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고양이가 숨어있는 사진'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갈색 얼룩무늬 고양이가

밭고랑 사이 같은 곳에 숨어있어 좀처럼 찾기가 어려웠더랬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온통

마르고 비틀려져 갈색빛 가득한 풀밭에서 메뚜기 한쌍을 알아보기란 꽤나 난이도가 있는

퀴즈인 셈이다. 그나마 한 마리가 아니라 한 쌍이라 조금은 눈에 잘 띌 테니 다행이다.

이들에겐 사랑, 혹은 종족보존을 위한 절실한 움직임이겠지만, 경련하듯 꿈틀거리며 뭔가 나른한

메뚜기의 앙상한 다리와 얼기설기한 문양과 질감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뭔가 거북살스럽다고나

할까. 아니면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한 대목처럼 대충 "그 우스꽝스러운 엉덩이의 움직임과

성급하고 눈먼 애무에 더한 섣부른 탄식" 나부랭이 운운하듯 대충 우습다고나 할까. 우야튼 과히

우아하거나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다. 너무 가깝게 들여다봐서 그런 거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보면 둥글둥글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 일정 간격 이상으로

바싹 붙어서 관찰하게 되면 맘에 걸리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저 외롭고 추운 두

곤충이 서로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짝지를 찾아 사랑도 하고 종족도 보존하는 아름다운

그림인 건데, 너무 들이대서 보니까 이 녀석들의 서툴고 단조로운 움직임이 보이고,

얄포름한 여섯 다리와 거칠고 칙칙한 피부가 눈에 들어온다.






단편소설은 차라리 시와 같다, 라고 한 옮긴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작가는 자신의

단편소설에 놓인 단어, 문장, 문단들을 어느 하나 허투루 놓지 않은 채 자그맣지만 더없이 날카롭고

위험한 덫을 하나 엮어놓는다고 상상할지 모른다. 글을 읽던 사람들을 조금씩 홀리게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까지 유인한 뒤에, 작정한 순간 휙, 하고 독자의 다리를 잡아채는 쾌감을 좇는 거다.


독자가 단편소설을 읽으며 바라는 것 역시 바로 그 정반대의 쾌감, 뭔가 마조히즘적인 쾌감일지 모른다.

어디에 덫이 숨어있을지 더듬어보고 예측해 보는 쾌감, 아니면 그 덫이 얼마나 잘 위장되어 있고

예기치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덮칠지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쾌감. 그 덫은 꼭 생각지 못한 반전일 필요는

없고, 분절되어 있는 의미와 단어들이 어느순간 단단히 연결되어 있거나 정렬해 있는 걸 뒤늦게

깨닫는 종류의 것이어도 좋겠다.


사실 그래서 단편은 대개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지도 모른다. 호흡이 유장하지도 않고 스토리가 

거대하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외려 뼈대만 튼튼히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사람들은 

단편소설의 몇 장 되지도 않는 페이지를 쉽게 넘기는 거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복잡하게 전개될 여지도

없고 중층적으로 꼬이기도 쉽지 않은 고작 몇 장의 이야기니까 말하자면 '맵'은 뻔한 상황, 작가들은

이야기를 Zipping하면서 좀더 함축하고 응집하려 들지만 독자는 대개 결말에 쉽게 와닿아 '덫'을

찾아내고 흔들어보인다. 겨우 이거야, 하고 실망하며.


그런 게 내가 늘 단편의 숲을 거닐며 혼자 해보는 상상. 사냥꾼이 만들어낸 조그마한 사냥터의 출구를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 조그마한 메추리 같은 새가 되어, 이왕이면 멋진 덫에 더없이 멋지게

걸려넘어가 주겠어, 하는 다짐을 해보는 거다. 몇 개 등장하지 않는 소재와 대사, 단어들을 요리조리

뒤집어 보며 맛보고 확인하는 훌륭한 독자가 되어 차근차근, 이왕이면 멋지게 잡아채이겠다는 다짐이다.

그런 점에서, 쑤퉁이 지은 '다리 위 미친 여자'라는 단편집에 실린 열네 개의 사냥터 중 여섯 개는 정말

굉장히 좋았고, 두 개는 조금 약했으며, 나머지는 괜찮았다.


