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를 지나 이집트, 꽤나 세속화된 아랍국 중 하나인지라 바로 참이슬로 입을 헹궈주시는 센스. 앞에는

이집트 전통 맥주, 사카라. 사카라는 이집트의 지명인데, 가자 피라밋 이전의 초기 형태 피라밋 무리가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5년만에 돌아온 이집트 카이로의 이 '빌어먹을' 교통대란. 어찌나 반갑던지. 사방에서 울려대는 클랙션과

브레이크 파열음, 어디선가 들리는 아잔 소리까지.

낮에 봤으면 분명 여기저기 우그러진 차들이 번연히 드러났을 텐데, 어둠의 장막 아래 그럭저럭 눈감아줬다.

어쩌다 보니 숙소 예약에 혼선이 빚어져, 항의 끝에 얻어낸 펜트하우스급 슈퍼디럭스 룸. 예전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묵고 갔다는 방과 똑같은 사이즈의 방이란다. 재빨리 차지하고 앉은 사무용 책장.

원래 예약했던 방은 작은 트윈룸이었는데, 여긴 방이 네 개, 화장실이 세 개짜리였던가.

푹신한 쇼파가 사방에 뒹구는 너른 거실하며, '빠'로 쓸 공간도 있었던, 그야말로 호사로운 객실.

큰 집에선 길을 잃을 수도 있다더니 딱 그짝이다. 요리조리 휘어지는 통로, 그 끝에서 마주치는 사방의 문짝들.

굉장히 넓었던 방, 저기서 혼자 잤다. 어떻게 해야 저 큰 침대를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더럽히고 잘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열심히 뒹굴고 헤집고 다녔다.

또 다른 방, 방은 다섯여섯 개씩이나 되는데 사람이 둘이니,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결국 이박하는 동안 얼굴

마주칠 일도, 화장실서 만날 일도 없이 혼자인 양 밤을 보냈다.

그리고 행사장. 호텔마다 고유하게 내세운 색감과 분위기가 참 다르다. 여긴 좀 화사한 톤의, 불그스레한 색감.




이번 출장에서도 사진은 여지없이 찍었댔다. 두바이의 유명한 7성급호텔 버즈 알아랍,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아직 공사중인) 버즈 두바이 등등 두바이의 풍경들. 사우디 리야드의 밤거리, 드문드문 땡땡이치며

산책나갔던 시내 골목길에 쿠웨이트의 쇼핑몰까지. 왠지 사진을 올리려는 의욕이 안 생긴다. 물론 왠지 10월

내내 바빴고 바쁜 탓도 있겠지만.


작년에 이미 갔던 호텔에 고대로 묵는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사실 별 기대가 없었고, 이번 출장은 사실 오로지

이집트 카이로에 다시 간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드디어) 디카를 들고 간다는 것, 5년만에 피라밋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 짧은 삶에서 뭔가 갈치 토막치듯 분기점을 나눠보라면

2004년 그때의 여행은 두세번째 순서쯤 되지 않을까 싶다. '먹고 살 고민' 따위, '먹고 살 궁리' 따위 '굴하지

않던' 철부지에서 '먹고 살 고민'씩이나 하는 철부지로 변신한 게.


마침 이집트에서 카메라를 누군가에게 빼앗겨서만은 아니었다. 현지인들과 함께 부대끼고 암내맡으며, 하루에

2리터들이 물병을 두개씩 마시며 마주했던 카이로의 거리들, 그리고 피라밋과는 너무 달랐다. 반듯한 정장에

(무거워서 고리가 휘어버린) 노트북 가방을 척 걸치고, 45인승 고속버스 차창 밖에서 넘쳐들어온 햇볕 한 줌에

아 뜨거라 하며 큰길로만 다녔다. 군자는 대로행이라던가. 흥. 카이로는, 길거리는 그대로였다. 사천년을

멀쩡했던 피라밋도 고작 오년만에 달라졌을리 없다. 내가 달라졌다.


그다지 맘에 썩 들지는 않았다. 출장과 여행의 차이일 수도, '먹고 살 고민' 따위의 유무 차이일 수도, 그저

2004년 8월과 2009년 10월의 온도 차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단순히 눈높이의 차이였을지 모른다. 피라밋을

굽어보게 만드는 45인승 고속버스라니. 왠지 순례하듯 그곳을 우러렀던 과거의 내게 모멸감을 안겼던 걸지도
 
모른다. 피라밋은, 카이로는, 사람 사는 곳은 그렇게 건방지게 내려보며 점점이 둘러보는 게 아닌데. 굽어보아

미안해. 내려보아 미안해요, 라고, 날 완전한 이방인으로 격리시켜 버린 양철캔 안에서 외치고 싶었다.


얄쌍하고 길쭉하며 튼튼해 보이는 고속버스들이 피라밋 앞 주차장을 쉼없이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걸으며 피라밋의 위용과 이질감에 숨막혀했던 바로 그 오르막길 역시, 버스의 탄탄한

모터는 잘도 부릉거리며 한숨에 정복해버렸다. 이건 강간이다.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5분만에 피라밋

코앞까지 내달렸다가, 다시 5분만에 피라밋 세 기가 배경으로 쭈그러든 포스트로 내달려 사진을 남기고 휑하니

가버렸다. 왜이리 덥냐고, 왜이리 사람이 많냐고, 이집트 삐끼들 못살겠다고.


어떤 식의 여행이 되어야 한다, 는 건 아니다. 꼭 땀 삐질삐질 흘리고 빡세야 여행이란 것도 아니다. 그저 난,

내가 풍경과 풍경 사이에 이전에 밟았던 그 울퉁불퉁하고 냄새나고 미칠듯 덥던 길이 사라지고 순간이동하듯

뿅뽕 튀어나오는 풍경들만 남아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전희도 없이 덜컥 달려나간 꼴. 그런 식의 폭력적인

풍경의 소환. 그건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지 않을까. 이미 닳고 닳아버린 이미지라 해도 좀더 조심스럽게,

세심하게 접근하면 조금은 더 신선하고 깊이 느낄 수 있을 텐데. 


그 야만스럽고 난폭한 고속버스의 행렬이 피라밋과 '관광지'로서의 카이로를 현지 사람들로부터 뺏어들고

희롱하는 것처럼 보여 수치스러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낙타에 오른 이집션들의 눈높이가 차창에

바싹 붙어앉은 내 눈높이와 같았다는 사실. 이 녀석들, 마리당 몸값이 일억원이라더니 몸값 제대로 하는구나.

왠지 거대 고속버스들이 지분거리며 들고 나는 피라밋 앞 주차장에서 이집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게 그

낙타들 같아서 안쓰럽고, 대견하고 그랬다.


다시 한번 가고 싶다. 45인승 삐까뻔쩍한 고속버스 말고, 소금기 얼룩진 티쪼가리 입고 시커멓게 그을린 채,

박박 기듯이 걸으며 걷고 뛰고, 그러고 싶다. 뭔가 거기서부터 나의 1984년과 1Q84년이 갈라져버렸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그저 훼손되고 벗겨내어진 내 기억속 그 공간의 아우라를 다시 조심조심

덮어씌워주고 싶어서인지도. 어쩌면 그 모든 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와 같을지

모른다.




여행 정보

주요 여행지

○ 카이로(Cairo)

- 이집트의 수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로 오랜 역사와 다양한 볼거리로 세계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로 손꼽힘.

- 이집트 박물관 : 다수의 최고수준 이집트 고고학적 유물 보유.

- 카이로 타워 : 게지라선 남쪽의 나일강변에 위치.

- 모하메드 알리 사원 : 화려한 내부 장식과 거대한 돔이 특징.

○ 기자(Gizeh)

- 이집트 북동부에 위치한 카이로 교외 도시.

- 쿠푸왕 피라미드, 카프레왕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이 위치함.

○ 룩소르(Luxor)

- 고대 이집트 신 왕국 시대 수도 테베의 남쪽 교외에 위치함.

- 왕가의 계곡 :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왕릉이 집중된 좁고 긴 골짜기로 왕들의 무덤 62개소가 발굴됨.

- 투탕카멘의 묘 : 세계 고고학적 발굴 중 가장 위대한 발견의 하나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함.

- 카르나크 : 이집트 상부 나일강 동쪽 강가에 있는 신전유적지.

- 라메세움 : 이집트 람세스 2세의 신전.

비자

○ 여행자의 경우 이집트 도착 시 공항 또는 항구에서 별도 구비서류 없이 30일 유효 비자를 받을 수 있으며, 수수료는 미화 15불임. 또한 사전에 주한 이집트 대사관에서도 받을 수 있음.(60불 상당)

출입국 심사

○ 여행 중 여권의 신원정보란(사진부착과 인적사항이 기록된 페이 지)이 훼손될 경우 입출국시 입출국 심사관으로부터 위․변조 여 권으로 오인 받아 입출국이 불허되거나, 대사관과의 확인과정에서 장시간 소요되는 등 어려움을 당할 수 있음. 따라서 여행 전에는 반드시 여권의 훼손여부를 확인하고 훼손된 경우 새 여권을 발급 받아야 함.

- 이집트 여행 중 부득이하게 훼손되었을 경우 사전에 대사관을 방 문하여 영사 서한을 발급받아 이집트 출국시 제출하거나 여행증명서를 발급받는 것이 안전함.

- 훼손 여권을 소지한 상태에서 이집트 여행 후 터키 등 제3국으로 입국하고자 할 경우, 그 곳 공항 당국에 의해 입국이 불허될 수도 있음.

비즈니스 참고사항

비즈니스 에티켓

○ 상대방을 부를 때는 존칭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고, 닥터, 엔지니어 의 호칭을 붙이고 전직 관리출신이라면 퇴직 당시 직명을 불러주 면 좋아함. 경제적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하지만 인간관계나 정서 적인 면도 비즈니스 진행에 많은 영향을 주므로 가급적 상대방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에티켓이나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좋음.

○ 약속잡기

- 일반적으로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편임. 통상 약속시간 보다 30 분에서 1시간 정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임.

- 문서보다는 전화를 통한 약속을 하는 편이고 확실히 약속을 정해 야 하는 경우, 이메일이나 전화보다는 팩스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음.

○ 식사

- 인구의 90%가 무슬림이므로 돼지고기, 술 및 이슬람식으로 도살 되지 않은 고기는 먹지 않음. 양고기 전문점이나 고급 음식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생선요리 전문점이 식사하기 무난한 장소임.

- 이집트인은 한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며 일부 독실한 무슬림의 경우 술을 판매하는 음식점에 가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이슬람식 고급 음식점이 무난함.

- 식사할 때 왼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기본 에티켓임.

○ 선물

- 이집트인들은 선물을 매우 좋아하며 따라서 선물을 통해 상대방의 호감을 사고 상담에 임하면 그만큼 비즈니스가 성사될 확률이 높아짐. 그러나 여성에게만 따로 선물하는 행동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가급적 삼가야 함.

- 선호되는 선물은 보석, 시계 등 화려한 것이 좋고, 상류계층은 인삼의 우수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삼제품이면 무난함. 젊은 층 의 경우 한국산 MP3와 같은 소형 전자제품을 선호함.

○ 인사

- 처음 보는 경우는 일반적인 악수가 무난함. 신뢰 관계가 형성되고 친밀감을 느끼는 경우 볼 키스(서로 양쪽 볼을 살짝 터치하는 키스)를 함.

- 알라신 이외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것이 종교적 관례이므로 한국 식의 머리를 숙이는 인사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으므로 눈을 마주 보며 가볍게 잡는 악수면 무난함.

○ 복장

- 일반 양복에 넥타이 정도면 무난함. 이집트 비즈니스맨의 경우 형식에 얽매이는 복장 보다는 노타이 차림의 복장을 선호하지만 고위직의 경우는 넥타이를 매는 경향이 있음. 상담 시에도 다른 중동국가에 비해 전통적인 이슬람 복장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음.

- 만일 바이어가 집에 초대하는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노출이 심한 복장을 피해야 함.

상관습

○ 유력바이어는 L/C 개설 등 대금결제 조건에 유연한 입장을 보이며 자기 품목의 세부 사항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경쟁국의 가격, 품질, 시장 점유율 등 시장에 대한 전반적 지식이 깊음.

○ 대부분의 수입상은 수집 가능한 모든 가격 및 품질조건을 비교한 후에야 주문하며 계약체결 물량보다 적은 양을 수입함으로써 가격 할인 효과를 노리는 경우가 빈번하므로 주의를 요하며 계약 체결 시 신용장에 커버해야 할 내용을 상세히 삽입하는 것이 좋음.

○ 고 관세 품목인 경우 관세회피를 목적으로 대금 중 일부는 T/T로 하자고 제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반드시 T/T 대금을 먼저 수령하고 나머지 대금에 대해서는 L/C를 개설하도록 해야 함.

○ 일부 악덕 수입상은 L/C만 개설하여 생산개시 또는 선적하도록 한 후 T/T 대금은 후에 지불하겠다고 하고, 후에 각종 이유로 트집을 잡아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며 T/T로 대금을 받았다 하더라도 잔액 분을 L/C개설된 후에 생산 또는 선적하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외상거래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함.

○ 무역대금 결제방식은 금액이 클 경우에는 L/C 100%가 대부분이 며 금액이 적을 경우에는 L/C 60%, T/T 등이 40%임.

- L/C의 경우 제3국 은행의 보증요청에 대해 현지 바이어나 은행은 협조하려고 하고 있으나 지방 중소은행에서 발행되는 L/C는 종종서류 하자를 빌미로 대금 지불을 안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반드시 제3국 유명은행을 통해 보증받도록 수입상을 종용해야 함.

- 현지은행의 신용도는 규모가 작은 은행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괜찮은 편임.

○ 이집트인들은 남을 믿지 못하는 습성이 강해 하부위임이 미약한 편이므로 보통 최종 결정을 할 때, 정부는 장관이, 회사에서는 사 장이 직접 시행하는 경우가 빈번함. 따라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고위인사를 만나는 것이 바람직함.

○ 일단 상담을 시작한 후에는 성급함이나 조급함을 상대방에게 보이 지 않도록 해야 함. 모든 결정이 최고위층에서 이루어지므로 상담 이나 계약의 이행속도가 느린 편이어서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상 대방을 의심하게 되고 나중에는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 전체 계 약을 망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남.

현지 주요 연락처

대사관 정보

○ 주 이집트 한국 대사관

- 주소 : 3 Boulos Hanna St., Dokki, Cairo, A.R.E

- 전화 : 20-2-3761-1234∼7, 팩스 : 20-2-3761-1238

- E-mail : egypt@mofat.go.kr

- 홈페이지 : http://egy.mofat.go.kr

- 근무시간외 비상연락처: 20-12-211-4809, 20-12-227-5053,7

○ 근무시간

- 일∼목 : 08:30∼15:30(점심시간 : 12:00∼13:00)

- 금, 토 : 휴무

○ 영사협력원 연락처

- 김태엽 (룩소르 거주) : 20-10-550-7258(휴대전화)

- 이메일 : cears@hanmail.net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약사

근대 약사

○ 1517년 오스만 터키 지배

○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 1922년 영국의 보호 통치기 종료,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

○ 1948년 이스라엘과의 제 1차 중동전쟁에서 중동 아랍국가 패배

○ 1952년 자유장교단 혁명을 통한 네기브(Neguib) 정권 수립

○ 1953년 군사 쿠테타 이후 공화정 수립

○ 1954년 나세르(Nasser) 쿠테타를 통해 집권

○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발발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발발

○ 1970년 나세르 대통령 사망 후 부통령 사다트(Sadat) 대통령직 승계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발발

○ 1981년 사다트 대통령 암살 후 부통령 무바라크(Mubarak) 대통령직 승계

○ 1982년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반환

○ 1987년 무바라크 대통령 재임

○ 1989년 이집트 아랍연맹 복귀

○ 1993년 무바라크 대통령 3선 당선

정치 개황

이집트의 정치 동향

○ 정치적 안정성

- 1981년 집권에 성공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대통령 은 2005년 9월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한 직선제에서도 승리함으로 써 2010년까지 임기를 보장 받았고 군부의 지지도 받고 있으며, 의회에서는 집권 국민민주당(NDP)이 2005년 11월 총선에서 원내의석 70%(311석)을 확보하면서 여당에 권력이 집중된 상태임.

- 여당은 2007년 3월 헌법 211개 조항 중 34개 조항에 대한 개헌 안을 통과시키면서 야당인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진출을 억제하고, 무바라크 대통령의 차남 가말 무바라크(Gamal Mubarak)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음.

○ 무바라크 대통령이 장기집권하고 있고, 헌법개정을 통해 선거감독에 대한 서법권 소멸, 정당소속의 의무화, 종교 세력 지지기반 정당의 불법화 등을 선언하는 등 반민주적 조치가 취해지자 민주화 및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져가고 있는 상황임.

○ 2008년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18.3%에 달했고 2009년에도 물가상 승률이 10%대를 유지하고 있어 서민층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팽 배해 있고 관련 시위도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협 하는 수준으로는 발전하고 있지 않음.

- 사법부 및 반대 세력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통제가 효율적으로 작 용하고 있고,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반대세력의 경우 계파 별로 분열되어 있어 당분간 현 정권의 실질적인 대항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낮은 상황임

- 차기 대통령 선거(2011년 9월)까지 큰 정치적 혼란은 없을 것으 로 전망되며, 현 정부도 차기 대선을 위한 권력 이양 작업에 치중 할 것으로 보임.

외교

대외정책의 기조

○ 대외적으로는 온건 친 서방 비동맹 외교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 며 중동지역 민주주의 실현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자생적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고 이란의 역내 세력 확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고 있음.

- 이집트는 지정학적으로 중동 이슬람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 이고 석유의 보고 페르시아만과 인접해 있으며, 아랍-이스라엘간 의 평화 회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

- 또한 아랍과 무슬림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서 국경을 넘어 중동 여 러 인접국가에 정치와 종교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쳐 왔음.

이집트-미국 관계

○ 미국과는 전통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으로 부터 매년 대규모 경제, 군사 원조를 받고 있음.

- 미국은 이집트를 미국의 아랍지역 정책 수행의 보완 및 동반자로 활용하는 대신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 달러 가량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어 양국 간 관계는 당분간 큰 변동이 없을 전망임.

- 무바라크 대통령 후계자 역시 미국과의 관계를 크게 흔들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차남 가말이 집권하면 이집트에 정치적 자유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되면서 미국과의 관계의 변수로 작용 할 전망임.

이집트와 그 외 국가들의 관계

○ EU와는 지리적으로 근접하여 경제적으로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 지하고 있으며, 이집트의 탈 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와 중국 과의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임.

○ 2008년 3월25일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하고 러 시아 푸틴 대통령과 푸틴의 후임자로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드 미트리 메드베데프와 중동 평화 문제를 포함한 각 종 국제 사회 문제를 논의하며 양국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하였고, 이 집트와 러시아 간 핵에너지 협력 협정을 도출하였음.

○ 중국의 경우 2006년 6월 원자바오 총리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상 호 경제 협력 협정을 체결하였고,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탈 유럽 을 통한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증진을 위한 이집트의 노력과 에너 지 자원 확보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상호 일치하고 있음.


