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 오메기저수지, 딱 육개월 전 쯤에 백운산을 가려다가 잠시 들러서 저수지 옆의 개울에서 잔뜩 놀았던 곳이다.

이제 가을 끄트머리가 되어 다시 찾아보니 분위기가 한결 스산하다.

( 백운산 아랫도리를 적시는 개울에 찾아든 신록. )

솔잎이 가지 끄트머리고 나무둥치고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비죽비죽 솟아나온 듯한, 그래서 소담하게 이파리가

모이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헐벗은 듯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하얀 가을달이 빛나고 있었다.

낙엽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하고 뾰족하게 헐벗은 잔가지만 삐죽거리며 내밀고 있는 나무들, 문득 둥그렇고

부드러워 보이는 가을 그림자가 나뭇잎처럼 내려앉았다.

파란 하늘에 하얀 달. 파란 물감이 잔뜩 칠해진 하늘에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져 번진 것만 같다. 아직 끈질기게

잔가지를 붙잡고 있는 이파리가 꽤나 신산하고 지친 표정이지만 그래도 테두리에 둘린 톱니의 날카로움은 아직

살아있어 보여 다행이다.


 그리고 저수지, 흑백영화처럼 지지직거리는 수면 위에서 앙상하게 마른 나무 두그루가 부서지고 있었다.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한번 걸어보려는데 자꾸 길을 막아서는 건 쓰러진 나무, 뿌리만 남아 독하고 질겨진 잡초,

깨진 시멘트 틈새를 살짝 덮은 낙엽들의 훼이크..


사람 키높이만큼 자란 이 풀떼기 사이에서는 계속 뭔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사람 하나 없이 점점

어둑해지는 주변 풍경에 더불어 다소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냥 새들이거나 들짐승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소리없이 풀이 밟히고 쓰러지는 소리만 단속적으로 들리는 상황은 아무래도 상상력을

이상한 쪽으로 자극하는 데에는 최고의 조건이었던 듯.

그래서 급, 저수지를 떠나기로 맘먹고는 발걸음을 재게 놀려 빠져 나왔다.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이미 푸른 빛을 잃고 거무튀튀한 심란한 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세상을 덮을 듯한 그물망이 촘촘히 내려앉고 있었다.





백운산에 오르려다 개울을 만났다. 날이 풀리고 산이 뱉어내는 물, 개울 너머가 궁금해서

결국 벗어던진 양말과 신발 속 창백한 맨발이 꽁꽁 얼어붙어버렸다.

花. 신발을 벗어던지고 시원하다 못해 모세혈관까지 꽁꽁 얼어붙는 듯한 개울에 발담그게 만든

풍경, 낙엽이 갈빛으로 깔린 바닥 가운데로 개울이 졸졸거리며 흐르고, 나무들엔 물이 올라

불쑥 연두색 새순이 돋았고, 개울 옆에는 점점이 노랑빛 꽃이 한웅큼씩.

水.
마침 드문드문 내렸던 비로 물이 불기도 했나보다. 수량이 넘쳐서 곳곳에 엉킨 채 섬을 이룬

낙엽들, 벚꽃잎들, 그리고 위에서부터 떠내려왔을 썩은 나뭇가지들. 그렇게 자연이 순환하는

개울 위로 세상은 온통 푸릇푸릇하다.

 


花. 산등성에 가렸는지 아직 꽃눈이 채 다 벌어지지 않은 꽃송이들이 있었다. 분홍색 빛깔이

여리여리하면서도 어찌나 곱던지, 뒷배경처럼 싱싱한 연두빛이 깔린 위에 압정처럼

꽂혀있는 꽃봉오리들이 조만간 폭죽처럼 펑펑 터뜨려지리란 예감에 괜히 가슴이 설렜다.


生. 땅을 온통 뒤덮은 채  사체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피어난 얄포름하고 여린 이파리들이

눈에 띈다 싶더니, 그 위에 얹힌채 바람에 풀썩이는 노랑 알갱이들이 궁금했다. 잔뜩 몸을

구부려 눈에 힘을 주니 보이는 건 꼬물거리는 아기 거미들.

新綠. 그야말로 신록, 올해 새롭게 뻗어나는 녹색의 잎사귀들. 하늘을 향해 양손을 활짝 펼친

그런 겁없고 당찬 느낌이다. 온몸을 들어 하늘로 향하는 듯한, 그런 거침없고 적극적인

모양새 덕에 굉장히 동적인 분위기가 나는 거다. 게다가 저 이파리들에 햇살이라도 비칠라치면,

온통 속살까지 투명하게 반짝거리며 빛나는 모습이라니.

