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끼가 한 남자에게, 한 남자와 여자에게 빨간 점을 찍는다.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갑남을녀',

익명의 바다를 떠다니던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이 붙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의 소설은, 그의 소설 중 내가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 주인공은 특정 분야에서 나름대로 특출하달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지만 의지와 욕구가

부재하다. 맘만 먹으면 그래도 꽤나 해낼 수 있는데, 그 마음 먹기가 힘들다.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사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태. 둘, 주인공은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현실감을 끈질기게 품고 있다.

"여기는 여기가 아닌 세계구나"류의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내내 반복되는

질문, 우리가 지금 같은 시공간에 있는 걸까. 셋. 도무지 주인공의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란 없다.

기껏해야 원점, 이거나 여기가 내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는 딱딱한 바닥면이구나, 정도의

확인에서 그친다.


그건 왠지 내 이야기다. 얼마전 하루끼와 관련한 잡지 인터뷰에서도 말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어필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적나라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맨날 보여주면

짜증나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볼품없고 엉성한 상태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보듯 날

비추어 볼 수 있는. 그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부분들, 딱히 신나게 달리지도 않고 드라마틱하고

거창한 결말도 없으며 주인공은 늘 사변적이고 주춤거리는-때로 아주 답답하고 짜증나는-캐릭터에

딱히 꿈이나 야망이랄 것도 없고 사실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추하고 김빠지며

'참 사느라 애쓴다'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을 보는 이유는, 그게 지금 내 삶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어서다. 그건 내가 살아감에 대한 일종의

데카르트식 '방법적 회의'를 가능케 하는 최후의 지반일 수도 있겠다.


항상 그렇듯 건조한 인생을 쌓아나가다 어느 순간 문제가 불거진다. 두 개의 달이 떠있음을 퍼뜩

깨닫게 되듯 일상에 그어진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나면 쭉쭉 균열이 사방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밋밋하고 조용했던 인생을 복기하다 보면, 정작 본인의 문제랄까,

본인의 결락이 심각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외부의 문제는 최초의 자극, 계기일 뿐

이내 시선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거다. 그 내부엔 자신의 가치, 자신의 사랑, 자신의 치부가 오롯이

숨겨져 있다. 모든 문제를 자기화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밀한 것으로 되돌이하고

마는 강력한 산화력이 발휘되지만, 그건 이기적이라거나 탈정치라거나 혹은 관념적, 사변적이라는

표현과 맞춤하지는 않다. 자신을 먼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A에서 A'로 바뀐 자신은 드디어 뭔가를 의욕하기 시작한다. 범속한 일상에서

무기력하고 무의지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주인공이지만, 조금은 '의지'라는 것을 품게 된다. 그건

아마도 수많은 상실을 거친 후, 내적으로는 거의 세계대전에 가까울 만큼 혁명적이고 치열했을

전투를 거친 결과이겠지만, 정작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끼가 찍어 놓은

빨간점을 지우고 일상에 풀어주면 다시 이전처럼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중 속으로 빨려들어갈 거다.
 

그의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온다 싶은 게 그래서다. 결말이 이상하다

싶다는 소감들도 그래서 아닐까 싶다. 1984나, 1Q84나 다르지 않다. 내면에선 폭풍우가 일고 숱한

상실과 모험을 겪었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여전히 세계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신은,

'리틀 피플'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천둥치며 으르렁대는가 하면 사람들의 일상 역시 똑같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도 바뀌는 건 없는 거다. 건방지지만, 그게 세상이다, 라는 정도의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쩌면 고마쓰니, 교쿄니, 아유미니, 교쿄의 남편이니 하는 등장인물들, 소설속 그리고 현실속 모든

동시대인들 역시 제각기의 모험 중이었을 거다. 상실감을 품고 뭔가를 계속해서 흘리듯 잃어버리면서,

허랑하게 뱉어지는 메마른 말들을 주고 받는 그들이었다. '리틀 피플'의 위협은, 주변의 소중하고

취약한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은 꼭 덴고나 아오마메에게만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