이집트 체류 정보

치안 및 유의사항

이집트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적인 편이며 외국인에 대해서도 호의적임. 다만 외국인을 상대로 한 바가지 씌우기, 소매치기 등에 주의 요망.

- 일단 분실된 소지품은 찾기가 어려우니 사전에 분실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최선임.

○ 최근 이라크 등 중동정세 관련, 한국, 미국 등 이라크 파병국 국민에 대한 반감이 있는 바, 이집트 국민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 (특히 정치, 종교)은 삼가야 함.

○ 이집트는 별도의 신호등이나 횡단보도가 없으며 현지인들의 운전습관이 난폭하여 길거리 무단횡단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함.

-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므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

○ 거리나 대중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이나 음료수를 함부로 섭취해서는 안 됨. 특히 음료수는 탄산음료나 정화된 물 이외에는 가능한 마시지 않는 것이 좋고 식당에서도 국물이 포함된 식사메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음.

기후

봄철은 3~4월 중 짧게 나타나고 거의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로 바뀌는 기후변화를 보이며 4월말경이면 우리나라의 6월 상순에 해당하는 더위가 시작됨.

5~9월말이 여름철로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으며 6~9월의 혹서기에는 38-45도 사이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가 지속됨.

1년중 국지적인 특성으로는 매년 3~5월 사이에 ‘까마신’이라는 사막의 열풍 및 모래바람이 부는데 엄청난 먼지를 수반함.

환전

사용화폐

- 통화단위 : 1 파운드(Pound) = 100 피아스타(Piasta)

- 지폐 : 200, 100, 50, 20, 10, 5, 1파운드, 50, 25 피아스타

- 동전 : 25, 20, 10, 5 피아스타

○ 환전 : 시중은행 및 환전소, 호텔에서 환전가능

- 환율 : 1.00 USD = 5.51800 EGP (2009년 9월 현재)

- 사설환전소의 경우도 은행 환율과 거의 비슷함

- 역환전 : 출국시 이집트화를 달러로 재환전할 경우, 처음 환전시 증빙서 필요(이 경우 하루 30불 이상 지출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함)

국제 전화

일반전화 이용시

- 00(국제전화) + 82(한국 국가코드) + 2(서울 지역코드) + 번호

- 호텔에서 이용시에는 외부전화 9번을 누른 후 전화번호 입력

수신자 부담 데이콤 전화 이용시

- 365-5641를 누르면 안내방송이 나옴.

- 안내방송에 따라 교환원과 연결 후 원하는 전화 번호 통보

국내 또는 국제통화는 룸이나 호텔 1층 로비에 문의, 사용 가능하나, 비용이 매우 비쌈.

공중전화 사용이 가능하나 설치 지역이 드물어 이용이 매우 불편함.

시차 및 서머타임

이집트의 시차는 GMT+2

리나라와 시차는 KST-7시간으로 한국이 24:00시일 때 이집트는 같은 날 17:00시임.

현재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한국과의 시차는 7시간임.(서머타임 중에는 한국이 24:00시일 때 이집트는 같은 날 18:00시가 됨)

전력 및 인터넷 환경

○ 인터넷 환경 : 일부 ADSL이 사용되나 주로 모뎀을 사용함.

○ 전력사용 현황 : 220V/50Hz 사용

- 콘센트 타입은 한국과 같으나, 모터를 사용하거나 강한 열을 내는 전자제품의 사용은 멀티플러스 사용 요망

주요언론

○ T V : 이집트국영방송(채널 1,2,3)

- 유료위성방송을 통해 여러 나라 방송(BBC, CNN 등)을 시청할 수 있으며 한국의 KBS월드, 아리랑 TV 시청 가능함.

○ 신문과 잡지

- 신문과 잡지는 이집트 공용어인 아랍어 외에도 영어, 불어로도 발간되기도 하며 외국의 유명 신문 및 잡지(New York Times, Herald Tribune, Newsweek 등)도 시내 곳곳에서 쉽게 구입 가능

- 주요일간지 : Al Ahram, Al Akhbar, Al Gomhuriaw, Al Wafd 등

팁 문화 및 교통편

팁 (박시시)

- 팁이 생활화 되어있으며 대체적으로 5파운드 정도가 적절함

- 호텔과 레스토랑 등에서는 이미 계산서에 서비스 요금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팁을 지불할 필요는 없으나 포터나 웨이터들에게는 1파운드 정도를 주는 것이 좋음.

교통편 안내

- 시내 교통편으로는 일반적으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함.

- 사전에 요금 협상하여 승차하는 것이 좋음.

- 요금은 근거리 5파운드, 15~20분 거리는 10~15파운드 정도임.

교통수단

○ 항공

- 국제선․국내선 모두가 연발착이 잦은 편이므로 72시간 이상 이집트에 체류할 시 반드시 예약 확인이 필요하며, 출발 시에는 최소한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

철도

- 철도는 이집트 철도청에서 관장하며 총 연장 약 5천 Km로 주요 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나 카이로-알렉산드리아 구간 등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권장할 만한 교통수단이 되지 못하며, 특히 남부 지역은 치안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철도 및 자동차를 이용한 여행은 삼갈 것.

○ 버스

- 버스는 미니버스, 시내버스, 장거리 버스 등으로 구분. 시내버스는 요금(0.5 이집트 파운드(약 0.2불))은 싸지만 매우 혼잡함.

- 미니버스는 일정 지역 구간을 운행하나 정해진 목적지가 없으며 구간에 따라 요금이 차등 적용됨. 장거리 운행 버스는 카이로 시내 TAHRIR 광장 및 람세스역에서 출발,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 등 주요도시와 시나이 반도, 후르가다 등 주요 도시 연결함.

○ 지하철(Metro)

- 1-3호선이 있으며, 역명이 영문 알파벳으로 표기 되어있어 초행자의 경우에도 이용이 비교적 편리함. 열차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칸은 여성 전용임.

○ 택시

- 택시는 호텔 앞에서 관광객 상대로 운행하는 리무진과 '우그라' 라는 일반 택시가 있으며 미터기가 부착되어 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 고 있음(이집트인의 경우에도 동일). 특히 외국인의 경우에는 별도 요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탑승 전 미리 흥정이 필요함.

종교활동

○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나 외국인들의 종교 활동에 특별한 제한 을 두고 있지 않음.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자말렉, 헬리오 폴리스, 마아디 등)에는 성당, 개신교회 등이 있어 종교 활동(예 배)에 큰 불편이 없음.

- 카이로에는 2개의 한국인 교회와 성당이 있어 비교적 자유롭게 종 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

○ 그러나 선교사활동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며, 엄격히 제한함. 특히 무슬림의 샤리아에 의해 무슬림에 대한 선교활동은 역시 엄격히 제한되고 있음.

대인관계 문화

○ 이집트인들은 인사할 때 주로 악수나 양 볼에 입 맞추는 정도이나 아주 친밀한 사이일 경우에는 껴안기도 함.

○ 대부분의 이집트 국민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른 종교생활(1일 5회 예배 등)을 하므로 이들의 종교생활을 해치는 행위는 삼가 해야 하며, 너무 짧고 노출이 심한 옷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함.

○ 종교에 따른 금식기간인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에 시행되며 태음력에 기초하므로 해마다 시기가 약 11일씩 앞당겨지 는데, 2009년의 경우 라마단은 8월 21일~9월 19일이었음.

- 라마단 기간에는 일출에서 일몰시까지 금식하는데, 이곳 사람들이 철저히 지키는 종교행사이므로 현지인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음주, 흡연 등은 삼갈 것.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한-이집트 관계 일반

외교관계

○ 우리나라와는 1961년 영사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62년에 주카이로 총영사관, 1991년 주 서울 이집트 총영사관이 개설됨.

○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집트가 문호개방정책을 표방하면서 친 서방 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한국과 경제․통상관계가 점차 신장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남북한에 대하여 중립정책을 채택하여 왔으나실질적으로는 한국과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중요시함.

○ 1970년대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외교관계로 발전하였고, 1980년대 이후 실질협력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95 년 4월 13일에 국교수립에 합의함. 1992년 2월 김종필 총리의 이집트 방문 이후 4월에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음.

○ 최근에는 2008년 12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방한한 Mahmoud Mohie El-Din 이집트 투자부 장관과 면담을 갖고 상품 교육, 에너지 개발, 건설, 금융, 정보통신 등 서비스 분야에서 양 국 간 협력을 강조하였음.

○ 2009년 2월에는 외교통상부 이용준 차관보가 방한 중인 후세인 하리디 이집트 외교부 아태담당 차관보와 제 5차 한-이집트 정책 협의회를 갖고 우리기업의 이집트 진출, 교육, 정보통신 등 제반 분야에서 협력 증진 방안에 대해 협의하였음.

주요협정체결

○ 1979 .5 과학협력 양해각서 교환

○ 1988. 6 항공협정

○ 1989. 6 문화 과학 기술협력 협정

○ 1993.10 한 · 이집트 이중과세방지협정

○ 1995. 4 국교수립 합의

○ 1996. 3 투자 보장협정, 무역협정 등 5개 협정

○ 2000.10 문화행사 교류 시행계획서

○ 2000. 5 보건협력협정

○ 2001. 1 차관 700만 달러 공여협정

○ 2002. 6 원자력 협정

○ 2005. 8 체육분야 협력양해각서

○ 2005. 9 연료전지, 풍력 에너지 분야 공동연구 등 업무협력협정

○ 2005.12 청소년 교류양해각서

○ 2007. 9 감사원 교류협정

○ 2008. 2 공무원 교육훈련에 관한 양해각서

한-이집트 교역 및 투자 동향

교역 현황

08년 한국의 대 이집트 수출은 전년대비 32.7% 증가한 15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수입도 전년대비 100% 이상 급증한 13억 달러 기록함. 2009년 기준 이집트는 세계 41위 수출 대상국이자 세계 45위 수입 대상국임.

- 이는 주력 수출 품목인 승용차가 전년 대비 13.5%가 증가했고 합성수지의 꾸준한 수요증가세 및 건설경기의 활황에 따른 건설중장비, 철강의 수요 증가에 따른 것임.

- 05년에 주춤했던 천연가스, 나프타 등 지하자원 및 여타 원자재 수입이 06년 들어 100% 이상의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으며 이런 추세는 07년 및 08년에도 꾸준히 유지되고 있음.

○ 03년 이후 한국의 대 이집트 수출은 매년 30% 수준의 급증 추세를 이어가고 있음.

국은 승용차, 자동차부품, 합성수지, 펌프 등 산업 자본재를 이집트로 수출하고 있는 반면 이집트로 부터 천연가스, 나프타 등 원자재를 주로 수입하고 있어 양국간 교역구조는 상호 보완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음.

〈한국의 對이집트 수출입 현황〉

구분

수출

수입

수지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2006

853

20.7

450

123.5

403

2007

1,167

36.7

614

36.4

553

2008

1,548

32.7

1,331

116.8

217

2009.1-7월

777

-9.7

402

-58.0

375

자료원 : KITA.NET (단위: US$백만, %)

주요 수출입품목

2009년 1~7월중 對이집트 총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9.6% 감소한 7억 7700만 달러를 기록함.

통적 수출 상위 품목과 함께 한국 기업의 플랜트 발주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플랜트 소요에 필요한 화학기계 수출이 급성장

<한국 對 이집트 10대 수출 품목>

순위

품 목

2008

2009. 1-7월

금 액

증가율

금 액

증가율

1

자동차

457

19.7

228

-11.0

2

합성수지

170

38.2

62

-36.5

3

석유제품

0

250.1

49

35,688.1

4

자동차부품

147

12.5

37

-67.4

5

섬유및화학기계

24

-6.4

31

186.1

6

공기조절기및냉난방기

47

186.8

31

85.4

7

고무제품

36

36.2

25

9.1

8

철강판

64

155.6

24

-30.5

9

원동기및펌프

46

155.6

19

-23.7

10

종이제품

5

-23.3

18

1,533.4

자료원 : KITA.NET (단위 : 백만 달러, %)

<한국 對 이집트 10대 수입 품목>

순위

품 목

2008

2009. 1-7월

금 액

증가율

금 액

증가율

1

천연가스

790

85.9

199

-65.6

2

석유제품

500

226.9

183

-48.5

3

정밀화학원료

0

-

6

-

4

의류

5

76.5

2

-7.7

5

기호식품

3

24.6

2

15.3

6

알루미늄

0

296.2

2

3,245.6

7

천연섬유사

5

79.9

1

-49.9

8

기타비금속광물

2

-28.4

1

-16.5

9

식물성물질

0

348.8

1

1,221.3

10

기타농산물

7

-16.2

1

-90.6

자료원 : KITA.NET (단위 : 백만 달러, %)

우리 기업의 투자 현황

○ 수교 후 동일방직, 대우자동차, POSCO개발 등의 투자가 이루어졌으나 분규 및 시장성 악화로 일부는 철수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대 이집트 잔존투자는 2009년 3월 신고금액 기준 18건으로 291,305천달러에 이르고 있음.

연도

신고건수

신규법인수

신고금액

투자건수

투자금액

2005

0

0

0

11

3,547

2006

3

1

3,662

13

5,545

2007

3

1

2,430

11

5,903

2008

2

0

1,350

8

4,809

2009.3월

2

0

96,165

2

541

전체

61

18

291,305

397

155,596

자료원 : 한국수출입은행 (단위 :건, 천 달러)

○ 우리기업의 대 이집트 업종별 투자 현황(2009. 3월 현재)

- 업종별로 SK(주)의 북 ZAFARANA 유전개발 참여(25%지분) 등 광업이 2건에 1억 800만 달러, 제조업이 7건에 2억 3,900만 달러로 광업과 제조업 중심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음.

- 그러나 금액으로는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72.2%. 제조업이 16.0%로 상대적으로 제조업 투자가 부진한 편이며 2004년 이후 신규 제조업 투자는 전무함.

업종대분류

신고

건수

신규

법인수

신고

금액

투자

건수

투자

금액

합계

61

18

291,305

397

155,596

어업

1

1

350

1

150

광업

24

2

241,710

346

113,017

제조업

25

7

29,011

346

113,017

건설업

3

2

1,695

3

557

도매 및 소매업

3

2

4,169

4

4,169

운수업

1

1

195

1

195

정보서비스업

1

1

165

1

165

부동산 및 임대업

2

1

12,510

2

11,556

보건 사회복지사업

1

1

1,500

1

1,500

자료원 : 한국수출입은행 (단위 : 건, 천 달러)

이집트 진출 기업 현황

진출형태

기업명

분야

비고

현지법인

동일방직

면사

민영화 기업임대 후 05년 완전 인수

LG 전자

가전제품

최초 지분 51% 투자, 현재 95% 보유

Texcham Egypt

섬유화학

섬유 염색용 화학제품 제조

현대건설

건설

건설작업 완료 후 청산절차 진행 중

EIMC United

제약

한국지분 10%, 07년 말 생산개시

지사

삼성건설

건설

AUC 신축 캠퍼스 건설 진행

연락사무소

금호타이어, 대우인터내셔널, 대우전자, 삼성전자, 샴스코(종합무역) 한산실업(종합무역), GM Africa(자동차)

교포직접투자

Nour Midas Taxtile(섬유봉제, 종업원 1,000명), GS Tech(사출성형) C&C(화학), DH Trade(종합무역), 다인 인텍스(섬유)

자료원 : KOTRA

우리나라의 대 이집트 투자 전망

○ 계속적인 투자사절단 및 시장개척단 등의 이집트 방문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비해 우리나라의 투자진출이 저조해 이집트 정부 및 경제계에서 불만을 표시하고 있음.

- 그러나 이집트의 전반적인 투자환경이 호전되지 않고 있는데다 현재의 경기침체로 당분간 우리기업의 현지 투자는 정체 내지 감소 추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됨.

○ 이집트 투자는 투자진출 초기단계는 물론이고 실제 기업 운영과정 에서 사업인허가, 공장설립, 세금문제, 종업원고용, 원부자재 조달, 기타 환경 등 실제투자를 해보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의외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

- 따라서 투자를 실현하는 경우 이미 경험을 해본 기업의 경험담과 문제 해결의 노하우를 사전에 습득하는 것이 중요함.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이집트 (Arab Republic of Egypt) 개황

개관

○ 국 명 : 이집트

○ 수 도 : 카이로(Cairo)

○ 면 적 : 약 1,002천 ㎢ (한반도의 5배, 국토의 95%가 사막)

○ 위 치 : 아프리카 동북부, 지중해연안(가자지구, 이스라엘, 리비아, 수단 접경)

○ 인 구 : 7,430만 명(2008년 기준)

○ 민 족 : 햄족(99%), 아르메니아인, 누비아인 등 소수족(1%)

주요도시 : 알렉산드리아(420만), 포트사이드(58만), 수에즈(52만)

○ 종 교 : 수니파 이슬람교(90%), 기독교(10%)

○ 언 어 : 아랍어(공용어), 영어 및 불어(일부)

○ 정부형태 : 대통령중심제(임기 6년)

○ 국가원수 : Mohamed Hosni Mubarak(‘82년 취임, ’05년 9월 7일 직선제를 통해 5기 연임 당선, 2010년까지 집권기반 마련)

○ 의 회 : 양원제 (상원 6년 임기, 264석, 하원 5년 임기, 454석)

○ 주요정당 : 국민민주당, 뉴와프드당, 사회노동당, 사회자유당

○ 독립기념일 : 1922년 2월 28일(영국)

○ 화폐단위 : 이집션 파운드화(EGP)

2009년 9월 현재 1.00 USD = 5.51800 EGP

○ 1인당 국민소득 : 2,115 달러 (2009 추정)

○ 국민총생산 : 1,760억 달러 (2009 추정)

산업구조 : 서비스업 48.0%, 제조업 38.1%, 농업 13.8%

○ 기 후 : 아열대성 사막

○ 주요부존자원 : 석유, 천연가스, 인광석, 철광석

○ 주요수출품 : 원료 및 광물, 원유, 석유-가스, 석탄, 면화

○ 주요수입품 : 원료 및 광물, 석유-가스, 석탄, 원유, 곡물 원자재

○ 경제적 강점 : 관광자원 및 양질의 노동력 풍부

○ 경제적 약점 : 식량부족, 사회간접자본 빈약

경제개황 및 주요지표

경제 구조 및 특징

○ 이집트 경제는 회계연도 2007/08년 7.2% 성장했으나, 2008/09년 1분기(2008년 7월-9월)에 2007/08년 1분기 대비 5.8% 성장에 그침. 세계 경기 하락으로 경제성장률 둔화가 불가피하나, 경기 하락의 폭은 주요국 대비 그렇게 크지 않을 것임.

○ 관광, 수에즈 운하 운영, 기타 공공 서비스 등 서비스 산업이 국가GDP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섬유 식료품 가공 중심의 제조업이 38.1%, 면화중심의 농업 부문이 13.8%를 담당하고 있음. 중동 정정 불안, 테러 사건 발생, 세계 운송경기 등 대내외 충격에 경제전반이 크게 영향을 받고 있음.

○ 만성적인 재정적자가 해결과제로 남아 있으나, 수입급증으로 인한 상품수지 적자폭 확대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이전수지 흑자 확대로 경상수지는 흑자를 유지하고 있으며 외환보유액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GDP 대비 외채 부담 또한 점차 감소하고 있음.

