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역에서 나와 조금 걷다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간판이 보인다. 홍콩의 지하철역이 으레 그렇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힐사이드 에스컬레이터가 출발. 참고로 이곳의 시꺼멓게 그을려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운 간판엔

 

'the Central Escalator Link Alley Shopping Arcade'라고 적혀 있다.

 

 다짜고짜 시작되는 에스컬레이터. 1994년 3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해 2년반만에 완공했다는 800미터짜리 에스컬레이터다.

 

연간 2천만명이 이용하는 이 에스컬레이터는 산 윗동네 사람들의 출퇴근을 돕고 교통 정체를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애초 출퇴근용이니만치 오전엔 하행, 오후엔 상행으로 방향을 바꾼다고 한다.

 

 그런 내용이 적혀 있는 안내판, 에스컬레이터를 안전하게 타기 위한 온갖 지침이 총망라되어 있는 듯 하다.

 

 중간에는 이렇게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건물 중턱에서 툭툭 튀어나와 사방으로 연결되는 아케이드를 따라 에스컬레이터로 합류하는 사람들하며.

 

 어느새 에스컬레이터가 오르는 길 아래로는 저만치 간판들이 늘어뜨려져 있을 만큼 높이 올라왔다.

 

 

 

 아래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정수리도 보이고.

 

 

 초록빛 화살표를 따라 멍하니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고 주변 풍경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어느새 소호.

 

 소호의 조금은 음침하면서도 술렁이는 분위기를 간직한 골목통을 지나고.

 

 어느 그럴듯한 바에 앉아 맥주병을 홀짝거리는 하얀 머리의 멋진 할머니도 만나고.

 

 그새 이렇게나 많이 올라왔나 가끔은 뒤도 돌아보며 에스컬레이터가 직선으로 관통해온 궤적을 헤아려보고.

 

 위로 오를수록 점점 눈에 띄는 주택가의 올망졸망한 풍경들을 보며 그들의 일상이란 어떤 걸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아무래도 소호를 넘어 위로 올라가면 주택가라 '볼 것이 없다'더니 관광객의 출입이 드문지 에스컬레이터까지 뚫고 들어온

 

왕성한 생명력의 파초 이파리가 불끈.

 

 그런 와중에 이어지는 주택들의 창문들. 에스컬레이터 양쪽 풍경을 온통 꽁꽁 닫힌 창문으로 막아버렸지만, 그래도

 

저렇게 리듬감있게 매달린 화분들이나 몇가지 소품들로 지나는 사람들을 배려했달까.

 

 

 끝까지 올라갔더니 정말, 당황스럽도록 아무것도 없는 휑한 주택가여서, 어쩔 수 없이 조금 걸어내려가야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를 땐 몰랐는데, 꽤나 가파르고 길다. 더구나 내려가는 길이나 무릎 도가니에 꽤나 부담이 가는 듯.

 

이 정도의 경사라면 조금 실감이 나려나. 마침 빨간 색이 화려한 홍콩의 택시들이 우르르 멈춰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장면.

 

 

#1. 포지티브 Ver. : '빽투더퓨처'

점점 시야가 좁아들어지더니 어느 시점에서 점 하나, 그 점조차 팟 꺼져 버리는 시점이 분명

있었을 거다. 언제가 되었건, 누군가 그런 미래를 바로잡고 나를 돕고자 2010년으로 되돌아와

알게 모르게 암시를 계속 내렸던 건 아닐까. 어떤 이유로든 안과에 나를 데려다 앉혀놓으면

나머지는 의사가 알아서 하리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덕분에, 아주아주 초기에서부터

발견해 내어 잘 관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니 미래는 바뀌었다.



