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비밀서재 #히틀러 #서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책을 소장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근거가 될까. 적어도 1만6천권의 장서를 개인소장했고, 그의 사상과 행동이 역사를 뒤흔든 사람이라면 그의 독서이력과 서재는 큰 힌트가 된다는데 이견은 없겠다. 사실 나는 그보다 자취가 작은 일반인, 한국같은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라거나 평범한 갑남을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애서가를 자처했고 늦은 밤까지 하루 한권의 책을 읽어내는 것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의 제3제국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철학자로 니체나 쇼펜하우어를 들먹인 것도 주효했을 거다. 지독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뒤범벅된 그의 이른바 민족사회주의는 그래서 더욱 파악하기 어려워보이는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대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어떻게 엮어내겠단 건지, 거기서 파생되는 논리적 귀결들이 서로 절그럭거리는 건 어떻게 해소하겠단 건지. 유대인은 왜 이렇게 늘 인류의 적이 되어 왔으며, 아리아인종이란 건 대체 어디서부터 순수하고 어디서부터 '오염'된 건지도. 등등, 끝이 없다.

그렇지만 과연 그가 그만큼의 소화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아니었단 게 이 책의 일관된 메시지다. 그는 체계적인 독서를 한 적이 없고, 그의 사고는 독서와 함께 부딪히고 발전하고 변화한 게 아니었단 이야기다. 문제는 그의 독서법. 그는 자신의 근거없는 신념과 망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조각들을 찾는 방식의 독서를 했고, 개별 철학이 진지하게 구축하려 한 세계와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런 아전인수식의 발췌독은 현란한 수사와 웅변에 필요한 벽돌은 제공할지언정 본인의 사고와 사상을 위한 자양분은 뽑아내지 못한단 이야기렸다.

이 대목을 아전인수식으로 다시 인용해보자면, 글쎄. 양보다 질이다. 몇권을 봤는지가 아니라, 개개의 책들이 어떤 맥락과 통찰력을 갖추고 본인에게 도전해왔는지가 중요하단 말이다. 교양을 진열하기 위한 지대넓얕식의 지식 소비가 갖는 위험성은, 혹은 장학퀴즈/일대백식의 퀴즈쇼에 특화된 암기지식이 갖는 위험성은 전혀 본인을 흔들지 못하는 그 무독한 지식에 있다. 백번을 흔들리고, 아프고 또 아파야 하는 건 청춘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개개인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지식이라면 결국 애서가이자 웅변가 '히틀러'가 되는 게 고작일 테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 독서 경험과 서재의 구비를 통해 히틀러의 뼈대가 될 신조와 인생을 짚어준다는 것. 사실 지금까지 과문한 바 히틀러의 삶과 그의 신념에 대해 제대로 짚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투쟁'을 읽어보는 건 고사하고 그가 외계인도 남장여자도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반인류적인 짓을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조각 하나 찾지 못했으니깐. 그렇지만 그의 사고퍼즐을 담당한 책들이 직조되면서, 그 역시 평범한, 혹은 다소 지적으로 부족하거나 성찰력이 부족한, 그래서 결단력만 가득한 멍청이였지 않을까 상상하고 이해해보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매일 비슷한 일정이다. 아침 7시반쯤 출발, 오후 4시에서 4시반쯤 대충 도착. 가끔 오후 6시까지 걷기도 하고, 혹은 아침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움직인 적도 있긴 하지만 대충 그 정도씩만 걸어도..하루 열시간 가까이 걷는 거구나.

 

 

히말라야 캠프의 롯지는 고작 세 동이던가, 위로 올라갈수록 롯지 수도 줄어들고 마을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곳이 많다더니 정말이다.

 

그래도 납작평평한 돌들로 이렇게 테라스도 만들고 계단도 쌓아두고, 생각보다 훨씬 잘 정비되어 있어서 놀랐다.

