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지나가고, 남은 건 좌절과 냉소뿐이었다.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출발하여 정치에 대한 냉소로 끝난 싸움.

 

그건, 이른바 '시대정신'이라 거창하게 호명되는 일반대중의 정서가 어느결엔가 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것이기도 하다.

 

 

불신과 냉소의 악순환.



촛불의 실패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고, 우선 촛불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평가부터 다르겠지만 내겐 그렇다.

 

촛불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고, 아무 것도 저지시키지 못했으며, 촛불을 든 스스로조차 거의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안으로 더욱 옹송그린 채 냉소만 머금게 만들었으니 철저하게 패배한 싸움.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에 대한 거부, 부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질서유지선 안에서 '상식' 수준에 머문 채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하나'였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어떤 의제도, 그들을 대변하거나 응집시키지 못했다.

 

광우병 걸리기 싫다는 정서만 공유했을 뿐,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지,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전되지 못한 건 그래서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심화시키는 과정, 그 소란스러움과 긴장감이 바로 정치의 본령일진대 그걸 거부했다.

 

(논쟁이라 부르기도 어설픈 '비폭력 논쟁' 나부랭이가 고작이었고, 유모차 부대는 '해맑은 아이들의 눈에 맨날

 

싸움박질만 하는 정치인들은 부끄럽지 않나요' 따위의 신화적 정치에의 감성에 감응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안철수.

 

 

변화를 원하지만 정확히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게다가 정치를 혐오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이 켜든 또다른 촛불이나 다름없지 싶다.

 

현상타파의 눈먼 의지(혹자는 그 눈멀었음을 상식이라 포장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정치(과정)에 대한 불신과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마도 2012년 대선후보 안철수라는 아바타에 투영된 '시대정신' 아닐까.

 

 

대선에 뛰어든 이후 현재까지 그가 보여준 짧막한 말들과 모호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식의 '정치에 대한 부정/거부', 정치에 대한 혐오에 그 뿌리를 기대고 있는 '앙상한 상식' 뿐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식으로라면, 그가 만의 하나 대선에 승리한다고 치더라도 별반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가치판단과 입장이 없는 '상식'에 기대어 공공의 장에서 발언하고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데다가,

 

어떤 정책을 어떠한 철학으로 펼쳐낼지에 대한 공백상태에선 또다시 대중의 열광은 냉소와 불신만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촛불을 거치며 크게 소진해 버린 변화와 혁신의 욕망, 그 에너지가 다시 방향을 잘못 찾고 소진되어 버리는 건 아닐지 우려스럽다.

 

암울하게도, 지난 촛불의 낯부끄러운 패배와 뒤따른 냉소의 시기..수년간의 절망은 곧 재연될 거 같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에도,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야당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에도, 준비 안된 안철수가 되는 경우에도)

 

 

안철수를 보면 촛불이 떠오르는 이유다.

 

 

 

 

 

* 참고삼아 읽어둘 만한 글 하나.(글 내용과 크게 관련은 없지만)

 

 

촛불시위 2년, 내가 쓰는 ‘촛불 반성문’ (시사평론가 유창선, 2010. 5월)

 

 

 

 

정태춘, 5.18.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도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근 10년만이었다. 구묘역과 신묘역으로 기억하고 있던 광주 5.18묘역은 그사이 많이 깔끔해져 있었다. 그때에도 이미

 

신묘역의 말끔함은 억지스런 분칠로만 느껴져서 왠지 모를 거부감과 암담함을 느끼게 했었지만.

 

평일 오전시간. 신묘역, 그러니까 무려 '국립 5.18민주묘지'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다. 관리하시는 분들이나 몇몇 보이지 않는

 

참배객들의 몸가짐에서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조심스러움과 함께 역사의 무게를 감각하는 이들의 비극성이 묻어나는 듯 했다.

