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무악재역에서 내리면 양쪽으로 인왕산, 그리고 안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멀리는 남산N타워니 국회의사당이니 63빌딩까지.

 

안산 봉우리에 있는 봉수대, 아무래도 봉수대는 입지상 훤히 트여있고 사방에 가릴 것이 없어야 할 테니 전망이 시원하다.

 

3호선 무악재역에서 내려 안산 등산로를 찾아 걸어올라가던 길, 어찌나 경사가 가파르던지

 

뒤를 돌아보니 산길을 밟기도 전에 벌써 정상에 다다를 듯한 높이에 올라버렸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본격적인 산길에 접어들고도 이런 길을 좀 더 걸어야 한다.

 

태풍이 온다더니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완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계단을 오르는 길.

 

마을 주민분들은 동네 마실 나온 차림으로 성큼성큼 잘도 오르시던데,

 

서울 한가운데 있는 산 치고는 생각보다 공간도 넓고 걷는 거리도 좀 있다 싶다.

 

그래도 봉수대까지 올라가서 내려다본 서울 전경은 참 좋았다. 아랫쪽에 서대문 형무소도 보이고, 위로는 남산까지.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있는 대형 태극기의 사괘까지 또렷하게 들어오는 정도랄까. 아기자기한 아파트 무더기들은 덤이다.

 

그리고 시야를 조금 왼쪽으로 틀면 인왕산, 그 건너편 산등성이를 끼고 청와대가 있겠지. 위에는 성벽이 이어져있다.

 

그리고 아예 왼쪽으로 확 꺾어버리니 왼쪽 안산의 둔치에서부터 오른쪽 인왕산의 아랫품까지,

 

주욱 늘어서있는 무악재 인근의 생활권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 오글오글한 풍경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저 멀리 63빌딩이 꼽혀 있는 여의도가 보이고.

 

거기서 조금더 오른편을 바라보면 뿌옇게나마 국회의사당의 푸른 돔 지붕이 보인다.

 

 

한참을 봉화대 근처에서 이리저리 서울 곳곳을 굽어보다가 내려가는 길. 사실 초행길이고 갈피가 안 잡혀서 그랬지

 

그렇게 험하거나 멀지는 않은 오름길이었다. 내려갈 때는 한결 부담없고 가벼운 마음으로. 헬기 착륙 사인을 지나.

 

대부분의 시간에 그늘을 머금고 있을 산의 서쪽면, 나무들의 서쪽면에는 짙푸른 이끼가 그대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나무 등걸에는 어김없이 버섯이 오돌토돌 돋아나 있었고.

 

내려오는 길에 만난 시멘트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날 벽, 그 위에서부터 쪼르르 조그마한 잎들을 늘어뜨린 덩굴손.

 

산을 거의 다 내려온 즈음, 엉성한 울타리를 만들어둔다며 세워둔 두툼하고 녹슨 쇠파이프 기둥 속에서 피어난 이파리들.

 

그리고, 어느 풀밭에 살포시 내려앉은 노랑색 하트 잎사귀.

 

 

 

언젠가 다음번에는 서울에 어둠이 살풋 드리운 저녁 시간에 맞추어 올라와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삼각대는 필수, 이쪽 방향에서라면 꽤나 멋진 서울의 야경을 찍을 수 있을지도.

 

 

 

 

 

 

 

싱겁게도 길게만 자라난 잔디 잎새들은 초록빛을 잔뜩 머금었고,

 

어느새 노랗게 바래버린 채 툭 떨궈진 잎새 하나를 품을 만큼은 속이 깊어졌나 보다.

 

 

누군가의 상처입은 사랑이 노랗게 곪은 채 저렇게 툭. 떨어지는 계절, 가을.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저런 엉성한 잔디 쿠션이나마 함께하기를.

 

 

 

@ 무악재 안산.

 

 

 

 

시화호 갈대습지는 시화호의 수질개선을 위해 만든 국내 최초의 대규모 인공습지, 이제는 제법

수질이 많이 개선되었고 생태계가 다시 안정이 되어 새들도 많이 날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새들을 구경하는 걸 좀 있어보이는 단어로 '조류탐사', '탐조'라 하던가, 우리 나라에서 새를

구경하기 좋은 곳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는 곳이라고 한다.