 

그렇다고 따뜻한 온수가 나온다거나 난로가 지펴지는 건 아니어서 꽤나 추웠지만, 덕분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땀과 땟국물이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방금까지 열심히 걸으며 온몸 가득 흠뻑 젖었던 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뽀송뽀송해진 상태.

 

건물 외벽에 나와있는 요 단촐한 시설이 세면대. 여기에서 씻고 이닦고 발도 닦고.

 

어느 포터의 등짐. 대나무로 엮어 만든 등짐에 대충 질긴 천을 찢어 묶어서는 어깨끈을 만들었다.

 

히말라야 캠프 앞쪽의, 아마도 공용 설비라고 해야 하나. 뭐 딱히 롯지끼리 니꺼내꺼 갈라 쓰는 분위긴 아니라지만 여긴 위치상 공용.

 

속속들이 집결하는 트레커들. 촘롱 이후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오르는 길은 이길 하나밖에 없으니 사람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눈인사만 주고받던 사람들이던 '나마스떼~'하고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이던 결국 몇번씩 얼굴을 마주치게 된다.

 

 

아직 우기의 끄트머리라 그런가, 그러고보면 4일차에 이르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왔다. 그나마 하루 빼고는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걷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중간에 하루 비맞으며 마침 굉장히 오래 걷고 났더니 굉장히 타격이 크다. 옷도 다 젖고.

 

3천미터 어간에서부터 주의해야 하는 고산병.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거나, 식욕이 없다거나, 몸이 무거워지는 등등 다양한 증세를

 

보인다고 하는데, 요새는 고산병 약으로 (혈관 확장효과 때문에) 비아그라를 많이 쓰기도 한다고 한다. 그치만 현지 가이드의 추천을

 

듣건대, 그리고 내 경험상으로도 단언컨대, 고산병에는 마늘수프가 최고다. 갈릭 수프.

 

저녁은 간단하게 갈릭수프와 감자전 비스무레한 것. 갈릭수프는 기대 이상으로 꽤나 맛있었고, 몸도 따뜻하게 덥혀주는 효과까지.

 

네팔같은 빈국의 경제 상황을 가늠케 해주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기본적인 생필품들의 퀄리티를 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쪽이 칼날인지 헷갈릴 정도로 얇디얇은 저 손잡이들. 칼뿐 아니라 숟갈이나 포크 역시 마찬가지다. 칼날만큼 얇은 손잡이.

 

그리고 가스 버너. 한국의 등산가들이 갖고 와서 쓰다가 놓고 갔다던가. 왠지 이 동네에 딱 어울리는 물건이지 싶다.

 

 

그리고 전기조차 귀해서 알전구가 빠져 있는 내 숙소방. 전기가 끊긴 건지 전구가 비싼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게 지급된 초 한자루.

 

바깥 기온과 딱히 다를 바 없는 실내 기온 때문에 오리털 침낭을 덮고 그 위에 이불을 또 덮었지만 별무소용이라, 따뜻한 물을 다시

 

주문해서 계속 마셨다. 양초도 어찌나 조악하고 조그맣고 얇은지, 생일 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초라고 해도 믿겠다.

 

그래도 이토록 짙고 농염한 어둠 속에서도 양초 한 자루, 그리고 헤드랜턴 두개를 가지고 히말라야의 긴긴 밤동안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가져갔던 책이 네 권인데 전부 다 읽고 돌아왔다.

 

 

 

 

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2. 이제 별걸 다 시켜주시는 우리 초하님♡(http://chohamuseum.net/241)

릴레이는 뭥미..하고 내용부터 살펴 보았다. 독서란 '네모'다, 라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기회를 주는 릴레이다.

누가 묻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대답들이 있고,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하지 않는 대답들도 있는 법인데,

아마 자신에게 독서란 무엇인지,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그러한 것 중의 하나일 거다.

