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드 인디고.

 

 

꽃처럼 피고 지는 사랑, 사랑처럼 피고 지는 꽃. 꽃이 은유인지 사랑이 은유인지 헷갈릴 만큼 미셸 공드리의 환타지는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사라진다.

 

그게 과연 환타지였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모두 한송이 꽃이라면 세상은 온통 꽃이 지천에 피고지는 거대한 꽃밭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고등학교에서 미디어수업을 듣고 있는 그는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데다가 맨눈보다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이 더 편안할 정도로 영화찍기에 심취해 있다. 그가 주제로 잡은 건 자신의 자살, 자신의

자살 순간을 영화에 넣겠다는 그의 의지는 강력하다.


파괴되는 지구, 자본주의 시스템의 각박함, 비인간성, 어른 세대의 위선과 거짓말들, 그리고 반듯하고

모범적으로 자라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압박까지 그야말로 세상 온갖 것들이 전부 불만의

재료이자 불쏘시개인 거다. 뚜렷이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불만과 허무함, 간단히 '질풍노도'의 시기라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도 그 결들이 복잡하고 무늬가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지나간다.


그 미성숙하고 아름다운 젊음이 빚어내는 혼란스러움, 격정의 순간은 어느 영화인이고 담아내고 싶은

순간임에는 틀림없을 거다. 이미 수많은 감독들이 그 시절의 자신을 복기하거나 그 시절을 살아가는

젊음들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들었었으니. 이 감독 역시 디지탈 문화에 익숙한 세태에 맞추어 감각적이고

경쾌한 화면과 스피디한 전개로 자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청춘에 대해 눈높이를 맞추는 것 같다.


미셀 공드리의 작품, '수면의 과학'과 비슷하게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적나라하게 조악한 환타지가

지나가는 영화라는 점에서만 그렇다. 감독은 결과적으로 '자살은 나쁜 짓이에욤 뿌우'하는 공익광고를

세련화하는 데서 멈춘다. 갑작스레 그의 자살 충동을 제어하려는 움직임들이 준동하기 시작하고, 그다지

설득력도 흡인력도 없는 급전직하의 전개를 따라 '그래도 살자'라는 무책임하고 쉬운 봉합.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도 확인된 거지만, 그는 미국의 10대들이 자살률이 높다, 라는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젊음에 대한 아까움, 아쉬움만 있을 뿐 10대들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

날카롭고 깊게 통찰하거나 비판적으로 목소리를 내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의 영화 처음과 끝, 그 아이가

자살을 생각했던 처음과 자살을 포기한 끝의 장면에서 바뀐 건 아이의 마음상태 뿐, 문제는 그대로인데.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았단 게 포인트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자살'의 문제를

자살자 개인의 문제로 슬그머니 밀어놓은 채 멈춰버려서 문제라는 거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은 전부

차치하더라도, 자살하는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는 게 아니라 결국 훈계하고 바로잡는데 성급하게 몰두하고

있어 보인다는 게 문제라는 거다. 감독에게 묻고 싶었던 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10대의 사망원인 수위를

다투는 게 자살인데, 그렇게 자살을 택하는 아이들이 당신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위로를 받을 거 같냐고.


그렇지만 그는,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어릴 때와는 달리 디지털 매체에 친숙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부럽다고, 그런데 자살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자신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

일찌감치 이야기했다. 자살도 아니고 죽음에 대해서조차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살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고 영화를 만들어? 10대라고 얕보는 건가 지금. 답은 바라지도 않지만, 최소한

말하기 전에 먼저 많이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 서울국제가족영화제, CGV송파.

잔뜩 지친 채 버스 좌석에 몸을 얹어놓고서 잠시 심령이 창밖을 부유하던 그때...문득 전화기가 온몸으로 울음을

울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

다짜고짜 달려드는 그 목소리는 껌처럼 늘어진 채 저어기 어딘가쯤 철푸덕 널부러져있던 내 의식을 황급히 유체로

복귀시켰고. 난 여전히 술에 취한 듯...혹은 복화술을 시험하듯...내 입술이 어디서부터 말려올라가고 혀가 어디에

위치하며 어떻게 잇몸을 쳐올리는지 하나하나 점검하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돌아올 길 찾을라고 아침에 옷에다가 밥풀을 잔뜩 묻힌채 집을 나섰어...하나하나 살금살금 뜯어가며, 길가다

왠지 맘에 드는 사람들 이마빡에 666 바코드 새기듯 하나씩 납작하게, 동그랗게 붙혀놨었지..풍경이 갑자기

겹쳐지면서, 내가 지금 마녀가 들끓는 숲속에 버려졌다는 그 화급함...떨림...그런 느낌이 내 폐에 가스처럼

스며왔어. 무언가 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무언가 내게 따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무언가 내게 이것이

현실임을 항변하고 있었는데...그 뭔지 모를 상실감이 차오르면서 왠지 이제 더이상 세상은 당장 방금 전까지의

살아있는 세계랑은 달라졌다는 느낌.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에 나왔던 풍경처럼 두터운 벽지에 발린 세계가 2차원처럼 내 앞에서 철푸덕 누워버릴 거

