뚱이 속에서 뭔가 새롭게 진화한, 더 쎈 녀석이 톡

튀어나와 다음 판으로 도망가곤 하는 게 온갖 게임들의 법칙이다. 끝판왕인 줄 알았지만 늘 속아 넘어간 채

다음 판에서의 승리를 기약하는, 마치 치토스의 '언젠간 먹고 말 거야'라는 멘트처럼, '지금 여기'의 끝판왕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일 거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 10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청미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면..사랑이 싹트고 자라고 피어나고 시드는..그 과정들에 대한

단락구분이 절묘하다. 예컨대 이상화..진정성..정신과 육체..사랑이냐 자유주의냐..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행복에 대한 두려움..이런 식이다. 이를테면 관계의 절정에 달했달 부분인, '행복에 대한 두려움' 챕터 이후에

오는 것들은, 수축..낭만적 테러리즘..선악을 넘어서..예수 콤플렉스..사랑의 교훈..운운 이런 이별을 예감하고

준비하고 맞이하고 되새기는 과정들에 대한 압축적인 소제목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스물다섯 쯤에 쓴 처녀작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그의 감성과 능력에 질투를 느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그는 '이별하는 법'을 말하지 않았다. 이별을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하는게 좋은 이별이고

어떤 게 나쁜 이별인지 말하지 않았다. 애초 그가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이별 따위 없는 거고, 이뿌게

돌아서는 것 따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별은 언제나 당하는 것일 뿐..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별은 상대로부터 오는 건지도, 혹은 자신이 만들어낸 마음속의 환영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와, 누구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배우지 않은 것들, 배울 수 없는 것들은 도무지

막막할 뿐이다. 다만...그에게 힌트를 얻는다. 그는 그 기승전결의 루트를 돌이키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주의와
 
나약함을 가감없이 대면하고, 묻는다. 묻어버리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저 매순간..진심을 담아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더할 수 있는 팁일까.



(2008. 12. 28)

유달리 강하지는 않아도 제 식솔에 대한 책임은 아는 사람, 아버지..라는 게 소설의 메시지인 듯 하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지나치게 호들갑스런 묘사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눈물을 뽑아내겠다는 의욕이 과해보이는

스토리도 아니었다.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몇몇 표현이 생생하고 신선한 게 눈에 띄긴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말투는

담백하고 건조하기까지 하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이 소설을 '아버지'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가져가고 싶어서였을까.

대개 아버지의 이미지란 건 과묵하고,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하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그런 거니까.


그래서일 거다. 난 이 소설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되지도 않았으며, 뭔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 라는 커다란 심적 동요가 오지도 않았다. 그저 조그마한 소득이라면, '아버지'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보군, 정도 감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랄까. 감정의 기복을 격하게 탄주하지 않고 덤덤하게 가는 건

좋은데, 그러다 보니까 감정이입도 별로 안 되고 밋밋하고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어허, 엄숙하고도 거룩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밋밋하고 지루하다고 해서야 되겠는고, 하고 누군가

꾸지람할지 몰라도, 솔직히 이 소설에서 화자 엄세웅의 병든 형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줌의

설득력조차 사라질 뻔 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을 하던 가족들 먹여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불도저처럼

살아가는 아버지, 주변의 평판은 내팽개친 채 편집적으로 소지품정리에 매달린다는 아버지, 죽고 난 후의 일을

추스리려 발신번호만 몇차례씩 남기면서도 살아있을 때의 일은 돌보지 않는 아버지.


굳이 난 그런 아버지에 반댈세, 라고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그런 아버지도 있을 수 있을 테고, 당신의 삶이니까.

또 그게 아버지의 '사랑방식'이라면야 더 할 말 없다. 그치만 난 그들의 '책임'이란 게 단순히 식구들 밥 안 굶기는 걸로

끝난다고 생각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것,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아버지'들의 사랑 표현방식이나, 이 책이나, 똑같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 같다. 표현을 안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려니 '밥먹여 살리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함께 한 스토리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공감도 어렵다. 차라리 IMF 직후엔가 나왔던, 주절주절대는 신파조의 '아버지'가 나았다고 생각한다.




어줍잖은 소설론 - 소설은 분재같은 거 아닐까.