1. 독서란 [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를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명을 지정해 주세요
.
4. 릴레이는 6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
5. 기타 세칙은 블로그 릴레이의 오상(五常)


이미 많은 분들이 쉼없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독서가 자신에게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셨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키워드가

겹치지 않을까,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위의 3번항, 누구한테 넘길지를 정하기 전에 누가 이미 답을 하셨나 확인해 보고

싶어서 한분한분 찾아가보았다. 머..무슨 생명의 나무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궤적을 되짚어보는 험난한 여정이어서,

그냥 조금 찾아보다 말았는데, 얼추 기억에 남는 네모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아디쉬님에겐 "지식의 습득, 그리고 그에 의한 즐거움". (http://adish.tistory.com/123)

초하님에겐 "책 나눔". (http://chohamuseum.net/241)

맑은독백님에겐 "거울". (http://rayny.net/entry/릴레이-나의-독서론)

웰덴지기님에겐 "재미". (http://walden3.kr/1873?TSSESSION=140467c038b6c304337c42b25d25399b)

Read&Lead님에겐 "월아(越我)". (http://read-lead.com/blog/entry/월아-알고리즘?TSSESSION=131722e74232374d4ad74d43284e8006)

다들 너무너무 글도 잘 쓰시고, 생각도 많으시고, 게다가 책도 많이 보시고 포스팅도 많이 하신다는..ㄷㄷㄷ

이미 나올 말은 다 나온 게 아닌가 싶어서..살짝 쫄아버렸다.


1-1. 내게 책은, 자석이다.

내게 책은. 자석이다. 독서가 뭔지 답하기 전에, 우선 책은 그렇다. 자석이다.

책을 열기 전부터, 제목이나 작가, 혹은 약간의 사전지식만으로 내 안의 뭔가를 끌어당기곤 한다.

그건 내가 어떤 감정상태에 있는지, 어떤 불만과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혹은 어떤 부문에서의 갈증과

무식함을 느끼고 있는지에 따라 달랐지만, 거칠게 구분하자면 어려서는 문학이었고, 고등학교 때에는

역사였으며, 대학교 때에는 사회과학 도서가 특히 강력한 자력을 띄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요새는, 책이 가진 자력에 이끌리기보다는, 뭔가가-알라딘이나 위블 등-따끈한 신간 서적들을

하늘에서 떨어뜨려주고 있다. 가끔은 내게 징징 울리며 마력같은 자력을 발휘하는 책들을 제쳐두고 시간의
 
흐름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신간, 게다가 소설류로만 편중된 책들과 마주한다는 게 속쓰릴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요샌 다시, 사회과학 서적류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고 있다. 생체권력을 다룬 푸코라거나,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들..


1-2. 내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렬이다.

내게 있어서 독서란 스스로를 정렬시키는 행위인 것 같다. 자석 끝에서부터 파닥이는 철가루의 정렬처럼.

불쑥 들이밀어진 자석에 어김없이 감응하며 바싹 곤두서는, 혹은 두개의 자석 사이에서 파르르 긴장하는

그 이미지처럼, 그 선명한 떨림과 가쁜 호흡. 저자와의 섬세하고도 마력적인 조응. 그렇게 책을 읽으려 한다.


그게 비단 정묘한 개념과 로직으로 한층한층 쌓이는 사회과학 도서가 아니라 설렁설렁 넘기며 '느끼면 되는'

시집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가능한 푹 빠져들어 그 책이 보여주는 세계와 만들어내는 아우라를 한껏

즐기고는 그게 내 안의 어디를 건드리고 있는지, 무슨 부분을 채워주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은

행복하다.  내게 빈곤했던 상상력, 표현, 내가 보지 못한 풍경,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 혹은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아이디어와 그걸 극한까지 밀고가는 사고 유희들을 따라 기꺼이 저자들과 나란히 서있어 본다는 것은.