거다. '리플 피플'이란 일종의 비료랄까, 원래 내면에 있던 씨앗을 이상성장시킬 뿐이다.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조금 일찍 상실시킬 뿐이다. 그렇게 제각기의 전투와 모험을 마치고, 두권짜리

장편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복귀했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루끼가 빨간 점을 찍고 들어올리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덴고'와 '아오메마'가 1984년에서 어느 순간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1Q84년으로 흘러들었듯, 일상의 어느 순간 어디서 그런 갈림길, 혹은

스위치를 건드릴지 모른다. 기지개를 연달아 네번 켜본다거나, 왼쪽신발과 오른쪽신발을 바꿔

신어본다거나. 굳이 그런 거 아니어도 호, 흡, 호, 흡 대신 호, 호, 흡, 흡 하는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 사소한 스위치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불가역한, 돌이킬 수 없는 세상으로

옮겨지는지 모른다.


그건 사실상 매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공간에 떨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좀처럼

그 무게감때문에 직시하고 싶지 않은 깨달음과도 같다. 매순간 돌이킬 수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함께 쓸어내버린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가 내 현재, 내 소중한 살점들이 흘러가 버린다는 거니까 사실은 같은

말이다. (불가역한) 시간, 과 상실, 이란 단어. 그리고 '리틀 피플'의 협박이란, 사실 언제가

'상실'에 있어 맞춤한 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갈협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작용한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상실할 때였는지도 모른다.


1984년과 1Q84년이 결국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소설의 시작점과 마침점이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깨달은 후에도 별다를 바 없이 계속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아마도 시간 = 상실, 삶 = 상실, 실용적이지는 않은 깨달음 때문

아닐까 싶다. 딱히 그걸 알았다고 해서 어째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 그저 거기서부터 다시

뭐든간에 쌓아올려볼 수 밖에 없는 '방법적 회의'의 밑장.



* 리뷰랄까, 내가 쓴 건 지독히도 재미없는데 소설은 사실 꽤나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하루끼가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보여주는 그의 '밑장'은 여기서 보던 저기서 보던 똑같다. 그의 문제의식이나

글쓰기의 주제가 더이상 커지거나 발전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미 그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

나고 자라면서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외로움, 상실감이라는 거대한 것, 그걸 이야기하는 그의

내공은 절정을 친 지 오래고 지금은 이리저리 변주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물론 이야기는

세련되고 풍성해졌으며 더욱 '열렸지만', 핵심은 '상실의 시대'에서 이미 다 쓰여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1Q84 1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2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Q84 3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1984 (반양장)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문학동네


솔직히 그런 책들이 있다. 제목을 워낙 많이 들었거나 그 핵심 아이디어라며 쉽사리 인용되는 한두가지 개념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미처 읽기도 전에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고 마는 책. 예컨대 '빅브라더'같은 단어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하루키의 1Q84를 두고 '아이큐84(IQ84)'라며 이상하게 읽어대는 어떤 문학평론가를 조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하루키가 1Q84라며 비튼 제목의 원전 격이랄 조지 오웰의 '1984'를 여태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굉장히 멋진 책이다. 하루키를 무지 좋아라 하지만, 그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아마 2984년쯤에도 살아남아 찬사를 받을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일 거라는 데 걸겠다. 물론 두 작품은

제목 빼고는 별로 주제도, 내용도 겹치지 않으니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1Q84를

제목으로 내건 하루키가 1984의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고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뭐랄까, 두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불현듯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이 떠올랐다. 사회주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한번의 혁명, 한번의 전복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애써 이뤄낸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 '영구혁명론'의 대강인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1984년의 세상은 그런 영구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세상인 거다. 다만 그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러니까 기득권층, 더 적나라하게는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다.


