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위드블로그에 종종 앨범이 리뷰대상으로 오르고 있지만, 위블에서 올린 음반 리뷰의 첫대상이었던 '화나'

힙합앨범이 운좋게 당첨된 이후([FANATIC] 생기다만 귀로 듣는 화나의 힙합.)로는, 전혀 당첨의 기회가 없었던지라
 
아쉬워 하던 참이었다. 아마 그때의 리뷰가 맘에 안 들었나보다, 역시 내 귀는 생기다 말아서 누군가의 음악을

평한다는 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렸나보다..여러 가지 자책감과 자괴감이 물밀듯 몰려오던 중.


"클래식/크로스오버 뮤직의 센세이션! 본드와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된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라고?

본드는 제임스 본드를 말함인가 했지만, 여튼 바네사 메이는 안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나름 좋아라 하며

찾아들었던 이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란 단어가 와닿는다. 오호...냉큼 신청.

"레드 제플린의 'Kashmir',엔니오 모리꼬네의 'Chi Mai'라니요..이 두곡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해서 연주했는지 꼭 듣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바네사 메이밖에 모르고 본드가 누군지, 에스칼라가 누군지 듣도 보도 못했지만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되었단 게 대체 어떤 느낌일지 맛보고 싶네요."

라고 알랑방귀 아닌 알랑방귀를 뀌었더니, 뿡, 소식이 왔다. 역시 방구가 잦으면 또...흠, 여튼.

앨범 포장지에도 붙어있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최종전까지 진출했던 그녀들인 게다. 하긴 데뷔 앨범에서

'Palladio', 'Kashmir' 두 곡이 동시에 싱글 차트에서 대박을 냈다니 실력은 인정받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들어보니 2번 트랙 Palladio와 3번 Kashmir, 그리고 7번 Chi Mai와 9번 Serabande가 가장 귀에

꽂힌다. 주로 가사없는 클래식 음악이나 뉴에이지 음악류는 틀어놓고 쭉 BGM으로 쓰는 터라 따로 트랙번호나

곡 이름을 확인하는 일이라곤 좀처럼 없는데, 이렇게 네 곡은 앨범을 들춰 제목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특히 Palladio는 그녀들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들고 나간 곡이라던데, 아마 그 쇼에 나가서 처음 이 곡을

선보이던 순간, 심사위원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지 않을까. 포장지를 쭉 잡아찢어 그녀들의 음악을 좀더

맛보고 싶다, 대체 이 세련되면서도 파워풀한 곡 흐름은 뭐지, 두 대의 바이올린, 한 대의 비올라, 한 대의

첼로로 이렇듯 풍부한 감정을 탄주할 수 있다니. 아마 그랬기에 최종전까지 올라갔었으리라. 다른 재해석된

곡들도 물론 멋졌지만, 이 앨범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곡이 바로 Palladio인 것 같다.


나름 클래식한 우아함, 장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스피디함과 보다 드라마틱한 궤적을 화려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지만, 이 씨디를 아예 차에다 갖다놓고 시간날 때마다 듣게 되는 걸

보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는 거다. 아마도 다음 앨범이 나온다면, 한번쯤 살지 말지를 고민하게 될

법하다. (물론 그 전에 리뷰대상으로 나온다면 꼭 뽑아주세요~하고 저요저요 하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흐릿한 바네사 메이보단 파워가 약하면서도 좀더 풍부한 화음이 장점이지 싶다.

아무래도 솔로와 밴드의 차이겠지만. 점수를 주라면 솔직히 바네사 메이에 쏠리겠지만, 데뷔 초의 그녀와 비기는게

공정한 거고, 그렇다면 글쎄. 오십보 백보의 점수를 받지 않을까.

멋진 앨범이었지만, 다만 한 가지. 배송 상태가 왜이렇게 엉망인지 씨디 케이스를 열자마자 나뒹구는 씨디와

옥수수 강냉이 이빨빠지듯 사방으로 튀겨나가는 씨디 케이스 쪼가리들. 에어캡을 좀더 감던가 택배직원에게

좀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던가, 씨디를 열 때마다 조심스레 수평맞춰 여는 일이 없도록 다음번에는 신경을

좀 더 써주었으면 한다.







위드 블로그가 조금씩 품목들이 다양해진다 싶더니, 선크림도 리뷰 품목에 올랐길래 이렇게 적었댔다.

"남성들도 피부를 가꿔야 한다느니, 꽃남이 대세라느니 말은 많지만 일단 선크림부터 찍어바르는 게 시작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얗게 들뜨거나 끈적거리는 느낌이 싫어 안바르고 있었는데, 액티브 썬크림은 어떨지 기대도 되고요, 마침 여름휴가철이니 본격적으로 사용할 기회도 많을 거 같아 신청합니다~!"

용케 당첨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여름 휴가가 많이 미뤄졌다. 해서 우선 집 밖에 나다닐 때 바르기로 하고 택배상자 개봉!
 
생각보다 커다란 상자에 에어쿠션이 잔뜩 들어있었고, 그 밑에서 사뿐히 자리잡고 있던 선크림과 보디워시, 로션까지.

이런 걸 그리고 임기응변에 강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좀 성의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박스 한쪽 뚜껑에 적힌

메시지와 하트 마침표. 조금만 더 신경썼으면 메시지의 진심이 훨씬 잘 와닿지 않았을까 아쉬웠던 대목.

본격적인 사용후기 #1. '프레쉬 바디워시 & 바디로션'

선크림보다 먼저 써본 건 받고 나서 바로 써본 바디워시와 바디로션이었는데, 좀 실망이었다. 향이 너무 달기만

하고 산뜻한 느낌이 없어서, 화장실 내의 공기가 온통 무겁게 축축 처지고 가라앉는 듯 했달까. 게다가 로션은

뭔가 처덕처덕 바른다는 식으로 점도가 높아서 피부에 마뜨하게 스민다기보다 발라놓고 말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뭐...사실 이 품목들은 보너스로 온 셈이니까 딱히 리뷰를 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그래도 의견을 표해주면 좀더

좋은 제품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하며 몇마디 꿍시렁꿍시렁.

본격적인 사용후기 #2. 'CS3 for Men'

사실 선크림을 잘 바르지 않아 대조군이 딱히 없다. 그나마 내가 선크림을 발랐던 기억이라면 이집트와

태국의 작열하는 태양아래 뿌옇고 텁텁한 선크림을 쓴 약삼키듯 억지로 발랐던 것, 그리고 어쩌다 한 번

바르곤 씻어낼 때 물 위에 기름이 동동 뜨며 잘 씻겨지지도 않던 그런 불쾌한 느낌? 그런데 좀 나은

느낌이 들었다. 그새 기술이 진보한 건지, 아님 내가 예전에 썼던 게 구렸던 건지 모르겠지만, 뭔가

피부에 스며들어 텁텁한 느낌이 훨씬 덜하고, 바르면서도 뭔가 군인들 위장크림 바른다는 그런

처덕처덕한 느낌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뭐랄까, 양말 신고 그 위에 두텁고 둔한 등산양말 신는 느낌?

그런 느낌에서 조금은 많이 멀어져 있었다.


