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실감하는 데에는 East Side Gallery과 The Wall Museum을 무엇보다 추천하고 싶지만,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구역을 보려면 베를린 장벽 메모리얼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함직 하다.


앙상하고 얄포름한 콘크리트 장벽의 골간이 되었던 철근만 뾰족하니 남아있는 그 곳에는 과거 이 장벽을 넘기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순간들이 주변 건물 벽화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인근의 불타버린 성당 자리에 새롭게 꾸며진 자연친화적인 공간에서는 이 곳에서 흩뿌려진 피와 희생에 대해 묵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미니멀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듯 했다.



어느덧 3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역사, 뜯어낸 장벽을 둘러싼 울창한 초록빛 식물들의 생명력이 왕성하다.


메모리얼에 들어가면 실제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의 이탈과 움직임을 막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내부까지 둘러보진 못했고 그저 바깥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작지 않은 강, 슈프레(Spree) 강변으로는 과거 독일 분단시기의 유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독일이 동서로 나뉘고, 동독 내에 소재하던 수도 베를린 역시 동서로 나뉘었던 그 시절, 체제 경쟁이 심화하면서 동독은 서베를린의 구획을 온통 장벽으로 둘러싸버리기로 한 것. 그게 베를린 장벽의 초기 모습이었다. 물론 '클래시 오브 클랜'같은 게임을 보면 알 수 있듯 장벽이 점차 업그레이드되면서 내구성도 단단해지고 강화되는 것처럼, 이 장벽도 점점 최신의 기술적 진보를 더해 걷잡을 수 없이 삼엄해졌고.

20여 킬로미터에 이르던 그 장벽이 일부 구간, 약 2킬로미터 정도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이곳 East Side Gallery다. 말그대로 거리의 갤러리, 장벽을 미술관 전시품처럼 보전해 놓은 곳. 


이른 아침에 도착해서 한번 따라가보기로 했는데, 상상보다 충격적이었다. 장벽 자체는 이렇게 얇고 허름했구나 싶어서.


보전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듯, 여기 보이는 그래피티들은 전부다 최근의 것들. 그러니까 '훼손'이랄 수 있겠다.


1961년 이래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1989년까지 장벽을 넘으려다 숨진 사람들의 공식적인 숫자는 163명이라고 한다. 그 숫자만큼 해당 년도에 표기해 둔 이 작품은, 그렇지만 공식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탈주 시도자와 은폐된 죽음들을 놓치고 있을 거다.


누군가 가져다둔 화환. 아마도 여전히 그 상흔을 생생히 갖고 있는 누군가겠지.


이렇게 장벽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둔 것처럼 묘사해둔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작은 구멍 하나로부터 장벽이 무너지리라는 기대 혹은 다짐.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끝나는 지점에 '장벽 박물관(The Wall Museum)'이 있다는 표지가 곳곳의 아스팔트 바닥에.


그렇지만, 동방의 여전한 분단국가에서 온 이가 새삼 감회에 젖기엔 이미 독일 통일은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제 통일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마구 그려댄 그래피티로 장벽은 훼손되고, 그 코앞 전봇대나 가로등에는 온통 난삽한 광고 뿐이다. 이미 27년전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이미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장벽이 던졌던 문제의식, 혹은 장벽을 남기며 사람들이 남기고 싶었을 자유라느니 정의라느니, 그런 가치들은 이제 얼마나 싱싱하게 남아있을까. 아니면 이들은 이미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젖히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느라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부러운 일이다.


장벽 너머 보이는 슈프레강, 이 작은 강은 대체로 동독의 영역에 속한 채 군사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에 아이가 빠졌을 때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칫 상대편의 총격을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인데, 이후 인도적인 조치를 취할 때에는 협조하도록 원칙을 세웠다고.


자꾸 한반도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5차 핵실험이 벌어지고, 남북한 양측의 '최고존엄'이 전쟁을 부추기는 언어를 주고 받는 상황이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진, 동독과 구소련 정치지도자 간의 유착관계를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버전으로 치면, 글쎄, 두 명은 누구여야 하려나.


