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시장 위로 조금 걷다보면 나오는 보수동 책방골목. 이곳저곳에 '책방골목'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간판, 그리고

서점들의 간판들이 큰소리로 호객중이다. 어느 서점 앞에 나온 앉은뱅이 의자 두개 위에 앉은 돼지 두마리가 귀엽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자갈치시장, 족발골목, 40계단, 그리고 보수동 책방골목까지. 쉬엄쉬엄 하루 걸어다니며 볼 거리.

정말 골목이다. 큰길에서 비스듬이 꺽여들어가는 좁은 길, 가뜩이나 좁은 길을 양쪽에서 툭툭 치고나온 온갖

종류의 서적들이 더욱 좁게 보이게 만든 데다가 하늘까지 차양이 가리고 있어 더욱 좁아보인다.


어느 서점에선가 헌책을 손보고 계신 아저씨. 책의 구겨진 부분이라거나 겉면에 붙은 스티커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 듯.

골목 위로 기세좋게 쌓아올려진 오르막계단길. 가파른 계단 양쪽으로도 서점들 간판이 보인다.


헌책방을 좋아하는 건, 그 책의 종이들이 적당히 누렇게 바래가며 삭아가는 냄새가 좋아서다. 대학교에서도

중앙도서관 같은 커다란 헌책방을 가면 넘 냄새가 좋아서 똥이 마려울 지경이었다. 여긴 심수봉 1집 같은

오랜 LP판도 함께 취급하는 헌책방이었다.

앗, 그런데 이리저리 둘러보던 헌책 중에서 하나 눈에 들어온 책이 한 권 있었다. 내 방에 있는 세계문학전집 중

한권이 비는데, 마침 딱 그 책이 보이는 거다.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들어있는. 덥썩 집어들고 가격을

물으니 사천원이라던가. 늘 이가 빠진 책장이 맘에 걸렸는데 횡재라는 기분으로 냉큼 들고 나왔다.

또 뭔가 건질 게 없을까 싶어서 여기저기 살피는데 가장 많이 보이던 건, 온갖 종류의 문제집 참고서들. 그리고 뭣보다도

영어교재들. 내가 중학교때 썼던 걸로 기억하는 초록색 성문기초영문법이 보이고 막 그런다.

그리고 골목 어귀쯤에서 비탈을 타고 오르는 길, 고양이 한마리가 당당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뭔가 공공미술기획이 있었나보다. 벽면을 타고 카멜레온 한마리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글자들을 풀어넣고 있었다.

색색으로 깜찍하게 정비된 풍경 덕에 회색빛 시멘트의 차가운 느낌이 많이 희석되는 거 같다.

물론 중간에 이렇게 페인트가 온통 붉게 벗겨지고 녹물이 줄줄 타내려오는 문짝같은 게 그대로 남아있기도 했다.

저런 건 발로 한방만 뻥 걷어차도 구멍이 뻥 뚫리지 않을까, 싶도록 옴팡지게 삭아내린 철문. 이미 철문 안과 밖을

가르고 버틸만큼의 힘도 없거니와 철문 안에는 막다른 골목만 남아버린, 맹장같은 철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원색으로 화사하게 칠해진 담벼락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한아름 꽃다발같은 카멜레온을 안고 있는

흰곰 한마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책방골목 3길, 이라 씌인 푯말이 가파르게 고개를 굽혔다.


골목 위에 올라섰다가, 다시 돌아내려오는데 세상 곳곳에 왕관같은 깃털을 날리고 있는 비둘기 한마리도 만나고.


올라올 때는 미처 못 봤던, 심통 가득한 표정의 다부진 백곰 한 마리.

그리고 이녀석은 아까 보초서고 있던 고양이랑 바톤 체인지한 뉴페이스 괭이.

놓쳤던 풍경 하나. 비탈길 오르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난간 따라 이어진 줄에 조그마한 표찰들이 즐비했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살게 해주세요, 행복하면 좋겠어요, 남자친구 생겼으면 좋겠어요..저마다의 소원들이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바닥에 이름난 한국 소설들과 그 작가의 이름이 대리석으로 박혀 있었다. 이상의 날개,

염상섭의 표본실 청개구리,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읽지 않았다 해도 이름은 모두가 알만한 그런 작품들이다.

