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국부'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한 중정기념당의 메인 건물은 바로 요것, 커다란 팔각 정자처럼 생긴

하얀색 대리석 건물이다. 그렇지만 그 양쪽에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위풍당당한 콘서트홀과 공연장이 버티고

섰을 뿐 아니라 입구참엔 그럴듯한 정문이 서 있어서 조금은 위축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선 이게 중정기념당에 들어서는 입구, 현판에는 '자유광장'이라고 쓰여 있다. 천수이볜 전 총통이 몇년 전

대만에서의 최초 평화적인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고 나서 시행했던 일종의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애초 '중정기념당'이라던가 '장개석광장'이라던가, 적혀 있던 현판을 내리고 '자유광장'으로 개명했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다보니, 다른 일반적인 한자 현판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히기 마련인데 이 현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다는 점이 뭔가 생뚱한 느낌을 주고 있던 것이었다.

중정기념당에 올라 돌아보면 양쪽에 커다란 건물 두 채가 버티고 섰고, 잘 꾸며진 정원과 제법 큰 '자유공원'의

앞마당이 보이는 거다.

양쪽 건물은 거의 비슷해 보이면서도 사실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다. 한쪽 건물은 음악당, 콘서트나 연주회가
 
열리는 공간이라고 한다.

중정기념당을 에워싼 건물 유리벽에 비치는 으리으리한 처마의 그림자.

또 하나의 건물은 오페라니 뮤지컬이니, 그런 공연을 위한 공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양산을 하도 많이 쓰고 다녀서, 가끔은 비가 오는 게 아닌가 하고 헷갈리기도 했다. 특히 지하철을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올 때, 사람들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일제히 양산을 펼치는 장면을 보고 비가 오는가 싶어

당황했던 기억.

북경 자금성에 갔을 때도 그렇고, 서울의 궁들을 돌아볼 때도 그랬지만 왕이나 황제를 위한 주된 건물의 가운데

길은 아무나 함부로 밟을 수 없게 해 놓았다. 용을 조각해 두거나 여기처럼 이렇게 커다란 태양을 조각해두어

정면으로 바로 걸어들어올 수 없게 만든 거다.


저 태양 문양은 타이완의 국기인 '청천백일기'에 등장하는 그것과 같다. 파란 하늘의 하얀 태양. 그리고 땅에는

시뻘건 피가 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타이완의 청천백일기.

생각보다 계단은 높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양옆 금빛 건물에 다소 눌려보인다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크기도 생각보다 많이 크고 높기도 높다. 고궁박물관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무늬의 하얀 계단 기둥들에

난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문득 나타난 꺼뭇한 동굴 안, 뭔가가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하얗고 강렬한 태양에 길들었던 시야가 좀체 내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슬리퍼 신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지만 크게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쪼리는

슬리퍼랑 다르니까, 라 스스로 정당화하며 동굴 속으로.

중정기념당의 천장, 바깥에서처럼 하얀 태양이 내리쬐이고 있었다.

이 아저씨가 장개석, 혹은 장제스, 혹은 중정. 일제와 맞서 싸우기보다 공산당을 먼저 패퇴시키겠다면서도

부정부패를 방관하여 민심을 잃고 급기야 중국대륙을 잃어버린, 타이완까지 쫓겨들어와 권위적 독재체제를

십여년간 구축한 인물. 20세기 초중반의 격변기를 지나면서 개인적으로야 참 극적인 삶을 살았겠지만, 대부분

피식민지의 처지에 있던 지역들의 정치지도자들의 궤적과 딱히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이승만처럼.

그에 대해 타이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우리나라랑 비슷하게 천수이볜의 집권 몇년동안 심각한

내부갈등과 정치적 지향논쟁이 있었던 만큼, 이제 '반공'과 '친미'를 국시로 삼던 이 나라도 조금씩 과거사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을지 모른다. '국부'라는 모호하고 위압적인 칭호 뒤에 가려진

사실들을 발굴해 내고,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 싶다. 더구나

남북 관계와는 달리 중국과 대만간의 양안 관계는 천천히, 그렇지만 확고한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으니

어쩜 우리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다.

