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두 편의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 네 장의 초대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영화 네 편을 보거나, 데이트를 두 번 하거나.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 영화다운 '시작은 키스(원제 : delicacy)'를 보고 난 참이었고, 조금 지치고 살짝

 

실망했던 참이었다. 홍상수식의 갈림길을 빙자한 순환도로라거나 미묘하고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영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초대권 한 장은 남기고 일요일날 아트하우스 모모의 마지막 영화였던

 

'블루 발렌타인'을 보기로 했다.

 

 

맞다. 어떤 노래는 듣게 되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거다. 어떤 사람은 만나게 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런 노래가,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현자같은 소리만 주워섬기거나, 이런저런 연애의 온갖 일반론들을

 

꿰차고 있는 척 해도,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는 그런 상대. 흔히 천생연분이라거나 소울메이트라거나 운명이라거나,

 

혹은 영원과 불멸을 다짐하는 그런 상대를 만나고 나면, 방법이 없다. 그런 인연 앞에 서고 나면, 마치 여태 어느 인류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밟는 기분으로 사랑에 빠지고 마니까.

 

 

뜨거운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평소에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 따위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과의 이런 순간들이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도 모두 옛 허물과 과오와

 

부끄러움을 태워버리고 불사조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겠다 믿었을지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그녀를 잡아주는 그의 손길, 한순간의 불편한 침묵도 끼어들지 못하는 남김없는 대화. 베르나르가 소설 '개미'에서 말했던

 

더듬이를 포갠 개미들의 완전소통이란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어렴풋이 알 거 같은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택시와 버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브루클린 다리 교각 위에 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름다운 건 더없이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뿌듯하고, 거침없이 자랑스러운 그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이 뭔지 맛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그와 그녀는 감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맞다. 어른들의 경험이라봐야 누추하고 실패한 인생을 반추했을 뿐,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황홀한 건지, 한 순간 남김없이 충만함으로 가득했는지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런데.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도가니를 달구는 화력이 점점 떨어진 건,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땔감이 부족해서였을까.

 

착하고 유머러스하고 순수하던 그는 그대로 가정적인 남편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 안아주었던 그였고,

 

그의 마음은 좀처럼 변함없이 그녀를 향한다. 아마 그는 변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금은 덜 세상에 찌들도록 자신이 조금

 

더 세상에 찌들거나, 그녀가 조금은 덜 독해지도록 자신이 조금 더 독해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때의 천진한 마음과 순진함을 지켜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뿐일까. 그가 조금 변했다고, 아니면 그녀가 조금 변하지 않았다고 해결될 문제였을까. 과연 이런 당황스러운

 

피로감과 거리감은, 그와 그녀의 잘못인 걸까. 무엇이 모자라 그토록 펄펄 끓던 도가니에 냉기만 감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나 그녀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와 그녀는 만났고, 사랑했으며, 기꺼이 서로를 책임지고 동반하려

 

함께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와 그녀는 서로가 상대로부터 뻗쳐나온 냉기와 거부감으로 손끝 하나 마음대로

 

옴쭉달싹 못하게 된 상황임을 깨닫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귀처럼 싸우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듯,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균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싸우지 않으려 애써

 

웃음을 짓고 노력해보아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찾아냈던 사랑의 이유들, 유머러스하고 천진난만하고 밝고 착하고. 그런

 

장점들은 그대로 단점이 되어 증오의 이유가 된다. 대체 왜. 대체 왜일까. 어쩌면. 사랑 따위 처음부터 환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유효기간 만년짜리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작해야 반평생 버티면 성공했다 쳐주는 게 사랑일까. 애초에

 

그와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감지했던 온갖 위험 신호와 불길한 징조를 외면하고 조롱했던 벌을 받는 걸까.