이제 다음주에 태양이 가득한 나라로 뒤늦은 여름휴가를 떠나는데, 꼭 가져가야 할 아이템으로 메모해 두었다.

가서 씻고 나서 스킨/로션 다 바르고, 그 위에 썬 크림 바를 때 조금은 덜 찝찝한 기분으로 바를 수 있을 것 같다.



장면#1.

오랜만에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한 수영장, 이게 얼마만인가.

옛 기억을 더듬어 촌스런 무늬의 수영복과 수영모를 꺼내다 보니 옆에서 뒹굴대며 함께 나오는 수경과 튜브.

일단 수영장에 들고 가기는 했는데..막상 바람을 불어넣고 나니 그 앙증맞은 사이즈란.

예전 기억에는 마냥 거대하기만 했던 초등학교 교정이 어느새 손바닥만한 사이즈로 변했듯,

허리에서 훌라후프처럼 돌아가던 튜브가 허벅지에서 멈춰버렸다.


장면#2.

수영장에서 수영만 하고 노는 사람이 어디있나. 쌩돈내고 바가지쓰는 기분으로 사든 튜브.

근데 모양이..아까 그 '어린이용' 튜브와 다를 게 없다. 나는 어린 아이들보다 최소한 일만이천육백구십삼개의

(튜브와 함께 하는) 영법을 더 상상할 수 있는 어른이란 말이다.


장면#3.

여자친구와 함께 간 수영장.
 
가뜩이나 수영장이니만치(!) 한뼘의 빈틈도 허용치 않고 바싹 붙어있고 싶은 마음일 뿐이건만,

맘과는 달리 자꾸 멀어지는 둘의 거리. 도넛같이 두터운 튜브가 자꾸 쿵쿵 부딪혀서 서로를 밀어낸다는.

에라, 차라리 튜브 두개를 끈으로 묶어버릴까.



그에 대한 해답?!

아직 시험은 못 해봤지만...능히 이런 세가지 상황을 손쉽게 해소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정답'이 아닐까.


 

 
 
 
 
 
이준구 교수의 말에 따르자면 시장근본주의자들이 날뛰는 세상이다.

그들은 정부의 규제를 죄악시하고 시장을 만병통치약이라 여기지만, 사실 이미 경제 활동의 발목을 모질게 잡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그들이 방기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시장 실패, 혹은 시장 왜곡이다. 경제활동 현장에서 예컨대 무역

애로를 발굴하라거나 불편한 규제를 적시해서 해소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해도, 그건 전봇대 몇 개 뽑는 식의 간단한

제거, 지움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정비하고 시장 자체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려는 노력을 요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게 문제인 세상.


이준구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다들 그랬었다. 시장주의자도, 시장근본주의자도. 하물며 노무현보다 왼쪽에 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한미FTA를 반대하고 이라크파병을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실정에 대해서 대개 한 목소리의

비판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약간씩 다른 목소리가 간간히 섞여 나왔다. 이준구 교수는 새만금 사업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건 환경지상주의도,

온정주의도 아니었다. 철저히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효용이 없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좀더 정밀하고, 좀더 보완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갖도록 주문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두고 딱히 좌/우의 색깔론이 불러내질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노무현에 대한, 노무현의 정책에 대한 비판 일색의

지형에서 그 비판이 좌로부터 오던 우로부터 오던 따지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이명박이 당선되고, 종부세에 한을 품은 사람이 장관이 되고 종부세는 거덜이 났다. 새만금 따위는 기억 저편에 묻힐

만큼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4대강 유역, 전국토에서 벌이겠다고 움직거리기 시작했고, 교육은 오로지 경쟁의 논리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이준구 교수는 '좌빨'이 되었다.


그는 경제학자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원칙적으로 믿는 시장주의자다. 그런 사람을 일러 좌빨이라 칭하는

사회에서는 두가지 문제가 생긴다. 미쳐 돌아가는 시장탈레반주의자, 혹은 뭐라 이름붙일 '주의-이즘'도 없는

깡패 권력자 집단에 쉽사리 농단되고 희롱당하는 희생자가 수도 없이 나온다. 도심 테러분자라 희롱당한 용산,

논두렁에 1억시계를 버렸다는 식으로 하지도 않은 말들이 첨가되어 희롱당한 노무현, 고공농성 중인, 파업중인,

혹은 스스로 산화한 노동자들까지.


두번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런 공간에선 '시장주의자' 이준구를 비판할 여지조차 협소하다. 왜 그는 한미FTA를

한번 걸어볼만한 도박이라 생각하는가. 왜 그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규제 자체를 모두 피해야 할 것으로 매도하는가.

공익을 위한 규제라면, 좀더 정밀하게 가다듬어진 규제라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 단적으로,

유럽의 자동차 시장에 대한 품질 규제는 지금 그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환경까지 보호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어쨌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의 정국에 대해 특히 이준구 교수의 혜안이 발휘되는 대목.


"주택가격 폭등을 위시한 주택정책 전반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물론 (당시 노무현) 정부다.

정부는 일관된 방향으로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주택시장을

더 큰 혼란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백약이 무효'인 상태를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은 정부, 그리고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신뢰의 결여에 있었다.

...그렇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들어오면서 새로이 나타난 현상은 결코 아니다...정부와

정책에 대한 불신과 관련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크지만, 모든 책임을 현 정부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평한 일이 아니다."


"정책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가져온 데는 현 정부의 무능을 가장 소리 높여 비판해온 집단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정부가 잘못하는 점이 많더라도, 추진하고 있는 모든 정책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하는 일

모두를 도매금으로 싸잡아 매도한 나머지 거의 '식물정부' 수준으로 몰아간 것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얼마전 주택가격이 미친 듯한 폭등세를 보였을 때 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야당과 보수 언론이었다.

자신들이 집권하면 종부세를 크게 완화해줄 듯한 제스처를 쓴 야당,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종부세의 흠을 잡아

정부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 보수 언론 역시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게 만든 데 책임의

일단을 갖고 있다."


노무현에 대한 균형잡힌 평가는 최소한 이 정도의 상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 10점
이준구 지음/푸른숲





영화를 보기 전 가급적이면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피하려는 성향이 언젠가부터 생겨버렸다.

위드블로그에서 있었던 이 영화에 대한 시사회 신청을 하면서도, 여주인공 이름이 (아기공룡 둘리의 그)

'둘리'라니 왠지 더 보고 싶다느니, 희미한 기억 속 친구의 멘트를 팔아가며 신청은 했지만, 사실 시놉시스나

평가같은 것들에 대해선 일부러 눈을 감고 신청했던 거다.


광화문 인근에 이런 영화관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음식물 반입이 일체 금지된 데다가 전후좌우로 넓찍한

좌석공간, 그리고 세련된 마감재로 신경쓴 듯한 영화관 내부의 은근히 호기로운 분위기. 시네큐브에 도착해서야

내가 보게 될 영화의 제목을 확실히 각인했다. 그전까지는 블랙 스노우였는지 블랙 아이스였는지 계속 헷갈렸다.




