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어떤 철학이 담겨야 할지, 어떤 역사적인 맥락과 주변과의 조화가 고려되어야 할지에 대한 많은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흔히 DDP로 줄여부르는 것 같은 그 건물이다. 사실 이 생뚱맞고 이질적인 건물을 설계한 자하 하디드를

 

둘러싼 논쟁보다는, 원칙적으로 제기되는 건축의 철학성, 역사성, 그리고 주변과의 심미적인 조화에 대한 문제가 과연 한국에

 

현대 건축에 얼마나 배어있는지를 곱씹어보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건축이라면, '말하는 건축가'

 

고 정기용 건축가씨의 건축 정도려나. 몰개성한 아파트더미들과 스틸과 유리로만 처바르면 미래지향적이라 생각하는 건물들이 천지다.

 

하여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깔고 앉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그래놓고 보호하자는 이 낯짝두꺼운 표지판 보소.

 

 

 

동선이 굉장히 기괴하다고 느꼈는데, 층수와 현재 위치에 대해 계속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위풍당당한 외양에 집중한 건물.

 

음...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하다거나 눈높이가 낮은 건물은 아니어서, 전시나 슬쩍슬쩍 보고 빠져야 할 듯 하다.

 

아니면 옆에 전태일교에서 노랑리본을 단 채 21세기의 이땅을 바라보는 그 청년의 곁을 지나쳐 동대문 시장통을 거닐거나.

 

 

 

민주통합당은 위기감 없이, 표를 얻기 위해 '오른쪽'으로 가겠다며 김칫국부터 마시며 자리 나눠먹기 중이고,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구호를 내버린 채 대중정당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자멸 중이고,

 

새누리당과 박근혜와 이명박은 꽃놀이패를 쥐고 즐기는 참이고.

 

 

그 와중에 홍세화 당대표가 '전태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태일의 집'을 전국에 짓자는 제안을 해왔다.

 

문득, 총선에서의 패배를 예감했던 4월의 어느날 이래 멎어있던 심장이 뛰었다. 두근. 전태일당이라니.

 

5월 총선 이후 그가 침통하고 분루를 삼키던 사진이 숙제처럼 컴퓨터에 저장만 되어있다가, 이제야 올린다.

 

 

 

 

우리는 기어이 되돌아가야 한다

 

-왜 다시 전태일을 호명해야 하는가-

 

 

 

 

나는 왜 쓰는가? ― 4년 전의 글을 다시 꺼내 읽으며

 

 

일주일 전쯤, 20대의 한 청년 당원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가 이 글을 시작하려는 지금 다시 내 마음을 짓누른다. 동네 가게 주인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선거 때 표 찍어달라고 열심히 다니던데, 그런 정당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앞날이나 잘 챙기라”고. 짐짓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아버지뻘의 가게 주인에게 “그 당은 제가 속한 당이 아니”라며 설명하려는데 억울하고 목이 메여 눈물이 핑 돌더라는 얘기였다. 선거에 패배하여 이제는 그 이름조차 기억 속에 묻어야 하는 당을 변명해야 했던 그 청년 당원 앞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4년 전에 쓴 글을 다시 꺼내 읽는다. 그것은 2008년 2월 13일 민주노동당을 떠나며 남겼던 글이다. “민주노동당 당원 번호 ‘25994’는 이제 주인이 없다”로 시작하는 그 글에서 나는 “민주노동당에 민중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오직 요란한 구호의 장식품이었을 뿐, 오로지 배제 행위에 의한 권력 싸움만 남은 자아팽창자들의 권력의지의 전시장이라고 썼다. 나는 그 글의 말미에 이렇게도 썼다. 기어이 다시 참여할 것이라고...그래서 진보신당 평당원으로 3년 반을 채울 즈음, 당 대표를 지낸 이른바 명망가들이 당 대회의 결정에 아랑곳없이 떠나는 것을 보아야했다. 그리하여 한낱 서생에 자족해온 내가 그 빈자리에 올라 어울리지 않은 직책의 무게에 허덕이며 오늘에 이른 셈이다.

나는 이제 다시 쓴다. 지난 총선에서 당의 존립을 지키지 못한 패장으로서, 그러나 분노보다는 슬픔으로, 슬픔보다는 쓸쓸함으로 이 글을 쓴다. 그것은 위장전입과 당비 대납, 대리투표와 비례대표 독식 등 4년 전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몰염치와 오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몰염치가 한 치의 오치도 없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데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4년 전 그 글을 썼을 때, 그리고 그 글이 이른바 당을 장악한 종북 편향의 패권주의자들에게 알량한 쁘띠의 ‘유럽사대주의’의 발현으로 읽혀졌을 때, 이미 나는 그들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접었다.

 

