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를 가방에 담았다. 삐져나온 팔다리를 우겨넣느라 자크가 조금 터졌지만, 조금만 버티면 되니까. 근데 이 크다란

고깃덩이를 싣고 달리기엔 오토바이가 넘 작다.


어쩔 수 없이. 안 돼, 사람 불러야 돼, 그치?

금속생명체의 별에서 온 그 곳덩이가 철컹철컹 관절끼리 합을 맞추더니 두 바퀴를 펴서 임차인에게 건네졌다.

한계절 잘 타고 다니다가 창고에 박혔던 내 스트라이다 짭.


그러고 보면 내 '탈것'의 진화라고 해도 될 만한 사진이다. 검정색 삼각 스트라이다(짭)에서 검정색 줌머 스쿠터로.

다음에 탈 것은 뭐가 되려나. 이 추세라면 검정색, 뭔가 스타일있는, 바퀴는 두개..?




선뜩하고 찰져보이는 피부, 윤기를 잃어버린 머리카락, 사망 시간이 한참 지난 듯 빳빳이 경직된 팔다리,

게다가 근육들이 수축하면서 보기 흉하게 벌어진 몇 군데의 칼자국과 가슴과 배를 따라 Y자로 열었다가

두꺼운 실로 다시 꿰메진 자국까지. 섬뜩한 시체가 눈앞에 있다.

이 진짜같은 시체는 사실 '그림자 살인'에서 쓰였던 소품인데, CGV송파와 가든5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4회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중 특수효과 전시를 위해 사람들 눈앞에 나타난 것. 요모조모 꼼꼼히

뜯어보면 아쉬운 점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이전에 국립과학수사원에서 경험했던 시체의 선뜩함과

냉기를 풍기고 있었다. (음식의 미학-부검 견학의 감상.)

으윽..아무리 모형이란 거 알아도 이런 건 좀. 성글고 뒤엉킨 머리칼하며 온몸에 묻어있는 피칠갑하며.

무엇보다 이렇게 유리관 안에 핏덩이를 담아놓았다는 게 제일 자극적이다.

가운데와 오른쪽의 머리는 알겠다. 대충 목을 잘라서 성문 앞에 내걸거나 죽창 위에 꼽거나 할 때 쓰는

특수분장 소품일 거다. 근데 왼쪽의 저 포효하는 원숭이는 뭐지. 스타워즈 소품인가.;

왠지 누군가를 닮은 여성의 머리도 유리관에 담겨있다 싶었는데, 한참을 눈싸움하다 보니 누구랑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떠올랐다. 왠지 김민희 많이 닮은 듯.

그리고 말의 모형까지. 코가 금방이라도 벌름거릴 듯 리얼하긴 한데, 털이 너무 광택이 없다. 경마장의

준마들과 비교하기엔 영양상태가 안 좋은 건지 발육상태가 별로인 건지.

특수분장 전시를 해둔 곳을 나와서 둘러보다가, 3D 바닥벽화 작업을 해놓았다고 하는데 이게 왜 3D지?

바닥에 그려놓았으니 원근감이 아무래도 느껴지기야 한다만은 아무래도 요새는 아무데나 3D란 단어를

갖다 붙여놓는 게 아닌가 싶다. 슈렉이나 쿵푸팬더, 지니가 다들 넘 아저씨스럽게 나왔단 것도 불만.

'3D'바닥벽화에서 못내 아쉬웠던 마음을 단번에 털어내주던 그래피티들, 몽글몽글 귀여운 동물들이

단체 사진찍듯 우글대며 모여있었다.

좀더 전형적인 그래피티, 글자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라 하지만 어느새 글자로서의 형체나 기능은

소멸하고 추상화된 그림이 남는다. 어릴 적부터 그래피티를 꼭 한번 배워보고 싶었는데. 흑.