환경생태관은 갈대습지에 대한 자료들이 두개 층에 걸쳐 전시되어 있는 공간, 갈대습지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당장 2층 전망대부터 탐이 났다. 저길 올라가면 이 넓은 시화호 습지를 전부

바라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안개가 자욱하던 11월의 습지는 잔뜩 안개를 머금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막상 안개가 걷혔다 하더라도 고작 2층 정도의 높이로는 전부를 바라보기

힘들만큼 너른 습지였다. 가운데 잘 포장된 길을 두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습지, 그리고 그 습지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가는 갈래길들이 얼핏 보였다.

다시 생태관 1층, 시화호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돌아왔다. 농경지와 공장부지를 마련하려

방조제를 쌓고 간척사업을 하는 모습들, 그리고 호수처럼 갇혀버린 바다, 시화호가 생겨나고 이내

급격히 오염되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 '아픔'을 딛고 이제 갈대습지를 인공으로 조성하여

수질을 개선하고 생태를 복원해냈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오기까지, 참 쉽지 않았다.
 
갈대습지가 어떻게 수질을 개선하는 걸까, 그저 막연하게 갈대가 오염물질을 해독하겠거니

했는데 그림으로 된 설명을 보고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갈대사이로 물이 천천히

흐르면서 물속의 찌꺼기들이 자연스레 가라앉게 되고, 갈대 줄기나 뿌리에 오염물질이

부착된 후에는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분해한다는 거다.

그러면 생태관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도 바로 시작되는 이 드넓은 갈대밭은 결국 오염물질을

양분으로 삼아 이만큼 무성하게 자라났다는 이야기도 되는 셈이다. 인간이 토해내는 온갖

부산물과 오염물질들을 처리하느라 고생이 참 많다. 어찌보면 굉장히 비옥하고 우호적인

환경이랄 수도 있겠지만, 갈대의 입장에선 쉼없이 흘러들어오는 영양분들이 미처 소화시키기

버겁지 싶지 않을까. 돼지처럼 살만 뒤룩뒤룩 찐 갈대들이 다이어트의 권리를 호소할지도.

제일 중요한 건 아마도 유속이 느려진 물이 최대한 넓은 범위에서 갈대와 접촉하는 거 아닐까.

그게 바로 이 시화호 갈대습지의 존재의 이유,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인 셈이다. 시화호의

영어명은 어떻게 되나 했더니 의미심장하다. 'Sihwa Constructed-Reed Wetland'. 한글명칭에

비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인공'이란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게 흥미로웠다.

1층의 또다른 공간에서는 이곳 시화호 습지에서 서식하는 동식물들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라니, 너구리, 멧토끼, 족제비나 청설모 따위 동물들이 흔하게 발견된다니 아까 사진에서

봤던 불과 몇년전의 시뻘건 뻘흙이 드러난 황량한 곳이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게 자연의 복원력, 위대함 아닐까. 그밖에 쉽게 보기 힘든 여러 야생화나 곤충들도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문득 이 곳의 동물들은 소중히 보호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저 박제들이

눈에 못내 밟혔던 거다. 나 뿐만 아니라 이 곳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새삼 생명의

소중함, 자연의 소중함에 민감해지나보다. 한쪽에 있는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이 박제는 시화호 주변에 서식하는 조수로 부상 입은 상태로 신고되어 안산시에서 치료중

죽은 것을 자연생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다행이다. 애초 밀렵꾼의 총알이나 무지한 자동차 바퀴 따위가 부상을 입힌 거라면 다행이라

말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박제를 만들어 전시하겠다고 작정하고 사냥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산다는 몇몇 이름도 재미있는 야생화들, 이름만 들었었는데 저렇게

생겼구나. 제대로 생태공부 하고 가는 기분이다. '며느리밑씻개'라니, 이 풀은 시어미가

며느리를 싫어하는 마음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웅변하는 중이다.

그리고 개불알풀, 큰개불알풀. 음...민망한 이름이지만, 정작 풀의 생김은 그 민망한 이름과는

달리 꽤나 청초하달까. 암술수술이 뻗어나온 게 독특하긴 하지만, 저기서 '그것'의 '그것들'을

연상해내다니 거참 조상님네들도.

물길이 이리저리 조심조심 흐르며 습지 전체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차분한 흐름이지만

그 흐름을 따르다 보면 어느새 생태연못에 모여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그 곳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에게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습지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서 관찰할 수 있는 관찰로 곳곳에는 갈대습지가 어떻게 수질을

정화시키는지, 이 곳에 어떤 동물과 식물이 살고 있는지 등등 습지를 걷다보면 자연스레

궁금해지기 쉬운 질문들에 대한 답안을 마련해 두었다. 아이들의 교육공간으로도 꽤나

괜찮을 거 같고, 호젓한 관찰로를 산책하며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기에도 좋을 거 같고.

