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고시공부하던 친구가 절박하게 물어왔다,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써야 하냐고.

돌아보니 내가 취업준비생이라는 약하디 약한 자의 입장에서 사십여곳에 자기소개서를 써제끼던 때가 벌써

일년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무슨 '자기소개서의 달인'도 아니고 친구녀석에게 뭐라 확신을 줄 만큼 정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정답이 아니라 기본자세만 알려준다는 심정으로 몇가지 팁을 줬다.

자기소개서 쓰기를 집짓기에 비긴다면, 그래서 이런 과정을 탄탄히 밟아간다면, 최소한 짚으로 만들어 금방

비바람이 새고 무너져내리는 집 정도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집짓기 전 벽돌 모으기 >

1. 해당 기업에 대한 홈페이지 자료 모으기

해당 기업의 홈페이지를 뒤져서 인재상, 비전, CEO인사말에서 강조되는 공통점을 추출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몇번에 걸쳐 반복되거나 변주되는 단어들을 그대로 벽돌처럼 자기소개서에 박아넣을 때, 인사

담당자들은 지원자가 자사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해왔구나, 친숙하구나 라고 느끼지 않을까. 예컨대

대부분의 기업이 '고객만족', '고객지향', '고객제일' 등의 단어 중 한 단어만을 골라 죽어라고 홈피에

도배해놓는 행태를 보인다. 그게 그말이지만, 그 기업의 어법이라거나 jargon처럼 쓰이는 '빈출단어'를

활용한다면 아무래도 읽는 사람의 눈에 훨씬 익어보이는 게 인지상정일 게다.



2. 해당 기업, CEO에 대한 기사자료 모으기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검색엔진에 해당기업명 혹은/그리고 CEO의 이름을 키워드로 해서 대략 3-6개월치

신문기사를 찾아본다. 기업이 처한 시장상황이나 이슈, 그리고 최근 기업이 공표한 전략이나 가치에 대한

정제된 내용과 어구를 모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자료들을 모아두면 특히 실무면접이나 CEO 면접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CEO들도 아무래도 본인의 기사는 찾아보게 될 테고, 특히나 기사가 자신에게

우호적이거나 넓은 지면을 할애해 주었다면 뇌리에 남아있을 터, 그러한 기사에서 건드렸던 이슈나

칭찬거리들을 모아두는 건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위한 다목적용 벽돌을 구워두는 셈이다.



3. 자신의 이력을 연대기 형태로 정리해 두기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부분을 어떻게 떼어내서 자기소개서에 써야할지는, 사실 지원하는 기업의 성격,

업태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의 경험들을 연대기순으로 정렬시키고

각 이벤트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치라거나, 설득력있는 '이야기꺼리'들을 미리 브레인스토밍해둔다면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시작할 때 시간절약에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자신의 경험들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가서 어떠한 장점과 성격을 드러낼지는 어느정도 글쓰기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대학교에서 동아리장을 맡으면서 어떤 행사를 치뤄낸 경험이 있다면, 거기에서 책임감, 융화력,

리더십, 혹은 팔로어십, 높은 성취욕, 근성 등등 포인트를 잡아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자기 몫인 게다.

어쨌든 연대기 형태로 정리된 경험들은 언제든지 펼쳐보고 필요한 부분을 떼어서 써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꼭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터 잡기 >


1. 질문의 포인트 잡기

지원동기, 입사 후 계획, 입사 후 포부, 10년후 나의 모습, 자신의 장점 및 단점, 자기 소개, 가정환경 및

성장배경, 이런 식으로 단어로 제시되는 질문들이 있고, 귀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과

그 이유(가족제외, 2명)를 설명하시오,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를 기술하시오, 재학중 경험한 과외활동에

대하여 기술하시오, 이렇게 문장으로 제시되는 질문들이 있다. 어떤 경우던 올바르게 이해하고 답한다면

크게 문제될 거야 없지만, 이럴 때 좀 고민을 하게 된다.

"3번, 지원 동기. 4번, 입사 후 포부. 5번, 입사 10년후 나의 모습."

