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바퀴와 앞바퀴, 핸들과 브레이크선 등을 모두 연결한 모습. 부품에서 전체 조립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뭔가 아귀가 딱 떨어지는 느낌이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academy #plamodel #bicycle copyright 1998. 내게 친구가 말하길, "형 합법적으로 신나 불려고 저거 하는거지?"라니. 그치만 역시 니혼징의 섬세함은 못 따라가는구나..약간 국산품애용캠페인같이 스스로 세뇌를 하면서 어쨌던 끝내자고 다짐다짐.

스티커도 데칼처럼 얇고 정교하면 좋을 텐데 두께가 1미리쯤은 될 거 같은 두꺼운 비닐 소재다.

그래도 나름 추가적으로 도색도 하고, 약간의 커스터마이징도 하면서 최대한 디테일을 살려보려 노력중.

이런 자전거 받침대의 용수철도 그냥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모양이라 납작하고 부실해 보이는 게 아쉬웠던 점. 진짜 스프링은 못 쓴다고 하더라도 좀만 더 정교하면 좋은데.

그래도 페달은 따로 도색을 했더니 색감이나 텍스쳐가 그럴 듯하다.

브레이크패드 부분도 무광 은색으로 도색을 했으니 그나마 좀 나은 모습. 그렇지만 저런 주형틀 자국이 남은 것들은 좀..

대략 완성샷. 그래도 완성시켜놓으니 뿌듯한 마음은 다를 바 없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plamodel #bicycle 그야말로 악전고투. 조잡함과 정교함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실감했다..저 브레이크 라인은 계속해서 빠지고, 곳곳에서 흔들흔들 위태한 부품들의 결합상태라니.

어쨌든 그래도, 만들면서 자전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어떻게 동력이 전달되고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뜯어볼 수 있었던 기회. 재미있었다.

#프라모델 #자전거 #아카데미 #academy #plamodel #bicycle
copyright 1998. 무려 20년 전의 모델인데, 친구가 선뜻 내주어 조립을 해볼 수 있었다. 바이크와 건담 이후 또다른 아이템.

그렇게 퀄리티가 높거나 (그래서) 비싼 녀석이 아니라 그런지 부품은 세가지 색깔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래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말랑거리는 타이어 고무가 맘에 든다.

아무래도 색을 좀더 써줘야 할 것 같아 갖고 있는 타미야 스프레이로 부분부분 포인트를 주기로. 빨간색과 무광 은색, 무광 검정색 정도 얹어주면 될 거 같다.

제법 디테일은 뭉개지지 않은 편이긴 하다. 체인부분이나 기어 부분엔 별도로 도색하니 좀더 나아보이기도 하고.

안장부분도 다시 도색을 했다.

뒷좌석 역시. 그렇지만 싸구려 크롬 느낌나는 은색 부품들이 좀 거슬린다. 게다가 부품이 말끔하게 주형되지 않아 마감이 약간 안타깝기도.

빠른 속도로 프레임을 만들고 뒷바퀴와 체인부분을 완성. 빨간 색으로 페달 부분 일부를 칠한 것도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물인 듯.

그러나 이때까지는 몰랐다. 갈수록 태산, 안타깝던 퀄리티가 삐죽삐죽 문제를 만들기 시작하리란 걸.

 

 

이미 두 편의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 네 장의 초대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영화 네 편을 보거나, 데이트를 두 번 하거나.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 영화다운 '시작은 키스(원제 : delicacy)'를 보고 난 참이었고, 조금 지치고 살짝

 

실망했던 참이었다. 홍상수식의 갈림길을 빙자한 순환도로라거나 미묘하고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영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초대권 한 장은 남기고 일요일날 아트하우스 모모의 마지막 영화였던

 

'블루 발렌타인'을 보기로 했다.

 

 

맞다. 어떤 노래는 듣게 되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거다. 어떤 사람은 만나게 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런 노래가,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현자같은 소리만 주워섬기거나, 이런저런 연애의 온갖 일반론들을

 

꿰차고 있는 척 해도,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는 그런 상대. 흔히 천생연분이라거나 소울메이트라거나 운명이라거나,

 

혹은 영원과 불멸을 다짐하는 그런 상대를 만나고 나면, 방법이 없다. 그런 인연 앞에 서고 나면, 마치 여태 어느 인류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밟는 기분으로 사랑에 빠지고 마니까.