나는 ‘진보대통합’에 대해 어떤 통합이냐고 묻는 동지들을 ‘고립주의 독자파’로 몰아붙이고 주저 없이 떠난 이들에게 묻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3당 통합이 ‘노무현과 전태일의 만남’이라고 정의될 때 노무현 시대가 노동하는 인간에게 어떤 시대였는지 기억하는 노동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타적 지지’를 강행했던 조직노동의 대표자들에게 묻기 위해, 그리고 진보정치가 통합진보당의 독점물이 되도록 여론 몰이에 앞장선 한겨레를 포함한 이른바 진보매체들이 이제서 이 당의 비례대표경선 부정에 새삼스레 경악하며 집중포화를 퍼붓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묻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정말 이제 비로소 알았다는 것인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가 실현되는 지점까지만 진정으로 ‘자유주의적’이 되고 ‘개혁적’이 되는 국민참여당 출신들의 반응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민주노총은 무엇을 용인할 수 없고 또 어디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분당은 절대 없다. (통합)진보당이 진보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전의 진보신당 대표이자 오늘의 통합진보당 대표인 여성 정치인은 왜 4년 전엔 분당을 결단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분단의 질곡이 보수를 왜곡시켜 극우의 품에서 사익을 추구하게 했듯이, 본디 보수인 민족자주세력이 패권주의를 통해 주류 종파가 되었고 이들의 뭉뚱그려진 헤게모니 아래 이른바 진보주의자들과 노동조직까지 실리를 챙기려 했던 공모의 결과물이 통합진보당의 실체 아니었던가. 막무가내로 패권을 휘두른 이른바 당권파들이 차라리 단순한 편이라면, 그들이 그토록 막무가내가 될 때까지 침묵하고 방관하고 용인하다가 마침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서는 사람들은 복잡한 편이다. 이제서 당권파들을 제물 삼아 몰아세우며 스스로 정의의 편에 서있음을 입증하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지식인들...왜 그 예민한 지성의 분개는 사태의 본질이 감추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늘 퇴각하는 권력에 대해서만 가혹하게 작동할까? 차라리 몰랐다면 진솔한 자기고백이 필요할 뿐, 대중의 분노 뒤에 숨어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욕구는 자제했을 터이다.

 

아마도 4년 전과 오늘이 다른 게 있다면 한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명분을 필요로 했던 자유주의자들까지 끌어들여 키우고자 했던 파이(권력)의 크기가 커졌다는 점이다. 짐작컨대, 13개의 숫자로 불어난 권력이 지나치게 한편에 치우쳐 작금의 갈등이 촉발되었다면, 그 권력을 다시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대한 합의에 따라 갈등이 봉합될 것이라 전망할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던가? ‘좌파(여기서는 문맥상 ’진보‘라 하는 게 맞겠다)의 신화’는 그것이 실제의 혁명과는 무관해지는 순간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그런데 권력정치로 변질된 진보가 여전히 혁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권력의지를 그 속에 감추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진리’라 ‘법칙’이라 ‘섭리’라 ‘운명’이라 왜곡하기 시작하는 이 순간은 동시에 이 신화의 수명이 파국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역사마저 비틀어버린 불행한 동거의 파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왔어도, 권력정치의 레일에서 열차가 이탈해 완전히 전복되기 전까지 그들의 현란한 정치공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하여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갈 진보신당을 옹호하기 위해 목 메이던 청년 당원의 눈동자 속에 어른거리던 열정 때문에 차마 못했던 말을 이제는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한국에서 진보는 죽었다. 진보라는 말에 담겨 있던 아름다운 인간의 가치들은 그 가치들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권력에만 관심을 갖는 자들에 의해, 진보정치를 현실적 실리와 명분이라는 ‘떡’을 양손에 쥐고자 했던 자들과 더불어 사망선고를 받았다. 진보신당 또한 죽었다. 권력정치와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우리의 안간힘 역시 참담히 패배했다. 진보정치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던 성장주의와 결별하고자 했으나 새로운 진보의 가치를 제대로 일구어내지 못한 우리들 역시 사망선고를 받았다.

 

젊은 벗이여, 이제는 서둘러 낡고 병든 진보(정치)의 신화를 우리 자신의 손으로 땅속에 묻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들 자신에게도 권력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면 그것도 함께. 이 진보의 장례식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땅 속에 내려간 진보의 죽음이 지금과는 다른 인간다운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치의 씨앗으로 되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오늘의 참담과 추악과 왜곡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이 쓸쓸한 봄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는다. 오웰 스스로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책’이라 했던 이 빼어난 르포르타주는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의 정치드라마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증언한 고발서의 의미를 갖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스페인 인민의 열망 편에 서려고 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스페인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연합세력들에 의해 어떻게 배제되고 억압당하고 끝내는 죽음을 당했는지를 증언하는 책이다. 이 책보다 먼저 발표된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에세이에서 소비에트를 등에 업은 스페인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연합의 정치적 논리는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너무 따질 것이 아니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울 때”라는 것이었다. 그 논리 아래 인민 민주주의 지향은 부르주와 민주주의에 의해 차단되었다. 스페인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식견이 너무 ‘오른쪽’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왼쪽’이어서” 처형당했다.

 

너무 먼 역사이야기인가? 한 가지만 덧붙이자.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 오웰의 책은 소비에트와 연결된 자신의 이해를 실리적으로 계산하는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언론들, 심지어 출판사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 한 세기 전의 상황이 2012년 한국과 너무 닮아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이렇게 ‘배신당한 혁명’으로 프랑코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파시스트들에게 쫓겨 스페인의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나는 1980년대 파리에서의 망명시절 국제엠네스티 프랑스 지부에서 일하던 스페인 출신 2세 한 여성을 알고 지냈다. 스페인에서 쫓겨 온 그녀의 부모세대들은 그 무렵 이미 힘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하나 둘씩 남의 땅에서 눈을 감았다. 동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백발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래, 우리 삶은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나는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들은 끝까지 권력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고발서라기보다 제목 그대로 ‘찬가’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여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인간들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기억하기 위해 오웰은 그것을 망각 속으로 밀어낸 권력정치의 드라마를 고발했던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 턱없이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이같이 불편한 글을. “대여섯 살부터 작가가 되리란 걸 알았다”는 탁월한 작가 오웰과 달리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고된 짐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쓰는가? 우리에게도 분명 존재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되찾고 싶어서다. 그 노래를 한 번 함께 불러보고 싶어서다.

 

오늘의 절망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정당운동의 첫걸음이 지금과는 다른 인간의 미래를 앞당기려는 희망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제부터 우리는 길을 잃게 되었을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언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권력에 대한 현실적 욕망으로 뒤바뀌고 진보정치가 권력정치의 주술에 갇히게 되었을까?

