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간단히 물었다. 'May I?' 하며 카메라를 슬쩍 들어올리면

애나 어른이나 다들 알아듣고선 방긋 웃어주거나, 별 흔들림없이 시크하게 멈춰주거나.

그렇게 찍은 사진들. 황금산 위에 올랐을 때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방콕 시내를 내려다보던

가뭇가뭇한 아이들이 귀여웠다.

황금산 주변동네를 진동시키던 징소리, 종소리를 만들어내던 저 팔뚝들. 여자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빌러 온 아저씨 하나가 나의 '메이 아이?(카메라 들썩)' 앞에서 흔쾌히 포즈를

취했다. 사진 이후의 다시, 대애앵- 귓바퀴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굵은 떨림.

황금산 위의 황금탑, 사람들의 기원을 모으는 안테나처럼 위로 뾰족하게 곧추선 그 탑을 향해

무언가를 조용하게 빌고 있던 태국의 아가씨. 꺾인 발바닥이 하얘지도록 미동도 없이 탑을 향했다.

어딘가의 재래시장, 순대를 튀긴 것처럼 곱창 안에 밥풀이 잔뜩 채워진 채 기름으로 튀겨진

간식을 팔던 해맑은 꼬맹이 숙녀들. 하나만 달라는 내게 계속 두개를 디밀어주어 당황시키던.

두리안에도 제철이 있는줄은 몰랐다. 지금은 남국에도 두리안은 제철이 아니라더니, 과일시장은

온통 파인애플과 수박뿐. 조그마한 밴 위로 바늘꼽을 틈도 없이 차곡차곡 쟁여진 파인애플을

내리던 이들의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리고 적재가 끝난 다음인지 파란색 바구니들을 탑처럼 쌓아둔 채 고단한 몸을 뉘인 아저씨.


다른 시장, 또다른 고단함. 고개를 한껏 젖힌 채 불편한 자세지만 잠시라도 쉬어 가실 수 있다면.

짜오프라야 강으로 스미는 방콕의 거미줄같은 운하들, 사람들은 마을버스를 타듯 수상보트를

타고 방콕 깊숙히 들어갔다. 그리고 좁은 운하만큼이나 가늘고 긴 배를 타고 온통 물보라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통에 저런 파란 방수포를 끌어올린 채, 검표원만 배 밖에 남겼었다.

지저분한 방콕의 운하 좌우변의 허름한 수상 가옥들을 쾌속 보트로 휙휙 지나치며 문득 눈에

꽂혔던, Joy is UP이란 저 높은 건물. 선착장에 내리니 문득 풍경이 바뀌었다. 여기는 모던 방콕.

그리고 제법 대도시스러운 복장의 사람들.

그리고 어느 재즈바, 클래식기타를 쥐뜯으며 분위기를 잡던, 그리고 그만큼의 공력을 갖췄던

태국의 아티스트가 있었다. 구불구불한 장발을 커튼처럼 늘어뜨린 채 그가 만들어내던 멜로디들.

그런가 하면 태국의 소수부족, 아마도 북쪽 치앙마이 인근에서 온 듯한 분들이 나무 개구리를

막대기로 긁으며 개구리 소리를 내기도 하고, 원색의 고깔모자처럼 생긴 전통모자를 쓴 채

여행자들에게 팔고 있었다. 대부분은 저렇게 단호한 거절, 그래도 개구리 소리는 그치지 않고.



정말 귀엽게 생긴 백인 꼬맹이들이 짜오프라야 강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유람선 앞선창에

딱 버티고 서서는 아주 신났다. 찢어질 듯 맹렬하게 펄럭이는 태국 깃발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어찌나 재미있어하던지. 녀석의 윗도리도 질세라 나부끼고 있었다.

카오산로드 바로 옆에는 커다란 복권 상설도매시장이 위치해 있었다. 방콕 구석구석을 넘어

태국의 곳곳으로 퍼지는 복권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위한 사람들, 그리고 팔기 위한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잔뜩 쌓아둔 채 몇십장 단위로 끊어서 스테이플러로 묶어두는 어른들의

부산함 속에서 혼자 가판을 지키는 아이의 눈빛이 심퉁스럽다. 놀고 싶은 거겠지.

