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든 부처를 상징하는 와불상이 샛노랑 개나리색 옷을 입고 있다. 무슨 돌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녹아내린 건지 얼굴이 얼룩덜룩하다. 왠지 어렸을 적 했던 스트리트 파이터의 한 배경화면같은 느낌?

사이즈로 승부한 느낌이다. 더구나 뒤로 돌아서 본 헐벗은 등짝의 남루함, 그리고 발바닥의 꼬질꼬질함이라니.

발가락이 네갠지 여섯갠지.

무슨 탑이었는데...뭐더라...제법 높은 탑에 중턱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온통 평지만 펼쳐진

태국에서 여기보다 높은 곳이 없다는 설명을 얼핏 어디선가 봤던 거 같기도 하고. 올라가봤는데 주변의 풍광이

온통 발아래로 말갛게 펼쳐졌었다. 탑이라기보다는 무슨 얄쌍한 피라밋같은 느낌?

위에서 내려다본 탑 아래의 풍경. 깔끔하고 실감나게 꾸며진 디오라마 마을같기도 하고, 입체감이 잘 느껴지는

가옥과 대문들이 손에 잡힐 듯 했다. 저 건물은 기억컨대 부처님을 모신 불당이었을 게다.

 여행지마다, 고양이가 참 많이 따른다. 뉴욕서도, 이집트의 다합에서도, 그리고 태국의 아유타야에서도.

굳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나름 말이 되는 것 중 하나가 고양이랑 개로 나누는 거다. 고양이과의 사람,

개과의 사람. 고양이가 가진 도도함과 자존심, 손길에 연연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표정이 흔들리는 듯한

모습. 다합의 모래사장에서 내 그림자를 청해왔던 그 자그마하고 귀엽던 새끼고양이처럼, 아유타야의 한 사원에서

중천에 뜬 태양을 피해 고양이가 내게 왔다. 고양이를 품었다. 그새 '품는 법'을 조금은 더 배웠구나.

적어도, 고양이 한마리 품을 만큼 여유가 생겼으니.


글로벌 고양강아지

 저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동물을 찾으라면, 아마 고양이와 강아지의 성격을 모두 가진 가상의고양강아지를 빗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양이와 강아지가 서로 매우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고양이가 가진 야무지고 조심스러운 성정과 고유영역에 대한 소신 있는 몰입과 같은 것들은, 강아지가 갖고 있는 원만하고 적극적인 친화력과 충성심 등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두 특성을 모두 갖춘 채 적재적소에 필요한 성향을 드러내어, 최적의 맞춤형 인재로 부족함이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고양강아지의 유연한 태도와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제가 귀 기업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애정과 소속감을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부드럽고 원만한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조직 및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 산문시집 '구직험난(求職險難)' 제 1장 '글로벌 고양강아지' 일부 발췌, 이채(생몰년도 미상) 作






그래, 이런거다.

시간이 지나면, 탐욕스런 열대의 녹색식물들이 

깨어진 돌틈새, 벽돌의 홈들을 후벼파며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 뿌리는 동강난 부처의 머리를 휘감으며 인간이 만든 것들을 무화하기 시작할게다.


리셋.


그게 두려워서, 사람들은 매일매일 사다리를 걸치고 탑에 올라 눈곱처럼 끼어있는 잡풀들을 베어낸다.

공든 탑은 무너지고, 삶을 다한 건축물들은 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


뇌사상태에 빠진 고대의 사원들. 고대의 신성함.

p.s. 건설현장에서 일하시는 아빠는,

스스로 지구 표면을 조각하는 조각가로 여기신다고,

이번 여행에서 말씀하셨다.


비록 커다란 건물이 아니고, 스카이라인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지표를 변화시키고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물론, 엄마는, 아무리 그래도 '노가다'는 염증이 난다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그러고 보면, 석굴암의 나한들이나 다른 부처들의 체형은 대부분  이뿌다. 얘네들처럼. 비록 풍파에 휩쓸려 배에

할복이라도 한 양 커다랗게 칼자국이 나있고 머리가 분리된지 오래라지만, 가슴에서 배로 이어지는, 그리고 상체와

하체가 연결되는 그 매끄러운 곡선은 이상적이다. 정말. 달마조사 정도나 배불뚝이로 형상화될까, 그조차 달마의

득도과정에서 이야기되는 '추함'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하나의 팁으로 본다면, 몸에 대한 이상화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부처의 득도수행중의 금식과 고통을 형상화하는 종교적인 의미가 더욱