지원동기와 포부,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란 건 사실 조금조금씩 겹치기 십상인 거라고 난 생각했고,

그래서 대체 어떻게 이걸 구분지어서 내용을 만들어야 할까는 늘 고민이었다. 정답은 없지만, 이럴 땐

스스로 질문의 포인트를 선명하게 구분지을 수 있게 자소서를 쓰는 게 관건이 아닐까 한다. 동기는 A,

포부는 B, 미래의 모습은 C로 명료하게 구분시킬 자신의 장점과 경험을 드러내야지, 동기는 A, 포부는 A',

미래의 모습은 A''가 되어서는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대로 답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미리 자신이 이 질문에 어떤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킬 것인지, 그리고 어떠한 경험을 쓸 것인지 키워드를

잡아두면 나중에 쓸 때 편했다. 쓰다보면 자칫 방향을 잃고 중구난방이 되기 쉬우니까 일종의 나침반

역할도 해주고. 사실 또 그러한 키워드가 나중에 소제목 달 때 그대로 녹아들어가기도 한다.



2. 벽돌 실어나르기

미리 홈페이지와 기사들에서 모아둔 벽돌들, 키워드와 문장들이 쓰임직한 질문에 옮겨놓는다. 생각해둔

키워드에 부합하는 자신의 경험과 이력도 역시 옮겨놓는다. 이제 이걸 어떻게 잘 얼기설기 엮어서

문장으로 곱게 땋아내릴지가 집짓기, 자기소개서 쓰기의 포인트가 되는 셈.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벽돌 쌓기 >

1. 자기소개서의 문장論

문장 자체가, 너무 길다거나 문학적, 혹은 현학적이면 좋지 않고 최대한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쓰여야

할 거다. 기자직 같이 글빨로 먹고 사는 직업에 지원하는 것이라면 좀더 현란하고 유려한 글쓰기가

큰 관건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담백하고 차분한 호흡의 글을 바라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튀지 않고 무난한 지원자를 선호하는 기업들의 입맛이 반영된 건지도, 혹은 다소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안전하게 가려는 한없이 약한 취업준비생의 안전제일주의 때문일지도.



2.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표현하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반적인 특성-성실하다, 열정적이다, 리더십이 있다..-만 쓰고 치울 것이 아니라

선명한 사례를 제시해 줘야 한다. 동아리장을 맡았을 때 이런 행사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해냈다, 누구에게

어떠한 평을 들었다, 어떠한 경험을 했고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고유한 경험에 기대어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최대한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효과적'이라는 말은,

굳이 경험의 전후를 지루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간결한 문장 한두개로 압축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차피 말하고자 하는 건 그 경험 모두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이 거기서 무엇을 얻었는지, 혹은

자신이 거기서 어떤 능력을 보였는지에 대한 설득력있게 입증하는 거니까..인사담당자가 쓱 읽고 지나갈 때

어라, 이게 뭘 말하려는 거야, 라거나 그래서 어쩌라구, 혹은 지루하구만, 이렇게만 생각치 않게하면 되지

않을까나.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어차피 기업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이라는 거, 다 거기서 거기다.

성실하고 열정있고 창의력도 있고, 인화력에 포용력에 리더십까지 갖춘, 결국 좋은 건 다 갖춘 사람이다.

어떤 경험을 이야기해도 그러한 긍정적인 가치 한두개야 뽑아낼 수 있는 거고, 그러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걸 무리없이 전달해내면 되지 싶다. 자신이 부족한 혹은 나쁜 사람이란 얘기는 아무도 안 할 테니까.



3. 주어진 칸만큼 주어진 기회!

물론 뻔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쓰는 건 자폭행위나 마찬가지일 거다. 앞에 쓴 문장을 조금 바꿔서 뒤에

첨언하고 첨언하고..그런 식으로 칸을 채우는 건 차라리 안 채우느니만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300자 이내건, 1000자 이내건, 혹은 2000자 이내건, 주어진 칸은 그만큼 주어진 기회라고 본다. 꽉 채워쓸 때

얼핏 봐도 성의있어 보이기도 하고, 안간힘을 써서 썼겠다는 우호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무작정 꽉꽉 채워쓰는 것도 좋지 않다. 적절히 문단을 끊고, 소제목을 달아주는 게 보기에도 훨씬

좋고 내용을 파악하기에도 쉽기 때문이다. 각각의 문장이 뚜렷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배치되어 있어야

하는 건 물론이다. 군더더기처럼 잔뜩 붙어있는 말들로 인해 분량이 넘치는 걸 덜어내는 것도 문제가 된다.

결국 너무 과묵해도, 너무 수다스러워도 문제인 거 같다. 어디까지나 인사담당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자기소개서를 아무리 정독하려 애쓴다고 해도, 이미 수천장의 자기소개서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을 그들의 시선을 유린해서 좋을 게 없을 터.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집 둘러보기 >

 

1. 소제목 달고 퇴고하기

질문당 몇백자 이내라고 되어있던간에, 소제목을 달아넣는 것은 필수인 것 같다. 실제로 경험상 소제목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때와 달기 시작한 이후의 자기소개서 승률은 차이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도

전하는 이야기니까 소제목 다는 건 정말 필수라고 보면 될 거 같다.

