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쯤 일어나 씻고는 바로 시디가베르정류장으로 트램타고 출발. 정말 우리나라도 트램같은 호흡을 가진 탈 것이 있으면,

시간이 어중띠게 비는 때, 어딘가 갈 데가 마땅히 없지만 움직이고 싶을 때, 무지 애용해줄 거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집션들도 터키에서 들었던 악명보다는 훨씬 덜 '귀찮고', 생각보다 훨씬 더 친절하다. 물론 한국을 거의 피를 나눈 형제

국가로 여기는 터키인들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못지않다. 흔히 진부하게 표현하듯, '사람들이 때묻지않은 제3세계'운운

하기는 뭣할 정도로 관광대국인 이집트지만, 그래서 사람손도 많이 타고 때도 남들만큼은 묻어보이지만, 푸근했다.


영어가 안되도 눈빛과 제스처로 충분히 그 진심이 느껴진다. 어쩌면 말이 쉽게 통한다는 건-의사소통이 단지 언어에만

기대어 가능할 정도로-많은 것들을 놓치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외려 답답한듯한 눈빛과 제스처로, 그리고 그

뉘앙스로 무언가 의미를 교환하려 서로 애쓰는 와중에 훨씬 더 '인간'을 만난단 느낌을 짙게 한다. 몇마디 여행용

영어로나, 혹은 아주 식상한 '잘지냈어' 정도의 말로는...그저 인터넷상에서 무언가를 클릭해 순식간에 정보만을 얻고

치우는 정도...그런 느낌이다. 마치 여기가 무슨 리니지 같은 온라인겜 혹은 이러저러한 게임 속이고, 어디서 누굴 만나

대화를 걸면 무슨 정보나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이런 식의 걍퍅한 관계. 머, 그런 거 주의하면서 신나게 여행 중.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시간이나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그런 늘어지는 삶의 속도도 여유롭게

즐겨줄 만큼의 여유가 맘속에 생겼다. 어쨌거나, 여행 중이니까. 전날밤부터 재미나게 읽고 있던 론리플래넷 이집트의

역사랑 문화 편 보느라, 이집트에 대한 정보랑 이미지를 좀더 세밀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으로 썼다. 여기도 참..

3000여년의 파라오 시대 이후에는 계속되는 수난사였다. 페르시아, 로마, 아랍, 터키, 오스만투르크, 나폴레옹, 그리고

영국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게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땅이다. 덕분이랄까 문화도 파라오시대, 그레코로만시대,

등등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세시간 반정도의 버스여행길은, 안내양 아가씨(혹은 아주머니)가 함께 했다.

이집트에서 그런 '개명된 스타일'의 여성은 참 드물게 보아서, 계속 흘끔대며 보다가 넋놓고 남들하듯 차를 시켰다.

빵류까지 갖다주길래 혹시나 하고 몇번씩 물어봤지만 대답이 시원찮고 다른 이집션들도 많이 먹길래, 꽁짠갑다 하고

다 먹고 났더니, 자그마치 17EP를 내란다. 어이, 버스비가 22EP였다구. 데따 맛도 없었는데다가 꼭 불량식품같이

버석대는 엉성한 비닐봉지에 담긴 빵쪼가리와 과자부스러기였단 말이다. 카이로에서도 한끼는 5EP면 되는 판에.


더구나 내릴 즈음, 한 아저씨가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남이냐 북이냐, 해서 왠지 북이라 하기도 껄떡지근하고

남한서 왔다고 사실대로 말했더니 뭔가 옆의 아저씨와 아랍어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흥분이 내게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내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는지 몇마디의 영어와 제스쳐를 동원했다.

America, strong, 무언가 기는 표정 내지 쫄은 표정을 지어가며 혀를 낼름낼름-뭔가 핥듯-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한다.


