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10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부키


수많은, 그렇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뿐인, 자기계발서 나부랭이들.

왜 이렇게 자기계발서니, 에세이니, 심리서적 따위가 많아진 걸까. 어느 순간 '멘토'를 자처한 사람들의 도덕교과서는

어떻고. 서점에 가서 자기계발서류의 도서가 빼곡한 공간에 가거나, 그런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굳이 섭렵하고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답답함과 일종의 혐오감이 스물거리곤 한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다.


"암은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이었다." - 고환암 생존자인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

"부정적인 인간들은 역겹다!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긍정적인 사람들의 기운을 빨아먹는다. 그들은 훌륭한 회사, 팀, 관계의 에너지와 생명을 빨아먹는다...그런 사람들을 피하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 해도 당신을 고갈시키는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버려라. 당신은 그런 사람들 없이 더 잘 살 수 있다."

(* 보라색 구절들은 책에서 인용. 딱히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됨)


누군가 누군가에게 작정하고 가르치는 말투로 내리는 '교시'는 대개 뻔하다. 긍정적 사고, 긍정적 태도가 성공을 부른다!

긍정적인 생각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깁니다, 라고 말하는 책들 말이다. '좋은 생각'류의

야릇한 '군대 정훈도서'같은 책이나 '시크릿'같은 책들은 제목만 바뀌고 저자만 바뀐 채 같은 메시지를 반복한다.


'긍정의 배신'이 보여주는 긍정적 사고의 허위성.

'긍정의 배신'은 이런 쓰레기들을 수십수백권 읽는 것보다 나은 하나의 성찰을 던진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메시지는 눈앞에 닥친 엄연한 위기와 곤란함을 오로지 자신의 마음의 문제로만 치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자신 이외엔

오로지 '자신의 성장, 발전,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외부세계일 뿐이라는 자폐적이고 허위적인 태도를 낳고, 위기에 처한다.

(당연하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없이 무조건 답은 마음가짐의 문제, 한가지라고 하니까.)


"긍정적 사고에서 말하는 우주에 다른 사람들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예를 들어 똑같은 목걸이를 원한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면 선거나 축구 경기에서 우리와는 반대 결과를 희망한다면? '시크릿'에는 디즈니월드에 놀러갔다가 기구를 타기 위해 너무 오래 기다리는 바람에 실망한 콜린이라는 열 살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시크릿' 영화를 보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콜린이 '시크릿'에서 얻은 힘 탓에 뒤로 밀려나 기다리게 된 아이들은? 원하는 대로 여자에게 끌어당겨진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 역시 그녀와의 만남을 원했을까? 아니면 그녀의 환상 속에서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

"긍정적 사고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은 당신의 보살핌을 받거나 당신에게 달갑잖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보살펴 주고, 칭찬하고, 긍정해 주기 위한 존재다...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차단하고, 그 결과 심각한 감정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진정한 드라마로부터 물러선다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놓여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아무리 태도를 개조해도 '민간인 사상자 수가 늘고 있습니다.'라거나 '기근이 확산되어..'로 시작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좋은 소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부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뉴스를 보지 말라는 것, 그러니까 환경을 바꾸라는 얘기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저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이런 무서운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찬성과 지지, 좋은 뉴스, 미소 짓는 사람들로만 조심스럽게 구성해둔 자신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 뿐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자신의 마음도 몸도, 심지어 온 세계가 자신에게 복종할 거라는 엉성한 환타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구라'일 뿐이다. 그 구라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신의 세계를 만들어낸 중세의 종교적 사고겠지만, 지금

'긍정적 사고'를 설파하는 저간의 흐름들은 이미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선 수준에서 사람들의 뇌를 딱딱하게 만들고 있다.


알면서 속아주는 '구라'의 효용(?)

