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까지는, 사랑하던 남녀의 이별, 갑작스레 '차인' 상황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녀, 빵빵하게 부풀었던 질긴 풍선처럼 자신의 세상 구석구석까지 채웠던 그녀가

 

남기고 간 결핍감, 공허감,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현실부정의 몸부림까지. 대체 왜 사라져버린 건지 감도 잡지 못한채

 

그저 몇몇 단서로 더듬거리듯 추측이나 해볼 뿐인 상황에서 남자는 때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통함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져버린 여자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질투, 증오를 폭발시키던 거다.

 

 

살아가면서 맺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게 고작 핸드폰 번호 하나, 이메일 주소 하나 만으로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참 쉬운 건지도 모른다. 전화를 꺼버리고 이메일 계정을 삭제한 채

 

커다란 알사탕에 바글바글 꼬여있는 개미떼같은 인간들 틈속으로 슬쩍 스며들면 그뿐이니까. 그렇지만 급속도로 불어난

 

인류의 비대해진 몸집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 인류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자는 칼처럼 자신을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만 여자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이제 그녀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어떻게 웃었으며 말할 때 버릇이 뭐였는지, 자신이 알던 그녀가 그녀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믿기지 않는,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현실에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온기를 찾는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잠시일지언정

 

함께 누웠고, 웃었으며, 꿈이 아닌 '레알'로 존재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간과 기억을

 

배반하고 부정하지 않으려는 그 숭고한 의지는 대개의 경우 상대의 싸이나 카톡 사진을 들춰보는 걸로, 술에 취한

 

새벽 두시쯤 전화 한번 해보거나 여차하면 집앞에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로 귀결되기 마련이지만, 영화 속

 

남자는 여자의 뒤를 쫓으며 예기치 않은 어둠의 장막을 들춰보게 된다. 계획된 살인과 본격적인 정체성의 은폐공작.

 

 

스릴러가 풀려가는 방식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건, 그 모든 걸 일종의 메타포로 읽어내렸을 때 남자의 반응이었다.

 

남자는 왜 여자의 뒤를 기를 쓰고 쫓으려 했을까. 남자는 왜 여자의 옛 남편까지 만나보려 했을까. 남자는 대체 왜,

 

기어이 여자를 만나고 껴안고 다시 놓아줬을까. 자신이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랑의 순간들이 그녀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부질없는 조각들로 무화되는 걸 막아내려 필사적이었고, 그렇게 지켜낸 사랑의 이야기(서사)에 나름의 소망이 담긴

 

엔딩을 그려보려 하는 안간힘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는 그녀가 시든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그 순간을 막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내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던 건, 그녀가 끝내 살아남는 것. 자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 마지막으로 마주서서 끌어안았던 순간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은 채 그래도 한조각 가슴에 품고 살아갈 만한 진심을 건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잡히지 말고

 

어디서던 무슨 이름으로 어떤 얼굴로 누구로 살아가던 간에 꼭 살아남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했던

 

사랑을 지켜내기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랬던 게 남자의 깊숙한 속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여자의 선택은, 코너에까지 몰려버렸다고는 해도, 그의 기대와 소망을 다시금 흔들어버린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녀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의 '사랑'에 대한 남김없는 배신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사고능력을 제한하는 건 뭘까. 돈일까, 명예 혹은 자존심일까. 어떤 게 더 강력할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살인사건에 대한 조각난 팩트들이 몇 개 널려있고,

그 팩트들을 어떻게 꿰어서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어낼지,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할지는 자신의 입장이나

분노 유발조건들이 좌우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거다.


살인사건이 있었고, 검사(박희순) 측은 피살자의 남편(장혁)을 범인으로 확신한다. 그건 박희순과 장혁 간

이전에 얽힌 악연과 상처받은 자존심에서 출발한 건지도 모른다. 한편 변호사(하정우) 측은 장혁을 범인으로

모는 검사에 대항해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시나리오를 정밀하게 만들어간다. 그리고, 명예 혹은 자존심으로

눈먼 검사와는 달리, 변호사는 피고와의 계약관계로 구속받고 있다. 돈으로 얽혀버렸다.


그리고 '국민배심원'들도 있다. 최근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그들

역시 전문성이나 객관적이고 엄정한 판단력보다는 감정과 드라마틱한 연출에 영향받는 대중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되는 것 같다. 그들 역시 각자의 선험적인 가치관이나 입장에 따라 주어지는 파편들을 꿰고 있을 거다.


결국 누가 틀렸는지, 누구의 추리와 시나리오가 더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보게 되는 게 이 영화의 최종장이다.

그 과정을 얼마나 스릴있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는지, 라는 점에서라면 정말 기대 이상으로 멋진 영화였다는

생각이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그 호흡마저 흐트러뜨리던 반전과 긴박감에 가장 가까웠던 한국 영화 아닐까.


다만, 마지막에 굳이 그렇게 착하고 자상한 사족이 붙었어야 했을지가 좀 아쉽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느꼈을,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며 술술 '권선징악'의 급마무리로 돌진하는 엔딩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 않았을까. 그냥 범인의 악마성을 드러내거나 폭발시키는 순간으로 열어두는 건 어땠을지.



모방범 1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2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3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세계.


"너희들은 인간의 생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남의 생명이니까, 남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피스는 상냥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지인이나 친구는 죽이지 않아요. 죽으면 슬프니까요. 그렇지만 남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남들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그야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와는 관계없어요."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좋단 거야!"
"즐겁지요. 당신도 해보면 알걸요.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단순히 미친 또라이의 생각일까. 남의 생명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생명일 뿐이라는 저런

식의 사고라는 건.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 너머 어딘가서부터 나와 상관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는 거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사람들과 타인을 가를 경계, 그런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죽어가는 아이들, 지구 곳곳에서 쉼없이 벌어지는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사람들, 일본에서, 휴전선 너머에서, 심지어 이 나라에서도 부당하게 고통받고 괴롭힘당하며

죽거나 상처받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거다.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가 있지 않고서야 우리가 단

일초라도 웃을 수나 있을까. 우리가 주위 사람, 가까운 사람만 보듬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는지도.


평생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될 사람들의 대다수가 경계선 밖에 '남'으로 존재하고 있단 얘기다.

