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의 글은 대학 다닐 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었던 그의 말마따나 그의 글은

시간의 힘을 오랫동안 이겨낼만큼 깊이있고 섬세하게 다듬어졌다기보다는, 시사적인 이슈에 맞춰져 다작으로

승부하겠다는 느낌이 짙었던 탓이다. 아마도 그런 탓인지 다소 까칠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말글같은 그의

줄글에 담긴 내용이란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제기, 혹은 약간 더 치고 나간 정도의 이야기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나 학벌문제에 대해서나 지역갈등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 책은 제목을 어디선가 들었을 때부터 꼭 한번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간극이란 문제에 대해서 좀 관심이 뻗어있을 때기도 했고, 외교학과(라고 쓰고 국제정치학과 혹은 국제관계학과라

읽어야 할 거다)를 나온 탓에 어디서 줏어듣기는 한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의 개념을 빌어 한 나라의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논하려 하는 듯한 아이디어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필명을 얻었을

때 쓰던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풍모가 그대로 묻어나는 제목, "지방은 식민지다." 그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다.


'내부식민지론'은 한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중앙과 지방 간의 극심한 총체적 격차가 구조화되어 급기야 지방이

중앙의 발전 및 유지를 위한 착취의 대상, 즉 식민지로 기능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최장집교수 등이 이러한

내부식민지론을 한국에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경우 환원론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하는 데 대해, 강준만교수는

풍부한 사례를 들어 강력히 반박하고자 한다.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정치..그 어느 면에 있어서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주요한 사회 모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자잘한 칼럼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해 지방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지방 언론이

가져야 할 마땅한 책무와 역할에 대해 유독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방언론이 실제로 지방 자치제도와 경제성장의

도모, 기타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침 이 책을 다 읽어갈 즈음, 설날을 맞이해 '지방'이 모처럼 방송 앞머리를 장식했다. 휴식과 여가의 공간이자

도시인들(서울사람들)의 향수와 감정적 치유의 원천으로 남겨진 공간,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원형적 전통과

문화,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고 믿어지는 그곳. 그곳으로 도시인들은 꾸역꾸역

밀려내려갔고, 또 다시 '출세를 위한 공간', '한국의 중심' 서울로 되밀려 꾸역꾸역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잠복했던 한국의 지방은, 강호순이 지방의 야산과 한적한 국도를 휘저으며 연쇄살인을 저지를 때에야 또 방송에

출현하고 있는 거다.


그의 짧은 칼럼들을 교육, 정치, 언론 등 큰 주제에 따라 모아놓은 이 책에는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당장 실천

가능할 법한 방책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서울 소재대학들이 경쟁우위를 갖는 것은 바로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고 일갈하면서 그것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쓰자는 이야기나, 지방에 난립해 있는

토호친화형 언론들을 솎아내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소수의 언론을 밀어주자는 이야기, 그리고  연고주의를

강고하게 재생산하는 비공식적 집단들인 동창회, 향우회 등이 차라리 공익적인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조금은 쇄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그 모든 이야기들은 언제나 원칙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반응을 유발할지 모른다.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거나 임기응변에 불과하다는 식의 참 쉽고도 힘빠지는 비판말이다. 그걸 의식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매 칼럼마다 꼭 지레 항변하곤 한다. 이것 말고 실제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더 좋은 대안이

있다면 말해달라. 무릎꿇고 경청하겠다, 하고.


안타까운 건,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을 십분 고려하고 원칙을 어느 정도 양보하며 제시하고 있는 그의 대안들조차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다. 그는 지방자치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를 이야기했지만 외려

지방자치제도 자체를 폐기하거나 유명무실화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는 지방문화와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매끈한 '서울공화국'에 약간의 균열을 희망하며 그 모루와

망치로써 지방 언론을 주목했으나, 오히려 지방 언론들은 전부 말라죽어버리거나 더욱 지방 토호와 협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그가 말한 내부식민지로서의 지방이 중앙에 상납해야 할 몫은 점점 커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강준만 교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원칙을 좀더 양보하고 보다 유연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다시