1984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빅브라더'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다. 권력을 쥔

상층계급에 대항해서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의 수식을 내건 중간계급이 하층계급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상층계급으로 자리이동하고 다시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성되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식의, 커다란 순환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은 그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보유하려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하기 위해서 집적되어야 하는 부를 족족 소진시키고,

중간계급을 각성시키기 위한 지식을 황폐화시키겠다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전략. 그게 지배계급의, 지배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에 의한 '영구혁명'의 목표다.


듣기엔 우습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온 인류를 먹여살리고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경이로운 수준에

오른 생산력은 주변국과의 쉼없는 전쟁을 위한 총과 대포를 위해 소모된다. 현재의 세상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한 나침반이자 전거로서 기능해야 할 과거의 역사, 과거의 지식은 매시간 새롭게 씌여진다. 늘 전시체제 하에서

동원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없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며, 배급되는 신발과 면도날의 질과 양이

불과 일년 전에 비해서도 양호해졌는지를 따지지 못한다. 그들은 전쟁의 광기에 불현듯 휩싸이면 빅브라더를

위해 만세를 부르며, 집안 화장실마저 감시하는 사상경찰 하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권력이 자원을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쪽으로 소모해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건 2010년 지구에서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한국만 해도, 온 국민을 먹여살리고 북녁의 주민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소하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무기를

구매하고 국외와의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시키며 4대강 같은 무익한 사업에 쏟아부으며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권력과 언론간 '반복과 차용'의

근친교배를 통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들. 천안함 사태가 그렇고, G20가 그렇고,

사대강 사업이 그렇고, FTA옹호론이 그렇다. 그 와중에 국내이슈를 덮어버리는 애국 마케팅도 절묘하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그렇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괜히 그를 '디스토피아'의 무시무시한 재현자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다. 이들, '빅브라더'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버리려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구조를 고착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사고 자체를 개조하려 든다. 기계에서

자동으로 배열된 몇가지 단어로 짜맞춰진 시와 노래만을 유포하고, '섹스를 더럽게 변질시켜' 억압된 성욕을

전투적인 증오심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키는 거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둔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그 자체를 새롭게 정리한다. 어휘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생각의 폭을 좁히고, 결국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인간을 만드는 것이 빅브라더가 생각하는 혁명의 완수.


빅브라더의 생각대로 될까.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들, 깊은 사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관념어들이 없어지면, 정말 인간이 변화할까. 그리고 신발깔창처럼 제작되는 노래와 시들이 재래의 예술을

대체하면 인간의 문화는 황폐해지고 말까. 성욕을 억압하면 인간들이 까칠해져버려서 전투적으로 변하고

전시상태의 비인간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전통적 가정을 하나의 상호 감시단위로 변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될까.


모르겠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주인공 윈스턴조차 찢겨진 시체의 팔목을

무심히 발로 차내어 버릴만큼 황폐해졌고,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곡괭이로 살해하고 말겠다 다짐할 만큼 살벌하다.

결국 지독한 고문과 자기 부정을 거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오웰의

예측은 옳은 것이었다고 동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겠구나, 역사는 멈추고 말겠구나, 기껍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게 단순히 조지 오웰의 '사고 실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떤 권력도 빅브라더만큼 철저하게 국민들을

통제한 바 없으며, 언어를 조직적으로 퇴화시키는 건 고사하고 문화와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규율하고 억압한

적은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불길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신체에 대한 구속력-생체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고, 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대중문화는 스스로 천박해진지 오래다. 전신을

스캐닝하고 개인정보와 생체정보를 집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란 너무 쉬워졌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하향평준화를 강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적 사고를 단련하기 위한 시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슈들에 선점당한다고 느낀다면, 너무 시니컬한 건가.


다행히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이 암울하고 염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값지다.

