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 왠지 그렇게만 이름부르고 끝내면 어색해지고 만다. 뭔가 더 이어서 할 말이 있는데 중간에 덜컥

끊어버린 느낌이랄까.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이렇게 한단어로 덩어리지어 기억되던 그곳. 부여에 도읍을

정한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란 것이 머리에 꾹꾹 눌러박혀있는 거다.


그렇지만 몇 년전 대학 섭을 째고 무작정 버스터미널 가서 바로 출발하는 티켓을 사서 달렸던, 그 때의 부여,

그때의 정림사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들어서는 길에 만난 벤치, 봉황이 활개치며 금세라도 하늘로 뛰쳐오를 듯한 율동감이 충만해 있다. 반대편엔

다소곳이 깃을 가다듬고 서 있는 봉황.

정림사지 5층석탑의 위엄. 600년 경 만들어져 이렇게 단단히 섰다고 하니 대략 1400년쯤 되었겠다.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모습, 살짝살짝 들린 끄트머리가 은근하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이 석탑에다가 명문을 조각해 남겼다고 했다.

1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렴풋하나마 글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탑신. 기록의 힘이다. 더불어 용케도 천여년을

무사히 살아남은 이 탑의 힘이기도 하고.

예전에도 이런 게 있었던가, 싶도록 생경한 연못이 탑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품고 있었다. 어렸을 때 뭔가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를 다룬 전래동화를 읽었었는데, 무영탑의 설화던가. 와이프가 탑의 완성을 기다리며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길 마냥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는. (넘 거칠게 요약해 버린데다가 '와이프'란 표현이

전래동화의 격을 확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림사지박물관은 조금 심심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복원중인 정림사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엔 조금 발굴된

소재가 모자랄 수 밖에 없을 거다. 그래도 이런 장면은 꽤 흥미로웠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땠을지, 우뚝 선 완성태의 모습이 아니라 이게 어떤 식으로 하나씩 다져지며 올라갔을지를 상상케 해주는

몇 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해주는 전시들.

그 외에 부여 시대 백제의 암막새와 수막새(기와)를 지붕위에 얹는 장인들의 모습도, 첨에 아무생각없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던 시선에 저 사람들이 잡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었다.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그치만 정림사지에서 만났던 가장 깜놀했던 장면은 바로 화장실 표식. 눈알이 그려지지 않은 채 흰자가 있어야할

부분까지 온통 살색으로 메꿔지고 만 이 젊은 처자는, 왠지 복수심에 불타 입술을 앙다물만큼 절절한 사연이

있어 보였다. 이래서야 화장실 들어가기 무서워서 원.

남자라고 별반 다를 거 없다. 뭐 나름 전통 의복을 입혀 놓은 건 좋은데, 역시 눈알이 안 찍힌데다가 흰자위까지

온통 살색이다. 표정 역시 완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 사실 따지려면 한량없다. 저 의관은 백제식으로 갖춰

입혀놓은 건지, 아님 그냥 조선식으로 입혀놓은 건지.

그리고 석불좌상. 5층석탑 너머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또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정림사지는

엄밀하게는 고려의 문화유산, 그 원래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5층석탑만 백제의 것인 셈. 미처 몰랐다. 어쨌든,

번쩍이는 안광에 힘이 빡 들어간 도깨비의 억센 이빨이 손잡이를 물고 있고 연꽃무늬가 장식된 문을 지났다.

뭐랄까, 온몸이 완전히 닳고 닳아버렸다.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니 아무리 멀리 잡아도 천년인데, 5층석탑이

저렇게 세밀한 부분까지 고대로 남아있는데 반해 이 부처님 좌상은 무슨 바위덩이처럼 변해 버리다니.

두 돌덩어리는 각기 다른 시간을 넘어 오늘에 이른 걸까. 그렇다고 이 석불좌상의 느낌이 죽어버린 것도 아니다.