#2. 네가티브 Ver. : '안경탈출 대작전 대실패'

국민학교 1학년 때니까 어느새 20년도 넘었다. 첨엔 물색없이 '박사님'처럼 보인다는 말에

기뻐했던 꼬마녀석이 이젠 겨울철에 더운 방안에 들어오면 훅 끼쳐오는 안개를 불편해하고

점점 두꺼워진 안경알에 얼굴선이 왜곡되는 걸 신경쓴지 오래인 시간. 문득 마음을 먹었고

이십여년 만에 안경으로부터 탈출하나 싶었더니 보기 좋게 좌초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맘에

들지 않는 건, 이제 평생 관리해야 할 만성질병 한두개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건가 싶은 막막한 피로감.



#3. Fact 1. (압구정 Y안과, 강남 S안과)

시력교정 수술에는 라식, 마이크로라식, 무통라섹, M-무통라섹, ICL(렌즈삽입술) 등이 있으며,

고도근시의 경우 대개 M-무통라섹을 통해 각막두께를 약 50마이크로미터쯤 상실하는 것으로

교정 시력에 근사한 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수술 후 3일 정도 어두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버텨야 눈에서 피눈물이 멈춘다고 하는 속설이 있으나, 직접 체험하기 직전에 수술이

취소되어 검증할 방법이 없어지고 말았다.



#4. 시니컬 Ver. : '빼도박도 못하는 서른 인증'

A: 녹내장? 치료받으면 나아?

B: 아니, 리미트엔이 무한대로 갈 때 실명. 낫진 않고 평생 관리. 고혈압같은 거래.

A: 내 통풍이랑 비슷한 건가. 아님 무좀이라거나.

B: 글치.

A: 자넨 안경 쓰는 게 그나마 지적으로 보인다구.

B: 이제 무좀이니 통풍이니 뭐니 고질병 한두개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B: 슬슬 고장나기 시작하는 나이란 게 맘에 걸리고,
B: 그리고 안경이 다시 얼굴에 찰싹 들러붙었단 것도 꿀꿀해.

A: 하긴, 벌써 서른을 넘었으니. 어째 우울한데.

B: 그러고 보니 이제 빠른 생일이네 만나이네 어쩌네 빼도박도 못하고 서른의 영역이야.



#5. Fact 2. (강남 S종합병원)

녹내장이란 안압상승 및 다른 여러 가지 위험요인으로 초래된 진행성의 시신경 손상과

이에 따른 특징적인 시야장애를 보이는 질환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가장 큰 위험인자는

나이와 안압이며, 근시, 당뇨병, 편두통, 고혈압, 저혈압 등이 있을 때 더 잘 발생한다. 가족 중

녹내장 환자가 있을 경우 발생률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환자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겉으로는 정상처럼 보이므로 조기에 발견하여 적절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이미 손상된 시신경은 회복시킬 수 없기 때문에, 조기에 발견하여 진행을 억제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이다.



#6. 시니컬 Ver.2 : 짝부랄아외로워가 쓴 밤일과 녹내장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

B: 육체의 내구연한이 다 되어가나 봐.

A: 밤일 좀 줄이시죠.

B: 밤일 이지랄ㅋㅋㅋ 씨발로마ㅋㅋㅋㅋㅋㅋ

A: 밤일과 녹내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논문있던데. 이미 입증된 거임.

B: 아 그래?ㅋㅋㅋㅋ 하지 말라던?ㅋㅋㅋㅋ

A: 남아공 붕가붕가유니버시티에 짝부랄아외로워씨가 쓴 논문

B: 그리곤 제적당해 니미씨부럴털털카를 몰고 기둥서방노릇하며 나쁜 남자노릇한다는 그 아저씨 말이지?

A: ㅋㅋㅋㅋㅋㅋㅋㅋㅋ



#7. Quotation.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내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

<중경삼림>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내 육체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백년만이라도 무탈하게 아무 말썽없이 굴려먹을 수 있기를.





#8. 남은 것.

라섹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삼일 정도 장님놀이하려고 냈던 휴가가 휑하니 비어버렸다.

지방에나 한바퀴 빙 둘러보고 친구들 만나고 올까 생각 중이다. 아침마다 낯선 잠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안경을 더듬더듬 찾겠지. 씁쓸하다.