물론 '구라' 나름의 효용은 있을 수 있다. 애초 이 책, '긍정의 배신'을 쓴 작가가 겪었듯 암이라거나 실직같은, 당장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난 안 될 거야, 라는 패배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조금이라도 밝은 면을 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의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병원의, 사회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건 절대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형을 면제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린, 죽어가는 사람의 낙관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제로 암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자기들 용어로 '이점 발견'이라고 하는, 암에 긍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방식으로 기울었다."

"그 도그마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감정과 병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유방암 환자들에게 뭔가 할 일을 부여한다.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 기분을 관찰하면서 세포 차원의 전투를 돕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한다...동시에 그런 도그마는 암 연구 및 치료 산업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외과 의사나 종양학 의사 이외에 행동과학자, 치료사, 동기 유발 카운슬러, 훈계를 늘어놓는 자기계발서 저자들도 참여할 길이 열렸다."

"유방암을 선물로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실업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긍정적이 되면 구직 기간에 기분을 더 좋게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더 빠르고 행복하게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들일지 모른다. 다들 알고 있지만 애써 눈돌려 밝게 보려고 하는 와중에 굳이 찬물을 끼얹는 건 무슨 놀부 심보냐고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력으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일들에 대응하고 버텨내기 위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도전에 잘 대응하면 '더 큰 성취, 발전, 성숙' 따위가 수반될 거라는 믿음. 다만, 그 이면이 문제라 그렇다.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기 위해 억압되는 감정과 정당한 분노는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끝내 실패하는 경우에는 어떡해야 하는가. 나아가서는, 개인적 차원의 긍정적인 사고 말고도

예컨대 발암물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거나 정리해고 실시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구조적 해결책이 옳은 경우도 있지 않을까.


다시 묻는다. 가난, 실업, 비만은 개인의 마음의 문제인가.

그렇게 낙관론과 긍정적 사고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왔다. 병을 이겨내고 취직을 하고자 긍정적인 마음, 밝은 생각만을 줄곧 가지려 노력하고, 가난을 이겨내고자 '치즈는

누가 옮겼는지' 주저앉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치즈를 찾아 바삐 헤매게 된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이제 그건 중요치 않다.


"암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은 감정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끔찍한 비용을 강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긍정적 사고는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료 종사자나 환자의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제는 성공을 이끄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고용주나 긍정적 사고를 믿는 동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의미심장한 실패로 이어진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권위자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떨쳐 버리라고 강조하면서 또 하나의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항상 미소를 띠고, 쾌활하게 행동하고, 흐름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배척될 각오를 하라."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암이 퍼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애초에 암이 생긴 것도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고 한다."

"작가로 변신한 한 생존자는 유방암이라는 선물을 계시적인 힘의 발현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암이 준 선물'이라는 책에서 '암은 진정한 삶으로 가는 차표다. 암은 진정한 뜻에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으로 가는 여권이다.'라고 썼다...이 모든 긍정적 사고는 유방암을 통과의례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렇게 불만과 분노, 현실에 대한 성찰같은 걸 도외시한 결과는 자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야말로 사방에서 드러났다.

긍정적인 사고, 밝은 사고의 마법을 믿는 사람들의 눈빛은 대개 광신도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턱없이 순진한 기대와 희망을

부지런히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더욱 코너로 몰린다. 무조건 믿고 위로받을 것이 절실해질 만큼. 비합리의 세계다.


외부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적인 경고와 신호들을 무시한 채 긍정적 사고만 따르다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세계금융위기가

책에서는 큰 예시로 꼽혔다. 나더러 예를 하나 꼽으라면, MB 정부의 숱한 정책적 실패 중 하나를 꼽겠다. 4대강 사업은 어떨까.

회의적인 목소리, 불평과 비판 여론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의 낙관론 속에서 미친 듯 내달렸던 4대강은 파국을 맞고 있다.


