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비가 쏟아붓고 난 목요일, 트레이드 타워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멀찍이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한조각 찢어져서 떠가는 애기 구름 하나.

 

건물 옥상에서 밤에 깜빡깜빡거리며 비행기 등의 충돌을 방지하는 붉은 등 너머로 남산타워까지 보이고.

 

역삼역과 테헤란로 저너머 관악산자락이 왼켠으로 웅크리고 있다.

 

 

높은 구름 그림자가 한강에 얼룩덜룩한 흔적을 남기고, 한강의 서안과 동안에 빼곡한 아파트들.

 

봉은사의 초록빛 녹지공간과 그 너머 담색 물결의 한강, 그 위엔 새하얀 구름이 떠가는 푸른 하늘.

 

 

주변을 얼추 돌아보고 나서는 옥상 위 구경. 군사시설로 쓰였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뭔가 낡고 녹슨 시설물들 위로 짙푸른 하늘을 내달리는 새하얀 구름들.

 

건물 옥상에 있는 이 안테나같이 생긴 시설물은 뭘까.

 

 

 

 

점심시간을 틈타 옥상에 올라와서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 재미에 홀딱 빠져있는 직장인들.

 

 

선릉. 봉긋한 능 하나가 앞으로 보이고,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다이나믹한 녹지가 빌딩들에 포위됐다.

 

 

 

하늘 높은 곳에서 구름이 소리도 없이 내달리는 순간, 선릉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여의도 방면. 날이 맑으니 여의도 63빌딩이니 쌍둥이 빌딩이 쉽게 눈에 띄인다.

 

 

그러고 보면 서울 시내 끝에서 끝까지 한눈에 들어올만한 거리는 되는구나 싶다.

 

물론 날이 맑아야 하고, 이정도 높이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올라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는 길. 옥상을 가리키는 친절한 화살표들이 사방에 붙어있었다.

 

 

올라가든 내려가든 화물엘레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워낙 고층 옥상의 풍압이 센지라 중간문을 닫지 않으면

 

엘레베이터가 출발을 못하고 휘청거린다는 위협적인 사실.

 

 

 

 

 


영화를 보러 간 건 2010년의 마지막 밤, 무려 세시간여의 영화가 끝나고 나온 시각은 2011년의 첫 밤.

그다지 크지 않은 상영관 안이었지만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서 열명이나 되었을까,

사람에 치이지 않고 유난스럽지 않게 해넘이를 하는 방법으로 꽤나 추천할만한 방법인 듯 싶다.


영화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80년대에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을

그대로 읽는 식의 말투를 구사한달까, 도무지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을 법한 말투와 표현, 종결어미를

쓰는 거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따위의 말을 또박또박 읊는

그들의 말투는 영화에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이 영화는 대체 어디로 나를 끌고 가려는걸까,

저런 배경에서 배우들의 저런 연기와 대사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거다.


풍경도 마찬가지, 영화가 국내에서 근 일년여 늦게 개봉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2008년 어간의 서울

풍경일 텐데 왜 이다지도 낯설까. 남산타워의 모습이, 한강너머 트레이드타워의 모습이, 그리고

청계천과 덕수궁 인근의 모습이 내가 알던 그 곳들이 맞나 싶다. 풀칼라의 화면과 모노톤의 화면을

넘나들어서가 아니라, 워낙 날 것의 모습들로 나와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분칠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이되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가 짙게 투영된 풍경들이어서 더욱 생경한 거 같다.


구성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정서와 아포리즘이 반복해 등장하는 전반부,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지 한시간 반쯤 후에야 불쑥 '아 까먹었네'라는 느낌으로 등장하는 영화제목과

배우, 제작진 소개라니. 그리고 나서 '백야'의 정서와 아포리즘으로 넘어가는 후반부랄까. 게다가

영화 도중 계속해서 하얀 화면에 글씨로 새겨진 몇몇 대사들은, 실제 내러티브와는 살짝 빗겨나면서

더욱 풍부한 해석이나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복잡하고 낯선 장치들, 풍경들을 빌려 영화는 얼핏 세네개의 사랑이야기를 슬쩍 겹치며

흘려낸다. 신하균이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을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이 새롭게 만난 그녀, 그녀가

품고 있던 이전의 남자..가망없는 사랑 앞에 지쳐버려 죽음만을 생각하던 사내가 문득 새로운 가능성

앞에 가슴뛰고 열중하고, 그렇지만 다시 새처럼 날아가버린 그녀 앞에서 세상은 시간을 알 수 없는

흑백으로 물들고. 베르테르의 비극적 사랑과 그 결말을 백야의 여주인공이 그래도 조금 유예해줄 수

없을까, 했다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건너뛰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연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홍대여신' 요조가 연기했던 퀵배달부, 그녀의 역할이 결코 작지않았던 건, 그녀가 전하는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좌절하는 소식들을 받아드는 사람들의 제각기 반응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고하고, 이별 앞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복수심에 이를 갈고, 그 중의 한두명은 신하균과

같이 사랑에 지쳐버려 죽어버리거나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또 누구는 그렇게 죽어버릴지도 모르고.


