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모리현은 일본 본주의 동북부, 겨울에 눈이 6, 7미터씩 쌓인다 할 만큼 눈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아오모리와 인근 히로사키 인근 지역을 통틀어 쯔가루 지역이라 부른다는데, 이 지역의 전승되고 있는

공예품을 구경하러 갔던 쯔가루 전승공예관을 둘러보면서 공예품이니 인형 같은 많은 소소한 것들에

그런 눈많은 지역적 특성이 여기저기서 배어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렇게 털이 북실북실한 달마인형과

귀여운 동자승 같은 코케시인형 등불이 맞이하는 전승공예관 입구.

이 지역에서 과거에 사용했던 생활용품들이 일부 전시되어 있었다. 나막신 앞부분에 털가죽을 덮어

발을 따뜻하게 보온하도록 만들어둔 게 눈에 띄었다. 저렇게 해도 발바닥이나 발가락 사이는 여전히

차갑고 아프지 않으려나 싶은데, 예전에 게다를 신고 도쿄 하코네 동네 한바퀴를 돌았을 때 발가락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나막신 말고도 경대니 식기류니 재미난 용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던 곳.

코케시관 입구. 네부타를 만들듯 철사로 이어만든 뼈대에 일본 전통종이인 화지를 이어붙여 색칠한

코케시인형 등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옆의 포스터도 그렇고 등인형도 그렇고 눈매나 표정이 참 귀엽다.

쯔가루 코케시관, 이라 적혀있는 푸른색 현수막 앞으로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나무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 비슷해 보이지만 일본 동북부 각 지역에 따라 나름의 특색과 차별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지도와 함께 몇몇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온통 일본어라 봐도 모르겠다는

치명적인 까막눈인지라.

코케시란.

코케시관에서는 쯔가루계 코케시를 비롯하여 전국 11계통 3,000점의 코케시를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애초 코케시는 일본 본주 동북지방의 독특한 어린이용 완구로서 1850년경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가,

1900년경부터는 어른들의 감상용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생각보다 역사가 오랜

공예품은 아닌 셈이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과 소박한 색채감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폭발적으로 발전, 꽃피워낸 거라고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다.

코케시 인형은 나무를 저렇게 깨끗하게 손질해서 일정 크기로 거칠게나마 다듬어놓는 것부터 제작이

시작된다고 한다. 코케시관 한쪽에서 재연되고 있던 공방 모형이나 사진들을 보면 일본어 설명을

보지 않아도 아, 이렇게 인형이 만들어지는구나 알기 쉽게 표현되어 있었다.

저렇게 나무를 다듬어서 목각 인형의 형체를 만들고, 멋지게 담배를 물고선 집중해서 붓질을 슥슥. 할아버지

손길이나 눈길에 서린 포스가 대단하다. 2D 사진으로 보는 것 뿐인데도 왠지 보고 있는 나 역시 호흡을

잠시 멈추고 붓이 삐뚤어질세라 손길이 흐트러질세라 가만히 지켜보게 되는 거다. 그야말로 장인의 풍모랄까,


눈이 많은 쓰가루의 풍토가 낳은 쯔가루 목각인형은 넓은 옷자락과 풍성한 가슴 등의 독특한 형상이

그 특징이라고 한다. 그게 각양각색의 쯔가루 목각인형이 공유하는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거기에서의

다양한 변주를 가하고 눈코입의 위치나 모양새로 확 달라진 뉘앙스를 싣는 건 온전히 장인의 몫.


코케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코케시 인형들을 하나하나 꼼꼼이 살피며 때론 장난스럽게, 때론 조금

근엄하게 표정을 그려낸 장인이 어떤 생각이었을지 짐작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이런 식으로 현대적이랄까, 마치 체스판의 폰(PAWN)을 닮은 목각인형의 형체는 그대로

두되 그걸 하얀 도화지삼아 전혀 새로운 색깔을 입히고 금박을 붙이고 천으로 만든 옷을 덧입히는

수많은 변주들도 있었다.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데 그치지 않고 자유롭다 못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새롭게 해석해낸 인형들이 신선한 느낌을 주었지만, 사실 전통 코케시 인형이 주는 소박하면서도

고졸한 멋과 운치보단 못한 거 같다.


그리고 코케시 인형들 옆에서 발견한, 왠지 낯익은 이 녀석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왔던 머리들. 몸통은 없고

커다랗고 퉁퉁한 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똑같다.

아마 그는 이 인형들에서 힌트를 얻었던 건 아닐까.

이 인형들은 달마대사의 얼굴을 목각인형에 담아낸 것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여기에 힌트를 얻어 작품 속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리는 머리인형 세개를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엄하게 눈내리는 긴긴 밤 애기들이 이 인형들 갖고 노는 방식이 딱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사방으로

툭툭 치고 다니며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여기저기 데굴거리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인형은 근엄하다못해

살짝 멍청해보이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2층짜리 건물에 빽빽하게 전시되어 있는 코케시인형과 달마인형들을 구경하고 나서 1층 기념품샵으로

내려가는 길, 계단을 내려오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천장에도 코케시인형 모양의 길다란 연이 하나

걸려있었다. 바람을 받고 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인 형태라서, 다시 보니 연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


기념품샵에서 눈에 콕콕 박히던 이쁜 코케시인형들. 생각보다 가격이 좀 센 편이어서, 사이즈로 봤을 떄

8촌짜리 인형이 거의 5000엔에 육박하고 있었으니까, 한국돈으로 따지면 거의 6-7만원 수준인 셈이다.

