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앞바다 바람은 어찌나 세차고 몽글몽글하던지, 한번 쑤욱 하고 천막 아래로 들어가면 온통 들썩들썩이다.

 

제주도 남서쪽, 모슬포항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송악산과 산방산 지역을 찾은 날은 하필 날씨가 들쭉날쭉.

 

송악산 아랫도리에 뚫려 있는 무수한 인공동굴들, 일제시대 전쟁시설물로 쓰였다는 곳은 이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출입금지의 위태로운 공간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수륙양용기나 전함들, 아님 대포들이 숨어있었으려나.

 

 

그리고 송악산을 따라 이어지는 구비구비 올레길.

 

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는 율동감도 좋고, 좌우로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걷는 느낌도 좋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벼려진 절벽을 지난 시선이 꽂히는 곳은 산방산.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걷다보면 푸른 바다와 초록초록한 풀밭과 새하얀 파도.

 

 

그리고 바다 너머 점점이 꽂혀 있는 조그마한 암석 쪼가리들과 제주도의 실루엣.

 

제주도하면 역시 말, 이 푸른 초원 위에서 승마를 체험할 수 있으려면 말을 좀 배워야 할 듯.

 

 

 

제주도 이쪽 지역의 특색인 듯, 양지바른 곳에 잘 쓴 묘 주변을 현무암으로 저렇게 두텁게 둘러놨다.

 

동물들이나 잡초들의 침범을 피하기에 딱일 듯.

 

 

 

그리고 어느 시점에선가 시작된 나무데크 산책로.

 

 

송악산을 외곽으로 빙 둘러서 걷는 코스, 대략 2.8km라 했으니 한바퀴 도는데 한시간이 채 안 걸렸던 듯.

 

어떻게 보면 바다를 향해 단단히 채비하고 세워진 만리장성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나무데크가 스물스물 기어오르고 내리면서 제주도 남단의 해안선을 그대로 끼고 걷는 산책로.

 

 

길 중간에는 떡하니 버티고 선 나무를 그대로 살려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렇게 한 바퀴. 형제섬을 앞에 둔 송악산 입구에는 여전히 펄럭펄럭, 깃발처럼 천막을 나부끼게 만드는 바람이 잔뜩.

 

 

 

 

 

모슬포여객선터미널, 새롭게 단장중이던 터미널 앞 건물에는 철썩철썩 파도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여객선으로 대략 20-30분 정도면 금세 제주도를 떠나 가파도에 가닿는다. 산방산과 송악산이 바다너머 보이고.

 

  

누군지 참 공들여 쌓아둔 돌탑.

 

올레길 코스를 가리키는 파란색 화살표가 오두막에 단단히 박혔다.

 

 

 

새파랗던 하늘, 시퍼렇던 바다, 초록초록하던 가파도의 해안길.

 

 

 

 

선인장이 드문드문 자라는 식생도 조금 이질적으로 보이고.

 

풀숲 위로 스물스물 낮은 포복하듯 기어가는 하얀 구름, 파란 배경 탓에 바로 눈에 띈다.

 

 

 

가파도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제사를 지낸다는 제사단.

 

그리고 사람들이 앉아 쉬었다 가는 팔각 정자의 시원한 대청마루.

 

 

 

 

 

온통 동글동글한 몽돌로 치장한 가파도 마을의 어느 민박집.

 

올레길의 또다른 상징, 파랑색 조랑말 모양의 표지판.

 

아무래도 이런 조그마한 섬에선 급한대로 이렇게 쓸 일이다. 나무판자에 (아마도) 락카로, 급커브.

 

 

 

해안도로랄까, 산책로와 바다의 경계에는 씨알굵은 바윗덩이들이 일렬로 늘어서 단단히 박혔다.

 

 

그리고 가파도 민박식당. 이곳의 정식은 갈 때마다 참, 신기하고도 맛난 반찬들로 가득하다.

 

어느 갈래길. 제주도의 흔한 현무암 돌멩이들로 쌓아올린 돌담들의 실루엣이 미묘하다.

 

 

 

단단히 묶여있고 싶었던 거다. 이리저리 묶고 조여서는, 붉게 녹슬어 거죽은 부서져내릴지언정 철심에 기대고 싶었을 거다.

 

 

가파도를 해안선따라 한바퀴 걸어서 돌아보는 시간은 고작해야 두어시간, 중간중간 쉬고 사진찍는다 해도 그정도.

 

 

 

풍력발전기가 두 기. 거대한 바람개비처럼 윙윙 돌아가는 모양새가 한마리 학처럼 우아하기도 하고.

 

 

구멍이 숭숭한 돌들이 어찌나 많은지, 처음엔 신기한 수석보듯 보다가 나중엔 그저 범상해 보이기만 하더라는.

 

와중에 만난 하얀 강아지 한마리.

 

그리고 이 뜬금없는 시멘트 구조물은, 바다를 향한 미끄럼틀.

 

가파도를 닮아 담백하고 조용한 할머니 한분이 천천히 지나가며 슬쩍 웃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제주도와 가파도를 오가는 배의 선장님은 때로는 피자배달부가 되기도 하더라는.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한없이 걷고 싶은데 어디까지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는, 섬이 답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한뼘만한 땅덩이, 울릉도에서 2박 3일동안 정신나간 도보여행을 하고 싶을 때 추천하는 일정.

 

눈뜨면 걷고, 어두워지면 멈췄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건 삼일차, 남양에서 저동까지 움직이는 데까지만 한 번.

 

 

제주도 올레길이 조금은 편하고 아기자기한 코스라면, 울릉도 도보여행길은 좀더 거칠고 날것의 느낌.

 

대부분 성인봉 등반만 하고 마는 단체 등산객이거나 버스로 찍고 찍고 다니는 단체 여행객들만 찾는 곳이니만치

 

하루종일 걸어도 만나는 사람들은 손 꼽을 만큼인 곳. '둘레길'도 말만 둘레길이지 그냥 버려진 옛길이랄까.

 

 

미친 짓 한번 하고 싶을 때, 러닝-하이가 아닌 워킹-하이(Walking-high)를 맛보고 싶을 때 한번쯤,

 

내키는 대로 한없이 걷다가 바다가 나오면 발길을 틀면 그뿐이었다. 딱히 정해진 일정도 계획도 없었던 코스.

 

그렇게 3일동안 한걸음씩 꾹꾹 내딛었던 발걸음들을 잇고 나니 저런 길들이 그려졌다. 시속 4km의 세상.

 

 

 

ㅇ 1일차 : 사동항 - 성인봉(KBS중계소 코스) - 천부

 

 

(03:00 서울 출발, 05:30 추암 촛대바위 도착)

 

07:00 묵호여객선터미널 도착

 

07:00~08:00 아침식사

 

09:00 묵호항 출발 (by 씨플라워호)

 

12:30 사동항 도착

 

14:30 KBS중계소(성인봉 등산코스 출발지) 도착

 

17:00 성인봉 도착

 

18:30 나리분지 도착(성인봉 등산코스 도착지)

 

20:00 천부리 도착

 

20:00~21:00 저녁식사 (울릉도식 백반정식)

 

 

 

 

 

 

 

 

ㅇ 2일차 : 천부 - 현포 - 태하 - 둘레길2코스 - 구암 - 남양

 

 

10:00 숙소 출발

 

10:30~12:00 예림원(문자조각공원) 체류

 

13:00 현포 도착

 

13:00~14:00 점심식사 (울릉도식 백반정식)

 

15:00 태하항 도착

 

15:30~16:20 태하등대(모노레일) 체류

 

16:40 태하삼거리(울릉둘레길 2코스 시작점) 도착

 

18:30 구암 도착

 

19:00 남양 일몰전망대 도착

 

19:30~20:30 저녁식사 (약소숯불구이)