주요지표 및 통계

○ 주요경제지표

경제지표

단위

2006

2007

2008

2009

2010*

GDP

억 달러

1,079

1,298

1,602

1,760

2,130

1인당 GDP

달러

1,454

1,708

1,966

2,115

2,133

경제성장률

%

6.8

7.1

7.2

3.4

3.0

재정수지/GDP

%

-8.2

-7.5

-6.8

-7.0

-6.6

소비자물가상승률

%

7.6

9.5

18.3

9.1

7.1

경상수지

백만달러

2,731

501

-1,331

-1,439

-1,439

수출

백만달러

20,546

24,455

29,849

27,778

30,513

수입

백만달러

33,104

44,949

56,623

45,865

46,451

자료원 : 한국수출입은행, EIU, 이집트중앙은행

최근 경제 동향

○ 2008/09년 경제 성장률은 3.6%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됨. 금융위기로 발발된 전세계 불황의 수준과 비교할 때, 이 성장률은 긍정적으로 판단되나 이집트가 최근 2-3년간 유지해온 6-7% 대의 고성장을 고려할 때 체감 경기 둔화율은 심각한 수준임.

- 그러나 세계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지 않고 이집트 은행권이 현재와 같이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상대적으로 격리된 상태를 유지한다면 2010년 하반기부터 경기 상승세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

○ (정부정책)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이집트 정부는 약 54억달러(EGP300억)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발표함. 이 금액은 이집트 총 GDP의 약 2.8% 규모이며 사회 간접자본 확충 및 수출 진흥책에 사용될 예정임,

- 이집트 정부는 2009년 1월 29일 대통령령으로 중간재 및 자본재 250개 품목에 대한 수입관세 인하를 단행했으며, 관세인하의 경제적 효과는 총 3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됨.

- 한국의 대(對) 이집트 100대 수출품목 중 기계류, 열교환기, 동축 케이블 등 5개 품목 관세인하 대상에 포함되어 수출 증가에 긍정 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됨.

○ 세계적인 고유가의 지속과 천연가스의 수출 개시, 관광산업의 호 황과 수에즈 운하 수입의 증대 등의 긍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수 입물가 급등에 따른 물가 불안이 고성장 기조에 큰 걸림돌로 작용 하고 있음.

- 2008/09 회계연도 이집트 경제 성장률은 당초 7~8%로 전망되었으나 물가 상승의 여파로 세계 경기 침체 조짐이 보이면서 3.6% 내외로 수정되었음.

주요산업 현황 및 전망

자동차 산업

○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지역 최대의 자동차 생산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국내 운송 물동량의 85%를 도로운송에 의존하는 등 시장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

- 자동차 생산량은 2008년 120,400대를 기록했으며, 2009년에도11.3% 증가하여 134,000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됨.

○ 자국의 기계 산업의 발전과 자동차 산업의 육성을 위해 국제적인 자동차 메이커들의 조립 생산기지를 유치했으며 높은 수입관세 제도를 통해 자국의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해 왔음.

- 이집트-EU 파트너십으로 EU로부터 수입 관세는 2010년을 기점으로 2019년까지 매년 10%씩 관세 인하가 예정되어 있어 유럽산 자동차의 강세가 예상됨.

-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시장은 아직 품질과 기술력이 낮아 필요 부품을 해외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

식품가공산업

○ 식품가공업은 이집트의 가장 큰 제조업분야로, 생산 품목은 유가 공에서부터 음료, 과자, 제빵, 식품첨가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해 내고 있음. 특히 음료부분은 세계적인 탄산음료 제조업체들이 모두 진출해 있음.

- 이집트의 풍부한 농산물 및 값싼 노동력으로 인해 주요 수출 산업 중 하나로 성장하고 있으며 관련 설비투자도 증가 추세임.

○ 중동 지역 내 음식문화 및 언어의 유사성 때문에 이집트 가공식품 수출은 중동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나,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자체 생산이 부족하여 케냐, 수단 등에 대한 수출이 증가 추세에 있고, EU 지역에 대한 수출도 증가 추세에 있음.

석유·가스·에너지산업

○ 원유 및 천연가스

- 2007/08 회계연도 동안 오일 및 가스는 GDP의 16.5% 연간 수출의 45.9%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외화수입 및 투자유치가 이루어져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음.

- 이집트의 원유 매장량은 약 37억 배럴로 전 세계 매장량의 0.5% 에 해당하는데 다국적 개발 기업이 천연가스 자원 발굴에 치중하 고 있어 이집트는 2009년을 기점으로 석유 소비량이 생산량보다 많아질 것으로 전망됨.

○ 천연가스 산업은 이집트에서 가장 성장률이 높은 산업으로 하루 액화 천연가스(LNG)의 생산량은 70만 배럴로 세계에서 6 번째 액화 천연가스 수출 국가로 자리 잡음.

- 천연가스 생산은 국내외의 수요 증가 및 신규 가스전의 개발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됨.

○ 전력생산

- 전력 보급률은 개발 도상국에서 가장 높은 99.8%로 세계 최고 수준임. 하지만 매년 전력 소비량이 평균 7% 증가함에 따라 전력생산 확충이 시급한 실정으로 2012년까지 8GW의 전력 생산량을 확충하고 2027년 전체 전력 생산량을 63GW로 증가시킬 계획임.

- 이집트 정부는 전력 생산량의 86%를 차지하는 화석연료의 비중을 줄이고 전력 생산원을 다양화하기 위해 풍력, 태양열 발전 비중을 높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음.

관광산업

광산업은 이집트 외화수입의 최대 원천이며, 성장 동력으로 GDP의 11%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용 인력도 농업에 이어 2번째임.

○ 영국, 러시아, 독일로 부터 매년 100만명의 관광객이 이집트를 방문하고 있는데 2006년 이집트를 방문한 관광객 수는 980만명으로 전년의 860만명에 비해 5.5% 증가하였으며 관광 수입도 76억 달러로 전년 대비 11.8% 증가

- 인근 레바논, 이라크 팔레스타인의 정세 불안으로 관광업 타격이 예상되었지만 관광객은 오히려 증가하는 양상을 보임.

○ 이집트 정부도 늘어나는 관광객의 수용을 위해 신규 관광지 개발 및 시설 개선과 함께 의료관광, 비즈니스관광 등 관광 상품을 다양화하겠다는 전략을 발표함.

농산업

○ 이집트의 주요 산업의 하나임. 농업은 타 개발 도상국과 마찬가지 로 이집트에 중요한 산업이지만 산업화의 영향으로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및 농업 종사자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

- 1996년 착수한 Toshka사업(남부 사막지역 농토화 추진)으로 사업이 완료되면 농경 면적은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됨.

○ 원면

- 최고급 품질을 자랑하며 이집트 농업 수출 1위 품목으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 유럽시장이 주 대상이었으나, 최근 들어 한국, 인도,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권 공급 비중이점차 늘어남.

- 이집트 원면 GIZA 45,76,70,77,84는 세계 최고 품질의 EXTRALONG STAPLE COTTON으로 매우 고가임에도 수요가 많음. 이 제품은 판매시기 품질 등급, 세계 원면시장의 수급현황에 따라 수출가격 변동 폭이 심함.

유망시장

○ 한국에 대한 인지도

- 이집트 신차시장의 약 40%를 국산 자동차가 점유하고 있으며 가 전이나 기계 등 주요 품목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한국산에 대한 현지 소비자들이나 바이어들의 인지도는 매우 높고 좋은 편.

- 실제로 카이로 KBC가 실시한 한국 상품 인지도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일본과 유럽국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으 로 인식하고 있으며 한국산 물건을 구입해 사용해 본 소비자의 경우 더욱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음.

○ 건설시장

- 이집트는 연평균 1.2%의 인구성장률을 유지하고 있고 젊은 인구 비율에 따른 주거용 주택 수요 등이 탄탄해 건설 분야가 지속 성 장하고 있음. 건설장비 시장은 연평균 15% 성장추세임.

- Wheel Loaders, Hydraulic Excavators, Bulldozers, MotorGraders 등이 이집트 유망 건설 장비임.

○ 자동차 부품 시장

- 2011까지 20년 이상 된 택시를 신차로 교체하는 사업 추진 중임.

- 이집트 신차시장에서 한국산 차량의 점유율이 약 30%에 이르고 한국산 차량의 주력 모델이 베르나, 라노스 등 소형 차량이기 때문에 택시 교체시 상당수가 한국산 차량으로 교체될 전망이며, 관련 부품 수요도 향후 급증할 것으로 전망됨.

○ 수입화장품 시장

- 이집트의 화장품시장은 대표적인 미개척 시장의 하나로 성장잠재력이 매우 높음. 이집트는 아랍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고 높은 인구성장률이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 소득수준 향상으로 수입화장품 수요 증가 추세임. 특히 메이크업 제품의 시장 확대가 기대됨.

투자환경 및 동향

시장 특징

○ 이집트 시장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중인 과도 기적 성격을 갖고 있음. 대외교역의 자유화로 민간부문이 성장하 고 있으며 과거 국영기업들이 담당했던 역할의 대부분이 민간 부 문으로 이전되고 있어 민간 부분의 성장이 활발함.

○ 거대시장에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

- 거대 시장인 EU, 오일달러가 넘치는 아랍권, 외부에서 접근이 어려운 아프리카 시장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EU, 아랍국가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과 대서양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 운하 등 물류의 중심으로 지리적 장점을 지니고 있음.

○ 잠재력 있는 내수 시장

- 인구 약 7,200만 중 약 10%(720만~1,000만)는 연 소득 1만 달러 이상의 탄탄한 소득 기반을 보유하고 있고 인구의 63%가 30세 미만이며, 2015년까지 주력 소비층인 30~59세 인구 비중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보여 시장 선점 효과가 있는 미래 시장임.

○ 풍부한 노동력과 저렴한 사회간접 시설

- 실질 실업률이 20%를 상회하고, 대졸 실업률은 40% 가까이 되어 인력 채용이 용이하며, 인건비가 저렴함.

- 에너지 및 원자재 조달 요건이 양호하고 에너지 가격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어 저렴한 가격에 조달이 가능함.

○ 극단적인 가격시장

- 품질보다는 가격에 치중 하여 정상적인 제품보다는 덤핑물품 재고 품 등의 인기가 더 높은 시장임. 따라서 가격할인 요구가 빈발하 고 거래 후에도 대금 결제 조건에 관해 까다로운 요구가 빈발하는 시장임.

○ 전형적인 중소기업 시장

- 다수의 수입상과 다수의 공급상이 완전경쟁에 가까운 치열한 경쟁 을 하고 있으며 소규모 저가의 교역품이 무역의 주종을 이루는 중소 기업형 시장임.

○ 포스트 브릭스로 평가됨

- 저가 생필품 시장에서 중저가 보급형 시장 및 고급형 시장으로 시 장이 확대에 있으며 자국 특성에 맞는 제조업 발굴 육성 정책을 활용한 다양한 사업 기회가 존재함.

- 시장 선점을 위해 선진국뿐만 아니라 브릭스 국가 기업의 진출이 활발하며 에너지, 건축, 이동통신 분야로의 경쟁이 격화됨.

- 자원 민족주의를 가반으로 자국의 이익을 강화하는 현상이 확산되 고 있음. 자원뿐 아니라 이동통신, 유통, 서비스 등도 패키지 딜 투자 방식이 유행함.

투자 애로 사항

○ 세계 최하위 노동생산성 및 까다로운 노동법

- 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UNIDO)의 조사에 따르면 이집트의 노동 생 산성은 극히 저조함. 매년 기본임금 7% 인상 강제규정 및 근로자 해고가 불가능한 법체계와 관행이 존재함.

- 유한책임회사를 제외한 주식회사, 지사는 회사 순 이익의 10% 이 상을 연봉 이하 범위 내에서 종업원에게 배분해야 할 의무 규정이 있는 등 노동법규가 까다로움.

○ 관료적 행정절차

- 세관절차가 복잡하고, 담당자마다 적용 규정이 상이하며, 각종 행 정 절차에 관료주의가 만연하며 담당 기관별 법적 해석이 상이하 고 동일 문제 발생에 대한 문제 해결 능력이 취약함.

○ 투자 인센티브 미흡

- 외국인만을 위한 투자 유치 인센티브가 없고, 모든 투자에 있어 내국인과 외국인을 동일 취급하며 투자 인센티브가 극히 제한적 임. 일반 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센티브가 많은 자유무역지대 의 경우도 2008년 5월 5일 자유무역지대에 입주한 에너지 집약기업에 대한 혜택을 전면 폐지함.

- 투자 환경이 개선 중이나 단기간 경제성장으로 열악한 경제기반을 극복하는데 한계가 존재함.

○ 지적재산권 보호 미흡

- 명문화된 법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침해 방법이나 침해 시 구제 절차가 유명무실함.

- 우리 제품들의 상표가 도용 당하고 있으나 이를 제지하거나 피해 를 보상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지적재산권 분규도 일반 민 사재판에 의하여 최종 해결까지는 5년 이상 시간이 소요됨.

○ 에이전트 관계 종료 애로

- 영업부진 등의 요인으로 에이전트 계약기간 만료에도 불구하고 기 존 에이전트의 기득권 주장으로 큰 어려움이 발생함.

- 기존 에이전트의 경유 계약 만료 후에도 실제 에이전트 권리를 주 장하면서 법적 소송까지 제기해 실제 영업이 중단되는 사태가 다수 발생하기도 함.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여행이 끝났다. 한달여 나의 의지에 오롯이 맡겨졌던 시간이 다시 내 아쉬운 주먹을 희롱하며 어딘가로 풀려난다,

사막의 모래처럼. 아주아주 크고, 딱딱한 책갈피 하나를 꼽아 넣은 느낌이기도 하다. 이왕이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정빛, 가죽냄새도 약간 나면 좋겠다.


8주마다 나오는 휴가와, 제대휴가를 온통 노가다판에서 보내며 모았던 돈이었다. 못을 밟아 피가 흐르는 발바닥을

뽁뽁 쳐대며 죽은 피를 뽑아내주던 작업반장의 망치질이 웃기기만 했던 건, 그래도 제대하고 나서 '군대에서 공찼던'

기억만 잔뜩 이야기해대는 '복학생'이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군대라는 웅덩이에 내가 담겨 있었단 사실이 저만치 예전의 일인 양 스스로에게 낯설어진 것에 대해

감사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다합의 해변에서 되짚어 보았던 '나'라는 것으로부터 한걸음 더 멀어졌다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했던 xx살의 나, 하루키의 매혹적인 이 표현을 쓰고 싶어서 난 23, 22, 21,그런 식으로

나라고 불려왔던 것이 밟아온 무대와 주어진 씬, 그리고 허용되었던 애드립과 - 사실은 스스로 알고 있었을 - 대사들을

충분히 떠올려 보고, 그게 뒤늦게 내게 의미했던 '필연성'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들과 같은 진실을 담은 온갖 표현들, 하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울림을 갖고 효용을 갖는 것은

이미 그 진실이 자신의 지나간 과거로 굳혀진 이후일 뿐이다. 그처럼. 나의 과거도. 다행인지, 아직 크다란 후회나 참담한
 
고뇌를 되씹을 만한 상처를 입지 않은 내게, 미래란 언제나 여전히 최초의 반짝임을 그대로 간직한 신품의 크리스탈과

같다. 그리하여 불행인지, 무언가 바람이 바뀌어 불 때마다, 나는 노심초사하며 나를 되짚어보고 지금 나의 꿈을

생각한다. 혹여나 최초의 균열, 내지 최초의 후회-돌이킬 수 없을 만한-가 이로부터 비롯되지는 않을지, 여태 아무런

흠집없이 나름대로 명민하던 그 반짝임이 드디어 뭉그러지고 무뎌지는 건 아닌지. 혹은 이미 그리 되었는지도

모르겠으되, 그토록 커다란 책갈피의 느낌을 갖는 지금 다시금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맨 몸이었다. 룩소르에서 10여시간 자전거를 타고 물통 네 개를 아작내거나, 17시간 버스에 구겨진채 버티거나,

혹은 등짐을 메고 왠종일 거리를 걷거나. 그러한 순수한 육체적인 깡다구로서의 의미 외에도, 이른바 계급장 다 뗀
 
상태에서의 맨 몸이었단 뜻도 된다. 혹자는 김일성의 한국이냐고 되묻기도 하는 그런 내 나라주소, 거기에 알게모르게

내 등뒤에 버티고 섰던 온갖 상징들-학력, 나이, 재력, ..이른바 사회적, 문화적인 자본이랄까-이 훨씬 희미하게

드러나는 곳에 순간적이나마 벌거벗겨졌다. (물론 여행자로서 달리 획득하는 또다른 온갖 외투들이 순식간에 다시

입혀지지만..)


그곳에서 내 앞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곧 내가 돌아올 곳에서 다시 꿰어입어야 할 내 친숙한

껍데기들을 하나씩 꼼꼼히 뜯어보며 각각의 가능성과 내 의사를 타진한다는 것과 같지 싶다. 현재까지 내가 있었던 곳,

바라보던 곳,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그렇게 차근차근 지금의 '나'란 것에 대해 반추해보고, 그것이 어느쪽으로

얼마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또 해는 앞으로 어디로 움직여 그림자가 얼만큼 어디로 길어지게 될지. 그래봐야

고작 한 뼘이겠지만.


생각이란 놈도 일정량의 치사량이 있는 듯하여, 술에 먹히는 경우 바로 게워내짐이란 행위로 다시금 술을 잡아먹을

준비를 가다듬듯, 생각이 잡다하게 얽히고 섥혀 결국 갈피를 못잡게 되면 다시금 토해내고 그 어느 맘 잡히는대로의

꼬투리에서부터 잡념을 이어가는 듯하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것.


그냥 가보는 거야, 라고 신해철이 '절망에 대하여'에서 절규했듯..그렇게. 역시나 답은 없이 고작 불타오르는 양광 아래

한뼘의 그림자로 방향을 가늠해볼 수 밖엔 없을 거 같다. 고대 이집트에선 그림자란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한다고

믿어졌다던가.


여행이 끝났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내가 정말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다면, 노심초사 따위 고이접어
 
나빌레라.ㅋ



* 지금보다 낫던 그때의 마음과 정신상태. 아아..바쁘게 살기엔 삶이 짧단 말이다..




역시 터키는 뭔가 심심하다. 차가 달려도 빵빵거리지 않고,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무단횡단을 하지 않으며, 공항도

좀더 럭셔리한 티가 풀풀 난다. 물론 터키항공의 불친절과 덜된 서비스정신엔 할 말 없지만, 적어도 트랜짓 동안 쉬라고

별 넷짜리 호텔을 제공했으니 그 또한 봐줄 수 있다. 밤 3시 45분 비행기로 날아서 6시에 이스탄불을 다시 도착한

참이었다. 자, 이제 저녁 8시 비행기 타기 전까지는 12시간 정도 시간이 있으니 뭘 할지 생각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번 하는데 꾸정물이 줄줄 나온다. 그런 시설에서 한번 씻고 났더니 피로가 대번에 풀리는 느낌,

대신 무지하게 배고파져서 일단 에미뇨뉴로 나와 고등어케밥부터 먹었다. 역시 맛있다. 파샤 모스크를 찾아가서 기대

이상의 인테리어를 좀 인상깊게 봐주고, 슐레마니에 가서 그들 술탄들의 무덤을 먼저 보았다. 천년쯤 된 무덤들이

그토록 고스란히 남아있다니, 종교의 힘이 아마도 그 시간을 지켜냈으리라. 도저히 눈이 감기고 피곤해서 모스크의

천장 그림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여기 터키의 사원들은 그다지-아니 절대-편히 쉬고 누워 잠잘 만한

정도의 분위기가 안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구석에 가서 벽에 기대앉아 한시간쯤 잤나.