컸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마치 예수의 삐쩍 마른 몸띵이처럼) 글쎄..여전히 통하는 모티프 하나는,

퍼진몸=게으름..정도 아닐까. 살빼야겠다--+

삐죽거리는 탑들을 이어놓은 회랑에는, 원래 뚜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황폐해진 벽면과, 그 벽면에

기대어 선 부처상들이 열지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마치 시멘트로 군데군데 엉성하게 보수해 놓은 것같은

붉은 벽돌 구조물같은 모양새지만, 원래부터 저렇게 덮여있던 회칠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마침 뿌연 안개가 빗방울을 머금고 대지에 무겁게 포복중이어서 그랬는지도.

원래 금박이 입혀져있었던 건지, 아님 시주 대신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금박을 한조각씩 붙여넣은 건지 모르겠지만

오돌토돌한 돌기가득한 머리를 괴고 누운 부처의 뺨과 오른쪽 팔엔 드문드문 금박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몸뚱이를

가리고 있는 커튼같은 노란색 천. 나중에 들으니 저 '옷'도 신도들의 보시로 만들어진댄다.

이곳의 스님들은 모두 주홍색 옷을 입고 계신다. 그래서 아유타야 사원에 촘촘이 늘어선 부처들도 모두 주홍빛

천을 휘날리고 계시다. 아..지금 다시 간다면 훨씬 이뿐 사진들을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풍경.

가부좌를 튼 후 눈은 코끝을 내려다보듯 반개(半開)를 한다. 숨은 그칠 듯 그치지 않는 조식(調息)을 하고...운운.

고등학교 때 기수련에 관심을 가져선, 도우(道友)들과 계룡산에 올라선 밤새 비닐 거적을 뒤집어쓰고 이슬맞으며

연공(練功)을 했던 적이 있었다. 요런 비슷한 자세..였지 싶은데. 그치만 이분의 눈은 코끝이나 배꼽이 아니라 앞에

마주선 사람을 흘겨보는 느낌이다. 손에 들린 건방진 음료수는 또...언제 다 마셔버린 거냐.ㅋ

이왕 시주를 할 거면 온전한 한 컵을 주던가, 저건 누군가의 장난이 아닌가, 쓰레기를 버려놓은 건 아닐까, 혹시

내가 저걸 치워서 버려주면 부처님이 복을 내려주진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은근히 와불이 많다. 저렇게 누워 있는 부처는 이곳의 햇살과 왠지 너무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뭔가 얇고 부드러운

실크같은 막이 태양에서부터 너울지며 떨어져 내려 온몸에 감기는 느낌이랄까. 무슨 선블록오일 광고문구처럼

끈적이지 않고 순식간에 흡수되는 뽀송거림. 그리고 기분좋은 나른함까지. 내가 부처라도 눕겠다.

요건 뜬금없는 보너스샷. 비둘기고기 통조림. 태국의 길거리나 공원에 왠지 비둘기가 눈에 띄지 않는다 싶었다.

맛을 보고 싶었는데,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 않아 관뒀다. 나름 여러가지 색깔의 통에 담긴 걸로 보아 여러가지

양념맛이 가미된 듯 했지만, 사실 저렇게 담겨있는 고기는 제아무리 한우 차돌박이라 해도 안 땡길 게다.



사실 태국이 어떤 나라인지, 무슨 풍광이 유명한지도 이번에야 처음 알았다. 사실 내 세계지도는 미국, 터키,

이집트 그리고 남한 땅덩이가 전부였던 거다. 여행 갈 때마다 부딪히는 질문은, 대체 무엇을 보러 가는지. 무엇을

느끼러 가는지. 아무리 피하려 해도, 제약된 시간 내에 한 지역과 그 땅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본다는 건, 유명한

관광지 그리고 짧막한 관광영어를 벗어나기 힘들다. 

진부한 멜로드라마처럼 타고 내리는 감정선들도 사실은 그렇다. 이미 누천년 이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느꼈고,

봐왔고, 글로 풀어왔던 감정들. 이미 모든 게 읊어졌고, 말해졌다. 무수히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갔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생멸했고, 사람들은 두터운 대지의 더께위에 흙한줌을 보태며 쓰러진다.