자연스런 흥망성쇠의 역사 흐름을 멈춘 채 현재의 지위와 특권을 영원히 장악하겠다는 그들 권력자들의 욕심은,

조지 오웰이 그 결과로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언정, 그 욕심 자체는 지독히도 진부하고 익숙한 거다. 그들은

언제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며, 그들을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를 강권한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4대강은 운하가 아니고, FTA는 모두에게 유리하며, 아랍인은 테러리스트이고,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경찰이고,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란 이야기.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2+2=5, 라디오헤드의 이노래가 1984의 이 대목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이제 끔찍해질 거야, 도망칠 곳은 없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도 이제 너무 늦었어.


Are you such a dreamer
To put the world to rights?
I stay home forever
Where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 lay down the tracks
Sandbag and hide
January has april′s showers
And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ts the devil′s way now
There is no way out

You can SCREAM IT, you can shout
It is too late now

Because...
You′re not there!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You have not bee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WHEN I SAY SOON oohh

I try to sing along
But I get it all wrong
′Cause I’m not
′Cause I’m not

I swat ′em like flies but like flies the buggers keep coming back NOT
But I’m not

All hail to the thief
All hail to the thief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Don′t question my authority or put me in the box
′Cause I′m not
′Cause I′m not

Oh go and tell the king that the sky is falling in

When it′s not
But it′s not
But it′s not
Maybe not
Maybe not

올 한해동안 쓴 다이어리를 책상 서랍에 쟁여넣으려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겨버려 정리는커녕

서랍 안의 이전 다이어리들을 전부 헤집고 꺼내어 버렸다. 여태 내가 썼던 다이어리들이 전부

거기에 있었다. 아무래도 글로 쓰인 최초의 다이어리는 초등학교 1학년때의 일기장.


대체 머릿속에 생각이 있었을지도 의심스러운 1학년이긴 하지만 나름 1학년도 한참 지난 11월께

일기여서 그런지 뭔가 이야기의 흐름이 단순하지 않다. 휙휙 뒤바뀌는 사고의 흐름을 그대로

일기장에 옮겨놓은 듯한 내용. 잠시 여기저기 내키는대로 펼치고 읽다가 부끄러워져버렸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도 꽤나 열심히 일기를 썼다. 조금씩 공책의 줄간격은 좁아졌고 디자인은

덜 유치해졌으며, 선생님이 바뀌며 매년 색깔과 필체가 다른 첨삭이 더해졌지만, 무엇보다

조금씩 글이 길어지고 그나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달까. 서른 권은 채 안되지만

거의 매일같이 꼬박꼬박 썼던 그 때의 일상들, 지금 다시 보니 참..얘는 뭔가 싶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쓰던 다이어리들. 그러고 보니 그때는 학습지를 시키면 예외없이

저런 다이어리를 선물로 주곤 했었던 거 같다. 따로 파는 속지랑 스티커 연초면 으레 잔뜩

사서는 내키는대로 재구성하고, 삼공 펀치로 구멍을 뚫어서 심은하나 최지우 사진이나 엽서도

함께 꼽아두고. 아, 좋아하는 만화캐릭터도 빌린 만화책에서 몰래 오려서 붙여놓곤 했었다.

아..베르단디, 스쿨드, 울드.;;


차마 그 낯뜨거운 잔해들을 옮겨놓진 못하겠고, 속지만 남겨놓은 어느 일년의 기억들, 그리고

나중에 혹 다시 쓸까 싶어 남겼던 껍데기 몇 개만 슬쩍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군대 때 쓰던 다이어리. 어디에선가 한눈에 번쩍 띄었던 디자인의 공책인데, 그냥

틈나는 대로 날짜 '12/30' 요렇게 적고서 끄적이려고 들고 들어갔었다. 아마 일병 때부턴가

들고 갔던 거 같은데, 그 척박하고 비인간적인 돼지우리 속에서 전우 아닌 친구들과 함께

내 위로가 되었던 녀석이다. 어린 왕자, 다시 땡큐.