주섬주섬 일어나 한바퀴 돌며 인사해주곤, 중심가 산책이나 어슬렁대며 하기로 했다. 그랜드 바자르 한번 돌아보고,

이집션바자르도 한번 돌아보고, 블루모스크까지 걸었다. 도중에 격하게 친절했던 삐끼 아저씨들한테 잡혀서

양탄자 가게에 앉아 설탕 듬뿍 들어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정치학 얘기까지. 그리곤

이집트 카르낙 신전에서 들고 와 이스탄불의 한 광장 복판에 서있는 오벨리스크에게 그곳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다시 블루모스크다. 근데 이집트를 거쳐 다시 바라본 이곳은, 정말 시장바닥이다. 전혀 모스크로서의 기능,

성소로서의 아우라를 잃은 채 그냥 관광지같다. 애들 뛰어다니고 단체관광객 줄서서 돌아보고 다니고. 그냥

한군데 퍼져 앉아 이리저리 고개 갸웃대며 바라보고 싶었는데, 왠 이상한 관광객들이 같이 사진찍자고 하질않나,

아님 애들이 놀자고 장난걸질 않나..머 나름 전부 여자였으니 불만이야 없었지만. 내가 원했던, 이집트에서

만끽했던 그런 분위기는 아무리 기다려도 절대 나올 법 하지 않아 걍 나와버렸다.


내 생각엔 이집트 문화의 양대축은 고대 파라오문화하고 이슬람문화인 거 같은데, 파라오의 그것들은 이미 충분할만큼
 
봤고, 이슬람문화는 카이로에서 제일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루에 다섯번씩 울린다는 아잔소리라거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스크 첨탑, 미나렛들은 이집트의 매끈하게 구획된 전 국토를 뒤덮고 있지만, 그게 뿌리깊은 유적처럼

남아서 지금 현재의 삶과 끈끈이 엮인 게 실감나는 곳은 아마 이슬라믹 카이로만한 곳이 없을 거다.

이슬라믹 카이로에서..아니, 카이로 전체에 수천수만개는 될거라는 저 황홀한 미나렛(첨탑) 중에서 가장 이쁘다고 생각한

알아자르 사원의 세개짜리 미나렛. 이 사원 안에서 난 앉아 쉬기도 하고, 배깔고 일기 쓰기도 하고, 론리가이드북을 펼쳐

일정을 구상하기도 하고, 지쳐 쓰러져 잠들기도 했었다. 마냥 저 미나렛을 질릴 줄 모르고 바라보다 기어이 한 컷.

그러고 보면 이집트에서는 계속 모스크 찾아다니며 아련한 아잔소리와 함께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좌식 문화에

익숙해선지 맘대로 누워도 되고 잘수조차 있는 그 평안한 모스크의 분위기가 넘 맘에 들었었다. 게다가 거기엔, 알 수

없는 부담감과 심적인 긴장을 일으키는 형상화된 신의 모습이 없어서..그 눈빛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게 맘에 든다.
 
그냥 저렇게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한 공간이 있어서, 모두가 저 '지표' 너머 머나먼 메카를 응시하는 표정으로

예배를 드린다.

일단 알-아자르(Al-Azhar) 사원까지 걷고 좀 쉬어준 후에 이슬라믹 카이로를 돌기로 했다. 저번에 카이로에 머물던 때에
 
일부러 마지막을 위해 남겨놨던 지역이다. 근데 왜 이녀석들은 일본인이라니까 이렇게 친절해지는 거지. 세번째 온

알-아자르 사원인데 이제야 그 문 뒤의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주는 거다. 이로써 내가 사칭한 국적도 세 개.

북한인, 중국인, 일본인까지. 나를 드러내야 하는(identify) 일이 생기면 가장 유리한 게 뭘까 생각해서 필요한 국적을

꺼내 쓴 셈이다.


상인들의 숙소였다던 왈라카 어쩌구는, 마치 무슨 모델하우스 보는 느낌이었다. 새롭게 다시 지었다는 론리플래넷의

설명을 읽기 전에도, 어찌나 휑뎅그레하고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던지, 시간이 쌓이거나 사람의 체온이 묻었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래도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정도랄까. 민속촌처럼.


이런 저런 모스크들을 또 순례하며 사진찍어도 된다는 꼬임이나 느닷없는 박시쉬 요구에도 이제 익숙해졌지만,

중간에 망고주스집에 들렀을 때 또다시 낯선 상황에 봉착. 주인아저씨는 가만히 있는데 주위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지들 멋대로 5파운드라느니 7파운드라느니, 진지하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거다. 음..쪼꼬만 애들부터 여행자를 봉으로

보는구나 싶어서 좀 씁쓸했다. 애들 응원 속에 은근히 가격을 높여 부르는 아저씨의 뻔뻔함도 거슬렸고.

베이트 알 수야미는 이슬람시대의 저택인데, 생각보다 훨씬 넓고 집구조가 마치 미로처럼 뒤엉켜 있어서 몇번이나 돌며
 
못 본 구석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덕분에 10이집션파운드의 입장료가 비싸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수많은 방들에

열지어 배치되어있던 늘어진 쿠션들과 분수들, 우물들은 집안의 세과시용인가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했던 반면,

여성들이 가슴졸이며 내려다보았을 그 촘촘한 격자로 짜인 창문은 꽤나 이색적이었다. 왠지 전통한옥의 격자무늬를

닮은 거 같기도 한 그 창문은 외부의 시선은 완벽히 차단하되 내부에선 외부를 슬그머니 훔쳐볼 수 있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왕의 천칸짜리 왕궁에서 하나 모자란 구백구십구칸짜리의 호화 상류층 저택이랄까. 무진장 넓고도 화려했고,
 
분수대가 마당마다 있는 게 네개던가 다섯개던가..이슬람문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딱 그 이야기에 어울릴 법한 저택. 사실 이 사진은 저 왼쪽 귀퉁이에 고양이가 중요했는데, 이녀석이 이뿌게 앉아있다가

움직여버렸다. 개보다 고양이가 역시 귀엽다.

카이로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빌딩으로 빼곡한 스카이라인 한켠으로는 마치 중세를 여전히 사는 듯한 이슬라믹

카이로가 생생한 생명력으로 왁자지껄 펼쳐지고 있으니. 그런 스카이라인의 일부는 카이로 저 너머의 피라미드가

차지하고 있기도 했었다, 고층빌딩들의 각잡고 선 그 윤곽들 너머로. 여튼, 이슬라믹 카이로의 중심에 선 이

아름다운 문..막상 사진기를 들이대면 주위의 이집션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건 어쩌면, '역사'를 유산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삶의 터전'으로 살고 있는 사람의 시각차겠지. 근대에 박제되기 시작한 역사는 실은, 이런식으로

해방되어야 했을 거다. 한번 꼭 다시 가고 싶은데, 이집트 관광청이 이곳을 싹 정돈하고-사람들의 삶을 소거해내고-

깔끔하니 재건축을 한다고 들었다. 무슨 민속촌 분위기 만들라나 본데, 그래서 내가 갔을 때도 무진장 공사중인

이슬라믹 카이로. 최대한 빨리 다시 가보고 싶다.


나일강 근처 벤치에 앉아 바라본 카이로의 선셋은 생각보다는 이뻤지만, 그래도 역시 스모그나 대기오염때문이겠지만

태양의 선홍색이 어슴푸레한 뭔가에 밀려난 느낌이었다. 그치만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올림포스, 안탈랴, 셀축, 시와,

룩소르,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아스완에서 보았던 그 석양들을 떠올리며, 게다가 과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바라봤을 그 석양들을 상상하며 멍하니 생각을 놔버렸다.


타흐리르 광장서 질주하는 차들과 제각기 일상에서 (여행자가 보기에) 소소한 것들에 묶여 사는 이집트 사람들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여행도 실은 또다른 뭔가에 묶인 채 굴러가는 일상의 연속일지 모른다. 이러저러한

이름난 볼거리들, 그 틈새에서 악다구니하는 사람들에 눈이 가고 그래서 이곳 역시 사람들이 일상의 틀 속에서

버벅거리는 걸 보다 보면 문득 미소가 지어지고, 내겐 이곳이 그저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타지란 생각이 들었다.

난 여기서 그저 무언가를 계속 소비하며 내 안에 무언가를 계속 쌓아가는, 쌓아가려는 그런 뜨내기일 뿐인지도.


신호등도 변변찮은 이곳의 도로는..무단횡단의 진수를 보여주었더랬다. 재미삼아 합주해내는 클랙션의 무아지경과

도처에서 밟히는 브레이크의 굉음, 게다가 온전한 차 찾기가 힘들 정도로 광폭한 운전자들이라니...카이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8차선 도로 옆에 주저앉아 찍은 사진. 아마도 이런 것이 앞으로 내가 건너야 할 길이겠거니 하는 맘으로.


* 이런저런 티켓들.

다합에서 밥을 먹을 때 찾아왔던 새끼고양이가 있었다. 반가워서 버터바른 빵이나 딸기잼바른 크레페조각같은 걸

던져주다 보니 다음 식사 시간에도 알아서 찾아왔댔다. 스스럼없이 옆에서 세수도 하고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전번에 제대로 쓰다듬어줬구나, 하는 확신이랄까.ㅋ 내 허벅지가 만든 그늘에서 편히 웅크리고

쉬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내 가슴 속에 올려놨던 고양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나도 누구 한사람 대략

품어줄 만큼은 큰 거 같다고. 그래도 이제 내 호흡에 버거워 주위 사람들 못 챙기거나 신경못쓰는, 소중한 사람을

못 품어주는 일은 없을 거라는 나름의 자신감이 생긴 거 같다.

카이로-시와-알렉산드리아-아스완-룩소-다합-카이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여행, 카이로를 향해 10시간 버스를 달렸다. 자리가 저번보다 훨씬 편했는지라 문제없이 내내

잘 수 있었다. 어제 중간에 한 잠 자주지도 않고 바다에서 쉼없이 놀았던 게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던 듯. 사실

밤새 달리는 동안 버스는 몇 차례나 멈춰서곤 했었다. 참 이놈의 동네 차도 널럴하게 몰고 다닌다고 생각하며 이왕

멈춰선 김에 해뜨는 거나 보자고 생각했다. 첨에는 아무 이유없이 바다일 거라 믿었던 길 양쪽, 어둠이 양껏

웅크리고 있던 그곳이 실은 먼지 뽀얀 황무지란 사실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앞에 멈춰섰던 차를 샅샅이 뒤지고 우리차로 온 참이었다. 모든 짐을 다 꺼내놓고서 하나하나 풀어

헤치며, 가방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생쇼인가, 하고 있는데 결국 내 차례가 다가왔다. 아무리 이집트가

관광객을 보호하고 관광산업을 지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을 온동네에 풀어놓은 경찰국가라고 해도 왠 소지품검사?

어쩌면 다합에서 다른 곳으로 마약이나 다른 물건들이 밀반입될까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길 한구석에 몰아세워진 채 가방을 줄세워 차례로 열고 있는 모습이란 좀 씁쓸하다.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도 다들 툴툴대며 불만가득한 표정이면서도 여권 보여주고 짐 풀어주고.


내 차례는 금방 지나갔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여권만 보고 가버렸다. 하긴 혼자서 40명분 가방을 일일이

뒤지는 게 얼마나 짜증났겠어. 조금 후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난 다시 편하게 잠들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은 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어느 순간부터 문득 눈에 띄지 않아서 발을

쭉 뻗었다. 그가 잡히지 않기를 기원했다.




17시간여, 수많은 체크포인트(검문소)와 검표원에게 여권을 티켓을 보여줘 가면서 도착한 다합(Dahab).

룩소에서 다합까지 장장 17시간에 걸쳐 가장 큰 소원은, 의자를 한뼘만 뒤로 젖혔으면 하는 거. 하필 내 자리는

젖히는 레버가 고장난데다가, 90도, 딱 그 각도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거다. 어찌나 답답하고

불편하던지, 열일곱시간 내내 이리뒤척 저리뒤척. 온몸의 근육이 다 뒤엉키고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짐부터 숙소에 부려놓고 이제 허기가 뭔지조차 잊어버린 배를 달래주러 밖으로. 확실히 홍해 건너 사우디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휴양도시라 물가가 비싸다. 해변 한번 쭉 돌아보고, 제일 사람이 적어보이고 평온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이집션 아침먹고 이제 모르겠다. 눈앞에 바로 펼쳐진 파도, 머리위의 파라솔, 늘어지는

긴 의자, 배는 부르고 파도소리 황홀하고 바람도 시원하고. 그래, 쉬더라도 눈앞에 뭔가 그럴듯한 걸 병풍처럼

둘러놓고 쉬어야지, 그냥 호텔 방안에서 디굴대는 건 아니다. 남들 다 바쁘게 움직이는데서 혼자 늘어져있는

것도 그다지 내 스타일은 아닌 거 같고. 그래서 푸욱 쉬었다.

그렇게 세네시간 바다보면서, 또 바다를 들으면서, 그림자가 방향이 꺽여 내가 앉던 자리를 두번인가 바꾼 거

빼고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다. 저녁때가 되고 해가 뉘엿뉘엿 해질때까지도 그럴 수 있겠던데, 세시 좀

넘어서는 일단 인나서 샤워하고 다시 나워서 바다에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여태 breaking the ice는 할 만큼

한 셈이니까, 본격적으로 친해져 봐야지 하고. 숙소에서 나오는 물은 약간 짭짤한 게 아마도 바닷물을 어찌

바꿔서 수도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생각보다 파도가 높았고,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맑고 깨끗하길래 그냥 맘놓고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출렁출렁.

한시간도 채 안 있었는데 체온이 뚝 떨어졌다. 태양은 여전히 이글이글 모드지만, 아마 여기가 40도를 오르내리던

아스완이나 룩소보다 훨씬 북쪽이라 그런지 아님 그 동네서 워낙 단련이 된 건지 사실 다합은 그다지 덥단 느낌은

없었다. 바다라는 거대한 온도조절장치가 효과를 발휘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합엔 유적이나 기타 입장료 낼 게 하나도 없고, 그저 바다다. 바다랑 긴 의자/파라솔 세트. 아무 레스토랑이나

카페 들어가서 제대로 갈린 망고쉐이크가 서비스로 나오는 초콜렛 핫케잌같은 음식 시키고 걍 한나절 개기면서

딩굴딩굴, 물담배도 피고, 마약해보지 않겠냐고 은근히 물어오는 사람들이랑 수작을 부려주고. 천국이다.

삼일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걍 눈뜨면 바다나와서 아무 긴의자에 철푸덕 앉았다. 홍해 건너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국서 해가 기어코 탈출하는 걸 보고 나면, 다시 들어가서 씻고, 잠시 나른함을 즐기다가 다시 나와서 하루종일

걍 해변가에 바로 붙은 긴의자, 혹은 양탄자바닥, 혹은 모래사장에 왠종일 누워 바다소리를 듣고, 바다빛깔을

보고, 지나다니는 고양이랑 놀기도 하고. 배고프면 전과는 다른 메뉴 시켜서 맛나게 먹고, 더워지면 바다에

뛰어들어 잠시 놀아주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쓰고 싶어지면 노트를 꺼내 일기도 적어보고, 적어놓은 거 읽어

보기도 하고. 혹은 론리가이드북을 내키는 대로 펴놓고 읽기도 하고. 삐끼 아저씨들이랑 야한 농담같은 것도

주고받고,ㅋㅋ

그렇게 삼일동안 바다만 끼고 살았다. 정말 이게 릴랙스...라는 느낌이 들면서, 해지는 거 봐주며 물담배도

피워올려보고, 밤바다에 주저앉아 생각나는 노래 전부 불러보기도 하고.(난 이러면서 왠지 상실의 시대에서

나오코에게 바치는 그 멋진 장례신이 생각났다ㅋ) 24, 23, 21, 나이를 거슬러가 보기도 하고, 바다조차 흐른다.


문득 바다랑 피라밋이랑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파도를 예측할 수 있을까. 태양의 위치, 바다면의 굴곡, 재질의

차이로 인한 온도의 차, 자잘한 돌들의 방해, 해수 자체의 온도차와 그로 인한 별도의 작은 흐름..해수 표면에

떠있는 온갖 부유물들과 바람이 뒤흔들고 지나는 힘. 드문드문 새들의 날갯짓이나 부릿짓, 배가 만드는 파문에

물고기들이 튀어오르는 소소한 파문까지. 이 모든 걸 다 고려하고 파도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왜 일부러 더 어질러 볼라면 어딘가 어색하듯이, 혹은 아무리 멋지게 꾸며보려 해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이나 부담스러움이 꼭 느껴지기 마련인데, 바다는 그런 게 없다. 피라밋, 오천년의 시간으로

씻겨내어진 피라밋도 그랬다.


인간과 자연의 타협점이랄까, 여행와서 숱한 건축물과 유적, 풍경이나 자연들을 봐왔지만 결국은 자연스러움의

지향, 사막..바다..산..조금은 거릴 두고 보는 게 좋고 직접 그안에 들어가게 되면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걸

닮아가는 피라밋, 이슬라믹카이로, 터키 셀축의 유적들.


생각해보면 제대 휴가나와서까지 노가다를 뛰어 모은 돈으로 나온 여행이었다. 그것도 제대한지 사흘만에

비행기 잡아타고 나선 길, 사람이 늘어짐을 넘어서 마치 잔뜩 허물어진 벽이 마침내 더이상 무너져내릴 데가

없을 때까지 무너져 내리듯, 그렇듯 무너져 내려 쉬었더랬다.




이집트는 묘한 나라다. 피씨방에서도 코란 독경소리를 엠피쓰리로 듣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자신의 휴대폰에 담긴 야한 동영상을 어깨동무하고 같이 보자는 점원도 있다. 즐감해 주고, 몇마디

농담을 나누다가 카르낙 신전으로 향했다.

몇 대의 왕에 걸쳐 계속 확장되고 보수되고 고쳤다는 카르낙 신전. 전날 왕의 계곡을 자전거로 도느라 완전히 지쳤어서

오늘은 좀 여유있게 다니려 했는데, 이 신전 하나만 돌아보는데도 두세시간은 걸릴 듯 했다. 룩소에 도착해서 알게 된

친구 칼리드가 말한 대로 세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그 사이즈에 대한 느낌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기둥이 수백개는 되는 듯 했다. 아마 최근 트랜스포머2에서 나왔던 이집트의 신전이 여기가 아닐까, 보면서 혼자

생각했는데 영화 속에서는 카이로 기자의 피라밋 옆에 딱 붙어있는 신전처럼 나왔던 거 같다. 영화적상상력이란 건가.