 

 

뜨거운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평소에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 따위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과의 이런 순간들이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도 모두 옛 허물과 과오와

 

부끄러움을 태워버리고 불사조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겠다 믿었을지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그녀를 잡아주는 그의 손길, 한순간의 불편한 침묵도 끼어들지 못하는 남김없는 대화. 베르나르가 소설 '개미'에서 말했던

 

더듬이를 포갠 개미들의 완전소통이란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어렴풋이 알 거 같은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택시와 버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브루클린 다리 교각 위에 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름다운 건 더없이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뿌듯하고, 거침없이 자랑스러운 그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이 뭔지 맛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그와 그녀는 감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맞다. 어른들의 경험이라봐야 누추하고 실패한 인생을 반추했을 뿐,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황홀한 건지, 한 순간 남김없이 충만함으로 가득했는지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런데.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도가니를 달구는 화력이 점점 떨어진 건,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땔감이 부족해서였을까.

 

착하고 유머러스하고 순수하던 그는 그대로 가정적인 남편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 안아주었던 그였고,

 

그의 마음은 좀처럼 변함없이 그녀를 향한다. 아마 그는 변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금은 덜 세상에 찌들도록 자신이 조금

 

더 세상에 찌들거나, 그녀가 조금은 덜 독해지도록 자신이 조금 더 독해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때의 천진한 마음과 순진함을 지켜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뿐일까. 그가 조금 변했다고, 아니면 그녀가 조금 변하지 않았다고 해결될 문제였을까. 과연 이런 당황스러운

 

피로감과 거리감은, 그와 그녀의 잘못인 걸까. 무엇이 모자라 그토록 펄펄 끓던 도가니에 냉기만 감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나 그녀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와 그녀는 만났고, 사랑했으며, 기꺼이 서로를 책임지고 동반하려

 

함께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와 그녀는 서로가 상대로부터 뻗쳐나온 냉기와 거부감으로 손끝 하나 마음대로

 

옴쭉달싹 못하게 된 상황임을 깨닫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귀처럼 싸우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듯,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균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싸우지 않으려 애써

 

웃음을 짓고 노력해보아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찾아냈던 사랑의 이유들, 유머러스하고 천진난만하고 밝고 착하고. 그런

 

장점들은 그대로 단점이 되어 증오의 이유가 된다. 대체 왜. 대체 왜일까. 어쩌면. 사랑 따위 처음부터 환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유효기간 만년짜리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작해야 반평생 버티면 성공했다 쳐주는 게 사랑일까. 애초에

 

그와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감지했던 온갖 위험 신호와 불길한 징조를 외면하고 조롱했던 벌을 받는 걸까.

 

 

우리는, 나와 당신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평행선이었던 걸까. 어쩌다 한번 사다리 타듯 옆길을 타고 완벽하게

 

합쳐졌지만 어느 순간인가 다시금 옆길로 새버리고, 처음부터 그랬듯 각자의 길을 따라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긋고 있을 뿐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는, 앞으로 절대 다시 겹치지 않을 순간들을 저주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찰나의 순간이나마 완벽하게 겹쳤던 잠깐의 순간을 기적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그런 겹침의 순간은

 

결혼 따위 인습적 구속이나 사회적 책임감 따위, 사랑이 아닌 '부부애'나 '정' 따위로 지속되진 않는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어른해진 눈길을 붙잡는 건 크레딧 가득 번쩍거리며 터져오르는 불꽃놀이 불꽃들.

 

그 불꽃들은 그와 그녀가 사랑하던, 그에게 그녀가 전부였고 그녀에게 역시 그가 전부였던 그런 시절의 풍경들을

 

하나씩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다시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있었다. 허름하고 난잡한 해수욕장의 싸구려 불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낀 적은 없었다. 왠지 그저 슬프고 안쓰럽단 느낌, 부질없단 느낌 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저 정도 불꽃을

 

피워낸 불꽃놀이 폭죽이라면, 내가 그런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웠길 바랄 뿐.

 

 

 

 

 

 

 

 

 

 

경기도 이천에 소재한 '동원리더스 아카데미', 최근 회사 내의 연수를 위해 다녀온 곳이다. 날이 좀 흐리긴 했지만

 

펜탁스의 15mm 리밋렌즈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아카데미 건물을 휘감고 있는 '명상의 숲'을 거닐기엔 그럭저럭 괜찮았다.