계속 화면 한 구석에서 적잖은 존재감을 과시하며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고 있던 남산타워, 그건

사랑으로 채 덮이지 않는 뾰족한 한 '현실' 아니었을까. 학생의 어머니를 향한 신하균의 사랑은 그

남산타워의 첨탑에 걸려 찢기고 말았고, 신하균을 향한 동료교사의 사랑 역시, 신하균의 정유미를 향한

사랑 역시.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었다. 디워 논쟁 때 진중권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야기하며

불합리하고 비문맥적인 스토리를 비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렇지만 사랑은 대개 그런 거 아닐까.

불합리하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딱히 명료한 맥락을 잡아내기도 힘든.


성모상 앞에서 배신한 남자의 뺨을 때리는 대신 꼭 안아주고 돌아섰던 어느 여자아이, 그녀가 남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친구와 나누던 말은 신하균에겐 너무 늦은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래된 걸까.

이제 어떡할거야. 낳아야지. 어떡할 거냐고. 길러야지. 아니, 어떡할 거냐고. 살아야지. 살아야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하며 살아야지. 그 여자아이는 깨달은 걸까, 아님 너무 어린 걸까.




갈라타타워 가는 길, 알록달록 파스텔톤의 이쁜 건물들이 제각기의 실루엣을 양옆으로 커튼처럼

늘어뜨렸다. 날씨가 좀 맑았어도 저 건물들이 좀더 반짝반짝 새콤한 빛깔을 냈을 텐데. 돌들의 굴곡이

오톨도톨 생생하게 느껴지는 도로 바닥과 마찬가지로 빗물이 묻어 조금은 쳐지고 차분한 빛깔이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점점 커진다. 두툼한 원통 형태의 바디가 의외로 경쾌한 느낌인 건 아마도 저

베이지색의 자잘한 돌덩이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인 듯. 타워, 탑, 성이라지만 담백하고 부드러운

색감과 질감 덕에 애초 갖고 있었을 살벌하거나 딱딱한 느낌이 많이 희석되었다.

들어서는 길, 입구는 여기 한 곳이다. 안에 생각보다 좁은 공간에 기념품샵이 있고 위의 전망대나

레스토랑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엘레베이터가 두 대 있었다. 갈라타 타워 앞에서 돛을 몇개씩이나

달고 있는 범선들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던 옛날 어느적의 풍경이 늘어뜨려져 있어서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엘리베이터는 '고작' 9층짜리. 7층 로비에서 내려서 한층을 걸어올라가야 8층 레스토랑이 나타나고,

그 레스토랑에서 바깥 테라스로 나가 이스탄불 전경을 볼 수가 있는 식. 그 위 최고 꼭대기인 9층엔

터키 전통공연이 벌어지는 나이트클럽이 있다고 하던데 공연 수준이 나쁘지 않은 정도라고 하지만

직접 안 봤으니 잘 모르겠다. 그보다 고작 6명이 들어가는 조그마한 엘레베이터에 안내원 한명은

고정적으로 타고 있으니 5명만 타면 만원.;; 속도도 빠르지 않은 엘레베이터 두 대인지라 사람이

좀 몰린다 치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데도 시간 좀 걸릴 듯.

7층에서 8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원래 엘레베이터가 있기 전에는 맨 아랫층부터 꼭대기까지

이렇게 가파른 계단을 밟고 올라야 했을 거다. 이거 각도가 거의 70도정도는 족히 되어보이는

계단인데 폭도 좁아서 뱅글뱅글 꼬아올라가다보면 문득 핑-하고 도는 느낌도 들었다는.

8층 레스토랑에 올라 보니 생각보다는 공간이 넓다. 게다가 천장이 높으니 그렇게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아서, 테이블을 꽉 채운 채 밥을 먹으면서도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 얼기설기

불빛이 잔뜩 꽂혀있는 전등도 인상적이었고.


스프가 먼저 나오고 빵을 조금 먹다 보니 각종 고기 케밥이 나왔다. 감자 튀김도 맛있었고, 고기랑

빵이랑 같이 먹으니 역시 맛있더라는. 창 밖으로 멀찍이 보이는 블루모스크의 미나렛들이 밥맛을

더욱 돋궜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면 블루모스크와 아야 소피아의 미나렛들처럼 테이블 위에 우뚝 선 에페스 병맥주 탓이었는지도.

창가에 딱 붙은 옆 테이블 너머로 바깥 테라스에 나가 이스탄불 시내를 구경하는 두 젊은이가

풋풋했다. 이스탄불 젊은이들의 데이트 명소쯤 되지 않을까, 서울의 남산타워처럼.

돌아나오는 길, 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다시 기다리려 금세라도 몸이 앞으로 쏠릴 듯 가파른 계단을

걸어 내려왔고, 금박으로 얼기설기 빚어진 갈라타 타워와 주변의 스카이라인을 물끄러미 바라봤으며

5명씩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다시 내려와서 올려다본 갈라타타워. 반들반들, 조그맣고 단단해보이는 차돌들이 커다란 원통을 가득

감싸고 있었다. 아랫도리 부분은 사람들이 얼마나 매만졌을지 까맣게 손때가 묻어있던 갈라타타워.

6년전엔 돈이 없어 못 올라가본 채 밖으로만 맴돌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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