같은 느낌. 아...헨델은 그레텔의 손을 절대 못 놓았겠구나, 다른 한 손으로 잡은 빵은 아마도-분명히-이빨로

물어뜯어 길바닥에 흩뿌려 놓았겠구나...손을 놓치면, 손을 놓으면, 숲의 나무가 전부다 누워버리거나 혹은 계란빛

모래로 가득차 사막으로 가라앉는 걸 보고 말았겠지...깨어진 공간틈으로. 마녀가 등 뒤에서 목덜미를 깨물듯한

조바심으로, 나무가 금세라도 뿌리를 뒤틀며 윈드밀을 선보일 듯한 위화감으로 가득 차버린 듯해서,


눈알을 디룩이며 겁먹은 채 바라보는 세상에는 온통 내가 정성껏 붙여놓은 밥풀떼기들을, 헨젤이 이빨로 왕왕

물어뜯었을 빵 부스러기들을 소멸시켜버리는 녀석들이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그게 세발달린 까마귀가 되었건,

혹은 발톱사이에도 털이난 붉은 낙타가 되었건, 결국 햇볕에 바래 까매지고 말 파랑새가 되었건.

그래서 차는 달리는데 내 몸은 의자에 얹혀 있었고, 의식은 아마도 그림자를 떼어내고야 갈수있다는 그 곳에서

야위고 있었다는 걸...현실과 현실과 현실과 현실.


잠시동안 말이 없던 전화기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 지금 거기 어디야? 와타나베, 거기 어디야? 어디야? 어디야?

미도리는 녹색이란 뜻이지. 안녕 녹색, 안녕 헐크..안녕 식물성플랑크톤, 안녕 엽록소. 전화기가 녹아내리더니

내 혈관을 타고 심장을 삼키려 달겨들기 시작해서...난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잔뜩 움켜쥐고 그놈을 막아야만

했지. 격하게 몇번 의자 손잡이에 그녀석을 부딪히고 나서야 다시 그건 내 머리속의 소주병에 들어가 스스로

병뚜껑을 닫고 잠을 청했어. 램프의 요정 바바..이제 소원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


안녕 하루키, 결국 난 노르웨이의 숲으로 돌아왔어. 이토록 성가신 인사말이라니. 내일 아침은 호랑이 버터에

미역을 말아먹어보자구.



#1. 지워진 테입에 덧씌워진 '새롭고 오랜 기억'.
 
제리(잭 블랙)이 사고로 자석인간이 되고 나서 친구 마이크(모스 데프)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의 비디오 테입이

전부 지워진다. 그렇게 아무 내용이나 기억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채 허망한 타이틀과 앙상한 시놉시스만 걸치고

남아있는 테입들이지만, 그들의 필사적이고도 기발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롭지만 익숙한 무엇들을

품게 된다.


옛 영화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묘하게 코믹하고, 또 묘하게 감탄하게 만드는 그들의 새 영화들은, 마치 자신의

실수로던 어떤 이유로던 서둘러-예기치 않게-지워버린 과거의 사랑을 다시금 기를 쓰고 기억하고 각인해낸..

그런 결과물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큰 얼개와 스토리 전개는 비슷하다 해도, 자신의 입맛과 현재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각색되고 힘을 덜 빼고 더 넣은 장면들.


그들의 '새롭고도 낡은' 영화는 대박이 났다. 사랑이 지난 후의 '새롭고도 낡은' 기억 역시 대개 대박이 되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쩜 평생 품을 가슴시린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2. 지워지는 '파사익의 팻츠'에 덧씌워지는 '새롭고 오랜 기억'

비디오 가게 주인 플레처(대니 글로버)는 이 마을, 파사익(Passaic)과 자신의 가게가 있는 건물에 얽힌 '팻츠'란

재즈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감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라곤 마이크와 제리 뿐이었던 듯 하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끈질기게 저항해 보았지만 끝내 일주일 후 건물이 해체되기로 통보를 받은 날, 그는 사실 '팻츠'와 그 건물, 그리고

그 마을을 묶어주던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의 재구성. 신부님, 독실한 교인,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풀어내는 '구라'들이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펑, 소리내어 부정당할 뻔 했던 '팻츠'와의 이야기끈을 더욱 딴딴하고 풍요롭게 비끄러

매어주는 동앗줄이 되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불러낼 만큼 힘있는 '사실'이 된다.


그렇게 가게 주인 플레처가 지워 버리려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야기는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또다시 '새롭고도 낡은' 기억으로 화한다. 그건 더이상 플레처가 말했던 그 내용과도 다르지만, 또 예전과

같이 얄팍하고 의미박약한 이야기도 아니다.



#3. 시간에 씻겨나가는 기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실 'Be Kind, Rewind' 이 영화 코미디라고 분류되어 있다. 그냥 배우들의 재기발랄한 표정과 연기를 즐겨주고,

또 노골적으로 조악한 특수효과, 그렇지만 그 통통 튀는 상상력과 표현력에 탄복하며 살짝 마지막에서 감동해

주면 그만일 영화인데, 괜히 심각한 척 다른 데를 보며 되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카인드 리와인드', 되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까. 비디오 가게에 크게 적혀

있기도 한 이 제목은 그렇지만 괜히 이런저런 다른 생각으로 나를 계속 몰고 간다.

"종종 짜증나고 싫던 기억들, 다시 되감아 조금 더 여유롭고 아름답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만의 기억이라 여겨지던 것, 다시 되감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말입니다...


나만 가슴이 살짝 아프게 본 걸까. 모르겠다.



덧댐. 참, 영화를 다 보고 이 영화 출연진들을 일별하는데 깜짝 놀랬다. 시고니 위버가 나왔었다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