배수구 뚜껑도 특별한 보수동 책방골목. 헌책의 살짝 맵싸하고 습습한 냄새가 그득한 이곳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

딱 좋겠다 싶었고 괜찮은 까페도 요기조기 숨어있었으니 잠시 앉아 책장을 들척이기에 딱 좋을 듯.

심지어는 문닫고 있는 서점들조차 이렇게 독특한 그림들을 셔터에 그려두었고, 그 앞에 빈 책장들도 나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한 골목이다.

어느 일본서 헌책 전문점 앞에서. 마음껏 사진찍으라는 안내판을 보고 안심하고 이리저리 구경했는데 제일 눈에 들어왔던

건 역시 고무고무의 원피스 친구들. 니들은 대체 언제 해적왕이 되고 이야기를 완결할 셈이냐.

아, 내 방에 이빠진 책장.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책들이라 제법 손때도 묻고 애착이 있는 전집이었는데. 한국문학,

세계문학 전집중에서 유일하게 한 권 빠진 게 '오만과 편견'이 들어있는 6권.

이번에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발견한 책으로 메꿨다. 어랏. 근데 사이즈가 조금 작고 책 번호도 그게 아니다. 빠진 건

6번, 새로 구한 건 9번. 뒷장을 펼쳐보니 출판년도가 일년 차이가 나는 게 원인인 듯. 근데 분명히 오만과 편견은 있다는거.

뭐, 그러니 됐다.

 

부산에서 돌아보았던 곳곳들. 남포동을 중심으로 돌아봤던 곳들을 정리해본 지도.



모방범 1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2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모방범 3 - 10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문학동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엔 너무 커져버린 세계.


"너희들은 인간의 생명이 뭐라고 생각하나?"
"남의 생명이니까, 남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피스는 상냥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지인이나 친구는 죽이지 않아요. 죽으면 슬프니까요. 그렇지만 남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남들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그야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와는 관계없어요."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좋단 거야!"
"즐겁지요. 당신도 해보면 알걸요.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요."


단순히 미친 또라이의 생각일까. 남의 생명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생명일 뿐이라는 저런

식의 사고라는 건.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 너머 어딘가서부터 나와 상관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는 거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나의 사람들과 타인을 가를 경계, 그런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죽어가는 아이들, 지구 곳곳에서 쉼없이 벌어지는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사람들, 일본에서, 휴전선 너머에서, 심지어 이 나라에서도 부당하게 고통받고 괴롭힘당하며

죽거나 상처받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거다.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가 있지 않고서야 우리가 단

일초라도 웃을 수나 있을까. 우리가 주위 사람, 가까운 사람만 보듬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는지도.


평생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될 사람들의 대다수가 경계선 밖에 '남'으로 존재하고 있단 얘기다.

급작스레 커져버린 세계와 헤아릴수 없이 많아진 인간들을 대하고선, 인간 능력에 한계가 온 건

아닐까. 정말이지, 세계가 이토록 커져 버린 건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니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인류가 갑자기 흉포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커지고 많아진 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구.


"피해자를 죽이기 전에 범인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너는 죽고 싶지 않다고 애걸하지만, 지금처럼 보잘것없이 살아봤자 뭘 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기획한 이 연속살인극에 참가하면 네 이름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돼. 모든 사람이 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줄 거야. 모든 사람이 너의 죽음을 애도해줄 테고. 이거 너무 멋지다는 생각 안 들어?"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단 욕구는 '모방범'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에너지와 같은 무엇이다. 범인들이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런 인정에의 욕구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주목을 끌고 알려지고 싶다는 욕망을 내밀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거다. 범죄사건의 목격자이던

논평자이던, 소설 속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 방송에 나오려고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점점 그런 인정욕구에 목말라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점점 광활해지기만 하고

사람수는 헤아릴수 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와중에, 거대한 도시, 수많은 사람 속에서 살아남고

두드러지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모두가 인정받고 싶지만, 또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거다. 너무 커져버린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 팽개쳐진 영혼들.


범죄의 피해자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버려졌다고, 있으나 없으나 세상에 별 상관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범죄의 가해자였던 사람들 역시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진 채였다.