 

올해로 귀국한 지 꼭 10년이다. 진보정당 당원으로 살아온 시간과도 고스란히 겹쳐지는 이 10년 동안 내가 가장 빈번히 들었던 것은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바꾸기도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먼저 바뀌는지를 줄곧 지켜봐왔다. 그리고 진보정치와 조직노동이 스스로를 ‘민중권력’이라 강변하던 그 시간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는 물론이고 그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배제된 노동자들의 숫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나는 왜 쓰는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려고 인간의 고통과 시간을 건너뛰어 자유주의-진보주의 연합을 이룩한 저들의 허위와 몰락을 증언하기 위해 쓴다. 그리하여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 기어이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머물러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는 아직 이 노래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알지 못한다. 이 구절을 외는 것만으로 인간의 숭고함 속으로 성큼 다가가는 것 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중졸도 안 되는, 기껏해야 지상에서 누린 지위가 봉제공장 재단사 보조밖에 안 되는 스물셋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겨준 노래...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쓴 「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는 제목의 시에는 제목 외에 전태일은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시의 연이 바뀔 때마다 80페니히의 가격이 매겨진 건포도빵, 1마르크 20페니히의 출근길 맥주, 장벽이 무너진 베를린광장 앞에서 파는 5마르크의 기념품, 4마르크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눈동자 없는 눈’을 지닌 신들의 전시실 같은 풍경들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건 다름 아닌 노동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까지 완벽히 삼켜버린 물신의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사물을 넘어 살아있는 인간 모두에게 가격을 매겨놓은 물신의 세계가 펼쳐놓는 매끄러운 스크린 위에 모든 것들은 풍경으로 존재할 뿐. 전태일이 그림자로서나 어른거릴 뿐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장막을 찢지 않고선 그도, 그가 사랑으로 껴안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아픔도 볼 수 없다. 이 물신의 세계에 파열을 내지 못하는, 그저 권력정치에 포섭된 노동조직이 전태일을 실체 없는 유령으로 만드는 까닭이다. 유령이 된 전태일이 노무현을, 나아가 박정희 체제가 만들어놓은 자본과 권력, 이들과 만나지 못할 까닭도 없다.

 

지난 반 년 동안 기꺼이 나의 글의 첫 독자가 되어준 진보신당 당원 동지들, 그리고 젊은 벗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간곡한 제안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우리가 재창당할 당의 이름을 <전태일당>으로 하자고. 그리고 <전태일의 집> 운동으로 오늘 권력정치에 질식당한 진보좌파운동의 새로운 길 찾기를 하자고.

 

좌파정당의 이름으론 낯선가? 전태일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사유화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전태일당>과 <전태일의 집>은 ‘망자亡者와의 연대’이며 배제당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에게 다가가 부둥켜안기 위해 물신의 세계에 저항하며 싸우는 정당의 정신을 당당히 선언하는 이름이다. 이것은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명으로 우리를 침탈한 데 머물지 않고 등록취소가 되자마자 곧 진보당으로 바꾸겠다는 저들에게 응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약속하기 위함이다. 전태일 자신이 그랬듯이.

 

절망할 일로 가득 찼을 스물셋 봉제노동자가 “우리에게는 희망함이 너무 적다”고 탄식했을 때 그 희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돌아가기 위해’ 죽음도 무릅써야 했던, 그리하여 기어이 그가 만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태일은 버림받고 감추어진 자들을 부둥켜안으려는 사랑이고 만남의 정신이었다. 연대는 내게 넘치는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부족한 걸 떼어주는 것이다. 늘 배고픈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나눠주기 위해 버스비를 아껴 수유리에서 청계천 평화시장까지 뚜벅뚜벅 걸어가던 전태일의 발걸음을 정의하는 말이다.

 

진보신당 대표가 되어, 지금도 어색하기만한 옷을 입고 주로 했던 일은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정리해고 반대’ ‘비정규직 철폐’, 이런 구호들 속에서 나는 ‘연대’라는 말만 들으면 늘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무력감과 미안함,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말일까? 단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걸 의미하는가? 그것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것도 두 번 버림받은. 한 번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그리고 다음에는 정규직 노동조직에 의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현실에 대해, 그들의 노조가입조차 배제된 현실에 대해 침묵하면서 외치는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정규직 노동조직 자신이 배제한 비정규직의 존재를 자본과 권력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은 염치없는 정치적 알리바이 아닌가.

 

우리가 오늘 전태일을 다시 호명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시대의 노동현실에 가로놓인 이 이중의 배제구조를 외면하고 외치는 노동정치에 대해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이 허위의 현실에 안주해온 죽은 진보를 이제 땅 속에 묻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어이 전태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남도의 끝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매달린 절망에 연대하기 위해 달려간 버스에 ‘희망’이란 말이 붙은 것을 나는 기적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희망함이 너무 적다는 전태일의 탄식에 대한 응답이고, 그리하여 죽은 전태일이 죽음을 무릅쓰려는 김진숙을 살려낸 기적이다. 김진숙의 기록 『소금꽃나무』는 내가 읽기에 ‘망자와의 연대’이다. 크레인 위에서 떨어져 죽어간 동료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고 기어이 크레인 위로 올라갔던 그녀가 희망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부활은 기적을 통하지 않고선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 진보의 죽음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 기적 아닌가? 이제 우리가 만들 당의 이름이 전태일, 그의 이름이면 안 되는가? 우리의 당의 정신이 온통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정신인 그의 정신이면 안 되는가? 평생 집이 없었던 그의 이름으로 집을 짓고 배제되고 쫓겨나고 상처받은 노동자들이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게 하는 일에 전력하는 일, 그게 새로운 정당운동이면 안 되는가?

 

오늘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그것이 우리가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존재이유라고 자위해선 안 된다. 우리 자신은 검게 드리운 권력 정치의 그림자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 진보정당이란 몸통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던 우리들은 과연 민중의 고통을 따라 움직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설움 받는 평화시장 어린 동심을 지켜보던 그의 눈을 닮은.