알고 보니 여주인공은 둘리가 아니라 툴리였고, 영화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이렇게 발랄하게(!) 시작했던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심영섭 평론가님과 함께 했던 '씨네토크' 자리에서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놀랍게도' 이 둘은 부부다. 주름살이 패이기 시작하는 마흔살 나이의 아내지만, 그 둘은

뜨겁고도 농염한 사랑을 나눈다.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고 잠시 생각할 만큼 행복해 보인다.


심영섭님은 일종의 나비효과라고 했지만, 이걸 나비효과라고 부를 수 있을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행복하던

어느 한순간 기타케이스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다섯개 들이 콘돔 한 통, 그 안에 내용물이 세개밖에 없었다는

데서 최초의 충격이 가해진다. 신뢰를 잃은 남편, 그렇게 살얼음판 위에 콱 내리찍힌 후에는 남편의 자잘한

거짓말을 타고 균열이 사방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 사라가 의도치않게 '남편의 애인', 툴리를 만나면서 찌지지직, 손쓸 수 없는 속도로 번지기

시작한다. '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멜로'라는 손쉬운 한마디는 모종의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남이 하는 

'불륜'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역시 사랑이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었던 감정의 흐름들, 그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무리라 해도 때로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사라가 툴리에게 그랬다.

그게 심지어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 할 지라도. 남편을 빼앗긴 상처받은 사라는 남자를 빼앗고

불안해하는 툴리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수백번씩이나 생각하는 동시에, 가면 쓴 사라, 크리스타는 툴리와

은밀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제 사라는 신뢰를 저버린 남편을

미워하고, 툴리에게도 불성실한 남편을 미워하며, 그럼에도 사랑하고, 깨어진 자신의 사랑을 슬퍼하고,

툴리를 정말 좋아하며, 남편을 뺏은 툴리를 증오하고, 툴리의 젊음을 시기하며, 스스로의 위선과 가식을

혐오하고, 툴리의 행운을 빈다. 이 모든 혼란스런 감정은 그대로 '진심'이다.


그런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사라와 툴리의 내면에서 들끓으며 더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인 그림을 보이면서도,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아내 vs 아내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통속적인 구도에서 비롯한 갈등은 또 자체의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속내야 어떻든 그녀들 둘은 서로 맞부딪혀야 하는 사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닫게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그리스 비극들처럼, 그 둘은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균열이 극대화되는 순간, 핀란드의 백야는 끝나고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벗어난 자동차는 나무둥치에

들이박는다.


미워하는 사람을, 신뢰를 잃은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는 신뢰와 사랑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남편과 아내 간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보다 초점을 맞추는 건 오히려 사라와 툴리의 문제다. 어느 순간 (조금 많이 꼬아진) '델마와 루이스'가

왠지 연상되기도 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비극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래도 그 둘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을

진부하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었다.


스토리를 요약하려 해도 참 쉽지 않다. 영화가 인물들의 행동이 아닌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딱 떨어지는 느낌은 전혀 없이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느낌마저 들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스토리 전개도

뭔가 폭발적인 한방을 바랬던 관객에게라면 어지러울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원래 사람 맘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내기엔 참 구구하고 재미없고 설득력도 없기 십상일 텐데, 이렇게 흡인력있고

짜임새있게 풀어낸 감독이 대단하다 싶다.


영화를 다보고 생각한다.

블랙아이스란, 당신과 나의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에마저 끼어있는 자그마한 살얼음판. 잠시 방심한 한순간이면

관계의 통제력을 잃게 만들어 한껏 감정을 휘젓다가 어디론가 꼬라박히게 만드는. 안전운전..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기엔, 저 멀리서 비웃고 있는 '운명'이란 녀석의 썩소가 맘에 걸린다.



 
 

위드블로그에서 이런저런 리뷰 신청을 하다가, '화이트 벤토나이트'라는 것을 주성분으로 했다는 '케어닉

스킨닥터'의 리뷰 신청을 보고 냉큼 신청했었다. 비록 벤토나이트니 신비의 광물질이니 이런 단어들은 뜬금없게도

내게 슈퍼맨의 힘의 원천 클립토나이트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그리고 제조사도 '(주)발렌티노 씨엔씨'라나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그렇다고 다른 뭔가 귀에 익은 제조사가 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단 그런건

되고 나서 생각하자고 다짜고짜 신청부터 했었다.


그리고 집에 배달된 케어닉 스킨닥터 제품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이걸 과연 써도 될지, 부터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라는 세상 아닌가. 책이나 음반류와는 달리 심각한 부작용이나

적어도 피부트러블의 위험을 자초한 게 아닌가 잠시 두근두근.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마뜨하게 스며드는 느낌도 그렇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해서 그런지 피부톤도 좀 밝아지고 건강해진 듯한 느낌이다. 찡그린 표정에 칙칙한 톤의 사진을 비퍼(Before)라

칭하고, 활짝 웃는 낯에 뽀샤시한 톤의 사진을 애프터(After)라 하며 자사의 제품 효과를 광고하는 온갖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벤토나이트 케어닉 스킨닥터를 체험해 본 근 3주간의 내 생활을 하나하나 적시하며 효능이

있음을 증명키로 한다.


< 내부 요소 >

1. 수면 부족 : 주말에도 거의 매일 밤 2-3시에야 잠들어, 이른바 피부재생의 시간이라는 밤 10-12시 타임을 전부

수면이 아닌 다른 것에 할애했다. 기상시간 역시, 10시쯤 일어났던 주말을 제하고는 매일 7시이전..

2. 음주 : 한 주에 3일 정도는 술을 마셨던 듯 하다. 맥주, 소주, 소맥, 양주, 와인, 빼갈...

3. 흡연 : 마침 직간접 흡연이 절정에 달했던 기간. 담배를 몇년간 안 피다가 다시 피게 되었고, 하루에 많을 때는

한 갑씩도 태웠다.(최근 다시 끊었다.)

4. 스트레스 : 별다섯개, 그것도 왕별 다섯개짜리 스트레스가 쭉. ★★★★★


< 외부 요소 >

1. 황사 : 올해는 그나마 황사가 덜한 편이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황사는 '피부의 적'이다.

2. 건조함 : 비무장지대에서 잘도 번지고 있다는 대형 산불 탓도 있을 테고, 버석버석한 느낌의 계절..봄.

3. 컴퓨터 : 근자에 동영상 강의를 듣는 것도 있고 블로그에 좀 시간을 더 할애하는 듯 하니, 아무래도 컴퓨터의

전자파나 열기가 피부에 도움이 될리는 없고, 인체에 유해할 거다.



< 기타 요소 >

1. 닭튀김 : 후라이드 치킨을 몇 차례 맥주안주로 먹은 바, 특히 날개와 껍데기에 탐닉하여 콜라겐을 섭취하려

애썼으나 그 양이 소량인 고로 피부에는 미미한 효과를 미치는 데 지나지 않았으리라 사료됨.

2. 흑초 : 상무님이 드셔야 할 흑초를 1:3의 비율로 냉수와 희석하여 아침마다 장복한지 몇주 되어가는 듯 하며

배변생활에서의 명랑함을 기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 피부에까지 효험이 이르지는 못한 듯 하여 기각함.



