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국제면은 해외토픽인가.

 조금이라도 한국에 관련된 기사는 다른 지면으로 넘어간다. 여타 신문도 마찬가지지만, 동아일보의 국제면은 특히 그렇다. 포차 떼고 장기두는 격이다. 미일-중러의 군비 경쟁,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정치면에서 다룬다. 북한, 독도문제는 정치, 사회면, 그리고 동원호는 사회면이었다. 오늘자 발제를 봐도 그렇다. 사실의 선택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점은 알지만, 국제면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대체로 무미하다.

 국제부에서 종합면이나 사회면을 빌어 쓰는 기사는 그렇지 않다. 동아일보는 국제면을 약간은 진지한 일종의 해외 토픽란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국제부 기자는 국제면과 일반 지면을 오가면서 기사를 쓰는 것이 원칙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 지적은 무의미해지겠지만, 국제면 자체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자 하는가.



사실을 꿰는 바늘은 누가 쥐고 있는가.

 국제면에서 기사화된 ‘미국’, ‘레바논’ 등의 먼나라 이야기들은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의미를 던지게 된다. 스트레이트성의 기사들은 나름대로 깊이 있는 이해와 전문지식을 가지고 쓰여졌고,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알게 됐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사실들을 꿰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국제부 외부의 칼럼진이나 논설위원이고, 아주 가끔은 ‘기자의 눈’, ‘광화문에서’를 확보한 국제부 기자이다.

 동아일보는 국제부(라는 정체성이 존재하는지는 차지하고라도)에서 그러모은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고정적인 공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동아일보의 정견과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조율이야 불가피하겠지만, 동아일보가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스펙트럼 내에서 국제부 기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에 나서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과 해석이 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이 바로 언론들이 논조를 세련화하고 서로 소통가능한 기반을 만드는 초석이다.



여전히 특파원이 필요한가

 인터넷을 통해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오늘날, 특파원은 해당 지역의 뉴스에 대한 우선 접근권을 상실했다. 특파원에게 남겨진 역할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현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생생함을 기사에 투영하는 것이 하나이고, 해당 지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취재를 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특파원 제도는 그러한 문제 의식없이 구태의연하게 운영되는 것 같다.

 지역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파원을 보낼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지역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추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기술적인 차원에서는, 단기 특파원 제도를 활용하거나 현지 언론과의 제휴를 강화해서 현지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파원이 왜 여전히 필요한지부터 따져야 한다.



국제부 인턴을 마치는 개인적인 소회

 신문은 더 이상 신속성이나 가독성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굳이 신문을 찾아보는) 독자들은 수준도 높고 관심도 크다. 역피라미드형의 우람한 기사틀은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를 ‘글 잘 쓰는 사람’이라고 흔히 칭하지만, 인턴을 해보니 그보다는 ‘사실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아직까지는 적절한 듯하다.

 국제부의 인턴 프로그램이 참 좋았다. 기자를 본격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본격적인 기자 훈련보다 이곳의 분위기와 개략적인 이미지를 얻는 것이 훨씬 유익했다. 그리고 이아무개 선배, 김아무개 선배를 비롯한 국제부 기자들도 인턴기자를 귀찮아하지 않고 살갑게 챙겨주는 것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점심시간에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뉴스브리핑 갔을 때 이아무개 선배가 점심은 어떡할 것인지 네 번이나 전화를 해서 챙겨줬던 것이 제일 가슴에 와닿았더랬다. 부장님, 이아무개 선배님, 김아무개 선배님의 술 약속도 잊지 않고 있다.



하나 더.

 동아일보는 보수지다. 이는 위험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은 말로 들려야 한다. 국제부 인턴을 두 주간 하면서,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많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던 ‘동아일보’라는 ‘공기’는 이제 나름의 내부 동학을 가진 ‘기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보수적인 논리와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이 ‘기업’의 영업방식이다.

 다행인 것은, ‘찜질방 한번 안 가본 기자가 찜질방 기사를 쓰더라’는 인턴 동기의 이야기는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국제부의 선배기자들은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많이 열린 자세를 갖고 있어서 좋았다. ‘보수’, 혹은 (상대적인 개념어로서) ‘좌파, 우파’라는 단어가 거부감없이 쓰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동아일보를 바란다.