 

그런 역사를 이렇듯 '성지'화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일렀거나 부주의했다. 여전히 전두환이 건재하고, 5.18을 딛고 선 신군부와의

 

딜을 통해 은밀한 권세를 유지한 유신 잔당들은 다시금 명실상부한 권좌에 앉겠다며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새 빛이 바랜 (아마도) 2002년의 안내판. 이미 5.18은 오래되다 못해 이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할 과거가 되어 버린 걸까.

 

묘역 안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구슬프지만 우아하고 절제된 선율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 뿐, 분노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이전에 찾았던 정태춘의 노래들이라거나 5.18관련 영상들을 다시 찾는데, 이상하게도 많이들 짤렸다.

 

뭔가 오기가 생겨서, 이것저것 괜찮은 자료들을 다시금 퍼올려두기로 한다.

 

 

 

 

'민주의 문'을 지나 묘역 안으로 들어서는 길.

 

 

 

 

문재인이, 안철수가, 그 이전에는 이명박과 노무현과 김대중이 섰던 그 곳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내게 광주, 그리고 5.18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이 동영상의 첫머리, 5.18의 '모란꽃'이라 불렸다는

 

전옥주의 가두방송으로부터 시작한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계엄군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역사의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그렇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세상임에도, 5.18민주항쟁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거대한 그림자와 의미를 던지는 주춧돌이나 다름없다. 여전히 그 주역들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의

 

결과와 후폭풍으로 인해서 많은 역사적 변곡선들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신 잔당의 청산 문제, 지역 감정 문제,

 

한국 사회 민주화의 지체 문제들이 그런 것들이다.

 

어쩌면 당시 광주는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시민'들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며 일어선 사람들.

 

아마 전옥주는 이런 식으로 언론이 봉쇄되고 언로가 막힌 광주시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했을 거다.

 

"당신들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돌아가신 날짜대로 열을 지어 누워 계신 분들. 1980년 5월 18일부터 드문드문 나타난 비석에는 어느 순간

 

1980년 5월 20일자의 죽음들이 셀 수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어미의 마음으로 새겼을, '싸우리라." 비석의 뒤에는 남겨진 이들의, 혹은 떠난 이들의 독백이 단단히 새겨졌다.

 

열다섯의 누군가는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헌혈하고 나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고, 서른여덟의 누군가는

 

진압하려드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트럭을 몰고 항거하다 숨졌다. 누군가의 아비는, 어미는, 먼저 간 자녀들의 넋과

 

뜻을 기리며 피눈물을 새겼고, 누군가의 형수는 그저 평안하길 바랬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들, 그나마 '상식'이 있고 그나마 '일반 국민'을 대변한다고 말해지는 자들,

 

그들에게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 광주 민주항쟁은 어떤 빛깔로, 어떤 목소리로 기억될까.

 

 

어쩌면 그건 그들의 '상식'이라는 게 얼마나 올바르고 균형감이 잡혀 있는지를 고백하는 바로미터와 같을지 모른다.

 

 

강풀 원작의 영화 '26년'이 여전히 제작조차 쉽지 않은 나라, 학살자가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광주 5.18의 흔적을 보며 그저 슬픔을 느낄 뿐인지 분노를 느끼는지의 차이 말이다.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어버렸다.

자원해서 나선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퀴즈'라는 형태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하다.

대체 '양천리'가 어디에 붙은 동네인지 알아서 뭐하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짝퉁 상품이 뭔지는

알아서 뭐한단 말인가. 게다가 셜록홈즈 사무실이 있던 곳의 정확한 주소는 또 알아서 뭐하려고.


내가 처음 퀴즈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졌던 건 고등학교 때. 옆 학교 친구들이 장학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문제도 맞추고 상도 받는 게 좋아 보였다. 우리 학교야 90여년의 전통에 누가 된다며 그런

티비 프로그램에는 나가지 않는 게 방침이라고 어느 선생님에겐가 듣고 조금 실망했었다. 나가면

남들 못잖게 잘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상금도 받으면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었지만 대학교 등록금을

보태든 어쩌든 부모님도 좋아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들어온 대학교 3학년, '골든벨'인가 그걸 울렸다는 친구가 우리 과 새내기 후배로 들어왔다.