굳이 시니컬하게 '자존심 비대증의 실패자'라며 비하하지 않더라도, 가해자들의 삶은 공히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너무 커진 세계로부터 결정적인 상처를 받고 있었던 거다.



도시 반대편에 사는 사람에게 신, 혹은 스타가 되다.


"나는 안 잡혀. 계획은 완벽해. 황홀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스토리야. 가즈아키, 잘 들어. 이 사회는 내가 만들어내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 다음 이야기와, 최고의 클라이맥스와, 길게 여운이 남는 라스트신. 그러니까 네가 협력해줘야지. 공연자로서 말이야."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딸이나 손녀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예외없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그것은 아마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과, 우리집 딸이나 손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같은 농도, 같은 온도로 섞인 결과일 것이다...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고 또는 앞으로 될지도 모를, 피해자들과 동년배의 여자들은 심한 불안과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지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밝은 표정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라가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 하고 희생자들을 매도함으로써 안도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은 생각한다. 도시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어쩌면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타인을 발아래 둔 채 생사여탈권을 쥐고 모두를 위한 스토리를 통제하는 존재.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흥분에 들떠 추측만 해댈뿐인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보며 오락거리를

제공해주는 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경이다.


사실은 수많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정작 어디론가 묻혀버렸다. 연쇄살인 역시

도시 반대편의 사람에겐 하나의 가십에 지나지 않은 채 소비되고 만다. 마치 해외토픽처럼.

이미 그런 선정적이고 비극적인 스토리들은 계속 수위를 높여가며 제공되고 있었고, 연속선

상에서 연쇄살인사건 역시 최초의 충격을 지나서는 그저 엔터테인먼트, 남일이었을 뿐이다.


그건 합리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들이 사람을 죽여봐야, 자신의 일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친구의 일이 될 가능성이란 건. 대개의 경우 그런

사건은 내가 아닌 절대다수의 '타인'에게 벌어지는 거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크고, 사람은 너무 많다.



언제고 또 나타날 '모방범'.


'모방범' 속의 사건들은 1990년대 후반의 일들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전화기나 집전화를 이용해서 서로 연락하는 그런 시대이다.

지금은 그나마 거대한 세계에 모래알처럼 흩어진 인류가 조금은 서로를 끌어당기려 애쓰는

도구들이 많아진 시대다. 휴대폰도,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따위의 소셜 네트워킹도.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그런 도구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와

타인 사이에 세워두는 경계선이 좀더 확장되거나, 결국엔 사라질 거라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거다. 휴대폰이 생겼어도, 가상 사회가 건설되었어도, 가장 중요한 인간의

깜냥 자체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능력, 의지.


결국, 사람은 어디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혹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서로를 괴롭히고 못견뎌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 반대쪽의 살인마를

키워내는 건 이쪽에서 티비를 보며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편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소모하는 우리들 아닐까 하는 거다. 이 소설이 아무래도 우울한 비극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 거대해진 세계, 인간의 수용치를 넘어버린 세계에서 '모방범'의 도래를 피할 수 있을까.






가끔 들르곤 하는 술집, 연말이 다가오니 가게 밖으로 온통 치렁치렁 꼬마전구들을 늘어뜨렸다.

가게 전체를 작고 따스해보이는 주홍불빛으로 감싼 느낌, 안으로 들어오니 그 불빛들의 기운이

온통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다. 얼음상자 안에 즐비하게 꽂혀있는 세계맥주들이 반짝반짝.

사실 손님들이 잘 찾지 않거나 쉽게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메뉴판에만 존재하는 것도 많다.

이날따라 뭔가 안 마셔보던 게 땡겨서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뺀찌먹고, 그냥 벨기에산 '스텔라 아르토아'랑 미국산 '허니브라운'.

벨기에 맥주는 레페브라운이니 뭐니 무얼 마시던 늘 만족하게 된다. 라거류가 되었건 에일류가

되었건, 기본적으로 전부 맛있는 듯. 스텔라 아르토아 역시, 라거답게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느껴지면서도 쌉쌀하다기보다는 구수함에 가까운 그 향취가 좋다. 허니브라운은, 이름에서

느껴지듯 꿀이 들어갔는지 달콤한 맛이 강조되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텁텁하진 않은 정도.

원래 맥주는 병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잔에 따라 마셔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고 한다.

