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코엑스 메가박스 M2관, '클라우드 아틀라스' 상영이 끝난 후 한 시간 가까이 배두나와의 무비 토크가 이어졌다.

 

우선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그 이전 워쇼스키 남매(前 형제)의 작품-특히 '매트릭스'-에서 풍기던 철학적인 냄새가 많이

 

희석되고 좀더 호쾌하고 재미있는 즐길거리로 집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배우도 줄줄이 나오는.

 

 

물론 기본적인 베이스는 살아 있다. 수백년에 걸쳐 이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변하지 않는 약자에 대한 억압,

 

'상식'이라 당연시되는 편견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세대 갈등과 나아가 복제 인류(혹은 식용 인류)에 대한 차별까지


뻗어나가는 그럴 듯한 상상력이 그렇고, 생을 거듭하며 나타나는 삶의 궤적이나 연속성이랄까, 그런 불교적 뉘앙스도 그렇다.

 

 

그렇지만 그런 풍부한 은유와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몇 개의 인생이 퍼즐처럼 흩어진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겁거나 어렵지 않고, 기본적으로 스펙타클한 장면과 현란한 효과들에 무게를 실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아바타의 뒤를 잇는다'는 광고 카피라거나,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배두나씨가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인 듯.

 

 

결론. 아바타 때도 사실 규모만 크고 뻑적지근했지 내용은 별 거 없다 생각했었는데,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그렇다.

 

다만, 그 스펙타클함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면 더 재미있을 영화.

 

 

 

p.s. 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2300여년의 서울을 두고, 드문드문 나오는 한글을 두고, 혹은 영화의 여주 배두나를 두고,

 

'한국부심', 애국심을 느끼는 건 정말 뜬금없지 싶다. 그때는 이미 지금과는 국가의 개념도, 민족과 국경의 개념 역시

 

달라졌다는 전제를 깐 미래의 어느 지역일 뿐. "서울이 배경인데 왜 왜색이 느껴지냐" 따위의 불쾌감을 느끼기 전에

 

그저 아주아주 먼 미래에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다룬 픽션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p.s.2. 그나저나, 가져간 Pentax의 77 limited 렌즈로 D열에 앉아서 찍은 사진들인데 역시나, 거리와 조명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이 흔들리고 선예도도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두나는 참 이쁘더라는.

 

그녀는, 아니 그녀의 연기는 '고양이를 부탁해'로부터 '공기인형'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담아두게 된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공기인형' 리뷰는 기네스 병맥주를 사서 마시고는 그 딸랑이는 것의 정체를 찍은 사진을

포스팅할 때까지 미뤄둬야겠다,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잠드는 건

역시 못할 짓이다.


노조미가 처음으로 밟은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발견한 달그락대는 병, 아마도 기네스 병맥주일

그 이미지만으로 이 영화는 응축될 수 있다. 별 다를 거 없는 그 유리병은 조그마한 구슬 하나를

안에 꼭 품고 있다. 고작 조그만 구슬 하나가 더 들어있을 뿐인데, 그 존재로 인해 오히려 유리병

속이 텅 비어있음이 더욱 부각되는 거다.


유리병을 꽉 채우지도 못하고 절겅절겅 소리만 내는 구슬, 사람의 마음이 딱 그렇다. 존재를 꽉

채워주지도 못하면서 그 '결락감'만 더욱 부각시키는, 도무지 쓸모를 모르겠는 '맹장'같은 녀석.