그때쯤 난 그런 단답형의 퀴즈를 맞추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국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에 딱

걸맞는 천박한 수준의 테스트 혹은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별반 감흥은 없었지만. 말하자면

고등학교 때까지 그런 주입식, 암기식 교육 체제에 잘 길들여졌음을 보여주는 지표 중의 하나가

퀴즈에 대한 단답식 대답에 '재능'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대학교에 들어왔으니 그런

퀴즈풀기에 적합한 접근방식의 지식쌓기는 그만둬야 한다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군대에 있을 때,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기로 맘을 먹고 나니 너무 막막했다. 상금을 노리고

무작정 '퀴즈가 좋다'던가, 무슨 프로그램에 예선신청을 했었는데, 날짜 맞추어 휴가를 나가 휘적대며

방송국 대기실에 갔더니 전부들 손에손에 책과 노트, 프린트물들이었다. 질문, 답, 질문, 답, 누가

언제 만든 책의 제목은? 뭐시기뭐시기, 이걸 가리키는 순우리말은? 뭐시기뭐시기. 그런 걸로 빼곡한

글자들을 눈이 빠져라 노려보는 사람들을 보니 겁을 먹었다. 아..이 사람들은 저걸 다 외웠나. 재미도

없고 그 퀴즈 문제로 아무런 생각거리나 의미도 던지지 못하는 뚝뚝 끊어진 것들을.


말하자면 그것들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텅 빈 마침표들의 연속. 세종대왕이 누구의 몇째 아들인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몇 미터인지, 최근 한국의 아르바이트 법정시급은 얼마인지, 그거 하나하나를

외우는 게 대체 나의 무슨 능력을 측정할 수 있을까. 암기력. 인내력. 그리고 아마도..상금에 대한 열정.

혹은 명예에 대한 열정도 조금. 그 열정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건 개인적 차원에선 취미활동,

자신감 획득을 위한 수단, 자부심의 원천, 심지어는 생계활동일 수 있으니. 다만, 퀴즈에 한 단어로

답하기 위한 준비행위, 그 '공부'가 갖는 무미건조함과 무의미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당연히 예선에서 떨어졌고, 그 이후로는 퀴즈 프로그램에 나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저런 따분하고

지리한 공부 같지도 않은 공부를 해야 예선이라도 통과할 텐데, 그런 암기식 공부는 고등학교 때까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미 천만원, 이천만원을 훌쩍 넘어가던 퀴즈프로그램이 내건 상금에 대한

욕심은 여전했지만 그걸 받자고 그런 고시공부보다 재미없는 공부를 하고 싶진 않았던 거다. 작년인가

내가 속한 어느 모임에서 퀴즈 프로그램에 나갈 사람을 모집했지만 전혀 내키지 않아 신청도 안했었고

그런 상금을 사냥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할 사람들 몫이라고 지레 포기하고 있었다.


퀴즈는 그 질문의 답에 대한 앞뒤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그림이나 상황에 대한 깊이있는

사고를 하고 있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 너무나도 심플해서 단순무식하다. 그저 그 한 단어를

알고 있으면 통과, 모르면 탈락이다. 흔히 퀴즈대회에서 우승하는 사람들을 두고 '상식이 많은 사람'이라

말하는 거 같지만, 그런 게 상식일지 모르겠다. 시사상식 퀴즈를 잘 맞추는 것과 시사문제를 잘 이해하는

것도 분명히 다른 일이다. 퀴즈를 잘 맞춘다고 똑똑하다고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다. 공부를 잘한다고 꼭

똑똑하란 법이 없듯, 퀴즈를 잘 맞춘다고 똑똑한 것도 아닌 거다. 정답 아니면 오답, 맥락은 필요없고

한 단어로 끝, 이란 심플한 세상은 되려 똑똑한 사람들에겐 유치해 보이지 않을까.