급작스레 커져버린 세계와 헤아릴수 없이 많아진 인간들을 대하고선, 인간 능력에 한계가 온 건

아닐까. 정말이지, 세계가 이토록 커져 버린 건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니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인류가 갑자기 흉포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커지고 많아진 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구.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범인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죽고 싶지 않다고 애걸하지만, 지금처럼 보잘것없이 살아봤자 뭘 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기획한 이 연속살인극에 참가하면 네 이름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돼. 모든 사람이 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줄 거야. 모든 사람이 너의 죽음을 애도해줄 테고. 이거 너무 멋지다는 생각 안 들어?"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단 욕구는 '모방범'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에너지와 같은 무엇이다. 범인들이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런 인정에의 욕구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주목을 끌고 알려지고 싶다는 욕망을 내밀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거다. 범죄사건의 목격자이던

논평자이던, 소설 속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 방송에 나오려고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점점 그런 인정욕구에 목말라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점점 광활해지기만 하고

사람수는 헤아릴수 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와중에, 거대한 도시, 수많은 사람 속에서 살아남고

두드러지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모두가 인정받고 싶지만, 또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거다. 너무 커져버린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 팽개쳐진 영혼들.


범죄의 피해자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버려졌다고, 있으나 없으나 세상에 별 상관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범죄의 가해자였던 사람들 역시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진 채였다.

굳이 시니컬하게 '자존심 비대증의 실패자'라며 비하하지 않더라도, 가해자들의 삶은 공히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너무 커진 세계로부터 결정적인 상처를 받고 있었던 거다.



도시 반대편에 사는 사람에게 신, 혹은 스타가 되다.


"나는 안 잡혀. 계획은 완벽해. 황홀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스토리야. 가즈아키, 잘 들어. 이 사회는 내가 만들어내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 다음 이야기와, 최고의 클라이맥스와, 길게 여운이 남는 라스트신. 그러니까 네가 협력해줘야지. 공연자로서 말이야."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딸이나 손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예외없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그것은 아마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과, 우리집 딸이나 손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같은 농도, 같은 온도로 섞인 결과일 것이다...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고 또는 앞으로 될지도 모를, 피해자들과 동년배의 여자들은 심한 불안과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지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밝은 표정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라가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 하고 희생자들을 매도함으로써 안도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은 생각한다. 도시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어쩌면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타인을 발아래 둔 채 생사여탈권을 쥐고 모두를 위한 스토리를 통제하는 존재.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흥분에 들떠 추측만 해댈뿐인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보며 오락거리를

제공해주는 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경이다.


사실은 수많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정작 어디론가 묻혀버렸다. 연쇄살인 역시

도시 반대편의 사람에겐 하나의 가십에 지나지 않은 채 소비되고 만다. 마치 해외토픽처럼.

이미 그런 선정적이고 비극적인 스토리들은 계속 수위를 높여가며 제공되고 있었고, 연속선

상에서 연쇄살인사건 역시 최초의 충격을 지나서는 그저 엔터테인먼트, 남일이었을 뿐이다.


그건 합리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들이 사람을 죽여봐야, 자신의 일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친구의 일이 될 가능성이란 건. 대개의 경우 그런

사건은 내가 아닌 절대다수의 '타인'에게 벌어지는 거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크고, 사람은 너무 많다.



언제고 또 나타날 '모방범'.


'모방범' 속의 사건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일들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전화기나 집전화를 이용해서 서로 연락하는 그런 시대이다.

지금은 그나마 거대한 세계에 모래알처럼 흩어진 인류가 조금은 서로를 끌어당기려 애쓰는

도구들이 많아진 시대다. 휴대폰도,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따위의 소셜 네트워킹도.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그런 도구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와

타인 사이에 세워두는 경계선이 좀더 확장되거나, 결국엔 사라질 거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거다. 휴대폰이 생겼어도, 가상 사회가 건설되었어도, 가장 중요한 인간의

깜냥 자체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능력, 의지.


결국, 사람은 어디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혹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서로를 괴롭히고 못견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 반대쪽의 살인마를

키워내는 건 이쪽에서 티비를 보며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편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소모하는 우리들 아닐까 하는 거다. 이 소설이 아무래도 우울한 비극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 거대해진 세계, 인간의 수용치를 넘어버린 세계에서 '모방범'의 도래를 피할 수 있을까.






75년 폴 포트가 집권하여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큼의 극단적이고 광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어를

알거나 책을 보는 사람, 가르칠 능력이 되는 사람 등 지식분자스러운 사람들은 전부 수용소에 갇히고 외국과

내통했다거나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런 광기가 이어진 게 약 4년.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혹은 열등감, 부자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멸시, 구조와 개인에 대한

감정과 이성적 판단이 뒤엉켰고, 그에 더해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경험이나 트라우마 따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다. 그렇게 잔뜩 난마처럼 뒤얽힌 맥락에서 모두의 모두에 대한 증오만 남지 않았을까.

평범한 고등학교였던 곳이 보안본부이자 수용소로 전환되면서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끌려들어가서는 단 6명만

살아나왔다는 대표적으로 무시무시한 수용소,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랭 수용소다.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꺽어

도착한 건물은 웬지 스산한 느낌, 아침나절의 선선한 공기조차 위축시키는 느낌은 뭘까. 검정개도 웬지, 지옥문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개처럼 흉맹스러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없다. 맘편히 아침부터 관광할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매미니 뭐니 곤충들의 소리라도 있어야 할 법 한데 온통 조용한, 어딘가 추모공원이나 국립묘지에 온 듯한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무에 그어진 칼자국 하나도 범상해 보이질 않았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안에 들어서서 돌아본 바깥의 풍경. 여기가 수용소였을 때도 밖의 건물들은 저렇게 바싹

세워져 있진 않았겠지. 사방에서 총을 든 병사들이 초소에 올라 감시하고 있었을 테고, 서치라이트가 문득

깜빡했다는 듯 한바퀴씩 빙글빙글 돌았을 거고.

기괴한 웃음이다, 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 올려 웃고 있는 느낌, 눈은 전혀 안 웃고 있는 걸. 아마

이 피비린내나는, 셀수없이 많은 생명이 집중적으로 죽어간 공간에 붙을 표지라는 걸 알았다면, 아무리 웃는

표정을 지으려 해도, 그리려 해도 저렇게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밖에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웃지 말라는 표지와 더불어 붙어 있는 규정들, 방문자에게 요청되는 규정인가 하고 읽다가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었다...뭐 하나 제정신박힌 규정이 없지만 특히 6번. 하아...

고문하다 소리지르면 안된다라니, 개꼽창들이 죽도록 갈구겠다고 단단히 작정하고 꼬투리잡겠다는 얘기.

1층에 있던 누군가의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조각 하나 없이 앙상한 철망만 남겨놓고 있으니, 게다가 이런 공간에

있으니 상상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고문기구로 쓰였을까, 팔다리를 묶고 때렸을까, 설마

이게 침대길이보다 신체가 길면 잘라버린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겠지..하며.

뚜얼 슬랭 박물관은 총 4개의 동으로 되어서, 고문실, 살해하기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 고문도구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여기는 아마도 수용자들의 생활동쯤 되었나보다. 혹은 고문실이었거나, 고문실도 겸했거나.