안에는 따뜻한 캔 하나에 감격하고 누군가의 편지 한통에 행복한 깨알같은 군바리의 일상이

깜장색 153모나미펜으로 꾹꾹 눌러 적혀있었지만, 그런 일상 이외에도 휴가계획이나 제대후

배낭여행 일정 같은 것들, 졸업논문 아이디어들이 제법 빼곡히 적혀있었다.


제대하고 터키-이집트-시리아-요르단을 가려던 계획을 세우고 저렇게 지도도 직접 그리고,

어디 갈지 여행정보나 참고사이트도 모아두고, 여행 예산을 잡고 휴가 때마다 얼마씩 벌었고

이제 얼마가 더 필요한지 모든 걸 닥치는 대로 모아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다이어리에 더해

여행가이드북, 가계부, 지도 역할까지. 제대할 즈음 머릿속에 꽉 들어찼던 저 지도.

내무실 내 관물함 안에다 만들어서 하루하루 두근대며 그어나가던, 제대맞춤형 디데이달력.

아무리 기분좋고 그럴듯한 하루였다고 해도 "제대만이 살 길이다"라는 문구는 저녁무렵이면

으레 절실하게 다가왔고, 휴가라도 다녀와서 한꺼번에 대여섯개를 긋는 날이면 마치 제대가

내일모레인 양 흥분하고 말았던 거다. 그렇게 하루하루 소중하게 바라보던 이 녀석, 어디있나

했더니 다이어리 속에다가 접어서 보관했구나. 서랍을 뒤지는 소소한 즐거움이 이런 거다.

그리고 2007년으로 훌쩍. 대학 다니면서는 사실 대학수첩을 쓰느라고 따로 다이어리를 사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대학수첩을 충실하게 쓰지도 않았는지라..아마 당시 '나우누리' 과게시판을

워낙 열중해서 이용한 탓인 듯. 그래서 2007년, 저 이쁜 고양이 다이어리를 썼다.

다이어리를 펼치니 툭 떨어지는 건, 여기저기 꼽아본다고 써봤던 영어 이력서 한 장. 사진만

첨부하지 않았어도 합격률이 더 높았을 텐데, 실수였다.


다이어리가 굉장히 이쁘고 화려했던 게, 페이지 곳곳에서 고양이들이 갸르릉거리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새를 쫓기도 하고 털실이랑 놀기도 했지만 어깨죽지에서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기도 하고, 여하간 굉장히 매혹적인 다이어리였다는.

내 마지막학기 시간표였다. 그러고 보면 은근 다이어리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넣은 게

적지 않았다. 시간표도 그려넣고, 만화캐릭도 그려보고, 기린도 그리고, 대체 왜인지는

몰라도. 아..2007년 상반기까지는 학생이었는데, 세월 참 빠르구나. 진부하게도 빠르다.

학생수첩을 들고 다니던 그 이전 어느해, 2005년 김기덕 감독이 우리학교에 와서 강의를 했었다.

그의 영화를 빼놓지 않고 챙겨보며 일일이 감동을 먹다가 아마도 그때 최신작 '시간'을 보고

뭔가 영화에 대한 질문 겸 이야기를 한 후 받았던 사인. 좀처럼 사람들 사인은 안 받지만, 그는

기꺼이 사인을 부탁할 만한 사람. ([리뷰] 날 환장시키는 김기덕, 시간.)


아, 그리고 왼쪽은 취직준비할 때 지원했던 수많은 회사들. 저거 말고도 더 있을 텐데.

2008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기엔 좀 진부하지만, 여튼 학교를 벗어나 방학도 없고 조조영화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 첫 해의 다이어리다. 뭔가 이제 학생이 아니니까 좀 단정하고 평범한 걸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름 고심해 골랐는데, 아무래도 넘 심심하다.

원래 그런 건 안 하는데 유일하게 한해동안 본 영화니 공연, 전시회 티켓을 몽창 다이어리에

붙여보던 한해기도 했다. 갈수록 어찌나 두꺼워지고 뻣뻣해지던지, 다시는 안 하리라 다짐.