한 권을 읽으면서도 내 안의 무수한 철가루들이 이리저리 파닥대며 종횡하는 걸 느낀다.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물만났다는 듯 쌩하니 어딘가로 날아가붙고. 서로 상충하거나 다른 시각을 가진 책들이 이어진다 치면

철가루들은 더욱 정신없이 휘몰아치고서야 잠시 정렬..혹은 휴전 상태로 들어간다. 하물며 내가 안으로만 품고 있는

이야기를 밖으로 토해낼 때 일어나는 소요 사태란.


그러고 보면 '정렬'이라기보다는, 철가루들이 떠다니며 그려내는 무늬랄까, 해변가 파도가 그려내는 모래사장의

무늬랄까. 그런 것이 나의 독서인 것 같다는 자괴감이 한 웅큼 불쑥. 생각보다 사람을 바꿔내는 책이란 많지 않다는

깨달음도 한 몫했다.


3. 윤뽀님(http://qtotpz.tistory.com/)과 나른한고냥이님(http://petiteneco.tistory.com/)

블로그에 대해 얹어주는 제각기의 의미와 가치들이 있겠지만, 사실 내 글쓰기는 우선 나를 위한 행위이다. 얼마전

똥파리의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두고, 자신을 위한 영화라 당당히 밝혔던 장면이 너무도 솔직해 보였고 와닿았었다.

그게 내 블로그에 '나를 위한 이야기' 카테고리가 별도로 있는 이유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꺼려하지도 않고 냉소적이지도 않다. 차라리, 기본적으로 나를 위한 이런 주절거림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발판이 되길 바란다는 게 맞을 거 같다. 그런 소통의 념을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기꺼운 고심끝에 두 분께 짝대기를 향해 본다.


책을 정말 좋아라 하시며 얼마전 제게 동족 '괴물'을 업어가신 윤뽀님,

그리고 요새 배부른 막내사원이라 느끼시며 뭔가 '자기계발'의 욕구가 강렬하신 나른한고냥이님.

부담갖지 마시고, 잘 부탁드려요~∩_∩*

애초 6월 20일까지라는 마지노는 누가 정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그대로라면 두 분께서 문을 닫으심 되겠군요^^



덧붙임1_

'정렬'이라곤 했지만, 독서의 여운에서 벗어나는 순간, 혹은 다른 책으로 덧씌워지는 순간 대부분의 형체가

흐트러지고 만다. 아무리 울림이 크고 깨달음이 깊은 책이라 해도 나의 내부를 보기좋고 이해하기 좋도록

완결된 형태로 정돈/정렬하는 건 불가능할 게다. 아마 그건 죽은 후 관짝 뚜껑이 덮일 때쯤에야 가능하겠지.

흐트러진 걸 좋아하고 모순투성이인 철가루 탓이지 자석 탓할 일은 아니다.


덧붙임2_

예전에는 타블라 라싸, 아무것도 씌여지지 않은 공간이었는데 차츰 뭔가 고집스럽고 꼿꼿한 것들이

생겨나면서 그 '정렬'을 방해하는 것들도 많아졌다. 빠릿빠릿 움직이며 촥촥 모양을 그려내는 유연하고

가벼운 몸놀림의 철가루가 아니라, 둔하고 무딘 철괴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시, 어설프게 아는 건

아예 모르느니만 못한 건가.




강준만 교수의 글은 대학 다닐 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었던 그의 말마따나 그의 글은

시간의 힘을 오랫동안 이겨낼만큼 깊이있고 섬세하게 다듬어졌다기보다는, 시사적인 이슈에 맞춰져 다작으로

승부하겠다는 느낌이 짙었던 탓이다. 아마도 그런 탓인지 다소 까칠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말글같은 그의

줄글에 담긴 내용이란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제기, 혹은 약간 더 치고 나간 정도의 이야기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나 학벌문제에 대해서나 지역갈등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 책은 제목을 어디선가 들었을 때부터 꼭 한번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간극이란 문제에 대해서 좀 관심이 뻗어있을 때기도 했고, 외교학과(라고 쓰고 국제정치학과 혹은 국제관계학과라

읽어야 할 거다)를 나온 탓에 어디서 줏어듣기는 한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의 개념을 빌어 한 나라의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논하려 하는 듯한 아이디어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필명을 얻었을

때 쓰던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풍모가 그대로 묻어나는 제목, "지방은 식민지다." 그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다.


