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부분은 차치하고, 방송에 나왔다는 "정 전 의원께서는 독수공방을 이기지 못하시고 부끄럽게도 성욕감퇴제를

복용하고 계십니다. 그러하오니 마음 놓고 수영복 사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라는 발언 부분만 보자.


나꼼수를 소비하는 개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던, 그리고 이에 반응해 비키니 사진을 올리던 뭘 하던 개인의 자유다.

그걸 두고 개인의 진심인지 얼굴 한번 팔아보려는 장삿속인지 따지는 것 자체는 의미도 없고 결론도 없다.


문제는 나꼼수다. 더이상 비주류도 아니고 약자도 아니다. 비주류이기에는 일반 대중의 정서와 너무 영합하고 있고,

약자이기에는 말 한마디한마디의 파급효과가 너무 크다. 이제 나꼼수는 MB집권 5년차 시대의 주류이자 강자다.


애초 씨바,씨바 거리며 육두문자와 마초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던 건 그들 스스로 비주류이자 약자를 자처하였기에

희석되었거나 용인되었는지 모른다. 불만과 불쾌함을 꾹꾹 눌러참는 것이 아니라 터뜨려 표현하는 게 통쾌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나꼼수'가 설정한 '선/악'의 닫힌 구도에 희망버스니, 비정규직 문제니, 양성문제니, 체제 문제같은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는 들어설 곳이 없었다. 나꼼수가 권력화되기 전엔 괜찮았다. 수많은 목소리 중 하나였을 뿐.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이제 주류화되어 대중의 등에 올라탄, 권력화된 '나꼼수'를 듣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자체의 문제의식 내에서 닫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세적으로 닫힌 이야기가 아닌 공세적으로 닫힌.


그 와중에 여성은 자위를 위한 '도색잡지' 수준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들의 높이에서 그것은, '하대'에 가깝다.

이거 괜찮은 건가. 다른 이슈들이 전부 희화화되고 상처받고 대상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조짐은 아닐까.


나꼼수 팀이 이전처럼 자유롭고 분방한 방송을 원한다면, 그리고 권력화와 주류 감성을 경계하고 싶다면, 이번 문제는

분명히 털고 가야 할 일이다. 그들이 사회적 약자와 조직되지 않은 비주류를 보는 시선이 어떠한지에 대한 바로미터다.




* 프레시안 만평, 손문상 화백의 그림 "씨바, 거기 조용 좀 합시다"



제주 모슬포항 근처를 밤늦게 어슬렁대다가 만난 간판. 수음?

제주산 흑돼지고기를 파는 '수눌음'이란 음식점 간판에 가운데 '눌'자 불이 꺼져있었던 거다.

5,60년대 한국문학에서 적잖이 사용되던 그 단어, 뭔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은밀한 뉘앙스를 가진.

네이버에 물었더니 비슷한 말까지 우르르, 한자로 풀리니까 더욱 뜻이 선명하다. 손수手에 음란할음淫.

손으로 하는 '음란한 짓'이랄까. 그렇지만 뭐, 자연스런 욕망의 발현을 굳이 음란하다느니 따위로 색안경

끼고 볼 일은 아닌 거 같다.


그래서, 여하간, 제주흑돼지 파는 집 간판에서 '수음'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말았다는 이야기.



#1.

결국 사람들은 야설작가에 놀아난 셈이다. 고 장자연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고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과 같은 일련의 스토리를 얼개로 삼아 제멋대로 써댄 자신만의 야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친한 오빠라고는 해도 그렇게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모습들을 디테일하게, 감각적으로

묘사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2.

그 와중에 고인은 정의를 말한다는 입들에 의해 '악당'을 잡기 위한 '구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트윗 세상에서 도는 글들 중에 '구멍동서'라느니 '맛있는 거'라느니 따위의 묘사를 써가며

리스트의 사람들을 손가락질해대는 글들을 보면, 토할 거 같다. 대체 그들은 기본적으로 고인에

대한 예의나 안타까움을 갖추고나 말하는 건가, 아님 그저 누군가의 치부를 드러낼 도구일 뿐인가.


#3.