그래도 이런 신기한 공연도 봤었으니 기억해둘 만 하긴 하다. 한예종에서 있던 공연인데

제목이 무려 '카마수트라, 꿈', 대략 내 취향에 수렴되는 전위적이고 그로테스크했던 공연.

그리고 2009년, 다이어리가 이뻐야 한 해동안 곱게 품고 다니며 쓰게 된다는 간명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 한 해였다. 물론, 다이어리 뒤에 있는 꽁짜 쿠폰은 좋았지만.

그저 한해 일정만 설렁설렁 연초에 적어두고는, 그다지 수정하거나 추가하지도 않고서

일년이 지나버렸던 거다. 다이어리가 안 이쁘다기 보다는, 뭔가 레디메이드된 형태로

우르르 뿌렸다는 느낌이 워낙 강해서 '내꺼~♡'라는 애착이 안 간 거 같다.

그래도 빈 칸은 생각보다 적었던 건, 영화나 공연을 보고 나서, 혹은 여행을 다니면서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공책처럼 이렇게 저렇게 글을 쭉쭉 써댔기 때문인 듯. 아마도

이 페이지는 하루키의 1Q84를 읽고 나서 어딘가로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끄적끄적해둔.

([1Q84] 삶에 대한 '방법적 회의'의 밑장, 그리고 '리틀 피플'의 공갈협박.)

2010년 다이어리는 역시 너무 무거웠던 게 패인이었다. 노란색 가죽이 너무 맘에 들었지만

두껍고 무거워서 다소 부담스러웠달까. 그래도 대충 몇월 며칠에 뭘 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까진

적어두었지만, 소소한 생각들, 낙서들은 연초, 그리고 몇 번 마음을 다잡은 타이밍에 몰려있다.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온 2011년 새 다이어리, 고양이가 온통 뛰노는 표지가 그간의

다이어리 중 가장 이쁜 거 같다. 참 잘 샀다 싶어 맨날 자랑질하고 다니는 중.

2011년 잘 부탁해, 다이어리군&만년필양.

그렇게, 신발주머니 옥상으로 날려먹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기쓰듯 하루하루의 궤적을

적었던 다이어리를 한번 일람하고 나니까 왠지 급 나이들은 느낌이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몇 글자 두들김에 선명하게 내 안에서 살아나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정리하자면, 2011년에도 계속 잘 남겨보려는 의지 +5, 노화로 인한 우울증 +10, 시간낭비 1시간.




이번 출장에서도 사진은 여지없이 찍었댔다. 두바이의 유명한 7성급호텔 버즈 알아랍,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아직 공사중인) 버즈 두바이 등등 두바이의 풍경들. 사우디 리야드의 밤거리, 드문드문 땡땡이치며

산책나갔던 시내 골목길에 쿠웨이트의 쇼핑몰까지. 왠지 사진을 올리려는 의욕이 안 생긴다. 물론 왠지 10월

내내 바빴고 바쁜 탓도 있겠지만.


작년에 이미 갔던 호텔에 고대로 묵는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사실 별 기대가 없었고, 이번 출장은 사실 오로지

이집트 카이로에 다시 간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드디어) 디카를 들고 간다는 것, 5년만에 피라밋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 짧은 삶에서 뭔가 갈치 토막치듯 분기점을 나눠보라면

2004년 그때의 여행은 두세번째 순서쯤 되지 않을까 싶다. '먹고 살 고민' 따위, '먹고 살 궁리' 따위 '굴하지

않던' 철부지에서 '먹고 살 고민'씩이나 하는 철부지로 변신한 게.