마음이 생긴 공기인형이 바라보는 세상은 누군가가 누군가의 대용품이 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그녀가 늘 스스로 '나는 공기인형,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용품'이라고 아프게 되뇌여왔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처지로부터 비롯한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녀가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마음

아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옛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섹스돌에 그녀 이름을 붙인 채 인형놀이에 열중인 아저씨,

자동응답기에 녹음해둔 자신의 목소리와 대화하며 스스로를 위안 중인 아가씨, 젊은 시절

학교에서 대리교사로 일했던 할아버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여직원을 세탁기 위에서

겁탈하는 사장님..심지어는 공기인형 그녀가 마음을 주려는 남자조차 그녀를 옛 여자친구의

대용품으로 여기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또 나의 과잉한 반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집에 여전히 간직된

옛 여친의 사진들, 옛 여친이 썼던 헬멧의 긁힌 자국, 자신도 공기인형과 비슷하다는 그의 고백,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었다가 하고 싶다며 그가 아무 설명없이 요청해왔던 것들 모두

'공기인형 그녀는 그의 옛 여친 대용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공기인형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다가 하는 건, 그야말로 옛 여친에 대한 그의 욕구를

극적으로, 그리고 지독히도 이기적으로 해소하는 방식 아닐까. 떠난 옛 여친에 대한 복수심

-죽어라죽어라 하는-인지, 반대로 아마도 죽어버린 옛 여친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공기인형을 통해서만이 해소할 수 있는 그의 욕구. 적어도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그걸 왜 하고 싶은데, 라는 그녀의

질문에 우물쭈물 답하지 못했던 그의 흐트러진 눈빛만 봐도 뻔하다.


그녀가, 인간의 마음이란 게 꼭 '대용품 or not'으로 칼처럼 갈리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후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쉽게 분별증류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게 마음이란 걸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미 훌쩍 자라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를 품어줄 만큼, 비록 그녀의 숨으로 그를 살릴

수는 없을지언정, 그녀가 어쩌면 그보다 성숙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아직

미처 인정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공기인형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녀는 그의 마음 속에서 발견해냈다.


한때 그녀의 주인이었던 남자는 말한다. 마음이 없던 때가 좋았어, 그때로 돌아와주지 않을래.

글쎄. 그저 자신의 욕망을 쏟아붓고 돌아서 화장실에서 씻어내면 그만이었던 그때를 말하는 거라면,

당신이 쭈그려앉은 모습은, 섹스돌을 껴안고 말을 거는 모습은, 왜 그리도 불행해 보였던 걸까.


'마음이 생겨난다'는 표현,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다. 어느날 문득 공기인형이 눈을

깜빡이며 몸을 움직이듯, 누군가를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란 건 한순간에 번쩍

생겨난다. 비록 그 마음이 꼭 충만하고 행복한 순간을 약속하는 건 아니라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괴롭고 쓰디쓴 경험만을 불러 오겠지만, 그건 텅빈 유리병들 틈에서 스스로를 구분짓는

'가능성'이자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다.


영화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영화는 밝을 수도, 혹은 지독히도 어두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마도 그게 '마음'이란 녀석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할 거고. 그 녀석은 그저 그림자도 투명한

'공기인형'들 틈에서 잘그랑잘그랑, 나 여기 있다고 소리내고 있을 뿐이다.



방콕의 시장통에 선 레깅스 모델. 굉장히 당당한 체구를 자랑한 채 공중부양 둥둥.

태국의 마네킹 모델은 우리나라의 마네킹들처럼 그렇게 바싹 마르지는 않았나보다.

아니면 아마도 레깅스의 신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바람을 양껏 불어넣은 걸까.

고작 네 개 마네킹을 걸었는데 행거가 꽉 차버렸다. 근데 저걸 보면서 수영장에 끌어안고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난 뭐지.;; 구명용으로도 딱일 거 같은데. 방콕을 휘감고 도는 짜오프라야

강에 누군가 빠지기라도 하면 슬쩍 들고 와 던져주면 되겠다.

대책없이 '공주풍'인 원피스들도 있었다. 강렬한 핑크빛의 원단과 레이스에 휘감긴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같은 공주님들이 우아하게 스마일. 저런 건 입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얼얼한 형광핑크에 눈이 아파 시선을 돌렸다. 그랬더니 눈을 찌르는 직사광선을 비늘처럼

반짝거리며 나부끼는 태국 깃발들, 게다가 만국기 아래에서 번쩍이며 발색하는 형광파랑,

형광핑크, 형광초록의 택시들.