인민의 아편, '긍정敎' 혹은 '정신승리법'을 권하는 사회.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않거나 못한 채 무조건 긍정하자는 절대적 메시지는 당연히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험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처음에 말했듯 갈수록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쓰레기같은 책들을 볼 때

느낀 답답함과 혐오감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정신승리법'을 점점 더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했다.


왜 그렇게 된 걸까. 왜 서점엔 갈수록 자기계발서니 동기유발 코치서적이니 따위가 기승을 부리는 걸까. 사람들이 '긍정적'이

되려 한다고 해서, 꼭 합리적인 의심이나 성찰, 회의적인 태도 따위를 버리기로 작정했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책들이 잘 팔려나간다는 건 하나의 징후다. 거대한 무기력감, 절박함, 패배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반증 같은 것.


이 책이 아쉬운 건 그 지점이다. '긍정'의 힘을 전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예견하지 못한 경제위기나 삶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시기는 아닐지, 그렇게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난관에 봉착해 하릴없이 '정신승리법' 따위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거라면. 그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답은 있긴 할까.


"물질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태도를 바로잡고, 감정의 반응을 수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자기를 향상시키는 다른 방법, 예컨대 교육을 통해 어려운 신기술을 습득한다거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회 변혁에 나서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까? 하지만 긍정적 사고에서는 모든 도전이 내면적인 것이며 의지를 통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국민적 자존심까지 걸고서 삼수 끝에 획득해낸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 직후의 뜨거운 열기는

한여름 무더위와 함께 한풀 가신 듯 하고, 이제 동계올림픽 개최로 발생할 득실에 대한 냉정하고 차분한 손익계산과

함께 '승자의 저주'를 피하고 가능한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자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점이다.


'New Horizons'라는 모토를 앞세운 평창의 비전을 앞장서서 구현하며 진두지휘할 사람, 최문순 강원도지사를

만났다. 애초부터 그가 기획한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이제 강원도의 수장으로 앞장서 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그가

동계올림픽을 둘러싼 이러한 기대와 우려의 교차 속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성공적인 동계올림픽

개최를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제한적인 시간과 조건하에서나마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에

대해서 처음부터 반대했고 유치 이후에도 걱정만 맘속 한가득인 본인으로서는 나름 궁금했던, 걱정됐던 몇 가지 지점들에

대해서 질문하고, 질문의 형식을 빌려 우려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대답을 듣고 우려가 좀

사라지고 개최해야 되겠다는 설복이 되었냐고? 답은, 인터뷰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각자의 마음 속에 있지 않을까.


인터뷰는 평창의 한 음식점에서 진행되었으며,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이 진행될 메인스타디움이

위치한 알펜시아 리조트를 둘러보고 메인스타디움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기념 콘서트'를 함께 관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파워블로거얼라이언스'에 소속된 블로거 중 한명으로 인터뷰에 참석하게 되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 MBC사장, 한국방송협회 회장, 민주당 국회의원, 민주당 유비쿼터스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2011년 4월 이래 강원도지사로 선출되기에 이르렀으니 뻣뻣할 만도 하건만, 그는 남들보다 먼저 물병을 잡아

물을 따랐고 막걸리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무겁거나 위엄부리는 몸가짐이 아니라 그냥 친근하고 부담없는

윗집 아저씨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게 '감자'란 별명을 멋쩍게 소개하던 문순C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에 대한 첫인상은 빗나가기 쉬운 법, 아무리 이렇게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인간적이고 호의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중요한 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품고 있는 컨텐츠다. 게다가 개인 최문순이 아니라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개최를 위한 도지사이자 '공인' 최문순을 만나야 하는 자리다. 그렇다. '공인'이란 건 이럴 때나

적당한 단어다. 공인에 대한 공적인 인터뷰. 먼저 궁금했던 건 평창 동계올림픽을 어떤 식으로 치뤄낼지에 대한 각오였다.