중정의 커다란 동상을 지키고 있는 병정놀이 중인 군인. 워싱턴의 링컨도 그렇고, 타이페이의 장개석도 그렇고

다들 너무 크다. 그들은 너무 크고 으리으리한 건물 한 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거다. 게다가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들, 이런 호두까기 인형같은 병정들과 반짝이며

내려꽂히는 후광같은 조명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고 차가운 질감의 대리석, 기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뱉게 만드는 그 공간의 깊은 침묵과 아스라한 공명 소리까지. 아, 양쪽으로 거대한 국기를 둘둘 말고 있는

데코레이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높은 곳에서, 그렇게 커다란 몸집을 하고, 주위의 온갖 것들이 다 당신만을 떠받드는 공간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니 참 좋겠수. 그냥, 그런 정치인들의 거대한 동상들이 조금은 눈높이를 맞추고

소탈하게 내려와 있으면 안 될까 싶어서 괜히 장개석에게 툴툴거려 보는 거다.

돌아나오는 길, 현판까지 대리석인가 보다. 햇살이 내리쬐이자 거울처럼 말갛게 빛나며 처마끝을 반사시켰다.

왠지 씁쓸했던 거대 건축물. 누군가를 높이고 금칠하기 위한 기색이 너무 역력해 보였다. 그가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지 아닌지를 차치하고라도, 그냥 누군가를 그렇게 추앙하고 떠받드는 것 자체가 불편했던
 
거다. 장개석=타이완=국가=숭배의 대상, 따위 그가 의도했을 도식이 거칠게 머릿속에 막 떠올랐다.

장개석은 '신생활운동'을 전개해 국민들에게 유교적 가치를 보급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일종의 새마을운동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인지 이 '중정기념당'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문들은 대효(大孝), 대충(大忠) 따위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타이완 거리에는 지금도 여전히 '신의信義로', '인애仁愛로', 심지어, '애국愛國로'같은

지명도 있어서 완전 경악하고 말았었다. 손발이 오글오글.

그들이 이공간을 어떤 의도로 기획했던 간에, 타이완을 어떤 국가로 구상했던 간에, 젊은이들은 모여서 춤추고

웃는다. 뭔가 수화로 된 공연을 연습중인지 손으로 수인을 짚거나 쉼없는 제스쳐를 펼쳐보이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단청과 처마의 기울어짐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 때 몇 가지 지문들을

읽으며 가늠할 수 있게 된 거 같은데, 정말이지 딱딱한 녀석들이다. 살짝 올라가려다 말았다는 느낌.

경직된 그만큼 완고해 보이기도 하고, 강건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뭔가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겠다는

결기가 꽉 차 보이는 거다.

돌아나오는 길, 아까는 없었는데 음악당 옆에서 붉은 기를 휘두르며 깃발춤을 연마중인 아이들이 보였다.

묘하게도 펄럭이는 붉은 기를 보면 일단 가슴부터 뛰고 만다. 우와..멋지다 이러면서.


타이페이 서북쪽으로 달려나가면 단수이가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찍은 항구도시라고 해야 하나. 바다를

접한 조그마한 마을. 단수이항을 따라 걷다가 떨어지는 해를 잡았다.

배를 끌어 바다로 내려가는 길, 반짝반짝 비늘처럼 햇살이 깔렸다.

육각별 모양으로 빛나는 태양, 자잘하게 출렁이는 잔잔한 바다에 맞춰 너엄실대는 조각배 몇 척.

어쩌다가 햇살이 붉고 둥근 구체로 사진 안에 들어왔을까.

한가롭고 평온하던, 그렇지만 역시 무지 덥고 습했던, 그렇지만 또 바닷바람 덕분에 더위의 팔할은 날려버렸던

곳, 반짝반짝 단수이의 해변을 걸었다.