그나마 다합으로 떠나기 전 룩소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를 칼리드와 함께 다닐 수 있어서 사진이 좀 남았다.

그래서,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한국인누나들이 그랬듯, 아스완서 렌이 그랬듯, 룩소르에선 칼리드가 출발할

때 배웅해 주었다. 머, 앞길을 선명한 비전으로 가다듬고 오겠다거나, 세상에 다시없을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오겠다거나, 그런 거창한 걸 바라고 온 여행은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다니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는 게 제일 큰 뿌듯함인거 같다.

내가 무언가를 왜 하고 싶냐, 고 스스로 자문했을 때 왜냐믄 내가 그걸 하고 싶으니까. 라는 대답으로 충분하다는
 
것. 아마도 대뇌피질쯤에 각인되었을 그 무수한 해돋이와 석양의 풍경, 매혹적인 온갖 자연의 풍광들과 인간이
 
이루어놓은 호방하고 때론 우악스러운 유적..건축물들은 덤, 쯤 되겠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치고 말을 섞고 혹은 잠시나마 여행을 함께 한 사람, 사람들.. 언제나 난 사람들에
 
기대를 덜 걸었고,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내게 선물과도 같이 주어지곤 한다.


* 비분강개하게도, 인물이 사진 주제를 많이 훼손시킨 사진들.

알고 보니 거기서 왕의 계곡 입구까지가 또 500미터다. 자전거를 묶어두고 왠 모노레일같은-에버랜드에서 본 듯한-차를

타고서야 제대로 도착해서, 람세스 6세가 묻혀있는 무덤부터. 아직도 그 색이 그토록 선명하게 남아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루트모스3세나 람세스2세 모두 공사중이어서 세크메트랑 람세스9세의 무덤을 들어가봤는데, 이제서야 좀

히에로글리프랑 그림들이랑 친해진 느낌이다. 왠지 소화가 좀 되는 듯 하달까. 여태까진 그 압도적으로 수다스런

그림들에 다소 질렸거나 소화불량에 걸린 것 같았다.

내려와 돌아오는 길은 쉬웠다. 그 모노레일같은 차에 일단의 여행객들을 태우고 출발하려던 가이드 하나가 나를

자신 옆자리에 끌어앉혀주는 덕분에 난 공짜로 그 웃긴 차를 타고 내려왔고, 그 아저씨의 '안녕히 가세요'란 인사를

받으며 신나게 자전거를 달려 내리막을 주파했다. 그대로 Tombs of Nobles로.

뜻밖에도, 그 무덤군이 소재한 구릉들 위에 그대로 왠 판자촌 같은 마을이 세워져있다. 경찰할아버지가 굳이

붙여주려던 가이드를 사양하고 올라가다가, '야방'이라는 이름의 꼬마애한테 잡혀서 길안내를 받게 되었는데,

이녀석 상당히 착실하고 눈치도 빠르다. 일본인 여행자들이 야방, JAPAN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다.

7개나 되는 띄엄띄엄 떨어진 무덤들을 도는 동안 별 얘기없이 밖에서 계속 기다려주고, 열쇠를 가진 무덤지기

아저씨들도 열심히 불러다 준다. 애초 가이드가 없이는 잠긴 문 너머 무덤들을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였다.

막판에 혹시나 하고 물병을 건네니 몹시 목이 말랐던 듯 순식간에 다 마셔버리는 걸 보고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워낙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긴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Senifer의 무덤이다. 천장이 온통 싱그런 보랏빛깔

포도덩굴과 포도그림이었다. 그린지 몇년 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된 데다가, 워낙에

색감이 이뿌게 잘 표현되어있었다. 어찌나 멋지던지 무덤밖으로 나오기가 싫을 정도였다. 나머지도 모두 멋졌다.

정형화되고 위엄을 부리려다 다소 딱딱해진 느낌의 왕들보다 훨씬 자유로워보이는 그림 스타일에, 풍경화같이

그려진 일부 이색적인, 실험적인 그림들, 카르투쉬와 히에로글리프가 아예 없거나 적당히 감해져 있어서 더욱

그 참신함이 돋보였던 것 같다.

그 무덤 중 하나였던 듯 한데, 사실 이집트의 Hieroglyph란 거, 저런 식으로 모두가 채색되어 있었다는 거다.

왠지 예기치 못한 색깔의 선택,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감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림을 상상할라치면...

이집트 외딴 오아시스 마을에까지 수다떨 준비가 되어있는 그들의 넘쳐나는 유산들을 본다면, 거기가 아마도

상상력의 경계쯤 되지 않을까.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자전거에 실었던 2리터들이 물통 세개가 반나절만에 비어버렸다. 너무 지쳐서 중간에

기념품점에 들어가서 콜라 한병 마시며 구경하다가, 무덤에 가서도 지하에 위치한 덕에 품고 있는 냉기에

감사하며 한참이나 쉬고, 그렇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람세스3세의 신전...메디나 하부까지 돌아봤다.


그가 여느 왕들보다 훨씬 깊이, 그리고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많이 파놓은 왕의 상징, 그의 카르투쉬를 보고

있자니 왠지 비감함이랄까 안쓰러움마저 들었다. 보통 남들은 1센티정도의 깊이로 카르투쉬를 조각해 놓는데,
 
그의 것은 무려 4-5센티? 그 정도 깊이로 조각해 놓았댔다. 애비에 대한 자격지심이었을까, 아니면 잊혀지는

게 그토록 두려웠던 걸까. 왠지 군대 갈 즈음의 내가 떠올랐다.


* 왕의 계곡 입장권 퍼레이드.









생각같아선 6시에 딱 룩소르 서안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자전거를 빌리는 게 아무리 빨라야 7시가 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아침삼아 간단하게 바싹 마른 팥빵..? 파이 비슷한 걸 먹고 출발했다. 내셔널 페리 선착장이 워낙 머니까 그냥

자신들의 펠루카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라 했던 펠루카 호객꾼의 구라와는 달리, 자전거로 한 10초 달리니까 바로

선착장이 나온다. 정말, 딱 10초 달렸는데 선착장이 나왔다. 대단한 구라빨이라 해야할지..

신나게 좀 달린다 싶을 때 덜컥 멤논의 거상이 나왔다. 네이*에 빌어 나온 자료사진, 이왕 찾아본 김에 설명도 좀

덧붙이자면 테베 근처 왕실 무덤군인 네크로폴리스의 입구에 있는 이 거상은 로마시대에 각광받았던 관광지라고

전해진다. 실제 크기는 이렇게 사진으로 볼때보다 훨씬 더 크단 느낌은 있지만, 워낙 허물어져서 그런지 뒤의 황량한

돌산과 함께 그저 황폐하단 느낌이 짙었다. 그래도 이 거상들이 왕과 왕비들, 귀족들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들이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자전거 페달 밟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무덤 중 가장 볼만하다는 네페르타리 여왕의 분묘는 역시나 닫혀 있다는 이야길 듣고 살짝 실망했다. 가장 먼 왕의

계곡부터 갔다가 고만고만하게 붙어있는 나머지 무덤군들을 좀 더 지나 해가 중천에 뜨고 더워질 때 돌아볼 작정으로

페달을 밟았는데 무진장 힘들다. 온통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그것도 약간 오르막길인데다가 벌써부터

미친듯이 무덥다. 해서 길을 틀어 합셋수트 신전부터.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건물이다. 아마도 인디아나 존스였던가, 뭐 그런 데였을 거다. 돌산을 깍아내고 또 가공한 돌을

차곡차곡 이어붙혀 만든 건물이라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그 위치가 정말 절묘하다. 산 중턱에 덜컥 붙어있는 모양새랄까,

산은 온통 붉은 빛. 보기만 해도 가슴이 황량해지고 마는 그런 무생물스러운 산이다. 생명체 하나 품지 않을 것 같은 산.

신전도 같은 빛깔이다. 죽은 이들만 품을 듯한 느낌의 황량한 신전.

그런데 또 그쯤에서 룩소르를, 나일강 동안을 되돌아보면 온통 초록빛이다. 뭔가, 인디아나 존스가 식인종이 우글대는

정글이 지난다거나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짜잔, 하고 나타나는 낙원 샹그릴라나 잃어버린 성지처럼 그렇게 어슴푸레

나타난다. 야자수도 잔뜩 보이고, 약간의 건물을 제하면 마치 환영인 양 신기루처럼 펼쳐지는 싱그런 녹색 대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거기서 일하는-아마도 가이드인양 박시쉬를 잔뜩 뜯어낼 법한-아저씨들이 모여앉아

있다가 날 부른다. 경계모드로 돌입, 일단 순순히 가보니까 밥먹었냐고, 같이 빵이랑 차 먹자고.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일일이 박시쉬-팁-을 주지는 않아도 될 거고, 먹고 보자는 속셈 반, 꼬질꼬질하고 새까맣게 타버린 내가

2리터들이 물병 세개를 든 채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게 얼마나 불쌍했겠나 하는 공감 반, 함께 앉았다. 히에로글리프가

잔뜩 남아있는 돌멩이를 깔고 앉아 아저씨들과 함께 빵과 차를 나눠 먹었다. 여전히 발굴중이거나 복구중인 모양인지,

유적 잔해들이 걍 난해하게 흩어져있는 걸 아저씨들은 의자로 쓰고 있었다.

잠시 쉬다가 인사하고 다시 왕의 계곡으로, 어찌나 먼 길이던지. 게다가 그 먼 길에 어떻게 표지판 하나가 없을 수

있는지. 그러고 보니 시와 오아시스 마을도 그렇고 어디에서든 투어 위주로, 투어가 제일 편하도록 해 놓았을 뿐

개별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나 안내표지판 같은 것에 꽤나 인색한 것 같다. 땀을 삐질대며 구비구비 고갯길을

돌아오를 때마다 실망하길 몇 차례, 지쳐빠질 때쯤, 혹은 길 잃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즈음 나타난

왕의 계곡 매표소.

캐나다 의사아저씨 렌과 펠라페를 맛나게 먹구서는 걍 기차역에 마침 서있던 기차를 덥썩 잡아탔다.

3등칸이었다. 2이집션파운드(400원 가량?)만 내고 에드푸까지 갈 수 있었는데, 덜컹이며 무심히..요샛말로 '시크하게'

달리는 허름한 기차는 이제 우리는 없애버린 경춘선 열차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 난 애초 내가 탔던 칸에서

쫓겨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겪긴 했다. 외간남자와 함께 앉아있을 수 없다며 거세게 손사래를 치는 검은 차도르

차림의 아주머니들이 옆칸으로 밀어냈던 것.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나는 머..그저 느낌으로 그렇게 이해했을 뿐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남자인 것에 상관없이 내 생김새가 맘에 안 들었다거나 그런 건..아니길 바랄 뿐.


오히려 다행이었다. 옆 칸에 가서도 역시 유일한 외국인으로 만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친절한 이집션 부부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빵에 치즈를 발라서 주기도 하고, 기차칸서 간식으로 팔고 다니는 볶은 콩..아마도 소금물에

푹 절였다가 볶은 듯 엄청나게 짰던..그런 것도 사서 듬뿍듬뿍 나눠주고 그랬다. 아마 적도에 인접할만큼 뜨거운 동네니만치

땀을 많이 흘리는 것에 대항해 염분을 보충하려는 건가, 그렇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왕소금을 씹는거 같은 느낌이라구

운운 혼자 머릿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그들의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에 절로 웃음이 났다.  

3등객석은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었는데, 마치 우리나라 옛날 기차처럼 닭 같은 것도 들고 타고, 짐보따리도 잔뜩 

이고 타고, 그런 류의 푸근함이 느껴졌다. 나일강을 끼고 덜컹이며 유유히 움직이던 그 열차칸의 진동과, 흔히 외국인의

암내라 부르는 것과는 또 다른그 짙은 이질적인 내음, 닭털이 날리고 사람들의 와글와글함 사이에서 동그마니 던져져

있던 날 이어준 건 그 사람들의 따스한 정이었다.


나른하고 유유자적한 기차의 율동감에 나도 몰래 졸고 있다가, 아까 그 가족들이 깨워줘서 에드푸에 내려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경찰이었다. 자기들끼리 잔뜩 뭐라뭐라하더니 택시 타라면서 차 한대를 잡아준다. 십오 내랬다가 십 내랬다가.

나름대로 깎는다고 오파운드 불러놓고는 배짱 튕겼더니 뭐, 일단 타기로 했다. 근데 이게 알고 보니 이게 택시가 아니라

일종의 마을버스 같은 거였던 거다. 차 뒤 짐칸이 개조된 곳에 사람들이 잔뜩 서서 타고 내리는 걸 함께 부대끼면서

이게 절대 오 파운드일리가 없다 싶었다. 내릴 즈음 다른 사람들처럼 오십 피아스타만 내고 내려버렸다. 

신전엔 거의 아무도 없었다. 있어도 이집트인 관광객 하나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디선가 시작된 아잔의 메아리소리가

신전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을 우르릉 흔드는 느낌이었다. 걍 앉아서 하염없이 그림보고 히에로글리프 보고 하다가,

이제 됐다 싶어져서 다시 기차타러 출발. 많이 더워져서 망고주스를 애타게 찾다가 큰 컵에 1.5EP라는 곳을 발견,

연이어 두잔을 들이키고 한잔을 사서 물병에 옮겨담았다. 이건 거의 중독이다. 여기에 마약탄 게 아닐까 싶을 정도.


다시 기차역, 3등차를 타고 룩소르에 입성했다. 꾸준히 나일강을 끼고서, 나일강물의 빛깔은 뭐랄까, 심오해보인다.

투명하게 맑지도 않고, 그렇다고 더럽다거나 거부감이 들지도 않는...적당한 의뭉스러움과 요요함을 숨긴 듯한.

룩소르 피씨방에서 칼리드라는 이집션을 만났다. 피씨방에서 미니홈피를 확인하다가 알바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알바생이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거다. 다짜고짜 넘겨준 전화통을 붙잡고 사실 적잖이

당황했고 이걸 어째야 하나 싶었는데, 짧고 성긴 대화가 오간 잠시 뒤에 그는 피씨방으로 직접 찾아왔다.

콧수염, 턱수염도 그럴듯하고 풍채도 딱 벌어진 게 아저씨스럽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고작(!) 스물하나. 아직

대학생이고 투어가이드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내친 김에 룩소르 신전의 야경을 보러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혹해서 또 따라나섰지만 혹시나 몰라 경계심은 살짝 유지하기로 했었다.


룩소르 신전 입구서 한 '코리언'을 만났다. 칼리드가 먼저 알아보고 내게 저기 '코리언'이 있다고 말해줬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꺼리는 병이 도져 잠시 쭈뼛거리는데, 그에게 몇몇 이집션 애들이 다가와서 돈달라고 손내밀고

그러는 거다. 그러자 바로 한국말로 터져나온 욕의 향연. 마치 여긴 내가 하는 말 아무도 못 알아들을 테니 걱정없이

상스러워질 수 있다는 듯이. 질려버려서 걍 멀어져버렸다. 단지 과거의 돌덩이들만 보러 여행온 건 아닐텐데..

거기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지. 상대적으로 칼리프에 부쩍 호감을 갖게 되어, 그의 그럴듯하게

자세가 잡힌 설명을 들으면서 룩소르 신전의 아름다운 야경을 잔뜩 구경하고, 뭔가 스토리가 잔뜩 웅숭그리고 있던

그곳의 정취에 함뿍 젖을 수 있었다. 빛이 모자라 잔뜩 흔들리고 깜깜한 사진들과 함께. (그래서 사진이 없다..ㅡㅡ;)


담날 새벽엔 변태를 만났다. 뉴욕에서도, 팟타야에서도, 심지어는 이집트의 아스완에서까지 변태는 내 친구..엉?

아침에 펠루카를 탄 채 나일강 위에서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5시, 여전히 깜깜한 한밤중에 나일강변에

나섰더니 왠 이집션이 다가왔다. 시시껄렁한 얘기하고 어쩌구 하더니 불쑥, 자기 집에 아무도 없댄다. 아내도 없고,

자식들도 없고. 그리고 long banana가 있다나..not small이란다. 쳇..여전히 못 알아듣고 있던 나는, 50파운드

주겠단 얘기를 듣고서야 그제야 그제야 알아버린 거다. 일단..너무 싸다고 거절.ㅋㅋ 50파운드? 우리돈 오천원이잖아.


근데 이자식, 아니랜다. 여기 정가가 그렇다고, 얼마를 원하냐고 진지하게 치근덕거렸다. 장난으로 대거리하다가는

정말 큰일나겠다 싶어 더럭 겁이 났다. 단호히 거절하고 돌아서서 속보로 퇴각하는데도 계속 따라오길래..경찰이 보이는

곳으로 도망왔다. 성질 좀 내볼까 했으나...어찌나 정말 '남자답게' 생겼던지 화는 못 냈다.

그러고 찍은 해돋이 사진들. 아침 5시반..그 바나나 아저씨를 만나고 난 직후다. 더구나 펠루카를 빌려서 나일강 서안으로
 
건너가 해돋이 보기로 약속을 해놓고서 이 아저씨들이 바람이 없어 펠루카는 안된다며 모터보트로 건너갔던 터다. 전날

황혼을 펠루카에서 보려던 계획을 빵꾸낸지라, 대신 해돋이를 보겠다던 의욕에 불타던 내 기분이 살짝 흐려졌었지만...

하늘이 밝아지고 천지가 뿌얘지더니 그제서야 은근슬쩍 올라오는 해를 보며 모든 걸 용서할 듯한 마음이 되어버렸댔다.


6시면 해가 뜰 줄 알았더니 동쪽에 딱 산이 있어서 생각보다 꾸물거린다. 6시 50분쯤에야 해를 봤다. 단순히 "해뜨다"란

표현으로 가리우는 그 지루할만큼 길고도 변화무쌍한 국면들...뿌연 하늘, 차츰 진해지는 청색과 서편 끝에까지 뻗어나가는

빛의 알갱이들, 동편이 차츰 붉게 달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이미 햇님이 어디선가 뜬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아졌다 싶을

즈음, 불쑥, 하고 해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고개만 빼꼼히 그치만, 점점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완전히 지면에서 떨어져

나갈 때조차 아직은 빛을 내는 아주아주 똥그란 다홍빛 원반같을 뿐. 그 열기는 한참 후에야 내게 도착해서 따뜻함을

전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춥다느니 하는 통속적이고 진부한, 마냥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말도 있지만, 기실
 
해 뜨기 전에 이미 사위는 모두 밝아진다는 점을 주목할 수도 있는 게다. 용례라면,

A : "해뜨기 전이 가장 춥다잖냐, 물고문, 성고문만 나오면 80년대와 다를 게 없다지만 좋아지겠지."

B : "꼬됴 이자식아. 해가 뜨기도 전에 이미 사방은 온통 밝아온다는 말도 모르냐."


여행 중 숱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가라앉는 해를 봤지만, 이때의 해돋이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물론, 그러고 나서

이 모터보트 선장이 애초 약속과는 달리 바가지를 씌우려는 바람에 불끈, 또 깡따구를 부려야 했지만. 머, 인샬라다.