 

 

 

 

 

 

 

 

 

ㅇ 3일차 : 저동항 - 행남등대 -  도동항 - 독도전망대 - 사동항

 

 

10:00~10:30 아침식사 (따개비 칼국수)

 

10:40~11:20  저동항 도착 (by BUS)

 

12:00 소라계단 도착

 

12:30 행남등대 도착, 행남해안산책로 시작

 

14:00 도동항 도착 (행남해안산책로)

 

14:30 도동약수공원 도착

 

15:00 독도전망대 도착 (케이블카 왕복)

 

17:00 사동항 도착

 

17:30 사동항 출발 (by 씨플라워호)

 

21:00 묵호항 도착 

 

23:40 서울 도착

 

 

 

 

 

 

 

 

 

 

 

 

 

 

 

 

모슬포항에서 출발하는 배는 마라도 아니면 가파도에 가 닿는다. 더러는 마라도를 지나 가파도에

닿기도 하고, 가파도를 지나 마라도에 닿기도 한다지만, 가파도로 바로 가는 직행 선박은 하루

서너차례쯤 있다고 한다. 9시, 11시, 14시에 모슬포행에서 출발.

빗발이 잘게 부서져 분무기에서 뿜어나오듯 사방으로 비산되는 궂은 날씨, 쾌속선 뒤의 스크류가

퍼올리는 바닷물 방울들까지 합쳐져 배 뒤는 온통 뿌연 안개다.

멀찍이 보이는 산방산. 신령이 한라산을 빚다가 너무 높다 싶어 산봉우리를 뽑아 내던져서 생겼다는

커다란 바위산이 불쑥 솟아서는 잿빛으로 케케한 풍경 너머 실루엣만 내밀었다.

가파도에 들어선 길. 채 20분이 걸렸나 싶을 정도로 짧은 코스였다. 날이 흐리고 파도가 높아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미처 걱정스런 마음을 채 펼치기도 전에 야트막한 바다를 건너 도착.

가파도는 '섬속의 섬', 제주 올레길 10-1코스다. 제주도를 따라 동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쭈욱

이어지는 긴 끈같은 올레길이 이어지는 와중, 우도니 가파도니, 옆으로 새어 나온 길은 '다시' 표시가

붙어서 가까운 올레길 번호로부터 갈라져나온다. 신기한 게 남쪽이 상동, 북쪽이 하동. 이 섬과

섬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바다를 바라보고 살았단 증거 아닐까.

올레길 10-1코스, 가파도 코스는 총 5킬로미터, 한두시간이면 주파할 거리지만 어차피 조그마한 섬,

올레길에 구애받지 않고 사방으로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한 세네시간 여유롭게 돌다보면 숨어있는

이쁘고 신기한 풍경들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게 조금 에러.

가파도에 살고 있는 인구는 겨우 150명 내외, 고양이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겠지만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는 전부 알만큼 조그마한 섬인 건 확실하다. 바다 넘어 어디론가 달려가는 배 한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동도 않는 고양이 뒷모습이 맘을 건드렸다.


어서 오십시오, 가파도 올레길을 시작하는 길 앞머리에 그려진 포석은 그려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

같은데 벌써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날근날근해졌다. 그 옆으로는, 바람 많은 섬 제주도의 구멍 숭숭한

돌 현무암으로 괴어올린 구멍숭숭한 돌담을 시멘트 벽돌로 따라 만들어 놓은 거 같다.

원래 이게 정석 아닌가. 돌 많고 바람 많은 제주도의 돌담이라고 하면.

왜 그렇게 고양이가 많던지. 어쩜 가파도도 노인분들 밖에 남지 않아서 반려동물로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있는 거 아닐까, 외로움을 달랠 벗삼아서. 그래서인지 고양이들 눈빛이 더욱 새초롬하다.

섬 외곽의 해안선을 따라 올레길이 조성되어 있긴 하지만, 조금만 화살표 벗어나 섬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미로같은 길이 꼬불꼬불하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온통 까만색 현무암으로 구획된 채 사방으로

열리거나 닫혀있는, 더러 가정집 앞마당이나 뒷마당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는 그 길이 재밌다.

가파도에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건, 역시 섬에서 마실 물을 구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풀떼기가 무성하게

자라난 저 웅덩이가 우물인지 아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때는 우물 비슷한 거였지 않을까. 그리고

둥그스름하게 곡선을 그리며 쌓아올려진 돌담은, 왠지 똥돼지를 가둬놓고 기르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저 쪽이 제주도. 자욱하게 피어오른 바다안개와 비구름 사이에 낀 채 겨우 봉오리만 봉긋 세운

산방산과 울룩불룩한 제주도의 실루엣이 보인다.

올레길을 조성하면서 섬 해안도로를 시멘트로 포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미처 다 완공되진 않았다고

옷이랑 신발 버린다며 딴 길로 가라고 알려주시던 가파도 주민 할머니, 맘 써주시는 게 고맙긴 했지만

조금 묘한 생각도 들었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길, 흙길을 더욱 반길 테지만 막상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흙길 대신 시멘트길을 당연히 더 반기는 거다.


'지방'에 대한 '서울' 사람들의 인식, '시골'에 대한 '도시' 사람들의 인식이 그렇다. 휴양지로서, 추억을

되새기고 재충전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상화된 자연, 박제된 과거의 이미지가 유지되길 바라는 건

아닐까. 불편함을 감수하고 인간다움과 자연을 만끽하겠다는 건, 그게 일상이 아니라 잠시지간의

일탈, 혹은 여행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레길이 유명해지며 자연이 파괴되고 인심이 황폐해진다는

걱정은 도시 사람들의 것, 올레길이 유명해지니 이제 좀 살길도 트이고 개발되어 좋다는 건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것 아닐지. 많이 거칠게 굳이 나눠보자면. 쉽지 않은 문제다.

깡총 솟아있는 한쌍의 쓰레기통이 귀여웠다. 금방이라도 저 철봉을 잡고 앞뒤로 흔들대다가 훌쩍

한바퀴 공중제비라도 넘을 거 같은 거다.

가파도를 걸으며 만난 꽃들, 거센 빗방울에 툭툭 꺾였다가도 힘내어 곧추서는 단단한 줄기에 매달려

말갛게 꽃잎을 씻어내고 있었다. 침침한 날씨에 꺼뭇한 돌틈 사이에 가려져서 원래 빛깔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 꽃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꽃도 있었고.


가파도 북쪽 끝단에 가까워질 무렵, 아까 길이 채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이 있는데 비때문에 진창이

되어 있을 거라더니 여기 이야기였다. 온통 찐득한 진흙이 철퍽대는 길을 따라 걷다가 굵어진 빗발을

그을 겸 옆의 오두막 같은 곳으로 올라가 잠시 쉬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가파도에서 일출을 보기

가장 좋은 해맞이 장소라던데, 저렇게 잿빛 파도가 출렁이는 너머에서 해가 뜬다면 굉장히 멋질 듯. 


가파도에서 봄에 열리는 축제가 하나 있는데, 청보리밭 축제라고 한다. 조그마한 섬이지만 중간중간

제법 커다란 손바닥만한 보리밭이 현무암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아직 청보리를 수확하지

않은 건지 그 푸르름을 미루어 짐작함직한 '샘플'들이 남아있었던 것. 4,5월 쯤에 청보리가 지천에

틔워올랐을 때 다시 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도 뭐, 다른 계절에 왔다고 해도 저렇게 돌뿌리에

기대어 소담하게 피어난 꽃들도 보이고, 갑갑한 창고 속에서도 초록빛 싱싱한 풀떼기도 보이고.