<경고> 임산부나 노약자, 혹은 어젯밤 묘한 짓을 하여 심신이 미약해진 젊은이의 건강과 기분을 해칠 수 있는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시제 시장, 대만의 유명한 하고 많은 야시장들 중에서 뱀이나 자라의 해체쇼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에

두근두근하며 찾았던 곳이다. 여차하면 이번 여행의 목적 중에 하나였던 '뱀탕'을 시음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실내로 이어져 있는 시장통 골목은 뭔가 다른 스린이나 궁관 야시장과는 또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뭔가

야시시한 상점들도 보였고, 마사지샵하며 횟집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공간에 가득한 살풋 비린내음.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기엔 냄새가 너무도 확연히 와닿았고, 점차 냄새의 실체에 접근하며 확인할 수 있었다.

뱀을 커튼처럼 가게 앞에 늘어뜨려놓았다. 다른 가게들도 이미 몇 개를 지나쳤지만 사진 촬영을 허가해 놓은

곳은 여기가 유일했다. 비린내가 확 와닿는 뱀커튼들. 옆의 촘촘한 철망에는 뭔가가 쉼없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커튼으로 걸린 녀석들은, 피와 함께 내장을 모두 뱉어내고 있었던 거다. 밑에 놓인 '빠께쓰'에는 핏물과

함께 뱀의 이런저런 장기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기-일다란 뱀의 몸통에 그어진 기-일다란 칼자국, 그리고 그

기-일다란 몸통을 타고 흐르는 핏물.

뱀들이 두세마리씩 끈에 목이 감긴 채 주렁주렁.

뒤의 티비에선 언젠가 했을 해체쇼를 녹화해선 무한반복으로 틀어놓고 있었고, 앞에선 반짝거리는 뱀가죽에

구슬처럼 빛나는 뱀눈알이 콕 박힌 채 흔들거리고 있었고.

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떻게 보면 뱀의 징그러운 모습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주는 듯 하다. 뭐가

되었던 신체를 저렇게 칼질하고 내걸어두면 이뻐보일리야 없지만, 왠지 목졸라 죽인 듯한 그 살벌한 분위기에

더해서 더욱 적나라한 뱀의 표정이랄까, 게다가 쫙 찢어진 입은 살풋 비웃음마저 머금고 있는 듯 해서 더욱.

철망 안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 왠지 이 녀석들은 죽음 앞에서도 초탈할 거 같다. 포유류가

파충류, 특히 뱀 앞에서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은 어느 문화권에선 경외감과 존경심을 낳았고, 다른 문화권에선

혐오감과 배척을 낳았던 거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싸구려스러운 불빛 뭉테기들이 천장에서 흘러내리고, 사진에 찍히지 않는 뱀의

비릿한 향취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뱀탕은 도저히 시도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패스.

그 와중에도 눈이 돌아가는 섹스돌샵, 온갖 종류의 성인 장난감들을 팔고 있었지만 좀처럼 들어가 구경할

엄두도 못내게 만드는 환경이었다. 그저 愛神이라는 간판 제목이 좀 웃겨서 웃었을 뿐, 이내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또다른 샵. 반투명한 비닐 커튼을 드리웠지만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대충 뭐가 어디에 진열되어 있는지,

저건 어디에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다 알겠더라. 내 상상력이 탁월한 걸까 아님 그것들이 워낙 적나라하게

생겼던 걸까.

아케이드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조금 살 만하다. 탁하고 비릿한 공기에서 해방되니 야시장 특유의 기름내와

온갖 음식냄새가 뒤섞인 그 오묘한 내음조차 향기롭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만난 뱀아저씨. 담배를 척, 하니 꼬나물고 무려 '소녀시대'의 댄스에 맞춰

뱀을 주물럭주물럭, 완전 기력이 쇠한 듯한 뱀을 억지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뒤의 모니터에선 소녀시대가 상큼발랄한 미소를 작렬하며 귀엽귀엽 댄스 중이시고, 앞에서는 담배를 꼬나문

아저씨가 투닥투닥 뱀을 훑으며 엉거주춤 댄스. 이건 좀 굉장히 부조화스럽기도 하고 부조리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소녀시대 팬클럽에라도 급히 알려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은데.ㅋ '소시가 뱀쇼 배경화면으로 쓰인대요'




타이완, 타이페이에선 왠만한 곳들을 전철로 이동하는 게 편하다. 빠르기도 하지만, 워낙 지하철역 안에 냉방이

잘 되어 있어서 시원하게 쉬엄쉬엄 이동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미술작품이 쭈르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쇼핑몰과 연계되어 있기도 하고. 