 

 

우리는, 나와 당신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평행선이었던 걸까. 어쩌다 한번 사다리 타듯 옆길을 타고 완벽하게

 

합쳐졌지만 어느 순간인가 다시금 옆길로 새버리고, 처음부터 그랬듯 각자의 길을 따라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긋고 있을 뿐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는, 앞으로 절대 다시 겹치지 않을 순간들을 저주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찰나의 순간이나마 완벽하게 겹쳤던 잠깐의 순간을 기적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그런 겹침의 순간은

 

결혼 따위 인습적 구속이나 사회적 책임감 따위, 사랑이 아닌 '부부애'나 '정' 따위로 지속되진 않는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어른해진 눈길을 붙잡는 건 크레딧 가득 번쩍거리며 터져오르는 불꽃놀이 불꽃들.

 

그 불꽃들은 그와 그녀가 사랑하던, 그에게 그녀가 전부였고 그녀에게 역시 그가 전부였던 그런 시절의 풍경들을

 

하나씩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다시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있었다. 허름하고 난잡한 해수욕장의 싸구려 불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낀 적은 없었다. 왠지 그저 슬프고 안쓰럽단 느낌, 부질없단 느낌 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저 정도 불꽃을

 

피워낸 불꽃놀이 폭죽이라면, 내가 그런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웠길 바랄 뿐.

 

 

 

 

 

 

 

 

 

 

"아버지를 그리는 아버지의 영화, 하드보일드 버전의 '아름다운 인생'이랄까". ytzsche.


비우티풀Biutiful. 영어로 '뷰티풀'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는 딸에게 그가 알려주는 알파벳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으며, 떳떳한 일자리나 제대로 된 가정환경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아빠지만,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거다.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아니어도, 최소한 영어 단어 하나쯤은 주저없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그의 삶은 '비우티풀'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경제 위기로 흉흉한 스페인,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의 일당을 나눠갖는 게 그의 소득이다. 갈취, 혹은 등쳐먹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경찰의 단속을 막기 위해

뇌물을 먹이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렇게 그는, 스페인과 불법체류자 양쪽으로부터 멸시받고 혐오받는 사람이지만,

그런 멸시와 혐오의 대가로 근근히 이어지는 그의 삶은 초라하고 구질구질하기만 하다. 게다가 몇개월의 시한부 선고까지.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 앞에서 잔뜩 흔들려버린 그는, 전혀 떠날 생각이 없다. 아무리 영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엄마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아내와 두 조그마한 아이들 앞에서,

훌쩍 떠나갈 수는 없었을 거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도 아이들에게 아무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고작해야

몇달치 집세와 함께 가난만 남겨놓고 떠나가게 될 거란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젊은 나이에 스페인을 떠나 외국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버지는,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늘 그리워한다. 그가 자신의 파탄나버린 결혼생활과 위기에 처한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는 거나, 먼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는 건 모두

그의 아버지에 대한 결락감과 그리움에서 비롯했는지 모른다.


포르말린에 잔뜩 절어 미이라가 되어버린 젊은 아버지의 시신, 이장을 위해 열린 무덤 속에서 드러난 아버지 미이라의

얼굴을 한참동안 매만지는 그, 마치 아버지의 영혼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 같다. 그렇다. 그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그렇지만 영화는 이때 그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삶에 응어리나 원망이 남아 떠나지 못한 영혼과의 대화만 가능한 것.


아버지 미이라와의 조우 이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구질구질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과 불안감에

떠밀린 무리수는 그를 나락으로 몰아간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는 아내와의 재결합 시도,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무리한 건설현장 일용직 투입..어느 것 하나 끝이 좋지 못했고, 그는 다시 아이 둘과 함께 하는 싱글파더로, 사고로

몰살당한 수십구의 시체 틈바구니에서 옴쭉달싹 못하고 돌아와버렸다.


그렇게 그는 한발한발, 죽음으로 다가간다. 그의 삶은 전혀 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불어 그의 아이들 역시 그가

아버지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결국 죽음이 눈앞에 닥쳤고,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진 육체를 겨우 가누며 그는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수십구의 중국인 영혼에게 고통받는다. 그건 그의

특수한 능력이 발현된 건지, 아니면 그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의 발현이나 삶의 무게 그자체의 메타포었는지도 모른다.


죽음. 죽기 전 그는 딸애에게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자신을 잊지 말 것을 약속받는다.