낡아빠진 창문틀, 아무런 칠도 안 된 채 나무 그대로의 헐벗은 색깔과 질감을 드러낸 것들, 그리고 저 뜬금없는

농구골대 같은 건, 고문시설. 저기에 사람을 매달아 커다란 물독에 머리를 박아놨다고 한다. 날것의 폭력이다.

상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야만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나, 짐승처럼 저기에

매달린 채 허우적대며 목숨을 구걸했을 사람이나.

아마도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였을 거다. 살해하기 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겁에 질린

그들의 표정이 보여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 지구상에서 소멸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6월 광주항쟁을 다룬 책들에서 저런 사진들은 처음 접했었다. 겁에 질렸던 표정이었겠지만, 경직되면서 표정은

빳빳하게 굳었고 더이상 생전의 이름으로 신체부위를 하나하나 식별하는 게 무의미하다.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단정히 눕혀져 있는 가죽가방같은 존재들. 사람 한 명 죽인다며 달려오는 살인마에겐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이라도 하겠지만, 이 엄청난 대규모 도살 앞에선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듯한 쇠사슬, 수용자들을 둘둘 엮어서 끌고 다니기 편하도록 쓰이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시멘트 건물의 묘한 냉기가 선뜻한 기분을 돋게 만들었다. 2층으로 오르던 길에 발견한 낙서들. 아, 여긴

1975년까지도 아이들이 가득하던 학교였던 거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란이 가득했을 곳.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울부짖고 절규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지옥도를 그려냈을 곳이기도 하다.

누굴까, 간수가 쓰던 책상인 거 같기도 하고. 70년대 후반에 쓰이던 책상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니,

더구나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 보존된 걸 보면 왠지 섬뜩하다. 아마도 이런 섬뜩함, 인간이 얼마나 흉폭하고

무지하게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런 장소가 필요한 거다.

그 뒷켠에 서 있던, 캄보디아가 잠시 '캄푸챠'라는 국명으로 광기어린 폴 포트 치하에서 신음하던 때 공산당

지도자들의 면면. 이들은 뭐가 좋아서 저리 활짝 웃고 있는 걸까. 사람이 가장 무서운 거다.

사실은, 그들의 교조화된 신념이 무서운 거다. 부르조아, 쁘띠부르조아, 인텔리겐챠가 조장한 자본주의와

뿌리깊은 봉건적 질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빈농과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열정이 단순화된

선악구도의 복수전으로 치달으면서 사회 전반을 퇴행시키고, 문명과 인류 지성을 퇴행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손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런 식의 맑시즘을 빙자한 근본주의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악에 대항하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적 혁명을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눈먼 광신이 빚어낸 참극은 이토록 생생할지언정, 무엇이 이들의 문제의식을

자극했고 심지어 득세하게 했는지 그런 부분은 짚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기득권에 기댔던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 기득권 세력만이 호의호식하며 풍기는 부정부패의 구린내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양극 세계질서의 패권성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이런 참극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애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순수해지라느니, 깨끗해지라느니, 그런 도덕군자같은 소리를 하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들이 자라나서 제각기의 위치에서 이해관계를 겨루게 될 테고, 그 와중엔 어쩔 수 없이 갈등과 큰 소리가

빚어지게 되는 거고, 그 문제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 노력하는지가 관건이어야지 시끄럽다고

혹은 '날것의 소란스러움/폭력'이 싫다고 그저 조용히 하라며 무질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 싸우는 거 보고

애들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흔히들 말하는 건, 그래서 대개 무지의 소치다. 정치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용히 입닫고 있다가 이런 대량 학살도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터져서 내전도 터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마도 수용자들의 숙소로 쓰였던 듯한, 철조망이 한층 삼엄하던 한쪽 건물. 잔뜩 녹슨 철조망이지만 여전히

날선 이빨은 그대로다. 뚜얼슬랭 수용소는 안전하고 독성없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사실

그때의 제3세계가 부딪히고 있는 국제정치적, 국내정치적 문제는 대부분 그대로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

미국의 피벗(pivot)으로 제한된, 게다가 무능한 외교, 계층간 부의 격차 심화, 기득권의 부정부패...

안에 들어가니 이건 수용시설이라기보다는, 사육시설이다. 좁디좁게 구획된 공간,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둠,

그리고 발이나 손에 채워졌을 철제 차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정말 불결하고 간소한 화장실까지.

크메르어인지 뭔가 언어가 잔뜩 휘갈겨져 있는 한쪽 벽, 수용소로 쓰이기 전 아이들이 해둔 낙서일까 아니면

수용시설에 갇힌 누군가가 적어둔 글일까. 혹은, 비극이 벌어진 후 찾아온 누군가가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긴

추도문일까.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림자도 확연히 짧아졌다. 남국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손발도 차갑고 가슴도 냉막하다. 이 공간은 그토록 서늘했다. 서늘하고, 시큰하고.

어딘가 굉장히 폐쇄된 채 어두침침한 공간, 바깥을 내다보기엔 너무 시늉만 해둔 창문, 하얗게 번지는 햇살.

마지막 건물동에서는 78년에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를 최초로 둘러봤던 한 서양인의 기록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포트의 초대를 받고 당시의 캄보디아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그는, 그 거침없는 파괴와 재건의 움직임을

다소간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고,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우호적이었던.

이런 식으로 당시의 사진과 감흥을 남겼고, 오늘날의 시점-역사적 평가가 어느정도 고착된-에서 다시 평가한

아이디어들을 함께 남겨 놓아서 훨씬 의미심장했던 거 같다. 훨씬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물론 그렇다고 당시라 해서 그 비판의식이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유의해 볼 만한 점.

아마 그가 자신의 과거 사유를 반성하고 남들 앞에 이렇듯 샅샅이 끄집어내어 재평가하는 이유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위함일 거라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 배려를 망각한 채 진행되는 래디컬한 혁명. 누군가의 피와

목숨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의 비정함이나 과격함의 틈바구니에서 개별 인간들을 챙긴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제 그런 폭력적인 형태의 전복은 가능치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경로든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생각하기.

더구나 일국 차원에서의 '변혁'이 가능한지도 문제.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도 참 지난한 문제거니와,

자립경제를 갖춘다고 해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는 백군세력이 정상적인 국가 경제발전을 방해하고 상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이탈하게 했듯.

꽤나 많던 전시물들을 다 돌아보고 문득 답답해져서 수용소의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모금, 숨 돌릴 여유가

필요한 곳이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층은 물론 2층, 3층에도 건물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을 틈에는 전부 꽁꽁

철조망이 둘려 있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혁명 국가'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인민의 적'으로 처단하겠다는 집요한 의지일 거다. 사실 이건 모든 국가에서 법을 집행하며 국민을 규율하는

방법이랑 똑같다. 다만 조금 더 날것의 형태일 뿐. 사형수의 자살을 막고 목숨을 붙여놓은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한 거다.