이렇게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신기한 건 그다지 벤치나 의자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사람들이 맨바닥에 그냥

털썩 앉아서 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는 점.
 
구간에 따라 요금이 할증되는 시스템이다. 기본은 20NT$, 타이완의 화폐단위는 NTS, 뉴타이완달러의 약자인 듯.

기계에 돈을 넣으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전철표가 나온다. 금속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고 플라스틱이라니,

왠지 조금 싸구려스러워 보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재활용하기에도 편할 거 같고 훼손이 쉽지도 않을 거 같고.

괜찮은 거 같다.

개찰구는 저 빨강 부채모양 장벽이 펼쳐져 있다가 지날 때마다 접히는 형태. 들어갈 때는 저 플라스틱 코인을

접촉면에 띡 대면 삑 소리나면서 문이 열리고, 나갈 때는 저금통 구멍같이 생긴 곳에 집어넣으며 나옴 된다.

여기선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한 줄 서기 시행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처럼 두줄서기 하는 나라를 본 적이

없는데, 한 줄은 서고 한 줄은 걷도록 해 주는 게 맞지 않나.

화려하게 꾸며진 지하철 역내 간판. 여기가 중정기념당 역이어서 좀더 신경써 꾸민 건지도 모르겠다.

중정, 장개석, 장제스, 그를 부르는 많은 이름들이 있다. 사실 대만의 장개석이나 한국의 이승만이나 일종의

'국부'였고 민주주의를 하는 양 독재를 했던 인물들, 닮은 면이 참 많은데 장개석에 대한 대만인들의 인식이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보다 조금은 좋은 거 같다. 기념물이 많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 뿐일까.

사실은 별 생각없고 아무 느낌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月台, 월태가 전철을 가리키는 대만식 표현이다. 달 월, 별 태. 뭔가 굉장히 로맨틱한 느낌의 이름이랄까.

그런 달과 별을 조심하라는 전철역 플랫폼의 문구.

전철 안에 붙어 있던 인터콤 안내문, 왠지 2번 설명 위에 있는 녀석이 입에서 초음파를 발사하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밌길래 그만 한 장. 주위의 사람들이 전부 이상한 사람보듯 쳐다보았지만 모른 척 했다.

그리고 또 한장, 노약자석에 붙어있던 안내판. 한국의 '노약자'는 임산부나 아이가 아니라 대개 나이든 노인을

위한 전용석처럼 되어있다가 요새 조금씩 임산부도 배려하기 시작하는데, 여기도 줄줄이 읊어놓았다. 노인,

행동이 불편한 사람, 어린 아이를 동반한 부녀, 임산부.

그렇게 도착한 중정기념당. 역사에서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모습.





음식의 천국 대만에서 술 한잔 안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두개 사고, 맥주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컵라면은 아무래도 내국인용인지 영어 설명도 아주 박하게 찔끔 있어서, 대충 그림보고

맛을 그려보고, 번체자로 씌여진 한자 대충 눈치로 추측해보고.

그래서 요렇게 두 개, 하나는 왠지 길거리에서 많이 본 장면을 그려넣고 있어서, 다른 거 하나는 뭔가 그릇용기를

두 개나 쓰며 조리하는 거 같아 보이길래 풍성해 보여서.

내부에 들어간 건 비슷하다. 분말 스프 하나랑 뭔가 특제 소스 하나. 뭔가 했더니 하얗게 굳어있는 돼지기름,

아마도 국물 위에 맛있게 둥둥 떠있는 돼지기름을 낼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하얗게 굳은 돼지기름을 찍찍

봉지에서 짜내는 건 좀...쉽지 않았고 보기에도 좀...