그래서 눈을 돌렸던 건 부채. 코케시 인형의 오묘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찡긋 웃는 듯한 눈매와 장난스런

입매가 그대로 살아있어 요모조모 눈여겨보게 된다. 게다가 그 트레이드마크같은 단발머리를 그대로 살려서

부채에 그려놓은 '코케시 스마일!'부채였다. 


그리고 쯔가루지방의 민속공예품 중의 하나인, 아이들 장난감일 수도 있겠고 빠찡코를 즐기는 어른들의

장난감일 수도 있겠고, 마치 룰렛처럼 생긴 팽이. 다양한 모양으로 숫자판 위에서 도는 팽이들이

신기해서 계속 돌려보고 사진찍고 돌려보고 사진찍고, 멈추기 전에 사진찍고.


쯔가루전승공예관 입구에 있는 야외 천연온천족탕에 앉아 따뜻한 온천물에 족욕도 즐길 수 있게 마련되어

있었다. 날씨가 너무 뜨겁지만 않으면, 그리고 일정에 여유만 있으면 잠시 양말벗고 앉아서 쉬는 것도

딱 좋겠다 싶었던 공간. 추운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면 더욱 멋질 듯.










*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겟어바웃' 필진의 일원으로 다녀왔습니다.
Get About - 당신의 여행이야기
주말이면 아키하바라의 넓은 대로는 차 대신 코스프레 걸들로 가득 찬다고 그랬었다.

가이드북에 딱 한 줄, 그렇게 나온 정보만 믿었던 게 실수였던 거다. 코스프레걸들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주말에 맞춰 당도했던 아키하바라는 전혀 예상과 다른 곳이었다.


* 알고 보니 코스프레는 하라주쿠에서 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라주쿠 역 근처 다리 옆이

본산이라던가, 아키하바라는 건물 내 실내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는 정도라고.


코스프레걸들이 제각기 빼입고 온 의상과 제스처를 선보여야 할 넓은 대로 위엔 차들이

씽씽거리고 달리고 있었고, 대로변엔 온통 게임샵들 뿐.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기를

직접 체험해보는 사람들이 있고,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흘낏흘낏

구경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게임엔 별로 관심이 없으니 그대로 전부 스킵하고 지나자니 이제 망가샵들이 나타나기 시작.

코스프레걸들을 구경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샵들을 구경하기로 맘을 정하고, 5-6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을 파는 그런 건물들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들이야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거지만, 이런 식으로

캐릭터들의 코스튬을 파는 가게들은 신기했다. 유니폼이나 응원복 같은 걸 맞추는 옷가게나

수선집 같기도 하고, 다소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빨강 파랑 원색의 의상들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그 와중에 조금 비싸고 질이 좋아 보이는 옷은 이렇게 마네킹에 입힌 채 디피되어 있었고,

에메랄드색 가발도 가발이지만 머리뒤로 깍지낀 두손의 포즈는 또 뭔가 싶고. 그래도 저런

옷은 옷걸이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인간이 입을 수 있겠다 싶은 느낌.

재질도 그렇고 모양새도 그렇고.

샵마다 조금씩 퀄리티나 분위기가 달랐는데, 내 취향은 (굳이 따지자면) 이런 쪽이랄까.

원색의 빤짝거리는 나이롱 재질의 옷들 말고, 단정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의...ㅋㅋ

굳이 치마가 잔뜩 짧을 필요도 없지 싶은 건, 역시 에반겔리온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인지도.

여전히 에반겔리온의 캐릭터들이 살아있구나 싶어서 기쁘기도 하고, 그 이후 이만한 작품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지 싶어서 아쉽기도 하고.

그러다 발견한 재미난 상품 하나. '원피스'의 캐릭터들이 제법 에로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물건의 용도는 바로 마우스 패드였던 거다. 이미 만화에서부터 풍만하게 그려졌던 그녀들의

가슴을 팔목받침으로 써서 손목의 피로도 줄이고 터널증후군도 방지하겠다는 그 갸륵하고도

참신한 발상이라니. 그 유쾌한 용도를 확인하는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슬쩍 올려보는 '공기인형' 상품. 배두나가 주연했던 영화 '공기인형'에서 첨부터

끝까지 등장했던 녀석들이 이런 실리콘 재질의 물컹이는 것들이었던 거다. 푸시시식, 하며

바람 빠지는 장면과 그 때의 배두나의 눈빛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영화.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그 밖의 건담이니 뭐니 캐릭터가 반영된 여러 성인용품들도 한쪽에서 팔고 있었고, 그것들의

모양새라거나 특징들이 어찌나 변화무쌍하던지 자꾸 눈이 가더라는.