구체적으로는, 보통 300자 이내는 한 개 정도 문단으로, 그리고 500자 이내는 두개 문단으로 쪼개되, 500자

이상은 소제목을 두 개쯤 다는 것이 적당한 듯 했다. 소제목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애초 질문에 대해 자신이

노출시키고 싶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얼만큼 튀는 소제목을 달지는 자신의 결단력, 그리고 지원 기업의

보수성 정도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예컨대 "도전정신과 나눔정신", 이런 조심스럽고 온건한 제목을 달 수도

있고, "보석같은 기업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같은 식으로 문장을 구사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2. 전반적으로 흐름 체크하기

몇 개의 벽돌을 떼어내서 오려 붙이는 ctrl+C, ctrl+V 신공을 펼치는 것은 괜찮지만, 다 쓴 후의 검토는 필수!

실제로 이전의 기업명이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송되는 불상사가 종종 발생한다. 그리고 혹시 같은

경험을 두번 써먹지는 않았는지, 동일한 문구..벽돌을 두번 써먹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 이전에 올렸던 글이지만 이즈음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발행.




#0. '장 그르니에'라는 섬에 대한 조각지도.

그의 글들은 쉽지 않다. '글'이라는 것이 뭔가를 묘사하고 구체화하는 거라면, 그의 글은 그의 내면 세계와

사고 과정을 묘사하고 스케치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자칫 난해하다거나 사변적이라는, 어렵게

쓰려고 참 애썼다, 라는 비아냥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짧은 단편들은 그의 내면, 그 구석구석에 대한 부분 지도와도 같다.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누구라 생각하는지, 여행이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행을 왜 떠난다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런 굵직굵직하고도 근본적이랄 문제들에 대해 '장 그르니에'라는 이름의 섬을 조금씩 드러내는

지도인 것이다.



#1. 묘하게 빨려드는 헛된 유희의 중독성, 삶.

'이것'과 '저것'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삶이다. 두 가지 다 영판 아니다 싶고,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런 게 삶"이고, 일정 시간 후에는 죽음으로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다는 건 억지로라도

잊으려 애쓴다. 생일이 다가오면 한 살 더 먹었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뒤집어 살 날이 한 해 줄었구나,

라고 생각해도 안 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포심과 터부, 그 이외엔 없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은

'비인간적'이라 거부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유희에 말려들어 덧없는 것 속에서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 헤매게 되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항상

좋고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악마'의 유혹이 귓전에 맴돌게

되는 거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왜 좀더 낫게 살지 않아?" 라는. 그말에

따라 달리기를 시작하고 여행을 떠나고. 집 한 채 마련하려고 수십년을 바치고.


니체가 '동일자의 무한반복'이라는 세계의 이미지를 견디어내는 자를 일러 칭했던 '위버멘쉬', '초인'이란

단어는 유사한 현실인식을 궁구하면서도 끝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장 그르니에에 붙음직한 칭호인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무한한 밀물썰물의 진퇴를 반복하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어느 순간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파도의 움직임에 문득 의미가 깃드는 순간. 그 한 순간이면 된다. '행복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자는, 어쩌면 그 '한순간'이란 게 생각보다 인생 곳곳에 숨어있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2. 여행의 대용품, 섬 찾아나서기.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일상의 더께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툭툭 먼지를 털고

다시금 탱탱하게 충전시키고자 함이다. 그렇지만 장 그르니에의 말을 빌건대,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것이고.."

그는 여행이 꼭 필요함을 말하는 동시에, 또 부질없음을 말한다.


더구나 영상 매체와 온갖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낯선 풍경들,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줄

그런 풍경들의 파괴력은 반의 반의 반쯤으로 줄어버린 게다. 이미 어디선가 한번쯤 본 풍경, 어디선가

보았던 구도를 답습하고, 꼬리를 문 관광객들의 뒤를 이어 화살표를 따르는 여행이란, (여행을 테마로 했다

주장하는 블로그를 채우려는 사람 입장에선 많이 아이러니하지만) 자칫 티비 다큐멘터리 하나 보는 것만

못한 지루하고 진부한 경험일 수 있다.