그는 도지사직을 수행한 후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동계올림픽 유치를 꼽았다. 강원도의 수익원 대부분은 관광에서

발생하는데, 동계올림픽 개최를 통해 내외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유인하여 열악한 도의 재정과 인프라를 확충하고

싶다고 했다. 154만에 불과한 강원도 인구의 국민소득은 만오천불에 지나지 않을 만큼 낙후되어 있는 강원도의

인프라와 재정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겠다는 다짐이다. 인천과 강릉 간 고속화철도를 개통하고 용산과

춘천간 2층 철도를 운행하는 등 철도, 도로 등 기반시설을 확충하기로 했으며, 다른 관광상품들도 많이 개발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당연히 '비용' 문제와, 그렇게 개발된 관광상품들의 질적, 문화적 수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는 순서다. 그는 '동계올림픽의

저주'란 단어를 사용하며 본인이 적자 올림픽에 대한 우려를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냈고, 가능한 기존 인프라와 경기장을

재활용해서 적자가 나지 않도록 할 것이라 답했다. 또한 문화가 바탕이 된 관광상품을 만들어내야 실제로 관광산업이

발전하는 것이라며, 중국, 대만, 홍콩 등 눈 구경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눈꽃 체험 관광이라거나 DMZ 안보관광을

상품화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눈꽃'의 경우, 작년 상해엑스포 때에 기업연합관에서 인공으로 눈을 뿌리는

이벤트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큰 호응을 얻어내기도 했던 터라 어느 정도 검증된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지만, 안보관광은

요새 같이 냉각된 남북관계를 중앙정부 차원에서 해결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겠다 싶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한 또다른 포인트는 환경 문제다. 가리왕산에 대한 환경평가가 졸속이라느니, 대규모 토목공사와

인프라 건설로 환경에 커다란 타격이 갈 거라는 우려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는 강원도의 관광경쟁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주저없이 '환경'을 꼽았다. 강원도처럼 울창한 숲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으며, 산과 바다를 모두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란 굉장히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원도 내 지역마다

다양한 옥수수맛이라거나 고유한 산지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제맛이 나지 않는 황태 같은 특산품에 대해서 줄줄 읊는데

정말 강원도에 대한 애정이 있지 않고서는 이런 디테일한 부분을 챙길 수 있을까 싶어 조금 감탄했다.

그가 강원도지사에 출마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최문순'이란 사람에 대해 물어보면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말안해도 강원도민이 먼저 알 거라고. 그는 연임에 대해서는 이미 욕심이 없다며

어느 인터뷰에선가 밝힌 바도 있거니와, 2018년에 열릴 평창 동계올림픽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아 이름값올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단 게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도지사의 공관을 최초로 일반에 개방했다는 데에서는

문득 대통령 별장 청남대를 최초로 일반에 돌려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버랩되기도 하던 최문순 도지사.

그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어떻게 준비할지, 어떤 문제를 인식하고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서 좀더 깊이있게

묻고 싶었지만 시간과 장소가 여의치 않았고, 그래도 날림이나마 대강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진정 온국민의 축제로 성공리에 치뤄지려면, 뭔가 큰 건 하나 했다고 무턱대고 기뻐하고는

잊어버릴 게 아니라, 계속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검사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굳이 포스팅의 제목을 '숙제 검사'라며 도발적으로 달아본 이유기도 하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주무대가 될 알펜시아 리조트의 이곳저곳, 유럽의 어느 분위기있는 리조트를 옮겨놓은 듯한

이국적이고 고급스런 외양이 눈에 확 띈다. 2018년, 지금부터 7년 후. 이 곳에서 치러지는 동계올림픽은 어떠한

모습일까, 최문순 도지사와 함께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관심이 필요한 거다.

지치지도 않고 미끄럼틀을 내려오는 아이들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함께 즐기려는 아이들이

전부 모여들어선 벗어던진 신발이 땅바닥을 덮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길 소망해본다.