어라..저건, '품바'라고 읽어야 하는 건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는

각설이타령의 품바 그건가. 근데 저 그림은 또 뭐지. PUMBA를 품바, 각설이라 읽어야 하는

건지 아님 뭔가 영어 단어에 뜻이 있는 건지 문득 혼란에 빠져버렸다.

옆골목으로 무작정 꺽고 들어갔다. 허름한 건물 아랫도리로 쭉 늘어서 있는 노랑색 파라솔들이

산뜻하다. 노랑 간판들이 번쩍 서있는 곳에서부터 노랑색 파라솔들을 지나 돌돌돌, 굴러오는

노랑망고 파는 노랑모자 아주머니. 잘 익은 노랑망고도 맛있지만 덜 익은 파랑색 망고도 꽤나

맛있었는데. 그렇게 달지 않고 산뜻해서 목이 마를 때 아작아작 씹어먹으면 딱이었다.

주차를 한 건지 방치를 한 건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차들이 범퍼에 범퍼를 붙인 채

어느 골목 한 켠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뜨끈하게 덥혀진 본넷 위에는 누군가 작업할 때

끼는 목장갑이 몇 짝 나뒹굴고 있었다. 말리려고 한 건지 버리려고 한 건지, 차나 장갑이나.

다시 재활용할 건지 아님 버려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가게 옆 벽면에서 발견한 외계인의 신호. 쭈꾸미별에서 온 듯한 외모,

이미 '아기공룡 둘리'에서 본 적 있는 그 외계인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웃고 있었다.





주말이면 아키하바라의 넓은 대로는 차 대신 코스프레 걸들로 가득 찬다고 그랬었다.

가이드북에 딱 한 줄, 그렇게 나온 정보만 믿었던 게 실수였던 거다. 코스프레걸들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주말에 맞춰 당도했던 아키하바라는 전혀 예상과 다른 곳이었다.


* 알고 보니 코스프레는 하라주쿠에서 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라주쿠 역 근처 다리 옆이

본산이라던가, 아키하바라는 건물 내 실내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는 정도라고.


코스프레걸들이 제각기 빼입고 온 의상과 제스처를 선보여야 할 넓은 대로 위엔 차들이

씽씽거리고 달리고 있었고, 대로변엔 온통 게임샵들 뿐.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기를

직접 체험해보는 사람들이 있고,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흘낏흘낏

구경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게임엔 별로 관심이 없으니 그대로 전부 스킵하고 지나자니 이제 망가샵들이 나타나기 시작.

코스프레걸들을 구경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샵들을 구경하기로 맘을 정하고, 5-6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애니메이션 관련 상품을 파는 그런 건물들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들이야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거지만, 이런 식으로

캐릭터들의 코스튬을 파는 가게들은 신기했다. 유니폼이나 응원복 같은 걸 맞추는 옷가게나

수선집 같기도 하고, 다소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빨강 파랑 원색의 의상들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그 와중에 조금 비싸고 질이 좋아 보이는 옷은 이렇게 마네킹에 입힌 채 디피되어 있었고,

에메랄드색 가발도 가발이지만 머리뒤로 깍지낀 두손의 포즈는 또 뭔가 싶고. 그래도 저런

옷은 옷걸이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인간이 입을 수 있겠다 싶은 느낌.

재질도 그렇고 모양새도 그렇고.

샵마다 조금씩 퀄리티나 분위기가 달랐는데, 내 취향은 (굳이 따지자면) 이런 쪽이랄까.

원색의 빤짝거리는 나이롱 재질의 옷들 말고, 단정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의...ㅋㅋ

굳이 치마가 잔뜩 짧을 필요도 없지 싶은 건, 역시 에반겔리온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인지도.

여전히 에반겔리온의 캐릭터들이 살아있구나 싶어서 기쁘기도 하고, 그 이후 이만한 작품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지 싶어서 아쉽기도 하고.

