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그런 식의 지시였다. 자신이 손보아 놓은 자료를 그대로만 타이핑해달라는 거였다. 급하다 했다.

드문드문 오자도 보이고 문맥이 어색하다 싶은 것도 있었지만, 자신이 다시 정리할 거라 했었으니 그대로 갔다.

자료를 넘기고 한 오분이 지나서, 그는 내게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쓰는 게 고작 단순 작업하라는 건 줄 알아? 머리쓰고 일 안 할 거야?


어쩌라구. 그때는 참 이상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실수 내지 무지에 대해

타인(이라 쓰고 약자라 읽는다)을 힐난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은 듯 하다. 힐난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불명료하고 애매한 지시로 인해 빚어진 혼선의 결과를 두고 상대에게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뭐라고 뒤늦게 해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또 그러겠지. "말대꾸까지 하네 요놈?"

억울한 일 안 당하고 부당한 평가 안 받으려면 미연에 방지하는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우선 이해하지 못한 일,

그림이 제대로 안 그려지는 일을 받으면, 조금 혼자 고민해보다가 바로 모르는 부분을 말하고 조언을 구하는 게

정공법이다. 또 센스없게 첨부터 모르겠다고 뻗대는 건 피하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괜찮은 듯 하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A->B->C->D 이렇게 넘어가면 되는 거 같은데 맞는 건가요? 특히 B->C 부분이요?"

애초 불분명한 지시라면 차라리 지시를 스스로 좀 명료하게 되묻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였다면 이런

식으로. "제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고쳐볼까요?"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어떤 분들의 억울하고 편파적인 평가는 피할 수 없는 똥물인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것들에 넘 스트레스 받지는 말기를. 어차피 직장 들어와서도 받을 거 미리부터 받지는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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