기록 지침: 위대한 항로에서 항해할 때 항해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물건. 섬의 자기를 기록해서 그 자기의 방향에 따라 각 섬을 들러가며 항해해야 한다. 기록 지침이 없다면 위대한 항로에선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영구 지침: 기록 지침과 달라서 한 번 섬의 자기를 기록시키면 그 지침을 어디로 옮기든 반드시 그 섬만을 가리키는 지침.

- 원피스 단어백과사전 中 -



그러고 보니 이곳은 여전히 '어디든 되거나 어련히 잘 되겠지'라던 불과 한달전의 마인드의 기록에서 멈춰있었다.

실은 이미 '어련히 잘 된' 홀가분함을 느끼는 목표상실의 멍청한 상태를 지나,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하나 라는

긴장감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상태랄까.

연말의 싱숭스러운 분위기를 핑계로 맘껏 늘어져서는 무슨 말로 자신을 추스리기 시작해야 할지 엄두를 못내고

있었을 뿐이다. 어느새 최초의 홀가분함은 퇴락하고 새로이 부딪힐 문제, 선택들이 정신차리고 진지해지라고

재촉하고 있으니.



수십여 곳에 지원을 했고, 하이바도 안 씌워주는 퀵서비스를 타고 시속120을 넘나들며 가능한 선택지를 넓혀

보고자 욕심을 부렸다. 세달동안 온갖 업종의 기업들 앞에서 내가 했던 말과 보였던 행동은 팔할이

'내숭'이었으며, 04년 이래 늘상 껴왔던 반지를 빼는 행위나 한미FTA를 찬성한다는 프리젠테이션, 혹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친구와의 선약 대신 회사를 택하겠다는 대답들이 전부 그러한 내숭..혹은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한다.



꼭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사실 '꼭 가고 싶은 곳'이란 단어로 내가 여태까지 지시해 왔던 것은, 들어가기만 하면

내가 선망하던 삶을 이뤄줄 것 같은 레디메이드 형태의 틀이었는지 모른다. 어느정도의 진보성을 두르고 중상류

이상의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미국보다 20-30년 늦은 한국에서 2010년쯤 대박예감의 '보보스'족이랄까.

그치만 그렇게 헐겁거나 만만한 선택지는 없었다. 물질적/비물질적 '보수'와 자신을 위한 '여가'라는 두 측면은

여지없이 상충했으며, 나자신 이미 88만원 세대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정말 뽑아줘서 마냥 감사할 뿐인 일개

구직자였던 거다.



엊그제 동아일보 인턴친구들을 만났을 때, 나랑 같이 인턴면접을 봤던 친구가 그때 많이 놀랐노라는 얘기를

했다. 내 빤짝이는 귀걸이를 보며 면접관이, 직장에 들어갔을 때 그걸 빼라 그러면 어쩔 거냐 그랬더니 내가

그랬댄다. 그 정도의 융통성도 없이 꽉 막힌 조직이라면 안 가겠다고. 전혀 잊혀졌던 기억이었다. 음..지금까지

내가 의지해온 것들은, 기록지침이었던 걸까. 어딘가 도착하면 도구로서의 효용을 다하고 버려질 뿐인. 갈지자

행보를 부추기는 기록지침말고..흔들리지 않는 영구지침을 한개쯤 품고는 있는 걸까. 나 자신에 대한 혼란.

협소한 정치적 지형만의 문제가 아니라, 진부하게도,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혼란.



오늘 우연찮게 중경삼림을 다시 봤다. 당신과의 기억을 통조림에 담는다면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만약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대사. 그 대사가 먹히는 이유는, 대다수의 기억은 편리하게도 유통기한이 파인애플

통조림만큼밖에 안 되기 때문일 거다. 사랑과 삶, 영구지침과 만년짜리 기억. 한살 더 먹는다는 따위로, 책임질

것이 많아진다는 따위로, 그걸 찾는 '척'만 하게 되는 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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