이쪽 각도로 보면 날이 좋을 때 무려 6개나 되는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날이

잔뜩 궂은 날에야 그런 풍경보다는 차라리 저 안내판이 더 눈이 갔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말의

형태를 본딴 게 틀림없는 파란색 철제 표지판. 제주도에 흔했을, 그래서 가파도에서 제법 흔했을

말과 소 같은 짐승들의 침범을 막기 위해 제주도의 무덤은 저렇게 돌담으로 네면을 모두 꽁꽁

싸매어놓는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고기잡이의 성공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던 마을 제단이 있던 곳. 남자 9명이 제관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제를 올렸다는 이곳은, 정확히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공간이다.

지금도 매해 정월쯤에 날을 잡고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벌써 그게 150여년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해안길을 따라 계속 걷는 길, 그래도 자그만 섬에 항구는 남북으로 두개나 있는 데다가 커다랗게

헬기장도 하나 지어져 있다. 뭐 이렇게 날씨가 궂은 날에는 파도도 높고 기상도 안 좋아서 바닷길이나

하늘길이나 둘다 위험하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특히나 긴급 후송환자가 있다거나 할 때 많이

도움이 되겠지 싶다.

비가 와서 그런가, 초록빛 식물들이 아주 극악스럽게 고개를 내민 것 같기도 하다. 깨어진 시멘트 길 

사이로 번개치듯 우르릉쿵쾅 내달리는 초록빛 새싹들하며, 해안가 옹벽을 잡아먹을 것처럼 두텁고

무섭게 흘러내리는 덩쿨들하며, 길가의 커다란 돌멩이 곳곳에 틈을 내어 뿌리를 뻗고 자라나는

끈질긴 녀석들까지.  


쉼없이 내리는 비, 우산을 접어버리고 우의를 걸친지 오래지만 맹렬히 내리는 비 앞에서는 전부

별무소용이지 싶다. 말하자면 이렇게 휑하니 뚫려있는 지붕 아래 서 있는 기분.

가파도수퍼를 필두로 해서 골목 곳곳에 이렇게 파랑색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거다. 이쪽 벽에서는

해녀가 자맥질을 하고 있는가 하면 저쪽 벽에서는 가파도의 마을 제단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나무들이 꽃을 주렁주렁 매단 채 우뚝 서있기도 하고. 그렇게 화려하거나 그림 하나하나가

심오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벽들이 좌우로 늘어서 만들어진 골목길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가파도 깊숙이 들어서며 사방으로 번지는 골목길들이 모두 이런 식이니,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며 그림 구경을 해도 다리 아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파란 하늘과 파란 청보리밭이 그려진 긴 벽면에 나있는 구멍 하나. 쥐구멍이라기엔

넘 높고, 무슨 호스같은 게 지나는 물받이 구멍이라기엔 넘 어정쩡한 위치. 뭔가 해서 가까이 다가가니

그 구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던 초록색 잎사귀들. 저 식물을 살리려고 구멍을 뚫어두진 않았겠지만

자꾸 그런 식으로 상상이 되는 거다. 벽을 세우려는데, 저기에 저 풀떼기 하나가 눈에 자꾸 밟혀서

그 부분만 저렇게 빼놓고 벽을 세운 건 아닐까, 그런 식으로.


저 커다란 꽃들, 한송이만으로도 푸짐한 느낌이 넘쳐나는 화려한 색감의 꽃들은 가운데에 하나씩

뽀얀 색 진주를 박아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담백한 돌담벼락에 기대어 손가락길이의 잎사귀를

피워내고 끝내 담벼락을 닮은 담백한 빛깔의 꽃봉오리까지 활짝 틔워낸 녀석도 대견하다.


벽화 작업을 언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 가파도에 옹기종기 모여살던 집들도 바닷바람과 파도에

씻겨내린, 그런 자연스러움이랄까 분위기가 한껏 살아있다. 적당히 낡고 헤진 옷이 갖는 편안함같은.


가파도에도 고인돌 군락지가 있다길래 궁금해서 푯말을 따라갔더니, 글쎄, 아직 발굴조사 중인지라

뭐가 고인돌이고 뭐가 자연석인지 구분하기가 영 쉽지 않다. 그냥 맨들맨들하니 조금이라도 인간이

가공한 흔적이 남아있고 평평한 돌이 있으면 저게 고인돌 추정 돌멩이인가 하는 거고. 고인돌 찾으러

들어갔다가 게으른 청보리밭 한뼘 구경하고 돌아나왔다.


이제 슬슬 가파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항구로 돌아나오는 길, 9시 배를 탔었고, 2시엔가 떠나는

배를 타겠다고 미리 표를 사뒀었던 거다. 일단 사고 나면 회항 시간은 못 바꾼다 했던가, 그래서 부러

여유있게 돌아보고 있었던 거기도 했다. 가파도 한가운데쯤 있는 건 초등학교. 놀이터가 잘 꾸며졌다.


항구에 가까워지니까 어라, 이런 좋은 길이 또 정비되어 있었단 말야, 싶도록 말끔한 산책로가 나왔다.

청보리밭 산책로라던가, 3,4월에 청보리밭 축제를 할 때 이 길을 거닐면 온통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청보리바다 한 가운데서 유영하는 느낌이 들 거 같다. 그리고 가파도를 지키고, 남해를 지키고 있는

해수관음상.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관음의 상이 남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동포구, 모슬포행 선착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또다시 마주친 제주의 바다. 이 정도 섬 사이즈면 딱

내가 좋아라 하는 섬의 크기다. 빨리 걸어서 이십여분이면 섬의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가닿을 수 있는

크기, 그리고 섬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이 보일만한 크기. 그 정도 사이즈라야 이게 섬이구나,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채 외로운 땅덩이구나 할텐데, 사실 제주도는 섬인지 뭔지 잘 감이 안 오니까.

항구를 둘러싼 채 두툼한 가랑이를 한껏 찢어벌린 방파제들이 흠뻑 젖었다. 빗물에 젖은 건지, 아니면

바닷물에 젖은 건지, 그렇게 조금씩 헐어가며 차갑게 반들거리던 시멘트 껍데기는 자갈과 모래가 섞인

뼈다귀를 드러낼 거다. 다음번에 조금더 헐어있는 방파제를 밟고 올라설 때엔, 눈위로 뜨거운 햇살이

쨍쨍 내리쬐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김없이 정시에 가파도를 떠난 배는 불과 이십여분만에 다시금 제주의 모슬포항에 사람들을

부려놓았다. 섬 속의 섬, 이라는 표현이 딱 와닿았다. 서울이나 다른 '육지', '본토'에서 제주도로

넘어온 사람들에겐 제주도 자체가 섬이란 감각이 생경하다지만, 막상 또 제주도에서 가파도로

들어오니 이게 진짜 섬같다는 느낌이 확연한 거다. 모슬포항에 도착하니 왠지 발딛고 선 땅덩이가

커진 만큼 가슴도 넓어지는 거 같고, 좀더 세상이 커다랗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제주도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곳은 어디일까. 좌우로 길쭉하게 생긴 제주도의

모양새를 보자면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바로 접근가능한 서귀포는 차라리 가깝다고 말해야 할 거

같고, 동쪽의 성산이니 섭지코지쪽도 딱히 멀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가장 먼 곳은 아무래도 마라도,

가파도로 향하는 배가 뜨는 모슬포쪽 아닐까. 제주도 서남쪽, 올레길 10코스가 있는 곳이다.

화순에서부터 시작하는 올레길 10코스,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탓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드문드문 빗발이 날리는 날씨였지만, 멀찍이 커다란 바윗덩이같은 산방산이 흔들림없이

섰다. 궂은 날씨에도 밭에 나와 일하고 계신 분은 이제 신경쓰지 않을 그 풍경, 산방산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 제주도 남서해안길을 따라 걷는 게 10코스의 매력이다.