그 밖의 여러 기기묘묘한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차마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어서 그저 두눈으로

마음으로 곱게 담아두고, 잠시 바람쐬러 건물 밖으로 나와 또다시 옆 건물로.

아마 사무실에 저런 넥타이를 하고 가면 당장 출근길에서부터 쏟아지는 눈화살에 맞아

죽어버리지 않을까. 쟤는 뭘까, 하는 의구심과 경계심을 가득 품은 눈화살들.

귀여운 물건들도 많아서, 저런 다양한 이모티콘이 그려진 컵이라거나, USB 포트에 꽂으면

쉼없이 자전거 페달을 젖는 강아지라거나, 질릴 줄 모르고 돌아보게 되는 마력이 있던 곳.

캐릭터를 활용한 음식도 한가득이었다. 이름하야 '메이드 쿠키'. 메이드 복장을 한 꼬마아가씨가

귀여운 저 포장 때문이라도 한번 더 눈이 가게 되는.

웃기면서도 다소 의미심장한, 나이키 로고를 패러디한 NEET 로고. No Job, No Guts.

Just Don't do it이란 절묘한 말장난이 일본의 심각한 청년실업과 고용불안을 시사하는 듯.

그리고, 무엇보다도 맘에 들었던 건, 심지어 저 가슴을 활용한 마우스 패드보다도 훨씬 맘에

들었던 건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캐릭터상품들. 지브리 스튜디오 샵에서도 못 봤던 것 같은

캐릭터상품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 녀석들을 하나씩 수집하는 건 어떨까, 싶다가도 저 만만치 않은 금액에 깜놀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하야오의 아이들.

그리고 마치 우리나라 모든 관광지에서 똑같은 등긁개니 곰방대니 옥돌이니 따위 파는 것처럼,

도쿄의 어느 관광지에서고 팔고 있던 녀석. 복던지는 고양이 스몰사이즈가 우르르.

건물 안에 들어가 샵들을 구경하는 데도 워낙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러저러한 캐릭터상품들도 구경하고, 일본냄새가 물씬한 아이디어상품들도 보고,

그러다가 밝은 햇살 속으로 나오면 또 드문드문 메이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이런

메이드샵 광고지도 나눠주고. 만화캐릭터의 뽀얗고 맑은 피부, 커다랗고 그렁그렁한

눈망울, 여릿한 허리와 가늘고 기다란 다리 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그녀들이

우르르 찍혀 있는 광고지를 요모조모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던 일본의 추억 중 하나.



'새삼' 블로그 소개와 미야자키 하야오 팬레터. 에서 미리 올렸었던 글, 아무런 가감도 되지 않은

그대로 책 끄트머리에 소개되었다. 여기저기에 넘겼던 글들이 약간씩 손질되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자면 정말 가장 고마운 부분이기도 하다. 사진이 전부 담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뭐. 무엇보다

저 반지 사진이 그대로 실렸다는 게 꽤나 반가웠다는.

다음 장에는 내가 도쿄의 '에도도쿄건축공원'에서 찍고 이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들이 컬러로

보기 좋게 편집되어 담겨 있었다. 전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리게 하는 배경들이다. 다시금 올 여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내 사진들과 블로그 소개글이 담긴 '예술분야' 신간은 "애니메이션 사랑을 탐하다"라는 책이다.

대학교수님이신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을 유치한 아이들용으로만 여기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우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와 상징들을 말글로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그의 애니메이션 한 편으로 이렇게 풍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잔뜩 뽑아낼

수 있다는 건 사실 나 역시 크게 공감한다. 그의 작품 하나를 리뷰하기란, 왠만한 책이나 영화를

리뷰하기보다 훨씬 어렵던 거다. 숨어있는 의미도 많고, 이리저리 읽힐 수 있는 결도 많고.


아마 애니메이션은 그 안의 공간을 세세한 소품 하나하나까지 전부 창조해 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그런 데다가 하야오가 만들어 내는 그 같은 듯 다른 세계의 정밀함과 '레알'함이 더해지니 더더욱.

이 책만 해도 작품 네 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리고

'추억은 방울방울', 이 네 편으로 책 한권이 만들어졌다. 사실 개별 작품 하나하나로도 책 한 권의

이야기는 나올 수 있는 이미지와 스토리가 꾹꾹 눌러담긴 것들일 텐데, 저자가 욕심을 버린 게다.

그리고 마지막 부록으로 담겨 있는 '이미지를 제공해준 블로그'. 거기에 내 블로그 소개글과

컬러판 사진이 담겨있다. (읽고 싶으신 분은 가까운 서점을 찾으시길..현재 '예술'분야 신간부문에서

괄목할 판매성적을 보이며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되었다던데.)

내 이미지들이 들어가 있는 1장,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다룬 챕터의 제목은 '그리움'.