라오스에서 왔다는 Kai, 이 게이 아저씨는 내 선글라스를 굉장히 부러워했다. 아침부터 쌀국수에

맥주를 먹는 내 앞에 앉아 계속 재잘재잘, 며칠 안 되는 사이 세번이나 가서 밥도 먹고 그와 얘기도

나누는 '단골'이 되어버렸다. 남자친구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문득 시샘이 샘솟듯 하더라는.

왕실선박박물관에서 온몸을 구부린 채 배 안쪽을 수선하고 있던 아저씨. '메이아이(카메라)?'의

물음에 슬쩍 흘려주던 수줍은 미소가 참 좋았는데.

숙소로 돌아가던 길, 카오산로드로 돌아가는 숏컷shortcut, 지름길을 자기집 안방인 양

차지하고 의자에 누워 티비를 보는 가족들이 넘 웃기고 정겨운 거다. 전등 불빛과 함께

어둑한 골목길을 비추는 티비 조명.

어느 음식점들, 골목 뒷켠에 숨어 외국인이나 여행자는 눈에 띄지 않던 그 곳은 태국의

아저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신문을 꾸깃하게 펼친 채 달겨붙는 파리에게 엉성하게

손을 휘저으며.

그렇지만 카오산에만 들어가면 이렇게 꿈틀거리는 문신을 과시하며 벗고 다니는 외국인들 천지.

유럽인, 미국인, 아시아인들, 온갖 국적의 인종들이 몰려들어와선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문화를

만들어놓은 해방구의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이렇게 온몸 가득 타투가 새겨진 마네킹이 서 있던 카오산의 그 어느 골목, 아무래도 저런 식의

타투는 그렇게 이쁘다는 생각은 절대 안 든다.

공원의 큼지막한 그늘 아래에서, 돗자리처럼 펼쳐진 초록빛 잔디밭에 기대 누운 채 책도 읽고

낮잠도 자는 금발의 아가씨들. 저런 식의 여유를 그렸던 거다. 사진을 찍고는 나도 슬몃

풍경에 끼어들어 책도 보고, 낮잠도 자고. 또 누군가 사진을 찍었을지도.

하얗게 칠해진 길다란 벤치 위에 척하니 양반다리를 한 채 신문을 읽던 아저씨가 있었다.

밑에는 커다란 개 두마리가 녹아내린 듯 땅에 달라붙어서 나른하게 잠들어있었고. 꽤나

한가롭고 평화로워보이는 풍경이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니 개들은 도망가고 아저씨만 웃었다.

조그마한 불당에 들어갔는데 아저씨가 부처상 앞을 싸리빗자루로 쓸다가 잠시 멈추더니 한참을

통화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내게 하나도 의미를 싣지 못한 채 그저 시끄럽고 야릇한 노래처럼

울렸지만, 왠지 부처는 다 이해했다는 듯 빙긋 웃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오던 날, 짐가방을 질질 끌며 공항버스를 기다리던 때. 따끈하게 덥혀진 보도블록에

앉아 눈앞에서 내달리는 차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방으로 꼬불거리는 글씨가

창문에 가득 적힌 시내버스 한 대가 멈췄고 사람들을 쏟아냈고 다시 삼켰다. 사람들이 몸싸움하듯

오르내리던 부산함 가운데도 흔들림없던 그녀, 무심한 눈빛으로 버스를 보내버렸다.





짜오프라야강 서안, 카오산로드에서 북서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선박박물관',

태국 왕실이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짜오프라야강에 띄우는 화려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이토록 한적할 수가.


입장료는 100바트, 300바트에 대략 10달러, 만이천원이라 치면 100바트는 대략 3000원선.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따로 100바트를 추가로 내면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고 했다.

걍 둘러보지 뭐, 하고 입장료만 내고 들어갔다가 헉, 아니다 싶어서 냉큼 100바트 더 내고 촬영을

허가받았다는 표시의 얄포름한 종이 한장을 목에 걸었다.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던 촬영증.