이집트는 여전히 해가 떠오르는 동쪽...나일강 동쪽변에만 그들의 삶을 꾸린다. 서편은 별로 발전시킬 의욕도

없는 거 같고, 일단 과거로부터의 무덤이 너무도 많아서. 나일강을 보고 있으면 보통 볼 수 있는 water와는

다르게 점도가 상당히 높은 거 같다는 착각이 든다. 유속이 그리 느리지도 않은데, 수면에 계속해서 파문이

그려지면서도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살짝 끈적스러워 보이면서도 무진장 맑아보이는 나일강. 물 밑에는

거대한 물고기가 잔뜩 산다.






아부심벨에 가려면 아스완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한다. 실제 출발시간은 4시가 넘어서지만, 가기 전에 경찰에서

아부심벨로 향하는 차량대수와 총 인원수를 파악하고 행렬의 앞뒤에 패트롤카가 붙어 호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서 절대 못가고, 결국 투어를 할 수 밖에 없단 얘기. 97년엔가 이집트 룩소르서 관광객대상으로 테러나고 일케

경찰이 잔뜩 깔렸다는데, 그와중에 어제 또 테러가 났으니 이제 이집트 난리났겠지 싶다. 관광자원으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관광객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다면...이미 이집트인들은 거의 계엄상태인양 쫙 깔린 경찰에 눈치를 보며

지냈었더랬다. 카이로에서 만난 한 이집트친구는 이집트인과 외국인이 같이 붙어다니는 것만 봐도 경찰이 와서 이집트

사람을 조사할 정도라고 그러던데.

아부심벨 가는 길은 한 3시간 채 안 걸린 거 같은데, 좁디좁은 15인승 미니버스에 빼곡히 실린 채 그래도 자보겠다고

잔뜩 힘쓰다가 문득 눈뜨니 6시쯤, 해가 꾸물꾸물 뜨고 있었다. 황량한 황토빛 황야에서, 아직은 그다지 강렬하지는

않은 태양이 미처 열기까지는 전달하지 못한 채 분홍빛 양광만을 세상에 꽂아주고. 반사적으로 사진 함 찍고 잠시

감상해주다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사실은 끊임없이 펼쳐진 듯한 황야, 황량하고 쓸쓸한, 단조로운 풍경이 계속된

것에 지치기도 했다.

8시쯤, 기사아저씨가 갑자기 웰컴 투 아부심벨~! 외치는 소리에 깼다. 불쑥 눈앞에 나타난 나즈막한 산.

뒤로부터 정면으로, 조금씩조금씩 드러나는 아부심벨의 그 유명한 네 기의 석상은 생각만큼이나 멋졌다.

각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카르투쉬를 오른쪽 어깨와 가슴에 새기고, 먼곳 어딘가를 당당히 응시한 그 자세가

참 위풍당당하다는 느낌.

큼지막한 신전의 덩치도 덩치지만, 그 온갖 벽면과 천장을 온통 히에라글리프(이집트 그림문자)와 그림으로

가득 채워놨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이빠이 안력을 돋구고 사방을 쉼없이 돌아보며 눈을 엄청나게 혹사시켜야

그걸 그래도 대략이나마 훑을 수 있을 정도니, 왠만한 궁전의 호사스러움에 비길만하다.


뭘 그렇게 남기고 싶었을지, 그렇게 극렬하게. 이집트인들이 죽음에 그토록 집착한게 아니라, 사실은 그 행복한

삶을 죽음 너머까지 잇고 싶어서 그토록 사후에 대한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 그림과 도안들은

그저 치장을 위해서라거나 무의미한 단편들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하다. 뭐랄까..

신전 자체가 한권, 혹은 그 이상의 책으로 느껴진달까.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사람이 침튀겨가며 무언가 웅변조로

스스로 감동먹은 채 잔뜩 얘기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마치 렌이라는 캐나다 의사아저씨가

종종 그렇듯,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서 흥분하다 보면 말이 무진장 빨라지는데 그럴 때 내가 느끼는 감정, 뭔말인지

대략은 알거 같은데 맥락이 대부분 끊기고. 그저 어렴풋한 뉘앙스와 의도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 그런 느낌이

바로 내가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그 고대의 텍스트에 대해 갖는 거랑 똑같은 거 같다.

혹 내가 그걸 읽어내고 벽면에 걸친 스토리를 이어낼 수 있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릴

거란 생각...그것은 람세스2세의 자기자랑이거나 마누라자랑, 혹은 이집트 위대하다 식의 쓸데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혹은 이 신전에는 뭐가 얼마나 들어갔고 짐 무슨 신에게 언제 제사를 지내며..그런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그 히에라글리프와 그림들은 자체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무식'자의 눈에 신비로움을 더하고,

게다가 그토록 방대하고 빽빽하게 채워진 스토리를 읽어내릴 수 있다면 일종의 외경심마저 들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옆에 있는 좀 작은 규모의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도 가봤지만 글쎄..아부심벨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가득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야기들이 내게 신기함과 이국적인 느낌 이상을 던지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이상 아부심벨의 전투신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어찌보면 이집트 고대문화는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 모두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거 같다. 오벨리스크가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이나 교회의 첨탑으로, 히에로글리프가 모스크의 캘리그래피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는 상형문자가

교회의 십자가 원형태로. 올곧이 전승되었다거나 의식적으로 계승되었노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영향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신기하게도 또다시 체코에서 온 파블로와 마르코 남매를 만났다. 어제도 기차역에서 멀찌감치 날 봤다고 하던데, 참

질긴 인연이다. 뭐..여행자들 가는 루트란 게 워낙 비슷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부심벨 안에서 만나다니 하도

반가워서 덥썩 사진 한방 찍으려다 제지당하고, 밖에 나와 함께 사진 한장.


9시까지 미니버스로 돌아오라 하던 차에, 시시각각 여행객들이 단체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길래 질려버렸다.

한번 다시 완상해주고는 차로 돌아가선, 같은 숙소에 머무는 미나꼬와 그녀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아스완 하이댐으로.

마침 그녀 친구중에 하나가 하루끼의 '댄스댄스댄스'를 읽고 있길래 엉성한 영어로나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아스완하이댐은, 볼 건 하나도 없으면서 보안에는 가장 철저했다. 사진 한장 찍지 못하게 할 정도.

다음으로 필라에 신전, 기대했던 만큼 멋졌다. 섬에 세워진 신전이란 컨셉도 그렇지만, 신전의 외벽을 크게 장식한

인물들의 조각들이 참 볼 만했다. 다만 거슬렸던 건, 비잔틴 혹은 이슬람 문화가 유입된 이후, 새롭게 등극한 신의

이름으로 이전의 신들을 말살하려는 듯 잔뜩 뭉개버린 흔적들이다. 태양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가 험상궂게 새겨져

있거나, 온갖 신들의 얼굴을 위주로 몸체가 완전 뭉개져 있고, 그러다 힘겨움 걍 얼굴만 지워놓기도 하고.

단지 1800년대에 다녀간 사람들의 장난기어린 낙서가 아니라, 새로운 신의 새로운 '미신'으로 과거를 그렇게 거부

혹은 부정하려는 게...얼굴 지운다고 어떤 신적인 힘이 사라질 거라 믿는 건 또 하나의 미신일 텐데.

어쨌든, 캐나다에서 의사질을 하고 있다는 렌이라는 아저씨와 같이 보조를 맞춰 돌기도 하고 때론 혼자 돌아보기도

하면서, 사진 찍고 싶을 땐 주위에 있는 울 차 사람들-어느새 얼굴도 익고 친숙해져 버린-을 아무나 잡아 부탁하며

투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신전의 수호신인 호루스. 그의 샐쭉한 표정이나 다소 새침스러워 보이는 자태가 은근히 웃음을 불렀다.

약간 사팔뜨기같기도 하고..이 새 말이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은 미완성 오벨리스크. 이미 해는 중천에서 이글이글, 저토록 까맣게 탄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정오의 시간이었다. 역시 투어는 이래서 문제다. 빈칸 네개 만들어진 데다가 숙제했다고 도장 하나씩 받는

기분이랄까, 그땐 이미 여행이란 기분은 싹 사라지고 얼른 '해치우고' 가버리기만 바라게 되는 거다. 게다가

아부심벨과 필라에 신전이 주였다면, 아스완 하이댐과 미완성 오벨리스크는 그에 비해 현격한 체급차가 나는

소품에 불과하다. 미완성 오벨리스크, 가보니 걍 커다란 돌덩이, 쪼다말고 버려진 돌덩이 하나 덜렁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일종의 채석장이자 그토록 거대한 오벨리시크나 피라밋들이 결국 인간의 손으로

저렇게 돌 하나를 쫄아 만들어졌다는 걸 증거하는 강력한 현장인 건 맞다. 다만 그게 워낙 덜 만들어진 거라서

기둥의 삼면만 설렁설렁 다듬어지고 아무런 다른 손길이 미처 닿기 전이었는지라 좀 많이 밋밋했단 얘기.

조금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저걸 마저 어떤 식으로 꾸며넣었을지(그니까 수다스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새겨

넣었을지), 어떻게 세우고 밑면을 어떻게 다듬고 어떻게 운반했을지 정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기진맥진해 있던 상태라 그런 거 생각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얼른 퇴각했다.




밤 10시 기차,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13시간을 달렸다. 내가 앉은 좌석에 또다른 티켓이 발부되어 잠시 소란이 이는 등

영 못 미더운 이집트 기차의 저질 서비스를 실감하고 내리 자다가, 꽉꽉 들이찼던 사람들이 많이 빠진 한적한 찻칸에

동그마니 남았다. 아침 6시밖에 안 되었는데, 유리창 너머 햇살이..느낌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남으로 내려갈수록

심상찮다. 입으로 이글이글 소리를 내면서 내리쬔다는 느낌?


불쑥 승무원 아저씨가 객실에 들어오더니 통로바닥에 깔린 카펫이 깨끗하다고 막 자랑을 늘어놓는다. 어이없게도

그러고 나서 박시쉬 달라고. 기차 카펫 깨끗하니 팁달라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하이 머니 헬로우 머니 어쩌구 하는

아이들도 적나라한 사례였다. 뭐랄까, 그들의 생업 자체가 관광객에 달려있어서, 아직 그다지 세련화하지는 못한

-서비스 정신으로 치장되지 못한-fight for money가 더욱 두드러진다고 느꼈다.

숙소를 잡자마자 나섰다. 정처없이 아스완 시내구경 좀 하다가, 이집트 남단의 원주민이라는 누비안족의 문화나 유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엘레펀트 아일랜드에 들어가기로 했다. 20파운드(2000원)이라는 관광객요금을 요구하는 페리호
 
선장을 쌩까고 1파운드(200원)의 현지인요금만 내고 건너간 그 섬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소중히 간직한채 5시간여 거닐며

온갖것을 볼라다가 일사병 걸리는 줄 알았더랬다. 그 조그마한 섬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던 내게 자신의 짐을 들리시곤,

자신의 집방향과 같은 곳에 있던 누비안박물관을 안내해 주셨던 순박한 아저씨, 들고 갔던 2리터짜리 물병을 다 비우고

탈진해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뜨신 차이를 나눠줬던 맘좋은 아저씨..들 덕분에 살아돌아나왔달까.

햇빛 가릴 한 줌의 그늘이 아쉬워질 정도의 열기, 눈알이 화끈거리며 말라붙는 듯하던 그 열풍이라니. 물통 역시

금세 끓어오를 듯이 뜨거워져서는 물이 이미 미지근함을 넘어서버린지 오래였다. 박물관에선 그래도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관리인이 따라다니며 불켜줬다가 다시 끄고 설명도 해주고 차도 함께 마시고 그랬다.

펠루카와 엘레판트 아일랜드. 강에 내려앉은 나비떼 같은 저 하얀 돛단배들이 바로 펠루카. 무동력범선이랄까.

오로지 돛의 힘으로 움직인다는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는 노를 쓰고. 그치만 갈수록 모터도 다는 추세인 거

같았다, 펠루카 선장들과의 인터뷰 결과 노질이 너무 힘들어서 모터를 다는 거라나. 아스완은 수단과의 경계에

가장 근접한 도시인지라, 내가 내려간 최남단의 도시이기도 했다. 아부심벨은 물론 여기서 한 160킬로 더 남단에

있었고. 무진장 더웠다. 하루에 1.5리터 펫병을 네개까지 먹을 정도였으니...에어콘은 커녕 선풍기조차 천장에 붙은

크다란 팬밖에 없는 숙소는 그저 밤에 잠잘때만 들어갔고, 나머지 시간은 저 유유한 나일강의 유유한 펠루카를

바라보며 유유하고자 했다.

 펠루카와 나일강..은 참 잘 어울린다. 한강에는...거북선이 어울릴라나. 뜬금없이 한강도 보고 싶어졌다.

어딜가나 박시시(일종의 팁)을 요구하는 이집트인들, 오죽하면 카이로공항에 첨 떨어져서 화장실을 이용할 때
 
휴지 빼주고 건조기 버튼눌러주고는 팁을 요구할까..어딜가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내가 자발적으로 박시시를

줘야겠다고 맘먹은 아저씨, 너무도 더운 아스완에서 그것도 2시에서 3시쯤에, 아스완 서안에 있는 tombs of

nobles를 안내해가며 다니는데 할아버지가 넘 힘들어하는 거다. 내 욕심같아선 몇개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나도 지쳤고 물도 떨어졌고 해서 걍 만족하고 내려오는 길. 이미 볼만치 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덤들의 열쇠를 가진 할아버지는 내가 보자고 하는 무덤에 앞장서 도착해 문을 열어줬고, 내가 보고 나온 무덤을

다시 잠그고는 서둘러 앞장섰더랬다. 무덤들은, 비슷하게 정형화된 양식인 듯 했지만, 그 안에 온통 가득한

히에라글립스(상형문자)들과 그림들은 정말 볼 만 했다. 단순히 치장이나 배경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일생을

세세히 새겨넣어 후생을 기하려는, 그런 어떤 의지가 강렬하게 와닿을 정도로,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내게 등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을 앞세우는 것은 살짝 안심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호의가 쌓여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이라면, 난 그사람이 쥐여준 끈을 잡고 길을 인도받는 셈이다.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고, 누군가에게서 등을 빌리고. 그 길이 비록 뜨끈뜨끈한 모래바람이 휘몰아친대도, 태양이 아무리

녹여내릴 듯 작열한대도.(저 짙은 그늘이라니...)


피라밋을 본격적으로 들어가 본다는 설렘에 6시부터 설레발을 치고는, 7시에 출발. 어제와 같은 경로로 기자를 향하다간

갑자기 미니버스가 서버리는 바람에 당황하기도 하고, 일단 안개가 뿌옇게 서린 피라밋 단지 내로 입.장. 이럴 수가.

어제 밖에서 볼 때는 약간 생각보다 사이즈가 작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걸...어마어마하고 엄청난 박력이다. 그렇다고

인위적인 위압감이나 어떤 치장의 기색도 없이, 그냥 거기 서 있다. 하나, 둘, 그리고 좀 걸어가서야 보이는 세번째

피라밋.

쿠푸왕의 대피라밋이나 다른 것들이 모두 피라밋 내부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이야기에 개장 시간에
 
딱 맞춰 온 거였는데, 비슷하게 도착한 대형 고속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늘어서있길래 은근히 긴장했다. 그래도 무난히

티켓을 끊고, 세 기중 가장 큰 쿠푸왕의 대피라밋으로. 카메라를 입구에서 압수당하고는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피라밋

내부에 틈입, 잠시 길을 따라가보면 바로 오르막이 좁게 나있다.

방금까지 난 길은 좀 누군가 파낸 듯, 억지로 만들어진 길이라면, 여기서부턴 아니다. 애초부터 돌을 그렇게 짜맞춘 게

분명한, 정말 돌들이 별반 오차없이 매끈하게 놓인 게다. 중간에서 더 가파르게 오르막 길이 되더니 피라밋의 중심,

쿠푸왕의 묘실이다. 안방만한 크기에 돌하나를 파서 만들었다는 석관이 덩그라니 놓였는데, 그 방을 사각형형태로

딱 짜맞추었다는 게 정말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피라밋이 걍 종이로 접어 만든 속빈 구조물도 아니고, 바닥부터 그

커다란 돌들을 차근차근 채워나갔단 거 아닌가. 그러면서 오르막길도 내고 이런 커다란 방도 만들고. 게다가 산소 유입을

위한 배기구까지 감안했다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또 있다. 돌들이 관광객들의 손에 닳고 닳아서 그리 맨들거리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만들 때부터 그렇듯 반질거리게 가공된 상태였다는 거다. 그 몇만개 돌들이 모두 다 그렇게 세심하게,

정밀하게 세팅되어 안에 반듯한 방과 정교한 통로를 야무지게 확보한 큰 '산'을 이룬 거다. 정말 말로는 뭐라 더

표현하기도 힘들다. 이러니 외계인이 만든 거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구나, 공감해버렸다.

그 중심에 놓인 쿠푸왕의 석관, 그 까맣고 커다란 관 안에 누워 잠시 쉬어볼 수 있었다. 한번 둘러보고 다시 나가려던

차에, 나가기 직전 아쉬워서 다시 한번 오르내리니까 안내인 아저씨가 선심을 썼다. 들어가 보라고, 괜찮다길래 좀..

개념없는 짓을 해버렸다. 그 안에 들어가서 누웠다. 무릎을 약간 접어야 했지만, 몸이 딱 자리를 잡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여기에 몇천년동안 누워있었을 쿠푸왕의 미이라..그는 어떠한 세계를 머릿속에 품고 있었을까. 이런 구조물을

자신의 사후를 위해 준비시킬 만큼의 권력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검정색 돌의 서늘함인지, 아니면 그의 바짝 마른

몸에서 배어난 냉기인지 손발이 차가워질 정도로 한기가 느껴지길래, 한 5분 정도 있다가 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석실에서 내가 일어서길 기다렸던 안내인 아저씨는 맘씨 좋게 웃으며 박시시를 요구했고, 난 흔쾌히 '드렸다'.

피라밋을 등산하는 것도 꽤나 인기있는 익스트림 스포츠 중 하나였다고 했다. 플로베르였던가, 그가 이집트 여행을 할 때

피라밋 위에 올라 낙서를 남겼다는 수기를 본 적이 있다. 나도 그 이래로 꼭 한번 올라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더이상

가능할 법하지가 않다. 낙타타고 있는 경찰이 50미터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물어보니 대답이 두 개다. 누군가 떨어져

죽은 이후로 지키고 섰다는 이야기가 하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대비하기 위해 그렇단 이야기가 둘.

난 죽지 않고 잘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내 생각엔 스핑크스는 덤이다. 사진으론 꽤나 큰 것처럼, 피라밋과 비슷한 사이즈인 양 찍히기 일쑤지만, 실제로

스핑크스는 생각보다 훨씬 작다. 단지 피라밋을 위한 수호상, 피라밋을 지키는 부록물 같은 거니까 그게 당연한지도.

피라미드...첨에는 맨들맨들 크리스탈같이 이뻤던 '건축물'이라 그러는데, 이젠 그 맨 모습이 거칠거칠 보이면서..

뭐랄까, 오천년쯤 지남 인공의 것도 어떤 경지에 이르는 거 같다. 자연..이랄 경지.ㅋ 피라밋이 눈에 잔뜩 찼다 싶을
 
때까지 보면서, 지치도록 걸어돌아다녔지만 암만봐도 이건 진짜다. 와우.