저자는 하야오의 작품 네 편에서 그리움, 두려움, 입맞춤, 결혼이라는 네 가지 열쇳말을

잡아내어 강의하듯 이야기를 풀어간다. 실제로 대학교 교양수업 강의자료로 쓰일 예정인데

이런 식으로 애니메이션을 인문학적 소양을 갖고 분석하고 이야기를 이리저리 진지하게

들춰보는 책은 처음인 거 같다. 아직은 몇 페이지 들춰본 정도지만, 술술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개론서와 본격 서적 사이의 균형을 잘 잡고 있는 듯.



뭐,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쓰인다니 책이 많이 많이 팔리지 않을까 기대되지만 내게 좋은 건

딱히 없고. 다만 그 학생분들께옵서 이 미천한 블로그를 몸소 방문하시어 이리저리 구경하다

가면 좋을 텐데. 난 사진을 발로 찍는 것 같다, 라는 불만에 빠져있던 요새 굉장히 기분좋은

일이었다. 본문에 드문드문 들어가 있는 사진들에 ⓒytzsche.tistory.com 이란 문구가 전부

붙어있는 데다가 은근히 많이 쓰여서 좋았지만 굳이 아쉬운 걸 잡아내라면, 그 사진들이

칼라가 아니라 흑백이어서 조금 아쉬웠다는 정도. 내 평생의 소원 중의 하나인 내 이름이 박힌,

내가 쓴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사진들이 들어가 있고 내 글이 두 페이지에 빼곡히 실려있어

사적인 애정이 듬뿍듬뿍 담기는 책이다.





기치조지역에서 지브리 스튜디오, 산책로를 지나 미타카역으로. 미타카역 근처에 '에도도쿄건축공원'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가이드북에서 '기치조지/나카노' 지역으로 묶인 곳에 지브리 스튜디오랑 같이 묶여있어서 지레

그렇게 오해했던 거지만, 사실은 꽤나 멀다. JR 추오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데 대략 삼십분.

미타카역에서 JR 추오선을 타고 '무사시고가네이(武藏小金井)'역에 내려 버스를 잡아타야 한다.

가이드북('클로즈업 도쿄')의 설명을 그대로 따오자면,

"JR 추오선 무사시고가네이武藏小金井 역 하차. 북쪽 출구 北口의 개찰구를 나와 오른쪽으로 10m쯤 가면 육교가 있다. 육교를 건너면 바로 밑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2/3번 정류장에서 세이부西武 버스를 타고 5번째 정거장인 고가네이코엔니시구치小金井公園西口에서 내린다(170엔, 5분). 버스 진행 방향 뒤쪽의 횡단보도를 건너 고가네이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에도도쿄건축공원의 표지판이 보인다. 도보 7분"

무슨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지령을 따랐다.

무사시고가네이武藏小金井 역에서 버스정류장은 쉽게 찾았다. 버스정류장에서 하야오가 그려 공원에 선사했다는

그 애벌레 캐릭터가 굼실대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번째, 고가네이코엔니시구치小金井公園西口 역도 보였다.

글자로 써진 걸 읽으면 머릿속이 온통 굼실굼실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일단 믿고 따라나서니 생각보다 쉽다.

그렇지만 역시 멋도 모르고 그냥 찾아나서긴 쉽지 않겠다, 생각보다 여기까지 찾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후쿠오카에서도 그랬지만, 일본의 교통 체계는 참 정확하다. 몇시 몇분에 정류장에 도착할지를 저렇게

명기해 두다니. 손님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본인과의 약속이기도 하렸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 뭔가 예측가능한

스케줄을 원한다면 저런 명확한 시간표가 있음 정말 좋을 듯. 정말 일분의 오차도 없이 도착한 버스.

다섯 정거장이라 그냥 서 있었다. 하차벨에 적힌 꼬불꼬불한 히라가나를 눈을 붙잡았다. 올해 초에 그래도

일본어 공부 좀 해본다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수업도 듣고 그랬는데, 히라가나 외우려다 포기해버렸댔다.

쓰는 건 참 이쁘긴 한데, 글자에 무슨 규칙도 없고 무조건 외우고 봐야 하다니 원. 그 법칙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운 후에 일본어 문법을 따르면 될 텐데, 그 법칙 자체를 수용하질 못하겠다. 넘 자의적이란 느낌.

하기야 한국어도 마찬가지지만, 어려서 생각없을 때 일단 틀을 받아들이고 말았으니. 외국어 못 해먹겠다. 쳇.

굳이 가이드북의 설명을 한단어 한단어 유심히 살필 필요도 없었다. 다섯 번째 정류장에서 내리니 사방에서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애벌레녀석도 사방에서 슬금슬금.

가는 길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 때 여기로 자주

산책을 왔다더만, 여기까지 걸어온 걸까 싶다. 한적하고 조용한 게 산책하기 좋긴 하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부터는 넘 멀다.

고가네이코엔小金井公園은 에도시대부터 벚꽃으로 유명하던 곳이라 한다. 울창한 나무들이 뜨거운 도쿄의

햇살을 온몸으로 가려주며 시원한 바람의 냉기를 보존하고 있었다. 에도도쿄전축공원은 이 고가네이코엔의

안에 있는 또다른 공원. 공원 속의 공원인 셈이다.