좋은 맥주는 그래서 맥주잔이 함께 제공되는 법인데, 스텔라 아르토아잔은 손잡이가 특이했다.

둥그렇게 배부른 유리잔 목부분이 슬쩍 깎여나가서는 저런 장식이 들어가서 오톨도톨, 잔을

쥐기에도 미끄럼없이 편한 거 같다.




그 높이가 무려 508미터. 버즈 칼리파(버즈 두바이)가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 높이의 빌딩으로 인증받던

타이페이101인지라 시내 곳곳에서 그 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 하구나, 왠만한 빌딩은 아무리 바싹

눈앞에 땡겨놓고 원근법의 힘을 빌린다 하여도 딱히 상대가 안 된다.

길가를 다니는 타이완 현지인들이야 쏟아져내리는 햇살을 막느라 양산을 쓰고 다니느라 다른 곳에 시야를

두진 않겠지만, 마냥 모든 게 신기해서 두리번두리번대는 여행자의 마음으로는 뭔가 계속 낯설고 새롭고

재미난 것들을 찾아내려 눈이 벌개져 있는 거다.

오토바이가 유난히도 많은 타이페이 시내, 어디서든 신호만 걸리면 마치 모래와 자갈이 분별깔대기에서

분리되듯 오토바이가 맨 앞으로 몰려나온다. 그 뒤론 커다란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고. 멀리 하얀 햇살에

투명하게 탈색되어 버린 타이페이101의 윤곽.

어디쯤이던가, 도심을 걷다가 어느 순간 불쑥 눈앞에 나타나버린 101에 깜짝 놀랬었다.

다른 건물들이 그렇게 낮지도 않다. 우리나라 서울이랑 비슷하게 적당히 오래된 저층 건물들도 많고 새롭게

올라간 높고 두꺼운 건물들도 적당히 섞여 있지만, 단연 눈에 띄는 높이와 외관이다. 죽순의 형태를 형상화했단

말을 듣기 전에도 슬쩍 예감할 수 있었다.

단수이에 가는 길이었던가, 어딘가의 고가 위를 달리는 차에서도 멀찌감치 타이페이101의 우뚝 솟은 실루엣이

보였다. 다소 도도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외로워보이기도 하고.

타이페이101의 91층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겠다며 나선 길, 조금씩 빌딩 앞으로 다가설수록 고개를 젖히는

각도가 가팔라졌다. 호오...서울의 트레이드타워나 63빌딩보다는 확실히, 월등히 높구나.

모양새도 꽤나 정묘하게 만들어진거 같다. 미끈하고 유려하게 뻗은 라인과 금빛 번쩍이는 외관을 자랑하는

63빌딩이나, 상승을 거듭하는 그래프 모양처럼 생긴 트레이드타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우선 외관 자체에

돌출된 부분이나 장식물처럼 매달린 부분들이 있어서 그런 거 같고, 왠지 손으로 만질만질하면 그 오돌토돌한

골격의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질 거 같아서 그렇기도 하고.



 
해질녘 101타워 위의 전망대에 올라서 내려다본 타이페이 시내의 야경, 야경이야 어디서든 이뿌다지만

불안정한 대기 탓에 뭉게뭉게 예술구름이 피어나는 하늘 아래 다정하게 깜빡이는 주홍불빛들은 참.

101타워에서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는 최대높이는 89층, 382미터. 거기에서 계단으로 두 층 올라가면

건물 옥상으로 나와 타이페이 시내를 조감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거다.

91층 높이, 390미터에 이르는 그 전망대는 사실 타이페이에 오기 전에는 굳이 오를 필요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평소 일하는 사무실 높이가 47층인지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둠이 내려 주홍불빛이 번지는 그 모습들에서

미감을 느끼기엔 다소 질려버리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래도 조금 갈등하다가 가보기로 결정.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가고 나서 후회하자는...결혼과도 같은 고민.


게다가 현재 세계 최고로 높다는 버즈 칼리파(버즈 두바이에서 이름이 바뀐)도 가봤으니, 그 이전까지 세계

최고 높이라던 이 타이페이101도 한번 가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싶어서.