 

진보신당을 변명하며 목 메이던 젊은 벗에게 송경동 시인의 시 한편 발췌해 남긴다. 이것이 내가 말한 ‘망자와의 연대’의 의미이다.

 

 

“경기대에서 「조국은 하나다」/ 육성시낭송 듣고도 울지 않고/ (……)/ 불 꺼진 취조실마냥 어둡던 망월동/ 그의 하관을 보면서도 이 악물었는데// 그를 묻고 돌아온 서울/ 심야버스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거리는 허리 받치고/ 헤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들을 본 순간/ 이 악물며 울고 말았다/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사내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

―송경동의 시, 「김남주를 묻던 날」

 

 

 

 

 

* 지금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생각난 예전 홍세화 대표님의 글


 

 

남양주 마석에 있는 모란공원묘지, 추석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때 찾았던 묘지분위기는 그렇지만

정말 썰렁했다. 공기에 짓눌린 채 바싹 말라버린 꽃가지 하나가 화석처럼 대리석 제단 위에 고여있었다.

이전 포스팅 ( 
이소선 여사 마지막 가시는 길. )에서 올렸던 사진들은 이소선 여사의 안식처가 될 공간

중심이어서 그나마 사람들이 북적북적, 공기를 흩어놓고 있었지만 다른 수많은 묘소들은 무겁게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더욱 기분이 울적했던 건, 묘소 곳곳에 붙어있던 이런 관리비 독촉 스티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그들이 가고 나서 재산이나 가족이 제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도 대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데,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이들 역시 묫자리 하나 맘편하게 쓰지도 못하고

죽고 나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건 아닌지. 없는 사람들,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민주묘역에 묻힐 수 있었던 게 다행인 걸까. 추석때 찾아와 무성한 잡초라도 끊어줄 사람은 있을까.

모란공원묘지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만난 꽃가게. 한지에 붓으로 엉성하게 써둔 문구가 굉장히

담백하면서도 왠지 호소력 짙어보였다. "아름다운 생화 사시오 여기로 오시오"

모란공원 입구는 야트막한 돌기둥 두개, 그리고 기둥 사이로 녹슬고 성긴 초록색 철문으로 열리고

닫히고 있었다. 철문에 페인트칠은 벗겨지고, 개방시간을 알리는 철판은 글씨가 낡고 삭아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고. 그 와중에 눈에 띄던 건, 아마도 남양주에서도 트레킹코스를 개발한듯 어딘가로부터의

코스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점 시점' 표지판. 인생이 끝나는 묘역에서 맞는 트레킹 코스의 종점이라.

입구를 들어서니 바로 묘소들이다. 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준비하기도 전에, 촘촘하게 모셔진 무덤들이

눈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나름 겉에서 보기엔 색색의 꽃들도 꼽혀있어 색깔도 다양하고, 검고 하얀 대리석

조형물들도 묘소 옆을 지키고 있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꽃들은 전부 빛바랜 조화.

민족민주열사 묘역도가 묘소로 들어가는 길 앞섶에 세워져있었다. 많다. 그리 넓은 않은 부지에 꽉꽉

채워진 느낌이다 했더니, 묘역도를 봐도 그 느낌 그대로다. 그리고 중간중간에는 미처 그림에 반영되지

못한 새로 모셔진 분들의 위치가 사인펜으로, 볼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띄던 표시,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이명박정부는 이미 만원이 되어버린 모란공원묘지의

밀도를 더욱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다. 하긴, 이명박정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노무현 때라고, 김대중

때라고 태평성대도 아니었거니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쉼없이 요구하는 괴물이 어딘가에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더 크고 넓은 묘역이 필요한 거다.

민주열사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 문득 머릿속을 맴돌던 노래 하나가 계속 무한도돌이표를 그려냈다.

꽃다지가 불렀던 '열사가 전사에게'라는 민중가요.

꽃무더기 뿌려놓은 동지의 길을
피비린 전사의 못다한 길을
내 다시 살아온대도 그 길 가리라
그 길가다 피눈물 고여 바다된대도
싸우는 전사의 오늘있는 한
피눈물 갈라 흐르는 내 길을 가리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복수의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
마침내 올려질 승리의 깃발 힘차게 펄럭여다오

민주열사 추모비.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겨진 글이 뜨겁다.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삼가 불씨를 구할지어니."


허세욱 열사. 2007년 한미 FTA를 반대하며 분신하신 택시운전 노동자였다. 운전을 하며 틈틈이 얻은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각종 집회와 진보정당 모임에 빠지지않고 나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

세상을 공부하고 의견을 말하시던 분. 한미FTA가 지고의 가치인양 치장하는 건 2007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지만..스스로 빛을 밝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안타깝던 건, 묘비나 이런 안내문 위에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를 새똥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던 모습.

조금만 신경써서 관리해줘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텐데, 햇빛에 하얗게 바래어가는 종이만큼

녹슬고 더러워진 시설물들이 너무 아쉽다.

그래도, 묘비 머리마다 둘린 머리띠가 팽팽하다. 열사정신 계승, 단결투쟁, 이명박정권 퇴진까지. 생전에

그렇게도 자주 둘렸을 머리띠가 이제 묘비에 둘린 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느 노동자의 무덤 앞에는 백기완 선생님의 헌시가 새겨진 돌도 서 있었다. 정말 비장하고 무거운,

새들마저 부리를 여미는 그런 분위기가 꽉 들이찼던 곳.