마침 이집트에서 카메라를 누군가에게 빼앗겨서만은 아니었다. 현지인들과 함께 부대끼고 암내맡으며, 하루에

2리터들이 물병을 두개씩 마시며 마주했던 카이로의 거리들, 그리고 피라밋과는 너무 달랐다. 반듯한 정장에

(무거워서 고리가 휘어버린) 노트북 가방을 척 걸치고, 45인승 고속버스 차창 밖에서 넘쳐들어온 햇볕 한 줌에

아 뜨거라 하며 큰길로만 다녔다. 군자는 대로행이라던가. 흥. 카이로는, 길거리는 그대로였다. 사천년을

멀쩡했던 피라밋도 고작 오년만에 달라졌을리 없다. 내가 달라졌다.


그다지 맘에 썩 들지는 않았다. 출장과 여행의 차이일 수도, '먹고 살 고민' 따위의 유무 차이일 수도, 그저

2004년 8월과 2009년 10월의 온도 차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단순히 눈높이의 차이였을지 모른다. 피라밋을

굽어보게 만드는 45인승 고속버스라니. 왠지 순례하듯 그곳을 우러렀던 과거의 내게 모멸감을 안겼던 걸지도
 
모른다. 피라밋은, 카이로는, 사람 사는 곳은 그렇게 건방지게 내려보며 점점이 둘러보는 게 아닌데. 굽어보아

미안해. 내려보아 미안해요, 라고, 날 완전한 이방인으로 격리시켜 버린 양철캔 안에서 외치고 싶었다.


얄쌍하고 길쭉하며 튼튼해 보이는 고속버스들이 피라밋 앞 주차장을 쉼없이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걸으며 피라밋의 위용과 이질감에 숨막혀했던 바로 그 오르막길 역시, 버스의 탄탄한

모터는 잘도 부릉거리며 한숨에 정복해버렸다. 이건 강간이다.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5분만에 피라밋

코앞까지 내달렸다가, 다시 5분만에 피라밋 세 기가 배경으로 쭈그러든 포스트로 내달려 사진을 남기고 휑하니

가버렸다. 왜이리 덥냐고, 왜이리 사람이 많냐고, 이집트 삐끼들 못살겠다고.


어떤 식의 여행이 되어야 한다, 는 건 아니다. 꼭 땀 삐질삐질 흘리고 빡세야 여행이란 것도 아니다. 그저 난,

내가 풍경과 풍경 사이에 이전에 밟았던 그 울퉁불퉁하고 냄새나고 미칠듯 덥던 길이 사라지고 순간이동하듯

뿅뽕 튀어나오는 풍경들만 남아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전희도 없이 덜컥 달려나간 꼴. 그런 식의 폭력적인

풍경의 소환. 그건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지 않을까. 이미 닳고 닳아버린 이미지라 해도 좀더 조심스럽게,

세심하게 접근하면 조금은 더 신선하고 깊이 느낄 수 있을 텐데. 


그 야만스럽고 난폭한 고속버스의 행렬이 피라밋과 '관광지'로서의 카이로를 현지 사람들로부터 뺏어들고

희롱하는 것처럼 보여 수치스러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낙타에 오른 이집션들의 눈높이가 차창에

바싹 붙어앉은 내 눈높이와 같았다는 사실. 이 녀석들, 마리당 몸값이 일억원이라더니 몸값 제대로 하는구나.

왠지 거대 고속버스들이 지분거리며 들고 나는 피라밋 앞 주차장에서 이집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게 그

낙타들 같아서 안쓰럽고, 대견하고 그랬다.


다시 한번 가고 싶다. 45인승 삐까뻔쩍한 고속버스 말고, 소금기 얼룩진 티쪼가리 입고 시커멓게 그을린 채,

박박 기듯이 걸으며 걷고 뛰고, 그러고 싶다. 뭔가 거기서부터 나의 1984년과 1Q84년이 갈라져버렸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그저 훼손되고 벗겨내어진 내 기억속 그 공간의 아우라를 다시 조심조심

덮어씌워주고 싶어서인지도. 어쩌면 그 모든 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와 같을지

모른다.




#1.