..이런 와중에도 피부가 뒤집어지지 않고 최소한 Before와 After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반대로 당시

체험중이던 '벤토나이트 케어닉 스킨닥터'의 탁월한 효과를 반증하는 건 아닐까. (이건 왠지 서프라이즈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나레이터 톤을 연상시키는 듯..)


#1. 시크릿은 실컷 웃을 수 있는 연극이다.

공연 소개를 아무리 보아도 이게 대체 어떤 류의 이야기를 할 지는 감이 잘 안 왔다. 대충 사랑이야기이겠거니,

게다가 정신병원이 배경이고 니가 미쳤니 내가 미치고 있느니 사실은 미치지 않았느니 운운 이야기하는 걸로 보아

뭔가 '미쳤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보여주려는 연극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한시간 반 정도의 공연 시간, 한시간 십분 정도는 계속 웃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삼십분 정도는 빵 터졌으며, 또

그 중 이십분 정도는 박장대소를 했던 듯 하다. 정신병원이란 배경에서 능히 상상할 수 있을 또라이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배우들도 훌륭했고, 이러니저러니 덧붙은 살들이 있긴 했지만 역시나 재미를 극대화하는데

주력한 티가 역력한 에피소드와 개별 씬들도 딴 생각없이 실컷 웃을 수 있을만큼 재미있었다.


#2. 시크릿은 관객과의 소통을 특히 유의한 연극이다.

어느 연극이 안 그렇냐만은 초반부터 무대와 관객석 간의 유리장벽이 통쾌하게 부숴진다. 쉼없이 관객을 호명하는

배우와 그에 응하며 맘껏 즐기는 관객들의 호흡이 역시 연극에 대한 만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지 싶다.

내가 보았을 때는 특히 반응이 좋았던 관객 한 분이 계셨어서 더욱 큰 웃음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던 것 같지만,

시크릿이란 연극 자체가 관객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다만 다소 '상식적인 수준'에서 쉼없이 이야기되는 정치나 시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에잇, 까놓고 말해 이명박에

대해 빈정대며 이리저리 비난/비판하는 대사들은, 오히려 너무 '대통령 까댐'이라는 시류에 편승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부하고 내용이 없어서 아쉬웠다. 차라리 좀더 생생하고 와닿는 이슈를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희롱했다면 좀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3. 바이올린 현이 파들파들 떨며 우는 소리는, 자칫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첩경이기 쉽다.

메시지나 교훈 따위 끄집어내지 않고 그냥 실컷 웃고 즐기면 되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쑥 바이올린 현이

길게 울다간 파들파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극의 분위기를 급냉각시키며 분위기를 잡으면 좀 당황스럽다. 이러한

경우 그런 감정의 오르내림을 함께 하며 몰입할 수 있다면 멋지겠지만 대부분 관객들이 그간의 몰입 상태에서

튕겨나오는 당혹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소 아쉽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곤 하듯이, 웃겼다 울렸다 관객을

주무르려는 제작자의 의도에 대한 반감은 이러한 튕겨나옴에서 비롯하는 걸 거다.


설득력이 약하거나 다소 급작스럽다 싶은 감정의 과잉 분출, 변환이 역시 시크릿에서도 나타난다. 뭔가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한 마디 해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는지 정신병원의 노인은 광소를 터뜨리며

뭔가 아포리즘이 담긴 문단을 읊고는, 기적처럼 스르르 제혼자 열린 문으로 퇴장하는 거다. 좀더 작은 목소리로,

좀더 담백하게, 그리고 좀더 간접적으로 담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을 텐데 너무 전면에 불쑥 내세워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굳이 그전까지의 유쾌한 분위기를 확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는지 싶기도 하고.


#4. 비록 손발은 잠시 오그라들었지만.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연극이었다. 그리고 연극계 최초로 관객들을 대상으로 '다단계식' 홍보를 한다는

당찬 선언에 맞게 대박났으면 좋겠다. 갠적으론 홀로 감정몰입해 흐느끼는 바이올린 선율은 왠만하면 쓰지 않았음

좋겠다. 이미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바이올린 소리까지 더하는 건 오바 아닐까 싶다. 그리고도 넘

진부한 연출 아닐까.


애초 위드블로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리뷰어를 신청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차례로

그의 미술작품들, 그의 수기노트들, 그리고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그의 삶 어느 순간순간에 포진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난 이미지들이 바로 내가 지금껏 다 빈치 그에 대해

그나마 갖고 있던 조각조각 분절된 정보들이었던 게다.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쉽게

멈추어 버리곤 한다. 그렇게 자신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멈추어선 경계 그 내부를 세계의 전부인양 살아가지만,

때론 그 경계를 거침없이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오늘날 현대과학이

검증해낸 과학적 사실들을 일찍이 깨우쳐버린 다 빈치나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당대의 상식에 반함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 실험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프로이드나 니체 같은 사람들.


그 중 운 좋은 사람은 후대인들을 자신의 어깨 위에 태워 좀더 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재평가되고, 아 이러저러한 것들은 이미 그가 얘기했던 것들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는 식으로 그치곤 한다. 다 빈치가 그렇다. 그의 아이디어와 과학적 시도, 방법론들은 너무

일렀다. 그야말로 그는 '너무 일찍 깨어난 사람'이었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책에서는 특히 그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할 만큼 엄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현상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작동 원리를 탐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난잡한 수기 노트에 적힌 글과 그림을 봐도

그가 얼마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했는지 열의가 느껴진다.

물론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생을 재구성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책이다.

그가 자신의 사고를 기록해둔 수기노트들조차 제대로 재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의 삶을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사실 욕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 빈치 앞에 붙는 온갖 수사들, 천재니 편집증

환자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생아였다느니 등등 손쉽게 레테르를 붙이고 멈추는 게 아니라 조금은

더 그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따라가며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풍성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하얀 수염이 뒤덮인 늙은 현자로서 멈춰있는 다 빈치가 아니라, 그의 어릴 적 모습과

커나가는 모습, 그리고 인간적인 여러 고민과 어려움들 앞에서는 지금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그의 반응을 보면서

왠지 친밀한 느낌이 한층 커져 버렸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용 인문/사회 도서다. 몰랐다. 처음에는 책을 받고 나서 이런 책을 보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다소 망연했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또 무엇보다 책 마지막 쯤에 있는 다 빈치의

수기노트를 웹상에서 일부 열람 가능토록 한 웹사이트 주소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현재 그의 수기 중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레스터 사본은 물이 가진

모든 성질과 움직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한다. http://www.amnh.org/exhibitions/codex/index.html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으니 한번 죽 읽어보며 수기노트에 담긴 그림 일부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


또 영국국립도서관의 사이트에서는 마치 책장을 넘기듯 그의 수기노트를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데,

왜 그런지 난 계속 못 보고 있다. http://www.bl.uk/collections/treasures/digitisation.html#leo 


레오나르도 다 빈치 - 10점
캐슬린 크럴 지음, 장석봉 옮김, 보리스 쿨리코프 그림/오유아이
안데르센의 대표적인 동화들인 '인어공주', '백조왕자', '장난감 병정', '성냥팔이 소녀'와 '눈의 여왕' 등 총 6편의