 

비가 오지만 않았으면 저기에 앉아 바람을 쐬며 밥먹는 게 참 좋았는데.

 

 

인공잔디이긴 하지만 잔디구장도 있어서 틈만 나면 공을 차러 나가곤 했던 운동장, 그 둘레에 새빨간 장미가 함박 피었다.

 

다른 쪽에는 흔히 족구장으로 활용되는 배구장, 그 옆엔 농구장도 있는데 아무래도 족구가 덜 힘들다.

 

 

건물 뒷켠으로는 철도길처럼 침목 받침이 규칙적으로 놓여 발걸음을 인도하는, 그런 숲길로 새는 길이 있다.

 

 

 

아직 뻣뻣해지지 않은 가지를 기울여 오솔길 쪽으로 귀를 기울인 나무 한 그루.

 

 

이렇게 트인 잔디밭 길을 따라 걷는 것만 해도 제법 거리가 짧지 않다. 이제 숲으로 진입하는 길목.

 

 

 

 

중간중간 벤치도 있고, 제법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감싸고 하늘을 걸러서 아늑한 기분이 든다. 당장 코앞에 있을

 

교육동의 여러 소음들도 여기까지는 차마 침범하지 못하는 그런 고요하고 차분한 공간.

 

 

 

6월이 넘어간 초록색은 벌써 삶의 고단함과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뭔가 심지가 들어간 질기고 그악스런

 

분위기가 없지 않지만, 5월까지만 해도 대개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햇살 쬐고 물빨아올리는 게 좋은 착한 연둣빛이다.

 

 

 

with smc PENTAX DA 15mm F4 ED AL Limited.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느 가족의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보금자리였겠지만 이젠 한무더기의 건축폐기물로 변한 돌무덤

 

위를 밟고 올라가 아현동 일대의 재개발지역을 한눈에 내려보았다.

 

 

그 와중에 돌무덤 틈새를 비집고 노란 꽃줄기 한 가닥이 꿋꿋이 피어오른 모습이란.

 

 

 

누군가 신었을 발레슈즈도 탁하고 무거운 시멘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하늘하늘, 반짝거리고 있었다.

 

 

 

B&W 모드의 사진 몇 장. 뒤에 우뚝 서 있는 삼성 아파트와 그 앞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건물들이 뚜렷한 온도차를 보인다.

 

 

화장실 창문만한 조그마한 창에 엉성하게 덧붙은 가림막.

 

붕괴 위험으로 막아놓은 길 너머엔 이십년 전에나 보았을 법한 비디오테잎이 나뒹굴고 있다. 저 안은, 1990년대인 건가.

 

낚시바늘로 성을 지은 것처럼 살벌한 담장 끝 방범창살.

 

 

빛과 그림자. 왠지 딱 그런 문구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집앞에 잔뜩 쟁여진 쓰레기들, 그리고 생활 폐품과 재활용품들.

 

 

저 집은 아무래도 사람 얼굴이다. 눈썹 붙인 게 뜯어져버린 오른쪽 눈에 너덜거리는 왼쪽 눈,

 

게다가 젓가락을 꼽고 있는 한쪽 콧구멍. 뭔가 일본식으로 즐기며 술을 마시는 중인가 싶은.

 

 

 

 

 

어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부지런히 모아서 꽁꽁 동여매 놓으셨을 폐지 묶음들. 어렸을 땐 그러고보니 저거 챙겨서

 

학교에 가져가서 무게도 달고 그랬는데.

 

애오개 고개에 자리잡은 철거촌, 그 곳에 핀 꽃들은 이쁘다기보다는 왠지 풀죽은 채, 그렇지만 가시를 세운 어린 왕자의

 

장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아마도 저 허름하고 시트조차 다 사라져버린 소파는 이 곳 어르신들의 사랑방 같은 거 아닐까.

 

 

재개발지역을 떠나 차들이 씽씽 다니는 큰길로 올라서는 계단, 시멘트 계단에 녹물이 흐르고 흘렀는지

 

붉게 염색이 되어 버렸다.

 

 

 

 

 

 

 

 

 

 

 

 

 

 

 

 

 

 

 

 

 

 

 

 

 

 

 

 

 

 

 

 

 

 

 

 

 

보문동의 골목은, 서촌이나 이태원 경리단, 혹은 부암동의 골목길과는 또 다른 풍경이 숨어있었다.