에도도쿄건축공원의 입구. 입장료가 없는 고가네이코엔小金井公園 내의 테마공원인 셈이니 빈틈없이 둘러쳐진

울타리 윤곽선이 두드러졌다.

공원의 내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 배경이 모여있는 에도도쿄건축공원.

건축공원을 돌아보고 나와서 기념품 샵에서 발견한 사진들. 왼쪽의 저 사람은 하야오, 맞는 거 같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얼굴없는 요괴, 가오나시'다. 이거 그림이나 합성이 아니라 실제로 찍은 거 같은데, 대단하다.

이렇게 무슨 코스프레하듯 가오나시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면, 지브리 스튜디오나 여기 에도도교건축공원이나

모두 무료통과는 물론이고 꽤나 환대받지 않았을까. 일본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온몸에 받았을지도. 나도 담엔.

하야오가 선사한 에도도쿄건축공원의 마스코트인 애벌레 녀석도 기념품 인형으로 이렇게 팔고 있었고,

그 밖에, 이런 귀여운 고양이 인형들도 왜인지 팔고 있었다. 건축공원하고는 그다지 상관없는 듯 한데.

캐릭터를 이렇게 치밀하게 이용하는 그 아이디어가 넘 좋은 거다. 모처럼 하야오가 만들어준 캐릭터를 그냥

썩히는 게 아니라, 기념품샵 봉투에도 넣고, 그 봉투를 봉하는 테이프에도 넣고. 감탄해 버렸다.

에도도쿄건축공원을 나서는데, 눈앞의 잔디밭이 온통 꺼뭇꺼뭇하다. 뭔가 했더니 모두 까마귀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왔던 마녀도 아침이 되면 까마귀로 변신해 성을 떠나고는 했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한번 왔던 길을 다시 가는 건 참 쉽다. 대충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어디서 길을

건너거나 방향을 꺽어야 할지도 대략의 감이 오는 거다. 그러면 주변이 보인다. 눈앞을 새하얗게 만드는 햇살에

뽀송뽀송 말라가는 사이좋은 빨래들 같은 것도.

버스 정류장.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오는 길이 제법 솔찮이 시간도 걸리고, 교통비도 적잖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지만, 도쿄까지 왔는데 교통비 몇 푼 아낀다고 여길 스킵하는 건 좀 아닌 듯. 게다가 여기저기 인증샷만

남기고 떠나는 여행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세상을 동경한다면.

에도도쿄건축공원의 맵. 서쪽존까지도 돌아볼 걸, 하는 생각이 없진 않지만 동쪽 존만으로도 넘 많은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야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느낌을 가득 받아 올 수 있었던 공원.

가이드북 말고 공원 팜플렛에서 발견한 또다른 루트. 참고하면 좋을 거 같다.






일본 애니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작할 당시 산책하러 즐겨 찾던 에도도쿄건축공원.

도쿄 시내에서 옮겨온 27채의 20세기 전후반 건물들이 대충 동쪽 구역과 서쪽 구역으로 나뉘어 산재해 있는데,

대충 동쪽 구역은 서민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보이는 건물들이 모여 있다. 역시나,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에 주로

차용한 배경들도 동쪽 구역의 건물들.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한 식당, 센의 숙소와 일터인 목욕탕, 그리고

가마지이가 목욕탕 약초물을 달이던 방, 센이 바다를 건널 때 탔던 열차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라 하야오가 산책삼아 왔다갔다 할 수 있었다곤 하지만, 사실 부실하게

소개된 가이드북만 따라 오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여정이었던 것도 사실. 관리동에서 입장권을 끊으면서 여기까지

오로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되었던 건물들을 직접 보겠다며 꾸역꾸역 찾아온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입장료는 400엔.

에도도쿄건축공원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이 애벌레는 다름아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한다. 참 복받은 공원이다. 에도도쿄건축공원에 찾아올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이 미타카역에서부터 이 캐릭터가

그려진 버스 정류장을 찾아 캐릭터가 그려진 버스를 타고 캐릭터가 많이 그려진 즈음에서 내리는 것. 그렇게

도착한 '고가네이(小金井)공원' 안에 위치한 에도도쿄건축공원을 찾는 것 역시 캐릭터를 찾아나서기.

입장권을 확인한 후 실외로 다시 나서는 길, 건축공원 안내팜플렛이 세 종류로 비치되어 있었다. 영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조선말 버전. '에도도쿄건조물원'이란 건 한국어라기보단 조선말에 더 가까운 표현인 거 같은데.

하얀 햇살이 쏟아지는 밖으로 나섰다. 커다란 안내판 옆에서 길안내를 도와주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친근하게

다가서선 안내판 위에서 푸닥대며 돌고 있던 바람개비를 하나 선물해 주셨다.