락카 스프레이들이 잔뜩 늘어선 채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그래피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림만큼이나

알록달록한 사람들. 원래 그래피티는 누가 보지 않는 새 보통 야밤을 틈타 후딱 작업하고 도망가는 게

묘미일 텐데, 평소 그런 거에 익숙한 이들이 사람들이 멀쩡하니 구경하는 앞에서 작업하려니 어색하진

않으려나. 스프레이로 저렇게 생생한 그림을 그리고 남겨놓는 솜씨는 역시 참 대단해 보인다.

그래피티에 열중한 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니, 생각보다 꽤나 힘든 작업이겠다는 생각이다.

벽면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그림으로 메꾸려면 무릎을 꿇고 바닥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해서 그려야

하고, 위에 그릴 때는 사다리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사다리를 조금씩 옮겨가며 다시 올라야

할 테니 꽤나 번거롭고 피곤할 거 같다.

온갖 과일이 매달려 있는 과일나무와 가지, 옥수수가 날개달고 날아다니는 벽화는 빨간 지붕과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사람들이 은근 쉼없이 서서 사진을 찍던 포스트 하나.

영상축제를 찾은 사람들이 직접 아이들과 함께 벽돌에 그림이나 글씨를 그려넣으면 그 벽돌로

작은 집을 쌓아올리는 행사도 있었다. 한 꼬맹이가 자신이 만들었던 벽돌이 어딨는지를 찾는듯

몇 분째 유심히 벽돌 한장 한장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그 옆에, 특수분장 체험관 옆으로 마저 이어지던 석고상들. 근데 인물들이 어디서 많이 보았던 듯

낯익은 면면이다. 이 둘만 해도, 모르겠다고? GOD의 멤버 중 두 명이라고 하면 바로 감이 오려나.

석고상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그녀의 이미지는 소녀였다가 '난 이제 더이상

소녀가 아니게' 되어버린. 박지윤이다.

워낙 개성있는 마스크를 가진 배우, 최민식.

이 두 사람도 뭐, 딱 보면 각이 잡히는 얼굴이다. 라디오스타의 두 스타. 안성기와 박중훈.

아무래도 여성의 경우는 조금 더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거 같다. 헤어스타일과 화장이 갖는 비중이 워낙

큰 탓인지도 모르겠고, 그녀들의 웃는 얼굴에 익숙해 있는지라 이런 눈감은 무표정한 얼굴은 어쨌든

실제로 낯설고 어색한 탓인지도 모른다. 위에는 김윤진, 밑에는 고 최진실. 최진실은 좀 많이 낯설다.

사실 이렇게 석고로 마스크를 뜨는 건 데드 마스크가 그 기원 아닌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죽은 이의

얼굴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의도로 죽은 이의 얼굴을 정제한 후 석고를 부어 만드는 게 데드 마스크인데

이렇게 영화 배우들의 얼굴을 석고로 뜨는 건 어디에 쓰려나. 마네킹을 만들거나 대역배우 가면을

만드는데 쓰는 건가.

왜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빡빡 대머리에 아무 분장도 되지 않은 그들의 얼굴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뭐, 딱히 잘생기지도 않았네. (나랑 비슷하게 생겼네), 뭐 요런 턱없는 망상이

스물스물 자라났달까. 그래놓고 거울보면 왠 오징어가 있을지도.




"그냥 국물 몇 숟갈 뜨고, 못 먹겠다고 하면서 삼계탕이나 하나 시켜먹어."


저녁 회식자리에서 개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알린 나도 나지만, 문자를 받고 득달같이 전화한 엄마도 엄마다.

그만큼 우리 집에서 '개고기'는 아무도 먹어보지 않았고 먹을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그야말로 '금기의 음식'.

뭐 딱히 개를 사랑해서라거나, 비위가 약해서는 아니다. 우리 집안에선 예전부터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 개고기를 안 먹는 이유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개고기를 먹는단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안 먹던 거니까, 왠지 찝찝하니까 정도의 부담감이랄까. (그렇지만 안 먹어 보았던 새로운 음식을 먹는 건 아주

좋아라 하니 찝찝함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도 되겠다.)

