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죽어라 부숴라 하던 노래를 찔끔찔끔 듣던 시기에 친구가 내게 선물했던 앨범이 하나 있었다.(여전히 갖고 있다.)

 

한국의 헤비메탈 그룹이라는 '블랙홀'의 4집, Made in Korea.

 

(그림은 네이버에서 업어옴)

 

 

백제 말기에 창건되어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었다던 고란사의 이야기를 다룬 '고란초의 독백' 같은 서정적인 곡들은

 

바로 귀에 꽂혔고, 알고 보니 실제 5.18 광주항쟁 때 죽어간 어느 고등학생의 일기를 가사로 그대로 갖고 왔다는

 

'마지막 일기' 같은 곡들은 그런 내막을 알기 전부터 가슴을 뜨겁게 달궜었다.

 

 

공식적으로 기억되는 비극이야 '박제화된 유물'임을 자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올해 2012년의 5.18이

 

아무런 공식적인 언급이나 조명없이, 권력자가 하사하는 말의 성찬없이 지나는 것은 오히려 그만큼 생생하게

 

되살아나야 한다는, 원래의 모습에 가까워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가 하면 "815 419 516 1212 518 629 그리고,"라며 성수대교니 삼풍이니로 이어졌었던 '공생관계'의 가삿말이란.

 

숨가쁘게 이어지던 이땅 민주화의 역사, 지금 이 가사는 어디로 이어져야 할까. 되돌이표 앞에 멈춰서 어디까지

 

돌아가야 할지 멈칫거리게 되는 느낌.

 

 

 

 

마지막 일기.

 

 

사실 두려워요 내게 다가올 시간이 아직도 내겐 너무도 벅차요 .
먼저 떠난 친구들의 눈물이 생각이 나요 아직도 내가슴엔 흘러요.
이 어둠이 가기 전에 나의 짧은 시계소리 멈추고.
워~나도 잊혀 지겠지.
달빛 아래 펼쳐 있는 나의 일기장에 그린 어머니
워~ 영원히 사랑~해~요.

* 못다한 나의 숨결은 5월의 하늘위에 붉게 펴있는 눈부신 큰빛이 되어 그리운 모든 사랑을 바라볼꺼야

이 어둠이 가기 전에 나의 짧은 시계소리 멈추고.
워~ 나도 잊혀 지겠지.
달빛 아래 펼쳐 있는 나의 일기장에 그린 어머니
워~ 영원히 사랑~해~요.

* 못다한 나의 숨결은 5월의 하늘위에 붉게 펴있는 눈부신 큰빛이 되어 그리운 모든 사랑을 바라볼꺼야

 

 

 

 

* 구글에서 '518 광주 사진'이란 검색어로 찾으면 수두룩하게 나타나는 핏빛 사진들.

 

 

 

공생관계

 

 

오렌지,야타,러브호텔,압구정,로데오거리,X세대,카피,일본,노바다야끼,가라오케,
Rock Cafe,눈먼 아이들 신세대, 놓치지 않는 장사속 그리고 T.V,RADIO


수없이 쏟아지는 일회용 스타 땀흘리지 않고 쉽게 즐길수있는 듯 똑같은 모습들 생각도 귀찮은 웃음뿐

인명경시 패륜범죄 도덕이 실종된 사회상 그러나 누굴 탓해 따지고 보면 공생관계

 

나만이 잘 살아보세 우리만이 잘 살아보세

 

삼국 김유신 김춘추 소정방 당나라 그리고 김부식 조선말기 매국오적과 일제 36년 친일파
8.15,6.25,5.16,12.12,5.18,6.29 그리고 성수대교 대구,서울의 삼풍에 비극

 

아무리 큰일에도 길지않은 기억력 아무도 책임 없는 온갖 크고 작은 사고들
항상 불안한 나날들 보이지 않는 눈물들 그러나 누굴 탓해 따지고 보며는 공생관계

 

나만이 잘 살아보세 우리만이 잘 살아보세

 

쉽게 벌어 쉽게 쓰는지 놀아야만 잘난 것인지
물은 물이요 산은 산 태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어둠이 지나면 새벽오고 겨울에 들리는 봄소식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변하지 않는 진리를 믿어온 많은 침묵

 

언제나 가려진 듯 하지만 결국엔 무너지는 조선 총독부, 식민사관 낱낱이 드러나는 암울한 시대의 조각들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로 믿어온 많은 침묵


그들의 또다른 공생관계

 

 

 

고란초의 독백.