그리고 전태일. 수없이 고문당하고 고통받고 죽어간 노동자들, 민주투사들의 대명사이자 상징처럼

되어버린 그의 묘소는 제법 색색의 꽃들이 화려하게 놓여있었다. 그 이외에는 다른 묘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던. 그런데 그는 '기독청년'이란 앞머리를 달고 누워있었구나, 갈수록 대형화, 상업화되며

심지어 정치까지 넘보는 교회세력이 들끓는 시대의 눈으로 보니 좀 낯설다.


전태일 추모비. 납작하고 그리 크지 않은 검정 대리석 네면에 빼곡한 글씨로 전태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신념을 적어두었다. 네 면을 순서대로 찍어두었으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돌아나오는 길, 곳곳에서 눈에 띄는 관리비 납부 독촉장이 석상 위에 차례 음식이나 꽃 한송이 대신

모질게도 찰싹 붙어있는게 맘에 걸렸다. 이번 추석에는 무성한 잡초도 좀 정리하고 먼지와 독촉장만

내려앉은 대리석 차례상 위에 그래도 조금은 풍성해도 좋을 음식들이 올라앉아 있으면 좋겠는데.






마석 모란공원묘지, 어제(9/7)가 이소선 여사 발인날인지는 몰랐다. 이미 이 곳 전태일 열사 옆자리에

모셔진 줄로 알고 있었고 마침 휴가를 내었기에 찾아가 봤던 것. 그런데 그곳에 이렇게 모셔질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식은 네시부터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묘소보다 한줄 뒤로, 한칸 왼켠으로 모셔지게 되는 이소선 여사. 그녀의 민주사회장을

준비하는 장례위 소속 사람들이 식을 준비하다가는 전태일 열사의 묘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했다.

정리해고 철회! 라고 쓰인 소금꽃나무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위원회라 적힌 티를 입은

그분들의 뒷모습이 문득 굉장히 무겁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 불꽃이 된 게 스물두살, 70년 11월의 그날 이후로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모든 억압받고 박해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했었다. 근로기준법을 안고 몸을 불사른 70년 그때와

2011년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고 비감해하던 그녀, 마지막 유언처럼 남은 말은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했다.

장례식은 추모예배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었고, 색소폰 등 약간의 추모공연이 있다고 했다.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늘어나는 현수막들. '어머니'란 단어 일색인 게 조금은 맘에 걸렸다. 여성에 대한

경의나 존중을 표하기 위해서는 꼭 '어머니'의 이미지가 씌워져야 하는 것일까. 그저 이소선 그녀,

한 사람의 위대했던 삶 그 자체로 존경하고 사랑하기에도 충분할 텐데. (물론 그녀가 전태일을 보낸

이후 모든 노동자들을 아들딸처럼 여겼다거나, 연배상으로 그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점은 있겠지만.)

이소선 그녀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거하는 곳. 인부들이 들어가서 땅을 고르고,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땅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로서,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비로소 행복하게

쉴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전태일의 불꽃을 이고 지고 살아온 한평생, 그 자체로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었을 테니까.

사실, 모란공원묘지엔 '전태일'이나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과 같은 널리 알려진 사람들 이외에도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들어 있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네들의 삶이나 행적 역시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경외스럽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투쟁하고 산화해갔고, 이소선 전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굽힘없이 싸워왔던 거다.

4시가 좀 넘은 시각, 청계천을 지나 서울 곳곳을 들른 이소선 여사의 운구행렬이 드디어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도착했다. 만장이 길목 양켠으로 빼곡히 들이찼고, 그녀의 영정사진을 앞세운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쥔 그녀의 모습, 개인적인 기억은 전혀 없는 내가 아는 유일한 그녀의 모습이다.

영정사진 뒤 풍물패가 지나가고, 그리고 이소선 여사. 아..어머니. 그렇게 몇 번 집회에서 뵌 적이 있었던 거

말고는 늘 전태일의 그림자에 가려있던 분이었다.

부디..돌아가실 곳, 하늘나라란 게 있다면 40년 넘게 가슴에 묻어오셨을 전태일 열사 꼭 만나서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시민장례위원을 포함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묘역까지 함께 했다. 행렬의 앞섶에서 보이던 정치인들,

유명인사들이 있었지만 특히 노회찬 전 진보신당대표..최근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통합이 결렬되고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실까. 권영길 전 민노당대표도 마찬가지.

좁다란 모란공원묘지 중앙길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진 만장들, 하나하나 씌여진 문구들을 읽어보았다.

시대의 어른이 또 한분 이렇게 떠나시는구나, 어려운 시기, 야만스러워지는 시대에 중심을 잡아줄 사람들이

떠나는가 싶어 왠지 울컥하고 말았다.

이소선 여사가 떠나기 직전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한진중공업 사태, 비정규직 문제, 그런 수많은 난제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간의 의견차라거나, 노조로 조직되지조차 못한 수많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분리,

진보 진영 내에서 노선차라거나 비전의 차이로 힘을 모으지 못하는 상황..그 모든 것들도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한순간이나마 극복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Vice versa. 남은 자들의 몫.

민주사회장이 시작되려는 찰나. 그녀를 보내는 늦은 여름날 날씨가 이렇게 선선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큰 부조라고 어느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 아주머니는 말하면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시 각자의 일터와 생활 공간으로 들어와

평소처럼 살아가게 될 사람들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정리해고당하고, 철거당하고, 그렇게 삶의 가장자리로 불쑥 떼밀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던 이소선, 그녀가 돌아갔다.



▶◀ 이소선 여사의 명복을 빕니다.



* 이소선 여사 마지막 가신 곳.



‘눈물바다’ 된 85호크레인 앞, 가로막힌 ‘어머니의 영정’ (민중의소리, 2011.9.7)


다음으로, 전화연결을 통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눈물의 추도사가 울려 퍼지자 이내 추모제 현장은 울음바다를 이뤘다. 김 지도위원은 “희망버스 타고 가서 진숙이를 만나고 싶다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오셨냐”며 “희망버스 타고 가서 해고된 한진 노동자들 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울먹였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싸우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시던 어머니였고,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싸우는 노동자들을 이 먼 곳까지 찾아오신 분”이라며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던 말씀은 어머니 삶에서 나온 평생의 철학이었고 지혜였다”고 말했다.