작품들이 '어른들을 위한' 새로운 버전으로 출간되었단다. 어른들을 위한 버전이라니, 인어공주와 왕자와의 종을

넘어선 정사 장면이라도 묘사되었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장난감 병정이 실은 메조키스트였다는 충격 고백이 독점

게재되어 있을지 궁금했지만, 글쎄, 그림체가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정묘해진 덕분에

어른들이 들고 다니며 읽어도 '모냥새 빠지는 일'은 없겠다 싶은 정도 외에는 뭘 바꿨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사실 큰 공헌일지 모른다. 어렸을 적의 '내'가 이해했던 그 내용과 교훈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그 동화를 공식적으로 어른이 된 '내'가 다시 한번 집어들어 펼쳐볼 만한 유인을 제공한다는 것 자체로

말이다. 동화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마주쳤던 건,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마치 화석처럼 조용히

내 어딘가에 새겨졌던 느낌들과 나름의 해석이었고, 또 그것과 부딪히고 반발하는 지금의 '나'였다.
어렸을 적에는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습게도 나는 인어공주가 되어 나의 감정만을 유일시했으며, 나를 넘어 옆나라 공주를 바라보는 왕자의 감정은,

그리고 그에 호응하는 옆나라 공주의 눈빛은 가짜라고 여겼다. 굳이 악의가 철철 흐르는 '바다마녀'라거나 장난감

병정에게 시련을 안기는 '괴물 인형', 혹은 '눈의 여왕'이 아니라 해도 주인공의 감정을 가로막고 좌절시키는 것은

모두 가짜, 혹은 나쁜 놈이었다. 어쩌면 동화 속 주인공 자리는 항상 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옹이구멍만한

시야와 턱없는 자존감이 바로 내 모든 감정이야말로 진정한 것, 순수한 것이라고 믿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받아들여지는 감정과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정이 있을 뿐인 것 같다.

모두 진짜라면 진짜고, 또 가짜라면 모두 가짜일 그 감정들의 흐름 속에서 때로 막히고 때로 뚫리면서 슬펐다가

기뻤다가, 그렇게 아프고 행복한 것 뿐인 건 아닐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적부터 주입되었던 '선은 반드시 악에 승리한다'는 기묘한 믿음이 조금씩 사각대며

부식되고 있으면서도, 아직 공룡뼈처럼 완고히 남아있는 최후의 보루랄까,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그리고 나만이

진심이다)라는 식의 잔재가 남아 자신의 감정이 거부됨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도 얼마나 혼탁하고, 변덕스러우며, 진실하지

못한가. 마음이 진실하다는 건 또 뭐냐, 흘러가는 감정을 '단어'와 말의 힘을 빌어 오롯이 퍼올릴 수 있을까

따위 근본주의적인 질문엔 잠시 등을 돌린 채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차이는 어쩜 아주 작은 것

하나 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마치 망망대해에 점점이 솟아오른 섬과 같다면, 좀처럼 이어지기 힘든 

인근 섬 그 어딘가에게 연결되고 회신을 받을 수 있는 감정,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걸쳐지지 못한 채 힘없이

자유낙하하다 바다 저 아래로 가라앉을 뿐인 감정. 그렇게 이어지고 이해받는지, 아닌지의 차이.


인어공주의 마음은 왕자에게 전해지지 못했으며,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되돌려받지 못했을 뿐이다.

옆나라 공주의 마음은, 왕자의 마음은, 서로에게 전해졌으며, 받아들여졌고, 그리고 어렸을 적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 믿는 건 잠시 유예할지라도 당분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되먹여줄 게다. 그리고

인어공주의 아픈 감정만큼 그들의 달콤한 사랑 역시 진실하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주인공일 수 있고, 저마다 감정을 쌓아온 역사와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진심은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감정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답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소모하느니 감정이 받아들여지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여라, 정도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훌륭한 교훈이 아닐지. 


그렇게 자신의 진심이 언제고 거부당할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하지 않은가. 어른들에게조차.




눈의 여왕 - 6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인디고

한국 힙합 뮤지션은, 글쎄..그다지 장르를 가려듣는 편은 아니지만 힙합은 딱히 땡기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아마도 '거리의 시인들' 정도가 내가 최근까지 굳이 앨범을 사가면서 들었던 한국 힙합 뮤지션이던가 싶을 정도.

그만큼 힙합이란 장르는 내겐 꽤나 낯선 것이다. 


견문이 천박해서겠지만, 왠지 힙합은 다소 겉멋에 치우쳐 수입되고 소비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있었다.

특히 팝송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판에 알아듣지 못할 영어 라임으로 꽉찬 힙합 음악을 듣는다는 건 뭐랄까, 정작

중요한 부분을 놓친 채 나머지만을, 심하게 말하자면 겉멋만을 취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노래는 대부분 분노한, 상처받은 목소리로 뱉듯이 읊어지고 있었기에 더욱 그 가사가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 데다가, 락을 좋아하던 시절에 락 스피리츠 어쩌구 했던 것처럼, 힙합의 소울이란 게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한국의 힙합이라는 게 '비주류와 저항의 음악'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대한 살벌하고 나름

거침없는 비판을 던지던 '거리의 시인들', 그 중 한 멤버인 노현태가 이명박의 대선 캠프에서 홍보송을 부른 것도

모자라 대운하 찬양송까지 불렀다는, 최근에야 뒤늦게 알게 된 뉴스는 한국에서 소비되는 힙합이란 건, (본토에선

어떤지 잘 모르겠으되) 이미지가 중요한 일개 상품일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을 더욱 굳혀 놓았었다.


그런데 화나, 그의 첫 정규앨범이라는 이 앨범은 그 두가지 면에서 모두 살짝 내 흥미를 간지럽힌다.

그는 '라임폭격기'라거나 '라임몬스터'라는 별칭으로 불리나 보다. 그의 라임은 어쨌든 몇번을 들으면 귀에 익어

뜻이 전달될 수 있는 한국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어쨌든 난 네이티브 한국인이니까-, 중간중간 폭발하는 듯

내달리는 라임들이 여전히 의미불명이긴 하지만 대개 메세지를 이해하며 듣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색. 불만에

차서 분노를 터뜨리는 듯, 때론 냉소하듯, 또 때로는 잔뜩 칼날이 쑤셔박혀 상처입은 듯 아파하는 목소리까지

왠지 뭔가 중독성있게 귓가를 맴돈다. 그의 이름이 왜 화나, 일까..화난 목소리가 매력적이어서? 따위 말도 안되는

상상까지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예전에는 곡 하나하나를 뜯어서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샌 갈수록 노래를

BGM으로 쓰고 있어서 딱히 몇 번 트랙 무슨 노래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더라, 라고 기억해내지는 못하겠지만..


이번주 시사인 잡지에 실린 조국 교수의 에세이에 보면 최인훈의 '서유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문명 감각의 정상에 서서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조차 비판하는 것,

이것이 진보가 살 길이다."