굉장히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정신병원의 그는 야설계의 베스트셀러를 지어낸 셈이다. 고 장자연의

스토리는 이미 언론에 충실히 보도되어 있으니, 그 얼개에 맞추어 디테일을 그려내고 그녀의 목소리만

빌려오면 되었지만. 사실, 이번 편지가 팩트에 있어 더해준 건 아무것도 없다. 더해진 건 오로지

자극성,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 뿐. 그리고 그 상상력은 편지가 가짜던 진짜던, 이미 충분히

충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가 아니라서 바싹 꼴렸다가 맥이 풀렸으려나.


#4.

사실은 그 같잖은 야설쪼가리 말고도, 이미 나온 이야기들로 충분했다. 고 장자연이 죽음으로

이슈화했던 문제들은 뚜렷하다. 연예계 성상납과 노예계약, 노동자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와 인권을

무시당하는 연예산업 종사자들. 그리고 잊지말아야 할 그 포식자들. 그런 문제점을 덮자는 게

아니다. 그런 문제점들이 고작 야설쪼가리 몇 장으로 덮이거나 안 덮이는 것처럼 구는 것도 웃긴다.


#5.

대체 어디까지 불신할 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거라면, 절차 따위 상관없고 예기치 않은 피해자

따위 안중에도 없이 각자의 '정의'실현을 위해 악다구니를 쓸 거라면.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그림.

이번 같은 경우도 그렇다. 좀더 차분할 수는 없었을까. 필적 감정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빠지지 말고, 억울하게 잊혀간 그녀의 죽음이 갖는 구조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을까. 조중동에 대한, 포식자들에 대한 신물만큼이나 그런 행태에 대해서도 신물이 난다.



수십명 남녀의 난교, 여성의 자위, 남성의 아크로바틱한-스스로의 입을 사용한-자위, 남자들/여자들의 동성애, 남자들의

쓰리썸, 관음증에 S/M까지. 왠만한 성인영화나 포르노물에서도 한꺼번에 다루기 힘든 소재들이다.

그런 이슈들을 한꺼번에 다룬 '발칙한' 영화, 그래서 한국에 수입될 때 이런저런 말들도 많고 제약도 적잖았던 영화,

숏버스. Short Bus. 숏버스란 '능력있고 결함있는' 자들을 위한 뉴욕의 어느 모임 공간의 이름.


제이미와 제임스를 넘나드는 주인공 남남 커플의 이야기가 중심축이랄 수도 있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겨졌던

장면은 스무살 어간의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청년-그것도 모델출신-이 숏버스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할배와

조우하는 장면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내가 뉴욕시장이었으니까."


희끗희끗 헐벗은 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가진 그 뉴욕 전 시장 할아버지는, 알콜 기운도 없이, 맨 정신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한쪽 방에선 벌거벗은 젊은 남녀의 난교가 질펀하고, 대마 연기 자욱하게 피어올려지는

공간에선 여지없이 남녀/남남/여여/혹은 '창의적인 방식'의 교합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이긴 하다.) 자네는 무슨

잘못을 하고 여기에 왔는가. 별거 아닌 거였겠지. 고향이란, 자신의 정서적 보금자리라 여겨지는 고향이란, 때론 무지하게

가혹하고 냉엄해질 수 있다네. 그게 뉴욕처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오랜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세상에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이라 해도 말일세.



잘못이란 건, 자신이 저지른 것일 수도, 혹은 누군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뇌와

클리토리스를 연결해 오르가즘을 만들어낸다는 일종의 마법회로처럼, '나'와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알기
 
힘든 블랙박스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임스(혹은 제이미)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성적

가혹행위나 매춘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다. 외견상 문제될 게 크게 없는 커플 상담가/섹스 카운셀러

유부녀는 엄격한 동양적 가정교육과 아버지의 도착적이다시피한 감시로 인해 정작 오르가즘을 못느끼는 석녀란다.

새디즘을 만끽하며 가죽옷과 채찍에 탐닉하는 '제니퍼 애니스톤'은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철저히 숨겨온 여리고

상처투성이인 영혼일 뿐이고, 주인공이랄 남남 커플의 일상을 쉼없이 따라가는 스토킹행위로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하는

맞은 편 집의 남자는 사실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조차 숨막혀 하는 순둥이다. 그런 식이다. 뭐 때문에 뭐, 이렇게

단선적으로 말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백퍼센트 자신의 모자름이나 부족함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상황,

그래서 블랙박스, 마법의 회로일 게다.