 

사람 두명도 어깨를 부딪기며 걸어야 할 듯한 좁은 골목길을 롤러코스터처럼 타고 몸을 맡긴 채 한참을 흐르다가,

 

어느 허름한 집앞에서 문득 풍경을 발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앉지도 못하고 스케치북을 잡은 채 서서 그리길 수십여분, 문득 옆엣집 낮은 담장 너머 중국어가 들리더니 삐그덕,

 

녹슨 철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아마도 중국에서 넘어오신 일가족. 왠지 그분들 중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가

 

대표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셨고, 나 역시 왠지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꾸벅하고 말았다.

 

 

 

 

영화는 어떤 기술적 진보에 대한 '아티스트'의 반감과 편견이 끝내 녹아내리고 새롭게 진보한 '그릇'에 어울리는 형태의

 

'아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리가 지워진 영화세트장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하던 그가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모두들 소리를 죽인 영화세트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그가 발굴하고 영감을 건넸던 젊은

 

여배우와 경쾌하게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구둣발을 어찌나 감각적으로 타닥탁탁 거리던지. 타닥탁탁.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구둣발이 내는 소리를 살려내면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내는데 일조한 셈이다.

 

 

어쩌면 영화는, 2011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인 이 영화는, 영화에 꼭 '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새삼스레 확인해 보고,

 

영화 속 세계에 당연하게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소리'를 어떻게 해야 인상적으로, 인습적이지 않게 재발견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리의 힘을 빌지 않고 표정과 몸짓과 최소한의 대사 텍스트로

 

스토리를 진행해 가다가 문득, 남자를 괴롭히거나 희롱하다가 결국엔 화해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릴 때마다 사운드가

 

지닌 나름의 강력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 거다. (그보다 무성영화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더욱 감탄했지만.)

 

 

영화에선 크게 두개의 갈등이 노정되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기술적 발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시선의 문제에 더해,

 

'세단 지나간다니 똥차 빼주자'는 세대간의 문제랄까. 기술 혁신과 그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이란 건, 반기는 사람에겐

 

세상이 확 바뀌고 나아지리라는 열광을, 시큰둥한 사람에겐 조잡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생겼다는 기피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사진기술이 개발되거나 영화가 발명되거나,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거나 혹은 3D기술이

 

생기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이 생기거나 따위에 대한 찬반. 그건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경계와 겹치곤 한다.

 

 

그렇지만 그건 '아티스트'에서 보여주듯, 어쩌면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웅변하듯, 그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요소'에 비기면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인 거다. 기술 발전이 어떠한 방향으로 얼마나 혁신적인 가능성을

 

확장시킬지라도, 혹은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디그레이드가 될 여지가 크다 할지라도, 그걸 활용하고

 

가능성을 구현하고 제 몸에 맞는 옷으로 적응시키는 건 결국 인간. 그런 작업에 요하는 창의성과 창조성을 감안한다면

 

일종의 예술이라 해도 무방할 테니 결국 쉼없는 기술혁신기에 처한 인간은 모두 아티스트인지 모른다. 마치 그가

 

그녀와 함께 유성영화 속에서 구둣발을 타닥탁탁 하며, 목소리 대신 새로운 사운드를 들려주듯이.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최근에 봤던 무성영화는 어느 따뜻한 나라로 떠나던 외국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찰리채플린의 클래식이었다-는 역시나 물기를 함뿍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화면의 느낌이라거나, 동작 하나

 

표정 하나 사려깊게 배치된 섬세한 세공이라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 자극적이고 번다하기 쉬운 소리의 쓰임없이도

 

보는 사람을 흡인하고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달려가게 만드는 그 힘 같은 것들에 다시금 매혹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2011년에 만들어진 새삼스러운 무성영화, '아티스트'를 찾아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를 그리는 아버지의 영화, 하드보일드 버전의 '아름다운 인생'이랄까". ytzsche.