“이제 편안히 가세요.
배가 고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아들 만나셔서
이승의 고통일랑 다 내려놓으시고 못다 한 얘기, 못다 나눈 정, 맘껏 나누세요.
어머니로 인해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키지도,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머니를 기억할 것입니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한 젊은이가 스스로 횃불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그리고 2011년 8월, 이제서야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딱지를 떼고 그녀 스스로의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그녀가 있다. 이소선. 어쩌면, 그녀는 그녀의 아들 이상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다.


프레시안의 만평을 책임진 손문상 화백은 가끔 울컥, 할 만큼 강렬한 그림으로 수백마디 말을 함축한다.

모란공원묘지에 오랜만에 다시 한번 찾아가봐야겠다. 전태일, 그리고 이소선을 뵙고 싶다.

번다한 세상일은 산 자들의 몫으로, 이제나마 당신들은 모쪼록 평안하게 쉬시기를.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10점
오도엽 지음/후마니타스


전태일 평전 - 10점
조영래 지음/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소금꽃나무 - 10점
김진숙 지음/후마니타스

3차에 걸친 희망버스, 연인원 수만명의 자발적인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을 찾았다.

이제 조남호 회장에 대한 청문회가 내일(18일)에 있을 예정이고, 진보 정당들 이외에 민주당까지도 이 문제를

적극 이슈화하며 조남호 회장의 불법적인 정리해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겠다며 벼르고 있으니, 어쩌면

조금은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렇게 한진중공업 사태가 조금이나마 전향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리라는 희망이 보이게 된 건, 거의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다. 반년이 넘도록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중인 그녀,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

그녀 스스로 한진중공업의 전신 대한조선공사의 불법 정리해고 희생자인 채 아직도 복직되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오십이 훌쩍 넘은 '중늙은이 아줌마'가 죽을 각오로 크레인 위에서 버텼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떤 삶이었기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에, 이미 두명이나 죽어내려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갈 각오를 했던 걸까. 한진중공업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녀가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그녀의 이름 석자, 김진숙을 알고 감동하고 감탄하고 더러는

욕하는 시대, 그녀를 편들던 아니던 그녀를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닐까.


조금씩 그런 우려들이 나오는 거 같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의 외침 대신

그녀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모습들이 꼭 달 대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 같다는 우려다. 그렇지만

그녀의 안부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그녀가 지금 목숨을 걸고 그곳에 있는 이유로 관심이 옮아가는 건

생각보다 쉬울지 모른다. 더구나 그녀 김진숙이 지난 시간 써온 글, 뱉은 말들과 행동의 연장선 상에서

마치 나침반의 자침처럼 한 곳만을 흔들림없이 향하고 있다면.


이 책, '소금꽃나무'를 낼 때 김진숙 그녀는 먼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따위 게 책으로 만들어낼 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 그따위 걸 책으로 만들어 내자고 나무를 베어내도 되는 걸까." 그리고 펴낸 책 앞머리에

이렇게 글을 박아 넣었다.

"소금꽃나무를 읽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고 묻곤 한다.
난 내 삶을 살았던 것 뿐이다. 누구에게든 삶이 있듯 내 삶은 그랬던 것 뿐이다.
내가 지닌 이력 중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채 쉰둘.
살아 내려간다면 단 한가지만큼은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꿈꾸며
85호 크레인, 169일을 맞는다.
_2011년 6월 23일 김진숙."


그녀 김진숙의 지난 생을 기록하고, 그녀가 만난 노동자들의 삶과 고통을 기록하고, 그렇게 2011년

한국 사회로 치달아온 야만의 세월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망이 담긴 책, '소금꽃나무'를 읽으며 줄곧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비정규직 문제나 소규모 사업장 노조 문제와 같은 문제를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싸워온 그 대담하고도 치열한 순수함 앞에서, 열정 앞에서, 부끄러웠다.


그 눈물은 김진숙 때문이라기보단, 그녀가 온몸으로 가리키고 있는 이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란 게

더 맞을 거 같다. 1970년 전태일이 스스로를 불태웠던 시대로부터 멀리 나아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기껏 비정규직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짐을 전가시킨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건 너무나도 아픈 일이다.

김진숙 그녀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기엔 그런 손가락조차 귀한 시대, 'Golden Age'

도금시대를 살고 있는지라 그녀의 존재 자체, 목소리와 몸짓 모두를 아끼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렇게 달을 보기 전, 김진숙이라는 손가락 앞에서조차 이토록 부끄럽고 아파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랄까, 세례식이 필요한 거 아닐까. 이런 야만과 부조리 앞에서 이토록 무감각한 우리라면.

그게 내가 이 책을 모든 사람에게 떠맡기듯 기어이 강권하고 싶은 이유다.



* 아래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2003년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며 바친 추모사 동영상.

 
"1970년대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003년 김주익 열사 추모사)



* 그리고 '소금꽃나무'를 굳이 사서 보진 않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부분 발췌.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 싸워서 얻은 해방감을

단 하루도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이들은 무모해

보인다. 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




"동지 여러분. 저는 우리가 참 멀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뒤돌아보니 우리가 떠나온 자리에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제는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 되돌아

보니 우리가 벗어던졌다고 믿었던 사슬이 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돼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2006년 부산지하철 고용승계쟁취 결의대회,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나는 교향악단을 구경한 적도 없고 오케스트라 같은 건 지나가다라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만약 단

한 번만이라도 여러분들의 연주를 듣고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거다. 한 달에 70만원을 받고 그마저도 잘릴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그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누가 그 음악을 듣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모멸감을 느끼면서 만들어진

음악이 도대체 누구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겠는가." (마산 예술 노조 복직 투쟁)



"요즘 십대들이 무섭다지만 그때 십대들이 더 무서웠다. 먹고사는 일에 목숨 걸었던 그 무서운 십대들이

결국은 독재를 유지시켰던 균주였고 지금도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인권이나 환경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건 삽시간에 나발이 되고 마니까. 먹고살기 위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어간 일이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으나 내가 무슨 힘이 있냐는 체념과 타협한 일은 오죽이나 많았겠는가."



