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아무래도 심장이 떨리기 마련이다. 백 명 중의 하나로 서는 거니까 티비 울렁증이라기보단

뭔가 '잘하면' 큰 돈을 따겠구나, 하는 초짜 타짜의 심정이랄까. 사실 그렇다. 대개 연예인인 유명인

한명과 나머지 백명, 그렇게 백한명 중에서 마지막 한 명으로만 남아있으면 되는 거니까. 보기에 따라

쉽다면 굉장히 쉽고 어렵다면 굉장히 어려운 퀴즈 게임이다.


일요일 오후 여섯 시, KBS 별관의 '일대백' 녹화장에 도착했다. 이미 술렁술렁하던 공기는 마치

도박장의 그것, 얼마전 다녀왔던 경마장의 그것과도 비슷한 냄새가 풍겼다.

상금을 탄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설레는, 내가 상금을 탄다면 그 상금이 이러저러한 절차에 따라

지급된다는 것에 동의하는 동의서를 써야 했다. 벼락을 맞고 맞아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하는 확률의

로또보다 얼마나 현실적인가, 백일분의 일이라는 당첨 확률은. 게다가 몇십 퍼센트에 달한다는

로또나 다른 복권의 세금보다 얼마나 괜춘한가, 4.4%의 세금이라니.


물론 로또나 복권같은 벼락같은 행운과 퀴즈 프로그램의 상금을 똑같이 비교하는 건 무리다.

나 역시 며칠 바싹 신경쓴다고 신문을 보거나 책을 볼 때도 연도니 신조어니 그럴듯한 단어따위에

잔뜩 시선을 모으며 혀를 굴려 발음해보지 않았던가. 그러한 노고에 대한 정당한 결과랄 수도.

녹화 진행 순서에 대한 몇장의 안내문도 함께 나눠줬는데, 평소 이 프로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나로선

매우매우 도움이 많이 되었던 내용이었다. 아, 그러니까 백 명의 사람들은 일종의 스펙타클을 꿈꾸는

배경화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 명의 등장인물을 압박하는 유효한 심리적 압박수단인 거다.

이 날의 등장인물은 뮤지컬 배우 최정원과 CNBLUE의 정용화. 누가 더 똑똑할까, 벌써부터 치열한

나름의 승산 계산이 시작됐다.

진행자 손범수가 등장할 일 인과 함께 서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앙 무대, 양쪽에 포진한

방청객들은 아주아주 극적인 환호성과 웃음소리를 탑재하고 있었다. 굉장한 리액션들, 아무래도

그들은 백 명과 한 명이 마주선 이 원형극장의 진정한 주인공일지도. 아니, 사실 이런 프로그램의

흐름과 반응정도를 지배하는 건 그들의 환호성과 웃음소리, 공중파의 진정한 승자일지도.

내 자리에 섰다. 인터뷰를 한다는 등의 비상사태에 대비한 자바라 마이크가 하나 서있고, 의외로

단촐한 버튼이 검은 박스 안에 숨어있었다. 서로간의 컨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슬쩍 꺼내보니 버튼은 총 네 개. 내가 눌러야 하는 버튼은 세 개 중 하나. 일대백은 삼지선다라며,

혹시나 4번을 누르면 무조건 탈락이라고 리허설 중 슬쩍 언급된 한 마디가 귀에 쫑긋 들어섰다.

혹여나 상금을 받는데 누를 끼칠 수 있는 나쁜 버튼 4번, 절대 안 누르겠다고 다짐다짐.

카메라는 한 예닐곱대 정도 되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백 명 중에 숨어 있으니 딱히 카메라의

압박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조금씩 사람들이 줄어가면서 불이 켜진 자리가 드물어질수록 그런

압박이 조금씩 커진 것도 사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문제를 하나하나 넘어가면서 휙휙 늘어가는

상금의 액수에 따라 왕성하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의 흥분이 더 컸다. 뭐랄까, 이건 촬영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따느냐 마느냐, 라는 흥분이었던 거다. 포커에서 손에 든 패를 쪼는 그런 느낌과

이번 문제의 정답이 공표되기를 기다리는 삼엄한 몇 초 사이의 그런 느낌은 정말이지 똑같았다.

머리 위에서 말그대로 '쨍쨍' 비추던 조명 하나가 툭 꺼지는 순간, 그 흥분이 삽시간에 가라앉는 순간.