 

 

맑게 개인 날이어도 눈뜨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소리라도 듣고 싶지가 않아

눈 비 바람 몰아쳐도 나는 애써 견뎠어

모두 태워 지웠어도 나를 지울순 없어
홀로 간직한 기억 꽃이 떨어지던
홀로 지켜온 사랑 백제의 마음

고란사의 종소리도 묻혀 버리었지만
가느다란 나의 몸은 바위틈에 남았어
온몸으로 눈물짓는 나의 이름 고란초

 

 

 

 

 

 

 

 

 

"파편화된 채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ytzsche.

 

 

한국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 이런 류의 영화를 찍은 건 얼마나 될까. 황정민과 전지현의 러브라인은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 로맨스나 멜로도 아니고, 계속해서 비유가 가닿는 지점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해석하게 만드니

 

코미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화의 현실성에 기댄 채 눈물을 짜내는 '휴먼 다큐'식의 신파도 아니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도 더더욱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순간에 잡아채이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다간

 

함께 걷는 이야기랄까. 한국의 주류 영화마켓에서 이런 잔잔하고 대중적이지 않을 영화에 황정민이나 전지현같은

 

대형배우가 출현하다니. 그들의 영화 선구안과 용기(?)에 조금은 감탄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일종의 우화로 다가온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믿는 가슴따뜻한 바보들의 이야기는 많았다지만,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신파나 로맨스나 휴먼다큐의 유혹을 피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차근차근 동화속 세상으로 바꾸어나간다.

 

스스로를 슈퍼맨이라 믿는 황정민을 지천에 널린 또라이처럼 여기며 일회성 방송 소재로나 생각하던 전지현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의 친구가 되어 그와 같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처럼,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세상의 모습이,

 

상식이 낯설게 바뀌는 거다. 계속해서 번갈아 보여주는 황정민의 날고 뛰고 악당과 싸우는 머릿속 슈퍼맨 이미지와

 

옆에서 보이는 누추하고 엉성한 뜀박질과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질, 어느 순간 어떤 게 진짜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조금씩 잠식하던 슈퍼맨의 저력은 마지막에 폭발한다. 아이를 구하려 3층에서

 

날아올라 무사히 땅에 착지한 건지, 아니면 무거운 쌀포대가 추락하듯 툭, 땅에 널부러지고 만 건지 잠시동안

 

혼란에 빠지는 거다. 물론 이어지는 후일담은 그가 결국 죽었다는 빼도박도 못하는 현실을 명시하고 있다곤 해도,

 

차근차근 그의 이야기에 스며들었던 그녀처럼 나 역시 황정민이 비로소 클립토나이트로부터 해방되어 날아올랐어도

 

이상할 게 없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 그가 '자기의 별로 돌아갔다'고 한 전지현 그녀의 대사처럼,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그는 정말로 대머리악당의 저주와 같은 클립토나이트로 초능력을 잃은 슈퍼맨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끝내 80년 5월의 광주까지 가닿는 욕심많은 영화라니. 어쩌면 이 영화는 우화나 감동 드라마인 척하며 힘을

 

빼고는 있지만 굉장히 정치적인, 실천적인 영화로 읽히는 게 온당할지 모른다. 광주를 짓밟은 계엄군의 총탄이

 

슈퍼맨을 일반인,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지구인'으로 만든 클립토나이트랜다. 그를 그렇게 만든 악당은 대머리고.

 

위기의 사고 현장이나 어려운 사람 앞에서 모두가 못 본 척 외면하거나 발만 구르고 무기력하게 손놓고 있을 때

 

'슈퍼맨임을 잊지 않은', 슈퍼맨이었다는 그가 먼저 한발 앞으로 나서는 거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물결이 봉쇄된

 

80년 광주의 상흔을 갖고 기억을 봉인한 한국사회가 무기력하고 무비판적으로 남아있음을 말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 읽는다면, 그런 맥락과 떨어뜨려 놓고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몇몇 영화속 대사들은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담게 되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것들.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아예 잃어버려요. 그럼 내가 누군지 아예 까먹어버리죠. 악당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난 계속 사람들을 도우려 해요."