오늘도 점심때 소주, 저녁때 소주, 그리곤 맥주로 입가심..했더니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 잠이 들어버렸다.

종점에 사는 것이 좋은 점도 있구나 싶었다. 선택지를 버리면, 맘편히 잠들 수 있다. '저, 여기서 내려요' 정도의

대사가 방해하지 않는한, 여닫히는 문과 그 밖에 펼쳐진 풍경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1) 일개미가 쉴새없이 먹이를 실어나르듯, 기자들은 끊임없이 하루짜리 fact를 주워모은다. 자유롭다고도,

자유롭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박이 만만해보일 수도, 혹은 이미 자기검열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일정한 수준내에서 자신의 입맛대로 상큼한 먹잇감을 골라든다.


2) 이른바 데스크에서 조율이 이루어진다. 무엇이 'new's인지, 어떤 것이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비이성적으로 결정된다. 찜방 한번 안 가본 기자가 찜방기사쓰듯.


3) fact는 언어로 짜여지기 시작하고, 그럴듯한 레테르로 포장된다. 글말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단어를

배치하고 뉘앙스를 얹어주며 아웃복싱의 쾌감을 느끼다. 어디에 힘을 실어줄지 결정하는 정교한 구조물. 물론,

스트레이트성 기사는 역삼각형의 흉칙한 바디.(이제 신문을 읽는 독자가 신속성, 가독성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면, 문체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4) 기사의 표현과 호흡이 유지하던 아슬아슬한 객관성의 외피는, 논설과 칼럼에서 화려하게 재정렬된다. 무질서한
 
듯 뿌려져있는 철가루를 바싹 긴장시키는 강력한 자기장. 기사면에 헐겁게 매달려있던 구슬들을 꿰맨 바늘은

누군가에게 날아가 꽂힌다. 조선의 계륵, 동아의 '약탈정부', '노무현조크' 따위 유치한 삿대질,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유아틱한 정부의 막말은 차치하고라도.


0) 애초, 객관성은 무리다. 기자들은 사실 기능공이다. 누추한 현실을 재단해서 뭔가 있어보이게 짜깁기하는

바느질공. 아니, 기자는 단지 한 땀만 꿰매는 건지도 모른다. 각자가 가진, 서로 구태여 확인하며 맞춰볼 필요없는

정향에 따라서 허용된 한땀을 꿰맨다. 삐뚤빼뚤하게 엮여나간 실의 궤적은 때론 비둘기를, 때론 매를 그린다.

혹은 정신나간 art brut일지도.



...'동아일보'라는 덩어리를 깨서 보기 시작했다. 80년대 해직기자들은 아무러해도 결국 무능력과 비사교성으로

짤릴 처지였단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지식인의 군기'를 요구하는 선배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5시가 다가오면 죽을듯 괴로워하며 헛구역질하듯 글을 토하는..안쓰런 족속인거다.

하지만 사회에 버티고 선 건, 동아일보 기자 누구가 아니라 논설과 칼럼을 두른 동아일보 덩어리다. 대체

마이크를 쥔 건 누군가. 기자에게 쥐어진 건 고작 외마디 fact를 울리는 캐스터네츠 아닌가 싶다. 짝. 짝. 짝.

누군가가 그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아, 물론 모든 신문은 정향이 있어야 한다. 동아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언론'의 문제. 1인 1매체가

불가능하다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괴리감의 존재. 게다가 잔뜩 우그러진 정향이라면야.

이번주는 아시아재단이나 ICG같은 곳으로 인터뷰 반, 견학 반 다니느라 상당히 바쁘게 지나갔다. 내일은

저번주부터 추진했던 이스라엘 대사와의 인터뷰. 첨에는 사실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대사랑 인터뷰해봐야 동아일보 지면을 이스라엘 찌라시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런저런 기사를 찾아서

사전 조사를 하다보니 이자식..생각보다 매콤하다. 국제부 선배가 오늘 중동 문제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해줬는데, 딱 그만큼 매콤하다. 이스라엘은 '영토와 평화'를 교환하고자 하며 성경이 점지해준 땅에 조용히

살고 있는데, 테러단체들이 숨통을 졸라온다는 거다. 사실의 채택조차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새내기 교육하듯'

그리도 강조하던 기자들이 정작 균형을 잡는 건 레바논이 '제대로 된' 주권국가가 아니라서 주권침해가

성립되는지가 애매하다는 지점이다.