약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거창한 역사의 진보라느니, 의식적인 지향이 아니더라도, 어떤 음악은

"현재 이곳에서 이뤄진 가장 현대적인 감각의 정상에 서서 현재 이곳에서 이뤄진 가장 당연해 보이는 기득권에

대해서조차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힙합 자체를 순치되고 상업화된 형태로 소비하는 것 자체도 부정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비주류와 저항의 음악'으로서 힙합을 자처하고자 하는 뮤지션들은 계속해서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나왔으면 한다. 누군가는 문화와 음악이 태생에서부터 비주류와

저항의 몸짓을 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화나도 그런 묵직한 힙합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oscar@momo: 아카데미의 보석들]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하다

놓쳤거나,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래도 몇 개 딱히 끌리지 않는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더 레슬러". 제목만 봐도 뭔가 센스없어 보이고 무성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시놉시스를 약간 보니

대충 '은퇴한 레슬링 영웅의 눈물겨운 부활..' 그런 식의 뻔한 레퍼토리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2008/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105분/청소년관람불가

은퇴한 노년의 레슬러의 눈물겨운 재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 미키 루크의 화려한 재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며, 이미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미키 루크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쥘 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98년 장편 데뷔작 <파이>와 2000년 <레퀴엠>으로 영화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작이며, 1992년 <내 사촌 비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후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마리사 토메이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면서, 두번째 여우조연상에 도전한다.(씨네아트 상영작 정보 中)


그렇지만 시간상의 제약으로 다소 체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던 이 영화는, 의외였다.

노쇠한 영웅의 재기..라는 뻔한 주제에 따라붙기 쉬운 뻔한 묘사들, 뻔한 동기 부여들에 더해 그냥 괜찮은 영화로

남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안온한 부분들을 전부-자의던 타의던-던져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에센스로 바로 돌진하고 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느순간 자신의 지난 삶이 실은 자신의 황금기였음을 깨닫는 것 같다. 자신에게 현재 남아있는 건

소원해진 가족, 얼굴도 까먹은 친구들, 그리고 밥벌어먹고 사느라 망가져가는 몸뚱이, 그렇게 누추해진 삶일 뿐.

그러면 보통 며칠 싱숭생숭하다가 술 한잔 하고 풀기도 하고-더러는 눈물을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혹은

돌아올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있는 여행을 다녀온다거나..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현재의

자리로 고분고분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건 뭐랄까, 추운 겨울날 아침 눈을 딱 떴을 때, 그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벗어나기 싫어 더욱 안으로 

파고 들듯..그렇게 '남아있는 행복'들에 집착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레슬러는 달랐다. 그나마 그에게 안온함을 주고 남아있는 삶의 행복쪼가리들이라도 꼭꼭 지키며 남은 삶을

방어하려는 자세를 굳힌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쳐진 링으로 돌아가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는 살이 깨끗하게 발라진 뼈다귀만 애꿎게 핥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던 게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며, 사람에 대한 속깊은 사랑이나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알았고, 다른 대체물들로 대리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어나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아마도 그 점이, 가게에서 쌍욕을 하고 자해를 하며, 스테플러 철심을 몸에 박아넣고 피칠갑을 하는 그를 끝내

연민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유지 싶다.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외톨이 레슬러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





운좋게도 위드블로그에 베타테스터로 선정되어 활동을 시작한 지 한달도 채 안된 기간에 적벽대전2, 레저베이션

로드, 더 레슬러 같은 영화도 볼 수 있었고,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 같은 책도 읽을 기회도 잡는 등 솔찮이 재미났던

게 사실이다.


물론 그때마다 리뷰를 남겨야 하는 건 다소 부담이 없잖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런 엄연한 외력을 빌어

자발성을 빙자한 리뷰를 써제끼면서 혼자 즐거웠으니 됐지 싶다. 내가 무슨 IT 첨단제품에 대해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얼리어답터도 아니어서 별로 신제품에 관심도 없고. 걍 클래식하게 영화나 책 같은 거나 보고

끼적대는 게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문득 오즈에서 체조위젯을 리뷰해달라면서 신청자를 받고 있다는 걸 보고 냉큼 신청해

버렸으니. 나도 몰랐지만 아마 사무실에서 온종일 엉덩이만 키우며 앉아있는 게 꽤나 무료했나 보다.


이제 보니 저런 식으로 신청을 해놨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름 사무실에서도 찌뿌드드한 몸을 펼 수 있는 몇 가지

쓸만한 동작들이 있어서 몇개씩 따라해 보다가 내게 가장 잘 맞는 운동을 찾아냈다.

바로 이민기의 졸음예방체조.


점심먹고 돌아와 앉으면 쏟아지는 졸음과 무기력증, 뻣뻣해지는 근육들의 아우성을 입막음하기 위한 나름의 비책.

구분동작으로 알아보고 실생활에 응용키로 한다.

이민기가 활짝 웃고 있는 첫 화면.
에헤이~ 남은 바빠죽겠는데 또 조신다~ (니가 뭘 안다고 에헤이~냐?ㅡㅡ+)
자, 따라해 보세요~ (너 이자식 계속 짝눈 뜨고 이러고 있다)
하나~
둘~
하나~ (반대편으로)
둘~
에헤이~ 왼쪽 어깨 따라가면 안돼요~ (나랑 대화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꼼수 따위..통할지도.)
그렇지, 그렇게요! (친한 척 하는 건 맘에 안 들지만, 칭찬받으니 왠지 기쁘다는..)
상체는 세우시고요, (두 팔을 깍지껴 뒤로 젖히고는 아래로~)
(또 위로~)
어때요? 잠이 확 깨시죠? (이러면서 얼굴이 커졌다 작아졌다, 열심히 들이대는 민기)



#0. 들어가기 전.

이 책은 형식상 두 파트로 나뉜다. '대중의 흐름', 그리고 '지식의 운명'. '운동의 선언'이란 파트가 덧붙어 있기는
 
하고,
특히 마지막의 '코뮨주의 선언'은 앞선 '대중의 흐름' 파트의 행간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는 힌트들이

가득
담겨 있지만, 일단은 선언들을 제하고 앞의 두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담긴 것들이 너무 많다. 1부에서는 아감벤이 말했던 '배제함으로써 포섭하는 생명정치'에 대한 이야기

(이미 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해 포스팅한 바 있다.[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부터

시작해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가속화된 국민의 추방, 촛불시위의 전말에 대해 내가 본 중 가장 깊이있고

냉정하게 내려진 해석, 폭력의 문제와 혁명의 문제 등이 줄줄이 다루어진다. 물론 그것들은 연속해 있지만, 동시에

하나하나 녹록치 않은 어려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갈 여지도 풍부한 소재들이란

뜻이다. 거기에 더해 2부에서는 지식인의 현재적 의미, 대중지성과 그에 대척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문제, 그리고

현장인문학이란 문제의식의 제기, 앎과 삶의 관계가 말해진다. 고병권 그가 생각하는 선언이란 "말한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충실한 살아있는 무엇인가이며, 그의 이 책 역시 그 자체로 "이명박

정부, 정부로부터의 탈주"를 선언하는 선언문 같아 문득 이 책을 읽는 자세를 가다듬기도 했다.