젖은 날개를 쉬러 잠시 꽃들에 내려앉은 배추흰나비들. 금방이라도 쏴아 비가 쏟아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보니까,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빗물에 씻겨서 거의 형광색에

가깝도록 강렬하고 선명하게 빛깔을 내뿜는 꽃들 옆에 쪼그리곤 이리저리 구경.


제주도에 출장으로도 오고, 여행으로도 오고, 혼자도 오고, 가족이랑도 오고, 어떻든 올 때마다

주변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돌 많고 여자 많고 바람 많다니 조심하라는. 바람 구멍 숭숭난

깜장 현무암 돌담 옆을 우르르 걷는 여자들의 그림이 그럼 제주도의 단적인 이미지일까.

여자들 대신 보이는 건 농사일이나 장사일로 고단하신 어르신들이다. 제주도의 지역소주는

한라산, 그렇지만 맥주는 뭍이나 여기나 똑같다. 카스, 하이트, 맥스..관련 법규정이 워낙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기업 위주로, 빡빡하게 되어있어 그렇다던데 지역 맥주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제주도의 맑은 물로 빚은 맥주라면.

화순 금모래해변가로 바싹 내려가는 길에서부터 본격 올레길 시작. 음..그치만 사실 길에 시작이

어디 있고 끝이 어디 있나. 올레길로 구간구간 끊겨있긴 하지만, 어디서고 올레길에 들어서서

또다시 어디서고 내키는대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랄까. 올레길이 불어온 걷기열풍이니

'자기를 찾는 도보여행'이니 따위의 말의 성찬에 걸맞는 사용법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파도에 씻긴 어두운 암갈색의 바윗덩이 해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듯한 해변가에 셀수없이

들이치고 빠져나갔을 물결무늬가 그대로 새겨진 기암괴석들. 짙은 안개인지 구름이 끼어 정상부

절반쯤이 뚝 잘려나간 산방산이 계속 눈앞이다.


날이 잔뜩 찌푸린 거 치고는 잔잔한 바다다, 싶었는데 어느결에 조그마한 복어 한마리를 뱉었다.

점점이 흰 알맹이가 박힌 검정모래사장 위에 뉘인 하얀 배의 복어새끼, 그 거무스름한 등판에도

점점이 하얀 얼룩이 박혀있었다.

화순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끝나고 슬쩍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을 따랐다. 짙고 검은 바위들을

질식시킬 듯이 빼곡히 들어찬 녹색 풀떼기들이 검고 딱딱하고 까칠한 그것들을 바다로, 바다로

밀어내는 것만 같다. 녹색생명과 암석생명간의 전면전이랄까.

문득 언덕길 아래로 한뼘만한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삼면이 까만 바위로 둘러쳐진 채, 자동차 두어대만

대면 꽉 찰 것 같은 공간에 제주도에서는 보기 힘들것 같은 황금빛 모래가 곱게 쌓여있는 비밀의 공간.

아까는 뾰족뾰족, 파도에 벼려진 칼날같은 바윗덩이들 사이로 걷는 게 곧 길이더니, 이번엔

파도에 씻겨서 둥글둥글해진 해변가 올레길이다. 뾰족하고 동글하고, 그걸 모두 파도 핑계로만

돌리는 건 얼마나 비겁한가. 나는 잘하는데 상대가, 다른 사람들이, 세상이 잘 못한다는 말은

대개 핑계이기 마련. 내 단단함과 심지를 먼저 살필 일이다.

'썩은 동앗줄', 누군가의 배를 항구에 비끄러매었을, 혹은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을,

아니면 하다못해 그물망이라도 잡아놓고 있었을 그런 나이롱끈이 깡충하게 짧아진 채 해안가

모래톱 위에서 가늘고 야윈 몸을 뒤채고 있었다.

딱딱한 바위판, 두터운 각질처럼 해변가를 덮고 있는 길은 군데군데 여린 곳이 파이고 깨어져

물이 제법 깊은 곳도 있고 얕은 곳도 있고, 곳곳이 웅덩이였다. 테이블처럼 깍아지른 바위판에

파도가 밀려오니 철썩철썩 극적으로 하얗게 부서져내리기도 하고.

용머리 해안으로 접어드는 길. 올레길 표지가 언제 저렇게 쌈빡하게 바뀌었을까. 해안을 따라 걷던

좁은 길이 확 트이며 숲사이로 이어지는 즈음, 흙바닥은 톱밥이 깔린 듯 폭신폭신.

'산방연대'가 뭔가 했다. 산방산에 있는 연대, 그러니까 연기를 피워올리는 봉화대를 말하는 거다.

조선시대에 변경 최일선에 설치한 시설물로,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대 위에는 각종 병기와 생필품을

간수하는 창고 역할도 했다고 한다. 저렇게 말끔하게 잘 보존이 되어있나 했더니, 최근에 보수한

거라고. 안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올려야 할 곳에는 잡초만 듬성듬성. 조선시대라면 평화로운

때로구나, 하겠지만 이미 봉화대는 퇴역한지 오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삼엄한 시절이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한 곳이 바로 여기란다. 용머리해안.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이곳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간직한 곳이라 하여 중국의 누군가 와서 이곳에 칼을 꼽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했다. 칼을 꼽자 천지를 진동하는 비명소리가 번졌다던가. 하멜은

그런 전설이 서린 이곳에 처음 당도했을 때 저런 풍경을 봤을 거다. 그러고 보면, 올레길 10코스를

걷는단 건 당시 하멜이 봤던 풍경을 따라 걷는 길은 아닐까. 조난당하고, 근처를 배회하고, 혹은

조선의 병사들에게 압송되거나 민간인들에게 길안내를 받거나. 그렇게 걸었던 길 아닐까.

하멜 동상과 하멜이 타고온 범선이 놓인 한 옆에는 네덜란드문화체험관이 조그맣게 서있었다.

네덜란드의 나막신들을 직접 신어볼 수도 있고, (좀 뜬금없지만) 히딩크 생가나 캐리커쳐도 있고,

풍차니 튤립이니 모양을 딴 장식품들도 전시되어 있고. 풍차의 날개를 돌려 운수를 보라더니

'좋은 사람을 만나니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라'랜다.

산방산자락을 끼고 계속 가는 길, 올레길이 설마 산방산 위까지 올라가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고

우회하는 길이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검푸르딩딩한 바다가 잔뜩 찌푸린채 빗발을 날리는

하늘이랑 섞여들어버렸다. 그나마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표지하는 건 길게 늘어진 섬하나.


파도에 씻기고 쓸려서 오랜 옛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모습이 되어 있는 해안가 바위들, 녹조류가

이끼처럼 온통 돋아난 모습이 신기하다. 암석의 때로 격하고 때로 부드러운 굴곡이 리드미컬한

가운데 부드러운 녹색 이끼가 빼곡하니 융단처럼 내려앉아 더욱 보드라운 느낌을 던져준다.

검정 모래사장 위에 떠밀려온 미역 비스무레한 해초류 동가리. 쪼글쪼글한 잎새 모양이 변기

청소하는 솔 같기도 하고. 굉장히 탱글탱글하고 두툼하니, 맛있어 보이기도 하고.

해안에 바로 붙어서 걷는 길은 이제 좀 뜸하려나, 해안도로의 아스팔트 위로 올라섰다. 오래지않아

나타난 조그만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는, 잠시 길가 벤치에 앉아 쉬는 중에 발견한

누군가의 호루라기.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던 이 곳이 마라도 잠수함타는 곳이라던가. 어느

부산한 가이드가 흘리고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멀리 형제섬이 보이는 바닷가. 바닷물이 들고 남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섬의 크기나 갯수가

달라진다는 형제섬을 흘낏거리며 걷는 와중에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려진 사람들의 소원도 만나고,

무슨 십장생도의 영지버섯처럼 자라난 풀떼기들도 만나고, 형제섬 앞으로 달리는 유람선도 만나고.