그들 수용자들이 행정적인 이유로, 아마도 세상에서 '제거'되기 이전의 서류 절차를 위해 저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간 2만명, 여섯 명을 제외하곤 전부 저 의자를 거쳐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거다.

참. 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무참히도 해치웠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이나 만 명의 목숨이나 경중을 따질 일도

부등호를 사이에 꼽을 일도 아니지만, 참 적나라하게 막장이었던...

나오기 전, 그들에 대한 위령탑이 서 있는 마당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이런 광기 어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념과 신앙과 이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게도

귀감이 될 수 있길. 사람 만 명이나 한 명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그런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민주주의, 사람을 위한 정치체제는 피를 먹고 자란다. 사실 캄보디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시뻘겋게 피에 물든 장면들 한둘 이상씩은 갖고 있는 거다. 이런 비극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연되고 되살아날 수 있는, 다만 잠복해 있을 뿐인 사건일지 모른다.

한자 그대로 읽자면 충렬사, 그리고 중국식 발음으로 읽자면 중례츠, 조금 답답한 게 한자는 뻔히 보이고 무슨

뜻인지, 한국식으로 읽음 어떻게 읽는지 다 알겠는데 좀체 타이완 사람들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중례츠'라는 발음 역시 아무리 책으로 보고 눈으로 익혔어도 좀체 입에 붙지가 않아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중례츠, 라는 현판이 걸린 좌우에는 인을 이루라는 뜻의 성인(成仁), 그리고 의를 취하라는 뜻의 취의(取義)라는
 
조금 작은 현판이 걸린 채 내부로 들어가는 세 개의 아치형 정문 위에 걸려있었다.

말하자면 여기는 서울의 현충원 같은 곳이랄까. 일제 세력과 중국 내 공산당 세력과 항전하며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타이완'의 애국선열을 위한 공간인 거다.

해가 중천에서 약간 이그러지고, 그렇지만 이제 잔뜩 열받은 땅이 한창 열기를 푹푹 쏟아내기 시작하는 오후2시

거칠고 하얀 바닥 표면에서조차 섬광처럼 번뜩이는 햇살이 튕겨나왔다.

북경 자금성 내의 태화전을 따라 지었다는 중례츠, 충렬사의 본전에 얹힌 금색 지붕도 어찌나 반짝거리던지.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 밖에 없다 싶더니, 슬금슬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관광버스에서 올컥울컥

토해내지고 나니 어느새 북적북적대고 있다. 정문의 뒷면 현판에는 만고유방, 충의천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들의 타이완을 향한 '애국'의 의기가 오래도록 전해지리라는 희망과 주문, 그리고 그들의 충성과 '의로움'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계시나 점지와도 같은 의미렸다.

공사 중인지라 내부에선 사실 가까이 들어가 살펴보거나 건물 안에 들어가 돌아볼 만한 여지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저 누각 아래 있는 흉상도 장개석의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가 공산당에 쫓겨 내려와 원주민을 압박하며

만들어낸 '타이완'이란 나라에 대한 애국의 대가, 애국의 보상을 위한 공간인 셈이다, 여긴.

화려한 문양들, 고궁박물관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들의 용 문양에는 꼭 발톱이 다섯 개다. 황제의 용에는 발톱이

다섯 개, 왕이나 제후의 용에는 발톱이 네 개나 심지어는 세 개. 조선시대 왕의 곤륭포니 의복이나 장신구에

나타난 용의 발톱은 늘 네 개였다. 사대교린의 국제질서와 관념 하의 세계였으니 그게 당연한 거였다.

태양은 양껏 때려부었지만 그래도 바람이 멎지 않아 다행이었다. 내부 양켠으로 쭉 늘어선 깃발을 쉼없이

희롱하는 바람 덕에 '청천백일기'가 휘날리는 걸 원없이 봤다. 파란 하늘에 선명히 박힌 하얗고 강렬한 태양,

그리고 온통 시뻘건 핏빛으로 가득한 대지. 그게 청천백일기에 담긴 의미 혹은 비주얼이라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매시 정각에 시작하는 위병 교대식을 보기로 했다. 9시부터

17시까지 문을 연다고 하는데, 그럼 17시 정각에도 교대식을 하는 걸까 아님 그냥 위병들이 들어가고 문닫으면

끝인 걸까 모르겠다. 그나저나, 참 촌스럽고 색이 바랠대로 바랜 표지판. 아무리 여기가 국가를 위해 죽어간

영혼들의 애국심과 용맹을 기리는 공간이라 해도, 산 사람은 싸야 할 거 아니냐.

꼼짝도 않고 밀랍 인형처럼 굳어 있던 위병들이 움직이기 직전. 그들은 숨을 쉬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아주 얌전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그러고 있었을 거다.

기합소리와 함께 시작된 위병 교대식. 아마 매 시간마다 정복의 색깔이 흰색과 파란색, 교대로 바뀌나보다.

교대할 위병 두명, 그리고 약간 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인솔자 한 명이 팔과 무릎의 각을 탁탁 맞춘 채

구분동작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제자리걸음부터 시작해 서서히 굳었던 몸을 풀기 시작한 위병 둘.





다섯 명이서 내부로 스무 걸음쯤 걸어들어가더니 한참을 총도 돌리고, 군화로 착착 소리도 내고, 그랬다.

움직임은 과히 나무랄 데 없어서 볼 만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군대 병정놀이따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요새 많이 자제하고는 있지만 또 울컥, 아뉘 그 EBS 강사가 한 말 다 맞잖아. 군대가서 사람죽이는 거 배워오는

것도 맞고, 군대가 애초 사람죽이고 나라지키려고 가는 거잖아. 게다가 그에 더해 온갖 사회의 더러운 꼴의

원형에 익숙해져 오는 것도 맞고, 그렇게 자발성도 없고 동기부여도 안되는 허섭스런 징병제도의 부작용이

긍정적 효과보다 크다 싶으면 다른 방식을 찾아가는 것도 맞는 거고. 근본적으로는 군대나 경찰, 국가로부터

인증된 합법적 폭력집단이 해체되어야 하는 것도 맞는 거고. 뭐가 문제인 거지..?

이들 위병들이나, 이미 이 공간에서 기려길 자격을 획득한 군인들이나, 타이완 쪽에서 보면야 나라를 사랑하고

가족을 지키고 '진충보국'하는 모범사례겠지만, 사실 그들은 적국의 군인과 민간인을 살상함으로써 그걸 가능케

하는 거다. 전쟁터에 총알받이되러 나간다, 는 표현의 어폐는 그걸 숨기는데 있다. 전쟁터에는, 전쟁은, 사람을

죽이러 가는 거다. 그리하여 파란하늘, 하얗게 작렬하는 태양 아래 대지를 온통 적의 피로 붉게 물들이려는 거다.