The Wall Museum 내부, 생각보다 전시물도 많고, 장벽이 생긴 이래 철거되기까지의 역사에 대한 시청각 자료가 엄청 많아서 둘러보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사진은 처음 장벽을 쌓아올릴 때 쓰였던 허름하고 기초적인 장비들.


그리고 최초의 기초적인 망루. 슈프레강 넘어 보이는 건 서베를린.


다리 중간도 이렇게 엉성하고 속이 빈 벽돌블럭으로 담을 쌓고.


그러다가 1989년, 외부 세력의 개입을 적절히 차단해 가면서, 또 적절히 활용해 가면서 서독과 동독은 결국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맞이한다. 박물관 내 영상 자료들을 따라가다보면 그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질 지경이다.


부럽기도 하고, 천운이었다 싶기도 하고, 또 한국과는 굉장히 상황이 달랐다 싶기도 하고. 일단 베를린이 엄청 어색하게 동독 한복판에 박혀 있었던 데다가 동독과 서독간에 전쟁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도 없었으니. 한국은, 그리고 북한은 독일과 같이 분단 체제를 역사로 되돌릴 수 있을까.




 

경주 대릉원에 도착했을 즈음 기대와는 달리 겨울비는 한창 기세를 올리던 중이었다.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 너머 첨성대와 봉긋한 선대의 능들이 찢겨지는 게 아닌가 싶도록 수천수만의 빗방울이 드세던 그 때.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이 무겁게 가라앉은 경주만큼이나 수백년을 산다는 천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 땅을 누르고 있는 건 천년의 시간만이 아니었다.

경주 대릉원 내의 천마총을 둘러보다가, 무덤 앞에 놓인 까만색 석비가 눈에 띄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신라의 통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기리 보존하여 위하여' 천마총을 발굴, 복원했단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정권을 탈취하던 당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열세를 절감했다가

이제 조금씩 경제적 우위를 선점하고 베트남전 파병 등을 통해 군사적 우위에 대한 자신감도 보인

영향인 걸까. '통일'이라는 이슈를 자신감있게 제기하던 그쯤, 삼국시대 신라는 일종의 롤모델이거나

동일시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평화가 아니라 통일 그 자체, 신라에 의한, 그리고 남한에 의한

통일이 강조되던 시기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는 천마총에서 그치는 건 아니었다. 부처가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신성한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 '화랑교육원'이니 '통일전'이니 그런 식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거창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던 거다. 박정희가 권좌에 있던 시절, 민족문화를 중시한다는 식으로 뭉뚱그려지는

이면에는 그렇게 신라 중심의 통일, 군인정신의 모범으로 이미지화된 '화랑'에 대한 강조 따위가

숨어있기도 했던 것.


신라의 왕족들이 남산을 신성한 곳으로 꾸며내고, 부처와 천심을 업고 다른 나라들에 대한

통일, 혹은 지배 욕망을 정당화했듯이 박정희 역시 경주 남산과 신라의 고총들에 기대어 그런

정당화를 꾀했던 건 아닐까. 남북간의 군비 경쟁과 체제 경쟁에서 이겼다는 자신감과 함께.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마음자리 곁에서 멀리 떠나있는 가족, 밥벌이용 밥통 이외엔 공유하지 않는 직장 동료들만 있다면 더더욱.


한규(송강호)가 그렇다.

그에게는 '빨갱이 사냥'하는 국정원 대공부서 일이나 '동남아 신부 사냥'하는 흥신소 일이나 별반 '밥통' 이외의

의미는 담기지 않았다. '국민들을 발뻗고 자게 한다느니' 따위의 말이야,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준다'는 명분과

똑같이 속편한 자기암시거나 위무일 뿐 그저 그는 딸내미 집 한 채 사줄 돈만 모을 수 있으면 족하다.


그런 한규라지만, 울리지도 않은 전화에 대고 살갑게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다. 그는 결국, 외롭다.


지원(강동원)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원에서 정리해고당한 한규처럼, 지원 역시 작전 실패로 배신의 낙인을 찍힌 채 '조국'으로부터 내쳐진다.

사실 '장군님'에 대한 그의 사상과 정조가 얼마나 투철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를 움직이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곳, 조국.