다행인 건, 우리 사이엔 아직 신대륙이 남아있다는 것.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매우매우매우 무궁무진

하다는 것. 장 그르니에의 단편들이 모인 이 단편선의 제목이 '섬'인 이유는, 그가 허무하고 부질없다 느끼는

삶에 애정과 온기, 열정을 불어넣게 되는 이유가 바로 '섬'에 대한 이해, 유대의 욕망이기 때문일 거다. 그는

본질적으로 삶이 무의미하고 공(空)한 것이라는 인식을 양보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작은 고양이 한 마리,

두 그루의 나무, 한 번의 악수, 어떤 눈길, 그런 것들로 충분히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섬. 점에서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기어이는 선으로.

김기덕 감독의 '섬',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제각기의 해안선으로 외곽을 단단히 둘러친 '섬'같다는

이미지가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망망대해에 혼자만 존재하는 듯 덩그마니 놓여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

사실 그런 이미지는 많은 선인들이 차용했던 것이었고, 그르니에 역시 그 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제각기 떠들고는 있지만,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다가 결국은 그 섬에서

굶어 죽던 나이들어 죽던 제각기의 삶을 소진하고 제각기 죽어갈 뿐이라는 식의 이미지.


다만 그는 '섬'이 갖는 폐쇄성, 소통불가능성, 본원적인 고독, 외로움 따위의 이미지에 더해, 그 복수의 '섬들'에

대한 여행의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저기 저 섬, 한번 여행하듯 떠나보지 않을래? 조금씩 지도를 읽어나가듯

이해하고, 소통해보지 않을래? 육체를 먼 곳에 내동댕이치는 여행이 아니라, 지독히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다른 육체와 정신들에 대해 여행을 떠나보지 않으련, 하고 그는 권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이란 그래서 동떨어진 하나의 점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점들이 하나하나 이어져 조심스런

말줄임표로 서로를 탐색하고, 결국은 갸냘픈 '선'에까지 이르러 탄탄하고 의지함직한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움직임의 시초, 일종의 씨앗. 그에겐 '보로메의 섬'이었던 그것은 아직 서로에 뿌리를 뻗지 못한 우리들이다.



#4. 글쓰기. '섬'으로의 친절한 초대장.

글쓰기란 그래서 내겐, 일종의 '작도(作圖)'다. 2009년 10월 20여일 어디메쯤의 나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있고, 이런 내면을 갖고 있음을 전하려는 지도 그리기나 다름없다. '블로그'라는 도구가 새로운 양 하여

뭔가 그에 걸맞는 뾰족한 수가 있지 않겠나 했지만, 그건 전혀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블로그가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가 문제다. 그러고 나면 온갖 광고성 리뷰와 내키지 않는-고역스럽고 '일'이 되어버리는-포스팅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장 그르니에의 '사변적이고 난해한' 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건, 전혀 경험치 못한

하나의 세계, 섬 안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비록 그가 니힐리즘과 실존주의 철학의 역사적

궤적 하의 인물이고, 까뮈를 예비한 인물이란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다 해도, 그래서 일정 지역에 몰려 있는

'군도'에 속해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섬'인 채로다. 그런 글조차 없었다면 대체 어디에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대체 어디에서부터 그에게 '들어갈' 수 있을까 싶다.



- 10점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민음사


#1. 노출증에 대해 생각하다.

용도에 따라 크고 작고 휘어진 그릇들, 접시들이 산개해 있듯이..적당한 형태를 취한 말글을 통해 타인과 접속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는 애초 말글의 목적이 타인과의 소통에 있다는 전제를 편의적으로 밟고 전개되는 이야기이나, 똘갱이가 아닌 이상 지 혼자만의 이야기를 펼쳐 말글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구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므로 말글의 목적이 노출에 있음을, 그리고 그에 상응한 피드백을 기대함에 있음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 45억년의 외로움.

우주의 한생명으로 지구가 탄생하고, 지구의 한생명으로 유기생명이 태어나고, 유기생명의 진화체인 인류가 탄생하고, 그 세포 내에선 끊임없는 유전자적 진화가 이루어져 엄지손가락이 되고, 맹장이 되고. 우주적인 단위에선 지구가 외롭고, 동물적인 단위에선 인간이 외로우며, 개개 인간의 단위에선 내가 외롭지만, 어쩜 내 둘째손가락이나 소장의 상피세포가 외로워할지도 모른다.(미지의 영역이다) 다른 말로, 천왕성이 외롭고, 금붕어가 외로우며, 당신이 외롭고, 당신의 뇌하수체 국물이나 새끼발톱이 외로워할지도 모른다.