이런 금빛찬란한 화려한 뱃머리가 나란히 모여 있던 거다. 첫눈에도 정교한 조각과 세련된 마감,

금빛이 번쩍거리면서도 결코 싸지 않은 느낌의 배색과 품격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 무려 1981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의식용으로 쓰이는

이 배의 뱃머리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신장이 당당히 저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춤엔 조그맣게 숨어있는 포신. 이런 배를 넓고 도도한 짜오프라야 강심에서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된 뱃머리, 저 눈길을 올려다본다면.


이것들은 더 멋졌다. 동남아에서 신격화되는 뱀의 신 '나가'를 형상화한 듯한 일곱 머리를 가진

뱀의 흉흉하고 위압적인 모습도 그렇고, 날개처럼 두 팔을 펄럭이며 날아오를 듯한 분위기의

날렵한 신장도 그렇고. 특히 저 빨간 혀와 새하얀 이빨을 가진 일곱머리 금빛 뱀은 태국 왕실을

배경으로 유유하게 짜오프라야 강을 점령한 화려한 배들이 담긴 풍경 엽서에서 자주 봤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 배를 타고 수많은 선단으로 구성된 전투용 배들의 앞머리에 섰다면, 적선들이

딱 마주쳤을 때 바싹 쫄았을 거 같다. 화염이 불타오르는 듯한 저 사납고 들끓는 듯한 갈기들,

그리고 단숨에 숨통을 물어뜯어낼 듯한 강력한 턱과 이빨, 그리고 새빨간 혀가 날름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아가리까지. 뱃전에 설치된 포신이 차라리 귀여워 보일 지경.


옆으로 넘어가며 배를 하나하나 둘러보는 데도 은근히 동선이 길다. 배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싶었는데, 앞에서 보았을 땐 얄포름하다 싶어서 그랬지만 정작 배의 길이가 꽤나 긴 거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형태의 배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을지는 모르곘지만, 그런

날씬한 형태를 갖추고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이런 위엄을 갖출 수 있다니 그것도 놀랍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여덟 척의 배중에서 가장 아름답던 배, 초록색 눈과 은빛 어금니가

온통 보석으로 꾸며진 것 같다. 학처럼 우아하게 뻗어올려진 미끈한 목에도 비늘같은 무늬가

꼼꼼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슬몃 쳐들어올려진 고개도 당당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이 또아리를

틀고 땅에 내려앉은 채 하늘을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배의 뒷꼬리, 미끈하게 쭉 빠진 느낌도 그럴 듯 하지만 배의 앞섶과 마찬가지 문양으로

통일성을 갖춘 모양새는 왕실의 선박으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번쩍 들린 앞머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실용적인지 감각적인 측면인지 모르겠지만, 하늘로 은근히 슬금슬금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번쩍 치켜올려지는 휘영청한 곡선의 아름다움까지.

배 가운데, 금빛 휘황한 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왕과 왕비, 왕자나 공주를 위한 자리일 테고.

시야를 확보하고 바람이 넉넉하도록 그랬는지 햇빛을 가릴 천장이 좌대만큼 높았다. 저렇게

높이고서도 배가 균형을 잘 잡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도 언제든지 불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배들 옆으로, 옆면이 휑하니 빈 채인

배도 한 척 보였고, 아예 분해해서 새롭게 만들 작정인 듯 뱃머리만 떡하니 떨어져나가있는 덩어리도

보였다. 다리 사이로 대포를 쏴대는 모양의 뱃머리,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니 한척 한척이 모두

굉장히 소중한 거 같다.

그래서겠지만, 박물관 한 쪽에는 이전에 쓰였던 배의 잔해들과 장식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언제든 새로운 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한척 한척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모양새와

분위기를 가지고 짜오프라야 강을 당당하게 가로질렀노라 기억해 두려는 듯. 박물관이긴 하지만

이 배들은 유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 저렇게 자재를 운반하고, 배 안에 들어가 사포질을 하고

뭔가 수선하고 보완하는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박제된 기념품들이 아니라, 언제든 행사 일정에

맞추어 나설 준비가 된 살아있는 것들.