이 분 파란색 정복에 있는 명찰을 보니 공군의전, 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 흰색 정복은 공군이 아닌 육군이나

해군인 걸까. 왠지 삼군이 번갈아 한 시간씩 지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심증이 굳어졌지만, 그걸 확인하자고

한시간이나 더 여기서 개기자니 딱히 볼 거라곤 교대식밖에 없는 곳에 발이 묶일 순 없다 싶어서 포기.

드디어 교대해 줄 병정 둘이 위에 올라섰다. 꼬맹이들은 어찌나 열중하고 보고 있는지 입을 헤 벌린 채 눈도

똥그랗게 뜨고 있는 게 꽤나 귀엽다.

대 위에 올라서고 나서도 한참 계속되는 일사분란한 '구.분.동.작'. 왼다리 들어, 오른다리 들지 말고 왼다리놔.

왼다리 들고 오른다리 부딪혀. 총 한바퀴 돌리고 멜빵끈에 손가락 걸어, 뭐 요런 식의 성마르고 까탈스런

청기백기 게임처럼 한없이 지속될 거 같은 그들의 움직임이 기이한 침묵 속에 계속되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가끔씩 부딪혀주는 군화발 소리, 그리고 휘둘려지고 꽉 쥐여지는 총에서 비롯하는 철컥대는 쇳소리.

약 십오분에서 이십분, 그렇게 위병 교대식이 끝나고 나니 다시 위병 둘은 밀랍인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어물대는 사이 관광객들을 다시 꾸역꾸역 버스 안으로 소환되어 쌩하니 떠나고 말았다. 



병정 둘이 남았다. 왠지 그들이 딛고 선 중례츠의 바닥이 온통 붉은 핏빛으로 보였다.








* 스포일링의 가능성은 최대한 비켜내고자 하는, 영화를 보고 삐쭉삐쭉 뻗어나간 사변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은 비켜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자칫-아니 백방-구구절절히

사형을 반대한다고 처벌에 반대한다거나 정당한 죗값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라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주렁주렁 엮여야 할 것은 뻔하니,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고 싶다.


사람을 죽인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별 거 아니다. 실수로, 사고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심지어 스스로

목숨줄을 놔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 생명이란 게 얼마나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여느 영화에서처럼 목 한번 돌려주거나 숨통에 바늘 하나 꼽는다고 켁, 나자빠져 버리지야 않겠지만 그냥 목에

밧줄 한번 감아서 땡겨주거나 전기로 지지거나, 여차하면 독액이 든 주사액을 주입해버리면 그뿐이다. 실제로

사형은 그런 식으로 집행된다. 어쩌면 흔히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차에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밀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수고로울지 모른다.


죽이는 건 별 거 아니다. 사람의 육신을,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건 쉽다. 문제는 그 임팩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밖에서 보기엔 법원의 판결이, 공문 한 장이, 국가의 이름 하에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거였지만,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공무(公務)라는 휘광 뒤에 숨으려 해도, 사회의 법과 정의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내세우려 해도, 혹은 피해자의 아픔과 가해자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인 공명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사람이다. 비록 그게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거라 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신성하고 지고한 '초인간적인' 국가 따위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르조아

소위원회..한줌의 사람-그들 역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과격한 거일라나.)


갈림길이 나온다. 이사람은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고, 죄값도 치렀(다고 생각하)으며, 결과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사람은 죄를 뉘우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고, 사회에 돌아가면 계속 죄를 저지를

(처럼 보)이고, 갱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람을 살릴지 저사람을 살릴지,

누굴 죽여도 되고 누굴 안 죽여야 할지의 갈림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신'의 갈림길이다. 앞선 문장

중간중간을 얼기설기 묶어둔 괄호들, 그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징표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오바하는

걸까. 다른 생명을 판단하고 소멸시키는 건 신, 혹은 만물을 주재하는 운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가 맡을

역할이지, 동일한 생명, 인간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저사람을 죽일 때의 죄책감이 다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리 강호순 사건 때나

조두순 사건 때 골프장 갤러리들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쳐죽일 놈, 광화문 네거리에 육시를 할 놈, 어쩌구

막말을 내뱉던 사람들도 밝고 맑은 정의로움과 숭고함을 유지하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니까 막말을 하고 저주를 내뱉고 '죽여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다. 설혹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해도, 또 설마 실제로 직접 손을 써 죽여버린다 해도, 영화 속 집행자들처럼 뭔가가 하나둘씩

무너져버리고 말 거다.


처음에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형제도를 건드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을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 그간 주목받지 못해온 사형제도의 비인간적인 한 측면인 거다.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상한 게 있다. 왜,

집행의 선고자들, 이 사회와 제도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가. 저승에 있다는 

길고 긴 젓가락을 휘두르듯, 그렇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들어 '집행'시키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격무에

시달리거나 피곤해서는 아닐 텐데. 


"우리는 망나니였어" 어쩌구 하는 대사가 있었다. 사회를 위해 법을 집행하는, 좀더 적나라하게는 살인을

떠맡는 존재들. 사회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그들 안의 무엇인가는 어쩌면 사회로부터 죽임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걸 또 다른 '살인'이라 부르기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버리는 건 틀림없는 거다.



* 고백 하나, 사실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순간은 꼭 정말로 사람을 죽일 때만은 아닌 거 같다.

거리에서 전경들과 마주 선 채 투석이 난무하거나 파이프를 맞대고 있을 때, 전쟁터와 같은 그런 상황에서 역시

분노와 공포, 혹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 뭔가

눈먼 야수같은 광기가 뿜어지는 듯한 감각은 두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단지 문제가 사형이

살인인지 아닌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을 조장하는 시스템, 문화, 분위기, 그리고 감수성의 차원까지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이야기다. 꼭 생명을 말그대로 끊어버려야 살인이 아닐 거다.

(물론 당연히도 이른바 '폭력집회'가 잘못되었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를 틀 내에서 해결치 못하고 거리에서 파열음을 내게 만드는 기제 자체가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끈다는

말이다. 2미터 앞에서 돌을 던지는 보호장구 완비한 전경들이나, 자위적 차원에서 무장을 한 시위대, 문제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신용산역에서 내려 조금 걸었더니 저 앞에 문득 많이 보던 건물이 보인다. 특히 '세무사 조xx 사무소'라는 저 파란 간판.

문득,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직접 와보는구나.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제야.

[여기 사람이 있다] 우리들의 '구차한' 밥그릇싸움에 사형을 언도한 그들.