 

경쟁에 반대한다 - 10점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산눈

제목부터 도발적인 책이다. "경쟁에 반대한다"

경쟁에 반대한다고? 시장 논리와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의 신화가 경제 영역을 벗어나 교육, 정치,

문화 전 분야로 뻗어나가는 이런 시기에, 예컨대 '불공정한 경쟁'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 그 자체에

반대한단 제목이다. 이런 책은 둘 중 하나 아닐까,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낚아보려는' 책이거나

혹은 작심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보겠다는 결기 어린 책이거나. 둘 중 어떤 걸까, 이왕이면 후자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처음 집어들었다.


부제는 더욱 웃긴다.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누구는 낭비하고 싶어서 하나? 그리고 나라고 지기만 한 경주는 아니었단 말이다, 라고 저쪽에서 루저 1이

울컥 핏대세워 이야기한다. 이번엔 졌지만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또다른 루저 2가 자신없이 중얼거린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두걸음 전진을 위한 한걸음 후퇴'라고

해병대 팔각모자쓴 저쪽 루저 3은 강단진 표정으로 이를 악문다. 1%의 인재가 나머지 사람들을 먹여살려

준다는 이야기는 이런 식의 경쟁, 줄세우고 비교하고 99%를 '비인재', 루저로 모는 무한경쟁 무한찬양의

극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싫어도 경쟁 속으로 뛰어들고,

혹은 더 큰 과실을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있다. 치열한 몸값경쟁을 통해 낙찰,

낙찰가 88만원인 거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배웠네 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여태 인류의 발전 과정을

보면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갈등, 적자생존의 경쟁 상황 속에서 이런 '빛나는 문명'을 꽃피운 거랜다. 한국

사회로 스코프를 좁혀보아도 국내 기업간의 이기기 위한 경주, 뼈를 깍는 경쟁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진단평가니 뭐니 시험을 보고 경쟁을 붙여야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올라가고, 그래야 우리 지자체의 경쟁력-이라고 쓰고 명문대 합격률이라 읽는다-도 올라가고

국가 경쟁력도 올라가고 나아가 인류 전체의 복지에도 공헌할 거라는 투다.


인류의 놀이문화를 봐도, 어쩌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일 거라는 지레짐작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미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스포츠와 놀이 문화조차 '인격 형성과 성숙에 도움이 된다며 경쟁 일편향으로

기울어져 왔으니, 지금의 축구나 야구 같은 현대 스포츠가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욱 폭력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어쨌든 경쟁적 스포츠로 인간 본성에 내재한

전투적 본능을 달랜다는 해석도 있는 거다. 스포츠맨십 따위 치장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건 굳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고 승리를 통해 쾌감을 만끽하려는 욕구다. 승패 따위 가리지 않는 게임은 솔직히 지루하지

않은가, 라고 물어보기도 우스울 만큼 재미있으려면 당연히 경쟁적이어야 한다고 모두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티비에 만연한 온갖 버라이어티에서 보이는 경쟁 구도들, 갈수록 선연해지고 말초적으로 변해가는

경쟁들이 그 단적인 사례들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거다. 경쟁을 통해 더욱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 경쟁을 통해 삶이 윤택해지고

의미가 생긴다는 믿음, 심지어는 경쟁이 '인간 본성' 그자체에서 비롯한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오해거나 혹은 악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게 이 책의 골자다.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자존감 부족이 바로 경쟁사회의 원인이자 결과,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진단. 실은 협력을 통해 더욱 재미있을 수 있고 생산적일 수 있으며, 개인의 자존감 역시 더욱 고양될

수 있는데, 충분히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도 이미 나와 있음에도 워낙 근본적인 문제라 꼼짝도

안 한다는 거다.