 

影. 산이 흘려낸 물들은 모두 저수지로 모였다. 봄바람이 불자 바다처럼 잔물결이 일었지만,

그래도 제법 잔잔한 수면 위로 녹색의 나무가, 녹색의 둑길이, 녹색의 산이 전부 담겼다.

가을철의 나무처럼 아직은 헐벗고 앙상해보이는 나무들이지만 좀더 부드럽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이 역시, 봄날의 새순을 기다리고 있다는 분위기가 물씬 맴돌았다.




봄이면 으레 드는 생각. 뭔가 죽은 줄 알았던 것들이 저런 생명을 품고 있었구나. 만물이

푸릇푸릇 움트기 시작하고 죽은 듯하던 나뭇가지에서 어여쁜 연두빛의 잎사귀가 꼬물꼬물

기지개를 켜는 시간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작고 여려서 손가락끝 갖다대기도 저어스러워지는

그런 여린 속살이 어떻게 저런 딱딱하고 두텁한 나뭇가지를 뚫고 나왔을까.

거칠한 나뭇가지를 기어가는 빨간 벌레인 줄 알고 자세히 살폈더니 꽃눈이었다. 전혀 나뭇가지와

어울리지도 않고 융화해보이지도 않는, 툭 돌출한 까실까실한 꽃눈. 일단 한번 눈에 뜨이고 나니

나뭇가지 곳곳에서 툭툭 터져나오고 있었다. 정답을 알고 난 숨은 그림찾기처럼.

고만고만하니 고개만 삐죽이 내민 꽃눈, 잎눈들이 아니라 나름 날개를 펼친 아이들. 바싹 마른채

툭툭 분지러질 거 같이 위태한 나뭇가지 끝에서 한웅큼 새순이 올랐다. 보기만 해도 보들보들.

그렇다고 이 따뜻한 봄날이 온통 생명의 기운,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으로만 충만한 건 아니다.

겨우내 산이 품고 있던 물들이 흘러넘치는 개울가에 푹신하도록 뭉쳐있는 솔잎들, 그리고

이미 분해되기 시작한 그 주검들 위에 내려앉은 얇고 투명한 벚꽃잎들. 쓰나미가 몰아닥쳐

온갖 부산물들이 뒤엉킨 그런 현장처럼 뒤숭숭하고 비감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드문드문 바람결에 휘감겨 개울로 낙하하는 벚꽃잎들. 이미 많이 상하고 시든

꽃잎이지만 벚꽃잎의 위엄은 그대로다. 새하얀, 투명한, 그리고 입술처럼 감각적인 모양새까지.

물길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돌틈에 숨어 한숨 돌리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만나서

넝출거리며 비비대기도 하고.


물살이 빨라지는 곳, 돌멩이 위에 차곡차곡 잔뜩 걸려있는 낙엽들 위에 슬쩍 얹혀버린 꽃잎

한장이 동그란 구멍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글보글 봄볕에 끓는 물빛이 투명하기만 했다.

더러는 이렇게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어딘가에 단단히 정박중인 고목나무를 붙잡고 있기도.

옆에는 그새 형체를 사그라들어가버린 벚꽃잎의 자취가 남았다. 조금은 서늘한 기분.

개울가 옆에 하얗게 내려앉은 벚꽃잎들, 녹지 않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일 듯한 기세로

바닥을 온통 하얗게 덮은 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나풀나풀.

 

개울이 흘러 저수지에 다다랐다. 전날의 폭우로 잔뜩 흐려진 수면 위에서 더욱 싱그러운

연두빛의 잔가지들. 저 수많은 뉘앙스의 색감을 표현할 단어란, 초록색, 연두색, 연두빛,

풀색, 누런색, 노랑색 등등이 뒤적뒤적 뭉쳐진 그 무언가쯤이 되려나.

딱딱하고 바싹 말라 되려 쭉쭉 갈라터지는 나뭇가지 속에 저런 솜털보송보송한 잎사귀가

숨어있었다는 것도, 조그만 티눈같았을 점에서부터 저렇게 귀엽고 앙증맞은 잎사귀

형체를 뻗어내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저 부드러운 잎사귀에 떨어지는 이 따사롭고

포근포근한 봄볕까지. 모든 게 다 황홀하던 어느 봄날.




@ 백운산.(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옆)

 @ 남산골 한옥마을

@ 충남 공주

@ 한강 고수부지

@ 충남 공주 무령왕릉

@ 경기도 의왕호

@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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