"정문 앞에서 끌려 나가던 동료들을 창문 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무수한 자괴감에 대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료들을 밖에 둔 채 들어가서는 수많은 시간을 죽고 싶은 채 살아 있어야 했던

열패감에 대해, 그리고 비겁이라는 감옥을 제 손으로 짓고 들어가 10년(전교조가 합법화되기까지)을

장기수로 복역해야 했던 그들이 그 감옥에서 이제는 출감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하여 따뜻한 밥상 앞에서 더 이상 목 메지 않기를,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시위 장면을 보더라도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기를, 빨래를 걷다 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기를, 아이들에게

정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도리 같은 단어를 말할 때, 공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기를..."



"노무현 정권의 필살기는 투쟁이나 구속이나 수색 같은 특수하고도 전문적인 분야들을 좀 더 대중화해

일반인들도 누구나 향유할 수 있도록 한 점과 음지에서 했던 일들을 양지에서 내놓고 하게 한 게 아닐까.

이게 절차적 민주주의다. 저 시절엔 기가 질려 "동네 사람들아!"를 못했다면, 이 시절엔 절차대로 한

일이니 아무리 불러도 동네 사람들이 안 오는 거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땟국이 빠져서 얼굴이 허여멀건 게 도시 티가 난다고 했지만, 나는 햇빛을 못 봐서

허옇게 뜬 얼굴을 볼 때마다 설움이 왈칵 솟고는 했다. 회사 옥상에 높다랗게 붙어 있던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큰 간판이 언젠가 '수출강국'으로 바뀌어도 전혀 강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 간판 아래

짓눌린 채 배추 잎사귀처럼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 책(전태일 평전)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시집을 끼고 다니며 니체도 모르는 아저씨들을 비웃으며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던 넌 누구냐. '노동자'란 말에 멸시를 보내며 '회사원'이라는 자만의

웃음을 질질 흘리던 넌 도대체..."



"'자네 살었을 때 열심히 살게나. 죽어서 천당이 뭔 필요냐. 현실에서 앗싸리 끝내 불제. 천당에도 사장이
 
있다먼 아무리 좋아도 난 거그 안 갈라네. 왜? 그거 가 봐야 읎는 사람은 또 노동자로 살아야헝께. 사실
 
하난님도 썩은 디를 포크레인으로 파다파다 못 파서 도로 덮어버린 디가 우리나란디 그 냥반 붙잡고

나가 먼 야글 더 허간디.' 그라먼 우리 마누라가 '당신은 하난님헌티도 팍 찍힌 사람잉께 잘혀 보씨요'
 
그러면서 웃어 불제라." (대우조선 노동조합 상집 인터뷰 취재 중)



"내 조카는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다. 다만 민주노총이 어떤 합의를 하면, 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그 내용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일 뿐이다...

나는 내가 민주노총이라는 게 참 자랑스러웠다. 운동한답시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면서도,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다. 늙은 아버지까지 안기부에 경찰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면서도,

그까짓 상처쯤이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걸로 다 덮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았는데, 점점 안 좋아지는 세상. 지 잘난 맛에 살았던 그 잘나 빠진 이모가 조카를

파견 노동자로 만들어 버린, 아......나는 20년동안 뭘 한 걸까. 내가 20년동안 한 건 뭐였을까.

일요일도 없고, 재고 조사하는 날은 밤도 없는 조카 앞에서 나는 이모가 열심히 싸워서 민주노총

사업장은 대부분 주40시간이 됐다고 자랑할 수가 없었다. 상여금도 없고 체력 단련비도 없고 효도

수당도 없고 하다못해 월차도 없는 조카의 1,000만원도 안 되는 연봉 앞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심히 싸워서 그들의 성과금이 너의 1년 연봉을 넘는다는 자랑도 할 수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투쟁이건 산하노조의 투쟁이건 비난이 난무할 때, 조중동만 탓하기엔 참 옹색해져 버렸다."



"제일은행 노동자들이 잘릴 때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시금치를 무치거나 아이의 장난감을 고르는 일이

더 중요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잘릴 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잔업을 하거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잘릴 때 남성 노동자들은 이제 시집이나 가라고 농담처럼

말했고 형님들이 잘릴 때 동생들은 '헹님도 인자 낚시도 실컷 댕기고 땡잡았네.'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했던 똑같은 말을 울면서 듣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머리에 총알이 박혔지만 아무도 자기가 그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이 짜릿한

러시안룰렛게임. 이미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지만 아직도 내가 비정규직이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않는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전선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전선이 돼 버린 이 스릴

넘치는 치킨 게임."



"우리 사회에는 학번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고

나는 믿는다. 학교를 떠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아마 학번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 한 번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한 학번의 꿈을 자식 대에서라도 이루기

위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무모한 돌진. 그 무모함이 만들어 내는 온갖 왜곡되고 기형적인 현상과 구조들.

그건 우리가 바꿔야 할 모순의 가장 밑바탕이기도 하다."



"담당 검사님은 그러시더군요. 병원에서 폭력을 휘둘렀다면 사진을 찍어놨다고 고발을 하지 그랬냐고.