당하고 있는 사람이 착할 거란 건 환타지다. 장갑차에 치었다고 갑자기 '순결한 애국처녀'로 둔갑하는 건

코미디다. 하지만 똑같이 테러로 맞대응하는 이스라엘이 '평화, 사랑' 운운하는 건 혐오스럽다.


질문지 위의 번호 붙은 것은 선배들이 선정해준 질문에 내멋대로 살짝 시즈닝, 그리고 #표시는 내가 묻고 싶은

것들. 대체 이게 기사가 어찌 나오려나......또 내 질문은 짤려버리는거 아닌지.

음음...동아일보는 조선일보보다도 보수적이다. 의외인 건, 프레시안 편집부장이던가...가 동아일보의 전직

국제부장이란 사실. 인턴을 조금더 일찍 왔어야 했던가.ㅋㅋ


1. 이스라엘은 이번 사태를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 2명을 납치한 것에 대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군사작전은 자위권이 갖추어야 할 ‘비례의 원칙’에 어긋나는 대응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2. 이스라엘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어린이나 노약자 등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가 크게 발생하고 있다. 헤즈볼라와는 관련이 없는 일반 주거지나 사회 기반시설에도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이스라엘은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3. 이스라엘 총리가 이란을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는 등 점차 대립구도가 아랍권 대 이스라엘의 구도로 변화하고 있다. 헤즈볼라를 무력화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장이 기타 지역(시리아나 이란)으로 번질 수도 있는가.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는 한 전장이 두 나라로 확대되지 않는다고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 전황이 장기화되는 경우에도 이는 유효한 약속인가.


4. 이스라엘은 현재 레바논에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를 휴전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분열되어 있는 레바논 내각은 헤즈볼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레바논 남부를 무인지대화하거나 다국적군이 주둔하도록 구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번 사태의 궁극적인 바람직한 해법은 무엇이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 레바논의 유엔 감시단원들은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초소가 파괴되기 전까지 6시간 동안 무려 10차례나 공격을 중단해줄 것을 이스라엘군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사무총장도 이를 고의적인 공격으로 규정하며 규탄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입장은 무엇인가.


#.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작전으로 헤즈볼라가 약화되면, 비록 레바논이 치르고 있는 희생과 대가가 크지만 레바논 정부의 주권 행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를 향해 수행했던 비대칭전쟁의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가 점유하고 있던 지역을 점령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단시간 내에 현장을 장악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 벌어졌던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 사실 여부를 떠나 노르웨이 등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미 여론과 함께 반유대 여론도 대두하고 있다. 올해 3월 주한 이스라엘대사도 연세대 채플 시간에 강의를 하던 중 강한 반발을 샀던 일이 있는데, 한국 대중들의 반유대 정서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강연 도중 아랍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하고 민주주의도 전혀 모른다는 등의 아랍권 비하 발언)

사실 기자에 대한 동경은 없었다. 단지, 짜장면 받침이 되더라도 일정하게 확보된 지면을 장악한 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마이크'를 쥔 그들이 부러웠을 뿐.


국제부를 2주간, 사회부를 2주간 하게 됐다. 원래는 국제부 대신 정치부를 가고 싶었는데, 글쎄..암만해도 전공을

감안한 듯하다. 한국에서 '국제면'은 무슨 이야길 해야할까. FTA, 개성공단, 동아시아 군비경쟁과 우익화, 유엔,

북한문제..아니다. 국제면만이 실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얼음축구공을 핥고 있는 북극곰 사진과 어딘가

먼 나라의 축제 사진. 아니면 미인대회 사진?


FTA를 둘러싼 찬반논의가 간과한 건, 이미 한국은 벨트까지 끌러져내린 상태란 거다. 더이상 한나라의

정권이나 시민사회가 독존할 수 없는 세상, 미국조차도. 국제면 폐쇄를 건의해야겠다. 사회, 경제, 정치..살점은
 
모두 뺏긴 채 앙상하게 레바논 넝마 한벌 걸치고 있는 꼴이다. 그것도 경쟁지'조선'이 치는 만큼 따라간 기사.