아마도 저런 일꾼들이 이렇게 소담스런 불당을 차려놓은 거 아닐까. 박물관 아닌 박물관의 기둥

한켠에 새집처럼 올려둔 불당 앞으로 빨강색 환타 두병을 열어서 빨대까지 꼽아둔 저 다정함이라니.

한쪽 벽면에는 배를 실제로 어떻게 젓는지, 그리고 수병들의 복장은 어땠는지, 그런 모습을

에둘러 짐작해볼 몇 장의 자료들이 있었고 조그마한 형태로 축소된 배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배들은 언제든 수로를 통해 짜오프라야 강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제각기의 도크

위에 번쩍 들려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당당히 든 채 다리가 치워지고 철문이 열려 짜오프라야강

위로 둥실, 의연하게 미끄러져가는 그림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허름한 창고 같은 박물관

안에서 벗어나 남국의 햇살 아래 온통 번쩍거리며 그 섬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사방으로

빛무리를 떨쳐낼 그럴 장면. 왕의 배들이 어둠속에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왓 아룬, 새벽사원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곳은 첫날 일정을 위한 일종의 반환점이었다.

5년 전에 다녀갔던 그 곳. 그 때도 나름 똑딱이로 사진을 남기고 나름의 감흥을 남겼었다

"거대한 것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면, 적당한 거리잡기가 가장 중요하다.
얼마만큼 거리를 격해야 나와 당신의 그림이 이뿌게 나올 수 있을지..
당신의 위풍당당함과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내가 그 곁에 자연스럽게 설수 있는 사진은.

너무 멀면, 모든게 용서될 것 같다. 고작 한웅큼 흩뿌려진 저녁 햇살 만으로도
너무도 부드러워보이는 당신의 실루엣.

너무 가깝게 들이대진 말기. 그 오색찬란한 빛깔과 생생한 질감이 사실은
사기접시를 깨넣고 붙여넣은 재활용품처럼 보일 수 있으니.

고슴도치가 사랑을 하듯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바싹 다가가기엔 한 평생 호흡이 길다.
크레딧이 올라가도 삶은 계속되고, 한마디 말로 감정을 전달한다는 건 편집기술의 승리일뿐.

간격잡기는, 고수의 스킬. 당신은 내 간격 안에 들어와있어. 베인다.


p.s.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도, 삶도, 너무 거대해보이는 요즘이다.



정말이다. 이 커다란 사원의 그 오밀조밀하고 오톨도톨한 질감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어떻게 새겨넣었는지 일일이 눈으로 쫓으려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무늬들에 온통 둘둘

감겨 있는 거대한 탑, 그리고 요기조기서 탑을 온몸으로 (그리고 한쪽 무릎을 확 꺽어 바닥을

찍은 채) 받치고 있는 신들. 그저 탑의 굵은 윤곽만으로 섬세함과 장엄함을 던져준다.

그렇지만 역시나, 몇 걸음 가까이로 내딛으면 금세 드러나는 거다. 그 굵고 단호한 선 뒤에

가려있던 디테일들이란 게 얼마나 불규칙하고 마구잡이식으로 붙어있는 타일 조각들인지.

하나하나 정갈하게 붙어있다기보다는, 철퍽 접착제를 덧바른 후에 준비된 타일들을 꾹꾹

빠르게 붙여나간 게 아닐까 싶은 느낌으로 더러는 회칠 속으로 잠겨 있기도 하고, 조금은

들떠 있기도 하고.

원래 왓 아룬이 완공되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의도하진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태국의 왕에게 선물로 보내온 온갖 자기들이 있었는데 딱히 왕이 달가워하지 않아 그걸

이 곳의 사원을 꾸미는데 활용했다고 한다. 더러는 깨뜨려서 모자이크 타일처럼 썼지만

사진에서처럼 조그마한 자기는 통째로 붙여 장식하기도 했나본데, 하나가 쑥 빠졌다.

저건 누가 챙겨갔으려나. 괜히 손가락을 힘을 주어 옆의 자기도 슬쩍 건드려보고.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중앙탑에는 사방으로 계단이 나있다. 위로 오르는 사람들은 점점

몸을 탑에 의지하며 파이프 난간을 굳게 잡고, 밑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거의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물스물 계단에 붙어 기어내려오고.