내 조명이 꺼지기 전에는 못 느꼈던 사실, 백 개의 조명이 백 명의 도전자를 각기 비추고 있던

그 뜨거운 조명이 하나둘 꺼지는 가운데 오히려 전체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오르더라는. 내가 그

레이스에 함께 하고 있을 때는 몰랐었다.

몰랐는데 매주 개그맨들이 세네명씩은 고정적으로 나와서 백 명 사이에서 감초 역할을 하며

분위기도 띄워주고 본인들도 퀴즈를 상대한다고 한다. 벌써 몇 번은 나왔다던 개그맨 변기수,

그리고 쩌뻐쩌뻐~ 이 분 누구시더라, 둘다 내가 꽤나 애정하는 분들. 변기수의 변칙적인 입담은

늘 그렇듯 주위를 뻥뻥 터뜨리는 폭발력이 있었다.

아..스포츠 문제 따위. 아..캔만드는 회사의 사주를 받은 이상한 문제 따위만 아니었으면 나머지

문제 다 맞추고 상금 탈 수도 있었는데. 눈앞에 백일분의 일, 아니 이십분의 일 정도의 확률까지

다가섰던 몇백만원의 상금이 맥주 거품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복불복, 시사상식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는, 관계자분 말마따나 이건 '교양'이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


Q. 최근 한국의 음주문화가 서구화되면서 올 상반기 맥주 판매량 중에 유난히 급증한 것은?

1) 캔맥주
2) 병맥주
3) 생맥주


Q. 다음 중 몸의 색깔이 변하는 보호색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은?

1) 불가사리
2) 문어
3) 청개구리

Q. 고무신, 고무지우개, 이 때 '고무'는 어느나라 말일까?

1) 한자어
2) 일본어
3) 프랑스어


세 문제의 정답을 모두 맞추셨다면 일대백에 도전해보시길.ㅎ






경마장 가는 길, 기도문을 바치다.

에서 기도문을 바친 효험이 있었던 건지, 과천 경마공원에서 경마 세 게임에 만원을 베팅하고 나선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아, 여기가 바로 '내집마련'의 꿈을 이뤄줄 곳이로구나.ㅋ

삼천원이 (구만원이 되려다가) 만이천팔백원이 되고, 이천원이 삼천이백원이 되고, 그리고 (약간 삐끗해서)

오천원이 사천오백원이 되는 곳. 게임비 낸다고 치고 몇시간 재미있게 노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사실 말들을 잔뜩 볼 수 있었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꿈틀꿈틀 굵게 일렁이는 말근육들을 보는 재미랄까.

고등학교 일학년때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올림픽공원으로 소풍갔다가, 도망나와선 무려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비디오방에서 봤던 게 '옥보단'이었다. 좁은 비디오방에 바글대며 앉아서는 옥보단을 보고 있던 상황도 꽤나

기억에 오래 남았지만 역시 '옥보단'이라고 하면 말의 근육이 인상에 꽂히는 작품.

경주가 시작되기 삼십분쯤 전에 1000미터짜리 트랙 옆의 조그마한 트랙을 빙빙 돌며 사람들에게 말을 보여주는

시간, 정보지를 손에 쥔 아저씨들이 날카롭게 말을 살피고 전광판을 살피며 뭔가를 적기도 하고, 계산을 하기도

하고. 내 나름으로 나도 열심히 살폈던 건, 말들의 걸음걸이가 경쾌한지, 신경이 곤두서거나 겁먹어 보이진

않는지, 그리고 역시 '말근육'이 쩍쩍 갈라져 있는지.

이 녀석은 긴장한 탓인지 자꾸 트랙을 벗어나려 하더니, 급기야 앞발을 쳐들고 진저리를 친다. 무슨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닌가 싶어 잠시 긴장했지만, 침착한 인도자의 토닥거림으로 이내 차분해졌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말근육의 향연. 군살 하나없이 날렵하면서도 딱딱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냥 에너지덩어리가 

꿈틀꿈틀대며 말의 형체를 빚어낸 건 아닌가 싶도록 아름다운 몸이다.