'내부식민지론'은 한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중앙과 지방 간의 극심한 총체적 격차가 구조화되어 급기야 지방이

중앙의 발전 및 유지를 위한 착취의 대상, 즉 식민지로 기능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최장집교수 등이 이러한

내부식민지론을 한국에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경우 환원론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하는 데 대해, 강준만교수는

풍부한 사례를 들어 강력히 반박하고자 한다.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정치..그 어느 면에 있어서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주요한 사회 모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자잘한 칼럼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해 지방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지방 언론이

가져야 할 마땅한 책무와 역할에 대해 유독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방언론이 실제로 지방 자치제도와 경제성장의

도모, 기타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침 이 책을 다 읽어갈 즈음, 설날을 맞이해 '지방'이 모처럼 방송 앞머리를 장식했다. 휴식과 여가의 공간이자

도시인들(서울사람들)의 향수와 감정적 치유의 원천으로 남겨진 공간,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원형적 전통과

문화,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고 믿어지는 그곳. 그곳으로 도시인들은 꾸역꾸역

밀려내려갔고, 또 다시 '출세를 위한 공간', '한국의 중심' 서울로 되밀려 꾸역꾸역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잠복했던 한국의 지방은, 강호순이 지방의 야산과 한적한 국도를 휘저으며 연쇄살인을 저지를 때에야 또 방송에

출현하고 있는 거다.


그의 짧은 칼럼들을 교육, 정치, 언론 등 큰 주제에 따라 모아놓은 이 책에는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당장 실천

가능할 법한 방책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서울 소재대학들이 경쟁우위를 갖는 것은 바로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고 일갈하면서 그것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쓰자는 이야기나, 지방에 난립해 있는

토호친화형 언론들을 솎아내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소수의 언론을 밀어주자는 이야기, 그리고  연고주의를

강고하게 재생산하는 비공식적 집단들인 동창회, 향우회 등이 차라리 공익적인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조금은 쇄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그 모든 이야기들은 언제나 원칙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반응을 유발할지 모른다.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거나 임기응변에 불과하다는 식의 참 쉽고도 힘빠지는 비판말이다. 그걸 의식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매 칼럼마다 꼭 지레 항변하곤 한다. 이것 말고 실제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더 좋은 대안이

있다면 말해달라. 무릎꿇고 경청하겠다, 하고.


안타까운 건,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을 십분 고려하고 원칙을 어느 정도 양보하며 제시하고 있는 그의 대안들조차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다. 그는 지방자치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를 이야기했지만 외려

지방자치제도 자체를 폐기하거나 유명무실화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는 지방문화와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매끈한 '서울공화국'에 약간의 균열을 희망하며 그 모루와

망치로써 지방 언론을 주목했으나, 오히려 지방 언론들은 전부 말라죽어버리거나 더욱 지방 토호와 협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그가 말한 내부식민지로서의 지방이 중앙에 상납해야 할 몫은 점점 커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강준만 교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원칙을 좀더 양보하고 보다 유연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다시

궁리해 낼 것인가, 혹은 다시 원칙을 내세우고 다소 선동적이고 비타협적인 이야기-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소간 선정적일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그는 그가 제시한 '내부식민지론'이 강고해진다는 점에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등장 초기에 비해 조금씩 힘이 빠지고 퇴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식의 진동을 그가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대안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딪히게 될 한국의 완고하고도 답답한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방은 식민지다! - 8점
강준만 지음/개마고원


(우선 문학류라 묶일 것들부터 정리..)

