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 문득 내게 이어폰을 뭐 끼고 다니냐고 물었다. 요새 줄창 귀를 틀어막고 다니는 모습을 보인 탓이리라.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뭔가 이런저런 브랜드를 운운하며 아는 척을 한다. 실은 나도 갱장한 음질을 과시하는

뱅앤올룹슨(BANG&OLUFSEN)의 이어폰을 때때로 끼곤 하는데 브랜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한마디도

못하고 집에 돌아와선 브랜드네임부터 확인하고 몇번씩 입안에서 굴려본다. 뱅앤올룹슨뱅앤올룹슨. 이 이어폰에는

가죽 케이스도 있다구.


#2.

누군가 얼마전 내게 추천해줄 만한 음악을 물었다. 아직 장기하를 모르길래 그의 노래, 특히 '아무것도 없잖어',

'별일없이 산다', '나를 받아주오'를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언니네이발관의 '아름다운 것들'을 비롯한 앨범 전곡과

브로콜리너마저의 '보편적인노래'와 '앵콜요청금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스끼다시내인생'은 가사가 너무

시니컬하니 조심하고..까지 줄줄줄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출퇴근할 때는 부러 클래식을 듣고 있다.

마음이 너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재즈를 요새 피하는 이유기도 하다.


#3.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어언 반년이 넘었다. 목요일 점심시간마다 밥을 마다하고 연습실로 달려가는 내

뒷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말한다. 참..애쓴다.(고작 그런 식으로 뭔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한다며

자기연민에 빠진 것은 아니다.) 금속이 번쩍대는 악기지만, 엄연히 목관악기에 속하는 색소폰. 입술의 미묘한

움직임과 모양에 따라, 그리고 숨의 결과 세기에 따라, 혀의 위치와 움직임과 강도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는 사실은

여전히 경이롭다. 이토록 민감한 악기라니. 그치만 '사람'이라 불리는 백인백색의 생명체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색소폰은 익숙해지는 중이라 (건방지게도) 말할 수 있어도, '사람'은 모르겠다.


#4.

저녁에 먹었던 갈비찜을 국물까지 싹 먹었으니, 짜게 먹었다. 영화를 보고는 타는 목을 부여잡고 냉큼 집으로

돌아와 맥주부터 한 캔했다. 그러고 나니 와인이 땡겨서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나니, 지금은 또 위스키를 한 잔.

어제 만난 친구한테는, 요새는 혼자 밤에 술 안 먹는다고, 주위에 그런 이야길 하면 알콜중독초기 아니냐 하더라고

말했었다. 아하하하. 뭐랄까...따사로운 게 아니라 뜨끈하고 찐득한 '봄볕'에 맞았더니, 뫼르소처럼 왠지 어디에다

총이라도 쏘고 싶은 느낌이다. 무언가 안에서부터 바짝바짝 말라붙어가고 있다.


#5.

머리를 짧게 깍은 게 저번주 일요일. 빈말이던 아니던, 몇번이나 고등학생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건 문제다,

라고 생각했다. 왜 티비에 나오는 결혼적령기쯤 도달한, 혹은 사회생활에 접어든 사람들은 전부 어른스러운 표정에

어른스러운 외모에 어른스러운 말투를 하지 않던가 말이다. 때로 외관상 '성숙'해보이는-정장을 입지 않은 모습을

상상키 힘들고, 유치하거나 허술한 모습 따위 잘도 숨겼을-남성과 여성에게 이질감이랄까 거리감을 느끼고, 또

그렇다고 대학생같은 스타일과 아마추어같은 분위기에도 딱히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난 어쩌면 피터팬

신드롬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분이 심각하게 지체되어 있는 것 같다. 알콜분해효소도

그 중 하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