물론 똑똑한 사람들이 퀴즈도 잘 맞추고 공부도 잘 할 가능성이 높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지금은

조금 내 생각도 바뀐 게, 약간 타협한 상태랄 수도 있겠다. 퀴즈 문제에 대한 건조한 질문과 짧은 대답은

정말 그의 지력이나 능력에 대한 지극히 일부의 부분, 암기력만을 잴 뿐이지만, 다만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사, 경제, 정치, 문화 등 사회 전반에 대해 두루 접하고 폭넓게 정보를 수집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전히 그런 식으로 퀴즈에 답하기 위한 '공부'가 단순히

새로운 어휘나 숫자들에만 집착할 뿐 전체의 맥락이나 사건들에 대한 의견을 형성하고 사고를 깊게

하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지레짐작'은 여전하지만.


결국 내 생각은 그런 거다. 퀴즈 공부를 하고 신청하는 이유는 결국 물질적, 정서적 보상을 노리고.

그렇지만 퀴즈 자체가 공부가 되는 순간, 고등학생 이전의 주입식/암기식 교육 시스템에 다시 들어가

버린다는 거다. 그건 아무런 실익도 긍정적 효과도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시험(퀴즈)만을 위한 공부.

한발 더 나아간다면, 이런 식으로 퀴즈를 맞추는 승자에게 상금을 주는 건 좀 이해할 수 없기조차 하다.

그들이 암기를 잘하는 것에 대한 상을 주는 건가. 사람들의 기계적, 무비판적 암기와 맥락없는 지식

과시를 독려하려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차라리 100분 토론 같은 데 나와서

말 잘하는 사람에게 주던가.




진중권(@unheim)은 "허영만 화백의 선견지명? 이 만화가 2003년 거라니... 이 분, 돗자리 까셔도 되겠네요."

지인(@tradepoli**)은 "저 강을 아끼는 사람들의 심정으로.."라며 답답함을 호소하며 리트윗을 했고,

나(@ytzsche)는 "이미 2003년에 상식이 되어가던 이야기, 그치만 2010년엔 낯설어지고 만 이야기."라며

프레시안에 오른 기사를 재트윗. ( 허영만 화백의 예언? <식객> 한 장면, 4대강 논란과 흡사 )



어제 4대강에 대한 피디수첩을 보면서도 계속 분통이 터졌댔다.

"아니 정말, PD수첩에서 하는 얘기 누가 몰랐나. 별거 없잖아. 상식적인 차원의 비판과 온건한 수준의 문제제기일

뿐이다. 그 정도의 제도권내 비판조차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다는 사실이 더 비극이다. 우리 가족 모두 총평은

싱겁다, 라는 것."

"솔직히 정권과 언론상층부에서 그토록 무리하게 방송을 금지시켰길래 대체 뭐가 있나 했었다. 근데 이건

너무나 상식적이자나. 그들은 '상식'의 기준을 어디까지 끌어내리고 싶은 걸까."


그 답을 보여주듯, 2003년 허영만 화백이 기록한 '상식화되어가던' 당대의 (준)상식. 2010년 지금은 오히려

그 방향이 뒤집어진 채 상식이 비상식의 낯선 영역으로 내몰아지고 있다.



그 와중에 다른 트윗 친구분(@vleee**)은 "오늘로 이명박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채웠답니다!! 이제????"

라며 경악하고 말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 아, 슬프다.



생각보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빈곤하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철학 위에서 세워진 시스템을 상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주류 언론, 거물급 정치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되풀이하며 선전선동을 일삼는 상황에선.


'This is not America!'라는 외침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니컬한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예측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인종차별, 보이지 않는 계급 WASP(white-anglosaxon-protestantist), 총기, 마약, 시장주의,

패권주의, 제국주의적 속성까지. 미국에 대한 빈정거림과 비난은 하늘을 찌르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노출하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솔직히 까놓고, 미국의 인종차별이 심하다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미국의

정치판과 대통령이 대놓고 전세계의 놀림감이 되지만 한국의 그것들은 어떤가. 그게 미국의 저력이다.