다른 하나는 뭐랄까, 짜파게티와 비슷해 보이는 춘장 소스에 일반적인 분말 스프. 평이한 컵라면이었다.

그리고 맥주. 대만에 왔으니 대만 맥주를 마셔야겠다 싶어서, 타이완피조우. 무덥고 습해서 무지하게 끈끈한

하루를 보냈는지라 맥주 한 잔이 그야말로 '션하게' 바닥나고 말았다.

<막간을 이용해 배워보는 타이완의 음식 매너>

나쁜예) 음식을 먹기 전이나 먹는 중 젓가락을 이렇게 용기에 꽂아 놓거나 걸쳐 놓는 것은 비매너.

(국물에 둥둥 떠 있는 기름들은 아까 하얗게 굳어 있던 그 돼지기름이 녹은 것,  확실히 대만/중국 음식은

기름이 많이 들어가 기름진 느낌이 강하다. 심지어는 컵라면에까지.)

좋은예) 음식을 먹기 전이나 먹는 중에는 늘 이렇게 똑바로 젓가락을 걸쳐두어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젓가락 아랫부분이 국물에 담겨있지 않도록 하려는 위생상의 배려 아닐지.

그리고 용기를 두 개나 쓴다며 날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일종의 짜장면은 생각보다 초라한 행색, 짜장소스가

좀 많이 부족하달까, 맛이 심심하진 않은데 보기에 너무 노랗기만 해서 아쉬웠달까. 그렇지만 술안주로는

손색없던 대만의 컵라면들.





(요약) 고궁박물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 중 하나, 박물관에 위치한 찻집에서 맛보았던 황제를 위한 다과 세트.

고궁박물관 가는 길, 아무리 한국이 요새 폭염이니 뭐니 하지만 대만에는 비길 바가 아니다. 훨씬 뜨겁고, 훨씬

습하다. 작렬하는 태양 밑에서 허둥대다가 하얗게 찍어버린 사진. 버스들 뒤에는 운전사 이름이 번호판처럼

별도로 붙어있다. 오른쪽 밑부분, 하얘서 잘 안 보이지만 실제로는 눈에 아주 잘 띄인다는. 난폭운전이나 사고

발생시 아주 유용할 거 같다.

드디어 도착, 고궁박물관. 장제스가 이끌던 부패하고 나약한 군대가 마오쩌둥의 붉은 군대에 휩쓸리고 나서,

대륙 본토에서의 패배가 거의 기정사실화되던 즈음 전례없는 군사작전이 펼쳐졌다. 청나라 때부터 북경의

자금성에 수집되었던 대규모의 엄선된 중국 국보급 유물들을 대만으로 옮기는 작업. 수십만점의 회화, 도자기,

조각, 서적 등 귀한 유물들이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도 무사히 이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실 이건 대만 쪽, 장제스 쪽의 시각이고, 중국 쪽, 마오쩌둥 쪽의 시각으로 따지자면, 그야말로 중국 문화의

정수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셈이다. 지금 중국에 남아있는 유물들은 청나라 때부터 누대에 걸친 정선 작업을

통과하지 못한 B급 유물이 대부분이라 할 정도니까. 고궁박물관은 그런 박물관이다.

마치 타지마할처럼 온통 하얀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가야 고궁박물관의 본관에 도착한다. 그 와중에 계단의

장식이 눈을 잡아끌었다. 구름 모양인지 십장생의 하나인 영지버섯의 모양인지. 저 너머로는 야자수가

수양버들처럼 휘영청 잎새를 드리우고 있었다.

박물관 내부는 총 3층, 내부는 거의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더욱 꼼꼼이 살펴보아야 했다. 사진 따위에 의지해

기억을 남겨둘 수 없으니, 하나하나 눈에 마음에 새겨두겠다는 결의로 근 반나절을 돌아보았다. 특히나 도자기,

그리고 황제의 장난감으로 특수 제작되었다는 보석함이니 장식품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기꺼이 많은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청대의 도자기와 현대의 도자기 질감을 직접 만져보고 비교해 볼 수 있도록 마련해둔 코너에서 마주쳤던 '조각'.