이 녀석은 경주에 나서기 전부터 벌써 땀이 번질번질, 바싹 땡겨진 근육들이 범상치 않았다. 스타카토로 톡톡

튕기듯 하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온몸에서 뿜어내는 기운도 그렇고. 이 녀석이 일등한다는 데 걸었으면 무려

구십배의 배당을 받았을 텐데, 소심하게시리 삼등 내에 들 거라는 데 걸어서 열두배밖에 안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요새 재미있게 보았던 미드 '스파르타쿠스', 그야말로 말근육을 가진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피와 살이 사방에

흩뿌려지는 하드코어한 이야기지만 적어도 근육에 있어선 이 말들보다 못한 거 같다. 팽팽하게 긴장감을

머금은 채 사방으로 갈라지며 부들부들 떨리는 저 근육들.

말들이 조그마한 트랙 위를 몇 바퀴 도는 새 전광판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이번 게임에 걸린 판돈이 무려 이십억을

넘어가고 있었다. 제각기의 말들에 걸린 배당률도 돈이 쌓이면서 시시각각 변해가고 있었고, 아무래도 강력한

우승 후보일수록 배당률이 낮은 건 당연한 이치. 증권 시장이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런 식으로 돈 놓고 돈 먹기의 판에서는, 무엇보다 돈 앞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다.

적당히 포트폴리오를 짜서 손실을 통제하는 가운데 전략적으로 승부를 칠 줄 아는 감을 가다듬는 건 그 다음.

그러고 보니 정말 8번 말의 사진을 많이 찍긴 했다. 어쩌면 난 말을 알아보는 천부적인 눈을 가진 건지도

모르겠다는.ㅋ '경마가 가장 쉬웠어요' 한권 쓸까부다.;

마지막 바퀴는 기수가 말을 타고 돌았다. 경마에서 이기려면 아무래도 체구가 작고 가벼워야 한다더니 정말,

저 강인하고 아름다운 말 위에 기수가 살짝 얹힌 느낌이다. 전혀 무거워하지도 않을 거 같고, 오히려 에너지

충만한 저 말들이 방방 날아가지 못하도록 슬쩍 자그맣고 가벼운 돌멩이로 눌러둔 거 같달까.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트랙을 정돈하는 차들이 지나가고, 전광판에서 차츰 줄어들던 마권 구매가능 시간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두두두두, 말들이 내달리며 일으키는 흙먼지와 응원소리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 미터라고 해서 너무 짧은 건 아닌가 했는데, 의외로 엎치락 뒤치락 거푸 순위가 바뀐다. 심장이

쿵쾅쿵쾅 두근대면서 옆사람의 흥분과 고함소리에 전염되더니 눈앞을 쌩하니 지나가는 말들을 따라 시선이

먼저 올라가고, 그다음 양손이 번쩍 올라갔다. 일등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마권을 돈으로 바꾸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마권 구매표를 한 장 뽑았다.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구매표에 표기를 해서 카운터로 가져가면, 이번 경기에서도 마권을 다시 돈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거 크게 욕심만 안 내고 잘만 하면 야금야금 돈 벌 수 있겠는데. 


경마장 바닥엔 휴지처럼 쓸모없어진 마권이 잔뜩 널부러져 있었다. 토요일이 지난 로또처럼.

그러고 보니 맘의 여유만 있다면, 경마장에서도 가을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았던 하루.




약간 싸구려스럽게 빰빰거리며 울리는 배경음악이라거나 중간중간 챕터 제목을 붙여주듯 커튼이 내려가듯

그림이 끼어있는 것들, 1973년의 미국영화란 건 그랬구나 라는 깨달음은 줄지언정 오히려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었던 요소들이었다. 아무래도 요새 영화보다 못하지 않겠냐고 턱없이 얕잡아보며, 그래도 고전을 본다는

의의는 있겠거니 쉽게 생각하며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그렇지만 굉장히 재미있었다. '영화'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능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전하고

있으리라 그저 믿고 있었는데, 그런 거 아닌 거 같다. 짜릿한 반전의 쾌감은 어쩌면 사십여년 전에도 영화를

갖고 이렇게 재미있고 잘 짜인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데서 오는 신기함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어렴풋이 이름을 들었었던 과거의 배우들, 폴 뉴먼이라거나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력도 그렇고 엔간한 반전은

능히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닳고닳은 이에게도 감탄하게 만드는 스토리도 그렇고,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탄탄하게 끌고 가는 감독의 역량도 그렇고. 도박과 사기를 소재로 한 영화야 쉼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지만, 그 모든 작품들의 원류이자 지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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