 

 

"(전지현이 잡고 있는 줄을 잡아당겨 그녀를 끌어당기며)가 이 줄을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거기 있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와 있어. 미래가 바뀐 거지. 남을 돕는다는 건 바로 이런 거야.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는 것."

 

 

"커다란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조그만 열쇠이다. 우리 모두 열쇠를 하나씩 갖고 있다. 다른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는."

 

 

영화가 굳이 전지현의 남자친구를 몽골로 떼밀어놓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서 황-전의 로맨스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 버리는 거나, '지구가 더워지고 북극이 녹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구인들(한국인들)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세세히 주목하는 거나, 황정민이 끝내 어릴 적 80년 광주에서의 자신에게로 돌아가 길잃은 흉탄을 막아내는 장면을

 

넣은 거나,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쯤되면 또렷해진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단순히 어느 마음이 힘들고

 

조금은 모자란 사람의 '포레스트 검프' 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고 파편화된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다시금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애초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새삼 아쉽다.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와 삼성프린터

 

광고 속 이미지로 성공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는데 끝내 실패했다고만 여겼던-특히 헐리우드 진출작인 '블러드'를

 

시사회에서 보고 나서-전지현 그녀가 이런 영화도 찍었었다니, 하고 뒤늦게 감탄하고 말았다. 2008년작인 이 영화에서

 

그녀는 제법 연기자다운 결기를 보여준 거 같다. 하나도 꾸미거나 이뻐보이려 하지 않는 맨 얼굴의 모습들, 적당히

 

시크하면서도 삐뚤어진 성격을 잘 드러낸 연기, 그리고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감정의 표현이랄까. 다만

 

목소리의 톤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다시보기'로 좋은 영화 하나 건졌다.

 

 

 

p.s. 전지현씨, 결혼 축하해요~* 앞으로 더 좋은 연기, 좋은 영화에서 많이 보여주시길.

 

(혹시 이 리뷰를 언제고 읽게 된다면 실명으로 댓글이라도 하나 남겨서 의견주시면 좋을 텐데요.ㅎㅎ)

 

 

 

 

 

맹신자들 - 4점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네줄 요약)

객관을 빙자한 '반공주의자', '극렬 개인주의자'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자유세계

(1세계) 예찬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에 더해 사회 비판의 목소리들에 '니 마음이 병들어서 그래'라고 묵살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근거와 '단상'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중 운동' 자체를 냉소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이 책이 갖고 있는 날카로움은 대체로 (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공보수세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거다.




사람들의 불만, 현실을 타파하려는 열정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구체적인 불편함과 고단함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에, 멘토를 자처한 자들의 성공담과 정서적인 위무에 녹아내리거나 혹은

앞장선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따라 피아식별 따위 없이 만만한 마녀를 사냥하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지금도 그런 모습들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맹신자들'이란 제목이 뭔가 힌트를 줄 거 같은 기대감을 던졌다.


사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그런 내 나름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이른바 '대중운동의 역동기', 맹신자들이

형성되고 사태를 압도하는 시기의 동학을 살피고 그들 내부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전제는 간명하다 못해

저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에는 맹신자들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은 주로 좌절한 채 증오와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는 대중 운동의 비전이나 내용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일반적인 양태와 동력원를 분석하려 한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일견 굉장히 야심차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어느 순간 사회를 들썩이는 무정향의 대중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원천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는 거다.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던 간에, 어느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런 움직임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며, 그건 시공간을 초월한 일종의 규칙과 단계를 따른다는 가설.

촛불집회가 되었건, 황우석 사태가 되었건, 87년 민주화항쟁이건 아니면 광주항쟁이던 간에 그 기저엔 같은 게 있단 이야기다.


문제는 여러가지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왜 새삼 '맹신자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헤친 이시대의 고전'이란 카피를 달고 나왔는지,

그리고 조선이니 동아 따위 보수언론에서 이 책을 화제의 신간으로 내세웠는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그들이 이 책을 앞세워

말하려는 맹신자들은 누구일까,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을 강조함에도 종내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득 드러내는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에릭 호퍼의 반세기전 저작이 새삼 고전으로 떠받들릴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저자가 '대중 운동'의 정의조차 없이 글을 열며 '좌절한', '광신', '맹신' 따위 모호하고 무책임한 용어를 남발하는 건 참는다 치자.