탑의 중턱까지 올라와서 한숨 돌렸다. 짜오프라야 강이 내려다 보이고, 단정한 사원의 뒷끝있어보이는

뾰족한 부리들이 생생히 보이고, 온통 평지인 방콕 시내가 멀리까지 보이고. 남국의 햇살보다

바람이 더 힘센 공간이기도 했다. 따끈한 햇살을 시원한 바람이 산산조각낸 채 사방으로 날려보내는.


그렇지만 이미 상당히 좁아진 공간, 한바퀴 탑을 돌아보는데 좁은 통로를 비비적대며 사진도 찍고

바깥도 구경하는 사람들이 발에 걸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사방을 바라보는 각도와 시야가

몇 가지로 제한되어 버리는 곳이기도 했다.

다시 꾸역꾸역, 더이상 방문객에게 허용되지 않는 제한선까지 올라왔다. 조금더 높아졌고

그만큼 멀리까지 방콕을 바라볼 수 있었고, 짜오프라야 강 너머 꼬물대는 사람들이나 차들이

조그만 벌레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아까 중턱쯤에선 남국의 햇살과 바람 사이에 입을

오른쪽으로 벌린 부등호가 한 개 정도 끼어있었다면 여기는 한 두세개 쯤. 햇살<<<바람.


그만큼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워졌다. 공간이 더욱 좁아져서는 이미 올라와있는 사람들이

돌아보는 방향으로 일방통행밖에 가능하지 않았을 뿐더러, 보여지는 세상도 광각으로 잡힌

그저 작고 귀여워서 마냥 용서가 되는 듯한 사이즈. 그러고 보면 왓 아룬을 멀리서 볼 때의

느낌이나, 이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볼 때의 느낌이 같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솟아있는 탑의 나머지 상단부, 여기에서도 몇 명의 역사가 조금 졸린 눈을

하고서 탑을 떠받치고 있었다. 조금은 더 인상을 쓰고 있어야 실감이 더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탑을 떠받드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공덕이라 여겼으리라 생각하면, 저 나른하고

흐뭇한 표정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지만 가만 보면 탑 상단부에는 이렇게 코끼리들이 머리를 모은 채 커다랗게 휘영청한 상아 이빨과

길다란 코를 휘두르며 금방이라도 탑 밖으로 튀어나올 듯 육박하고 있는 거다. 조그마한 창문 하나를

완전히 꽉 메운 채 탑의 사방에서 돌진하는 녀석들, 그 무게만 해도..하며 어림짐작해보려다가 말았다.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왓 아룬의 화려한 전경. 저렇게 길고 가늘게 뻗어있는 첨탑은 어떻게

위에 올렸을까. 길기도 길지만 무게도 무게일 텐데, 균형을 잡고 유지하기도 쉽지 않지 싶다.

언제 이 곳에 공양된 화환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낮을 버텨낸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비실비실 수분을 잃고 축 처져버리긴 했지만 아직 그 색과 향은 여전했다.

다시 내려왔다. 탑을 한바퀴 둘러보기에도 여유롭고, 탑의 위와 아래, 디테일과 실루엣을

내키는대로 올려보고 굽어보기에는 역시 아래에 내려와 있는 게 좋은 거 같다. 위에 오르면

아무래도 시각도, 시야도 특정하게 묶여버리고 마는 거다. 그렇게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발견한 저 일란성 쌍둥이 난간 장식들 틈의 미운 오리 한마리. 훼손된 장식을 회색 시멘트로

그냥 다시 붙여버렸나 보다.



그러고 보면, 역시나 태국 사람들은 참 꽃을 사랑하는 거 같다. 모든 장식문양은 결국 꽃.

넓은 꽃잎, 좁은 꽃잎, 긴 꽃잎, 짧은 꽃잎, 그렇게 왓 아룬 사원 전체를 꽃밭처럼 뒤덮은 꽃들.