이래서, 피라밋을 보기전엔 이집트를 말하지 말라 했던가.

사카라의 피라밋단지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팀을 짜서 택시를 안 빌리면 정말 힘들겠어서 그냥 포기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큰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게 기자의 이것들로 이미 필 충만해져버렸으니. 차마 안 떨어지는 걸음, 그래도 정오가

다가오면서 심상치 않아지는 더위와 허기, 게다가 물통도 비어버린 지 오래라 일단 호텔로 퇴각했다.

한국 사람들이 사진은 잘 찍는 거 같다. 낙타 위에 올라있다가 경찰 두 명이 내려오길래 같이 사진찍쟀더니, 이렇게

찍어놓았다. 자신의 동료는 완전히 프레임 밖으로 내몰고, 나만 혼자 한쪽 구석에 몰려 서있는. 이번 뿐만이 아니라

머리를 짤라버리기도, 영 다른 곳을 찍어버리기도 부지기수였다. 우야튼, in sha'Allah.




이슬람 카이로에 가서 시타델을 보고선 기자 피라밋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으레 그렇듯 이슬람 카이로에 갔다가 길을

잃고 잔뜩 헤매다 보니, 어느 순간 무너져가는 건물들, 구정물이 흐르는 도로에 마구 폐차가 쌓여있는 할렘같은 도로변..

그런 풍경 속에 서있었다. 말하자면 카이로의 달동네랄까, 도시가 과잉팽창하면서 외곽에 생겼을 슬럼지역인 게다.

때가 꼬질한 아이들은 웽웽대는 파리떼를 몰고선 벌거벗고 내 주위를 맴돌았고, 어른들은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눈빛을 아끼지 않았다.


한참 당황해서 골목을 헤집다 보니 겨우 기자 피라밋으로 향하는 버스를 찾을 수 있었고, 시간상 레이저쇼를 보기에 딱

좋겠다 싶었다. 피라밋을 멀찌감치서 처음 보니 문득 가슴뛰는 것이 오늘 하루 뺑이치고 삽질하고 바가지쓰고 불쾌했던

것들이 싹 잊혀지는 느낌이다. 바로 옆 레스토랑 이층에 자리잡고 피라밋을 구경하자니, 왠지 사막하고 닮았단 느낌.

오천년 가까운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커다란 '산'을 자연처럼 완성시켜놓았달까. 애초 매끈하게 표면을 덮었을 

라임색 마감석들이 모두 벗겨지고 밑엣돌들이 드러나되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무질서한 듯 무너져내려가는 듯

보이면서도 전체로 보면 아주아주 그럴듯한. 오천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인력으론 도저히 따라하기 힘들 그

어떤 경지, 그런 경지에 오른 느낌이다.


잔뜩 보고 있다가, 해가 지고 기다리던 레이져쇼를 할 시간이 되었다. 알고 보니 조명이 내가 자리잡은 곳 반대편인지라

다시 그쪽으로 향했다. 좀 피곤하긴 했지만, 피라밋은 왠지 사방의 여러 각도에서 여러 차례 바라보며 머릿속에 꾹꾹

눌러담아야 할 것 같아 피곤함과 지침을 무릅쓰고 반대편으로 걸었다. 다행히 중간에 착한 아저씨들이 차를 태워주어서

쉽게 도착, 비록 우락부락한 털복숭이 아저씨 셋만 타고 있던 차여서 조금 경계를 하긴 했지만.


반대편에서 본 피라밋과 스핑크스도 물론 조망은 좋았지만, 역시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만은 못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애초 레이져쇼는 44EP를 내고 입장해서 구경하는 건데 내가 듣기론 굳이 입장하지 않고 밖에서 봐도 충분히 괜찮더란

얘기. 색색의 조명이 밝혀진 세 개의 피라밋과 스핑크스가 달하나 점처럼 박힌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버티고 선 풍경.

생각했던 것처럼 레이져나 조명이 하늘에 선을 긋고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담백한 조명아래 드러난 피라밋의 그

연륜있는 모습이 그 자체로 두드러졌던 것 같다.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전부 어둠에 먹혀서 아쉬울 뿐.



6시쯤 일어나 씻고는 바로 시디가베르정류장으로 트램타고 출발. 정말 우리나라도 트램같은 호흡을 가진 탈 것이 있으면,

시간이 어중띠게 비는 때, 어딘가 갈 데가 마땅히 없지만 움직이고 싶을 때, 무지 애용해줄 거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집션들도 터키에서 들었던 악명보다는 훨씬 덜 '귀찮고', 생각보다 훨씬 더 친절하다. 물론 한국을 거의 피를 나눈 형제

국가로 여기는 터키인들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못지않다. 흔히 진부하게 표현하듯, '사람들이 때묻지않은 제3세계'운운

하기는 뭣할 정도로 관광대국인 이집트지만, 그래서 사람손도 많이 타고 때도 남들만큼은 묻어보이지만, 푸근했다.


영어가 안되도 눈빛과 제스처로 충분히 그 진심이 느껴진다. 어쩌면 말이 쉽게 통한다는 건-의사소통이 단지 언어에만

기대어 가능할 정도로-많은 것들을 놓치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외려 답답한듯한 눈빛과 제스처로, 그리고 그

뉘앙스로 무언가 의미를 교환하려 서로 애쓰는 와중에 훨씬 더 '인간'을 만난단 느낌을 짙게 한다. 몇마디 여행용

영어로나, 혹은 아주 식상한 '잘지냈어' 정도의 말로는...그저 인터넷상에서 무언가를 클릭해 순식간에 정보만을 얻고

치우는 정도...그런 느낌이다. 마치 여기가 무슨 리니지 같은 온라인겜 혹은 이러저러한 게임 속이고, 어디서 누굴 만나

대화를 걸면 무슨 정보나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이런 식의 걍퍅한 관계. 머, 그런 거 주의하면서 신나게 여행 중.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시간이나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그런 늘어지는 삶의 속도도 여유롭게

즐겨줄 만큼의 여유가 맘속에 생겼다. 어쨌거나, 여행 중이니까. 전날밤부터 재미나게 읽고 있던 론리플래넷 이집트의

역사랑 문화 편 보느라, 이집트에 대한 정보랑 이미지를 좀더 세밀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으로 썼다. 여기도 참..

3000여년의 파라오 시대 이후에는 계속되는 수난사였다. 페르시아, 로마, 아랍, 터키, 오스만투르크, 나폴레옹, 그리고

영국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게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땅이다. 덕분이랄까 문화도 파라오시대, 그레코로만시대,

등등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세시간 반정도의 버스여행길은, 안내양 아가씨(혹은 아주머니)가 함께 했다.

이집트에서 그런 '개명된 스타일'의 여성은 참 드물게 보아서, 계속 흘끔대며 보다가 넋놓고 남들하듯 차를 시켰다.

빵류까지 갖다주길래 혹시나 하고 몇번씩 물어봤지만 대답이 시원찮고 다른 이집션들도 많이 먹길래, 꽁짠갑다 하고

다 먹고 났더니, 자그마치 17EP를 내란다. 어이, 버스비가 22EP였다구. 데따 맛도 없었는데다가 꼭 불량식품같이

버석대는 엉성한 비닐봉지에 담긴 빵쪼가리와 과자부스러기였단 말이다. 카이로에서도 한끼는 5EP면 되는 판에.


더구나 내릴 즈음, 한 아저씨가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남이냐 북이냐, 해서 왠지 북이라 하기도 껄떡지근하고

남한서 왔다고 사실대로 말했더니 뭔가 옆의 아저씨와 아랍어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흥분이 내게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내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는지 몇마디의 영어와 제스쳐를 동원했다.

America, strong, 무언가 기는 표정 내지 쫄은 표정을 지어가며 혀를 낼름낼름-뭔가 핥듯-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한다.


감이 왔다. 뭐, 이라크 전에 굳이 파병한 한국이 아랍세계에 곱게 보일 리는 없는 거고, 對제3세계 외교가 전무한 채

오로지 미국과의 코드맞추기에 급급한 한국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맞는 이야기고, 나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기분이

좀 묘했다. '조국'과 나를 동일시할 생각이야 없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 국적과 그 인간을 뭉뚱그려 빈정대고

싶지도 않고 빈정당하고 싶지도 않은 거다. 어쨌든 내가 느꼈던 감정은, 나 자신이 '국가'와 '국적'에 묻혀 매도당하고

있다는 불쾌감, 그리고 부끄러움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 명분 없는 파병에 대해.


Kenooz 레스토랑서 기필코 저녁 한 끼 먹어볼라다가 오늘은 또 '오늘부터 내부수리'란다. 결국 벼르고 별렀던 대충야자

밀크 쉐이크는 맛도 못보고, 걍 오다가다 대추야자만 실컷 따먹었다. 어찌나 달콤한지 나중에 배가 아릴 정도..

Shali에 올라 석양을 보려는데, 앞에서 파블로와 마르코가 내려온다. 이미 끝났대나..그래도 정상에서 벌겋게 불붙은

하늘을 보며 시와의 마지막 해를 잔뜩 감상해줬다. 생각해 보면, 아침에 일어나 해뜨는 것보고 미친 것처럼 사막으로
 
내달려 하염없이 사막을 바라보다가, 저녁이면 해지는 것 보고 별 총총한 하늘을 원없이 구경하다가 자고.

요새 계속 그런 식이다. 그렇다고 전혀 식상해질 줄 모르는 이런 스케줄..언제 또 가능할지.

샤워하고 버스를 탔는데 얼마 못가 차가 '퍼졌다'. 고친다고 운전사가 꾸물꾸물 움직거리는 새 버스 앞 아스팔트 도로에

누워 어젯밤만큼 멋진 밤하늘을 뚫어져라, 눈깜빡이는 것도 아까워하며 바라보았다. 별똥별은 역시 그냥 떨어져라,

냅뒀다. 눈에 담아가고, 마음에 담아가고, 넘칠 만큼 길어가고 싶은 이미지와 감흥과 감각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시와는.


차가 고장나서 한 30여분 아스팔트 바닥에 대자로 누워 칠흑같은 밤에 한가득 펼쳐진 별들을 잔뜩 바라본 거 빼고는,

좀체 정신을 못차리고 잠만 집요하게 청하고 만 밤 버스여행이었다. 문득 잠이 깨서 눈뜨니 왠 생경한 버스 터미널,

알렉산드리아란다. 6시 20분. 바다내음과 잔망스러운 모기떼들을 보면 알렉산드리아 같기는 한데, 사람들 표정이나

공기가 영 낯설다. 굳은 표정과 어수선하고 차가운 공기. 시와의 분위기나 호흡에 꽤나 익숙해져 있었던 게다.

그래도 친절한 아저씨 한분이 시디가베르 정류장 근처 내가 가려던 호텔까지 안내해 주어 금방 체크인할 수 있었다.

체크인하고 샤워 한번 하고는 바로 나와서, 포트 콰이트베이. 등대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그저 귀여운 외양의 요새만

서 있는데, 무엇보다 다시 혼자가 되어 사진찍어줄 사람도 없어지고 얘기할 사람도 없어졌단 게 좀 아쉬웠다. 그런 거다.

누군가에게 등을 보여주고 등을 보고..그렇게 나란히 서는 것. '드래곤 라자'의 후치처럼 그렇게 등을 보여주는 사람을

왕이라 생각지는 않더라도.

이제 어디로 가볼까. 생각해보면 은근히 빡시게도 여기까지 왔다. 좀 쉬엄쉬엄, 오늘은 그렇게 한 호흡 골라낼 생각인데

또 모르겠다. 트램을 한번 갈아타고 '폼페이의 기둥'을 봤다. 날 일본인이라 오해한 이집션이 일본어 한번 실습해 보려고
 
말을 걸었다가 함께 도서관이랑 기둥이랑, 사진도 번갈아 찍어주고, 근데 막상 또 한명이 생기니 불편하다. 해서 먼저

보내고, 혼자 카타콤을 향했다. 일종의 지하 공동묘지랄까, 죽음의 냄새가 짙게 서린 곳.

일본인 집단1과 프랑스 패키지집단2가 계속 앞길을 가로막아서 아예 확 뒤처져 유유히 돌아볼 생각도 했지만,

내부가 워낙 공포물스러웠던지라. 시와에서처럼 미라 한두어구 있었더라면 정말 식은땀이 흘렀을 게다.

지상으로 다시 나오니 폭싹 지쳐버렸다. 마땅히 걸을 거리도 아니고 해서, 택시 잡고 7EP 부르는 걸 4EP로 깍았다.

방금 점심삼아 먹었던 망고주스-거의 중독수준으로 마시고 있다..-랑 꿀 들어있는 빵 값이 빠진 셈이라고 어찌나

기쁘던지.ㅡㅡ; 아저씨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대우/현대차 지나갈 때마다 알려주며 한국좋다고 그러길래, 나도 이집트

좋다고, 멋지다고 엄지손가락을 쭉쭉 뻗어줬다. 그레코로망박물관. 로마식의 유물은 터키서도 많이 봤었지만, 마치

카타콤에서 봤던 아누비스가 로마틱한 옷을 입고 있었듯이 조금씩 융합된 유물들을 감별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던 듯.

이집트 유적도 그렇고.

지중해 도시로 이집트의 대체적인 분위기와 상당히 이질적인 알렉산드리아마저 모스크와 미나렛들은 빼곡했다. 그중에

이 사원은, 중세까지의 황금기를 거치고 이민족들의 지배를 몇백년간 받음서 황폐해진 이집트에서 근대에 들어와 다시금

피워낸 이슬람 건축문화의 백미라고 하던가. 어찌보면, 고대 이집트에서 탑처럼 세워낸 오벨리스크는 미나렛에 상응하고,

히에라글리프(상형문자)를 빼곡히 채워낸 건물 벽면은 모스크에 잔뜩 새겨진 코란문구와 아랍어에 상응하고...그런

식으로 꾸며내는 방식을 이어온 듯하다. 물론 그 내용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 이슬람 문명으로 판이하게 달랐다지만,

그걸 담아내는 그릇, 그것을 위한 상상력은 역시나 역사적인 맥락을 이어왔단 추측..어쨌거나 우리나라에도 이런 멋진

모스크가 잔뜩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판에는 시든 풀처럼 지쳐서 아무생각없이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잠들어 버렸다. 한 세시간쯤. 그러고 보니 여태껏 푹

낮잠을 자본 게 시와의 야자수 정원에 묶여있던 해먹에서 한번뿐이었다. 생각보다 강행군이었는지도. 자고 일어나 모처럼

-무려 나흘만에-돈 계산을 해볼까 하고 다 뒤적여 꺼냈더니 복대 안의 달러가 모자란다. 최근에 정산해 본 이래로 여행자

수표(T/C) 한장 환전한 것밖에는 없는데, 허리 쌕은 잘 때도 껴안고 잤는데, 떼어놓은 적이라곤...언제지...? 어디서, 누가
 
그랬을지, 누가 그랬을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도 싫다. 여태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좋은 기억들만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어디에서 흘린 게다.


저녁 한끼 덜먹고 돈 덜 쓴다고 복구될 것도 아니고, 걍 지금까지처럼 크게 구애받지 않는 선에서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근데 결국 저녁은 1.5EP(300원짜리) 망고주스랑 1EP(200원짜리) 펠라페. 윽..내 나흘치 노가다 일당.


어딜 가나 말을 걸어주고 친구라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다. 포트 콰이트베이에서나, 폼페이의 기둥에서나, 그레코로망

박물관에서조차. 때론 무지 고맙고 재미있고 그런데, 때론 내가 혼자 조용히 다이어리를 정리하거나 론리플래넷을 뒤적일

여지조차 치고 들어온다는 사실에 짜증이 살짝 일 때도 있다. 여행자 수준의 영어를 되풀이하며, 도식적이라 할 만한

자기 소개와 인사말을 건넨 후 이집트 좋은지, 이 지역 좋은지 계속 물어보는 그들.


여행, 확실히 친구랑도 젤 마지막에 해야한다는 이벤트인 건 확실하지 싶다. 그래도 여기서 만난 사람들하고 이렇게

저렇게 서로 맞춰가면서 말을 섞는 것도 나쁘진 않다. 다만 정말 계속 붙어다닐 수 있는 한 명 정도 있으면 훨씬

좋겠단 생각도 들지만. 참, 파블로와 마르코를 또다시 알렉산드리아 거리에서 조우했다. 어찌나 반갑던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들 남매에게 펄쩍 안기듯 악수했다.





시와라는 오아시스 마을이 있다.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쭈욱 달리다가 리비아 국경근처까지 한 15시간 버스 달림 나오는 아주아주 조그마한

마을인데, 주변은 온통 사막이다.

밤에 여우가 다녀간 모양이다. 우리가 자던 주변에 온통 동물발자국이 가득했고, 저만치 던져진 빵조각과 생선뼛조각

주위에는 거의 난장판 상태다. 6시쯤 인나서 서늘한, 아니 거의 춥다시피한 공기에 부르르 떨고선, 꽁꽁 얼어붙은 몸을

살살 달래며 모래 언덕을 오르내려주곤 해뜨는 걸 구경했다. 여긴 정말 왜 이렇게도 멋진 건지.

시와 사막에 이름자 새기기. 별달리 새길 만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발을 질질 끌며 커다란 이름을 새겼다.

알리가 모는 차를 타고 성난 파도에 비척거리는 자그마한 돛단배처럼 듄을 타고 오르내리며 신나라 하다가 차밖으로

떨어질 뻔 했다. 로데오 기분을 내보겠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놓고 있었던 탓이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음에도

좀체 눈이 사막에서 떨어지질 않으니 실감도 안 났다. 결국 호텔로 돌아와서도 아침을 대충 먹고서는 자전거를 빌려서는
 
다시 사막으로 나섰다.

우선 가깝다는 Fatnas Springs를 들러 사막으로 갔다. 거기서 바라보는 일출, 일몰도 아주 그림이라던데, 한참 달려

도착해보니 어쨌든 사막만은 못하다. 야자수숲이 운치있게 우거져있어서 사막이란 느낌도 다 죽어버렸달까. 이미

이 때 내게 미의 기준이란, 사막이다, 아니다로 갈려있을 정도였으니.


자전거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던데다가 길도 아주 달리기 좋은 정도여서 타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딱

멈춰서니 등덜미에 땀이 흥건하다. 망고주스를 한잔하고 Palm Tree Hotel의 자랑인 야자수정원서 한두시간 낮잠을 자곤

다시 사탕수수주스. 이번엔 바로 남쪽으로, Grand Sand Sea로 달렸다. 알렉산드리아로 나갈 표를 구하는 문제로

좀 주춤하긴 했지만, 역시 친절하게 길안내에 용건까지 대신 설명해주는 아저씨 덕분에 금방 '졸라 큰 사막바다'로.

자전거로는 더이상 전진이 불가능한 모래사장 속에서 허부적대다가 잠시 자전거를 버려두고 방랑. 그렇지, 사막에 꼭

있어야 할 법한 하얗게 백골이 되고 만 동물의 잔해, 그 립 하나를 쥐고 괴물처럼 뜯어먹는 시늉...은 좀 심했나.