처음 와 봤으니 이것저것 맛을 봐야 한다 하여 수육이랑 탕이랑 테이블 위에 올랐다. 기름을 반들반들 머금은

고기가 나오는데, 속살은 흑염소고기처럼 결이 져서 부드럽고 껍데기쪽은 쫀득거린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

음식점 한 켠에는 '드시지 못하는 분을 위해 외부음식의 아웃소싱을 해드린다'는 안내까지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있던 룸 내의 사람들은 전부 잘만 먹더라. 딱히 먹으면서 추억할 만한 누렁이와의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먹으면서 점점 내 말소리가 개소리로 변해가는 것 같지도 않고.


집에 도착해선 다녀왔습니다, 대신 멍멍, 짖어서 인사를 갈음했다. 국물만 먹었냐고, 고기 정말 먹었냐고

그러길래 계속 멍멍, 그렇게 답하다가 한 대 맞고. 그러다가 개고기를 먹어선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나름

'치열한(이라 쓰고 저열한, 이라 읽는다)' 논리 싸움. 우리 윤씨는 대대로 개와 잉어를 피했다고 하길래,

조상이 개나 잉어에서 변신한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고 그러다가 멍멍거린다고 한 대 맞고. 뭐라더라,

개랑 잉어한테 도움을 입었다던가, 그래서 그랬다. 어차피 키우던 소랑 돼지랑 닭한테도, 그리고 키우던

깻잎이랑 상추한테도 도움을 입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집안에 도움이 된 게 어디 개와 잉어 뿐이겠냐고.


그리고 친가 쪽만 조상이냐고, 외가 쪽에서는 먹지 않냐고 했다가 외가 쪽도 안 먹는다는 말에 깨갱 한번.

뭐 대충 그렇게 일 합씩 주고 받는 상황에서 우리 집 족보가 과연 진짜일까욤, 요런 질문 던져봐야 별로

도움될 이야기는 아니어서 속으로만 하고 말았지만, 사실 그것도 그렇다. 씨족에 따라 존중하고 보살피는

동물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 씨족에 대대로 속해서 족보와 가계에 맞는 오리지널 정통 계보가 얼마나

되려나 싶다. 대부분 돌쇠, 점순이를 조상으로 갖고 있을 텐데.


할머님이 먹지 말라 했다고 당부하셨다고, 옛날 어른들 말씀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랬다. 손에 잡히지 않는

'조상'이란 단어보다는 훨씬 와닿는 할머니의 말씀이었다니 왠지 뜨끔하긴 하지만, 옛날 어른들 말씀이라고

다 삶의 지혜니 살아본 경험이니 응축된 건 아닌 거다. 막말로 사람들 영혼 빼앗긴다며 사진찍히지 말라던 것도

고작 백년안팎 이전의 옛날 어른들 말씀이다. 혹시 모르지, 현대 과학으로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겠지만 특정

성씨의 씨족에겐 개고기의 DNA와 충돌하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거나 하여 옛 어른들의 경험칙으로만 구전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젯밤은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몸을 보하는 게 아니라 허하게 만드는..;


결국 우리집에서 개고기를 먹지 말라는 이유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개고기를 먹는단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던(먹지 말라는 불문율이 내려오는) '전통' 혹은 '조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겠다. 그런 조심스러움에 더해 조상님들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거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 외경이

개고기에 대한 찝찝함을 증폭시키는 이유랄까. 맛보고 나니 사실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전혀 거리낌없이 먹을

수 있긴 했는데, 왠지 그런 부분이 걸려서 딱히 다음에도 또 먹고 싶을 만큼 땡긴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괜히

조상님들을 화내게 만들고 싶진 않아..란 생각이 깊숙이 인셉션되어 있는 거랄까. (아...이렇게 심지가 약했던 걸까...)