감이 왔다. 뭐, 이라크 전에 굳이 파병한 한국이 아랍세계에 곱게 보일 리는 없는 거고, 對제3세계 외교가 전무한 채

오로지 미국과의 코드맞추기에 급급한 한국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맞는 이야기고, 나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기분이

좀 묘했다. '조국'과 나를 동일시할 생각이야 없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 국적과 그 인간을 뭉뚱그려 빈정대고

싶지도 않고 빈정당하고 싶지도 않은 거다. 어쨌든 내가 느꼈던 감정은, 나 자신이 '국가'와 '국적'에 묻혀 매도당하고

있다는 불쾌감, 그리고 부끄러움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 명분 없는 파병에 대해.


버스 창가에 그어지는 빗방울처럼, 움직이는 건 자취를 남긴다죠..죽을때까지 먹고 싸는 지렁이처럼.

난 내가 싸제끼는..나로부터 소외되고 나를 소외시키는 감정들을 계속 보고싶진 않은데. 말과 글..이란 건,
 
그로써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자 하는건 너무 지치는 일이네요. 소모적이야. 


여지껏 내가 살아온답시고 나도 모른새 쏟아내고 다닌 말들과, 잠시 그것에 콧물처럼 묻어있던 감정들도

그렇고..주섬주섬 수거한단 건 불가능할뿐더러 나..자신, 맷돌에 대고 갈아버리는 느낌이 든단 말이죠.

죽을 때까지 따끈함과 신선함을 간직한 채 감정을 실을 만한 그릇이 없네요. 뱉어놓고 나면 썩어버리는

느낌을 온전히 전해줄 방법이 없네요. 말의 온기와 감정의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외마디 비명에

의미를 담고 죽어나자빠지는 게 그나마 가장 스스로에게 충실한 거겠죠.


말은, 글은..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각자의 머릿속에 깊이 골지워진

손바닥만한 우물속에서 죽도록 외로워해야한단 걸 외면하는 데엔 너무도 성공적이었던 걸까요, 아님 '최면'에

걸린 채 몰입했던 걸까요..살아야 한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그거밖에 없는데, 아둥바둥 살아야 할 이유는

결국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싶어서인데. 알고보니 적어도 난, 아무것도 피워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품거나

전달하지 못하는 불임의 인간인지도. 몰입이 안되는 게 아니라, 몰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굳이

몰입해 보겠다는 것부터가 무리였는지도.


왜. 노이즈 가득한 세상에서 자기조차 믿지 못하는 말들을 내뱉으며 스스로 냉소를 머금은 채 살아야하죠..

장마가 시작되고, 폭우가 쏟아져내려도 우린 몇천년 째 고작 우산 하나 가졌을 뿐인데. 왜. 왜..대체 뭘

믿고 그리도 당연하게 다들 살아가는 거죠. 난 질식해버릴거 같은데. 우산으로 하늘을 가려보겠다고 정수리나

겨우 가린 파리하고 위선적인 사람떼를 보면 토할 거 같은데. 나 역시 그 족속의 가죽과 핏물을 지닌

일부라기에 더더욱.

#1. 노출증에 대해 생각하다.

용도에 따라 크고 작고 휘어진 그릇들, 접시들이 산개해 있듯이..적당한 형태를 취한 말글을 통해 타인과 접속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는 애초 말글의 목적이 타인과의 소통에 있다는 전제를 편의적으로 밟고 전개되는 이야기이나, 똘갱이가 아닌 이상 지 혼자만의 이야기를 펼쳐 말글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구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므로 말글의 목적이 노출에 있음을, 그리고 그에 상응한 피드백을 기대함에 있음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 45억년의 외로움.