좀 가다 보니 나타나는 송악산 자락. 송악산은 제주도의 오름(기생화산) 중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인데, 제일 먼저 마주한 건 산자락에 뽕뽕 뚫린 구멍들. 일제시대에 여기에

대공포 요새를 만들었다나, 굴을 파고 포들을 숨겨놓았다 한다. 일반인의 접근은 통제된 채

그저 먼 발치에서만 볼 수 있는 뽕뽕뽕 구멍들.

그리고 송악산 중턱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 가만히 네다리로 버티고 선 채 잠을 자는 듯

미동도 않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이좋게 서로 몸을 바싹 붙인 채 풀도 뜯고 꼬리를 휘둘러

파리도 쫓는 (아마도) 부모자식간의 말 두마리도 있었다. 그리고 올레길 10코스 처음부터

우릴 따라 내달려온 저 말모양의 표지판도.


송악산 정상, 성산일출봉만은 못하지만 그만큼 거대하게 푸욱 꺼진 분화구는 한눈에 채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돌려야 크레이터의 끝에서 끝까지, 그리고 위에서 아래까지 시선으로

거칠게나마 훑어볼 수 있었던 것. 그 풀떼기들과 돌무더기들의 거친 질감과 거리감을 담기엔

카메라가 너무 가까웠다. 가뜩이나 황량한 풍경, 불쑥 코앞에 닥친 거대한 크레이터 때문에 더욱

막막해지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올레길이 만들어진지도 이제 꽤 되었나. 파랑 페인트로 그려진 화살표가 놓인 돌이 쪼개지고 그 틈으로

풀씨가 새어들어가선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화살표를 뚝 끊어먹었다. 애초 돌부터 쪼개져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화살표를 따른 오솔길 옆으로 말들이 슬몃슬몃 숨어있는 풍경이

희끄무레한 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아까까지는 돌무더기가 거칠거칠하거나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가를 걸어서 힘들다 싶더니

어느결에 오르락내리락거리는 호젓한 산길 위로 걷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더구나 저 좁은 길 위로

폭탄처럼 투하되어 있는 말똥들의 향연이라니. 한발 한발, 지뢰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텐션 가득한

순간들. 그 덕에 주변 풍경을 여유롭게 보기보다는 발끝만 바라봐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빗물에

씻긴 풀꽃들이라거나 나무를 칭칭 감은 채 하얗게 변색된 덩굴 따위, 눈에 콕콕 박혔다.

말들이 돌아다니는 걸 막으려 했나보다. 제법 넓은 길이 나타났다 했더니, 어느 틈에 저런 울타리가

길 앞을 가로막았다. 숲까지도 길게 이어져있는 엉성한 울타리, 사람들은 저 옆에 한번 꺽여있는

좁은 창구로 이동해야 한다. 말을 막고 사람은 걸러내는 그런 신기한 울타리.

그렇게 울타리를 넘고 나니 또다른 말들이 나타났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뒷배경이 모두

날아가버린 어느 언덕 위에, 미끄럼틀처럼 고개를 드리우고 풀을 뜯는 어미말 옆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망아지 한마리. 아니 근데, 말에 접근하지

말라면서 어떻게 올레길 표지는 말 옆에 저리도 바싹 묶어둘 수가 있나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나타난 말들, 그보다 먼저 눈에 띈 건 푹 꺼진 땅에 구축된 콘크리트 구조물.

말들이 느긋하게 늘어져서 풀을 우물거리는 정경은 분명 평화로워야 함에도 왠지 모를

서늘함과 살벌함이 느껴지는 건 저 구조물 때문이었다. 뭔고 하니, 일제시대 이 근처에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포진지였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군사시설을 부랴부랴 확충하던 시기 건축하던 것으로 5기 중

하나는 미처 완공도 못한 상태였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군사시설이 조선이 해방되는 순간을

그대로 멈춘 채 증거하는 셈이다.

흡사 정글 트레킹을 하는 기분.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가방과 옷을 흠뻑 적시곤

삶의 무게를 한껏 더해주었고, 물방울을 머금어 축축 처진 잎사귀들이 시야를 가리고 길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날이 맑았다면 온통 새까맣게 타버리고 목도 금방 말라버리고, 여러모로

그것도 쉽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끈덕진 가랑비도 쉽진 않단 말이다. 온통 희뿌옇게

'밥안개'가 내려앉은 제주도의 시골 풍경, 대충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올레길 10코스가 끝물에

다다른 참이어서, 조금 더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예기치 않게 눈앞에 저런 시멘트 구조물이 나타나서 조금 놀랬다. 그리고 조금 지나 나타난 텅빈

주차장과 단발 비행기의 앙상한 얼개까지. 사람 하나 얼씬대지 않는 곳에 이런 것들이라니. 더욱

을씨년스럽고 추적추적 청승맞은 느낌이다. 알고보니 그 '알뜨르 비행장'과 관련된 시설들,

시멘트 구조물은 비행기 격납고, 주차장은 인근 양민학살장과 비행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

아직도 남아있는 청보리밭이 조금. 청보리축제는 이미 3,4월에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밭이 조금 남아있었던 거 같다. 상큼하고 건강한 보릿대가 위로 뻗어올라가면서

초록빛을 쭉쭉 짜올리다가 급기야 가늘고 보드라운 붓털같은 끄트머리에서 팡, 공기중으로

퍼뜨려 버리는 느낌.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저 보리밭 위로 연두빛 구름이 곱게 뭉쳐있을 것만

같은데, 바람이 슬슬 일렁이며 초록빛 기운을 온통 흐트려버렸다.

그렇게 10코스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빗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흙길엔 온통 물구덩이가

패여서 발이 푹푹 빠지는 열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10코스를 첨부터 끝까지 걷는데

5시간에서 6시간내외로 걸린다고 보면 될 듯.


아마도 청보리가 가득 차 있던 밭이 아니었을까. 양쪽으로 시꺼먼 흙, 굉장히 비옥해 보이는

흙이 잘 다독거려진 채 빗발을 흔적없이 빨아들였다. 그 사이로 난 곧고도 좁은 길 하나가

하모해수욕장, 모슬포항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7코스는 외돌개에서 시작해 월평포구에서 끝난다. 그리고 8코스는 월평포구에서 다시 시작하며, 그런 식으로 총13개

올레길이 제주도 남해안을 쭉 잇고 있다. 15.1킬로의 7코스 구간, 놀멍 쉬멍 걸으멍 했더니 반나절이 훌쩍 넘는다.

7코스의 마지막, 월평포구. 천천히 걸었던 어쨌던 코스를 마쳐서 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아쉬움이 강했다.

월평에서부터 거꾸로 7코스를 걸어가는 사람들, 어쩜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초반에 강정마을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참기만 한다면 이후로는 쭉 즐거울 테니. 뭐, 고기구울 때 제일 노릇노릇 맛난 한 점을 먼저 먹을 건지

아껴뒀다 마지막에 먹을 건지의 차이.

바다 한가운데 부표처럼 떠있는 게 뭔가 했더니, 사람이다. 카메라로 잔뜩 땡겨서 봤더니 낚시 중이신 듯. 근데

뭐에 의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다시, 7코스 시작점쯤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 차로 달리니 금방인 것을. 어떻게 보면 멍청한 짓이라겠지만,

슝- 달리다 놓치기 쉬운 풍경들 하나하나에 이야기와 추억들을 촘촘이 링크걸어 놨으니 됐다.

펜션에 도착해서 쉬엄쉬엄 이쁜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잘 꾸며져 있던 정원의 꽃도 보고, 개랑도 놀고.