물론 그 밖에 개고기를 둘러싼 많은 찬반의 이야기들이 있다. 개는 인간의 친구라느니, 가장 유전적으로

유사한 생명체라느니, 혹은 반대로 우리 민족의 전통이라느니(사실 동남아니 다른 나라에서도 참 많이들

먹고 있다길래 깜짝 놀랬지만) 따위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영양학적 근거를 통해 우수한

단백질 보충원(보양식꺼리)라는 입장과 요새같이 영양분 넘치는 세상에 굳이 개고기까지 먹을 필요가 있냐는

다소 실용성에 주목한 입장(음식의 맛 차이나 그런 요소는 모조리 무시한) 등이 있는 거다. 혹은 위생적으로

전혀 깔끔한 도축 과정이나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는 지금의 실태를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라거나 아님 아예

금지하라는 입장도 있는 거고. 정답은 뭘까.


그냥, 개인적으로는 아무 생각없이 개고기를 가리키며 "개속살은 담백하니 맛있네요. 근데 개껍데기는 좀

쫀득하면서 돼지족발같애요."라고 이야기했다가 살짝 뜨아했다. 개속살, 개껍데기라...돼지속살, 돼지껍데기랑은

조금 다르게 울리던 단어들. 그리고 사실 단순히 이 문제는 개냐 돼지냐의 취사선택이라기보다는 육식이냐

아니냐의 선택이 좀더 근본적이고 깊이있는 프레임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 국과수에서 시체 부검하는 것보고

생각했던 것처럼. (음식의 미학-부검 견학의 감상.)


* 나름 개고기계에서 이름난 맛집이라 하여 첨부해 보는 정보. 먹을 사람은 먹어야지 싶어서.


라즈니쉬는 예수가 부처보다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고 평한 바 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에 대해 그다지 성찰하지

않았던 예수와 달리, 부처는 육식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을 만큼 섬세했다는 이유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다람쥐, 십자매가 죽었을 때 묻어주면서 느꼈던 그 뻣뻣함과 선뜻함이 전부였다.

군대에서 '쫌생이'라는 고양이 녀석이 '자살'했을 때도 현장을 놓쳤더랬다. 조금은 긴장되고, 조금은 흥분되는

느낌이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빈 퍼즐조각 하나를 채워넣는 기분이랄까..나이 드신, 나이 드신 채로

멈춰버린 경비 아저씨 한 분이 누워 계셨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뇌성마비 아저씨 한 분이 나오셨다.

다행스럽게도, 험하게 돌아가신 분들은 아니었지만..혹시나 모를 의심을 풀기 위해서 그분들은 험하게

다뤄져야 했다. 간단한 시각화를 시도하면, 안심살, 갈빗살, 곱창, 호두, 육포의 이미지. 그리고 시장에서

그램수로 과일을 담아 팔듯, 그렇게 호명되는 몇가지의 수치들. 브레인 천이백오십. 좌측폐 사백..



'죽어서도 억울할지 모른다'는 오래된 사고방식은,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감시와 처벌'을 통한 사회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었다. 죽으면 끝이다. 그렇지만 합법적으로 '평안한 죽음'을 살 수 있는 병원이나 기타 소견서

등을 첨부하지 못한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을 규율하기 위한 '증거'로 남는다. 갈수록 빈틈없어지는 인간들.



관례란다. 부검을 견학하고나면 내장탕을 먹어야 한댄다. 대체 어떤 새디스트가 처음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으되, 식은땀을 잠시 질척하게 흘렸던지라 반가웠다. 나는, 배가 고팠다.



언젠가 집에 아버지가 가져왔던 돼지 앞다리가 생각났다. 털이 여전히 숭숭하고, 돼지 껍데기 밑으로 투실하니

붉은 살이 늘어져 있었다. 생명을 잃고 살이 적당히 발라져서는 먹히는 거다.

동물을 먹는 것이 그다지 아름다운 일은 아니라는 라즈니쉬의 말에 공감했다. 아직 나는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무차별하게 상상할 수는 없다. 내게 비어있는 또다른 퍼즐조각 하나.




(2006.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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