그냥...그래도...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아무리 진부하고 범용한 감흥이라도, 내 아가미로 한번 걸러 나오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다. 그래서...어쩔 수 없이, 혹은 적당히 용서하는 기분으로 카메라 앞에서 어정쩡한 포즈를

잡아주며 증빙샷.

무슨 골프장처럼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밭 위에 곧추선 붉은 벽돌 구조물들이 단단하고 야무져 뵌다. 햇살만큼이나
그림자도 진했다.

지금까지의 1/4에서 3/4까지가 올해 찍은 사진들로만 고른 거라면, 마지막 4/4는 지금까지 곱게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채 빛을 못 보고 있던 사진들 중 그나마 인물이 소거되어 있거나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진. 사실은

조만간..아마도 조만간 내 블로그에 전부 글과 함께 올리려고 하는 사진들인데, 어느새 사진공모에 몹시 몰입한

터라 우선 몇 장 올려본달까. 6월이 좋겠다 싶은 사진들. (자꾸 머릿속에서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어쩌구 음산한

목소리가 맴돌지만, 꿋꿋이 거부하는 중..)

#1. 태국 농눅 빌리지의 프렌치 가든.

#2. 태국 농눅 빌리지의 프렌치가든2.

#3. 태국 아유타야사원의 어느 길.

#4. 방콕 인근 어딘가의 높은 사원.

#5. 그 태국 방콕 인근 높은 사원에서 내려다본 아랫풍경.

#6. 태국 농눅 빌리지 안의 어느 정원길.

#7. 태국 어딘가의 수상 시장.

#8. 태국 아유타야 근처던가..코끼리와 사이좋은 아저씨.

#9. 태국 꾸란섬 가는 길의 해변가.

#10. 태국 수상 시장위 벌려진 좌판대들.

#11. 6월엔 아마도 부처님오신날. 태국의 어느 사원.

#12. 태국 아유타야 사원의 부처상.

#13. 태국 위만멕궁전의 처마.

#14. 터키의 파묵칼레. 하얀 수반에 담긴 하늘빛 물결.

#15. 터키 파묵칼레 위로 쏟아지는 햇살.

#16. 터키 에페스의 원형극장.

#17. 터키 카파도키아, 땅에서 솟아난듯한 버섯마을.

#18. 터키 카파도키아, 러브 밸리란 이름의 유래는..?

#19. 터키 카파도키아. 뒷편의 장미빛 고운 로즈 밸리.


전란으로 목이 잘려나가 땅에 나뒹굴었을 부처의 머리가 똑바로 서있다.

나무 뿌리에 단단히 걸린다는 다소 과다한 우연의 힘과, 실수없이 끌어올려지는 수백년의 시간의 힘을 빌어.

부처상의 머리 부분에 대고 빈다기 보다는, 난 왠지 그 우연과 시간이 빚어낼 수 있는 경이로움에 질려버려 비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왠지 2000년대 한국의 건축물에서도 자주 쓰이는 붉은벽돌로 지어졌다 해도 그다지 큰 어려움없이 믿을 수 있을

법한 아유타야의 사원들. 그렇지만 약 1300년대에 건설되어 400여년 동안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로 번영했다는

그 단단한 역사적 사실을 떠올려 보면, 저 정교하고 튼실한 벽돌郡이 수백여년을 버티어 왔다는 사실이

경탄스럽다. 더구나 여기는 여름, 우기, 겨울로 계절이 구분된다는 비많고 수풀우거지는 타일랜드인 거다. 인간의

흔적 따위 한 철 비바람이면 물에 씻기고 녹색 덩굴에 씻기기 십상일 텐데.

그런데 이렇게 하늘을 향한 탑..혹은 탑파의 원형을 세밀한 부분까지 보존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자세히 보면 새들이 남기고 간 얼룩부터 시작해서 군데군데 잠식해나가는 파랗고 강인한 풀떼기가

보이지만. 한 옆에서는 서울서 가로수 정비할 때 쓰는 도구같이 생긴, 끝에 칼을 묶어놓은 장대같은

것으로 관리원들이 식물의 접착을 막고 있었다.

여행의 컨셉은 배낭여행이었다. 휴가를 못받은 동생을 빼고, 엄마랑 아빠랑 나. 여행을 좋아하는 가족인지라,

패키지는 애초 코웃음 한방, 투어는 원칙적으로 안하기로. 일정은 전적으로 내가.