우선 개인의 병리적 심리에 대한 통찰은 제법 날카로우나 이를 사회의 동학에 그대로 이입하고 충분한 근거없이 일반적인 동력으로

단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또 하나, 저자가 살던 냉전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반공 이데올로기와 오리엔탈리즘

따위의 편향된 사고 프레임에 기반한 편견들을 근거라고 제시하고 있단 점이다. 근거박약한, 응집력없는 조각난 '단상'들일 뿐이다.


결국 그는 '대중 운동'을 암묵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자율적이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주적인 사람'은

대중 운동을 조장하고 독려하는 일부 음모가, 불평분자에 넘어가지 않으나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불안정한 사람, 소위 좌절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 운동이 촉발되고 진행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심리 문제와 트라우마, 불만족스러움이

어떤 식으로던 현실을 타파하고 조직적 가치와 지향에 스스로를 투신하려는 자기 희생 의지를 낳는다는 거다.


저자는 사회 변화 혹은 소란의 원인과 에너지원을 개인에서 찾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그들이 어떻게 양산되고 있는지, 개인의

도덕성이나 참을성 이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예외적으로 생겨난 불평분자가 아니라 특정 계층과 그룹에서 공통된

지반을 갖춘 불만과 좌절이 형성되고 있다면, 역시 구조적인 문제 혹은 모순이 있다고 봐야 한다. 저자는 그들을 그저 문제 해결의

의지나 탐색 노력은 없이 어떤 방향으로던 불만을 터뜨려 버리겠다는 마음만 가득한 '맹신자', 혹은 '광신자'라 일컫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찰 역시 견고하진 않으며, 그의 단호한 어조를 뒷받침할 사례들 역시 빈약하긴 매한가지다. 냉전기 전형적인 체제경쟁과

상호비방의 '자유진영' 논리와 어투를 그대로 가져다 쓴 소련 공산주의 비판에서는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적 한계와 이에 편승한

저자의 몰역사적 인식이 드러나고, 중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언급들은 이들 지역이 오랜 기간 역사적 저발전 단계에 있었던 것처럼

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묻어난다. 그가 드는 사례들 역시, 단편적이고 편의적인 취사선택을 거쳐 주워섬길 뿐이다.


그저 당대의 믿음과 당대의 '상식'에 기댄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아무래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세력에 대한 냉전을 새롭게 시작한 시점에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자유세계

이데올로그의 냄새가 너무 난다. 저자도 수차례 '악마'라 지칭하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그리고 '광신자'로 싸잡아 묘사되는

'대중운동가', '사회 불평분자'에 대한 혐오는 왠지 2010년대 가스통을 들고 있는 '어버이연합'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 그의 책은 니체의 관점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목적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가족과 부족과 국가와 종교와 같은 특정 조직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필연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하게 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라는 점에서 니체가 떠오르는 거다. 그러나 니체가 보통 일반인과 초인(ubermensch) 사이의 간극을 말하며

인간의 고양을 말했다면, 이 책의 구도는 굉장히 협소하고 불편하다. 지독한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버전이랄까.


아마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애초 저자의 의도와도 같이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거나 '대중 운동' 일반에 대한 해명을

위한 참고 자료로 인용되기보다는, 주로 종교적 광신자나 폭탄테러범의 내면 심리를 읽는데 제한적으로 참조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책을 지금 한국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을 짚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개독인'들이 왜 '개독인'이 되고 말았는지, 라거나 '어버이연합'이 왜 '어버이연합'이 되었는지라거나.


물론 중간에 말했던 내 의심이 유효하다면, 이 책의 얼개를 손쉽게 뒤집어 씌운다면 '멍청하고 좌절한 대중'이 몇몇 선동가의

외침에 놀아나며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느니, '4대강이 무너진다'느니, 'FTA하면 나라 망한다'느니 따위의 선전선동을

'맹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가 더욱 간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런 책을 '고전'이라 상찬하며 서점 책꽂이에

진열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행간을 의심하게 되는 거다. 이 책에 시공간을 넘어설만한 통찰과 혜안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여기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군부독재의 총칼과 맞선 광주, 전남 애국시도민들이 자유와

헌정수호의 결의로 굳게 뭉쳐 민주의 대**를 걸고 도청 탈환의 처절한 피의 항쟁을 전개한 곳이다.