탑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토끼 분수대. 금색 토끼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조각이 신묘년

토끼해를 맞은 사람들에게 나름 의미를 던지는 듯 하다. 근데 태국도 십이지신의 개념을

매년 적용해서 의미를 부여하려나, 그건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곳의 아이들에게 이 사원은 그저 잔디가 파릇파릇 깔려있는 폭신한 공원. 깔깔거리며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아이들이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바로 앞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 강 동안으로 넘어가는 길, 꽃 한송이 한송이를

묘사하던 타일 조각들, 탑의 구석구석 피어난 그 꽃송이들, 그것들이 그어내던 미묘하고 자잘한

떨림 같은 선들이 싹 걷혀버렸다. 그리고 다시 처음에 봤던 모습 그대로, 단호하고 기하학적인

굵은 선으로 강렬하게 그어진 탑 한덩이만 남아버렸다.


+ 태국여행, 특히 방콕에 들러 이국적인 문화를 만끽하고 싶다면 방콕호텔 예약은 판매못한 객실을

모아 저렴하게 판매하는 '레이트스테이즈'를 추천하니 참고하면 되겠다.





지도에도 그려져 있지 않은 짜오프라야 강 서안, 방콕의 서쪽 끄트머리에서 만난

갈래갈래 운하길에서 선인장과 조우했다. 조우. 불쑥 에피톤프로젝트의 이 노래가

생각났고 단숨에 가사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뭐랄까 가사가 그리는 풍경, 감정이

한순간에 휙 머금었다가 휙 빠지는 느낌이, 마치 스펀지를 미지근한 물에 푹 담궜다가

힘주어 꽉 짜내는 그런 기분이었다.


잔뜩 구겨진 스펀지로부터 손을 타고 끈적한 물이 뚝뚝 흘러떨어지듯, 그렇게 땀이

얼굴에서 뚝뚝 떨어졌더랬다. 어쩔 수 없었다. 알지만, 땀이 흘러주어 다행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맘이 아픈 것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선인장, 에피톤프로젝트.


햇볕이 잘 드는 그 어느 곳이든

잘 놓아두고서 한 달에 한번만

잊지 말아줘, 물은 모자란 듯 하게만 주고


차가운 모습에 무심해 보이고

가시가 돋아서 어둡게 보여도

걱정하지 마, 이내 예쁜 꽃을 피울 테니까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께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속상했던 마음들까지도

웃는 모습이 비출 때까지

소리 없이 머금고 있을께


그 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 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서 있을께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왓포에서였던가, 금발 꼬맹이 하나가 잔뜩 늘어진 고양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고양이한테 소리도 질러보고, 슬쩍 꼬리나 귀를 잡아당겨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철저히 몸뚱이를

내팽개친 채 끄떡없이 눈을 감고 있던 이 녀석. 야윈 목덜미를 감싼 색색의 목걸이가 눈에 닿았다.

방콕 가이드북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짜오프라야강 서안, 운하가 촘촘한 그 어디메를

헤매이다 발견한 늠름한 개자식. 더럽고 위험해보이는 이곳에도 피터팬과 푸우는 살풋

이불보처럼 내려앉아서 개자식의 위용에 커튼을 더했다.

실은 이 녀석의 밥을 훔쳐먹는 두 마리 까마귀를 담고 싶었는데, 영악한 녀석들은 카메라

렌즈 움직이는 소리에 멀찍이 도망가고 객쩍은 참새만 남아서 부리질 중이었다. 그나마도

찰칵, 소리에 눈을 뜬 개자식은 더운 나라의 개답잖게 미친 듯이 짖어대며 밥값을 했다.

빡크롱 꽃시장에서, 핏줄이 섞인 듯한 이 두 녀석이 늘어지게 자는 걸 보고 접근했더니 두 녀석

모두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앨런포의 '검은 고양이'를 떠올릴 만큼 악마처럼 새까맣던

녀석들의 잠을 방해했단 사실이 따끔따끔해지도록,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대던 녀석들.

이렇게 서글서글한 눈빛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꽃시장의 아지매들, 아저씨들이 슬쩍

쌀국수 그릇을 걸친 채 한끼를 해결하던 식탁 대용 테이블에 퍼진 채 남국의 고양이다움이란

이런 것임을 늘어지게 과시하던 녀석.