보르헤스,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의 단편들에서 풍기는 현실 너머의 현실에 대한 감각.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냐..랄까.

정지아, '봄빛'
- 점심시간 짬을 내어 읽기에는 단편집이 좋았다.
"소멸을 의식함으로써 똑딱 하는 소리와 함께 흘러가는 이 순간은 더욱 생생해졌다. 여자는 소멸해가는 중이었고,
그러나 아직 살고 있었다." 

장영희, '축복'
- "헤매는 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행복해보인들 '미래'를 믿지 말라."

주제 사라마구, '눈먼자들의 도시'
- 눈이 먼 자들 사이에서 눈뜬 자는 되려 병신일 뿐 아니라, 온갖 추악함을 생생히 감각해야 하는 천형을 받은 몸.

주제 사라마구, '눈뜬자들의 도시'
- 으레 그렇듯 보수 40%, 중도 50%, 진보 10%랬던가..그 써늘한 냉소가 허울뿐인 민주주의를 향했다.

노신,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 식민지 지식인의 양가감정, 지키고 긍정해야 하는 자신의 뿌리로서의 민족과 동시에 깨우기 위해 비판하고
부정해야 하는 과거의 것으로의 민족. 그 사이에서 균형잡고 줄타기에 능한 노신.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 프랑스 가기 전에 파리의 몇몇 풍경에 이야기들을 심어두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다. 종교적 편향이 없는 내겐
그다지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그 유리 피라밋 아래 조그만 피라밋이란 게 대체 어딘지는 결국 못 찾았다.

코맥 매카시, '더 로드'
- 광고문구에서 표현되듯 이책은 묵시록인 걸까. 불을 운반하는 아버지와 아들, 그들이 가닿는 감정의 깊이와
순정함을 보면서 난 자꾸 그 말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는가.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그가 20대에 썼다는 이런 소설, 나도 한번은 쓰고 싶었던 소설. 사랑이 태어나고, 자라고, 꽃들을 피우고, 죽는다.
그리고 또다시 상처를 머금고 씨앗은 자란다.

남무성, 'Jazz it up'(1-2)
- 재즈의 기원부터 전개 과정, 빛나는 뮤지션들까지 만화체로 풀어 설명한 책. 중간중간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나올 때 맛보는 마치 퍼즐조각의 제자리를 찾아낸 듯한 쾌감.

파울로 코엘료,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점심시간 짬짬이 일주일에 걸쳐 읽었던가. 뜬금없이 하루키에 비기자면, 하루키가 시니컬하고 삐뚤어진 태도로
'그래도 살아 제길' 정도 이야기해줄 때, 코엘료는 왠지 아름답고 부드러운 밤하늘을 가리키며 '아름다운 밤이에요'
할 거 같다.

주이란, '혀'
- 조경란과의 표절논쟁으로 떠들썩해진 덕에 굳이 사서 읽었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왠지 나도 소설이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태까지는 스스로의 감정을 풀어내기도 힘든데 감정이입따위 해가며 픽션을 쓸 염은 없었다.

한상복, '배려'
- 이런 류의 책..자기계발인지 뭔지, 정말 혐오한다. 치즈를 누가 옮겼던 말던, 어차피 그런 교훈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이야기의 '원형'은 넘치도록 많다. 왜 같은 이야기를 온갖 디그레이드된 버전으로,
그것도 건방지고 오만한 말투로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지. 그나마 다행히 숙제였던 이 책은 좀 낫다 싶었지만.


(다음, 비문학류랄까, 아님 인문사회과학류랄까..)

조지프 캠벨, '서양 신화-신의 가면3'
- 레반트 지역의 남성신이 어떻게 그 이전의 여성신들을 전복하고 전유했는지. 성경에 매장된 채 변형된 세계.