저 위에서 여섯 생목숨이 날아가 버렸다. 망루를 짓고 올라간지 하루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그야말로

'테러분자들을 진압'하듯 불구덩이 속으로 토끼몰이해버렸던 거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은 커녕 3000여쪽의 수사기록도 공개하길 거부하고, 진상 규명조차 마냥 소홀한 정부. 그들은

피해자 측에 대한 책임있는 사과나 유감 표명 등은 고사하고 어떤 대화도 일절 거부해 왔다.

그런 곳이다. 그런 곳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사제단과 피해자대책위, 철거대책위원회 분들이 분향소를

설치하고 매일 추모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내가 갔던 저번주 금요일, 이날은 참사, 혹은 학살이 발생한지 무려

193일째 되는 날이었다.

시끄러운 도심의 소음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점차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신호등을 건너니

아마도 작가선언 측에서 나온 듯한 분이 길거리 선전전을 하고 계셨다. "평범한 시민이었다. 죽여야 했는가?"

뭐라도 들고 가야겠다 싶어서 우선 현장을 지나 근처 슈퍼에서 집들이 선물용 휴지를 사가는 길, 유족분들 중 한분인 듯한

아주머니께 들려드리며 "어머니, 잘 풀렸음 좋겠어요."란 멘트를 하고 싶었다. 건물 위에 언뜻 잔뜩 불에 그슬려 허물어진

컨테이너가 보인다.

자, 여기서부터 일상이 깨어져나간달까. 사람들이 부산하게 쏘다니던 거리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뭔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안하게 만드는, 생경한 단어들과 '낯간지런' 호소들.

선연한 빨강색에 느낌표로 끝나는, 뭔가 강력한 어조로 요구하는 선전물들. 용산4구역 철거민들은 재개발을 틈타

한몫 벌어보겠다고 눈이 벌건 '속물'도 못 되었었다. 바랬던 건 단지 재개발 중에 영업을 계속하기 위한 가상가 제공,

그리고 재개발 이후의 임차/임대상가를 보장하라는 것이었을 뿐. 그조차도 묵살당하고,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건

누구의 책임인가.

전철연의 삑삑거리는 소음 섞인 스피커, 낯설고 무서운 투쟁가, 그런 것들에 대한 관용, 나아가 이해를 바라는 건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사실 무섭고 낯설기는 소리없이 사람을 짓밟는 세련된 공권력이 한 수 위라고.

검찰은 수사기록 3천쪽을 법원의 명령까지 거부하고 벌금을 감수하며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는 아마

용역과 경찰과의 공동 작전을 펼쳤던 정황이나 진압작전이 아무런 안전조치없이 취해졌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있을 거란

추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런 의혹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비공개하는 이유는, 정말 뭔가 있는 거 아닐까.

7월 초에 인터넷 공간에도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다. 경찰의 진압훈련 시범 중에 용산 참사와 너무나도 흡사한 그림이

나타났던 것. 경찰은 이미 용산참사를 '도심 테러리스트 섬멸'작전 정도로 규정지은지 오래인 듯 하다.

분향소 앞을 지키고 늘어선 화분들. 조그마한 꽃집처럼,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봉싯봉싯 꽃망울을 열고 있었다.

꽃이라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을씨년스런 건물에 자리잡은 분향소가 풍기는 허름한 분위기에

더해, 조화라거나 거대한 화환 같은 것들 하나 보이지 않는 삭막함까지 사람맘을 쳐댔을 거다.

분향소는 한산했다. 검은색 전철연 조끼를 입고 다니시는 분들은 의외로 매우 밝고 의연하셨다. 뒤늦게서야 이렇게

찾아뵙고 착잡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돌아다니는 스스로가 더욱 부끄러웠다.

다섯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역시 조그마한 화분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참사 이후 6개월, 아직 이분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끊임없이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이 정부 인사들에게 용산 참사란 마치 먼 옛날 일인양 까맣게 잊혀진게

아닌가 두렵다. 이분들에 대한 완벽하고 단호한 무시.

분향소 왼쪽에 지어진 평상엔 신부님들이 인터넷도 하고, 책도 보시고, 이야기도 나누시며 자리를 지키셨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 오른쪽 평상에 앉아 사람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나지막한 평상은 왠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털썩 주저앉아 잠시 쉬어갈 수 있다고 유혹하는 듯 해서 나도 잠시 앉아 땀도 식히고..신부님과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귀기울여 듣고.

그러고 보니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가시는 모양이다. 수박에 생수에 포도, 사과에 쌀포대까지. 좋은 분들이 많다.

다섯 분의 생전 모습이 그려진 액자가 분향소 옆 유가족 분들의 살림터를 가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치 내장이

터져나온 생선처럼 삶의 '누추한' 흔적들은 여기저기서 불에 그슬린 양동이로,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냄비로

나타난다. 이런 것들을 안전하고 위협없는 공간에 부려놓고 일상을 살아갈 만큼, 그만큼의 보장도 못해주는

정부라니 한심하다. 화가 난다.

유가족분들의 일상 아닌 일상은 분향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한쪽에서 매 식사를 준비했고, 또 건물외벽에

의지해 늘어뜨려진 빨랫줄에는 하루치의 빨래가 널려 있었다. 이토록 신산스런 삶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이분들이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어느 한계에 도달했음을, 정말 그분들 말씀처럼 '악밖에' 남지 않은 싸움이다.

건물을 반바퀴 에둘러 보았다. 어느 지점에선가 올려다본 하늘은 시커멓게 그을린 채 팍삭 허물어져내린 컨테이너의

잔해로 가려져있었다. 울컥, 눈물이 났다.

여기였다. 이곳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들은 용산 주변 출근길을 온통 마비상태에 빠뜨렸으며, 용역들과 공조하여

토끼몰이식 강경책을 일관했고, 안전대책 하나없이 죽어라, 하며 기름불에 물을 끼얹었다.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에는 반짝반짝 세련된 색감의 닭장차가 마치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 프라임처럼 늠름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닭장차 안에도 역시 먹고 살기 위한 양푼이며 냄비, 식판들이야 있겠지만 차곡차곡 잘 갈무리된 채

깔끔하게 숨겨져 있을 거다. 이건 인간의 존엄성 문제기도 하다.

참 허약하기 짝이 없는 철판 한장이다. 폭발물과 위험물질이 가득하고 인근 주민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 판단하여

해치워 버린 거라지만, 실제로 주변 주민들은 아무 위해도 느끼지 않았다고 증언했던 바 있다.

"죽이지 마라. 민중이 이긴다." 죽이겠다고 달겨들면 사실 방법이 없다. 죽고 나면 이렇게, 끝인가 싶기도 하다.

용산참사가 벌어지고 나서 한동안 여론이 술렁댔었고 이로써 정권이 끝난다는 성급한 예측, 기대섞인 전망도 있었댔다.