다소 죄송스런 맘을 담아 표현하자면, 지하철이나 터미널같은 데서 많이 뵐 수 있는, 몸이 불편하여 땅에 일부를

끌고 다니시는 그런 분들을 닮은 부처다. 팔도 다리도, 온몸이 둥글둥글 지워져 버렸지만 왠지 모를 위엄과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일견 엄한 것 같은 표정이지만 슬몃 웃음이 물려있는 듯 하기도 하고.

돌아나오는 길, 이번엔 석탑 대신 소나무 한 그루가 연못에 그려졌다.

정림사지는 여전히 발굴 중, 잔디만 무성한 한쪽 벌판 끄트머리에 뜬금없이 자리잡은 돌계단,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돌들이 어깨맞댄 틈바구니에서 풀들만 무성하다.

이런 거 좋다. 지역의 역사문화적 이미지를 이렇게 적극 활용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박물관에서 뽀얀 뽀샵 조명받고 손도 못대게 박제시켜 두는 것이 아니라, 2010년 현재에서 1400년전 사람들이

창조해내고 즐기던 미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2010 세계대백제전'을 준비중인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대백제전이라니,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하나씩 들고 나오는 무분별한 지역 행사 중의 하나는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출발해

부여에 
도착했다. 최근 성남시가 재정 악화로 모라토리엄 선언을 했듯 그간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남발했던
지역 행사들도 상당수 지지부진한 채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상황, '대백제전'은 부디 그런

'나쁜 예'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취재 전에 '대백제전', '안희정'에 대해 미리 검색해보고 조사하는 것은 필수, 여러 정보 중에서도 최근

시사지에서
봤던 기사 한 꼭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기획해 심대평 지사 시절 시작했고 올해 축제를 앞두고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완구

전 지사는
이 축제를 국제 행사로 키워놓았고 안희정 지사가 마무리를 하게 된 것이다."

"
안희정이 백제에 빠진 까닭(시사IN, 151호)".

라는 내용이 있을 만큼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세계대백제전, 안희정 지사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2010 세계대백제전이 펼쳐질 부여의 '백제문화단지', 그 중에서도 고대 국가의 궁궐을 최초로 복원했다는

부여궁(사비궁)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능사를 복원한 공간을 안희정 지사와 함께 돌아보며 '대백제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눠보기 전, 간단한 브리핑이 있었다. 4000여 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어 330만㎡

(100만 평)
대지에 건립된 아시아 최대의 역사 테마파크라는 백제문화단지, 1994년에서부터 근 20년 걸려

지어진 셈이다.


아시아 최대니 뭐니, 그런 거창하고 알맹이없는 수사보다, 무엇보다 놀랐던 사실 하나는 세계대백제전은 기껏

몇년 된 다른 지자체 행사와는 달리 올해로 57회를 맞는 연원깊은 행사라는 것. 일제시기 낙화암에서 나라잃은

백성의 비애를 달래던 부여/공주 지역행사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안희정 지사는 그런 역사적 연원을 강조하며

이 행사가 여느 지자체 주관의 행사들과는 다르게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성원과 지지가 있음을 강조했다.

사비궁에 들어서며 설명을 듣고 있는 안희정 지사. 그는 백제 문화와 역사가 그저 피상적인 암기와 이해에

머물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실 '백제'라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야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에 걸맞는 이미지나

깊이있는 지식이 있었던가. 북한과 남한이 각각 국가 정통성의 연원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적으로

부각하던 사이, 1400년 전의 이 화려한 고대국가는 점점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었던 거다.

그런 점에서 세계대백제전을 통해 잊혀졌던 역사를 다시금 기억해내고, 재구성해내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문화적 저력을 재발견하려는 것이 대백제전의 목적이라 한다. 외국에 나갔을 때 고작 삼성 반도체, 현대

자동차 따위 최근의 공산품 제조능력만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저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나 자신의 한국인으로서의 품격이 존중받길 바랍니다"라는 게 안희정 지사의 바람이다.