생각보다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간 책이고 책 자체가 하나의 주장을 위한 탄탄한 논문이라 해도 좋을 만큼

논리 정연하고 논거가 풍부하다. 교육 심리학자인 저자는 기존의 학문적 필드에서 '정설'이라 일반화되어

버린 설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하고 있어서 상당 부분 '팩트' 싸움, 유의미한 해석을 도출하는 실험의 인용

여부 및 신뢰도 싸움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총 10장으로 구성된 챕터 중 무려 아홉 챕터나 할애해서

집요하게 보여주려는 것, "승리와 성공은 다르다"라는 명제 아래 지금의 "경쟁"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키워드, "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문제제기는 정말 너무나도 무겁다.


사실 이미 경쟁을 조장하는 구조가 문제냐, 경쟁적인 마인드에 절어버린 사람이 문제냐, 하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무의미하고 무익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키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말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경쟁시스템에서 '키'라는 요소로 패배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한편 '키'라는 요소조차 타인과의 경쟁구도 속에서 생각하는 멘탈리티를 이미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키'라는 신체적/천부적 조건조차

이 도박장이나 주식시장같은-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잃는다는 점에서-경쟁시장의 칩으로 훌륭히 쓰이고

있는 거고, 또 칩으로 이미 유통되고 있으니 사람들은 '키'를 둘러싼 경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


그렇게 보면 참 공고하다. 아무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쟁하는 동물이 아니며, 경쟁 말고 협력을 통해

보다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떠들어봐야, 마치 맑스주의를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그래, 니말은 다 알겠는데, 참 논리정연하고 그럴 듯하고 멋져보이는데, 그래서 어쩌라구. 그런 차갑고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 때문에 책을 읽어내리다가 덮어버리기를 몇 번. 단순히 경쟁 말고 협력에 의한

문화, 경제, 사회가 가능하겠구나 정도 고개 몇 번 주억거리고 말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뭔가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기업 구조, 경제 시스템, 학업 시스템 따위 거대한 것들 말고 당장

경쟁에 길들어버린 '내 입맛'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저자는 치사하게 자기

전문분야인 '교육'에 대해서만 몇 마디 아이디어를 던져주고 말았다.


그냥, 계속 생각해 볼 만한 책이고 어쩌면 좀 확장해서 읽어보아야 할 책일지도 몰라서, 정리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정리해 버릴 책이 아닌 거다. 계속 책상 위, 머릿속에서 ing로 남아있어야

할 책, 남아있어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의 자-타인이 되었건

그들이 정해둔 기준이 되었건-를 빌어 스스로를 재어 보며 위축되거나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도록 좀더 애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직 시즌이라 알게 모르게 또 마음속의 자를 가동해보는 자그마한

모터 소리가 윙윙 들리는 거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어디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어디쯤, 이런 식의 등수

놀이를 피하려면 다소간 '도 닦는 마음'이 필요한 거다. 스포츠에 비기자면,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려는

축구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기록을 갱신하려는 역도나 높이뛰기쯤에 임하는 마음이랄까.
 

책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던 대학교 2학년 때의 기억 하나. 학과 신입생들을 맞이하는 새내기준비위원회

회장을 맡아서는 오리엔테이션에 뭐하고 놀지, 뒷풀이에선 뭐하고 놀지, 새터가서는 또 뭐하고 놀지

나름 열심히 고민고민했었다. 뭐 결과물이야 통속적이고 보잘것 없었지만, 만약 내가 '경쟁'과 '협력'을

감별해낼 만큼의 미각을 갖고 있었다면 좀더 신선하고 즐거운 놀이들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함께 즐겁고, 서로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이름과 쉽게 매칭시킬 수 있게 만드는 게임들.

누구보다 앞서고, 누굴 제치고 이기려고 바둥바둥대느라 잔뜩 지치고 상처받았을 녀석들하고 굳이

또 그런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던 건데.