어떻게 리뷰(혹은 이 책의 얼개를 뜯어 내 사고와 뭉쳐내어선 다시 풀어낸 글)를 쓸까 고심하다가, 나름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 지점을 잡기로 했다. 우선 국민들을 추방시키고 있는 정부(특히 벌써 망각되고 있는 용산참사와

관련해서), 두번째로는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사제들의 개입과 승리선언의 평가, 마지막으로는 '선언'이라는 단어로

고병권 그가 담고자 하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일지. 한없이 길어지겠다 싶어서 두번으로 나누어 올릴까 생각중이다.



#1. 국민을 추방하는 (이명박) 정부.


정확히 말하자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부, 그리고 그 앞선 시대의 정부들에 대한 환상을 던져버리라 한다.

사실 이미 사람들은 모두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환상이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며, 질릴 대로 질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누가 되건 똑같은데 왜 괜히 핏대 세우나." "지들끼리 해먹지."

              ▲ ⓒ연합뉴스

이명박이 지금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일까. 이명박 등장 이후 부쩍 늘어난 노무현에 대한 향수,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 무엇보다 마치 이명박 정부 혹은 이명박 개인이 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인 양 치부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사회 분위기를 본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경찰국가,

민주주의독재국가로 치닫고 있는 이명박 자신이 자초한 면이 매우 크지만, 또한 노무현의 말만 앞섰던 번지르르한

립서비스가 남긴 잔상들 탓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재개발 정책, FTA 추진을 비롯한 시장개방 정책, 감세 정책, 무한경쟁식 교육 정책,

부동산 정책, 비정규직 처우와 관련한 노동 정책 등등. 하나하나 논의의 여지가 큰 이슈들이지만,그런 것들은 사실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고, 말마따나 '설거지만 하는 수준'으로 이어받았다 자인하기조차

하는 게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난 십여 년간의 한국 사회를 꿰뚫는 연속적인 흐름은 잡아내는데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실은 고병권 그가 말했던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연속성을 실증적으로 책 안에서 보여주지는

않고 있지만, 중요한 건 정권 교체 따위로 역전되지 않는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라 한다. IMF가 잠시 거세게 몰아치는 삭풍이라 여기며 잠시 후면 다시 잔잔한 일상이 도래할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직면했던 것은, 그칠 줄 모르고 불어제끼는 삭풍이 곧 일상으로 화해 버린 현실이었다. 구조조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구조가 되어 위기를 일년 365일 안고 살아야 하게 되었다는 인식. 그런 상시적 위기는 마치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 빼곡히 올라앉은 사람들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바닷속으로 밀어내듯, '국민'이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사람들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 이주 노동자,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철거민, 농민, 빈민,
 
노점상인, 장애인, 공고 졸업생, '지잡대' 졸업생, 4년제 대학 졸업생, 20대 청년...계속해서 밀려나고 있는 거다.

취업시장은 얼어붙었고, 채 세워지지도 않은 사회적 안전망은 허물어졌고, '금모으기운동'은 씁쓸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되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172>"세입자도 국민이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30165117&section=03)

그들은 이제 '국민'이 아닌 국가 내부의 난민이 된다. 더이상 이들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국민','시민'이란

단어로 불리워지지 않으며, 다만 점점 줄어가는 그 정체모를 '국민'의 이해를 위해 계속해서 양보를 강요당하게

된다. 용산참사에 대한 반응도 그렇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들은 대한민국 내부의

테러리스트"라는 등, 철거민(세입자)는 더이상 우리와 같은 국민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병권의 지적처럼,

이러한 경계로 몰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날것의 국가권력을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통제받지 않는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며 게다가 일부 언론과 검찰의 사후 추인을 동원하는 

국가권력에 비해,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고 말아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추방된 국민"들이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그렇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들이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 ⓒ프레시안

경찰국가, 혹은 민주주의 독재국가가 도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해 더이상 세련되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데서 기인한다는 게 고병권의 지적이다. 국민된 권리로부터

추방당한 채 방치된 '2등 국민, 3등 국민'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정부의 위협 요인이며 불안 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연인원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섰던 지난 촛불정국에서,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이명박정부의 앙상한 대응태세는

권위와 시스템의 외피가 지워진 국가권력의 추하고 무능력한 쌩얼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때 잠시나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부르던 사람들에게 힘이 돌아왔다고 느낄 정도로, 정부의

절대적이고 늘 신성해야 할 외관은 심히 손상되고 헐벗어 있었다.


용산참사를 두고 찧고 까부는 사람들 역시 분칠된 국가권력의 추악성, 비인간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 생존권을 절박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법질서를 우선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만큼이나 추악하고 본말이 전도된 장면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채 덕지덕지 존엄함과 지고함을

두르고 있는 정부 시스템이 요란스레 작동해서 '국민 모두가 살 길', '재발 방지와 선진화의 길'의 찌라시를 뱉는

동안, 그 '국민이 주인된다는' 권력의 원천인 여섯 생명이 한줌 재로 화했던 충격적인 사건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장면. 비극적인 것은, 국민들이 계속해서 추방당해 '한발 재겨딛을 곳조차 없는' 백척간두의 위기속으로

몰리게 될수록, 이러한 추악한 권력의 맨얼굴을 대면할 일이 점점 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 스포일러가 약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스포일러는 뭐니뭐니해도 "손수건을 준비하라"는 팁..이 아닐지.


사랑하는 열 살짜리 아들이 한순간 눈앞에서 스러져 버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고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가누어가는 남은 세 가족, 에단, 그레이스, 그리고 딸-여동생이 있다.

에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비난할 사람을 찾고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아들의 부재, 그런 당혹스럽고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누구인지, 누가 그의 아들을 치고 도망갔는지 밝히고야 말겠다며 광기에 가까운

집념과 증오심을 불태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아내 그레이스가 자칫 자책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해서, 혹은

자신조차 아내에게 원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억지로 몰고 나간 감정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레이스는 이미 떠난 그녀의 아들을 정리하고 남은 가족들을 잘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연신 경련하듯 흔들리는 화면은 그녀의 바스라질 듯한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더이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니 법적 절차니 운운하며 떠난 아이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아픔을 참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 입술에 힘을 주며,

그 슬프고 힘겨운 바람이 멎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느낌. 보고 있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사이좋던 오빠를 잃은 여동생은, 영문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꼬맹이지만

또 하늘에 있을 오빠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바칠 줄도 아는 녀석이다.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라는 식의 당위 없이 있는 그대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또 보낼 줄 아는 게 아이들 아닐까.



그 사고로 인한 슬픔을 가누어가는 또다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고를 살인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그였는지라, 실수로 쏟아버린 물처럼

의도치 않게 벌이고 만 사고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 괴로움을 안기고 만다.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끌고, 거의 반사적으로 증거를 은폐하고, 또 겨우 짜낸 용기도 무성의한 경찰들 앞에서

사그라들어 버리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사이, 그 사고는 살인으로 바뀌어 간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그의 압박감과 죄책감, 그리고 어느새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걸 둔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도록 바꿔버리는 시간의 강력한

산화력에 대항해서, 그와 에단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 마주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가슴의 떨림, 그리고

그 진동을 상대가 눈치채면서 이야기는 폭발하듯 터져오르는 순간으로 급속히 달려나간다.