궁리해 낼 것인가, 혹은 다시 원칙을 내세우고 다소 선동적이고 비타협적인 이야기-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소간 선정적일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그는 그가 제시한 '내부식민지론'이 강고해진다는 점에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등장 초기에 비해 조금씩 힘이 빠지고 퇴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식의 진동을 그가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대안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딪히게 될 한국의 완고하고도 답답한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방은 식민지다! - 8점
강준만 지음/개마고원


누군가의 잠재력과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결혼하기 전에 미리 좀 살아봐야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하듯, 직접 함께 일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타입을 알기가 힘들다.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내재된 능력과 취향을 닥치기 전에는 모르는 판국이니

타인을 비교, 평가한다는 건 애당초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타인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결한 활동이다. 어찌됐건 살아가면서 일정한 경쟁이 요구된다는 대전제

하에서, 우리 사회의 경쟁이 얼마나 과다하고 비인간적인지를 차치하고서, 경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판단

기준이 필요해진다. 그건 이력서에 나와있는 학점, 토익성적, 자격증, 어학연수 등의 기록이나 때론 동산/부동산

보유 정도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무엇보다 출신대학이 절대적이다. 그 치열했던 고등학교 교육을 뚫고선

공고하게 서열화된 대학에 차례로 채워나갔다는 것은, 분명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하나의 중요한 잣대로

기능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잣대로서 기능하는 학력이 어느 순간 권력화되고 구조화되어서, 여러모로 스스로의 영향력을

확대재생산하는 '절대반지'가 된지 오래라는 것이다. 대학의 위계에 따라, 사회적인 직업군에도 일반적인

경향성이 생겨난다. 여지껏 공고했던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정책적 반응으로 최근 이력서의 출신학교란을 빼는

등의 시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이른바 명문대 입학생의 출신성분이 갈수록 상층화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끼리 밀어주는 연고주의는 이러한 학벌의

영향력을 한층 강화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비단 출신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인기학과/비인기학과의

문제이기도 하여, 점차 높아가는 경쟁의 파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메타적인 측면을 도외시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학벌주의는, 혹은 서울대학교 프리미엄은, 비서울대 출신이나 서울대 출신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비서울대 출신은 불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불만과 출신 대학에 올인해야 한다는 '교훈'을 각인하게

된다. 이러한 교훈이야말로 공교육을 파탄내고 사교육 광풍, 멀게는 부동산문제까지 일으킨 장본인이 아닌가.

서울대 출신 역시, 자신이 학벌의 덕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계속해서 증명해내야 하는

부담감을 안게 된다. 한국 내 대학위계의 최정점에 안착하기 위해 부차시되었던 자신의 적성, 희망 등은 여전히

접어두어야 하고, 일렬로 달리는 레이스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밤잠을 설쳐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요새는 '서울대 폐지론', '학벌주의타파종합대책' 등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려는 '세력'도 준동하고 있고 말이다.

(서울대..라는 게 한국 교육체계 '피라밋'의 정점에 선 하나의 상징이라 비판받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서울대가

사라져도 제 2, 제 3의 '서울대'는 당연히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는 애초 그러한 '피라밋'을 설정하고 당연시하는

교육 체계와 그 이면의 교육철학의 깊숙한 문제를 건드려야 할 문제다.)



그러한 '불순세력'의 준동에 너무 걱정은 마시라. 서울대라는 간판은 그렇게 녹록하진 않으며 거품이 빠진다 해도

여전히 최상급 레어 아이템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니까. 갈수록 부식되어 유명무실화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서울대'라는 위상이 역설적으로 대학의 상아탑적 기능, 혹은 취직공부에 목매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를

돌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바라건대 그러한 시간에 '학벌주의'에 대한 논란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한 논란이 비록 '엘리티시즘'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이나 한국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다소간 '묻지마'식 비판/비난으로 흐르는 면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학벌에 대한 비판 및 해체 시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한 경쟁과 획일적인 위계를 드러내는 것과 맞물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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