안경을 언제부터 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때 선생님이 안경낀 내게 늘 안경이 잘

어울린다며 박사님박사님 하고 불렀던 기억이 안경에 얽힌 첫 기억이다. 아마도 1학년 여름쯤부터

안경을 끼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안경과 함께 20년도 훌쩍 넘게 살아온 셈이다. 7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갔으니 에효,

정말 굉장히 오래 끼고 살았다. 이쯤 되면 불편한 줄도 모르고 거의 몸의 일부라고 하는 게 맞을 텐데,

물론 맞지만, 불편함은 여전하다.


이를테면 요새같이 추운 날씨에 갑자기 후끈한 실내로 들어서서 안경에 성에가 확 끼게 된다거나, 미용실에

가서 대체 아주머니가 어케 머리를 깍고 있는 건지 뵈는 건 없고 손길은 따사로와 곤히 잠들어버리고는 머리가
 
엉망이 된다거나, 안경의 도수가 높다 보니 렌즈따라 얼굴 윤곽이 일그러져 보인다거나 눈이 더욱 작아

보인다거나, 한번 삐뚤어진 안경테를 아무리 바로잡으려 해도 뭔가 이전보다 2% 부족한 느낌에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거나, 고글이나 물안경을 안경 위에 낄 수는 없는데다가 요즘처럼 고글형의 선그라스가

유행하는 때 도수가 안 들어가는 그런 것들은 낄 수 없다는, 그런 따위들.


왠지 불쑥 오늘은 기필코 내가 찢어지던 렌즈가 찢어지던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동했다. 무슨 행사 때 무료로

얻어두었던 소프트렌즈가 한벌 있었고, 몇 번 깨작깨작 시도하다가 속눈썹과 눈꺼풀의 굳건한 방어막 앞에서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던 터였다. 그다지 풍성하지도, 길지도 않은 속눈썹이 무슨 거미손도 아니고, 렌즈가

들어갈라 치면 완전 금성철벽이었다. (뭐 이나이 먹도록 여전히 겁많고 두려움 많아 그런지도 모른다, 인정..

그치만 혹시 렌즈끼다가 눈알을 손톱으로 긁으면 어떡하냐고, 아님 렌즈가 눈알뒤로 돌아가버린다거나. 혹은

아예 렌즈가 눈알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리면, 빼낸다고 호스 넣고 기구넣고 하다가 눈알마저 터져버리면.;; )


근 한 시간. 눈이 씨뻘개지고, 위아래로 잔뜩 벌린 눈가 위아래 두덩에서도 열감이 느껴질 즈음. 파닥파닥대며

발버둥치는 속눈썹과 눈꺼풀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는가 싶자, 한순간 손끝의 렌즈가 쑥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멍하니 손 끝만 바라보며 이게 지금 렌즈가 바닥에 떨어져버린 걸까 눈속에 들어간 걸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왼쪽과 오른쪽의 세상이 각기 다르단 걸 퍼뜩 깨닫고 말았다. 오...세상이 이렇게 밝고 맑았구나.


아마 내 시니컬함을 키운 건 팔할이 안경껴야 뭐가 보이는 저질 시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쪽 눈을 마저

업그레이드시키고 세상을 보니, 비록 딱 도수가 맞는 렌즈는 아니었으되 뭔가 뻥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안경 따위를 코끝에 걸치지 않고도 세상이 보이다니. 정말 편하다. 눈알 따위 터지지도 않을 거 같고, 렌즈는

든든하게 눈동자 위에 버티고 있을 거란 안심도 된다. 그러고 보니 렌즈는 그간 안경이 가려왔던 내 갈색

눈동자의 마력을 마구마구 발산시켜주지 않을까...이러고 있다.


이제 안경과의 타협이 조금 필요하지 싶다. 아예 안 끼자니 너무 얼굴 앞면이 심심할 거 같고, 뭔가 가려줄 게

필요하기도 하고, 렌즈가 없거나 보안경 수준의 도수만 가진 안경을 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좀더 익숙해지면

아예 벗어버릴까도 생각중이다. 어쨌거나 야호, 안경독립 만세. 역사적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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