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하루 가을방학을 내어주고 대부도 즈음에 풀어두었다. 어느 꼬부랑길을 앞에 둔

차도변에서 문득 마주한 교통표지판 하나를 보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표지판 아래

하늘거리는 갈대와 저 너머 헐벗은 나무 한 그루. 급커브길을 조심하라는 진지하고 열띤 낯빛의

표지판이 문득 푸근하고 너그러운 홍조를 띈 표정으로 바뀌며 가을에게 말해 준다.


조금 돌아가도 좋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떠날 필요 없다구요.

시화호갈대습지를 걷다가 만난 새빨간 열매들, 잎 한장 걸치지 않은 야트막하고 얄포름한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뭔가 풍선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으로 탱글거리는 열매들이 직선으로 쭉쭉 뻗고

날카로운, 그래서 조금은 거칠고 외로워 보이는 나무가지들을 사방에서 보듬어주는 것 같다.

벌레먹고 찢어진 나뭇잎이 한 장, 덩그마니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가슴이 짠하다. 마침

오늘 수능을 치고 지난 12년의 교과과정을 한 큐에 검증받아야 하는 안쓰럽고 대견한 학생들을

볼 때 같은 느낌이랄까. 고생했어요, 토닥토닥 해주고 싶은 나뭇잎.

까치밥을 남겼구나,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감나무 한 그루에 딱 한 개 감을 남겨두었던 거다.

철벽수비라도 펼치듯 온통 하늘로 손을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얼기설기 보이는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파란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감빛 덩어리 하나.

국화일까, 무슨 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새 같은 쌀쌀한 날씨에 더해 황해의 바닷바람까지

버텨내며 이렇게 탐스런 꽃을 피워냈다는 게 대단하다. 화려한 색감이 남국의 뜨거운 태양을

연상시키면서도 어딘지 가을의 스산함을 채 숨기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한반도의 인류는 긴 겨울을 대비해 태양 에너지를 비축하는 중. 무청을 빨랫줄에 잔뜩

널어두고 햇빛을 충전하고 있다. 축축 늘어진 채 아삭하고 풋풋한 생기 대신 햇빛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차곡차곡 쟁여두는, 가을이다.




#1.

출장 다녀온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내일부터 또 출장이다. 인천 송도에서 벌어지는 모 행사가 있어서, 수십명의

자원봉사자들한테 오리엔테이션하고, 모레랑 글피는 사람들에 부대끼며 헥헥대고 있을 거 같다. 사실 뭔가

행사-판을 짜고 준비하고 운영한다는 건 꽤나 매력적인 일이다. 대학교 때 새내기준비위원회라느니, 4.19기념

마라톤이라느니, 모의유엔이라느니, 그런 것들에 꼭 감투 하나씩 쓰고 헥헥댔었으니 그 맛을 알아버린지는

꽤나 오래다. 뭔가 무대를 만들어주고 판을 벌여주는 역할, 굳이 판 위에서 놀지 않아도, 그 옆에서 판이 잘

돌아가게 도와주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다.


여튼, 그래서 이박 삼일 (또) 다녀오겠습니다.ㅜ



#2.

사실 한 두어달 전부터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이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거야 뭐

그냥 하면 되는 거니까, 문제는 절대적인 시간의 확보가 관건이었다. 물론 초반에 좀 알량한 셤, 알량하게

대응하리라, 는 건방진 맘으로 시동을 늦게 걸었던 탓도 있지만, 뒤늦게 확정된 7박8일의 출장이 완전 개씨루를

박아버렸다. 막판까지 책보다 지쳐 쓰러져 잠들도록 버닝해봤지만 절대량이 넘 많아서 결국 무위.


왠지 올해 하반기가 '무위'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쉽게도 문제 두어개 차이지만, 어쨌든 시험은 합격 아니면

불합격인 거다. 사실 셤 자체는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다만 단번에 합격했음 이것저것 금전적 이익이

꽤나 있었을 텐데-그보다 2006년의 그 불쾌하도록 하얗던 감정이 떠올라버렸다. 본체에서 유리된 채 멀거니

내가 밥먹는 걸 지켜보고, 말하는 걸 지켜보고, 걷는 걸 지켜봤던 그 메슥거리던..누우런 갱지같던 감정.


그냥, 그런 기억이랑 겹쳐져 버려서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3.

가을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출장 다녀오니 가을이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침저녁으로 쌀랑해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땀은 안나고 몸은 따뜻해진다.

코엑스 앞을 지날 때마다 국화향이 진득한 황금빛 토종꿀처럼 녹진녹진 흘러들어왔다.


아직 가을이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이명박대통령이 한-중-일 삼국 정상회담을 하러 간 곳이 후쿠오카랜다. 귀를 쫑긋 세우고,

찍찍대는 소리는 적당히 걸러가며 듣다보니 어라, 후쿠오카 큐슈국립박물관에서 원자바오 중국총리랑 아소 다로

일본총리를 만났대는 거다. 불과 몇주전 내가 갔던 그곳을 뒤따라와서 정상회담을 했구나, 하는 맘에 반가워서

여행다녀온 내 이야기를 부랴부랴 포스팅.