멀리 떨어진 가족,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6년여 시간을 기다렸지만 참 쉽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란 때론, 의심스럽고 위험해보이기만 하는 낯선 남자보다 못해 보일 때도 있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기대어 선다. 사람 둘이 서로 기대어 선 사람人의 형상에 걸맞도록, 그렇게 외로움을 삭인다.

가족으로부터, 조직으로부터, 남과 북 두 강력한 국가로부터 내쳐졌거나 강제적으로 떨어져나간 채

외롭던 그들이다. (국가 자체가 거대한 병영인 북한에서 떨어져 나간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정원이라는

국가 핵심조직에서 튕겨나간 한규가 서울이 아닌 지방을 전전하며 '외국인'신부들을 잡는다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까.)


쉽지 않았다. 한 명은 명색이 전직 국정원 직원-게다가 '간첩신고'의 의무와 상금 수령의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인 데다가, 다른 한 명은 최고도의 살상기술을 익혔을 남파 간첩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을

반공회로와 반자본주의 적개심과 공포심은 어찌 다독거린다 하더라도, 상황과 조직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한은 북한의 핵을 부르고, 북한은 핵으로 으름장을 놓고, 폐쇄 회로 속에서 꼬리를 무는 남북, 북남 두 국가의

대치 상황과 함께 '맥'장군님과 '김'장군님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득달같은 기세는 언제든 파국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의리'는 통일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외로움이 해냈다. 인간이 외롭단 건, 때로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나보다. 빨갱이를 잡고

외국인신부에 수갑채우던 그가 '인간적으로' 바뀌었고, 웃음조차 사치인 양 냉막하고 까칠하던 그가 어느새

뜨거워졌다. 그런 그들의 관계가 굉장히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마침 두 사람 다 외롭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 그런 드라마, 영화가 마치고 나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p.s. 굉장한 스포일러 하나,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이 척박한 세상에 그들 둘만이라도 해피해질 수 있다니,

가슴이 더 훈훈해졌던 이유 중 하나. 둘 중 하나라도 죽었으면 시니컬함이 더욱 심해졌을지도.


p.s.2. 그런 의미의 애국심이면 그래도 참아주고 인정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지원이 그의 나라,

북한에 쏟는 헌신과 애정이 그렇듯,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게 각별한 사람들이 있는 땅이어서 사랑하고 아끼는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 그건 다른 곳과의 경쟁심이나 우월감을 수반하지 않는 '나라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번주 월요일 오후, 코엑스 3층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진격, 조그마한 초대장

하나를 들고 차려입은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 전우회 따위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들까지

숨넘어갈 만큼 잰 걸음으로 3층 행사장을 찾았다.

얼마나 바글댔냐 하면, 코엑스 1층부터 3층까지 전관에 그들의 숨가쁜 뜀박질 소리가 메아리쳤고, 그뒤를 따라

질서유지를 위해, 그리고 연사로 초청된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안전을 위해 의경들이 떼를 지어 몰려갔었다.

정신사나운 호루라기 소리와 구둣발 소리, 그리고 쉼없이 3층 행사장이 어디냐고, 어디에 가면 라면냄비를

받을 수 있냐고.


심지어 그들은 일층 행사장에서 커피브레이크를 가지며 마주보고 담소를 나누던 외빈들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며 "이건 뭐야~"할 정도로 용감무쌍했다. 이럴 수가. 이토록 비문명적인 인간들이라니.

그나저나, 엥? 라면냄비?? 오후3시인가 시작된다던 행사에 수천명의 사람이 몰렸다더니. 무슨 행사인가 싶어서

시간날 때 올라가 봤댔다. 민주평화통일? 진보쪽 단체인 거 같으면서도 묘하게 보수색채가 진한 듯 보이는

이름이 슬쩍 호기심을 간질였다. 근데 평화통일 어쩌구 행사에 왠 라면냄비 Seeker들인가 말이다.

안내데스크 뒤쪽 가득히 쌓인 라면냄비를 둘러싸고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전쟁터 한가운데서

부상병이 물한모금을 청하는 심정으로 주위 '어르신'들께 물었다. 이건 대체 뭡니까. 라면냄비는 어떻게 하면

받는 겁니까. 사정인즉슨 이랬다. '북괴를 몰아내는 통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는 '통일무지개회원카드'를

작성해서 회원신청을 하고 나면 입장이 가능하고, 입장이 가능한 사람에게만 무려, '라면냄비'씩이나 제공이

된다는 거다. 다소 소략하게 말하자면, 회원가입신청과 라면냄비의 물물교환이다.