지금 제주도의 모습이 이런 거 아닐까. 오랜 이미지, 현무암 돌하루방, 전통문의 상징 위에다 뭔가 새롭고 깔끔한

이미지를 덧대고 변형시키는 중. 올레길 개척과 커다란 반향이 그 단적인 사례일 듯 하다.

펜션 뒤쪽으로 놓인 그네의자.

털썩 주저앉았다가 주르르 미끄러져 누워버리고는, 흔들흔들 뒤척이며 셔터를 눌렀다.

이번엔 벌레먹은 능소화. 그러고 보니 "벌레먹은"이란 표현은 중의적일 수 있겠다. 벌레가 먹은, 혹은 벌레를 먹은.

여튼 이건 여리디여린 얄포름한 꽃잎을 갉아먹는 갈빛 벌레.

짠~*

제주 올레길 7코스의 강정포구 인근. 여태 해안가와 논두렁길, 꽃길을 걸으며 한껏 들떠있었던 기분이 싸해졌던 구간.

올레길 표시를 지나 문득 꺽여들어간 해안길.

오묘한 형태의 조형물이 바닷가에 서 있었다. 왠지 살풍경하고 휑뎅그레한 분위기, 왤까 싶다.

조금 둘러보니 노란색 깃발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꽂혀있고, 삼엄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켠에는 천막이랄지 텐트랄지 간이시설물이 있다. 방금까지도 누가 머물러있었던 듯 하다.

올레길을 걸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을 맞닥뜨리니 정신이 없다. 우선 사주경계부터. 캄보디아어 같은 꼬부랑

글씨들까지 곳곳에 적혀있는 이 게시판을 보니 조금 정신이 든다. 아. 해군기지 부지가 여기였구나. 강정포구.

MB와 같이 주민의 동의나 의견을 묻지 않고 대규모 국책사업을-더구나 군사시설 유치를-추진하는 제주도지사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최근에 제주도지사에 대한 전례없는 주민소환 시도가 투표율 저조로 부결되었지만 그 와중에

투표를 방해하려는 여러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다고 또다른 논란이 되었으며, 게다가 '주민소환'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제도가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MB의 언질 하에 제도 자체를 축소하려는 움직임마저 있는 상황.

바다 위에 군함이 정박해 있는 그림. 그다지 이뿌진 않다. 주민 공청회나 의견수렴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나 노력도

없이 덜컥 위에서 결정된 일이라니까 더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해군기지가 여기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인 상황인 거 같다. 또다시 가시돋힌 철조망이 둘리고, 살인무기들이

집결한 채 살기등등한 이빨을 드러내겠지. 올레길의 여유로움이나 (잠시나마) 품게 되는 관대한 마음 같은 게 그때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니, 해군기지가 생기고 나면 올레길 7코스가 지금과 같이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여기도 무료 엽서와 우체통이 있었다. '바닷가 우체국'에서 보았던 잘 꾸며진 모양새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함,

그리고 진실함이 있다 느껴진다. 이곳에까지 발톱 세운 철조망을 칭칭 옭죄어야 하는지, 자연 그대로 냅둘 수는 없는지

누군가에게든 다그쳐 묻고 싶었다.

나중에 만난 택시기사 한분에 슬쩍 물었더니, 이쪽 해안에 중국 어선들이 불법조업을 많이 하니 그걸 단속하려면

해군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발전하려면 뭐라도 들어와야 안되겠느냐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해양경찰력을 강화하면

될 일을 해군기지까지 섭외할 일인지, 해군기지가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지, '세계평화의 섬'으로 비전을 정립하고

올레길 같은 자연자원, 관광자원으로 발전해야 할 제주도의 이미지만 해치지는 않을지 묻고 싶었지만...

아마 해군기지 부지로 선정되고 나서 인근 토지에 대한 보상절차가 진행중인가보다. 이미 황량해져 버린채 버려진

비닐하우스들. 이런 장소에 해양박물관이니 크루즈항 같은 걸 짓고 해군기지를 이용한 지역축제를 개발하여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아이디어, 아...겁없이 용감하고 답답한 사람들. 그래놓고 해군기지서 기름이라도 대규모 유출되면

국민들 동원해 기름닦으라 시킬 거고, 해군기지 갔으니 공군기지도 짓자고 나설 테고, 지역축제에 혈세 낭비하며

위엣것들 사진 몇 장 남기고 선거운동 팜플렛에 한 줄 넣었으니 되었다 할 거고. 너무 시니컬한 건가.

사실 이전까지 걷던 길과 비슷한 풍경인데, 마음상태가 투영되어 버렸다. 왠지 써늘한 불안감과 싱숭생숭함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대기. 노란 깃발을 희롱하는 거침없고 둔탁한 바닷바람.

파도에 떠밀린 방파제들이 뭍까지 올라와 하얗게 말라죽어있다. 불가사리들 같기도 하다.

벌써부터 황량하고 살벌한 느낌의 바닷가를 벗어났을 때 살짝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제 다시 밝고 따뜻한 느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걷는 여행의 장점이자 단점은, 마치 보글보글 끓여대는 냄비 속에 들어가있는

개구리처럼 조금조금씩, 점진적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는 거다. 드라마틱한 단절이나 충격 같은 거 없이,

사실 강정포구의 살풍경함이란 그렇게 야금야금 예견되어 있었던 거였다. 빠져나가는 길 역시 그렇게 야금야금.

그렇지만 빠져나가는 길은 더욱 독했다. 이미 강정포구까지 잇는 모종의 도로 확장사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머

명목상으로는 이쪽의 도로 사정을 원활케 하고 관광자원 접근성을 높이니 어쩌니 등등의 건설현장 안내문을 보긴
 
했지만, 아까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던 그 택시기사 아저씨 역시 이게 해군기지 건설 정지작업이라 보고 있었다.


여론 수렴을 날림으로 하는 이유는, 어쩌면 니들끼리 내부적으로 싸워서 힘빼 버려라, 하는 고도의 수작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용에 대한 공지와 협의가 제대로 이루어진 후에야 공통 지반 위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공통 지반 없이 각자의 지반 위에서 떠드는 꼴이다.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올레길 7코스엔 이런 공사길도 포함되어 있다. 조만간 아스팔트가 부어지고 판판하게 다져질테지만, 당장은

벌건 흙먼지가 자욱하고 포클레인의 격한 호흡소리와 진동음이 땅을 울리며, 걷는 사람 따위 배려되지 않는.

뭐, 어차피 올레길도 여름 한철 장사라 이건가. 안전띠나 보행자 안전통로 같은 건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공사판 가운데를 뚫으며 걷고 나니, 시멘트를 대충 발라놓은 제방길을 걸어야 한다. 하아...

이 녀석. 파워가 나가버린 트랜스포머가 칙- 소리를 내며 축 늘어져버리듯 생명이 나가버렸다. 얜 어떤 소리를

내며 죽어버렸을까. 깨져버린 등딱지와, 서로 딴 곳을 향해 고정되어 버린 툭눈. 그렇지만 여전히 생기어린 채

빳빳한 다리털이 안타깝다. 대충 발린 시멘트길 위로 올라와 죽어버려 더욱 비극적인 녀석의 최후.


아, 방금 알아낸 사실 하나, 강정마을 해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보전지역이라고 한다.




강정천을 뒤로 하고 얼마 남지 않은 7코스를 계속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 공식홈페이지(www.jejuolle.org)에서

뽑은 지도에 따르자면 남은 포스트는, 강정포구, 알강정을 지나 월평포구까지 총 세개밖에 안 남았다.

8코스를 전날 걸었던 엄마와 여동생이 흥분하며 했던 말들에 따르자면, 8코스에는 이런 쉼터나 매점이 거의 없다한다.