그나저나, 이명박대통령을 줄여서 쓰려다보니 이명박통이 된 건데...왠지 이거 의도치않게 와닿는다. 이명朴統.

우선 기차를 탄다. 다자이후텐만구와 인접해 있어서 아예 날잡고 다자이후텐만구, 고묘젠지, 그리고 규슈박물관을

돌아보면 반나절 내지 하루코스가 될 거 같다. 나 역시 아침 일찍 다자이후로 가는 기차를 타고, 소풍가듯 그곳을

향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함께 설레하며 출발.

니시테쓰(西鐵) 다자이후역에서 내리면 이렇게 영어,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로 병기되어 있는 표지판들이 가고자

하는 곳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준다. 일본과 한국, 참 가까운 나라이긴 한 거 같다. 서로 왕래가 이만큼 잦으니만치

관계도 그만큼 좀 친근해졌으면 좋겠는데, 참 간단한 일일 수도 있을 텐데 좀체 어렵다. 예컨대 서울, 부산, 도쿄,

후쿠오카의 사이즈를 비교하는 거나 마찬가지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서울과 도쿄에서 지방의 영양분을 모두

취하면서 각자의 존재감을 경쟁하고, 자신들이 마치 한국과 일본, 그 자체인양 비대한 몸집을 흔들며 상대보다

앞서기 위해 부산의, 후쿠오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준만교수가 쓴 지방은 식민지다, 라는 책을 요새 읽고 있는

탓일까. 모든 걸 중앙 지역, 일부 계층으로 집중시키는 블랙홀 혹은 기생충같은 몇몇 것들이 참 마뜩찮다.

다자이후 역 앞의 골목을 따라 쭈욱 걷다보면 깔끔하게 정리된 일본의 전통 가옥들이 늘어서있다. 전통가옥이라

할 수 있을지, 살짝 자신감이 없어지는데 뭐..일본에 대해 무지한 탓이려니 한다. 얼마전 월미도에 놀러갔을 때

차이나타운 귀퉁이에 옛날 일본조계였던 지역을 조그맣게 복원해두었던데 그때 봤던 단정하고 왠지 수줍은 집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음...막상 긁어오니까 별로 비슷하단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그 깔끔하고 단정한 외관에서 느껴지는 '왜색'이란 게

공통적이라고 우선 우겨두기로 하자.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다자이후텐만구에 와 닿고,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틀면 큐슈박물관이랜다. 아직 관광객이

많이 들지 않은 거리에는 가게문을 열고 장사를 준비하는 주인아저씨 아주머니들만 분주하다.

마침 국화 품평회랄까, 뭐 그런 누가누가 국화 잘 키웠나 보자는 대회가 있나 보았다. 크고 작은 국화꽃들이 사방에

전시되어 있었고, 그 화분 옆이나 앞에는 아마도 출품자의 신상정보가 적힌 듯한 팻말이 함께 있었다.

주먹만한 꽃들이 눈을 부라리듯 화분 위에 딱 버티고 서있다. 어떻게 저렇게도 탐스럽게 키워냈는지, 꽃잎 한장

한장이 목련잎처럼 두툼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다자이후 관광협회장상, 다자이후시상공회상 등등 이아이들은

검증된 애들인 거다. 음...자세히 보면 저 무거운 꽃때문에 대궁이 처지지 않도록 빳빳한 마분지로 된 턱받침들을

하나씩 괴고 있다. 그렇지 않음 아마 몸을 못 가눴을 테니, 얘들 쫌 많이 심각한 대두다.

다자이후 큐슈박물관 가는 길에 마주치게 되는 조그마한 사원 미니어쳐 같은 구조물들. 한옥의 날아오를 듯 유려한

처마지붕도 멋지지만, 이런 처마 모양도 멋지다. 말아올리다 만듯 단정한 끝마무리로부터 급격히 배불러오른 처마

중앙께까지. 돌아봤던 신사들이나 다자이후텐만구나, 대충 지붕은 모두 이런 모양에서 딱히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자이후텐만구를 향할지, 큐슈박물관을 향할지 그 분기점쯤에서 재롱을 피우려는 듯 준비된 원숭이. 대체 무슨

재롱을 피우려나 보고 가려고 잠시 미적거리며 어슬렁댔는데, 이넘의 원숭이는 새초롬하게 빼고만 있고 외려

할아버지만 열심히 드럼(이랄까 북이랄까)을 두드리고 계셨다. 나중에 오는 길에 보니 결국 뭔가 사람들에 둘러

쌓인 채 재롱을 피우는 것 같긴 하던데.