더러는 찔리고 더러는 *고 무자비한 신군부의 탱크와 총칼에 희생된 채 수많은 사상자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는 시산시해의 격전장을 이루었다. **하여 도청앞 광장 그날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민주**의

투쟁현장으로서 마침내 역사를 넘어 죽음을 넘어 새로이 부활하는 한국민주주의의 제1번지

'5.18 민주광장'으로 명명되었다."

대리석 위에 새겨진 글자조차 훼손되고 마모되어서 보이지도 않는 추모탑, 그조차도 전남 구도청을

칭칭 휘감은 장벽 안 쪽에 격리된 채 잡풀만 무성해 있었다. 5.18 민주광장의 의의가 채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은 채 여전히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뒷방 어딘가로

밀려난 채 녹슬고 잊혀지고 지워지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80년 광주, 대학교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으로 본격적으로 접했던 그때의 그 사건,

그 처절했던 마지막 순간에 시민사수대가 지키던 옛 전남도청 청사. 최근 그 청사 건물이 너무 낡아

붕괴의 위험까지 있다고 하여 철거하자는 측과 보존해야 한다는 측의 의견이 맞서고 실력행사까지

있었다던가. 결국 보수,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니 다행이지만 아직 문어대가리와 물태우가

살아있는 와중에 '인권', '민주주의'같은 가치에서 '문화'로 넘어가버리는 건 좀 걱정스럽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10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 황석영 기록/풀빛

 


전남도청에서 쭉 이어지는 금남로, 5월 21일의 계엄군 발포로 54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한 걸로

추정되는 피비린내 가득한 공간. 그렇게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시민 봉기가 무장항쟁으로

전환되어 광주는 22일부터 27일까지 짧지만 의미심장한 꼬뮌의 역사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 27일 새벽,

최후의 시민군 14명이 희생되면서 도청을 빼앗기며 끝나버린 광주민주화항쟁. 그렇지만, 아무리 지금

보수공사 중이라곤 하지만, 7,8년전에 왔을 때도 그랬듯 참 남아있는 것들이 없다.

그래도 그때 왔을 때는 도청의 외벽에서 총탄의 흔적도 발견하고, 나름 비장한 의미를 가득 품고 있는

일종의 민주화 성지의 느낌이 가득했는데. 저 초현대적인 가림막이 치워지고 나서 다시 나타난 모습도

그런 아우라가 남아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컨테이너박스를 재활용해 만든 쿤스트할레 건물에

올라 바라본 도청, 근데 이거 도청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가리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 여기가 도청 건물의 정문이었다. 가림막 안쪽으로, 그 바깥의 공사현장을 구획한 높다란 장벽 너머로

보이는 하얀 색깔의 정문. 여기 어디선가 총탄 자국을 찾았던 거 같은데 아무리 망원렌즈로 땡겨서 찾아봐도

잘 모르겠다. 어디였더라...못 찾겠다. 도청 위에 내걸린 태극기만 힘없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래, 80년만

해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섰었다.

"전남도청 본관. 1930년 건립. 이 건물은 관공서 건물의 설계와 시공을 일본인들이 독차지하던 시기에

한국인 건축가 김순하가 설계와 시공 과정에 참여하여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건립

이후 70년 이상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이 된 곳이며, 1980년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산 현장으로서

전남 지역 근현대사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에 수직으로 나란히 3개의 창을 설치하고 창문

사이에는 코린트 양식을 단순화한 주두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당시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의장이다." 1930년에 건축되었는지는 몰랐다. 굉장히 오래된 근대 건축물인 셈이다. 