코스도 7코스보다 길고 더 힘들었다고는 하는데, 7코스만큼이나 8코스도 좋았다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나타나는 소철 '농장'.

비닐하우스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 종묘들. 뭔지 궁금해서 한참 봤지만, 짧막한 내 식물학적 지식으론

도무지 모르겠다. 넓적한 건 잎이요, 쭉 뻗은 건 줄기랄까.

비닐하우스 단지 내에서 길을 잃을세라, 바닥에 큼지막하게 그려놓은 올레길 화살표. 자세히 보면 페인트칠 직후에

차바퀴가 밟고 지나간 듯 뽈, 뽈, 뽈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다.

온통 시뻘겋게 녹슬어버린 물탱크, 도로까지 무성하게 뻗어나온 하룻강아지녀석 풀떼기들. 왠지 방금까지 걷던

인적없어도 넉넉하고 여유롭던 바닷길과는 영 딴판으로 황량하고, 뭔가 괴괴한 느낌이다.

그런 길인데, 비닐하우스 안은 또 딴판이다. 온통 꽃밭 가득.

이것은 꽃. 아까 미처 영글기 전의 종묘가 "넓적한 건 잎이요, 쭉 뻗은 건 줄기"랬다면, 꽃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벌어진 건 꽃잎이요 뭉쳐있는 건 암수술이랄까. 아...너무 무식하다.

그렇게, 황량하고 살짝 불안하기까지한 느낌이 감도는 길 옆에 무덕무덕 무더기로 피어난 꽃들을 위로삼아

강정포구로 가는 길이다.




서건도를 지나 다음 기점, 풍림리조트로 가는 길이다. 어제 신문이었던가, "올레길 싸우멍 다투멍(서울신문, 9/16)에

나왔듯 올레길을 둘러싼 이야기가 온통 찬사 일색인 건 아니다. 걷기 좋게 흙길로 포장하려 하는 측과 먼지나고

지저분하다고 싫다는 땅주인 측, 그리고 사유지 통행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올레길 폐쇄까지 이르기도 한다.

"올레길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제7코스 돔베낭골과 야자수나무숲 길 등 일부 코스는 최근 땅 주인과 마찰을 빚은 끝에 조만간 폐쇄될 전망이다. 올레꾼들은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런...사유지에 대한 적정 수준의 보상과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았으면 좋겠다. 다녀온지 며칠 되었다고 폐쇄 이야기가.

제주도에서 흘러내리는 민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 제주도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라 한다.

정오가 가까워져서인지, 파도가 조금씩 거칠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해가 높을수록 파도가 거칠단 '속설'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아마 그래서 거칠어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옛날 세탁기가 한참 윙윙 돌 때 슬쩍 열어보면, 안전장치가 작동해서 내부에서 정신없이 돌던 빨래통이 금세

멈추곤 했다. 무슨 먹음직스러운 크림을 떠내듯 손가락 끝으로 풍성하게 떠올리던 비누거품. 딱 저렇게 생겼었다.

앞에서 걷던 엄마가 문득 저 돌을 가리켰다. 저거 무슨 환상속의 동물 같지 않냐고. 황소가 콧김 내뿜는 거 같기도,

혹은 용이 입을 히죽 벌리고 지긋이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 않냐는. 난 두꺼비가 떠올랐을 뿐이고.

바로 옆에도 뭔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바위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사자 같은 동물 두마리 같지 않냐고, 한마리는 밑에

늘어지게 눕고 또 한마리는 그 허리춤 위로 턱을 괴고 기댄 거 같지 않냐는 말씀. 나는, 왠 건방진 배불뚝이 자식이

옆으로 누워 한 팔로 턱을 괸 거 같다.

조그마한 내를 가로지르는 하이얀 나무뼈다귀. 생각보다 많이 흔들려서 여성들에겐 조금 쉽지 않았던 듯.

다리 삼아 누워있던 나무뼈다귀를 밟고 지나고 나니 잔잔하게 흐르는 내 한가운데 가지런히 올려진 돌무더기가
 
그제서야 보인다.

바닷가 우체국이랜다. 뭔가 했더니, 인근 리조트에서 직접 짓고 운영하고 있다는 자그마한 정자, 그리고 무료 엽서와

배송 서비스. 나쁘진 않은데, 엽서 전면에 광고처럼 붙어있는 리조트 시설물의 그림이 좀 아쉬웠다. 좀더 은근하게,

거부감도 덜하면서 더욱 기억에도 남을 방법으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쪽엔 이미 온통 낙서로 자욱해진 '소원기원벽'. 색연필도 넉넉히 비치되어 있었고, 차근차근 읽으면 재미도 있었다.

우체통이 있고 엽서가 있고 펜이 있으며 마침 아픈 다리 쉬어갈 바람솔솔 정자도 있으니,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엽서 한 통 적고 싶어지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그리고 얼마전 누군가 지적하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치 일본 신사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원기원 푯말들을 벤치마킹한

소원기원 패..라고 해야 하나. 뭐, 좋으면 벤치마킹할 수도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사당도 아니고, 소원을 적어 걸어둔단

정도의 아이디어 갖고 베꼈다고 말하는 건 좀 과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자를 둘러싼 울타리엔 통나무를 걸어놨다. 거기 역시 소원을 적을 수 있도록 충분히 비치된 펜들.

오호......누군가 빨간 펜으로 "MB OUT"을 적어놓았다. 누굴까, 이거 누가 그랬을까.ㅋㅋㅋ

올레길이라고 전부 올레길 손수건 같은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랜다. 코스 중에서도 7코스를 비롯한 몇몇 코스,

그리고 7코스중에서도 몇몇 포스트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찾아간 풍림리조트. 그 앞에 그럴듯한 이끼벽.

토토로가 뛰어놀듯한 분위기다.

아마도 여기가 강정천? 리조트 옆을 끼고 흐르는, 아니 정확한 선후사실대로 따지자면 강정천을 끼고 리조트를

지었겠지만, 사계절 내내 맑은 물이 흐르는 은어 서식지랜다. 물이 엄청 맑지 않고서야 코빼기도 안 비친다는

우윳빛깔 은어씨, 수박냄새 은어씨.

그러고 보면 과거 제주도, 하면 떠오르던 돌하르방과 전통 형태의 대문 같은 이미지의 농도가 많이 옅어졌다.

그만큼 제주도에 다른 볼거리와 먹을거리, 이야기거리가 많아졌다는 의미인 거 같아 다행스럽다.





여기가 돔베낭길 쯤일까, 옆으로 담장돌들이 가지런히 이빨맞춰 늘어서 있고, 머리위엔 꽃을 잔뜩 얹었다.

색소폰을 형상화한 거 같기도 하고, 다른 악기 같기도 하고. 알고 보니 여긴 무슨무슨 펜션의 정원이랄까,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올레길 코스도 그런 사적 영역에 기댄 바가 없지 않다.

호텔에 부속된 산책길이라거나, 호텔 홍보를 위해 기증된 정자라거나.

그래도 그런 공간들이 올레길 순례자들에게 (물건을 사라거나 자신의 호텔을 이용해달라는 등의) 강한 압박, 그래서

불쾌할 수 있는 부담감을 주지 않아 다행이다. 그냥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느낌이다. 그 펜션 정원에 들어가 잠시

앉아 쉬며 바라본 꽃과 나비.

거푸 크게 심호흡하는 리듬으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나비. 후읍, 하아, 후읍, 하아.

약간 흑백 사진처럼 나와버렸는데, 왠지 분위기가 살아있는 사진같다. 걷기 시작한지 30분도 안 됐으니, 아침 7시반도

안 된 살짝 이른 아침의 제주 앞바다.

그리고 제주의 하늘. 구름이 몽실몽실 한켠으로 우르르.