올라서자마자 보인 건 촘촘한 안전철망 사이로 빛나던 조그마한 손톱달. 바람은 철망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윙윙 소리내며 노닐고 있었고, 해가 떨어지며 찜통더위는 급속히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아래로 보이는 야경은 89층에서 유리창 너머 보였던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을 던지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여지지 않는 날것의 풍경이란 감흥 때문인지도, 시시각각 짙게 나리는 어둠 때문인지도.

이런 높은 건물에서는 꼭 줄을 내려 등반을 하거나, 글라이더를 타고 내려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지라,

이런 식의 경고 문구 역시 꼭 있기 마련이다. 그에 더해 흡연 금지, 뜀박질 금지라는 건 자칫 불씨가 날려가서

어딘가 불을 낼까 봐, 그리고 뛰다가 자칫 바람에 날려 떨어져 버릴까 봐 경계한 것일 테다.

101타워, 총 101층으로 되어 있어 101타워라고 불린다지만 일반인에게 공개된 부분은 여기 전망대의 91층까지.

아마 나머지 10층은 전망대가 있는 옥상 위에서부터 다시 탑처럼 솟은 이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 듯 하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전망대를 한바퀴 거니는 동안 하늘은 시시각각 어두워졌고, 언제부턴가 건물의

곳곳에서는 조명이 밝혀졌다. 뭔가 동물원 우리를 연상케 하는 안전철망, 다른 점이라면 갇힌 게 이쪽이란 점.

사방을 뛰어다니며-사실은 걸어다녔지만-사진을 찍어대다 보니 마치 신경세포들 같다. 그리고 신경관들이

촘촘히 뻗어있는 그것들은 마치 101타워, 여기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뻗어나간 듯한 느낌. 여기가 그만큼

타이페이 시내 중심가에 있기 때문이겠지만, 멀찍이 둥글둥글 혈관이 뭉쳐있는 정맥류처럼 불빛들이 올망졸망

뭉쳐있는 곳들을 제하고 나면 대체로 가지런하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안전철망 따위 쉽사리 넘나드는 손톱달.

중간중간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망원경이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철망을 조금쯤 걷어내서 시야를 가리지 않는

센스를 발휘했어도 좋았을 텐데, 사방을 빙빙 두른 철망은 완고하기만 하다. 풍경을 가지런히 칼질해내어

마치 병풍처럼 세워내는 그 솜씨하며.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니 바람이 더욱 거세진 느낌이다. 어쩌면 조금씩 사위어가는 주위 풍경 속에서 용쓰지

못하는 시각 대신, 온통 바람이 건드리는 그 촉감에 쏠린 탓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어둑어둑해져 불빛을 잡아내기조차 힘들어진 즈음, 굵고 유난한 불빛, 굵은 혈관같은 불빛의 흐름만
 
남아버렸다.





상해엑스포장 내의 한국관, 멀찍이서부터 뽕뽕 구멍뚫린 듯 표기된 글자가 한국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포서 지역보다 포동 지역에 중국관을 비롯한 국가관이 모두 모여있는지라 관람객들이 훨씬 많이

바글대고 있었고, 비단 한국관만이 아니라 일본관, 중국관 모두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선 채 입장을 기다려야 했다.

최근에 중국 칭하이에서 큰 지진이 나고 또다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각 국가관에서 모두 조기를 게양해

비극을 애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관은 조기를 게양하지 않아 중국 내 반한감정을 건드리는 불씨가 되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여튼 아이티 지진이 났을 때와는 너무 달랐던 국내의 분위기는 내 생각에도

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똑같이 사람 목숨이 날아간 비극이었는데.

벽면 가득 색색의 한글이 차 있었다. 무슨 200자 원고지에 빼곡히 글자를 적어 건물 벽면에 둘둘 바른 느낌.

근데 심지어 그 글자들이 이어져 문장이 된다.