#3. 이야기하고 글을 쓴다는 것-나와 타인간의 관계

더구나 이렇게 홈그라운드를 탄탄히 구축하고 그 안에 자신의 온갖 사념들을 응집해 넣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임상병리학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하루끼가 상실의 시대에서 갈파했듯, 사람들은 '내'가 하루에 계단을 몇개 밟고 몇걸음을 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맹목적인 호의나 감정이 관심을 끌어내는데 서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타인의 관심을 끊임없이 유발해내고 타인들의 세계관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지속적으로 개입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자신을 언어로써 기술해넣는 skill인 것이다. 홈그라운드를 설정하여 타인을 자신의 거미줄로 불러들임으로써 얻는 이점에는, 자신의 연속적인 생각의 궤적을 타인으로 하여금 읽어내어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좌표를 가늠하게 하여 갈기갈기 찢긴 서로의 시공간적 공백을 보다 효과적으로 메워보고자 함에 있으며, 또한 타인과의 소경 길 더듬듯 하는 소통에 있어 모종의 어드밴티지를 얻고자 함이다. 담화의 소재와 주체를 최대한 자신 쪽으로 기울임으로써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장악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homo politicus로서의 본성이 발휘되는 것이라 하겠다.


#4. 글을 쓰는 걸 보고 이야기하는 걸 듣는다는 것-나 자신의 문제

그러나 타인에게 이해되는 순간에 본연의 자신은 왜곡되고 박제되어 버린, 예컨대 '04년2월2일오전3시54분의 홀로술기울이는아무개(남,24)'라는 괴상한 것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그러한 수정과 왜곡, 축약의 과정을 거쳐야 모두에게 읽힐 수 있는 '인간'으로써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기에 불가피한 과정이라 여겨진다. 다만 니체가 이야기했듯, 편의상 구체화한 삶의 구라들을 진실로 여겨 지혼자 상처받고 울지 않도록...언제나 타인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관계란 완전할 수 없음을 유념하고 매분매초마다 그 냉혹한 현실에 두손들어 항복하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불가피한 랙에 걸린다 할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기술하고 이해함에 있어 개재되는 말글의 형해화이다. 내가 자신을 읽어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자동기술적인 방식이나 브레인스토밍과 같은 카오스적인 방식을 활용한다 할지라도 역시나 자신을 위한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언어화함으로써 사념처럼 떠돌던 몇가지의 전기적신호들이 형태를 갖추어 자신을 지속적으로 설득해내기도 하여, 결국 말글이 인간의 생각의 흐름을 구속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요는, 자신을 이해함에 있어 본질적으로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한다는 성찰이다.

역시, 인간은 모두에게 타인일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자기 자신마저 자신에게 타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나 방금 쓴 글에서 낯선 남자의 향기를 맡는 경우는 그나마 그 어쩔 수 없는 진실을 대면한 순간이다. 마치 화염이나 파도, 바람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형태를 예측할 수 없도록 변화무상하게 지속하는 인간이 '씌여지고 말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속류화한 인간형은 생기를 잃고 한 fiction의 등장인물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5. 다시 틈새에 끼어들어 무임승차를 꾀하다.

그렇다고 하여 말글을 통한 인간의 통상적인-큰 틀에서의-자기 규정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말글은 역사를 이루어왔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특정양식으로 고착화하거나 인간들간의 일들을 엮고 풀어왔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묶는 접착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미니홈피 한장한장 역시 타인과 자신간의 사이에 놓인 우주와도 같은 그 허무를 메꾸기 위한 벽돌이자 시멘트가 되어 서로의 훼손을 감내한 소통의 기초가 되는 게 아닌가를 생각한다. 말글은, 그 빈약하고 거친 표현으로 인해 서로를 '일반화된 양식'으로 변형시키고-깎아내린단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보이지만-그로부터 다시 서로의 '고유한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한 양대 도구-몸과 언어-이다. 그렇지만, 모두 서로를 자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들이기 꺼리고, 타인의 고유한 영역에 들어가길 꺼린다면. 그저 각자 언어화된 형태로 자신의 그릇내에 안전히 존재할 뿐이라면, 그렇게 그저 세워져 있을 뿐이라면 이건 그저 그림자 놀이일 뿐이다. 제각기의 달팽이껍질 속에서 그 언어가 다중에게 노출되고 의미가 명확치 않은 익명속으로 증발해버리지 않으려면, 최소한 '일반화된 모두'를 위한 중첩적인 아크로폴리스가 필요하단 이야기. 방어선으로써.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