들으면서 꽤나 거창한, 그렇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지구촌 유지'의 일원이

되었음에 천박한 황금이빨을 드러내며 으스대기 바쁜 게 지금 한국의 문화적 소양이랄까, 수준인 터다.

그에 더해 필요한 건 문화적 자존감과 정체성의 풍요로움. 백제는 분명 그 중요한 수원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담이불루 화이불치'라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문화의 정수를 찬탄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에 잘 살려내는 건 우리 후손들의 몫.

사비궁은 삼국시대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것으로, 아무런 잔존 건물이나 흔적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영향을 주고 받았던 수, 당, 남송은 물론 왜의 당대 자취를

추적하고 고증을 거치면서 탄생한 궁전이지만 당연히 원래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거다.

역사도 마찬가지, 지금 우리가 불러내는 '백제'의 기억이란 지금 이시대의 요구와 필요성에 의해 제약받을

거다. 당장 낙화암 인근에서 대백제전 기간에 벌어진다는 '수상공연'이 4대강 정세와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안희정 지사도 그런 부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한국의 토담 문화가 벽돌이나 석재를 위주로 한

여타 문화에 비해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지워지기 쉬우나, 가능한 한 기록과 보전을 통한 역사문화의

계승은 꼭 필요하다는 것. 20세기식의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를 극복하며, 동시에 현시대의 정치적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사비궁을 돌아보고 점심까지 함께 하며 좀더 심도 있는 질문들을 나눴다. 내가 했던 첫 질문은, 대백제전을

이렇게
커다란 규모로 준비하고 있는데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백제문화, 조금 좁혀 대백제전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해 준다면 무엇인지
였다.


안희정 지사의 답.

백제의 키워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백제전의 키워드는 첫 번째로 역사무대를 소재로 한 지역의 축제이고, 두 번째로는 백제의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이번의 가장 큰 목표이다.

해상왕국으로서의 백제, 아시아권 질서내에서의 백제, 불교문화의 중심으로서의 백제, 향후 대백제전이 어떠한 주제의 컨셉을 가지고 볼것이냐가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역사문화축제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국가중심의 역사로부터 땅의 사람의 역사에 대한 문화에 대한 관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가의 역사로부터 백제의 역사는 있지만 한반도 어느 한 지역을 차지했던 이 땅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체계적으로 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백제문화제의 초창기 55년, 56년 백제문화가 열렸던 초반기에는 국가의 패망을 애석해하는 유민의 심정으로 연민의 마음으로 행사를 치루었다면 올해 세계대백제전은 이 지역사로서의 백제의 지역역사에 대한 주목이 첫 번째 컨셉이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온조 이야기를 주제로 한 사마(왕) 이야기, 사비미르 (부여의 용) 의자왕을 주제로 한 수상공연과 삼국시대의 궁터, 백제의 궁터 재현단지가 이번 축제기간에 주목받는 컨텐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비궁과 능사를 둘러보던 옷차림은 참 편안했다. 등산객들이 흔히 쓰는 편한 모자, 그리고 한 손에는

플라스틱 부채를 쥔 채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의 말투 역시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맛이 느껴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성과 열정이 전해지게 만드는 그런 느낌.

그리고 두번째 질문, 외국인 관광객을 20만명으로 잡고 있었는데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구체적인

복안이
준비되어 있는 건지. 주로 어떤 국가의 관광객이 타겟이 될지.


안희정 지사의 대답.

20만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대다수는 일본인 관광객이 차지할 것이다. 주미대사가 열심히 홍보대사 역할을 해주실 것이다. 샤프 사령관등 주한미군 가족들이 백제역사 축제에 많이 참여를 할 것이고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미국인들의 관광도 예상하고 있다.

