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게도 길게만 자라난 잔디 잎새들은 초록빛을 잔뜩 머금었고,

 

어느새 노랗게 바래버린 채 툭 떨궈진 잎새 하나를 품을 만큼은 속이 깊어졌나 보다.

 

 

누군가의 상처입은 사랑이 노랗게 곪은 채 저렇게 툭. 떨어지는 계절, 가을.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저런 엉성한 잔디 쿠션이나마 함께하기를.

 

 

 

@ 무악재 안산.

 

 

 

 

톱카프 궁전 깊숙한 곳,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단정하게 세워진 다소곳한 별궁.

내부의 벽면이 전후좌우, 윗면 모두 복잡하게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득하다. 창밖너머에서

그득하게 던져지는 햇살을 뚫고 창틀에 기대면 시퍼런 보스포러스 해협이 활짝 펼쳐진다.

날이 쌀쌀해지면 저 실내 스토브에서 불을 피웠던 걸 거다. 아니 근데, 저거 스토브가 맞는 건가.

그리고 밑에는 아마도 세면대..? 아니면 기도시간에 맞추어 발을 씻기 위한 곳인가..; 용도가

아리까리하지만 그림같은 아랍어 글자들과 금박이 단정하고 세련되게 입힌 모양새가 이쁘다.

가까이 들여다본 모자이크 타일의 섬세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양, 한 장의 타일 내에 구비구비

얽혀있는 문양들도 신기하지만, 그 타일들이 다닥다닥 붙으면서 이어지고 엮여지는 느낌이 굉장하다.

빛이 스미는 창틀 바닥면에도 빠짐없이 붙어있는 모자이크 타일들이 정교하다.

길게 누울 수 있는 빨간 의자가 긴 벽면을 따라 미리부터 길게 누워있었고, 돌아나오는 발걸음을

잡는 건 좀처럼 심심할 틈 없는 올록볼록한 철문의 문양들.

별궁에서 바다 쪽으로 면한 울타리 너머로 톡 튀어나온 조그마한 정자, 금빛 지붕이 반짝이는

곳에서 두 사람이 서면 꽉 차는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너머로는

외적을 침입이나 불청객의 접근을 막기 위한 돌담이 완고하게 버티고 섰고.

이렇게 햇살이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곳에서 긴 의자에 누워서 뻐끔뻐끔 시샤를 맛보며 나른하게

한나절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푹신푹신하고 탱탱하게 탄력을 유지하는 듯 해 보이는 쇼파가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 새것같은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둥근 돔 천장에서 무게를 잡고 돔을 지탱하는 무거운 추가 늘어뜨려져 있다. 건축학을 전공한다는

여행 친구로부터 듣기 전까지는 왜 저런 걸 늘어뜨렸을까 궁금했는데, 그림까지 그려주며 설명하던

그 친구의 열의 덕에 이해할 수 있었더랬다.

건물 가운데에 네 발로 버티고 선...이것은 뭘까. 향로? 터키에도 향을 피우는 전통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김새로 보자면 꽤나 그럴듯하게 생긴 향로인 거 같은 거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에 초를 꼽거나 물을 담아두었을까. 그다지 다른 용도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너무나도

분명히 '나는 향로에요'라고 외치는 듯한 외양.

궁궐 건물들 사이에서 발견한 조금은 외진, 그렇지만 까막 바닥돌들이 하얀 돌들과 어우러져

꽤나 이쁜 그림을 그려내던 길 하나가 눈에 들었다.

돌아나오던 길, 드문드문 비추던 햇살은 깍쟁이처럼 끝내 간만 보이다가 사그라들어 버렸고,

어두침침한 구름 사이에서 톱카프 궁전의 담회색 잿빛 색조가 조금은 무거워졌다.

궁전의 곧고 반듯한 포장도로 위에서 젖은 발을 끌며 걷는 여행객들, 그렇지만 이전에 이 길위를

걸었던 건 터키의 왕후장상, 더러는 말을 타고 지나기도 했으려나.

아무리 해도 이런 둥그렇고 완만한 돔 형태의 지붕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 어렵다. 그냥 눈으로만 잠깐 바라보고 있어도 눈알이 뱅글뱅글, 덩달아 머릿속도

뱅글뱅글 해서 왠지 갸냘픈 폐병환자처럼 풀썩 기절이라도 할 거 같은 거다.

궁전에서 거의 다 돌아나올 즈음, 마치 테마공원의 으리으리한 지붕처럼 양끝의 첨탑이 뾰족하니

깃발을 휘날리는 성문을 지나쳐 나오곤 돌아보았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며 함께 걸어주던 성벽 근처에선 더이상 아무런 살벌한 기운도, 예리한

금속물질들의 철컹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양이 새끼들 몇 마리가 지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는. 저 녀석들은 고양이라기보다는, 마중냥이나 개냥이 정도.