조금 걷다가 문득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붉은기운 도는 누런 모래밖에 없음에 살짝 두려움마저 느끼고는 서둘러

자전거쪽으로 돌아나오길 수차례, 그저 사막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홀린듯이 바라봤댔다. 뭐랄까...

사막의 지평을 자아내는 그 온갖 모양의 선들...밋밋하다가도 휘영청 굽어지고, 잔뜩 곡선을 그리다가도 어느 순간 탁,

하고 급전직하하는 그런 선들. 혹은 부드러운 능선으로, 혹은 각잡힌 깍아지름으로. 때론 그저 한없이 펼쳐진 양 하다가도

때론 휘영청 감아돌아가는 그런 끝없는 선. 더불어 태양이 쏘아내는 햇살에 따라 변화무쌍한 그 음양감이라니.

그 굵은 몇개의 선들로 이뤄진 경관에 촘촘히 그려진 바람무늬를 보고 있으면, 아무도 밟은 자국 없는 그 순결한 땅에

차마 발자욱을 내기가 저어스러워질 정도였단 말이다.

내가 밟고 걸어간 발자국...그것이 그린 자그마한 모래언덕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이건 아니다 싶은지, 우악스럽거나

혹은 무지하게 푸욱 파묻혀있을 뿐이거나. 내가 딛은 발자국에 드러난 모래굴곡은 너무도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사막에 펼쳐진 굴곡은 그냥..어쩔 줄 모를 정도로 아름답다. 사막은, 딱 그대로 있어야 할 모습이란 말이다.

게다가 그 능선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세상의 절반으로 시야를 차지한다면야. 휴우...

사막에 딱 서면...그냥 나하고 모래...그것만 있는 셈인데, 그게 그렇게 좋다니. 무언가 완벽한 것이랑 마주하고 있는 그런

가슴벅참이 느껴졌다. 신이 있다면, 신을 마주한다면 그런 막막하고도 거대한 것을 마주한 느낌이지 않을까.




밤에 몇 번씩 깨어서 남은 포도 마저 먹고, 모기향도 다시 갈아줄 정도로 잠을 뒤척였다. 5시반쯤에 인나서 6시에 떠나는

투어를 준비하고 보니 일행 두 명이 슬며시 로비로 나온다. 체코인 파블로와 마르코, 처음엔 걍 몇 마디 주고받는 선에서

그치고, 이제 드디어 직접 밟을 수 있었던 사막에서의 일출을 감상하는데 집중..

사막은 생각했던만큼이나 굉장했는데 그 깨끗함이나 우아함, 그리고 순수함이랄까. 오로지 모래만으로 언덕을 이루고,

골짜기를 이루고 벌판이 되고. 게다가 그 고아하고 부드러운, 때로는 비현실적일만큼 아름답고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실루엣이라니. 아무리 보아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 신발도 벗고 언덕에서 구르기도 하고, 전력으로 달리기도 해보고,

여태 바닷가에서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는 모래찜질을 순식간에 해치우기도 하고. 그렇게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조금씩 사막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샌드보드. 사막에서 타는 보드는 정말 그럴 듯했다. 어찌나 재미나던지, 점점 경사가 급한 곳을 찾아서는

거침없이 내달려주고, 다시 헉헉거리며 보드를 들고 올라서는 또 순식간에 훅~ 달려주고. 휘영청 만곡한 듄을

타고 달리는데 몇 번을 타도 질리지가 않을 정도..결국 내가 급경사를 타고 내려오던 중 쫄아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보드 발걸이를 뿌셔먹고서야 어쩔 수 없이 보드에서 내렸다.

그렇게 사막과의 첫대면을 질펀하게 해주시고, 핫스프링이랑 콜드스프링, 솔트레이크-온천, 냉천, 그리고 소금호수..

라고 바꿔 말하면 되려나-를 향했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이상적인 오아시스, 뭐랄까 손바닥만한 맑은 호수 주위를

추욱추욱 늘어진 초록빛 싱그런 야자수들이 뺑글하게 둘러싸고 있고, 야자가 툭툭 떨어지는 짙은 그늘 아래엔 왠지

파라솔이나 해먹이 매어져 있을 법한 그림과는 영 달랐다. 내가 그리던 맑고 깨끗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 워낙

만화적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도 깜짝 놀랐다.


이미 넓게 펼쳐진 야자수숲 가운데쯤 엉성한 풀장 같은 게 있다. 이끼가 잔뜩 끼고 물고기도 잔뜩 사는..깊이도

무지하게 깊어 보이는 짙은 푸른색의 물. 여행을 떠나기 전 '물가를 멀리 하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되새기며 혹시 어젯밤 꿈이 더러웠던가 잠시 상기했다. 겨우 물에 들어갈 엄두를 냈던 건, 간밤에
 
꿈을 꾼 기억이 없었던 데다가, 이미 들어가서 유유히 놀고 있는 체코 친구들한테 꿀려보이기도 싫었고, 워낙

덥기도 했으며(이미 난 피부 때깔이 달라져 있었다..8월의 이집트란..), 그렇게 깊은 데를 여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는 자각도 한 몫했다.

다이빙, 발이 닿지 않는다. 허부적대다가 오아시스의 가장자리를 테두리지어둔 바위에 겨우 의지하고, 다시 다이빙.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물에 대한 공포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도무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퍼런 물의

심연이나 문득문득 팔다리에 스치는 이끼의 매끈하고 섬뜩한 느낌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싶어서, 살짝살짝 수영해

나가는 거리를 높여가다가 결국 오아시스 횡단 성공. 힘이 빠져 중간에 퍼뜩 죽음을 떠올리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신났다. 파블로와 마르코가 사륜구동 차위에 올라 오아시스로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고 불끈, 나도 버둥버둥 차에

기어오르긴 했으나...차마 뛸 용기는 안 생겨서 패스. 사진만 찍어달라고 하고는 쪼르르 내려와버렸다.

그렇게 두어시간 놀다가 점심먹고 걸어간 곳이 소금호수. 팬티를 콜드스프링에서 벗어놓고 말린 참이라 바지를

입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지만, 바닥에 잔뜩 형성된 소금결정들이 가시처럼 온통 꽂히고 박히는 통에 차라리 

바지차림이 나았던 듯 하다. 절로 몸이 둥둥 뜨는 게 물장구치려는 몸짓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곳의

물이 피부에 좋다는 이야기에 나름대로 열심히 세수도 하고 몸도 여러차례 앞뒤로 뒤집어 주고. 

핫스프링은 그냥, 온천물같았다. 거기서조차 이끼가 잔뜩 끼고 하도 더러워보여서 발만 좀 담가보고 세수 한번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콜드스프링에 가서, 소금 가시들이 잔뜩 박혀있는 바지도 빨 겸 열심히 놀다가

호텔로 돌아와 휴식. 밤에는 사막에서 자며 별을 보기로 했는지라, 좀 자두는 만치 오늘밤 사막에서 별을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다시 출발해서 템플 오브 오라클, 아문,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연못까지. 생각보다 좀 다 별로였다. 아무래도

문명 세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인지라 붕괴되기 전의 유적들도 좀 급이 낮은 것들 아니었을까. 클레오파트라의

연못은 잠깐 클레오파트라가 쉬었다 갔다던가...뭐 그래서 붙은 이름이라니 말 다했다. 그치만 역시 사막에서 

듄에 올라 바라본 석양이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  

사막에서 언덕을 오르내리고 초승달처럼 잔뜩 휘어진 언덕 아래 자리를 깔고 생선이랑 빵, 밥이랑 해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그리고 그보다 빠르게 날아와 박히는 별, 별, 별들. 그렇게

많은 별들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은하수란 게 저토록 선명하리라곤. 우윳길, 혹은 젖길이라고 불리웠다던

과거의 이름이 왜 붙게 되었는지 실감했을 정도로, 그렇게 이쁜 줄은 몰랐다. 안내인 알리와 압둘라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한국어, 체코어와 아랍어 등 저마다의 언어로 말하다가 영어로 말하다가.

별구경하며 사막의 밤을 보내면 은근히 엄습하리라 예상했던 괜시리 센치한 고민 따위로 다운될 여지조차 없었다.

완벽한 항복. 완전한 충일감. 쉼없이 떨어져내리는 별똥별 역시, 넌 떨어져라 난 즐길란다. 딱히 빌 소원조차 없던 밤.

아마도 조상신과 헤르메스-여행자를 돌본다는-의 도움으로, 문득 6시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시계는 한개도 못 들었지만,

덕분에 아침도 먹고 샤워도 하고 일정도 점검하고 여유있게 택시를 탔다. 어제 그토록 찾기 힘들었던 투르고만 가리지와

부스를 쉽게 찾아 시와로 출발. 마루사 마투르와(Marsa Matru)에서 12시쯤 내려 점심으로 펠라페를 먹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1시반에 다시 출발.
 
여행자의 행색은 나와, 터키서 말을 섞었던 형님 한분밖에 없어서 살짝 비즈와히르 사막투어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끝없이 황량한 지평선과 그야말로 먼지같이 뿌옇기만 한 풍경에 지쳐 꼬박꼬박 졸아버리고

말았다. 카이로에서 마루사 마투르와까진 5시간, 거기서 시와까지는 4시간을 더 가야 했다.

그리고 시와. 갑작스레 푸른 빛깔이 눈앞에 점점이 나타나더니 커다란 마을이 되어 불쑥 눈안에 차고 들어왔다. 흙은

여전히 물기 하나없이 풀풀 날리는 먼지같건만, 야자수가 더불어 숲이 되니 이런 오아시스가 생겨났다. 아마 생겨난 

순서는 반대로 오아시스가 있어 더불어 숲이 이루어진 거겠지만. 사막이 저멀리 보인다. 여우를 볼 수 있을까.

죽은 자의 산, 이곳에 미이라가 네 구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산 사이의 크레바스처럼 갈라진 틈에 고이 모셔져

있는, 바싹 마른 사자(死者). 그들의 죽음은 무섭다기보다는 왠지 처연했달까. 완전히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기보다

껍데기만 남아 왜소하고 볼품없이 말라 비틀어진..

석양을 산위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메마른 바람이, 그 꺼칠함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몸을

휘감았고,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조금 떨어진 사막의 모래 사각이는 소리가 들리는 환상에 빠졌다.

이 한가로움과 유유함. 시끄럽고 정신없는 카이로에서 내가 정말 바라던, 그리고 여행이 어느덧 이주가 넘어가면서

살짝 지친 내게 꼭 필요한 그런 거였다.

저녁으로 지방음식 중 삭슈가인가, 발음도 제대로 안 되던 그런 신기한 걸 먹었는데, 음식이란 게 상상력만으론 닿기 힘든

그런 영역인 거 같다. 이름만 가지고서는 예상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명을 듣고도 도무지 어떤 음식인지 상상해내기가

힘드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게 먹어치우고, 모처럼 간만에 배부르게 먹고, 물담배 시샤(seesha)를 한 대 피워올리며

포도 1킬로를 사서 나눠먹었다.


시샤가 생각보다 셌던 건지, 아님 내가 연기를 지나치게 몸안에서 많이 돌려버린 건지,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문득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당나귀를 붙잡고 장난을 치다가 사진 한장.




2시쯤 이집트공항에 떨어졌는데, 그새 친해진 일행 넷이 모두 여권 정밀검사에 걸리고 말았다. 한참 기다리다가 3시쯤

공항을 나와서 그 중 길동무가 된 친구 하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는 애초 내가 가려던 호텔이 아닌 다른 호텔을 고집했고,

별생각없이 난 그저 시나브로 시작된 이집션들의 바가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단 그의 의견을 따랐다. 문제가 시작...

방이 없댄다. 옆의 가깝다는 호텔을 알아봐줬는데, 길도 알려줬는데, 반대길로 내가 앞장서버렸고, 거기서부터 2시간

가까이의 개삽질을 해야 했다.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더구나 현재좌표조차 부유하는 상황에서 경찰서를 찾아

도움을 청했지만, 영어 한마디 소통이 불가능했다.


6시에야 무지 비싼 곳의 더블룸을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애초 묵고 싶었던 곳은 하루에 15EP, 우리가 묵었던 곳은 30EP,

가격은 두배지만..그래봐야 6000원 안짝?) 한밤중 새벽녘의 카이로란 거. 이제 아무리 혼자 헤매도 해가 말간 낮이기만

하면 걱정따위 안 할 거 같다. 줄창 자버릴 줄 알았는데 9시전에 일어나서 아침먹고 밖에 나섰다. 세상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카이로의 무질서함과 대혼란스러움인가 싶었다.

폭주하는 차들, 가만 보면 어디 하나 성한 구석없어 사이드미러가 없거나 범퍼가 찌부러졌거나, 녹이 벌겋게 슨 차들은
 
마치 수다떨듯 클랙션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재미삼아 합주해내는 클랙션의 무아지경과 도처에서 밟히는 브레이크의

굉음, 게다가 온전한 차 찾기가 힘들 정도로 광폭한 운전자들이라니...이러니 누군가 이집트 여행을 왔다가 식겁해서

공항으로 바로 돌아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일화까지 전해지지. 신호등도 변변찮은 이곳의 도로는..극한의 무단횡단

신공을 요구했다.

사실 약간 질리긴 했다. 좀 이 정신없고 공격적인 도시를 벗어나 여행도 추스리고 쉴 필요도 있을 거 같아 우선 내일은

이집트 서쪽에 외떨어진 오아시스 마을 시와(Siwa)로 뜨기로 했다. 힘겹게 환전을 하고, 쿠샤리로 배를 채우고.

ⓒ 위키피디아.
'
쿠샤리'란 흔히 "저 이집트 가서 쿠사리먹고 왔어요"할 때의 그 쿠사리다. 이집트의 전통적인 음식인데, 쌀, 콩, 마카로니,

국수 등을 토마토 소스와 버무려 나오는 음식이랄까. '쿠샤리'라는 뜻 자체도 모든 걸 섞어 만든다는 뜻이라고 한다.

좀 거칠게 만들어진 파스타랄까, 그치만 콩이나 쌀 덕분에 파스타보다도 되려 씹는 맛은 좋았다.
 
그리곤 다시 나와서 이슬람 카이로지구를 방황하고 있다. 어느 모스크에서 아잔을 틀었던 성직자 할배가 미나렛을

열어주곤 박시쉬를 달라는 게 아닌가. 그것도 20EP나. 박시쉬란 일종의 팁을 말하는 거고, 이집트는 이런 식의 

팁문화가 일반적이라곤 해도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터무니없는 요구가 그침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방금

먹었던 쿠샤리가 1.75EP, 호텔 하루 방값이 20EP였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뻔뻔스러움이다.

물론 10$를 환전해서 62EP정도를 만들었던 당시 환율을 따지자면 '고작'...얼만고, 4,500원 정도? 그정도긴 하지만

현지 물가를 감안컨대 이건 아니다. 더구나 여행경비는 내가 군대 휴가나와서는 꼬박꼬박 노가다를 뛰며 모은,

못도 밟아가며 모은 피같은 돈이란 말이다.(심지어 빠듯한..ㅡㅡ;)

그래서 말했다. 이봐, 그러지 말고 5EP 줄테니 이곳에서 내 사진이나 찍어주지 않겠나. 결국 10EP로 낙찰. 그럴 줄 알았음

처음에 미나렛 열어준다며 앞장설 때 그렇게 좋아하고 고마워하진 않았어도 되는 건데, 어쨌든 전망이 꽤나 좋았으니.

서울 야경을 뻘겅십자가가 점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긴 모스크의 미나렛이 천지삐까리다. 저 꼭대기에서 한꺼번에

시간맞추어 아잔소리를 틀어댄다고 생각하니 공기조차 달라보인다. 제각기 다른 실루엣을 띈 미나렛들.

이집트 여행을 시작하며 내 자세부터 결정해야 했다. 사람을 안 믿어야 한다..기엔 오버스럽고, 친절을 베풀려 하는

사람에겐 박시쉬줘야 하는 건지부터 물어야 하는 건지 원. 공항에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휴지걸이 쪽으로 가는데,

왠 아저씨가 잽싸게 휴지마디를 끊어 건네길래 엉겁결에 받았더니 박시쉬 달라고 손내미는 통에 깜짝 놀라 도망치는

일도 있었단 말이다.

그냥, 무난한 선에서 그때그때 눙치며 넘어가기로 했다. 박시쉬가 이들에겐 자연스러운 문화라니 기겁할 일도 아닌 거고.

그런데 조금 후에 만난 구두닦이 녀석은 정말 착했다. 나 혼자 빵조각 우물거리며 앉아 쉬는 걸 보더니, 자기가 싸온 거

같이 먹자며 집에서 싸온 양념통들을 꺼낸다. 호오...토마토소스가 정말 맛있어서, 유쾌하게 다 먹어버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친구들이라며 뒤늦게 합류한 목걸이 파는 애, 음료수 파는 애들이 오길래 인사도 하고, 사진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내밀었더니 신나서 자기들끼리 서로 난사하듯 마구 찍어버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쉽게 헤어지고, 알-아자르(Al-Azar)모스크가서 세개의 미나렛을 보며 즐기다가 이왕 온거 밥-주웨일라

(Bob-zuweila)까지 보자 하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일어났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과거의 것들을 현재에까지 여전한

방식으로 활용하며 공존하는 게 진짜 그 '유물'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일지 모른다.

좀 변두리 지역서는 카메라를 들고 신기한 듯 건물들을 돌아보는 내가 무진장 이상스러운 사람처럼 의아한 눈총을

받기도 했다. 피샤위 커피숍서 물담배 한대 피워올리려다가, 워낙 현지의 이집션들밖에 없어서 왠지 살짝 소심해져서

포기, 대신 망고주스가 얼마나 맛있는 건지 깨우쳐버렸다. 






이집트 룩소에서 만난 Hassan에게 소개를 받아 직접 공장까지 가서 만들어온 카르투쉬 반지.

그에 따르면 이런 상형문자를 새긴 반지는 과거 파라오들이 왕의 상징으로 들고 있던 왕의 홀(인장)과 같은 의미를

띄고 있다고 했다. 엷은 웃음과 함께, 그는 그랬다. 넌 왕이 될 거야.


공장이라지만, 비어있는 은색 반지에 알파벳에 해당하는 그림들을 하나씩 녹여붙이는 작업을 손수 하는 조그마한

가내수공업 현장같은 느낌이었달까. 여덟 혹은 아홉 글자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이리저리 내 이름을

짜맞추어도 딱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사실 저기엔 y, t, z, s, c, h, e 그리고 앞뒤로는 '호루스의 눈' 그림과

또다른 수호상의 상징이 들어갔다. 그게 2004년 8월에 있었던 일.


그 이후로는 잠을 잘 때 빼고는 한번도 빼지 않았던 반지였다. 아, 저 오돌토돌한 문양 사이로 비누가 끼곤 했어서

씻을 때도 빼기는 했다. 반지를 끼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이집트의 풍경들이 떠올랐으며, 그때 내가 했던

생각들을 계속 쥐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집트에서 발에 채이던 수다스런 옛사람들의 말풍선들..이 다시 그리워지는 날이다.

이집트에서 해온 카르투쉬 반지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 The Hieroglyphic Alpha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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