중앙구역에는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생가나 관련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짧고 단호하게 끊겨진 일본

전통 가옥의 처마는 볼 때마다 나름의 미감이 떠오른다. 여기 건물들은 모두 실제로 사람이 살던 건물들, 도쿄가

쉼없이 개발되고 발전해나가면서 밀려나가고 지워지기 마련인 옛 가옥들을 옮겨둔 것이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민속촌 같은 곳에서 느껴지곤 하는 휑하고 선뜻한 기분은 덜한 거 같다.

건물 안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미리 받았던 비닐봉투에 신발을 담아 들고 가야 한다. 건물마다 자리를 잡고

마치 터줏대감같은 포스로 건물에 얽힌 이야기나 설명등을 해주시는 (듯한) 자원봉사자 할아버지들이 정다웠지만,

아쉽게도 일본어는 '와까리마셍' 정도나 읊조리는 앵무새인지라 그분들이 숨겨둔 이야기 대신 창 밖 경치만

열심히 보았다. 좋네 뭐.

일본, 도쿄에서는 까마귀를 꽤나 쉽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하라주쿠의 메이지신궁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까마귀들이 떼지어 날아다니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옛 건물들만 집결시켜 둔 것이 아니라

주변 풍광까지 고려하고 이렇게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배경까지 안배하여 보존해 둔 공원이니, 모이는 게 비단

까마귀만은 아닐 것 같기도 하다.

고풍스런 가로등이 듬직한 발톱을 한껏 드러낸 네 발로 땅거죽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것도 그 언젠가의

도쿄 거리를 밝혔던 가로등인 걸까. 저런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라면, 운치가 1.2배쯤 상승할 듯.

계속해서 동쪽 구역으로 가는 중이다. 공원이 생각보다 커서 동쪽 구역만 돌아보고 나와도 다리 꽤나 아프겠다

싶은 정도의 규모랄까. 이런 하천도 품고 있으니.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데, 문득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괴이쩍은 터널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게 한 줄기 불어왔다. 풍경이 흔들렸다.

그리고 덜컥 등장한 기차. 어이, 이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토리 라인하고는 좀 다르다구. 노란색깔이

어울리는 건 솜털 보송한 유치원 꼬맹이들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열차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애니 속에서

나왔던 열차도 물론 노란색이긴 했지만, 애니 속 열차와 비스무레한 것이 이렇게 전시되어 있으니 새삼 감탄.

실제 시부야에서 긴자까지 운영되던 열차란다. 더 놀랬다. 하루 이용자가 130여만명에 달했다는 이 전차는

19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근 반세기동안 운행되었다가 퇴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이리로 온 걸까.

차내로 들어와보니 깔끔하게 잘 유지되고 있는 게, 금세라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손잡이를 잡은 채 빼곡하게

꼽혀 있어도 하나도 안 이상할 듯. 센과 가오나시가 저기쯤 앉았었다.

그리고 커다란 목욕탕 건물을 앞에 두고 좌우로 벌려진 주점, 꽃집, 문구점, 음식점, 상가 등등. 동쪽 구역의

중심가인 셈이다. 드문드문 보수 중인 건물들도 보인다.

옛 건물들을 모아두고, 이렇게 식물들을 기르고 사람의 손을 거치며 다시금 생명을 얻는다. 사람으로부터 유리된

채 건물들이 박물관 속 유물처럼 차갑게 굳어버리거나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괴물같은 것으로 변해버리는

경우에 비하자면 정말 멋진 공간.

치히로의 부모가 음식에 홀려 돼지처럼 먹다가 진짜로 돼지가 되어버린 그 음식점의 모델이 되었다는 건물.

딱 보니 알겠다. 저 의자에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앉아서는 양손으로 한껏 음식을 그러쥐고 그야말로 우걱우걱

먹어대다간, 주변을 돌아보던 치히로가 돌아왔을 때에는 부모님은 간데없고 살찐 돼지 두마리가 허부적대고

있었던 곳이다.

활짝 펼쳐진 메뉴판 옆에 도꾸리도 하나 나와있고, 주홍색 알전구 조명도 들어와 있는 게 금방이라도

주방 안쪽에서 누군가 '이럇사이' 하며 반겨 나올 거 같다. 혹은 이 자리엔 방금까지도 치히로와 부모들이

앉아있었는지도.

일본인들의 디테일함이야 익히 알려져 있는 바지만 정말, 이 주점을 더욱 사람냄새나게 만들어주는 건 이런

자그만 조화 한 송이. 자신의 가게를 꾸미고 손님을 불러모으겠다는 식의 생각 없이 이런 치장을 엄두나 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가게 바깥에는 어제 장사한 흔적인 듯 빈 병들이 삼엄하게 꽂혀 있었다. 이래서야 원, 치히로 부모님이 아니라

나라고 해도 당장 의자에 철푸덕 앉아 음식부터 주문하고 볼 판이다.

그리고 치히로가 센으로 이름이 바뀐 채 일하게 되는 목욕탕의 모델이 되었다는 커다란 대중 목욕탕.

애니에 나오듯 그렇게 으리으리하고 커다란 건물은 아니고 조금 천장이 높은 단층 건물인데, 그 건물의

어느 부위를 어떻게 살리고 뻥튀기해내어 애니 속 모습을 가공해 낸 건지 상상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옷바구니. 목욕탕 안을 이런 기회 아니고선 또 언제 찍어보겠나 싶어, 또다시 신발을

벗고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다니는 불편을 감수하고 덥썩 안으로 들어왔다.