일반 기업인들도 한국 내에 들어와 있는 많은 외국인 바이어들을 실질적으로  대접을 잘하고 싶다면 백제재현단지 문화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400년 전 패망했던 백제유민의 심정으로 역사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반도가 아시아의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우리의 조상들이 어떠한 생활반경을 가졌는지를 주목해 본다면 아시아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본다.


안희정 지사는 2010 세계대백제전이 가진 커다란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무엇보다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또다시 이 시대의 기록을 쌓고 추억을 만들어가려면 재미있고 내실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했다. 그가 가장 자신있게 추천하는 공연은 바로 '사비미르 수상공연'. 꼭 한번 다시 와서 1400년 전

백제의 문화와 분위기를 흠뻑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백제전 홈페이지 : www.baekje.org/html/kr )



덧댐. 백제문화전과는 상관없이, 안희정 지사에게 궁금한 점 하나가 있어 트윗 친구를 빌어 질문을 했다.

안희정 지사(@steelroot)는 평소 활발한 트윗을 하는 걸로 유명한데 요새 트윗 세계와 바깥 세계와의

온도차가 심하게 나는 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대체 왜 그럴까, 하고. 대답이 궁금하신 분은 그에게

다시 물어보셔도 좋을 듯.




 

청남대, [충북팸투어-청남대] 김대중과 노무현의 '아바타'가 그곳에 있다.에 이어 나머지 대통령들의 이미지도

가득 담아 올 수 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전두환 대통령 때 지어진 곳이라 그런지 그 이전 대통령들의 체취랄까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후로도 워낙 (여러 의미로) '씨알굵은' 대통령들이 있으니 아쉽진 않다.

참 씨알 굵은 양반. 산책로에서 제일 먼저 만났던 분인데, 이후 제각기의 특징을 잡고 있는 동상의 모습을

되짚어 보니까 저 자세는 어쩌면 구보와 각잡힌 걸음새에 익숙한 퇴역군인의 특성을 잘 포착한 게 아닐까

싶었다. 찰져보이는 몸뚱이에 완강하고 의지력있어 뵈는 얼굴까지. 딱 그사람이다.

그의 뒷모습. 맨들맨들한 동상 뒷머리에 흔히 떨어져 있을 법한 새똥 하나 없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다음 타자는 골프채를 시원하게 휘두르는 노태우 전 대통령. 그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 나는 삐라를 모았었다.

그 천연색깔 알록달록한 그림과 낯선 글씨체가 신기하고 자극적이었다. 똥오줌 못 가리던 어린 나이인지라

아마 사람들이 회피하고 어쩌면 무서워하던 삐라를 한장 두장 모아가며 묘한 쾌감을 느꼈던 거 같다. 어느날

부모님은 우표수집책 속에 우표처럼 꼽혀있던 색색의 삐라를 보고는 다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의 입꼬리는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원래 그렇게 생긴 걸까 아님 이 동상의 작가가 잘못 만든 걸까. 본인이나

유족으로부터 초상권에 대한 합의를 받고 최대한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낸 작품들이라 했었다. 사실 그가

재임중이던 시절, 난 최루탄 냄새 맡으며 어린이회관에 '우뢰매' 따위 보러다니던 꼬맹이였다. 그의 얼굴을

티비에서 본 기억이 없다. 입꼬리는 더더욱 기억에 있을 리 없다. 별명이...물태우였다던가.

김영삼 전 대통령. 요새도 참 말 많이 하던데, 다행인지 우리 나라 대통령 중엔 아직까지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전례가 없었다. 끝까지 무사하게 피 안 묻히고 구정물 안 튀긴 대통령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조깅을 워낙 좋아했던 대통령답게 흥건히 브론즈색 물들이고도 또 뛴다. 무슨 포레스트 검프도 아니고.

그의 봉긋한 엉덩이를 함께 보며 친구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클린턴이 조깅을

제안해왔댄다. 나란히 달리며 한미관계를 논해야 할 그 찬스에서, 그는 죽어라고 달려선 클린턴을 멀찍이

따돌리고 이겼다며 좋아했단다. 그러고 보니 포레스트 검프랑 비슷한 면이 적잖다.