비우티풀Biutiful. 영어로 '뷰티풀'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는 딸에게 그가 알려주는 알파벳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으며, 떳떳한 일자리나 제대로 된 가정환경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아빠지만,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거다.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아니어도, 최소한 영어 단어 하나쯤은 주저없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그의 삶은 '비우티풀'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경제 위기로 흉흉한 스페인,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의 일당을 나눠갖는 게 그의 소득이다. 갈취, 혹은 등쳐먹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경찰의 단속을 막기 위해

뇌물을 먹이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렇게 그는, 스페인과 불법체류자 양쪽으로부터 멸시받고 혐오받는 사람이지만,

그런 멸시와 혐오의 대가로 근근히 이어지는 그의 삶은 초라하고 구질구질하기만 하다. 게다가 몇개월의 시한부 선고까지.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 앞에서 잔뜩 흔들려버린 그는, 전혀 떠날 생각이 없다. 아무리 영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엄마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아내와 두 조그마한 아이들 앞에서,

훌쩍 떠나갈 수는 없었을 거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도 아이들에게 아무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고작해야

몇달치 집세와 함께 가난만 남겨놓고 떠나가게 될 거란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젊은 나이에 스페인을 떠나 외국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버지는,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늘 그리워한다. 그가 자신의 파탄나버린 결혼생활과 위기에 처한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는 거나, 먼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는 건 모두

그의 아버지에 대한 결락감과 그리움에서 비롯했는지 모른다.


포르말린에 잔뜩 절어 미이라가 되어버린 젊은 아버지의 시신, 이장을 위해 열린 무덤 속에서 드러난 아버지 미이라의

얼굴을 한참동안 매만지는 그, 마치 아버지의 영혼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 같다. 그렇다. 그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그렇지만 영화는 이때 그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삶에 응어리나 원망이 남아 떠나지 못한 영혼과의 대화만 가능한 것.


아버지 미이라와의 조우 이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구질구질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과 불안감에

떠밀린 무리수는 그를 나락으로 몰아간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는 아내와의 재결합 시도,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무리한 건설현장 일용직 투입..어느 것 하나 끝이 좋지 못했고, 그는 다시 아이 둘과 함께 하는 싱글파더로, 사고로

몰살당한 수십구의 시체 틈바구니에서 옴쭉달싹 못하고 돌아와버렸다.


그렇게 그는 한발한발, 죽음으로 다가간다. 그의 삶은 전혀 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불어 그의 아이들 역시 그가

아버지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결국 죽음이 눈앞에 닥쳤고,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진 육체를 겨우 가누며 그는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수십구의 중국인 영혼에게 고통받는다. 그건 그의

특수한 능력이 발현된 건지, 아니면 그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의 발현이나 삶의 무게 그자체의 메타포었는지도 모른다.


죽음. 죽기 전 그는 딸애에게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자신을 잊지 말 것을 약속받는다.

아이들이 따르게 된 사람에게 뒤를 부탁한다. 비록, 딸애가 언젠가 그 다이아몬드가 가짜라며 내팽개치고 그의 기억 역시

내팽개칠지 모르지만. 그리고 비록, 아이들을 부탁한 이주노동자 그녀가 돈뭉치를 들고 언제든 튈 수 있고 실제로도

한번 시도했었지만. 그정도의 흐릿하고도 갸냘픈 희망뿐이라지만, 그게 그가 죽기 전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


아마 그는 그의 아버지 미이라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던 거다. 영화의 도입 장면에서 나타났던 그보다 훨씬 젊고

민활해 보이던 청년은, 이제 그가 그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 눈앞으로 영화 마지막, 그의 죽음 이후에 다시

나타난다. 잠깐의 어색함과 긴장감 이후에 둘이 나누는 눈빛, 흘려내는 웃음소리. 비로소 그는 아버지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다. 아마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 아닐까.


어쩌면 그는 아버지를 그리던 한 생을 가장 아름답게 마감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았던 삶 역시, 그 신산함과 누추함에도 불구하고, 그 낙관하기 쉽지 않은 자잘한 희망부스러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던 거다. 비우티풀. 그가 그의 아이에게 가르쳤던 대로, 비우티풀.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는 과선배랑 모처럼 만나서 진하게 술을 마시던 날.

보궐선거라거나, 북한 핵 문제, 남북관계라거나 동아시아 정세. 북한 내 정책결정자를 개인으로

볼지 그룹으로 볼지라거나, 대북정책의 근간이 되는 북한의 자멸 여부에 대해서라거나, 한-미,

한-EU FTA에 대해서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라거나, 진보정당들이 원내외에서

어떤지라거나. 근대국가니 현실주의니 따위, 오랜만에 듣는 국제정치학의 jargon들이 우르르.