아니면, 깊이다. 가십거리야 이미 사이버공간에 넘쳐난다. 최근 미국 외교정책의 전환이나, 중동과 유대인의 문제

그리고 약간의 국제정치학적 씨즈닝을 곁들이면 어떨까 싶은데. 글쎄...기사가 한국과 가까워지는 순간 다른

지면에서 요리된다. 조선처럼 적극적으로 국제기사를 '활용'해서 국내 정치를 까는 것도 아니고. 멕시코 대선을

보며 '일자리도 못만드는 정부는 필요없다'는 식.ㅋ


국제부 선배 하나가 그런다. 기사문에 익숙해지면 글을 못 쓰게 된다고. 이건, 어디에서도 잘려나갈 수 있어야

하는 인스턴트 글. 우람하지만 정형화된 역삼각형의 근육미는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다. 도마뱀 꼬리처럼 언제고

잘려나간 준비가 된 나머지 글들이 허하다. 속보성이 떨어진다면, 훨씬 호흡을 잘 갖춘 글이 먹힐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하긴, 알고 있었다. 하루치 상식(내지 상식인 양 포장된 교묘한 프로파간다)을 파는 지식 노동자, 먹고

살아야 하는 밥벌이로서의 기자질. 술자리서 부딪혔던 부국장단 아저씨들은 그들이 이미 태반의 삶을 실어버린

동아일보의 이미지와 정견에 대한 신념이 있었지만, 젊은 기자들은 그렇지 않은 거 같다. 뭐..좀더 깊이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어디까지가 그들의 의지였고, 어디까지가 그들의 타협선일까. 땅따먹기 놀이같단 생각이 든다.

선을 그어 자유로이 밟을 수 있는 땅따먹기.

기자가 뭘까라는, 오늘 시작된 인턴 수업 매 시간마다 내게 불편하게 내질러졌던 질문. 사실 그다지 진지하게

뭘까~하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어서, 일단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관망세를 취하다. 진리를 구성하고,

사회적 책임이 막중하고, 머 그런 것들이 짚어졌다. 김학준 사장은 조선 시대의 사관과 언관에 비유를 하기도,

혹은 군사독재 시절 정의의 횃불로 비유를 하기도 하며, 권력에 대해 결연하게 맞장뜰 수 있는 자세를 강조했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기자는 어떤 축복을 받은 직업이긴 할게다. 자신의 호기심을 도발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쾌감. 무엇 하나 전문지식을 쌓지는 않더라도, 그만큼 자유롭게 알고 싶은 것들을 공부해가며 자신의

발로 눈으로 직접 알고 싶은 사실을 캐낸다는 것. 그저 쏟아지다시피 제공되는 정보에 만족하는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입장일 거다.



하지만, 지금이 유교적 기치가 공고했던 조선 시대나, 악과 정의의 구분이 선명했던 군사독재 시대와 같을까.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되고 나선, 오히려 제멋대로 호명되는 '민주주의'의 허울. 역설적인 이념 과잉의 시대에서
 
'민주주의'라는 둔탁하고 애매한 수사로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확고한 지반은 이미 무너졌다.

도끼를 짊어지고 왕에게 상소를 하던 심정으로 오늘날 언론의 사명을 운위한다는 것은, 내게 다시 황장엽씨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이 중심되는 세상을 구축하기 위한 그의 철학-함이 결국 기대고마는 '민주주의', 그것은

그러나 '미치광이'가 지배하는 북한을 의식해야 하는 한국에서는 의사 민주주의, 곧 반공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채

제기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삶을 온통 묻어버린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기가 옳다는, 옳을 수밖에 없다는

경직성으로 귀결된다. 맞장뜨자라는 도전적 사고. all or nothing의 극단성.

정치 권력에 대한, 시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각.



오늘날 기자에게 필요한 건, 진부하지만 똘레랑스 같은 거 아닐까. 물론 자신의 정견이나 의견이 없을 수야

없지만, 그조차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의 한부분을 구성하는 톱니같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 구성되는 진실에

수만가지 버전이 있을 수 있고, 압축성이 생명이라는 짧막한 기사글에 담기는 진실이란 허약하기 짝이 없다는

자기 반성..주제 파악. 좀더 경험해보면, 어떻게 생각에 살이 붙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