다만 계절은 조금 살펴서 오는 게 좋을 거 같다. 겨울의 초입에는 이렇게 습지에 가득 피었을

연꽃들이 고개를 폭폭 수그린 채 자맥질을 하고 있고, 풀과 나무들도 조금은 황량한 느낌.

그렇다고 너무 여름에 가는 것도 습지의 특성상 모기나 하루살이떼들이 극성일 거 같아

조심스럽고. 이왕 가는 거 제대로 새를 보고 싶다면 12월에서 2월경이 절정이라고 하니

망원경 하나 챙겨서 가는 게 좋을 듯.

안산수돗물의 이름은 상록수. 이 물 역시 시화호 갈대습지를 거쳐 깨끗해진 물이 돌고돌아

다시 사람들의 음용수로 변신한 거 아닐까. 뭐 바로 갈대습지를 돌아나온 물을 퍼서 음용수로

쓰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음용수 기준에 따른 몇가지 절차를 거쳐 음용수로 변신하는

걸지도 모르고. 갈대습지를 보고 바로 이런 수돗물을 보니까 더욱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뗄레야 뗄 수 없이 느껴졌다.





아직 해가 굼실굼실 지평선에서 게으름을 피우던 때,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채운 곳에

도착했다. 시화호 갈대습지. 만지면 청량하게 바스락거릴 듯한 갈빛 갈대가 눈 바로 앞에서부터

저 너머 산부리들로 끊어지는 곳까지 가득 차 있었다.

요새 날씨가 좀 춥긴 했으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갈대들을 잔뜩 품고 있는 습지의 수면이

살짝 얼어붙었다. 거친 선으로 굵게 그려진 크로키처럼 쭉쭉 뻗어나간 살얼음의 잔뼈들을 타고

햇살이 와작와작 부서지는 듯.

시화호에 방파제를 쌓아 물의 흐름을 끊어놓은 뒤부터 물이 썩어들어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던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농업용지와 공업용지를 확보한다며 바다를 막고 땅을

메우는 간척사업 명분이었다지만, 결국 사업 전에 감안했던 득실계산과 실제 드러난 득실은

꽤나 큰 차이를 보이고 만 거니까. 그래도 이렇게 갈대습지를 조성하고 오염을 정화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결국 자연 생태계를 회복시키고 새들까지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다행히도.

철새들의 시선을 피해 굳이 저런 조류관찰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곳곳에 만들어져 있는

벤치와 쉼터에 잠시 앉기만 해도 사방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 꽥꽥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물을 움키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갈대만 가득한 줄 알았더니, 그 곳을 빌어 살아가는 것들이

정말 많구나 싶도록. 새들 뿐 아니라 고라니나 멧토끼, 족제비까지 종종 발견된다니 신기하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갈빛이 빼곡해서 사람들이 걸어갈 길이나 제대로 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곳곳에 길이 숨겨져 있었다. 아예 무슨 공원처럼 널찍하게 잘 조성된

흙길도 있었고, 어느새 살얼음이 전부 풀려버린 채 찰박거리는 습지 위로 만들어진 나무길도

있었고.

갈대 습지가 정말 생각보다 꽤나 넓어서, 설렁설렁한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아본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듯. 중간중간에 쉬고 멈춰서 구경하고 할 테니 세네시간은 족히 소요될 테니 반나절

데이트 코스로도 제격이겠다.

습지 중간중간에 T자 모양으로 서 있는 나무 등걸이나 섬처럼 쌓여있는 돌무더기들은 새들이

쉬어가라고 만들어둔 것이라 한다. 갈대숲만 이렇게 울창해도 새들이 올 텐데 이런 식으로

서비스까지 확실하니, 많은 새들이 이 곳을 찾아들어 한해에만 약 15만 마리가 날아드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새를 가장 많이 관찰할 수 있는 시기는 겨울철새들이 찾아오는 12월에서

2월 사이. 망원경과 조류도감, 인내심을 갖고 오면 온갖 잡새 구경이 가능하다고.

평일이고 아직은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새들보다도 훨씬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갈대숲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을도 좋지만 눈을 흠뻑 이고 있는

겨울이라거나, 봄볕이 나른하게 내리쬐는 봄에도 좋을 거 같다. 여름에도 좋을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습지니까 모기나 날벌레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조심스럽고.