뭐, 대학다니며 늘 나누던 이야기들이었다. 근대니 탈근대니, 국제정치가 어떻고 세계 정세가

어떻고. 국내 정세가 어떻고 어떤 정치인은 어떻고, 파급 효과는 어떨 거 같고. 개별 이슈에

종횡하는 표피적인 것들이 아니라, 구조와 동학에 대해 집중하는 이야기들. 국가 차원이나

세계 차원에서 정치와 정세를 논하는, 말하자면 정말 '고담준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일 수

있지만 학문쪽으로 계속 나갔다면 굉장히 진지하고 중요했을 이야기들.


누구는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이 정부의 외교라인 씽크탱크로 들어간 교수진이 어떻고,

우리과 교수 누구는 한국의 대표선수로 외국 정계, 학계에서 인정받았고, 누구는 D.C로, 뉴욕으로

유학을 가서 아카데미아로 빠졌다거나 따위의 이야기들, 그리고 선배도 외교분야 보좌를 하다보니

공부를 더해야겠다며 유학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냥 나도 서른 즈음 되면 그렇게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무작정 생각했었다.

나름 '이데올로그'가 되겠다며 정치학이던 IR이던, 사회학이던 뭔가 잡고서 책상물림하며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국가 이외의 다른 행위자들이 등장하는

국제관계를 볼 수 있는 국제정치이론을 만들겠다느니. 그런 식의 '고담준론'을 교환하며 머릿속에

세계를 집어넣고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왠지 그런 이야기들이 내 일상과는 맞지 않게

붕붕 뜬 이야기 같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사실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열의도 그다지 많진 않은 거 같다. 못 가본 길에 대한 호기심이나

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던 공부란 건 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부였던 거다.

뭔가 대단한 논리나 통찰을 제공해서 바뀔 세상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아카데미아로 빠진

삶에서 내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올곧은 선비의 이미지보다는 왠지 낙향해 초야에 묻혀사는

폐포파립의 한량 이미지에서 더 매력을 느끼는 거 같기도 하고.








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과도 거의 아무런 유대없이 혼자 살며, 친구, 직장동료라거나 애인도 만들지 않고 '사람은 혼자 죽는다'는

신조를 갖고 다만 자신이 세운 목표만을 위해 하루하루 조용히 살고 있다. 이따금 강연을 하러 가면, 가방을 

앞에 꺼내두곤 그 가방에 불필요한 책상 위 소품들, 챙기고 책임질 자신이 없는 친구/가족/배우자,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담아서는 자크를 닫고 내다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어서 더욱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생면부지의 다른 회사 직원들에게 해고통지를 하는 역할.

그 일은 상대에 대한 집중과 배려, 세심한 말솜씨와 '밀/당'의 스킬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시

상대를 볼 필요가 없는 일회적인 일이기도 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 자살하던 말던, 그는 단지 소심한

그 회사 사장 대신 통지를 전하는 역할이었을 뿐이니 알아야 할 일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는 투다.


그는 미국 전지역을 비행기로 커버하며 온갖 마일리지와 특급회원권을 향유한다. 비즈니스석과 특급호텔의

안락하고 편안한 서비스. 그 공간에서 역시, 그는 신경써야 할 소소한 장식품이니 청소니 빨래니, 책임져야

할 강아지나 가족 따위 없는 거다. 요컨대 그의 생활은 철저하게 본인 자신에 맞춰져 있고, 책임질 수 없는 본인

능력 이외의 부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부분은 그의 생활 '밖'에 있다. 


굉장히 솔직하기도, 또 굉장히 어린애스럽기도 한 태도다. 어린애같은 태도가 아니라면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라고 이토록 명쾌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런 태도는 또 굉장히 매력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감당할 자신도 없고 벅찰 거라는 걸 알면서 꾸역꾸역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기대를 하지만, 애초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겠다는 거니까. 자신은 아직 '지상에 내려와' '청소하고 빨래하고 기념일을

챙기며' 사람들과 우격다짐하면서도 행복한 척 연기나 하는 삶은 싫다는 거니까. "쿨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영화의 최대 장점은, 그렇게 뻗대는 그를 '교화'시켜 지상으로 내려보내려 안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물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만치) 동생의 결혼 앞에 가족애를 실감키도 하고, 24시간 늘 청결하게 유지되는

화려한 특급호텔과는 판이하게 남루한 전셋집에 익숙해보려는 노력도 하지만,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거다. 아직은 up in the air, 조금은 더 자신의 방식으로 '책임지는 관계'를 최소화한 채

살겠다는 거다.