이건 무려 네 자의 한자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글자. 중국이나 대만의 상점에서 재운을 기원하는 뜻으로 종종

걸어두는 장식품이라 하는데, 招財進寶, 초재진보. 재물을 부르고 보배를 나오게 하려는 뜻이 담겼다 한다.

그리고 박물관 내의 화장실 표지. 남여화장실이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있기도 했지만, 별도로 여자화장실만

좀더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인당 '용무'에 필요한 공간이 남자보다 여자가 넓게 필요하기 때문에 같은

갯수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세심한 조치가 아닐까 싶었는데, 종종 급한 남자들이 여자용 화장실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나 보다.

박물관 나오는 길, 유리로 만들어진 자동문에 마치 자금성의 붉은색 대문처럼 오돌토돌 징이 박혀 있었다.

본관 말고도 별관도 있고, 행정용 관리관도 따로 있고. 별관에서는 지금 베트남 특별전시를 열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돌아보기에는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넘 많이 걸릴 듯 하여 패스.

대신에 좀 쉴 겸, 박물관에 딸려 있는 찻집에 들어갔다. 찻집 이외에도 고궁박물관을 감싸고 잘 조경되어 있는

정원과 정자 등도 있어서 어딜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워낙 더워서 에어컨이 절실했던 터라 망설임없이 실내로.

찻집 내부. 황실에서 즐기던 다과 세트를 맛 볼 수 있다는 곳이라더니, 실내 인테리어가 꽤나 화려하고 세련됐다.

모란차를 시켰더니 투명한 유리잔에 조그마한 잎새가 꽁꽁 뭉쳐진 덩어리 하나를 툭 떨어뜨린다. 정말이지

건조한 느낌으로 툭. 그리고 유리잔 주둥이가 찰박이도록 뜨거운 물을 뽈뽈뽈 부어주었다.

뭉글뭉글뭉글, 곧바로 반응하기 시작하는 덩어리. 바싹 말랐던 만큼 급했던 거다. 뭔가 잔뜩 뒤틀고 꼬깃꼬깃

말려있던 것들이 한껏 기지개키며 일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유리잔을 꽉 채워버린 꽃 한 송이. 초록색 꽃받침과 분홍색 꽃잎, 그리고 위풍당당한 수술까지 꽃송이

하나가 완연하게 피어올랐다. 투명했던 유리잔 속 물빛도 은은한 금색으로 바뀌었고 무엇보다 향기. 꽃향기.

모란차 말고 일반 녹차류를 시키면 이렇게 단정한 다기에 담겨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메인, 다과 세트. 정말 그럴 듯한 쟁반-이걸 뭐라 불러야 할지조차 모르겠지만-에 담겨 나왔다.

3층, 2층, 그리고 2층짜리 쟁반이 제각기의 높이와 공간을 확보한 채 이쁘게 빚어진 다과를 사뿐히 올린 채다.

콩으로 빚어진 오리 한 마리. 물결문양 날개깃이 새겨진 날개하며, 우스꽝스럽게 벌어진 부리하며. 검은깨로

콕 눌러박은 귀여운 눈매하며.

그리고 호박모양으로 빚어진 떡, 호박색도 딱 리얼하지만 그 위에 호박 줄기를 묘사하려고 올려둔 건포도는 참.

고궁박물관의 유명한 전시물 중 하나가 황제의 장난감이라는, 옥을 빚어 만든 배추다. 아마도 이 전시품을

흉내내어 만든 게 아닌가 싶은, 떡으로 빚은 배추.

그리고 복숭아 모양으로 빚어진 만두..라고 해야 하나. 호빵이라고 해야 하나. 비록 좀더 허술하고 치졸하게

만들어진 것일지언정 복숭아 모양의 호빵은 그리 신기한 편은 아니지만, 확실히 맛은 달랐다.