이제 완전히 톱카프 궁전의 구역을 빠져나오는 길, 돌아나오는 길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더 선명히 기억을 남길 수 있었던 거 같았다. 눈앞에서 어른대는 파랗고 하얗던

모자이크 타일들이니, 살짝 뿌연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보스포러스 해협의 검푸른 파도라거나,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거닐던 와중에 발견한 호젓하고 분위기 있던 짧은 골목길이라거나.




부여사비궁, 궁궐의 중심에 섰던 천정전을 향한 대로에 놓인 벽돌 포석들. 처음 느낌은, 뭐야, 이 문양은 왜이리

이질적이야. 하는 것이었다. 어줍잖은 지식이나마 내가 갖고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 이미지에 이런 식의 용문양이

쓰였던 건 못 봤던 거 같아서.

근데, 아니었다. 백제의 문화유산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부여와 공주의 땅을 밟으며 온갖 곳에서 그 흔적과 변용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던 것. 당장 박물관에서 여기저기 흔하게 눈에 띄던 용무늬 벽돌. 이런 문양이 친숙하게

쓰이고 사방에서 쉽게 쓰이던 때가 있던 것이었다. 1400년전.

정림사지석탑을 보러가는 길 울타리에도 있었다. 연꽃을 밟고 올라선 도깨비 문양, 연꽃 문양, 그리고 용 문양.

부여의 어느 음식점 앞, 부여궁(사비궁)에 있던 그 문양 비슷한 그림이 길가의 흔한 포석에서 다시 보였다.

용이 아니라 봉황, 인 듯 한데 그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지는 모습이나 간결하지만 화려한 모양새가 멋지다.

길가의 어느 벤치, 널빤지를 지탱하는 양 끄트머리 대리석에 봉황 무늬가 선명하다.

안타까운 건, 길가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보도블럭의 모양새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그것의 오리지널 모양새는

많이 닮았으면서도 은근히 다르다는 거다. 왠지 이전의 것들이 훨씬 기품이 느껴지고 깊이있어 보인다.

조명의 탓이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당장 같은 형상의 봉황이라고는 해도 뭔가 저급의 봉황과 고급의 봉황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 같달까. 내가 밟는 보도블럭도 조금은 더 고급스런 문양을 가진 거였으면 좋겠는데.

백제의 연꽃무늬 기와들은 그나마 눈에 좀 익은 편에 속하는 거다. 워낙 백제의 '우아한' 문화를 소개하는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대표적인 이미지이기도 하고, 그 고상하고 단정한 분위기는 워낙 인상적이기도 하고.

사비궁 벽돌 대로의 가장자리를 마감하고 있는 연꽃무늬 포석들은 그래서 한결 쉽게 다가왔다.

그리고 공주박물관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난 백제의 문양들. 사방으로 금가있고 깨져있는 벽돌들이었지만,

형체는 분명했다. 불꽃이 수레바퀴 주변에서 돌아가는 듯한 형체의 문양. 근데 어떻게 니들은 1400년을 지낸

유물들보다도 더 오래되어 보이고 힘들어 보이니.

확실히 오리지널이 좀더 문양도 깊고 뚜렷하게 파여 있고, 세련됨의 정도로는 훨씬 더 세련된 느낌. 보도블럭이

핑크빛으로 칠해진 게 문제인 걸까. 예산이 없니 뭐니 하지말고, 아예 한 두께 20센티 정도의 벽돌이나 자연석을

가공해서 몇십년은 갈만한 보도블럭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차피 매년 바꾸는 보도블럭 관련 예산이나

제대로 되어 몇십년 버텨낼 꺼로 바꾸는 예산이나.


도깨비 문양들, 연꽃을 타고 올라서 있기도 하고 산경치를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기도 하고.

아마도 고대 '치우천황'의 이미지에서부터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은 전혀 근거없는 상상. 이런 문양들도 좀더

많이 활용되면 충분히 백제의 얼굴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부여궁 앞마당에 커다랗게 그려져있는 그림은, 너무 커다래서 한눈에 와닿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 원전이 되는

그림에 대한 이미지가 사전에 박혀 있지 않고서야 더더욱.

산경무늬 벽돌. 뫼산(山)자를 꾸역꾸역 먹이고 사육시켜서 토실하게 살찌워놓은 듯한 모양의 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둥그스름한 형체도 그렇고, 듬성듬성 표현된 나무들도 그렇고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불꽃무늬 왕관장식,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이 문화유산은 왕관에서 떨어져나와 그 자체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경의 한구절 표현을 빌자면 '쉬지 않고 불타오르는 떨기나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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