붉은 연꽃이 커다랗게 피어나 있는 도청 앞 분수대, 천천히 위아래로 일렁이는 꽃잎의 빛깔이 너무

선연하다. 뒤로 보이는 도청 건물이 언제 가림막을 벗고 새롭게 단장된 형태를 내보일지 모르겠지만

다시 와서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민주화의 성지로, 80년 광주의 잊지말아야 할 상흔을 그대로 후세에

전달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교육할 산 현장으로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이렇게 공사현장 곳곳에 섬처럼 격리되어 있는 조형물들, 광주의 사건과 그 정신을 기리고 있을

추모탑이니 조각이니 하는 것들을 어떻게 다시 사람들 앞에 풀어놓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다.






오랜만에 학교에 갔더니 곳곳에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미 이러저러한 공간들을 비집고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고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당장 내가 군대 포함해서

십년 가까이 먹고 마시고 자고 놀던 공간, 사회대 근처가 이렇게 변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매년 개강집회, 과 학생회장 선거, 사회대 학생회장 선거, 축제, 각종 문화제, 공연,

외부집회 나가기 전 사전집회, 단대 차원의 온갖 행사들이 치뤄졌던 사회대 아고라.

밥먹고 나서 우유팩 두개 거꾸로 접어 꼽아서는 '팩차기'를 해대던 공간이기도 하고,

사회대 도서관의 고시생들이 잠시 나와 바람을 쐬며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기도 하고.


반원형의 둥근 재떨이같이 옴폭 파인 채 학생들을 불러모았던 그 공간 한 가운데

저렇게 공사판이 벌어졌고, 센스있는 학생들이 낙서를 잔뜩 해놨다. 기억해줘.

모든 걸 여기에 묻고 간다. 우리들의 광장 아고라.ㅋㅋ '끝'이란 단어가 괜히 원망스럽다.

사회대 도서관쪽에서 바라본 아고라. 다음 '아고라'가 온갖 이슈들에 대한 토론과 청원이

벌어지는 자유로운 백가쟁명의 공간이듯, 서울대가 연희동에서 관악산 자락으로 옮겨오고

사회대가 여기 건축되고 난 이후 쭈욱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그 원래적인 의미로 일상적인

온갖 활동이 펼쳐지던 집회공간이었던 곳이다. 비록 점점 사람들이 여기 모이기 힘들어졌고

더러는 도서관에서 집회 소음이 시끄럽다며 항의하는 지경에까지 처했었지만, 이젠 아예

그 공간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속이 서늘하다.

주차장이던 공간에는 3, 4층짜리 건물이 섰다. 무려 파파이스랑 자바시티 커피점이 들어섰더라는.

뭐, 그런 게 다 들어서다니 학교가 정말 예전같지 않구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게 있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맥도널드가 처음 생겼을 때,

미제의 브랜드가 신성한 대학 상권에 진입한 걸 항의하는 집회까지 있었다던가.

'미제', 미국 제국주의에 민감했던 시대적 정황을 염두에 두면, 그리고 당시에 생각하던

'대학'이란 지금 상식처럼 통용되는 대학의 의미와 달랐음을 염두에 두면 딱히 해프닝이라

치부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대학 사회가 꼭 과거와 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같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니까 그런 프랜차이즈들이 학내까지 들어온다고 정색할 일도

아닌지 모른다. '통큰치킨'으로 상징되는 손쉬운 합리적 소비욕구가 결국 영세 자영업자들을

전부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지만, 대학이라고 뭐, 별 수 있나.

씁쓸한 맘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와중에도 커피숍 한쪽이 눈에 들어왔다. 소화전을

에워싼 그림들과 더불어 무슨 그림작품처럼 치장된 소화전의 세련된 모습. 어쩌냐.

눈은 자연스레 이쁘고 세련되고 센스부릴 여유있는 것들로 가는 게 인지상정인 건가.

어라, 내가 다닐 때는 이런 이정표는 없었던 거 같은데. 교내에 뿔뿔이 산재해 있는

민주화 투쟁 열사들 추모비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민주화의 길'. 나중에

날이 좀 풀리면 학교에 놀러와서 한번 이 경로대로 걸어봐야겠다, 추모비들을 하나하나

새겨놓아야겠다 싶다.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는 것들이다.