내가 좋았던 단편을 나열해 보자면, '다리 위 미친 여자', '좀도둑', '술자리', '신녀봉', '대기압력',

'집으로 가는 5월' 정도인 듯. 다들 제각기 생김과 쾌감이 다른, 그리고 중국의 현대사가 새겨둔 상흔을

깊게 간직한 덫을 숨기고 있던 소설들. 한국에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중국에서만 가능한 소설을

맛보고 싶다면 한번 시도해보아도 좋을 듯.

다리 위 미친 여자 - 8점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문학동네
@ 강화도 전등사.

진흙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단전에 기를 모으듯 영양분을 끌어모았을 거다.

물방개니 게아재비니 어깨로 툭툭 시비걸 때마다 꽃대궁은 파르르 떨었을 거고.


강한 듯 애절하게 탄주되는 기타 루프소리가 뭔가 못견디겠는 쾌감을 선사하듯,

그렇듯 발가락과 똥꼬가 움찔대는 쾌감 속에 뿅. 꽃봉오리가 터져나온 건 아닐까 싶다.


뿅.



밤에 잠이 안 오고 마냥 종잡을 수 없는 얄따꾸레한 생각들만 치밀어오르기로 걍 이부자리를 걷고

모처럼 책장을 디볐다. 손창섭..내가 그간 즐겨 읽던 작가이면서도 여태 이름에 주의하지 않았더랬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약간씩은 일그러지고, 그로테스크한 배경과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이질적인-

그야말로 어불성설격인-인물이 등장하곤 한다. '인간동물원'이라거나 '잉여인간', 아님 '비오는날'..


무엇보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에서 드러나는 냉소와 비정상성은 해방 전후를 기해 한국

문학계가 잡아낸 온갖 이물감과 혼란, 방황의 극치랄까, 이보다 더 극적으로, 혹은 '선정적으로' 드러낸

작가는 없는 거 같다. 그의 묘한 문체와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짙은 냉소, 자포자기식의 쾌감. 그러한 말투로

읊어내는 비현실적 사건과 배경은 그 자체로 음울함을 잔뜩 독가스처럼 품고 있다.


푸닥거리하듯 그의 자멸적이고 자학적이랄만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마지막으로는 '신의희작'에서 그 작품들에

대한 열쇠로 보여질만한 자기고백을 하면서 그는 대략 진정된 거 같다. 소위 문학을 통한 승화, 구원이랄 만한.

그담엔 더이상 쓸 게 없었을까..더이상 별다른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68년인가 일본으로 아예

귀화해버렸다고 하더군. 하긴, 그가 '신의희작'에서 연기한 인물은 갈데까지 간셈, 막장중의 막장이었다.


그 탓일까, 내 생각엔 손창섭이 그다지 평가받지 못한 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이른바 한국인의 특성이라는
 
애이불비, 혹은 아무리 힘든 고난과 역경에도 한줄기 빛무리를 (무책임하게) 던져놓고 마는 식의 통속적이고
 
도식적인 구도가 아닌거다. 왠지 그래야할 듯한 도덕적인 압박감이나 (계몽이건 격려건) 무책임한 낙관으로

회귀하고 마는 잘 짜여진, 닫힌, 완결된, 기승전결의 작품이 아닌 거다. 이게 내 생각엔 손창섭과 김기덕, 그런 류의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공통점인거 같다는 생각이 불끈 드는데, 그저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을 '따왔을 뿐'인거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걍 하나의 주제의식이나 의식적인 부르짖음을 위해 현실을 보기좋게 매무새지어 마지막에

마침표로 마치는 것이 아닌...뭐랄까, 그저 작품 앞뒤에 말줄임표로 그 연속성과 함축성을 열어놓는달까.

"..." 이런 식으로나 표현할 수 있을까.


해서, 그는 어설픈 냉소나 겉멋든 자포자기가 아니라, 갈데까지간 냉소와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 이쯤이면 되겠지,
 
이쯤에서 반등해서 밝은곳으로 상승해야지, 하는 게 아니라 도무지 그 음울함과 비정상성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그저 맷돌에 갈리듯, 한없이 침잠할 뿐.



그러고 보니 하루끼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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