"그림을그릴때눈을반쯤감고그려야좋은그림이나온다가장좋은냄새는학교앞문방구에서방금산책받침냄새다서울서인천까지걸을만하다파송송잘끓인라면을당할음식이없다감싸고보듬으면살아난다남자들은대체로피부가맑은여자를좋아한다 서울은잠을자지않는다흐린날밤산속에서는손바닥도안보인다라면은양은냄비에끓여야한다전기통닭은무맛이다지하철에서나와방향을모를때는맞다고생각하는쪽의반대로가면된다얼짱사진각도는사십오도가아니라사십팔도라고한다 양손을가슴에얹고자면꼭가위에눌린다붐비는식당이맛있다코가닮은사람끼리친하다 계란을좀더오래삶으면껍질이저절로까진다토끼는토끼굴에여우는여우굴에서산다"

1층은 한국기업연합관과 마찬가지로 파시드, 벽면이 없이 기둥만 세워져서 트인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5월의 뜨거운 상하이 햇살을 피해 줄을 선 사람들. "닌더펑요따한민구어", 당신의 친구 대한민국.

한국관 벽면은 참, 한글을 가지고 이쁘게 만들어냈지 싶다. 평면으로 글자와 음가들을 배치하기만 한 게 아니라

툭툭 모음과 자음이 튀어나와 있다. 벽면에 빼곡히 들어차다 못해 밖으로 튕겨나오는 듯한 단어들.

한국관 관람은 커다란 대형 패널을 사용한 티비 사이를 걸으면서 시작된다. 한국의 태권도, 영화, 제품, 그리고

미술이니 전통문화 등을 소개하는 영상들, 그리고 연예인들의 축하 노래까지.

녹색 성장을 모토로 잡고 있는지라 역시 녹색 차양이 잔뜩 드리워져있고, 이것저것 뭔가 자연친화적인 냄새를

풍기도록 기획된 것 같다. 기업관에 비하자면 부지가 두배가 넘어서 그런지 공간이 아주 널찍하다.

나무의 느낌을 살린 다른 한켠의 전시공간. 시간이 많지 않아 휘 둘러보고 나오고 말았지만, 따뜻한 느낌의

백열등 조명과 은은한 나무결이 괜춘하다.

한국관 내부의 이동통로에 매달린 등의 갓. 한국어, 영어, 혹은 그림과 기하학적 무늬까지. 한 개만 있으면 꽤나

썰렁하고 어색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러 개 있으니까 제법 그럴 듯 하다.

한국관의 하이라이트,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이거다. 2012 여수 엑스포를 홍보하는 공간, "자신만의 물고기를

만들어보아요" 던가. 화면을 터치해서 물고기 종류를 고르고, 물고기 등에 업히거나 채울 수 있는 기계 종류를

고르고, 그렇게 물고기를 "만들어서" 바다로 내보내면 위쪽의 커다란 모니터에 본인이 만든 물고기가 유유히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다는 거다.


뭔가, 익숙한 그림 아닐까. 4대강에 풀어놓겠다는 그 물고기들. 수온 측정하고 오염도 측정하고 하수 방류

감시하는 그 물고기 발언에 이어지는 과학과 조직의 공명이다. 하아. 끔찍해라.

한국관 마지막 전시물은 이 나무다. 설명에 따르자면 한국과 중국을 상징하는 나무 두개가 칭칭 얽혀 올라가는

듯한 모양이라는데(마치 연리지처럼), 글쎄 잘 모르겠다. 그냥 자세히 보면 엽전을 이어붙여서 나무둥치를

만들었구나 정도, 주렁주렁 매달린 종들이 땡그랑대는 것도 그렇고 엽전으로 만든 둥치도 그렇고, 돈 좋아하는

중국인들 굉장히 즐거워하는구나 라는 인상.

그리고 정말 마지막, 요새 트렌드가 워낙 3D 티비 이런거다 보니까 부랴부랴 세팅되었다는 쌈쏭의 3D TV.

아무리 3D면 뭐하나, 콘텐츠가 별로 재미가 없어서, 게다가 안경을 쓰고 멈춰서서 여유있게 관람하기엔 동선도

전혀 배려가 되어있지 않아서 걍 나와버렸다.

크게 중국어로, 그리고 작게 한국어로, 한국관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잘 가라며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건넨다.

안에서 가장 임팩트있었던 것은 그 뭔가를 연상케 하는 불쾌한 물고기 만드는 체험프로그램, 그리고 밖에서

가장 임팩트있었던 것은 이 건물의 외관. 한글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는데 성공한 거 같다.

그리고 한 100여미터도 채 못 가면, A-10 지역. 조선관(북한관)이 기다리고 있다.

엑스포 사상 첫 참가한 'Paradise for people' 조선관(북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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