그렇지만 그렇게 산뜻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 이야기란 거, 현실에서 찾긴 쉽지 않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철거민 분들, 저 망루에 오르셨던 분들의 마음이다. 정권 퇴진시키자고 올라간 거 아니다.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이한몸

열사되겠다고 올라간 거 아닌 거다. 내게 살 길 좀 마련해 달라고, 반토막나고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으니 생계 대책

마련해달라고 올라간 거다. 용역이 경찰과 손잡고 죽어라죽어라 괴롭히니 올라간 거다.


최소한 국가라면, 정부라면, 지들이 국가고 정부를 '자처'하겠다면, 국민이 먹고 살게 해줘야 할 거 아닌가.

가톨릭사회교리에 따르면, 양심에 따라서 거부할 권리란 '공권력,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한다. 전/의경들한테도

못할 짓이다. 그들도 이미 큰 상처를 입었을 터, 거기에 더해 스스로 용기를 갖고 불의에 항거하라 말하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초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명령의 발화자가 더욱 혐오스럽다.


그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을 아프고 병들게 한다.

경찰, 용산 철거현장 강제 진압... 5명 사망 참사
"특히 특공대들은 수십미터 높이의 대형 기중기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참극이 벌어진 농성 현장에 접근했다. 철거민들을 상대로 사실상 대테러 작전을 펼친 것."(데일리중앙, 2009. 1. 20)

 
 

점유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강제 퇴거, 괴롭힘 또는 기타 위협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점유에 대한 법적 안정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 사회권규약 일반논평4)


책을 보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 몇장 힘겹게 넘기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져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다 문득 기사를 보았다. 쌍용차 공장에서도 용역과 경찰의 합동작전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쌍용차 공장에서는 용역들이 새총을 쏘고 불을 지르고, 용산참사에서처럼 똑같이 합니다. 경찰이 엄호하고 합동작전도 하고 경찰 장구도 빌려줍니다. 경찰력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자존심이 있지, 일반 용역깡패에게 지위 안 넘깁니다. 경찰은 경비업법 위반과 중상해죄, 공무원 사칭의 공범입니다. (권영국 변호사)"("테이저탄 맞아 뺨 썩는데 항생제 없이 수술..." - 오마이뉴스)


어제그제, 울음을 삼키며 책을 읽어내렸다. 그게 그러니까 올 초였다. 사람이 여섯 명이나 '학살'당했다. 경찰특공대는
 
용역과 손발을 맞춰 '도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엄혹한 군사작전을 성공리에 펼쳤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
그분들은 장례조차 못 치르고 있다. 만평 그대로, "뒤는 걱정않고 뭉개버렸던"
 
그들은 여전히 건재한 채 또다른 살인, 또다른 학살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재개발문제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고, 2000년의 봉천3동 철거촌에서 며칠 깔짝대며 나름대로 남들보다 보고 들은 게

있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오늘은 봉천 3동에서 이루어진 동계 노동자 빈민 학생연대투쟁(줄여서 빈활)의 첫날이었다.

이미 포클레인에 무참히 무너져내린 빈 집들이 쭉 좌우에 도열한 가운데 성했을 무렵에도 꽤나 볼품없었을 그런 집의 길쪽 창가에나마 여전히 갸날프게 매달려 있던 방범철창들...그건 공권력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비웃는 듯 했다.

겨울철에는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불법임에도, 이주 비용조차 없는 빈민들을 위한 가수용단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철거깡패들을 동원한 폭력과 방화 등의 살인적인 강제 철거가 지금에도 계속 사실상 경찰의 비호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빈민들-대부분이 세입자인데-에게는 약간의 이주비 외에는 아무런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재개발 사업 지역에서 충돌이 그치지 않는 주된 이유의 하나가 되는 거 같다.
가옥이 재산으로만 파악이 될뿐, 실지로의 삶의 터전, 즉 주거의 공간으로는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들을 '빈민'으로 칭하던 그때의 대학생이 사회인이 되고 나니 알겠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가진 꿈은 '내집 마련'.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은지 오래건만, 전체 가구의 40%가 전월세로 살고 있다. 10명이 5,508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이라거나, 전체 인구의 1%가 전체 사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그냥 넘기기로 한다.

소득불균형이 아니라 부의 불균형을 따진다면 나라가 벌써 엎어졌을 거라던 이준구 교수님의 이야기도 그러려니 한다. 


정말 복장터지도록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거다.

왜. 미분양 아파트는 쌓여만 가는데, 계속해서 더욱 비싸고 넓고 고급스런 아파트만 지어지고 있는 걸까.


좀더 적은 세대수를 가진, 좀더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아파트를 위한 현재 방식의 재개발이 지속되는 한,

철거민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집이거나, 혹은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밥그릇' 그 자체를 일부 땅주인들과

건설업자, 공무원들의 이익을 위해 통째로 넘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세입자 보상은 재개발 사업의 너무 늦은 단계에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진 상황에서 그저 강요된 독배처럼 이뤄진다면.
가게에 대한 투자금과 전세금
등을 100% 보상받지

못할 뿐 아니라, 기존의 영업지역, 생활권 이외의 지역에서 다시 장사를 일으키라며 막무가내로 내쫓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인접지역은 재개발 열풍에 휘말려 잔뜩 전세금이 올라버린 상황, 사람들은 체념을 강요당한다.


그나마 아직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

가능한 재원을 박박 긁어모아 가능한 인근한 주거지로 옮겨간다. 물론 순식간에 두배 이상 뛰어버린 전세금을 감당하기

쉽지 않고 사고처럼 닥친 '재개발사업'에 재산도 반토막났지만, 그래서 이전보다 좁고 열악한 환경으로 가기 일쑤지만,

어쨌든 '입에 풀칠하란 법은 없다'는 속담이 아직 힘이 된다. 이전에 비해 더욱 힘겨워진 삶이고, 심지어 집주인들조차

잔뜩 올라버린 집값을 감당치 못하고 튕겨나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주변에 그나마 연착륙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철거되는 지역에서 곧 철거될 지역으로 이동한다. 계속

낙후한 곳으로 밀려나고 밀려나 어느순간 '소시민'에서 '거지'로 전락해버린 걸 깨닫는 사람들. 그렇게 밀려날 수 없어서

항의를 시작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고 만다.


어쩌면 그들의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애초 도심에 비비고 살고 있었던 게 잘못이다.

원하던 원치않던 자녀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학원을 옮기는 등 아이들 교육 환경이 바뀌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다니던 직장이 조금 멀어지고, 출퇴근이 조금 어려워지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조그마한 가게 없어지면, 어디서든 새로 열어 손님 새로 만들고 단골 만들면 되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이웃간의 정이니 마을의 화목함 따위야 돈없고 촌스런 자들의 자기위안일 뿐이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보다 쾌적하고 안락하며 고급스러워서 돈되는 건물을 올리겠다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끄는 대로 국가발전을 위한

최적의, 최고효율의 자원 배분을 하겠다는데. 그게 비록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착각.