소설을 보면 애초 영감처럼 떠올랐을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무리 참신하고 흡인력 강하다고 해도, 그 줄기에서부터

뻗어나가는 가지들이 영 실하지 못하거나 볼품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늘 아쉬웠다. 마치 하나의 잘 다듬어진

분재처럼-그 어거지로 비틀고 구속하는 작업에 대한 반발감은 논외로 하고-개성있지만 기품있게 자리한 줄기와

그와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고른 각도로 뻗어나간 가지들의 비례와 배치에서 기인하는 미감이랄까.  그런 소설이

정말 만나기 힘든 잘 쓴 소설이 아닐까, 뭐 내가 요즘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다.


최대한 자연을 흉내낸 '자연스런' 분재처럼, 최대한 사회를 흉내낸 '사회스러운' 소설. 사회스럽단 말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쉽게 말하기 힘들지만 그건 확실하다. 자연을 인간의 손으로 빚는다는 거 자체가 다소 어불성설에

가까운 최고난이도의 작업이듯, 사회를 고작 몇 페이지의 글로 구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사실.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신문 사회면에 실릴만하다는, 그 좁은 의미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 세상을 말한다.


세상을 타워 속에 집어넣다.

674층 높이에 인구 50만이 살고 있는 빈스토크(beanstalk), 그 유례없는 초고층 건물 자체가 대외적으로 주권을 승인받은

하나의 국가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들은 뻗어나간다. 이야..이런 참신한 발상은 대체 어떻게 잡아낸 걸까. 건물이 나라의

영토가 되고, 그 건물의 입주자가 국민, 방문객에 대한 절차가 출입국 통관절차로 바뀌게 된단 얘기다. 건물 경비원들은

이제 외적에 대해 '영토' 빈스토크를 방어하는 '합법적 국가폭력' 군대가 되는 거고, 아마 건물주는 빈스토크의 국왕이

되는 셈인가, 음..일종의 도시국가라고 볼 수도 있겠으니 시장이란 게 맞겠군.


아마 이런 식으로 배명훈의 머릿속에서 '국가'를 '타워'로 대치하는 작업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작가의 상상력이

어떻게 발현되었을지, 어떻게 가지를 뻗고 세세한 디테일을 장악하기 시작했을지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게다가, 초고층 빌딩을 그 영토로 가진 국가라는 건 무척이나 특이하다. 어느 나라 영토가 시루떡처럼 층층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던가 말이다. 그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엄청나게 취약하기도 할 거다. 이미 우리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먼 옛날 바벨탑이 신의 불같은 분노로 무너져내렸던 것처럼. 


'빈스토크' 절개면의 에피소드들

이 소설 타워의 미덕이랄까, 구성상의 장점은 '연작'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리하게도 배명훈 그가 창조해낸

'빈스토크'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재기발랄하고도 함축력짙은 사건들을 묘사하기엔, 긴 호흡의 소설이 아니라 단편

에피소드들이 연이어지는 연작소설의 형태가 맞춤하다는 것을 알았던 게다. 그렇게 나열된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빈스토크라는 고층빌딩 내 구현된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고 재치있게 버혀내어 준다. 어쩔 수 없이 작금의 시대와

견줘보게 되는 건 작가가 작정하고 블랙유머를 날린 걸까, 아니면 내 편향 때문일까.


좀더 자세한 스토리..라기 보다는 스토리 각기에 대한 이미지 스케치가 궁금하다면 열어 보기~*




바벨탑은 이미 지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한국 사회를 되짚어 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생식능력 없는 남자가 되었다가
 
심지어 여자가 되고 말 욕을 부르는 자, "곧 성행위를 할 사람"들이나 "생식기같은 자"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굳이 빈스토크를 지어내어 그 안의 인간군상을 보여준 작가의 의도는, 어쩌면 그 안에서 평행우주처럼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낯설게 하고,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바벨탑'을 어쩔 건지

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나라 전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는 동네만큼은 바벨탑이 아니"라고.