계속 이렇게 잘 관리되고 '공원'같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의 길만 걷나 했더니,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잘 닦이고 주변

경관도 잘 조성된 길은 끝나고 '날 것'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껏 낮은 자세로 웅크린 저 차양들처럼 서서히. 저건 뭘 길러내기 위한 보호막인 걸까.

올레길이라고 샛길이나 곁길이 없을리 없다. 잠깐 샛길로 빠졌더니 바닷가에 내려섰다.

시커먼 돌과 푸르딩딩한 바다, 그리고 그야말로 하늘색 하늘.

다시 올레길 코스로 복귀, 이번엔 문득 호박길이다. 호박이 넝쿨째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는 길가.

이런 찻길이나 대로변 인도를 걷기도 한다. 온통 '허'로 시작하는 렌트카들이 씽씽 달리는 찻길이라 조금 주춤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찻길 근처에 기댄 구간이 길지 않아 다행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아버지를 빼고 엄마랑 여동생이 함께 갔다. 앞에서 부지런히 걷는 두 모녀.

그렇게 대로변을 지나다 마주친 어느 집의 '팥색' 지붕. 퇴색한 느낌이 너무 좋은 거다. 군데군데 잘 벗겨진

페인트칠도 무지하게 매력적이고. 이게 바로 엣지있는 빈티지스러움..?

공항버스 600번. 제주국제공항에서 15분마다 출발하는 이 버스는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제주도를 종단한다.

서귀포시 옆 제주월드컵경기장 근처 펜션에 머무느라, 목요일 퇴근후 비행기 잡아타고 이 버스를 잡아탔댔다.

올레~! 갈래갈래 갈린 길 앞에 서면 이런 식으로 된 스티커던, 파랑색 페인트로 찍찍 그려진 화살표던, 뭔가

표식을 찾게 된다. 스티커가 이뻐서 하나 떼어올까 하는 마음이 0.1초간 들었으나 후인들을 위해 참기로 했다.

서귀포여고를 지나가는 길에 문득 마주한 어느 집 대문. 제주도의 대문이라 하면 나무기둥 세 개를 가로누인 전통적인

그게 생각나는데, 이 녹슨 철문도 못잖은 포스를 뿜고 있다.

아직은 싱싱하니 파랗기만 한 귤. 희끗희끗한 액체가 말라붙어 있길래 혹시 농약인가 해서 물었더니, 영양제란다.

지금 나오는 귤들은 하우스 재배라는 것 같던데, 그래도 인심좋은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받은 귤은 크고 달았다.

어느 집 지붕 위에 불쑥 피어난 꽃무더기. 여린 꽃잎 여기저기 벌레먹은 양 너덜너덜한 게 살짝 민망하지만서도,

외려 '보여주기'용이 아니라 그냥 제 멋에 싹트고 자라고 꽃피웠겠거니 생각하니 또 그럴 듯 하다.





코스 경로(총 15.1km, 4~5시간)

외돌개 - 돔베낭길 - 펜션단지길 - 호근동 하수종말처리장 - 속골 - 수봉로 - 법환포구 - 두머니물 - 일강정 바당올레(서건도) - 제주풍림리조트 - 강정마을 올레 - 강정포구 - 알강정 - 월평포구

ⓒ 제주올레 공식홈페이지.(www.jejuolle.org)

올 여름에 10만명이 다녀갔다는 제주도 올레길, 제주도 사람들끼리 제주도가 가라앉는 거 아니냐는 농담도 돌았댄다.

도보여행자의 성지라는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벤치마킹했다지만 없던 길을 새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원래 제주도

사람들이 놀멍(놀면서), 쉬멍(쉬면서) 즐기던 길들을 정식으로 코스화했다는 게 맞을 듯 하다.


어찌 하다보니 저번주 목요일 저녁, 제주도에 있었다. 다음날 하루 걸었던 올레길 7코스.

외돌개 근처 솔숲에 숨어있는 자그마한 까페. 아침 이른 시간이라 아직 문은 안 열었다.

제주도의 남해안. 독특한 구름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뭔가, 의도를 갖고 찍어본 사진. 나와 함께 나란히 서서 저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지 않을까 싶도록.

왼쪽을 굽어보면 부지런한 배도 지나가고.

여름휴가철 내내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순례했다던 올레길은 이제 고즈넉하다. 앞서 걷고 있는 엄마와 동생.

다복솔이 살짝 얹힌 제주도의 남쪽 끄트머리. 누구던가 조선의 선비 하나가 기생과 흥취를 나눌 때 썼던 표현, '다복솔'.

외돌개가 왼켠에 자리했다. 용암이 분출하면서 신도 걸려 넘어질법한 거대한 돌부리가 솟구쳐 버린 셈이다.
 
삐쭉, 하고. 외돌개라..순우리말 이름도 멋지다. '외', 외롭게, '돌', 돌출해나온, '개', 개....식끼?ㅡㅡ;

홀로 우뚝 솟은 모습이, 아래에서 봤다면 더욱 당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위에서 이렇게 봐도 나름 느낌이 살고.

외돌개를 끼고 걷는 길, 바다에만 던져뒀던 시선을 육지쪽으로 거두니 잘 정돈된 공원이 나타난다.

외돌개가 유명해진 건 이곳에서 대장금 촬영을 하고 나서란다. 그렇지만 사실 렌트카 몰고 돌아다니는 여행에서

이런 단촐한 지점을 꼼꼼히 보기란 쉽지 않을 거다. 걷기가 주는 묘미란 게 그런 거 아닐까. 완만하고 연속적인

그림, 궤적 위에서 뭔가를 지긋이 바라볼 수 있다는 거. 뚝,뚝, 끊겨서 소위 '명승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아침해가 떠오르는 바닷가 벤치에 앉아 그날의 따뜻한 신문을 펼쳐보는 어르신의 여유. 그치만 왜 신문을 보시나요,

이왕이면 조금은 두툼하고 오랜 시간의 세례를 받은 책이 좀더 운치있을 텐데.

언덕 위의 하얀 집. 누군지 몰라도 그럴 듯한 별장, 혹은 펜션 하나 잘 지어놓았다. 저런 집에 살고 싶다, 라는

과거의 나이브하고 다소 진부한 찬탄은 어느새 '저런 펜션/별장 하나 갖고 싶다'라는 속물적 욕망으로 바뀌었다.

제주도에 많은 거 세 개 중 하나, 바람을 상징하는 신물이랄까. 바람개비. 아까 외돌개에 걸려넘어진 신이란 녀석,

울먹이며 꼬장부리고 있을 때 달래주려고 바람개비 몇 개 듬성듬성 꽂아놓고 준비중인 게다. 그녀석의 둔하고

무딘 손끝에서 쉬이 분질러지지 않도록 강철로 만들어놓은 커다란 바람개비로다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사람들의 보폭이란 게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다 다르다. 더구나 카메라를 들었는지 짐은 얼마나

챙겼는지 등등 변수란 건 찾아보면 참 많은 거다. 게다가 오늘 하루의 일정, 목적지도 다르니 호흡도 달라진다.

외돌개를 빠져나가는 길 어디메쯤. 구불구불한 길을 걷는 게 참 재밌다. 더구나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차를 타듯

'수단'으로 걷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 산이 있어서 오른다'는 식으로 거기 길이 있어서 걷는다는 맘으로 걷고 있자니

마음이 참 너그럽다. 실은, 금요일에 휴가를 낸 덕분인지도 모른다.

왼켠엔 푸른 바다, 오른켠엔 초록 들판. 그 사이로 구불구불, 좌우상하로 굽이치는 길.

제주도는 네번째다. 꼬맹이 때 한 번, 대학교 1학년 때 자전거로 해안도로 일주 한번, 작년에 국제행사 때문에 한번.

그리고 올레길을 처음 걸어보는 지금.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