사과라도 해야 할 판이다. 가난한 사람이면 가난한 사람답게 교육에도 욕심 안 부렸어야 했고, 직장이니 가게니 어차피

당신들 눈에 보이기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텐데 그런 걸로 쪼잔하고 구차하게 굴지 말아야 했으며, 삶의

터전이니 뭐니 촌스러운 단어로 '떼잡이질'했던 것들 너무너무 반성하고 죄송한 마음 뿐이라고. 그런 건가.


용산은,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는 두 가지를 요구했었다. 지금까지 장사해왔던 이곳에 주상복합 상가를 지은 후
 
다시 이 곳에서 영업할 수 있도록 상가를 임대조건으로 제공하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로는 공사기간 중 영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가수용상가를 개발지역 내에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밥그릇 싸움이다. 다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밥그릇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개발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살던 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생존권만을 확보해 준 상태에서 개발을 하라는 거다. 세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주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안도 내놓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손해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던 거다.


그리고 그건 모두를 대신한, 생업에 바쁘고 어쨌던 삶을 이어가기에 바쁜 사람들을 대신한 항의였다. 서울에만 50개가

넘게
짓겠다는 뉴타운 공약을 비롯 전국각지에서 벌어지는 재개발 사업, 그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재개발 지역의 혼란상.
 
잔뜩 올라버린 집값과 앉은 자리에서 슬금슬금 빼앗기고 있는 우리네 재산. 없는 이들의 재산이 있는 자들, 세입자 한번도
 
안 해봐서 세입자 심정 모르겠다며 똥배짱 튕기는 용산구청장, 건설자본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고발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용역과 경찰과 법과 언론에 위협받았으며...끝끝내 살해당했다.


"지금,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하는 자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난쏘공의 저자

조세희 작가님은 말한다. 불행한 사람들, 불행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연대의 깃발 하나로 목숨을 건 전철연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이 돈을 받았다느니 어쨌다느니 언론이 떠들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계절 넘게 망루 투쟁을

벌였던 용인 어정상가/공장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대신 돌아가신 거라며 눈물흘렸고, 용산4구역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도와주러 왔다가 돌아가신 분들때문에 고개를 못든다며 눈물을 흘린다.


아무래도 조세희 작가가 놓친 한 부류가 더 있다. 행복해하는 자, 혹은 최소한 눈물흘리지 않는 자의 한 부류가 더 있으니,
 
그들은 살인자다.


아무리 그들이 돈없으면 죄인이요, 망루가 너희를 반기리니 회개할지어다..라고 떠들지라도, 세상이 온통 가진자

위주로 돌아간다는 섬뜩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이 정말 끝끝내 진실이라 할지라도, 모처럼 하루 휴가를 낸 내일,
 
내일은 박카스라도 한 박스 사들고 용산에 가야겠다.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사는 것 같지않게 살아가시는 분들..

여기도 사람이 있다고, 죄송하다고 찾아뵈야겠다.



용산참사 반년, 사회 원로 대표 시국선언(7.23)


- 이전 포스팅들

▶◀ 불도저식 진압, 이건 살인이고 학살의 시작이다.

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展"에 다녀왔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촌스러운' 용산참사와의 부끄러운 데자뷰







여기 사람이 있다 - 10점
강곤 외 지음/삶이보이는창




* 스포일러가 약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스포일러는 뭐니뭐니해도 "손수건을 준비하라"는 팁..이 아닐지.


사랑하는 열 살짜리 아들이 한순간 눈앞에서 스러져 버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고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가누어가는 남은 세 가족, 에단, 그레이스, 그리고 딸-여동생이 있다.

에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비난할 사람을 찾고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아들의 부재, 그런 당혹스럽고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누구인지, 누가 그의 아들을 치고 도망갔는지 밝히고야 말겠다며 광기에 가까운

집념과 증오심을 불태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아내 그레이스가 자칫 자책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해서, 혹은

자신조차 아내에게 원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억지로 몰고 나간 감정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레이스는 이미 떠난 그녀의 아들을 정리하고 남은 가족들을 잘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연신 경련하듯 흔들리는 화면은 그녀의 바스라질 듯한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더이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니 법적 절차니 운운하며 떠난 아이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아픔을 참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 입술에 힘을 주며,

그 슬프고 힘겨운 바람이 멎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느낌. 보고 있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사이좋던 오빠를 잃은 여동생은, 영문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꼬맹이지만

또 하늘에 있을 오빠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바칠 줄도 아는 녀석이다.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라는 식의 당위 없이 있는 그대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또 보낼 줄 아는 게 아이들 아닐까.



그 사고로 인한 슬픔을 가누어가는 또다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고를 살인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그였는지라, 실수로 쏟아버린 물처럼

의도치 않게 벌이고 만 사고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 괴로움을 안기고 만다.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끌고, 거의 반사적으로 증거를 은폐하고, 또 겨우 짜낸 용기도 무성의한 경찰들 앞에서

사그라들어 버리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사이, 그 사고는 살인으로 바뀌어 간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그의 압박감과 죄책감, 그리고 어느새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걸 둔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도록 바꿔버리는 시간의 강력한

산화력에 대항해서, 그와 에단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 마주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가슴의 떨림, 그리고

그 진동을 상대가 눈치채면서 이야기는 폭발하듯 터져오르는 순간으로 급속히 달려나간다.


비극이란 건, 단순히 이야기가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그 인간의 숙명같은 것..뭐랄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뒤얽히고 결국은 옴쭉달싹 못하게 되는 그런 '통발'같은 스토리를 이른다고 했다.

어느 한편을 들어서 쉽게 다른 한 편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 가슴이 답답하고 꽉 메이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게 만드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비극.



모두가 아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사고라면, 누군가에게 아픔을 적극적으로 떠넘기는 게 살인 아닐까.


결국 한 아이의 사고는 남은 가족들이나, 그 죽음을 직접 초래하고 만 당사자, 그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 모두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을 남긴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그 사고, ACCIDENT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다른 단어가 아닌 '사고'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고와 살인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모두 전가해버리려는 의지를 갖고 행하는 건 범죄, 살인.

그리고 남은 자들의 아픔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모르쇠하려는 게 아니라 기꺼이 내 몫을 나누어 받겠다는 자세라면

실수, 사고.


사고를 낸 드와이트, 죽은 아들의 부모인 에단과 그레이스가 모두 '인간'이어서 다행이다. 그들은 삶을 살아나가다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맞닥뜨렸으며, 그들 모두 그 사고의 피해자였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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