아이들이 따르게 된 사람에게 뒤를 부탁한다. 비록, 딸애가 언젠가 그 다이아몬드가 가짜라며 내팽개치고 그의 기억 역시

내팽개칠지 모르지만. 그리고 비록, 아이들을 부탁한 이주노동자 그녀가 돈뭉치를 들고 언제든 튈 수 있고 실제로도

한번 시도했었지만. 그정도의 흐릿하고도 갸냘픈 희망뿐이라지만, 그게 그가 죽기 전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


아마 그는 그의 아버지 미이라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던 거다. 영화의 도입 장면에서 나타났던 그보다 훨씬 젊고

민활해 보이던 청년은, 이제 그가 그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 눈앞으로 영화 마지막, 그의 죽음 이후에 다시

나타난다. 잠깐의 어색함과 긴장감 이후에 둘이 나누는 눈빛, 흘려내는 웃음소리. 비로소 그는 아버지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다. 아마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 아닐까.


어쩌면 그는 아버지를 그리던 한 생을 가장 아름답게 마감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았던 삶 역시, 그 신산함과 누추함에도 불구하고, 그 낙관하기 쉽지 않은 자잘한 희망부스러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던 거다. 비우티풀. 그가 그의 아이에게 가르쳤던 대로, 비우티풀.





전달하려고 하는 명료한 메시지를 향해 차츰 전진해 나가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냥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지극히 농밀한 환상과 이미지로 가득차 있는 영화가 있는 것 같다. 영화를 빌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하나로 응축된 '결정타'와 같은 장면이나 대사, 이미지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안배되는지가 전자와

같은 종류의 내러티브 위주의 구조라면, 후자와 같은 종류의 영화에서는 딱히 그런 결정타랄 부분 대신에

전체적으로 관객을 얼마나 깊게 그 세계로 빠져들게 해서 실감케 하느냐, 가 관건이지 않을까.


'엉클 분미'는 그런 후자 스타일의 영화다. 잘 벼려지고 설득력있게 가다듬어져 누구라도 명료하게 읽어낼 수

있는 주제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스물스물 일어나는 분위기,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장면들에

관객이 충분히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자욱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스토리가 논리정연하지 않아도,

장면의 전환이나 전개에 개연성이 부족해 보여도, 뜬금없이 등장한 인물이 거침없이 기괴한 장면을 선보여도

관객에게 '저건 말도 안돼'라는 식의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으면 되는 거다.


엉클 분미, 분미 아저씨는 신장 질환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시골의 여동생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갑자기

죽은 아내의 혼령이 나타나고 오래전 실종된 아들이 원숭이 괴물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분미 아저씨는 전생의

기억들을 단락적으로 기억해내고, 죽은 아내의 혼령이 이끄는 대로 온 가족은 정글을 지나 어느 괴괴하고 신비로운

동굴로 길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지만, 이야기한대로 스토리는 크게 중요치 않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지만 환상적으로 툭툭 던져지는 장면과 삽화같은 이미지들, 그것들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효과를 느긋하게 감지하고 영화에 올라탄 채 즐기는 거다.


고백하자면, 즐기기가 쉽지는 않은 영화다. 태국의 정치상황과 현실 문제를 은유적으로 다룬 장면들이 크레딧

올라가면서까지 심술궂게 등장해선 가뜩이나 혼란해진 머리를 더욱 정신없게 만드는가 하면, 분미 아저씨가

자신이 태어난 '자궁'으로 인식하는 그 시꺼먼 동굴 뱃속에서는 희미한 손전등 불빛 하나를 조명삼아 카메라를

핸드헬드로 들고 지리하게 찍는다. 속이 다 울렁거리더라는. 뿐인가, 여태 내가 봤던 모든 종류의 섹스신 중에서

이렇게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이종(異種)간의 섹스신은 없었다. 사람과 메기라니. 인어가 태어날 듯. 민물인어.


그래도, 영화가 끝나고 세상 밖으로 다시 풀려나오니 문득 낯설다. 이런 느낌, 좋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