남탕은 됐고, 여탕으로 직행. 보통 일본의 목욕탕은 오른쪽이 남탕, 왼쪽이 여탕이라는데 여긴 뒤바뀌어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여하간 여기는 바뀌어있다는 것. 글쎄, 장난기 심한 주인남자가 여자남자가 습관에 이끌려

덜컥 문열었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혹은 응큼하고 연기잘하는 남자손님들을 좀더

불러모으려는 고도의 상술일 수도. "어익후 깜짝이야, 남탕인 줄 알았네요. 반갑습니다. 차라도 한잔?" 정도.

여탕 내부에 걸려 있는 그림들. 이런 그림들, 실제 여기가 목욕탕으로 쓰이던 때에도 걸려있었을까. 요새 시대에도

여탕엔 이런 그림이 걸려있나. 아무리 어릴 적 기억을 되짚어도 내가 가본 여탕엔 이런 야시시한 그림은 없었던

거 같은데. (아쉽게도.)

나무판을 이어붙이고, 쇠로 된 테두리를 감아 만든 고풍스런 물바가지. 얼룩이 여기저기 서려 있는 게 정말

쓰이던 걸까 싶은 상상을 계속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조그맣지만 야무지게 딴딴하게 생긴 나무의자도.

남탕엔 저울이 없던데, 여탕에만 있었다. 그것도 개씩이나. 슬쩍 올라갔다가, 얼추 비슷한 수치로 홱 당겨지는

바늘에 놀라 얼른 내려와 버렸다. 아..살 빼야되는데. 회사생활 2년차까지만 나름 선방했는데 올해가 문제.

목욕탕 뒤뜰..이라 해야 하나. 그리 넓진 않은 툇마루 밖으로 석등이며 이끼서린 돌덩이며 요리조리 꺽인 나무들,

보기 좋은 정원이지만 조금 이상하달까. 목욕하고 여기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갈 기세의 정원이다. 정말 그때의

목욕탕이 저랬다면, 현대인이 과거의 인간들보다 행복하다는 건 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한개 추가.

보드랍고 가벼운, 낭창한 이파리를 풍성하게 드리운 버드나무에 바람이 불었다. 목욕탕 우측의 건물은

구두방이라던가, 그냥 분위기로 족했다. 하나하나 굳이 문열어서 확인할 곳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그때의

인기척을 듣고 바람소리를 감각하며 거닐어 보는 곳. 하야오가 이 곳을 즐겨 산책한 이유를 알 거 같다.

이 건물도, 그렇게 풍족한 마음으로 살살 거닐던 차에 우연찮게 발견했다. 자칫 놓쳤으면 사실 아쉬웠을 거 같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마지이 영감이 기다란 여덟개의 팔로 약초를 다듬던 그 공간. 치히로가 일을

시켜달라며 무작정 찾아들어갔던 그 공간. 애니메이션 속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지만, 애니와는 다르게

여긴 문방구점이었다는 사소한 사실 하나만 다르다.

한쪽 벽면에 뺴곡한 서랍은 대략 300여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붓, 벼루, 먹 등의 문방구들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스란히 담겨 있을지, 꽤나 궁금했지만 차마 함부로 손댈 수가 없어 궁금증을 꾹 눌러 참았다.

아귀가 딱딱 맞는 조그마한 서랍들이 300여개나 된다니, 더구나 백 년 가까이 사람손에 길들어 반질하게 윤도

나고 은은한 나무색이 더욱 살아난 그 느낌이 너무 매혹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천장부터 바닥까지 채워진

서랍들이 실재하는 걸 두고 손이 마음대로 쭉쭉 늘어나는 가마지이 영감을 상상해 내다니, 역시 하야오.

다른 구역들, 화장품 가게도 있고, 음식점도 있고. 그리고 왠지 바람에 휘청휘청댈 것만 같은 얄포름한 외피에

쌓인 건물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그럴 듯한 풍치.

자전거 달구지가 삐걱, 소리내며 막 멈춰선 듯한 가게 앞. 어디까지가 진열되고 연출된 소품이고 어디까지가

정말 이 공간을 꾸려나가는데 쓸모있는 일상의 것인지가 도무지 불분명하다. 그냥, 2010년의 일본과 1900년

어느 어간쯔음의 일본이 마구 뒤섞인 채 새로운 느낌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커다란 월계관 사케병이 둥글게 둥글게 모여서 있는 술집. 하얗게 탈색된 채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는 라벨이 시간의 엄연한 흐름과 사람의 쉼없는 손짓을 가늠케 해준다.