그러다 발견한 재미난 상품 하나. '원피스'의 캐릭터들이 제법 에로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물건의 용도는 바로 마우스 패드였던 거다. 이미 만화에서부터 풍만하게 그려졌던 그녀들의

가슴을 팔목받침으로 써서 손목의 피로도 줄이고 터널증후군도 방지하겠다는 그 갸륵하고도

참신한 발상이라니. 그 유쾌한 용도를 확인하는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슬쩍 올려보는 '공기인형' 상품. 배두나가 주연했던 영화 '공기인형'에서 첨부터

끝까지 등장했던 녀석들이 이런 실리콘 재질의 물컹이는 것들이었던 거다. 푸시시식, 하며

바람 빠지는 장면과 그 때의 배두나의 눈빛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영화.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그 밖의 건담이니 뭐니 캐릭터가 반영된 여러 성인용품들도 한쪽에서 팔고 있었고, 그것들의

모양새라거나 특징들이 어찌나 변화무쌍하던지 자꾸 눈이 가더라는.

그 밖의 여러 기기묘묘한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차마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어서 그저 두눈으로

마음으로 곱게 담아두고, 잠시 바람쐬러 건물 밖으로 나와 또다시 옆 건물로.

아마 사무실에 저런 넥타이를 하고 가면 당장 출근길에서부터 쏟아지는 눈화살에 맞아

죽어버리지 않을까. 쟤는 뭘까, 하는 의구심과 경계심을 가득 품은 눈화살들.

귀여운 물건들도 많아서, 저런 다양한 이모티콘이 그려진 컵이라거나, USB 포트에 꽂으면

쉼없이 자전거 페달을 젖는 강아지라거나, 질릴 줄 모르고 돌아보게 되는 마력이 있던 곳.

캐릭터를 활용한 음식도 한가득이었다. 이름하야 '메이드 쿠키'. 메이드 복장을 한 꼬마아가씨가

귀여운 저 포장 때문이라도 한번 더 눈이 가게 되는.

웃기면서도 다소 의미심장한, 나이키 로고를 패러디한 NEET 로고. No Job, No Guts.

Just Don't do it이란 절묘한 말장난이 일본의 심각한 청년실업과 고용불안을 시사하는 듯.

그리고, 무엇보다도 맘에 들었던 건, 심지어 저 가슴을 활용한 마우스 패드보다도 훨씬 맘에

들었던 건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캐릭터상품들. 지브리 스튜디오 샵에서도 못 봤던 것 같은

캐릭터상품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 녀석들을 하나씩 수집하는 건 어떨까, 싶다가도 저 만만치 않은 금액에 깜놀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하야오의 아이들.

그리고 마치 우리나라 모든 관광지에서 똑같은 등긁개니 곰방대니 옥돌이니 따위 파는 것처럼,

도쿄의 어느 관광지에서고 팔고 있던 녀석. 복던지는 고양이 스몰사이즈가 우르르.

건물 안에 들어가 샵들을 구경하는 데도 워낙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러저러한 캐릭터상품들도 구경하고, 일본냄새가 물씬한 아이디어상품들도 보고,

그러다가 밝은 햇살 속으로 나오면 또 드문드문 메이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이런

메이드샵 광고지도 나눠주고. 만화캐릭터의 뽀얗고 맑은 피부, 커다랗고 그렁그렁한

눈망울, 여릿한 허리와 가늘고 기다란 다리 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그녀들이

우르르 찍혀 있는 광고지를 요모조모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던 일본의 추억 중 하나.



어제 '공기인형'을 보고 나서부터 기네스 맥주가 무지하게 땡겼었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퇴근하고 나서 장보러 가신다는 부모님을 따라 코스트코로, 농협으로. 코스트코엔 병맥주가 없었고 농협엔

수입맥주라곤 호가든과 버드와이저 뿐이었다. 농협에 수입맥주가 있단 사실에 더 놀랬다.