마이클 무어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아무런 배경지식도 관심도 없던 사람들에게 딱딱한 사회 시스템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현학적이거나, 반대로 감정적이지도 않다. 눈높이를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올려가는,

능란한 요리사가 부식재료를 다루듯, 그는 냉소적이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멘트들로 포커스를 한 점에 모은다.

미국 의료보험업계 로비스트와 결탁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시스템이 포인트다. 그는 응급실에서 돈 얘기부터 하는 의사의 야박함을 탓하지도, 티비에 나와 캐나다의

의료보장제도를 욕하는 정치인들의 뻔뻔함을 비난하지도, '의료 손실'이라는 손익의 개념으로 접근해 최소한의

보험을 제공하려는 보험업계의 비인간성을 타박하지도 않는다. 물론 야유와 조소는 아낌없이 던져지지만,

문제는 사람들을 그렇게 상상하고 움직이도록 틀지워주는 시스템이란 걸 그가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거다.


시스템이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그는 캐나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심지어 쿠바의 사례까지

풍부하게 제시한다. 그 모든 장면에서, 의사와 마주해선 'How much..?'부터 조바심치며 묻는 미국인들은

그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시선 앞에서 완전히 당황하고 만다. 미국에서 120불짜리 약이 그들의 적국

쿠바에서는 겨우 5센트라니, 미국의 시스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 앞에서는 완전한 배신감에 망연해지고 말았던 그들.


나라마다 시스템의 각론은 약간씩 다르지만, 'This is not America. System pays it'. 대답은 한결같고

그 대답이 깔고 있는 마인드도 한결같다. 돈이 아니라 환자가 우선이라는 거다. 누군가 자신의 지갑이 아닌

건강에 신경을 써주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준다는 것. 적절한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이며, 더욱 부강해지자는 주문을 쉼없이 외우는 정치인들의 목적은 더욱 국민들을 잘 돌보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상식과 의지가 모여 시스템을 만든다. 상식의 힘은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 데에 있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미국은 최소한 의료보장제도에 있어서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최근

오바마가 다시 전국민을 수혜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지만 두고 볼 일이고..


미국의 그들이 '시스템'과 '상식'의 가면을 빌어 하는 이야기는 뻔하다. 사회화의 비효율성, 비용 문제,

세금폭탄..사회화(socialization)와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전체주의 국가 사이에 은근슬쩍 이퀄(=) 표시를

꼽아두고는 사회화나 국가적 차원의 복지 시스템을 절대악으로 몰아간다. 한국과 같다.


한국의 그들은 미국의 의료제도를 따라 영리 의료법인 설립을 독려하고, 의료서비스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거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선진시스템',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 국가가 운영하던 인천공항도, 한전이니 철도니 도로니

따위의 것들처럼 민영화한다는 이야기가 스물스물 나오는 판이지만, 한박자씩 뒤늦게 따르는 그들의 지독한

박자감각은 어쩔꺼나. 이미 시행됐고 문제가 잔뜩 불거져서 고칠려는 판에, 우리는 그 '정통 오리지널' 버전을

수입하겠다니.


아무리 그래도, '상식과 시스템'을 둘러싼 전투에서 한국의 그들은 줄곧 승리해 왔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IMF 이후 급격히 무너진 공공 영역, 공공 부문에 들이대진 효율과

수익성의 잣대로 민영화는 곧 지고선이 되었고. 하나하나 무너져내려 이젠 정말 돈 있는 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유료로 지키는 경찰과 소방관들이 나온대도 딱히 이상해지진 않을 만큼 '상식'과 '시스템'이란 게 후퇴하고

있는 거 같다.