물론 노조 측에서도 사진을 찍었지요. 역시 카메라는 빼앗겨서 박살이 났구요. 그들 숫자가 훨씬 많았고

힘도 훨씬 셌으니까요. 그중 심하게 다친 조합원들 열 명이 전치 10일에서 4주까지 진단서를 첨부해

폭력을 주도했던 병원 측 관리자 스물한 명을 고발도 했구요.


그러나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더군요. 노조 측에선 열세 명이 사법 처리당하고 세 명이

구속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되는 게 아니냐며 흥분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겪은 법은 늘 그래 왔으니까요. 그걸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그래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라는 검사님의 충고도, 목적이 아무리 옳아도 불법에 대해선 처벌할 수

밖에 없다는 판사님의 지엄하신 판결에도 얼른 고개가 끄덕여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한 항소이유서를 쓰는 거구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래도 할 수 없고 대답 없는 메아리래도 어쩌겠습니까. 힘이 약해 만날 당하고

깨지기만 하는 약자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조합원 대부분이 스물을 갓 넘은 아가씨들인 일흔여 명의 작은 노동조합. 병원 측의 잔인하고도 악랄한
 
탄압과 일상적인 폭력을 그들만의 힘으론 도저히 막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들과 함께
 
했고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 노조가 지켜졌다면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거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가슴이 뿌듯합니다.


이 땅 어느 구석에선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가 외면한다면 도대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

(1995년 동래봉생병원 노조파업과 관련, 3자개입,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었을 때의 항소이유서 중)



* 그리고 그녀, 김진숙의 크레인 위 유일한 소통의 끈 트윗.(@JINSUK_85)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 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나지막이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 90년대 말 집회 현장에서 그의 연설을 몇 차례 들을 기회가 있었다. 누구였더라,

옆에서 저 사람이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선도했던 사람이라고 내게 알려줬더랬다. 골리앗 투쟁? 그게

뭐였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 싸움이었는지 알고 난 건 그 후였다.


이미 그때도 조금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골리앗 위에서 '고작' 14일 버텼다고? 그전엔 '고작' 128일동안 투쟁을

이어갔다고? 주변엔 1000일이 가깝도록 싸우고 있는 현장들이 쉽게 눈에 띄는 데다가 망루 위로, 굴뚝 위로,

옥상 위로, 올라가 몇 달을 버티는 소식들도 쉽게 들리고 있으니까 그랬다. 그야말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세례를 받은 초기 세대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의 책은 '그땐 그랬었지'류의 회고를 하지 않는다. 대개 '-한다'라는 식의 현재형 문장을 구사하는

그는, 그의 경험이 여전히 유효함을, 그가 체감한 노-자간의 굵은 갈등이 조금은 세련되어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같은 모양새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1000일 가까이 장기투쟁중인 사업체들이 겪는 이야기나

128일 투쟁했던 현대중공업의 이야기나. 지금 한국사회를 온통 장악한 삼성의 천하무적스러워 좌절스런

이미지나, 90년대 대통령까지 넘보았던 거대했던 현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나.


그러고 보면 '내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노조는 안된다'던 정주영의 현대도 어느새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대대손손 해먹을 기세인 이건희의 삼성도, 지금은 비록 통제불능의 거악으로 보이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갑용은, 본인의 경험을 최대한 적나라하게 살려내어 '작은 실무 교재'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투쟁 교본'.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며 더욱 위축되고 천대받던 노동을 위해 시행착오와

착시현상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도록.


그의 책 제목은 참 우직하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 길은 복잡하지 않단다. 마음이 복잡할 뿐. 정말 그런진

모르겠다. 다만 그가 '강성/온건 노조'의 거짓된 구분을 거부하고 '단결'과 '투쟁'만이 노동자의 힘이라고

재이재삼 다짐하며 노동현장에서 투쟁하던 이야기나, 최초의 노동자 출신 구청장으로 재임하던 때 노무현의

공무원 노조에 대한 징계를 거부해 중도사퇴당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궁금해진다.


무섭도록 단순하고, 심플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민주화 유공자'란 이 사람은 앞으로 또 어떻게 살게 될까.

그의 부인은 그를 '계급주의자'라고 칭한다. 국가나 국민 따위의 알량한 실체 없는 거품을 제하고 나면 늘

모든 일은 특정 계급에게 이익이 되고 다른 계급에 손해가 될 뿐이다. 지금의 민주노총은-한국노총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정파적 이해에 갈린 진보정당들 역시-노동자 계급, 밥벌이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육체를

팔고 있는 계급을 제대로 지켜내고 있지 않다는 그의 날카로운 말들이 약이 되길 바란다.



'34년 전인 190년, 평화시장 시다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노동청을 찾은 청년

전태일을 맞은 노동청의 공무원은, 노동운동을 그만두라고 오히려 전태일을 협박했다. 노동청이 노동자를

위하는 곳인 줄 알고, 근로 감독관이 잘못한 업주를 감독하는 노동자의 편인 줄 알았던 전태일은 큰 충격을

받는다...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34년째 되는 2004년 11월 1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위원장은 '공무원

노동자 총파업'을 선언하였다...


'공무원도 노동자'라는 선언으로 이제야 공무원 노동자들은 열사에게 진 빚을 갚았다. 더이상 노동자에게

저항의 대상이었던 공무원, 국민의 심부름꾼이 아닌 정권의 심부름꾼인 공무원은 없다. 공무원 노동조합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공무원 노조는 반드시 합법화될 것이다. 지금 정권에서 되지 않는다면 다음 정권이던

그 다음 정권이던 그들이 노동자란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그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니 노무현 정부여, 나를 고발하라! 누가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되는지 두고볼 일이다."

(2004년 공무원 노조 파업때 파업 참가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를 거부하며 이갑용 구청장이 쓴 글, p.246)

길은 복잡하지 않다 - 8점
이갑용 지음/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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