집앞 편의점도 두군데 들렀다. 한군데에서 드디어 기네스 캔맥주와 조우해서, 분명 다음 편의점에선 짤랑대는

기네스 병맥주를 만날 수 있으리라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웬걸, 아예 기네스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여 다시 처음 편의점으로 돌아가 두 캔 사버렸다. 캔이지만 살짝 달그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져서, 타협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맥주캔 두개를 한 손에 계주 바통처럼 옴쳐쥐고는 내달렸다. 캬~ 소리내어 마시고 싶었다.

꼴꼴꼴...맥주가 흘러나오면서 짙고도 자욱한 안개 덩어리를 만들다간 조금씩 검정 액체와 뽀얀 거품의 형체를

만들어 간다. 진한 커피같이 쌉쌀하면서도 굉장히 부드럽고 매끈한 느낌의 갈색 거품이다.

그리고, 마음. 공기인형 그녀가 백 안에 넣고 방울처럼 흔들어대던 그런 짤랑짤랑 소리가 아니라 조금은 탁성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던 이유다. 캔 속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탈탈 털고 나니 기네스의 마음이 얼핏 나타났다.

이리저리 굴려가며 자세히 살피니 하얀 플라스틱 탁구공같이 생겼다. 세련된 검정색의 중후한 알루미늄 외양

속에 저런 가뿐한 느낌의 플라스틱을 굴리고 있었다니, 다시금 공기인형을 생각한다.


텅 비어있는 속을 채우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그 결락감만 더욱 또렷이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게 마음. 하찮은 플라스틱 한 조각일 뿐인데도, 그게 이렇게 다르다.

무려 "기네스 고유의 맛인 크리미 헤드(부드러운 거품층)을 생성시키"는 능력을 가진 거다. 공기인형에게

마음이란 게 덜컥 생겨버리고 나서는 마냥 쓰잘데기없고 가슴 아픈 일들만 있었던 게 아니듯, 기네스 캔을

덜그럭덜그럭 귀찮게 부딪혀댔던 녀석도 마냥 쓸데없이 굴러다닌 건 아닌 셈이다. (물론 위젯 때문에 기네스는

일단 흔들거려서 흥분하고 나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다. 풍요로운 거품이 팝콘처럼 튀곤 하는 거다.)

마시고 나면 꼭 아쉬워지는 거품. 맥주라곤 마신 적이 없다는 결백함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깔끔이 주걱으로

싹싹 야무지게 닦아낸 것만큼 거품이 한점 남김없이 모조리 내게 흘러들어온다면 참 좋을 텐데. 게다가 기네스,

비싸단 말이다. 편의점에서 무려 캔 하나에 3,500원.

복부 절개를 시술했다. 그녀의 마음이 보고 싶었다. 주둥이에서 흘깃흘깃 비치는 마음조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불끈 힘줄이 선 손가락이 껍데기를 와그작, 찌그러뜨려 버렸더니 거품범벅의 '마음'이 잔뜩 당황한 채

배회하고 있었다.

기네스의 마음을 얻으려면 마법의 성을 지나 숲을 건너..어둠의 동굴 속 멀리멀리 나아가야 한다. 날카로운

알루미늄제 이빨을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달그락달그락 떨고 있는 매끌한 마음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손끝에

감각을 집중한 채 섬세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쥐어도 안 되지만 너무 약하게 쥐어도 안 된다. 너무 많은

손가락들을 들이밀어도 빼내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최소 두 손가락은 집어넣어줘야 한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기네스의 '마음'. 일곱개를 모아서 소원을 빌면 기네스의 신이 나타난다나.




*                                                     *                                                     *

기네스 드래프트. 알콜 4.2%, 원산국은 아일랜드.

안에는 '위젯'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플라스틱공이 들어가서 제멋대로 휘젓고 있어 기네스 흑맥주 특유의

풍성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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