큐슈국립박물관 입구. 다른 입구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다자이후텐만구쪽에서 들어서는 입구를 통하면

상당히 긴 에스컬레이터 구간을 지나야 박물관에 도착하게 된다. 얼핏 보아하니 저 뒷쪽의 산을 넘어야 박물관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명박통이나 중국, 일본 총리와 수행원들도 이쪽 길로 왔을까? 왠지 분명히 다른 곳에 또다른

입구가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렇게 불편한 곳을 감내할 만한 양반들이 아닐 텐데.

바로 오르막 에스컬레이터. 상당히 가파른 기울기의 에스컬레이터가 상당히 길게 올라간다. 아마 한강 밑에까지

내려가고 혹은 밑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는 여의도역의 에스컬레이터 정도? 그정도로 길고 가파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올라서고 나면 다시 한동안 수평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 이번에는 5호선 김포공항 역쯤에 있는 무쟈게

긴 그 수평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느낌이었다. 아..모든 걸 다 자신의 기존 경험과 지각에 어떻게든 맞춰보며

이해하고 소화시키려 애쓰고 있는 거다. 역시 그 양반들은 이쪽길로 안 왔을 거란 확신이 다시금 강해진다.

그렇게 오랫동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터널을 지나, 불쑥 빠져나온 바깥에는 큐슈국립박물관이 냅다, 라는

느낌으로 덜컥 버티고 섰다. 일본의 국립박물관 중에서 가장 크다던가, '일본문화의 형성을 아시아사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박물관'을 기본 이념으로 한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는 들어가보고 이해했다. 일본만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역사도 고루 소개하며 일본과의 비교문화사적 특징들, 그리고 상호 교류한 흔적들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아이들 놀이방같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서는, 저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는 곳인거 같아 들어가봤다.

신발을 벗고 바닥에 붙어있는 발바닥 모양을 하나씩 꼭꼭 짚어가며 들어서니, 정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아시아 각국의 아이들 전통의상을 입어볼 수도 있고, 전통놀이같은 것도 가볍게 체험할 수 있게 해뒀다. 시간대에

맞추면 뭔가 체험학습도 벌어지는 공간인 듯. 속내야 어쨌든 외견상 많이 어른인 만큼, 냉큼 나와버렸다.

박물관 입구에 높이 서있는 이건 뭘까, 구시다신사에서도 비슷한 걸 봤었는데, 뭔지를 모르겠다. 뭔가 축제나

행사 때 쓰이는 조형물인거 같긴 한데, 사람이 딱히 탈만한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그리고 저 인형들은

보기에 기분이 좋지는 않다. 음...그나마 여기 출연한 사람들은 뭔가 근대의 복장과 근대의 제스처-한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한다던가 하는 등의-를 취하고 있어서 이질감이 덜한 편이다.

뒷면에 있는 이 아저씨들, 누님들은 대체 왜이리 기괴한 느낌을 풍기는 거냐고. 마치 케이블에서 드문드문 봤던

일본 애니 '지옥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표정, 그리고 몸짓이다. 대체, 다시한번 대체, 이게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걸까 궁금해 죽겠다.

더구나 그 탑이랄까, 인형들이 층층이 버티고 선 조형물이 놓인 곳이 이렇게 양광이 찬란히 스며들어오는 단정한

현대식 건물이란 데서 더 부조화스런 느낌이 커졌던 거 같다. 음...잊고 있었는데, 그래서 여기서 이명박통이 일본,

중국총리와 만나 삼국 정상회담을 했다는 거다. 박물관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건 다른 무미하고 삭막한 회의장에서

하는 것보다 인문학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왜 좀체 그런 아우라가 안 씌워지는 건지.

안을 둘러보고 다시 돌아나오는 길, 왠지 요 '간판' 앞에서 다녀왔음다~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유치하게 그런 사진을 찍어야 하냐는 거부감 사이에서 심적 갈등을 일으키던 사이 놀러온 일본 여학생 두명이

헤실대며 바로 여기서 사진을 서로 찍어주고 난리가 났다. 저 동그란 '간판'을 힘주어 미는 척도 해보고, 둘이

셀카를 찍기도 하고, 약간 떨어진 채 지켜보고 있던 나를 살짝 의식한 채 신나라 하길래, 그네들이 떠나고 나도

사진 한장. 저 사진 너머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가 그 뒷길을 걸어보고도 싶었지만 마음만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쭉 내려오고 나니 아까 미처 못봤던 곳이 눈에 들어왔다. 큐슈국립박물관 입구라고 했던 건물

맞은편쪽에 있는 자그마한 놀이공원. 한눈에 보기에도 월미도 놀이공원 사이즈인데, 그래도 꽤 산뜻하게 꾸며놓은

듯 했다. 입구까지 조금 걸어서 무슨무슨 놀이기구가 있나, 가격은 얼마인가 한번 알아보기나 할까 하다가, 귀찮아

그냥 돌아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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