오늘은 동쪽으로 걸어볼까, 싶던 날. 차도와 인도가 슬몃 섞여들어가던 어느 길 위에서 지하세계로

통하는 비밀의 문을 발견했다. 절실한 손과 발 모양으로 그곳을 갈구하던 도마뱀 한 마리, 도망갈까

싶어 조심조심 사진을 찍고 나서 한숨돌리며 슬쩍 발로 밀었더니 슬슬 밀린다. 고인의 명복을.

아침에 먹던 쌀국수와 캔맥주를 제하면 사실 남국의 과일로 배를 채우다시피하던 낮의 시간,

그에 더해 맥주와 재즈 공연 따위로 버무려진 저녁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가 꾸륵꾸륵꾸르륵.

어딘가 있을 무료 화장실을 찾아 애타게 방황하던 타이밍에도 고양이는 놓칠 수 없었다.

날 그렇게 심문하는 눈초리로 노려보지 말기를. 나 역시도, 너 역시도 왜 사는지는 모르잖아.

우린 이제 요절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 한 시간에 이백바트짜리 타이 마사지로 몸을 풀기에는

배배 꼬인 구석들이 워낙 많더란 말이다. 근데, 심문을 하려는 거냐 아님 측은해하려는 거냐.

싸판풋 야시장, 라마1세 동상이 서 있는 앞에서 불경하게도 두어 시간 누운 채 노래를 듣고 책을

읽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었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대리석 화단조각에서 내 게으른 등짝을

떨어뜨렸던 건, 어디선가 웽웽거리며 나타난 R/C 카, 그리고 그 자동차를 따라 짧은 발을 재게

놀리며 눈을 뗄 줄 모르고 내달리던 강아지 한 마리.

방콕의 물가는 많이 올랐다. 타이 마사지는 삼십분에 백바트, 한시간에 이백바트. 이건 그나마

배낭여행객의 천국, 게으름뱅이들의 천국 카오산의 시세고, 이런 이쁜 고양이가 지키는 다른

동네에선 한시간에 이백육십여바트. 고양이값이라기엔, 저녀석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다는.

카오산 동쪽으로 걸어볼까 싶던 날이었다. 예기치 않게 마주친 골든 마운틴, 푸 카오 텅의

황금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슬쩍 풍경과 섞여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울룩불룩한

탑의 무늬에 스며든 채 달게 자던 녀석이 부러워 굳이 탑모서리를 밟고 다가가선 카메라를

들이밀었더니, 심술궂은 눈을 번쩍 뜨고 만 녀석의 심통스러움이라니.

남쪽으로 걷던 날이었다. 팟퐁을 지나 쑤언 룸 나이트 바자를 가는 길은 무슨 공원을 하나

끼고 있었더랬다. 공원을 따라 걷는 길에, 불쑥 난 경련하듯 몸을 떨며 잠시 멈춰선 채 저

미지의 생물체가 뭔지 곰곰이 뜯어봐야 했다. 이 거대한 도시 한 가운데 수로를 유유히

헤엄치던 저 녀석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 룸피니 공원. 이리저리 물길을 품고 있는 그 공원의 울타리 저쪽으로, 더러는 버스 정류장

뒷편의 깨어진 콘크리트와 벽돌 자재들 사이로 일미터는 쉽게 넘을 거대 도마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비둘기가 심상히 도마뱀의 상륙을 바라보듯, 정류장의 태국인들은 심상히 도마뱀들을

눈으로 좇고 있었던 거다. 거대 도마뱀을 품고 있는 도시, 방콕.

미국식으로라면, Cock-a-doodle-do!의 순간이랄까. 카오산 로드 앞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에 들어맞을 그 사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오만한 수탉 녀석이 시도 때도 없이 목을 뽑아쥐고

꼬꼬댁을 외치던 타이밍이었다.

남국의 개들은 남국의 고양이들만큼이나 축축 늘어진 채 순한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 앞을 장군처럼 꼿꼿한 걸음걸이로 비장한 히프를 내민 채 사열하는 수탉들의 위엄이라니.

태국에서, 태국의 방콕에서 만났던 개와 고양이와 닭, 그리고 더러는 도마뱀들에 얽힌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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