어제 '내사랑 내곁에'를 보았다. 적잖이 눈물을 흘렸다. 사실은 이런저런 핑계김에 울고 싶었는데, 눈물이 흐르기만 했다.

발랄하던 하지원은 울부짖고, 김명민의 '메소드 연기' 역시 훌륭했다. 일부 평론가의 악평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감독의 의지에 휘둘렸다. 눈물이 울음으로 발전토록 냅두질 않았다. 화면이 휙휙 넘어가고, 현실만큼 어색한 유머가

맥을 끊었다. 
 

뭔가 아쉬운 게 많은 영화였다. 죽음에 익숙한 장례업체 여직원, 착한 척 하다가 무너지는 루게릭병 환자라는 등장인물,

감정이입하기엔 쉽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원과 김명민의 연기는 좋았다. 스토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너는 내운명'을 울며 보고 나서 느낀 후련함이 없었다. 눈물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2.

포르투 와인 두 잔 째다. 안 보려고 애썼는데, 결국 1Q84 1권을 방금까지 다 봐버렸다. 얼마전 누군가와의 대화 끝에,

하루키를 탐닉한 전력이 있되 그를 극복, 혹은 경과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루키가 창조해낸

존재들이 갖는 공통점은, 자신의 영역 밖으로는 세계가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 지독히 이기적인 점이란 거다.


보통의 '이기적'이란 단어와는 뜻이 달라서, 내 한몸 제대로 추스리지도 못하니 그것부터 해보겠다는 겸손함도 담겨있고,

나부터 바로 서서 누군가를 품어보겠다는 건설적인 의지도 담겨 있겠지만. 아직 1권밖에 못 봤는지라 인물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시니컬하며 세상에 대한 환멸에 젖어있다. 그러고 보니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이 와인을 불렀댔다.


#3.

10월말까지는 꽤나 바쁠 예정이라 했는데, 원래 시험 전날에 더욱 만화나 책들이 땡기기 마련. 장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읽고 있고, '내 심장을 쏴라'나 '오늘의 거짓말' 등등의 소설들을 하룻밤새 다 읽어 버렸으며, 최장집교수의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찬찬히 읽고 있는 중이다. 리뷰어로 받던 책들도 다 끊겼으니 이제 살림살이 좀 나아질 것 같다.


바쁜 거 다 끝날 때까지 보고 싶던 책들을 끊는 거보다, 그냥 가능한 재빨리 전부 해치워버리는 게 낫겠다.


#4.

나만의 블로깅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인기 블로그나 파워 블로그 따위 허명들과 덧없는 거품을 지우고,

공짜에 현혹되어 자처한 온갖 리뷰들을 걸러내고,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블로그'라는 게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원칙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리뷰'를 쓴다는 행위가 어느새 '그 무엇'의

사주를 받은 마케팅에 (결과적으로) 포섭되고 만 건 아닌지 싶어서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나의 육체를 끌어모아 글자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꽉 닫는다"(이선영, "글자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中)

내게 블로그란 그런 공간이다. 일기를 쓰고 낙서를 끄적대듯, 그런 내밀하면서도 솔직한 공간의 의미가 우선인데 어느새

'미디어'라는 측면, 가능성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여러 편향이 생겼다. 단순하게는 글투의 문제에서부터, 이야기꺼리,

심지어는 '수익'에 대한 고려까지. 리뷰 신청을 끊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5.

와인 세 잔째다. 어쩌면 내가 아직 '하루끼적으로' 이기적인 티를 못 벗은 건지도 모른다. 요새 정말 보고 싶은 영화는

'똥파리', 그 영화의 감독이 영화를 찍고 나서 이건 나를 위해 만든 영화다, 라고 했다지. 대체 어떤 영화일까. 그는

어떻게 '나'와 '그들', 혹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을까. 당당하게 '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그가 부러운 건지, 아님

그 말 뒤에 숨어있는 원초적인 암담함과 답답함이 처연한 건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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