"클린턴도 조깅으론 날 못 이겨~!" 좋댄다.

그리고 책 읽는 김대중과 자전거 타는 노무현을 만나고, 초봄 기운이 드리워진 청평호에 시선을 박았다.

청남대엔 군사시설도 함께 있었다고 하더니, 설마 그때부터 화장실 옆에 저렇게 배치되었던 건 아닐 거다.

여자는 왼쪽으로, 남자는 오른쪽으로, 그리고 볼일급한 꼬맹이는 가운데쪽으로.

대통령 광장에 들어서는 입구. 뒷 벽면에는 각국의 행정수반이 집무를 보는 관청이 있다. 한국의 청와대,

프랑스의 엘리제궁, 미국의 백악관, 뭐 그런 것들.

총 9명의 대통령. (현 대통령을 제하면) 16대 대통령까지 16번의 임기가 지났는데 인물은 9명이다. 뭐 재임,

중임이 항상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지만, 좀더 옵션이 많았으면 조금은 더 맘에 드는 대통령이 많았을지도

모르겠어서 아쉬울 따름.

옆구리에 '대한민국 헌법'을 끼고 있는 대통령,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그의 치하에서 만들어진 헌법이긴

해도 그때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의미는 지금과는 또 달랐을 거다. 당장 국토의 공공성이라거나

수도로서의 서울이 갖는 지위 따위가 해석을 통해 바뀌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장면 내각은 내각제여서 대통령 광장에 끼지 못했나 보다. 바로 윤보선 대통령으로 스킵. 무슨 일을 했는지,

그가 어떤 대통령감인지 알아보고 평가하기엔 그의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 사람. 근데, 그 사람하고 진짜 닮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 흉내낸다고 선그라스 끼고 돌아다니고 그런

모습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그 사람은 정말 그 사람 닮으려고 꽤나 노력하는 중인 거 같다. 어쩌면 요새는

그 사람보다 더욱 세련되고 고도화된 수준에 올라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엄연한 질적 차이가 있으니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엔딩은 얼마나 닮고 또 얼마나 다르게 될까.

최규하 전 대통령. 이 분이 아마 최근의 '서거 러시' 이전 가장 가깝게 돌아가신 분이었던가. 조용하게

돌아가셨던 거 같다. 무색무취한 대통령이었던 걸까, 역시 짧았던 재임 기간 때문인지도.

아까, 군대에서 구보하는 걸음새로 각잡혀서 걷던 아자씨.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광주의 전남도청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한 채 파시드랑 뼈대만 남겨두었으며, 가끔 그는 현실 정치에 훈수도 둔다.

노태우 전 대통령. 그런 생각도 든다. 대통령도, 국민도, 시간이 지난다고 점점 나아지라는 법은 없다.

그건 조금은 무임승차하려거나 언발에 오줌누기식 위로를 구해보려는 얕은 꾀.

IMF라는 재앙이 터진 건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시기였지만, 그게 터지지 않고 안으로만 내연해서 약자들을

사회 밖으로 튕겨내는 시스템을 만든 건 그 이후였다. 거대한 후폭풍을 불러오고 뭔가 구태의연하던 과거를

지워버려야 할 타이밍에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고도화된 모순을 만들어내버린 면도 있는 거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한 고용 시장, 오히려 위축되는 듯한 사회복지망, 수월성 위주의 입시 교육, 민주/반민주 따위

선언적이고 허구적인 경계선에만 자족하는 지난 시대의 비주류들..그래서 김영삼 때문에 IMF가 났다고 쳐도

-사실은 다른 원인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그 뒷수습을 그렇게 한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어쨌거나, 대통령 광장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태극무늬가 있다.

대통령 동상들이 바라보는 쪽엔 뭐가 있을까, 싶어서 고개를 돌려봤다. 고개도 돌리고 카메라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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