섹스야 제각기 침대 속의 내밀한 이야기이듯, 사실 이 영화에서 각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블랙박스'의 해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살시도라는 격하고 돌출적인 행위를 통해,

혹은 반편향의 과도하고 도발적인 성적 탐닉을 통해, 혹은 스스로 흘러내리는 껍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등의 방식이 있겠지만, 해결책이야 각자가 꼬여있는 방식이 다른 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고, 심리적인 문제가 으레 그렇듯

겉으로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제각기의 방식으로 제각기 맞닥뜨려야 할 문제.


정작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이 문제에 직면하는 방식이었다. 뉴욕의 시장이었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중후한 연세의 '아저씨', '아줌마'이든, 남녀노소 미추를 불문하고 각자의 '계급장'과 '사회적 자본'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막혀버리고 뒤틀려버린 감정선을 되찾겠다 나서는 것, 그리고 전 뉴욕시장 할배가 그랬듯 얼마나

나이가 들었고 외부의 평판을 쌓아놨던 간에 스스로의 결핍과 부족함을 자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건 '여태 경험치

못한 오르가즘을 되찾는 모험'일 수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무작정한 몸부림(자살까지 감수하는)'일 수도,

'한평생 쌓아올린 경력과 평판보다 스스로의 가치와 취향을 지켜내려는 자존감의 싸움'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럴 수 있을까. 성적 쾌락에 대한 탐닉과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 성적 흥분의 인과를 차갑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스스로를 응시하고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결국은 스스로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지켜내고
 
있을까. 그 시험대가 대마초 연기 자욱하고 아마도 땀내와 정액냄새 질펀할 그런 공간이란 건 딱히 중요치 않다.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억눌리고 비틀린 욕망을 마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곳이란 '그럴듯한 포장'도

가능할 거고, 간단하게는 그저 '어디라도 상관없었다'라는 식의 빗겨나감도 가능할 거다. 어디서든, 그게 성당의 고해소가
 
되었건 사랑하는 이의 품속이 되었건 온갖 욕망과 희열이 둥둥 떠다니는 성적 해방구가 되었건,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거다.


아마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의식한 듯한 그 할아버지 캐릭터는, 그런 혼몽하고 '난잡한' 분위기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멍하니 휩쓸리지 않고 되려 중심을 잡은 채 스스로를 건져내고 지켜내러 그곳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궤적을

좇는 다른 몇몇 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단순히 살색 그림-검은색이던 분홍빛이던 노란색이던-만

노출되었던 다른 수많은 영혼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중심을 잡으러 왔는지 휩쓸리러 왔는지. 그것 역시 실은 지극히도

개인적인 영역,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인 게다.


다만, 나이가 몇이 되었건 사회적 지위와 성취가 어찌 되었건, 그들은 뭔가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찾으러

움직일 만큼의,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다 벗어제낄 만큼의 용기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꼭 섹스여야 하는지, 동성애나 SM이나 관음증이나 쓰리섬이나 난교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결핍과 결락감을 인정하고 새롭게 (되)찾으려 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육체의 리드미컬함은 아니었다.


사실 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도 생각한다. 꽤나 멀리, 그리고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른바

'시초축적'이 시작되고 역사가 시작된 건, 자유로운 성욕을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끄러매면서부터

비롯한 건 아닐까 하고. 사랑할 만큼만 먹고 살면 되었을 세상이,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인 잉여를

남기기 위해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린 건 일종의 비극일지 모른다고.


총구에 장미꽃을 일일이 꽂아주었던 68혁명의 정신, 히피의 정신이란 게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명살상을 위한 총알이
 
발사되는 총구가 상징하는 차갑고 흉폭한 남성성에 여리고 섬세한 장미꽃,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 그걸 가능케 하는

세상의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 개인적으로도 직면하기 쉽지 않은 자각의 순간, 다 벗어던지고 알몸의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쳐다볼 수 있게 해주는 '숏버스'.
 

거긴 머물러 살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잊지 않고 가끔씩 들러줘야 하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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