이 곳에서 다시 만난 저울들, 신기하게 생긴 저울들이 두개 세개씩 놓여 있는데, 예전엔 술집에서 술을 저울에

담아 팔았던 걸까. 주전자를 들고 가면 주전자에 담아서 그램수로 팔았나..사케를 무슨 막걸리마냥 그렇게

팔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꽃가게도 있고, 비록 조화지만 햇볕을 담뿍 받아 싱싱한 생화에 못잖은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걸로 보아 이동네는

당장이라도 몇 가구 이사와서 생활하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술에, 음식에, 목욕탕에, 그런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에 더해 꽃과 화장품까지 커버되는 동네면 뭐.

돌아 나서는 길, 금칠이 화려한 사당같은 건물이 하나 있었고, 그럴듯한 건물, 그렇지만 용처를 잘 가늠할 수

없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서쪽 구역을 좀더 돌아보았어도 꽤나 재미있었을 거 같은데, 이미 오전부터 지브리

스튜디오를 잔뜩 걸었는데다가 동쪽 구역만 돌아보아도 솔찮이 시간이 소모되어 어느새 해가 살짝 기울고

있어서. 슬슬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에도도쿄건축공원, 그 안을 돌아다니며 계속 한 손에 들고 바람맞히던 바람개비, 주위에 커다란 건물도 없고

거침없이 휘감기던 바람을 떨쳐내고 가까운 나무에 접붙이기 해버렸다. 나중에 이 나무에서 바람개비가

잔뜩 돋아나진 않을까, 아님 물과 양분을 쭉쭉 빨아먹고 이 바람개비가 거대하게 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과 함께.





지브리 미술관에서 나오는 길, 미타카 역을 가리키는 화살표 하나, 미술관을 에워싼 공원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또 하나. 미타카 역에서 지브리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꽤나 매력적인 산책로라는 이야기에 그쪽으로 바로

빠지기로 결심은 했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져 있는 공원에서 좀더 여운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움찔움찔.

아까 뛰어들어오느라 보지 못했던 지브리 박물관/미술관/스튜디오의 간판.

끝내 문을 나서서 돌아나오는 길, 샛노란 칠이 산뜻한 지브리 스튜디오 건물 안의 커다란 토토로가 배웅해주는

듯하다. 이제 막 스튜디오에 들어선 꼬마아이 하나가 토토로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나와 미타카 역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태풍 '곤파스'가 가로수를 뽑고 휘두른다던

서울과는 달리 이곳 도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죽어나간다는 전례없는 폭염이 계속되던 중. 비행기 타고 고작

두시간도 안 날아가는 거리인데 이토록 판이한 날씨라니. 이런 점에서도 가깝고도 먼 나라, 맞다.

이국적인 느낌의 신호등, 빨간 신호등의 불빛이 유난히 붉다.

사실 미타카역에서부터 지브리 미술관으로 걸어오면서 점점 줄어들어야 하는 숫자, 미술관까지 300미터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 푯말을 들고 있는 토토로도, 푯말 위에서 휘영청 몸을 꺽어내는 도마뱀도 귀엽다.

한참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닐 시간 아닌가, 오후 두세시경. 옆에 개천을 끼고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그렇지만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즈넉하고, 조용하면서 깨끗한 거리.

나무도 많고, 집들도 아기자기하고, 그런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니 금세 지브리 미술관에서 멀어진다. 어느새

500미터나 떨어졌다. 거꾸로, 미타카역에서 이 길을 따라 지브리 미술관을 향하는 길도 생각보다 금방 가닿을듯.

어느 집 앞마당에 얼기설기 세워진 대나무 울타리에 붙여진 안내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개와 고양이 그림이

귀엽다. 뭐, 이런 개나 고양이가 마당에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그런 걸까.

좀더 걷다 보니 다른 그림들도 눈에 띈다. 아이들이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포스터들, 그리고 검정귀를 가진

하얀 강아지가 푯말로 붙어있는, 그런 류의 귀여운 안내판들.

그리고 칠백미터. 토토로 말고 다른 캐릭터들도 푯말을 들고 있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리

뭐니뭐니 해도 지브리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는 역시 토토로. 붉은돼지 아저씨가 푯말을 들고 있기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거 같고.

이번엔 파란 불, 이건 또 아까 신호등과는 모양생김이 다르다. 햇살은 워낙 내리쬐이고 그늘은 또 그만큼

짙고, 도무지 광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던 도쿄.

신호등 앞에는 이렇게 멈춰서서 기다리라며 발자국 모양까지 그려넣는 세심함..이랄까 유머러스함이랄까.

장난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브리 스튜디오-미타카 역을 잇는 이 산책로의 이름은, '바람의 산책로'. 아닌 게 아니라 개천을 따라 쓸듯이

불어내리는 바람이 머리빗처럼 순순한 방향으로 행인들을 빗어넘기고 있었다.

문득 툭 튀어나온, 그렇지만 너무 과하게 튀거나 부조화스럽지는 않은 일본 스타일 강렬한 집도 한 채 지나고.

그러다보니 벌써 지브리 스튜디오에서부터 천백미터. 그리고 거의 코앞까지 당겨져버린 미타카역.

지브리에서의 여운을 곱씹으며 마음을 탁 놓은 채 걷기에 딱 좋던, 딱 알맞은 거리와 분위기의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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