그래서 신청서를 내고 라면냄비를 받는 창구는 이토록 혼잡스러운 거다. 초대권을 흔들며 왜 더 안 주냐고

항의하는 어르신, 양손에 라면냄비가 담긴 종이백을 네다섯개씩 주렁주렁 꿰고 가는 어르신.

한쪽에는 알맹이가 쏙 빠진 채 껍데기만 남은 종이백이 수북하다. 파란색이다.

"핵무기 개발로 세계와 대결하면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2,400만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신음하는

참담한 현실", "초당적이고 범국민적인 국민통합을 이루어 정부의 대북정책에 호응하는 지지층을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식의 관계 고위인사들 인사말을 보아도 알 수 있듯, 파란색이다.

이런 어이없는 대북관, 게다가 황장엽의 어이없는 통일관. 몇년전 황장엽이 주최하는 소규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때 주체철학의 창시자였던 그는, 그의 '인간중심철학'이 김일성에 의해 일인독재를 정당화하는

'주체사상'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땅에서의 지분을 받았지만 남겨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인간적으로 동정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북한에 대한 매파적이고

극렬한-결과적으로 한국 보수반동과 통하는-목소리를 더하는 것은 할 짓이 아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머리위에

있는 한국은 한국만의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느니 어떻다느니, 정부의 동원능력을 확대하고 시민적

공간과 가치를 훼손하는, 그런 어이없는 민주주의론까지 운위하고 있는 건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게다가 이런 자리를 위해 화환을 보내고, 사람들을 동원하고, '라면냄비' 몇천개를 사라고 돈을 내어주는

사람들은 더더욱 어이가 없다. 회원이 되면 낭독하게 될 '선서문'에 보면 적나라한 그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정부의 대북정책 공감대 확산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

솔직히 이런 양반도 마찬가지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김병찬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있다. 뭐, "대통령과의

대화"에 나가서 대통령 팬이니 어쩌니, 내복이 어쩌구 저쩌구 박자맞춰주는 탤런트니 아나운서들도 있으니

이런 조그마한 데서 마이크 잡는게 뭐가 어떠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사실 나는 애 많이 낳자거나 다시 한번

같이 뛰자거나 허리띠 졸라매자는 공익광고에 목소리 빌려주는 사람들도 일말의 가책은 있지않을까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런 관제 행사가 먹히는 상황이 많은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관에서 얼굴마담 내세워 사람들

동원하고 여론몰이하려 들고, 그래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게 별 거 아닌 쭉정이 단체에의

가입신청서를 써주는 조그마한 수고가 되었건, 별 거 아닌 '라면냄비' 따위 일용품이 되었건, 한 사람의 그런

호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런 조그마한 호응이 모여 지금같이 괴물같은 시대를 만들어낸 거 아닌가. 그래놓고

뒤로 돌아 정부 욕하고, (돈/지식) 가진자 욕하고 그래봐야 자기 얼굴에 침뱉기다.


하나더, 굳이 말하자면 '어르신' 문제다. 우리 사회에 대체 존경, 최소한 존중받을 만큼의 어르신이란 얼마나

될까. 그들은 식민시대라는 시대적 굴레에 대한 일정한 책임,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대한 일정한 책임, 이후

미쳐돌아가던 반공이데올로기와 발전이데올로기의 총화라고 해도 심한 건 아니지 싶은데, 그런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겸손한 '어르신'은 찾기가 힘들다. 생물학적으로 나이만 먹었을 뿐.

얼마전 '친일인명사전'에 맞서 '친북인명사전'을 발간했다는 어떤 뉴라이트계열 단체의 기자회견장에서

"왜 김대중, 노무현이 포함되지 않냐"라면서 니놈들도 빨갱이다, 라고 하며 급기야 서로 빨갱이 삿대질을 하던

사람들, 오바마 방한때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던 사람들, 어르신들이다. 이미 사고방식이 굳을대로

굳어버려 더이상 개전의 여지조차 없는, 그래서 약간 관조적이랄까, 역사적이랄까 그런 먼 시각에서 보자면

사라지는 것 밖에 답이 없는 존재들 아닐까 싶다. 반면교사로서 훌륭한 귀감이기도 하지만.