타워 - 10점
배명훈 지음/오멜라스(웅진)




휴대폰도 되고 카메라도 된다는 '컨버전스', 혹은 엠피쓰리도 되고 USB도 된다는 '양수겸장'의 아이디어 상품은

종종 성공적이지 못하다. 어느 한 쪽의 기능이나마 제대로 살아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다른 한 쪽의 기능이

물귀신처럼 우월한 쪽의 기능을 물고 늘어져 두 가지 기능 모두 어정쩡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읽기에 따라 연애소설이 될 수도, 미스터리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강조하는 건,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는

쉽게 와닿기는 힘들 듯 하다. 우선 미스터리를 구성하기 위해 치밀히 고안된 복선들과 상징들이 일본 '내수용'의

것들이어서 내 눈에는 별로 걸리지 않았다. 다만 A면, B면이라 이름붙은 두 챕터가 알고 보면 동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기록이라는 흐릿한 의심은 뒤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었고,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나름 성공적으로 그간의 긴장을 날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참신하고 재치있는 구성의 묘미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애소설의 측면에서는. 글쎄. 얼핏 생각하면 그 소설에서 제일 눈에 띄는 아포리즘은 이건가 싶다.

인간에겐, 이 세상에는 절대란 건 없다고. 그걸 알게 되면 비로소 어른이라고 해도 좋다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 사랑할 수 있겠다는 느낌, 헤어진 뒤에도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될 상대는 앞으로 평생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런 건 모두 어린 시절의 무지한 신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절대'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연애가 바로 일종의 통과의례,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러브라고.


그런 거구나, 하면서 제길, 하면서 끄덕끄덕 하려다가 왠지 반감이 인다. 내가 품은, 그녀가 품은 애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당사자들도 알지 못하고 확신도 없는 게 '어른들의 사랑'이라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믿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얄팍하고 찰나같은 진실이란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고작 그정도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라느니, '(성숙한) 어른의 사랑'이라느니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의 사랑'이라느니.

자존심을 다칠까 마음을 다 못주는 연약함, 상대로부터 거부당한다는 걸 견딜 수 없는 두려움, 그런 걸 왠지 다

컸다는 느낌을 강변하는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로 뭉개버리려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그녀,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라는 그녀의 한 마디.

그녀는 마치 열혈 기독교도처럼, 자신이 이미 알아버렸다고 생각한 그 황량하고 불가역한 '진실'이 남자에게도

유효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막상 그녀로 인해 황량해져버린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상처나 공허함을 타인에게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다려야 다시 예전처럼 신선하고

건강한 핑크빛 하트로 회복되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게 계속해서 상처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면...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 마음으로 사랑을 다시 해야 한다면, 그게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른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남자들은 보통 군대를 다녀오면서 '엄마'라는 호칭을 떼어버리곤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갈아탄다고 한다.

그렇지만 첫휴가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부모님께 제대로 '필승!'하고 경례 한번 한 적 없는 내 유별난 군대

혐오증 탓인지, 턱도 없이 군대를 빌어 뭔가 더 철든 척 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기는 싫었던 터라

내게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 엄마가 어느날 날 쿡쿡 찌르며 한번 읽어보라 했던 책.

누가 바라보는 건지, '엄마'도 아니고 '신'도 아닌 거 같은데, 뜬금없지만 집요하게 쓰이는 '너'라는 지칭에 다소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또 '엄마'란 존재가 또다시 자식들에게 헌신하고 남편에게 평생 봉사하고 모든 것을

다 챙기고 끊임없이 사랑을 퍼올리는 근원으로 이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다소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찔끔이게 되는 건, 그 '엄마'에게서 스스로의 엄마 모습을 찾아내기 때문일 거다.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늘 뭔가 약속이 있다며 주중엔 맨날 놀다가 늦게서야 집에 들어와서 피곤타고 짜증내고,

들어가 잔다고 뻥치고는 시덥잖은 컴터나 하고 앉아선 밤늦게 자기 일쑤고, 아침엔 혼자 못 일어나서 맨날

'오분만오분만~' 웅얼대는 게 일이고, '애미애비도 몰라볼 만큼' 술퍼마시곤 동네 놀이터에서 뻗어자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 그때마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다는 새삼스런 반성.


조금은 더 엄마한테 덜 틱틱거리고 덜 투덜거릴 수 있게 날 잡아 주겠지만, 또 다시 당신이 예전에 불리던 이름과

예전에 가졌던 꿈들에 대해 살짝 무뎌져 버리면 금세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책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동안이라도.

'엄마를 부탁해'라는 건,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게 그 피에타.

엄마를 부탁해 - 6점
신경숙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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