식코에 등장한 9/11 자원봉사자들, 한때 미국의 영웅으로 떠받들리다가 건축 폐자재 따위로 인한 신체적

손상이나 심리적 스트레스로 정신적 손상을 입은 채 내버려진 그들을 보고 중첩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가해 선박의 이름으로 보통 기억되곤 하는 해상 기름유출 사고지만, 마치 누군가 본능 깊숙이 인셉션한 것처럼

'서해기름유출사태'로만 기억날 뿐인, 2007년의 "삼성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건".


아이들의 고사리손까지 끌고 가서 국민들은 돌덩이의 기름띠를 닦아냈지만, 사실 그 원유는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던 데다가 변변한 안전장비조차 갖추지 않은 채였던 거다. 거기서 국가나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그 '자원봉사'를 영웅화하고 애국마케팅으로 소모해버릴 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의 건강과 안위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상식'을 지켜야 했던 건 아닐까. 이놈의 나라 국민들은 너무 순해빠진 건 아닐까.






아침뉴스에 나온 이명박 인터뷰에 깜짝 놀란 구절이 있었다. 대통령이 된 지금 더이상 국내엔 경쟁자가 없으며,

이제 자신의 경쟁자는 해외의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이야기. 이들과 경쟁해 대한민국을 선진 일류국가로 만드는데

매진하겠다고 밝혔다는 거다.


얼핏 듣기에는 모든 걸 '오해였다'고 발뺌하는 귀에 익은 그의 레퍼토리만큼이나 진부하고 천박한 그냥 그런

거라고 넘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미 대한민국의 경쟁상대는 세계라느니, 기술자, 노동자, 학생 등 국민의

경쟁상대는 외국의 기술자, 노동자, 학생 등이라는 식의 공익광고는 이미 셀 수 없이 쏟아졌던 데다가,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통한 공공선의 창출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편리한 '상식'이 되어버린 상황인 터이다. 그렇지만,

뭔가 날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그게 대체 어떠한 종류의 불편함이었는지 하루 내내 찝찝한 기분을 되씹고

말았다.


교과서에는 아마 정치를 무엇보다 사회적인 합의를 창출해내고 민생의 안정, 국민의 공공선을 위한 절차와

내용이라고 할 게다. 혹 교과서와 현실이 따로 굴러가는 세상이라 해도, 최소한 한국에서 바라는 정치의 '政'자가

'正'으로 표현될 수 있는 도덕성과 정의를 의미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경제가

우선이네, 실용주의가 우선이네 보수언론이 까불어대도 그에 더한 도덕적 잣대는 이미 지난 몇년간 크게 상승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나 인사 검증의 번번한 파열음은 어느새 높아진 국민/언론의 잣대와 지체된

기존 인물군과 '갑'의 인식간 괴리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두 부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공선을 창출하는 것과 사회 정의와 건전한 '상식'을 수호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 했을 때 일단 이 부분에는 경쟁의 이미지가 들어서기 힘들어 보인다. 더구나 그 자리가 일국을 감당하고

상징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임에야. 그건 정치지도자가 외국과 경쟁할 부분이 아니며, '다스리는(治)' 차원의

것이지 경쟁과 평가를 위한 객관적, 계량적 수치가 크게 대두될 수만은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경쟁과 서열매기기를 위해서는 숫자놀음이 필요하다. GDP가 얼마로 늘고, 대운하로 인한 고용유발이

몇만명, 경제효과 몇백억, 한미FTA로 시장이 얼마어치나 늘고, 그 모든 걸 귀결시킨 한국의 국제경제력 순위는

몇 단계 상승했다는 등의 지표. 정치라기보다는 경제, 정부라기보다는 기업에 적합한 마인드..

IMF 이후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를 거쳐왔고, 새삼스레 정치의 본령을 말하고 경제적 이슈-성장과

발전제일주의랄까..-에 경도된 정부를 지적하기는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경쟁상대를

언급하며 결의를 다지는 것은 나름 충격이었다. CEO형 대통령을 자처한 MB에겐, 성과와 수치로 이야기하는

기업의 생리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는지 모르지만 내겐 아직 정치라는 게,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갖는 다른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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