프로이트, '정신분석 입문'
- 프로이트의 '예술, 문학, 정신분석'을 보고 싶어서, 워밍업차 오랜만에 다시 한번 일독.
그는 참 무서운 사람이다. 자신의 사고를 겁없이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갓난애의 천진난만함은 유아기의 성욕으로
해석되고, 엄마와 아들, 아빠와 딸의 관계를 문명의 외피를 벗기고 사유하려는 그의 강철같은 정신.

프로이트, '꿈의 해석'
- 읽다보니 꿈의 해석도 한번 다시 읽고 싶어져서.

프로이트, '예술, 문학, 정신분석'
- 인간이 평등함을, 혹은 평등해야 함을 말하지만. 인간은 무의식 앞에서 평등하다, 아마도 그것만이 있는 그대로 진실일지 모른다.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한" 정권이라는 상투어, 그리고 대한민국헌법1조를 말하는 자는 국민(Korean)이 아니라
인민(people)이어야 한다는 해석..배제함으로써 포섭하는 사회의 갈가리 찢어 관리하는 시스템을 그려보인다.

최장집 등,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2007년에 나온 이 책 제목 앞에는 몇마디가 더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명박이 당선되기 전인 2007년 현재".
이 책에서 낙관인줄 모른 채 깔고 시작했던 전제들이 몇몇 휘떡 뒤집힌채 허우적대고 있는 2008년 말.
 
앤서니 기든스, '노동의 미래'
- 솔직히 학자들이 미래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내면 보고 싶지 않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 자체가 워낙 넌센스
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몇몇 개념어를 강조하고 싶은지 미래에 커다랗게 빨간 글씨로 그런 아이디어를
그려넣는다. 별로,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 이름은 익히 아는데 내용은 모르는, 마치 연예인같은 책 중 하나였다. 일본에 가지 않고도 이런 깊이와 균형잡힌
시각의 분석이 가능하다니..하고 놀랬었다. 그리고 이미 이 책이 있는데 왜 '일본은 없다' 따위 쓰레기가 소비될까
잠시 (순진하게도) 의아해졌더랬다.

만델라, 'Long walk to freedom'
- 751페이지짜리 문고판. freedom fighter라는 역할을 혼신의 열정으로 연기해내는 만델라..를 보는 것 같다. 그는
현재 마흔여섯살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섬에서 복역 중이다. 여기가 현재 내가 읽는 468페이지의 만델라.

강준만, '지방은 식민지다'
- 서울제국을 위한 내부식민지. 남한 내 비서울지역. 국토균형발전이니 뭐니 말도 많지만, 결국 지방 스스로의
민주적 역량과 실질적 제도적 정비의 뒷받침이 없이는 온통 서울로 빨려들어갈 뿐이라는. 돈도 사람도.

최일도, '이밥먹고 밥이되어'
- 밥퍼공동체에서 봉사를 하고 받은 책. 목사라지만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정말 목사인 것 같다.

최병일, '한미 FTA 역전시나리오'
- 나무가 아깝다.

'글로벌 시장을 리드하라'
- 면접준비용 책이었다.

앨빈 토플러, '부의 미래'
- 미래..라는 단어 갖고 사람을 현혹하는 건 이제 그만. 지금의 시스템이 어떠한 과거의 유물과 현재의 부산물로
어떻게 융합되어 있는지부터 철저히 따진 후에야 고작 예측 정도가 가능할 텐데..대체 무슨 과신인지.

'세계는 지금 이런 인재를 원한다'
- 엔트로피의 법칙을 안다면, 이런 책은 사지도 팔지도 만들지도 말자.

(정기적으로 본 것들..)

시사IN
- 이명박 사진 좀 올리지 말라고 독자의 편지에 투고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TIME
- 미국을 조정한다고 믿고 싶은 자들이 보는 잡지랬던가..Economist가 실제로 미국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보는 잡지라고 했던 거 같아서 바꿀까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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