그리고 젤리 형태로 만들어진 다과. 투명하면서도 굉장히 탄력있는 젤리였는데, 의외로 맛은 어쩐 영문인지

굉장히 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독특한 식감이었다.

그리고 1층에 담겨 있던 다른 다과. 이 아이는 좀 평범한 형태의 떡이었다. 아무래도 1층에 있는 것보단

2층에 있는 것들이 화려하고, 그 중에서도 3층에 있는 오리모양으로 빚어진 다과가 최고였지 싶다.

또다른 떡, 카카오 가루를 아낌없이 뿌려넣은 떡이었는데, 고명이 평범한 팥이 아니라 검은쌀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찻집 천장에 달린 조명도 자세히 보니 고궁박물관의 다른 유명한 전시품을 따라 만든 모양이다. 고대한자가

조각된 청동종의 형태가 천장에 주렁주렁.

이쁘게 빨간색 파란색 끈으로 매만져진 하얀 종지들.

여전히 햇살은 미친듯이 내려쬐고 있었고 남국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야자수 한 그루가 박물관 앞 정원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지만,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황제의 다과를 맛보고 났더니 뭔가 세상이 색다르다.

70만점이 넘는 소장품을 갖고 있다는 고궁박물관, 70만점이면 루브르 박물관이 가진 소장품의 배가 넘는 숫자,

게다가 그 퀄리티가 중국 오천년 역사의 정수를 품고 있는 수준이니 더 보탤 말이 없다. 그리고 그 전시품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녹아있는 찻집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며 차 한잔 여유롭게 즐기는 여유까지 부려보는 것,

대만에서 꼭 고궁박물관을 들러야 한다는 사람들의 조언에 나 역시 한 표.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수분간, 온갖 세상의 소음들이 삐집고 나오는 그 틈바구니에서 꽃처럼 만발하던 수화들,

처음엔 아무 대사 없이도 이렇게 흡인력있게 당겨낼 수 있다는 데에 마냥 놀랬고, 다음엔 말로 뱉는 대사들 대신

수화만으로도 참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사실 수화, '손으로 하는 말'이라 이해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는지도 모른다. 수화를 할 때 둘은 서로의 손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표정, 입모양에 몸짓까지 모두 섬세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그들의 눈빛,

입모양, 살짝 스쳐가는 빛과 그늘, 그런 뉘앙스들을 모두 잡아낼 기세로, 수화는 단지 손짓을 이용한 대화가

아니라 거의 완전소통을 지향하는 무엇과도 같다. 더듬이 두개를 완전히 포갠 채 서로의 의식 전체를 온전히

공유하는 개미의 그것과 같은 무엇 말이다.


쉽게쉽게 뱉어지고 그 누구의 귀에도 가닿지 못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상대를

등진 채로도 던질 수 있는 말이란 건 얼마나 허랑한지. "그럼 여태 너희는 만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의 아버지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고, 그래서 그녀와 그는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말이 아니라 손으로 했어요."

손으로, 온몸으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내내 한 번도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 '사랑해'. 자그맣고 귀여운 반전이 지나고 난 후에도

그들은 말할 뿐이다. "워 시환 니". 난 니가 좋아. 그 말로도 충분한 거다. 굳이 뭉게구름같은 수사와 여름철

소낙비같은 고백 말고, 이미 그들은 손으로, 눈으로, 입모양으로, 온몸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p.s1. 이런 달콤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만나면, 잠시나마 심술궂은 시니컬함이 잠잠해지고 만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은 갱장갱장히 이런 영화가 땡기는 이유.


p.s2. 영화에 대해 아쉬운 점은 딱 하나, '聽說'이란 (아마도) 대만 타이틀을 그대로 써버린 무성의한 제목, '청설'.

차라리 영어제목을 쓰는 게 어땠을까. hear me.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도, 내 말만 들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내 모든 것을, 내 모든 뉘앙스를 가능한 남김없이 들어주길. 그런 느낌의 영어 타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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