졸업하기 전 꼭 해보고 싶던 것 하나가 있었다. 이 위에 올라가서 술 한잔 하는 것. 흔히 전면에서

찍힌 사진에만 익숙한 이 '샤' 정문은 알고보면 ㄱ과 ㅅ과 ㄷ의 조합일 뿐이지만, 덕분에 그게

'공산당'의 약자니 뭐니 그런 이야기도 있었던 거다. 옆에서 보면 제법 두툼한 이중의 철판이

단단히 땅에 조여져 있는데, 그 사이로 계단처럼 밟고 가라며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것들이

층층이 박힌 채 꼭대기까지 인도하는 거다. 졸업하기 전에 야밤을 틈타 저길 한번 올라갔어야 했다.




허수아비춤 - 10점
조정래 지음/문학의문학

#0.

올해도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후보로 대두되었다가 끝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나'

버렸다며 언론에서 아쉬워하는 투의 기사를 많이 봤다. 한편 페루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은 페루의

광부들이 애송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꽤나 크다며, 우리도 노벨문학상을 탔으면 국내는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게 되었을 거라는 식의 기사도 있었다. 으응? 뭔가 이상하다. 노벨문학상을 타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널리 사랑받는 좋은 작품이라 노벨문학상을 타는 거 아닌가.


너무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도 여느 다른 상들처럼 세속의 일들에서 자유로운 채 그야말로

'순수한 판단'의 결과만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수상을 둘러싸고 정치적 고려나 호감도나 금전적인 로비까지도

왔다갔다 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 너무 음험한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노벨문학상을 타고 나면 실제로

꽤나 그럴듯한 후광을 덧붙이게 되는 셈이고 그건 곧바로 책의 판매부수와 직결되어 '사랑'받게 될 거다.

(어쩌면 그때쯤엔 나도 고은 시인의 '만인보'라거나 다른 시들을 비로소 찾아서 읽게 될지도.)


#1.

전세계의 작품들을 두고 그해의 가장 걸출한 작품을 선정하는 노벨문학상 이외에, 작품에 덕지덕지 붙여줄

수 있는 조금은 가볍지만 효과는 못지않은 '후광'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뭔가 소란스런 이슈를 만들어내는

노이즈 마케팅이 후광을 만들기 위한 비교적 최신 유행의 '광원'이라면, 워낙 익숙해져 버려서 새삼 이야기하기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강력한 광원은 역시 광고일 거다. 약간의 변종으로는 리뷰기사나 인터뷰기사 따위의 형태를

빙자해 책을 홍보하는 광고성 기사들이 있을 거고.


'삼성을 생각하다'라는 책이 광고시장에서 무식하게 밀쳐지면서 도리어 예기치 못한 광고없는 광고효과,

후광을 얻었던 사실 이외에는 딱히 그로부터 예외라 할 만한 사례를 들기가 어려운 거 같다. 대부분은, 광고가

많이 되고 노출이 많이 되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책들이다. 어줍잖은 고만고만한 소설들, 변주를

거듭하는 자기계발서 나부랭이들, 여행블로그보다 못하기 십상인 허술한 여행서적들..정말이지 그 책을

만들겠다며 벌목된 나무들에 미안할 지경인 책들이 범람하고 있으니 광고의 효력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2.

조정래는 어떤가. 그의 전작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어땠던가. 피식민 시기, 한국전쟁기, 산업화의 시기를

예민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소설화했던 그의 작품들은 늘 어김없이 누군가로부터 '위험물'의 딱지가 붙었고

소설의 형태를 빌어 '좌경화', 혹은 '의식화'를 꾀한다는 일부의 비난마저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딱히

광고를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시대착오적인 '금서' 목록에 올라있다더라 식의 노이즈 마케팅에 엮이기도 하면서

그 책들은 그나마도 꾸준히 팔려나갔다고 알고 있다.


허수아비춤은 어떤가, 비로소 묻는다. 조정래 정도의 작가가 꽤나 오랜만에 써낸 소설인데 너무 조용해서 하는

말이다. 그가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드디어 2010년 현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셈이니 그 의미도 심상하진

않을 테니 하는 말이다. 그의 신작 발표회에 불편한 얼굴로 왔다갔다는 찌라시 언론의 문화부 기자들이 작정한 듯

침묵을 지키거나 딴지를 걸어 그의 소설에 대해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해버리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너무

과잉반응인 걸까. 의도적인 무시 속에 그의 소설이 조용히 묻혀버리고 마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들은 점점 '지금 여기'의 '살아있는 권력'이 날뛰는 시대로 조여들어온 건 아닐까 싶다.