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지상'으로 내려가는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 라이언

(그리고 조지 클루니)의 순수하고 도덕주의적인 태도엔 사실 반대다. 덕분에 그 연세에도 소년같은 순수함과

섹시함을 과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그가 해고를 통보했던 사람들이 한바탕 울분을 토하고 격한

언사를 내뱉은 후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임을 생각했듯, 어쨌든 그건 자신이 준비가 되고 안되고를 떠난 문제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책임질 준비가 된 사람을 '어른'이라 한다면, 어른이 될 준비가 되어서 어른이 된

사람이 어딨나. 그냥 피할 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지, 라이언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비행기 안, 천만 마일리지를 달성한 그 자리에서조차 기장은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우린 돌아갈 곳이

필요하고 그 곳엔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할 거미줄같은 관계망이 버티고 있는 거다. I'm from here. 라는 그의

있어보이는 듯, 그렇지만 엉성한 대답이 살짝 망연하게 들렸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을 거다. 가방에 넣고 자크를

잠가버릴 필요도, 잠가버릴 수도 없는 게 다른 사람들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내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서로의

조각들이란 것. 언제까지 호텔 직원과 비행기 승무원들이 일방적으로 챙겨주는 세상에 머물 수만은 없다는 것도.


그는 조금씩 지상으로 착륙하는 중이다. 책임을 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모두 쉽지 않단 건 이미 경험했으니 조금은 더 연착륙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oscar@momo: 아카데미의 보석들]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하다

놓쳤거나,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래도 몇 개 딱히 끌리지 않는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더 레슬러". 제목만 봐도 뭔가 센스없어 보이고 무성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시놉시스를 약간 보니

대충 '은퇴한 레슬링 영웅의 눈물겨운 부활..' 그런 식의 뻔한 레퍼토리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2008/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105분/청소년관람불가

은퇴한 노년의 레슬러의 눈물겨운 재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 미키 루크의 화려한 재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며, 이미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미키 루크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쥘 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98년 장편 데뷔작 <파이>와 2000년 <레퀴엠>으로 영화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작이며, 1992년 <내 사촌 비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후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마리사 토메이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면서, 두번째 여우조연상에 도전한다.(씨네아트 상영작 정보 中)


그렇지만 시간상의 제약으로 다소 체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던 이 영화는, 의외였다.

노쇠한 영웅의 재기..라는 뻔한 주제에 따라붙기 쉬운 뻔한 묘사들, 뻔한 동기 부여들에 더해 그냥 괜찮은 영화로

남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안온한 부분들을 전부-자의던 타의던-던져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에센스로 바로 돌진하고 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느순간 자신의 지난 삶이 실은 자신의 황금기였음을 깨닫는 것 같다. 자신에게 현재 남아있는 건

소원해진 가족, 얼굴도 까먹은 친구들, 그리고 밥벌어먹고 사느라 망가져가는 몸뚱이, 그렇게 누추해진 삶일 뿐.

그러면 보통 며칠 싱숭생숭하다가 술 한잔 하고 풀기도 하고-더러는 눈물을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혹은

돌아올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있는 여행을 다녀온다거나..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현재의

자리로 고분고분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건 뭐랄까, 추운 겨울날 아침 눈을 딱 떴을 때, 그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벗어나기 싫어 더욱 안으로 

파고 들듯..그렇게 '남아있는 행복'들에 집착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레슬러는 달랐다. 그나마 그에게 안온함을 주고 남아있는 삶의 행복쪼가리들이라도 꼭꼭 지키며 남은 삶을

방어하려는 자세를 굳힌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쳐진 링으로 돌아가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는 살이 깨끗하게 발라진 뼈다귀만 애꿎게 핥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던 게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며, 사람에 대한 속깊은 사랑이나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알았고, 다른 대체물들로 대리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어나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아마도 그 점이, 가게에서 쌍욕을 하고 자해를 하며, 스테플러 철심을 몸에 박아넣고 피칠갑을 하는 그를 끝내

연민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유지 싶다.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외톨이 레슬러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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