방콕에서 북쪽으로 두시간, 버스를 타고 달리면서 비가 오지는 않을까, 일정을 얼마나한 밀도로 채워야 할까..

(더구나 부모님이랑) 이런저런 생각이 피워올랐지만. 여름, 우기, 겨울, 이렇게 세가지 계절을 가진 태국은 우리가

한나절 내내 걸어다녀도 그닥 덥지않을 만큼 선선한 날씨를 선물했다.

'툭툭'이라는 이름의 탈것은 오토바이를 개조한 엉성한 삼륜차지만, 나름 태국 시내에서나 근처 관광지를 돌때에는

아주 편리한 것 중 하나다. 뭐..두 명이 타기엔 저렇게 다소 힘들어보일 수는 있지만, 정작 부모님 본인들은 괜찮다

하셨다.


인력으로 움직이는 이러한 탈 것에 대해 다소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마치 제3세계 빈곤국의 아이들이 커피를

수확하는 노동에 종사한다는 사실에 대해, 가혹한 수준으로 착취받고 있다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반면 그러한

노동의 기회마저 없다면 당장 그 아이들의 생존이 백척간두에 처하고 만다는 엄연한 사실도 동시에 존재하는 거다.

어쩌면 이렇게 뚜렷한 옳고 그름의 지표를 집단적인 차원에서 내릴 수 없는 경우라면, 우선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그 긴장을 해소하려 노력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진심이 느껴지고 따뜻한 웃음으로, 조심스럽고

존중하는 태도로, 상대와 상대의 일을 존중하고 내게 그 서비스를 베품에 감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그렇게 우리가 간 곳은 코끼리 탑승장, 사람이 태워주는 것도 민망한 판에 코끼리를 타는 것도 다소 미안했다.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나로서는, 이런 식으로 사역당하거나 공연장에서 쇼를 하는 코끼리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부려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미지가 가득했던 거다.

그렇지만, "코끼리 비스켓"이란 표현이 적절했던 것 같다. 나 한명 그리고 저 아저씨..조종수랄지 운전수랄지 혹은

기수랄지..가 탔다고 해서 코끼리가 움쩍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냥 앉았다가 일어서는 동작, 사뿐하고도 부드러운

리듬을 타고서 지상 삼 미터쯤 위로 불끈 올라섰다.


코끼리의 등짝과 정수리쪽의 가죽은 물에 흠뻑 젖었다가 바싹 말라비틀어진 소가죽같았다. 거칠거칠하면서도

아무런 수분의 느낌없는 부석부석한 촉감. 그리고 완강하게 잡혀있는 깊게 패인 주름들. 동물을 만질 때 느껴지는

체온이나 따스함, 부드러움 등의 느낌은 별로 전해지지 않는 거대한 초식동물.

중간에 아저씨는 코끼리와 모종의 교감을 거쳤는지, 억센 생명력 그 자체인양 뻗어나간 풀잎들이 삼엄한 한 쪽

풀밭에 코끼리를 주차했다. 이내 강력하고도 섬세한 코를 사용해 식사를 시작한 코끼리.


부드럽고도 날렵한 코의 스냅이란. 그리고 단호하면서도 세련된 그 완력이란.

내가 탄 코끼리를 '운전'하신 분의 이름은 KLUAYMAI. 그리고 그 밑에 병기된 일어가 눈에 거슬렸었나보다.

앞뒤로 파도치듯 일렁이는 코끼리 걸음의 리듬을 타고 있었을 한 자존심강한 '한국인'이 굳이 한글로 적어넣었다.

        아이   이'. 코끼리 등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이 고스란히 글자에 남아있었다.
 '클루     마


글쎄..다소 유치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실제로 태국으로 많이 쏟아져들어가는 한국인들의 편의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처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다만 그렇게 한글로 굳이 적어넣은 행동이 영어와 일어가 병기된 데로부터

촉발해 발끈한 속좁고 치졸한 행동만은 아니기를 바랬다.

왠지 몽환적이었다. 정글 한가운데서 불쑥 튀어나온 고대의 사원들은 어느새 인공의 느낌과 자연의 느낌을 묘하게

뒤섞어 놓은, 인간의 것도 자연의 것도 아닌 느낌이었다.

자연을 굳이 '신'이라 표현한다면, 신과 인간의 경계지대에 놓여있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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