조금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비판할 수 있는 친일파 문제에서부터 그는 조금씩 난이도가 높은 세력,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세력들로 초점을 옮겨왔고, 그런 비판정신은 곧 한국 현대사의 핵심 모순들을 관통하며 오늘날에

와닿는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참 쉽게 읽힌다. 이미 너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인 거다. 기업을 자기 개인의

커다란 지갑처럼 생각하는 기업의 총수, 정관계에 고루 뿌려지는 떡밥 혹은 보험료의 용의주도한 전달 방법,

기업군을 가능한 세금을 물지 않고 통째로 세습하려는 철저한 사전 준비, 결국, 민주화되었다는 시대에 여전히

북조선스럽고 중세적인 '왕'을 모시는 기업을 고수하려 사회 시스템 곳곳에 돈지랄을 하는 그들의 이야기.


소설을 쓰기 참 쉬웠겠다, 고 읽던 중간에 생각했었다. 이건 뭐, 소재에서 뭔가 극적이고 흥미로울 만한 걸 더 더할

것도 없으니. 건물 깊숙히 감춰져 회장실 바닥에 깔린 커다란 금고, 골프가방과 사과박스에 차곡히 쟁여진 돈다발,

어느새 대기업 앞에서 몽창 썩어버린 검찰과 국세청 등 사정기관들, 집요한 노조파괴공작과 김일성 일가에 버금가는

부자세습의 욕망, 그저 요 몇 년간, 누구 말마따나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그 이래의 몇 년간의 사건들을 슬쩍

일별하기만 하면 그냥 그대로가 드라마틱하고 숨가쁜 소설 하나가 될 거 같은 거다.


그치만 끝장을 넘길 때쯤, 돌이켜 생각하니 조정래가 더하려 한 건, 그리고 실제로 이 소설이 쓰여지는 의미를

다하기 위해 더해져야 할 건 자극이 아니라 각성이었다. 누가 모르나. 지금 재벌들이 세상에 두려울 거 없이 나대며

전횡을 부리고 있어서 상식이 벌떡 뒤집어져 버렸다는 거. 말도 안 되고 어이도 없는 이야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뉴스에서 흘러나오며 건전하게 사는 사람들만 병신 만들고 있다는 거. 울컥울컥, 뉴스 헤드라인만 보고도 혈압이

솟을만큼의 자극은 넘쳐 나는 세상인 거다. 그래서, 혹여 왜 더 소설적으로 매만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냐고

작가를 추궁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겠다. 이미 현실속에서 그들의 전횡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고.


그의 책은, 그런 점에서 차라리 오늘의 기록이다. 책의 띠지에 둘려있듯 '경제민주화의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청사진이 요구되는 오늘의 문제적 상황을 응집해 보여주고 있다. 선정적이고 더러는 의도적인

곁가지치기와 물흐리기의 이야기들은 말고, 그들의 언론과 그들의 권력이 찌끄려대는 '광고'는 말고, 무엇을

대면하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 보여주는 있는 거 같다. 그게 현대사 100년을 숨가쁘게 달려온 그의 소설에서 

정면으로 대결했던 시대의 모순들이 켜켜이 누적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끝판왕.


#3.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처럼, 이 책도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야 할 정당한 관심과

추천사들을 받지 못한 채 적대적인 시선과 의도적인 무시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건 도리어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겨눈 칼 끝이 제대로 그들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 [삼성을 생각한다] 망각되길 거부하는 범죄자의 최후고백.



P.S. 끝판왕인 줄 알고 해치우고 나면 쓰러진 괴물의 비대한 몸뚱이 속에서 뭔가 새롭게 진화한, 더 쎈 녀석이 톡

튀어나와 다음 판으로 도망가곤 하는 게 온갖 게임들의 법칙이다. 끝판왕인 줄 알았지만 늘 속아 넘어간 채

다음 판에서의 승리를 기약하는, 마치 치토스의 '언젠간 먹고 말 거야'라는 멘트처럼, '지금 여기'의 끝판왕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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