사람 두명 덮고잘만한 사이즈의 깃발이 펄럭이는 걸 보면, 더구나 피처럼 붉은색의 붓글씨라면 가슴이 뛴다.

깃발을 볼 때마다 난 가슴이 뛰고, 또 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1학년 때 곽모군과 표모군이랑,

전경이 겹겹 에워싼 학교를 넘보다가 담을 넘어 기어코 가보았던 국보법 문화제. 그 이후로 엔엘 애들 문화제는

참 오랜만이었다. 마임보단 전투문예가 좋았던 나.


연세대의 교정에는 자주와 민족이라는 단어들이 낙엽처럼 뿌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발로 툭툭 찰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학교에서 아예 외부인사의 출입을 금하고 나선 분위기 탓도, 노무현의 '무능한 진보'라는 이미지 탓도

아니었다. 그냥, 으레 그런 시위 전야의 분위기. 더군다나 35도가 넘는다는 햇볕아래였으니.


문화제를 보면서 대체 한총련이 좌파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물론 분단국가인 한국의 지형

아래에선, 통일을 말하는 것 자체가 진보성을 일정하게 담보할 수 있겠지만, '통일과 자주'라는 성긴

그물망으로는 빠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미 '지배 진영'의 수사로 포섭되어 버린 '민족 자주'라는 이야기의

한계도 있고. 이미 그들의 유인물에는, "미사일 기술을 원천기술로 해서 남북한 양국이 과학강국으로 발전하자"

라거나, "통일이 되면 북한의 값싼 노동력으로 국가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된다"등의 위험한 이야기들이 버젓이

실려있다. 민족의 딸로 성화된 효순, 미선의 여성성,그리고 부끄러운 민족의 치부라서일까, 거기서 배제되기

십상이던 성매매 여성들의 죽음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우리 '민족'처럼 순박하고 착하지 않아서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다. 피해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정화하고 순결한 양 치장하고 싶은거 같다. 우리나라가 "분단의 족쇄를

끊고, 미제의 얼룩을 깨끗이 씻어내면"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찬 세계가 도래한다는 건가. '양키'와 '원숭이'와

'뙤놈'이 우리보다 센게 문제라는 건가. 그물망을 보다 섬세하게 짜보려는 노력 따위 보이지도 않았다.

반미투쟁!이라는 꼬리말이 무색하게, 영어단어들이 무딘 혀끝에서 적잖게 튀어나왔다. 문화제에서 사장과

노동자는 오로지 통일을 위해 어깨를 걸었으며, 통일은 무조건 되야한다는 말에서 공감을 요구했다.


결국, 한총련 혹은 민족자주 진영은...멘탈리티로 뭉쳐있을 뿐인 거 같다. 민족에 대한 센티멘탈리즘과

전통사회에의 향수. 미국을 최종 심급의 거악으로 규정짓는 순간 세상사는 단순해진다. 어찌보면 이미 한총련은

비전이 희미해지고 있다. 통일 이후에..그들은 어떤 비판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까. 통일이 마치 세상 끝날인

것처럼 절대적으로 봉헌된 마당에. 노무현을 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재고 있다. '민족'과 '자주'는

더이상 비주류가 아니다. 센치한 녀석들.


통일을 말하고, 민족을 운운하는 건, '민족정론'을 자처하는 우파 보수 언론들이 해야 할 거 아닌가. 왜 이땅에선

그런 것들이 빨갱이로 몰려 '좌파'로 매도당하지? 좌우가 상대적인 개념이라면, 대체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좌파'라고 칭하는 진영은 어떻게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는 걸까.



#. 왜 동아일보는 노무현을 '좌파정부'라고 까대냐는 내 질문에 선배기자가 했던 말. 원래 좌우는 상대적인 거야.

치사하고 교활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좌'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불신감을 심어놓은 왼손이 한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 이거지.

#. 다 쓰고 나서 봤더니, 난 어쩜 '좌'라는 단어에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센치하게.ㅋㅋ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