돌아나오는 길이 아쉬워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나왔다. 나중에는 좀 더 넉넉하게 시간을 보내며

쉬다 가야지, 그리고 조류도감은 아니어도 망원경 정도는 챙겨줘야겠다, 따위 다짐들을 새기면서.

그리고 갈대. 끝에 소복하니 먼지털이개처럼 달려있는 보드라운 털뭉치가 따뜻해 보인다.

바람이 일면 갈대 끝에 엉켜있는 그 털뭉치가 민들레홀씨처럼 탁 깨어져서는 퍼져나가는 거

아닐까, 위태한 맘으로 지켜보았지만 의외로 단단히 붙어서는 바람보다 앞서 바람결을 그려냈다.





구봉도에서 낙조를 보기로 했다지만 사실 구봉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나선 길이었다.

좀처럼 숨이 죽지 않아 짱짱한 햇살이 감히 바로 쳐다볼 엄두도 못 내게 하던 때, 그래서 아직은

오늘도 어제처럼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오리란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방이 훤하기만 하던 때

구봉도에 도착하고 나니 몇 마리 말들만 선한 눈을 꿈벅이며 반겨주었다.

'구봉도'는 대부도 북서쪽 끄트머리에 부리처럼 삐쭉 튀어나온 조그마한 섬의 이름이지만,

대부도가 섬과 육지 사이에 놓인 다리로 연결된 연육교인 것과 달리 아예 사이 바다를 메워

대부도의 일부가 되어 버린 섬 아닌 섬이다. 덕분에 인접한 제부도에서 하루에 몇 번 바다길이

열리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을 기다려 들고 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아무때고 원하는 대로

가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굳이 찾을 만한 이유는 역시 낙조. 안내자료에 따르면 '갯벌이

해를 삼키는 진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정말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작정하고 낙조 사진을 찍어보겠다 나선 건 처음이어서

살짝 두근대는 마음으로 적당한 포인트를 찾아 걸었다. 한걸음 한걸음, 어느 순간 내가 내딛는

걸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해가 내려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맘이 조금 급해졌다.

바다를 바라보고 선 옹송그린 어깨의 할머니처럼 보이는 저 바위는 역시 할매바위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의 좀더 크고 남성적인 실루엣을 드러낸 바위는 할아범바위,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구봉도 선돌'이라 하여 이 곳의 유명한 낙조 관람 포인트라고.

그리고 드디어 맨눈으로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그 빛과 열을 잃어버린 태양이 땅위로

내려서는 순간, 움찔움찔 지표면과 가까워진다 싶더니 하필 야트막한 능선의 산언저리에

내려가 앉는다. 산의 경사면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가면 재밌겠다.

그런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 일단 산 너머로 저물기 시작한 해는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단순히 가라앉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뭔가에 빨아들여지듯 그렇게.

꼴깍 완전히 산에 먹히기 직전에 내지르듯 뱉어낸 시뻘건 불빛, 뭔가 산 정상 부근에서

폭발한 것처럼 붉은 빛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좀 층층이 끼어 있었다면

좀더 멋진 풍경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무래도 가을 하늘인지라 구름이 불타는 듯한

그런 풍경과 마주치긴 쉽지 않을 거다.

해가 넘어갔다고 바로 세상이 어두워질 거라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늘 새롭게 깨닫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이다. 여전히 위쪽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빛을 담아

바다의 파도 결결이 붉은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연히 온도가 떨어지고 있는 듯 했다. 금세 몸이 차갑게 식었고, 바람 역시 더욱

거칠 것 없이 불어오는 통에 재빨리 철수. 그 와중에 바닷가에 박혀 있는 그물 울타리뼈대들이

바다 너머 저쪽으로 건너가는 오솔길 같단 생각에 한 두방 더 욕심을 부렸다. 마침 사진에 함께

담긴 건 집으로 돌아가는 갈매기 한 마리.

이번에는 남쪽 해안길만 걸었지만 나중에 시간 나면 구봉도의 해안 오솔길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는 것도 꽤나 괜찮을 거 같다. 요새 느닷없이 '올레길' 유행에 휘말려 여기저기에서

걷기가 광풍이라지만, 사실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천지사방에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거니까,

이름나고 유명해진 길을 한줄로 서서 순례하듯 걷는 거보다 이런 고즈넉하고 호젓한 길을

바닷바람 맞으며 파도소리 들으며 걷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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