비극이란 건, 단순히 이야기가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그 인간의 숙명같은 것..뭐랄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뒤얽히고 결국은 옴쭉달싹 못하게 되는 그런 '통발'같은 스토리를 이른다고 했다.

어느 한편을 들어서 쉽게 다른 한 편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 가슴이 답답하고 꽉 메이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게 만드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비극.



모두가 아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사고라면, 누군가에게 아픔을 적극적으로 떠넘기는 게 살인 아닐까.


결국 한 아이의 사고는 남은 가족들이나, 그 죽음을 직접 초래하고 만 당사자, 그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 모두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을 남긴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그 사고, ACCIDENT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다른 단어가 아닌 '사고'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고와 살인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모두 전가해버리려는 의지를 갖고 행하는 건 범죄, 살인.

그리고 남은 자들의 아픔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모르쇠하려는 게 아니라 기꺼이 내 몫을 나누어 받겠다는 자세라면

실수, 사고.


사고를 낸 드와이트, 죽은 아들의 부모인 에단과 그레이스가 모두 '인간'이어서 다행이다. 그들은 삶을 살아나가다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맞닥뜨렸으며, 그들 모두 그 사고의 피해자였던 것 아닐까..



* 삼국지 내용이야 다들 알 텐데 굳이 스포일러를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다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듯 오우삼이란 이야기꾼은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드러내고 싶었는지를 느낀대로 말하는 정도랄까요.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주말의 명화 시간에 몇 번이고 봤던 영화가 몇 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벤허'도

질릴 줄 모르고 봤던 작품들이었지만 무엇보다 The Towering Inferno, 한국어 제목으로는 심플하게 '타워링'을

빼놓을 수 없다.


재난이라고 하면 으레 폭풍, 해수면 상승, 우주인, 화산폭발..같은 어느정도 인력을 벗어난 것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대화재에 휩싸인
 
초고층건물에서 쥐잡듯 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주 조그마한 스파크에서 시작해 급기야 초고층빌딩

전체를 거대한 횃불처럼 살라먹으며 세 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 내내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불(火). 위협적으로 시뻘겋게 낼름이는 화염의 이미지가 어찌나 강렬하게 남았던지, 초등학교

혹은 이후의 유년시절에서도 화재방지 포스터 같은 걸 그릴라치면 가장 먼저 '타워링'의 장면들이 오버랩됐더랬다.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흔히 나관중 삼국지의 스토리에 익숙한 사람들이건 아니건 큰 상관없도록 한

배려인 건지, 영화는 삼국지의 전체적인 맥락과 큰 그림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이야기를

살짝 단순하게 변주한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야 삼국지를 열여덟번 읽어야 서울대를 간다느니 하며 위풍당당한

동양의 고전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시 삼국지가 익숙치 않을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오우삼감독이라

그런지 이야기하는 데에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적벽대전 1'을 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다지

영화를 따라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니까. 2편 스토리도 사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게, 화계를 사용한 이후의

전쟁씬을 묘사하는 데 더 열중하는 듯.


물론 등장해야 할 사람들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천하삼분지세를 유지할 조조, 공명, 주유의 세 축을 비롯해

유비 삼형제, 손권, 조자룡, 감녕, 채모, 장윤, 화타..등등에 더해, 주유의 아내인 소교, 그리고 손권의 여동생인

'돼지' 상향과 숙재던가, 바보스럽고 우직하지만 축구를 잘해 천부장이 된 조조의 병사가 새롭게 비중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긴 시간동안 영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주인공은 불(火)이다.

바람의 힘을 빌어 화계를 쓰겠다고 양 진영에서 모두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부터, '적벽대전'이라 후세에 알려진

그 처참한 싸움이 있었던 전장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건대, 통제불가능한 수준의 대화재를 조장하고 방기한

거대재난지역으로 예정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애초 불화살과 화염탄의 성능을 키우지 못해 안달내던 감녕이 전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이제 더이상 사람이

손쓸 도리도 없을 만큼 자체의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화마(火魔) 그 자체다. 조조군이나 손권군, 소속을

불문하고 화염이 무차별하게 너울지며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 망연하고 경악스럽다.

그런 질린 듯한 표정의 끄트머리를 타고 얼굴에 선연해지는 결기, 혹은 광기의 힘을 빌어 그들은 앞의 상대를 베고

찌르고 자르고 부수고 으깬다.

의외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이미 주인공 노릇에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거물 정치인들이 아니라 손권의

여동생 상향과 그 '착한 멍청이' 숙재인지도 모르겠다. 조조의 노련한 선전선동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환자들이

'승! 리!'를 거푸 외치며 전의를 불사르는 모습은 그 정도의 정치적 깜냥도 안 되어서 '오해다'란 말을 유행어로

미는데 정신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뿐, 왠지 기괴하고 불편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름조차 몇번 나오지 않는

숙재는 단지 세금을 삼년간 면하고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줏대있는' 젊은이다. 그와 상향은 마치 에반겔리온이 AT-필드를 무력화시키듯이

소속과 명분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뻘쭘하게 만드는 소소한 연애담과 이벤트들로 사람냄새를 폴폴 피운다.

우연찮게도 그들은 모든 걸 덮치고 불살라 버리는 탐욕스런 불길이 빚어낸 재난에서는 한발 빗겨서 있는 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비극적 결말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비록 영화 자체는 조조가 무도한 역적으로, 주유와 공명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는 식으로, 게다가 주유는

천하삼분지계를 위해 조조를 살려두고 말았다는 식으로 다소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그들은 정치인. 혹은 지배계층. 혹은 권력자.

조조에게, 주유에게, 그리고 공명에게 불을 이용한 화계라는 건, 각자의 명분을 실현하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기꺼이 마수(魔獸)를 풀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마수에게 어느순간 통제권을 빼앗기고 적과 내가

동시에 쫓기는 상황이 될지라도,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화마(火魔)를 불러내겠다는 그런

권력욕과 광기어린 정복욕은 불길이 과시하는 끝없는 탐욕과 순수한 비인간성과 통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유는 마지막에 신음을 토해내듯 말한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없다고. 애초 유황을 실은 배

몇 척으로 시작했던 화계가 어느 순간 온 바다와 산야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번져오른 데에 대한 자각이나

반성이었을까. 복잡한 눈빛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읽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소개 사이트에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한 시놉시스(http://cinema.ticketlink.co.kr/detail/place_end01.jsp?pro_cd=A0009565)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란 사건에 대한 요약일 뿐 이 영화 자체에 충실한 시놉시스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불타오른다, 는

그야말로 딱 떨어지는 표현 하나를 제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불러내고 만들어낸 재난에 대한 영화이자, 그 권력자입네 하는 인간들
 
자체가 다른 이들의 삶을 재앙에 빠뜨리는 재난임을 말하려고 한 영화는 아닐까. 조조군에 혈혈단신 찾아갔던

소교가 무지막지한 칼날 앞에서 하릴없이 횃불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장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주유의 아내가

아니라 백성을 대표해 조조 앞에 나섰다고 했던 그녀가 들고 있던 불은 고삐가 매인, 잘 통제되어 무섭지도 않은

그런 잔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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