우주의 한생명으로 지구가 탄생하고, 지구의 한생명으로 유기생명이 태어나고, 유기생명의 진화체인 인류가 탄생하고, 그 세포 내에선 끊임없는 유전자적 진화가 이루어져 엄지손가락이 되고, 맹장이 되고. 우주적인 단위에선 지구가 외롭고, 동물적인 단위에선 인간이 외로우며, 개개 인간의 단위에선 내가 외롭지만, 어쩜 내 둘째손가락이나 소장의 상피세포가 외로워할지도 모른다.(미지의 영역이다) 다른 말로, 천왕성이 외롭고, 금붕어가 외로우며, 당신이 외롭고, 당신의 뇌하수체 국물이나 새끼발톱이 외로워할지도 모른다.


#3. 이야기하고 글을 쓴다는 것-나와 타인간의 관계

더구나 이렇게 홈그라운드를 탄탄히 구축하고 그 안에 자신의 온갖 사념들을 응집해 넣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임상병리학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하루끼가 상실의 시대에서 갈파했듯, 사람들은 '내'가 하루에 계단을 몇개 밟고 몇걸음을 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맹목적인 호의나 감정이 관심을 끌어내는데 서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타인의 관심을 끊임없이 유발해내고 타인들의 세계관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지속적으로 개입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자신을 언어로써 기술해넣는 skill인 것이다. 홈그라운드를 설정하여 타인을 자신의 거미줄로 불러들임으로써 얻는 이점에는, 자신의 연속적인 생각의 궤적을 타인으로 하여금 읽어내어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좌표를 가늠하게 하여 갈기갈기 찢긴 서로의 시공간적 공백을 보다 효과적으로 메워보고자 함에 있으며, 또한 타인과의 소경 길 더듬듯 하는 소통에 있어 모종의 어드밴티지를 얻고자 함이다. 담화의 소재와 주체를 최대한 자신 쪽으로 기울임으로써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장악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homo politicus로서의 본성이 발휘되는 것이라 하겠다.


#4. 글을 쓰는 걸 보고 이야기하는 걸 듣는다는 것-나 자신의 문제

그러나 타인에게 이해되는 순간에 본연의 자신은 왜곡되고 박제되어 버린, 예컨대 '04년2월2일오전3시54분의 홀로술기울이는아무개(남,24)'라는 괴상한 것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그러한 수정과 왜곡, 축약의 과정을 거쳐야 모두에게 읽힐 수 있는 '인간'으로써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기에 불가피한 과정이라 여겨진다. 다만 니체가 이야기했듯, 편의상 구체화한 삶의 구라들을 진실로 여겨 지혼자 상처받고 울지 않도록...언제나 타인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관계란 완전할 수 없음을 유념하고 매분매초마다 그 냉혹한 현실에 두손들어 항복하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불가피한 랙에 걸린다 할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기술하고 이해함에 있어 개재되는 말글의 형해화이다. 내가 자신을 읽어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자동기술적인 방식이나 브레인스토밍과 같은 카오스적인 방식을 활용한다 할지라도 역시나 자신을 위한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언어화함으로써 사념처럼 떠돌던 몇가지의 전기적신호들이 형태를 갖추어 자신을 지속적으로 설득해내기도 하여, 결국 말글이 인간의 생각의 흐름을 구속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요는, 자신을 이해함에 있어 본질적으로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한다는 성찰이다.

역시, 인간은 모두에게 타인일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자기 자신마저 자신에게 타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나 방금 쓴 글에서 낯선 남자의 향기를 맡는 경우는 그나마 그 어쩔 수 없는 진실을 대면한 순간이다. 마치 화염이나 파도, 바람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형태를 예측할 수 없도록 변화무상하게 지속하는 인간이 '씌여지고 말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속류화한 인간형은 생기를 잃고 한 fiction의 등장인물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5. 다시 틈새에 끼어들어 무임승차를 꾀하다.

그렇다고 하여 말글을 통한 인간의 통상적인-큰 틀에서의-자기 규정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말글은 역사를 이루어왔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특정양식으로 고착화하거나 인간들간의 일들을 엮고 풀어왔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묶는 접착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미니홈피 한장한장 역시 타인과 자신간의 사이에 놓인 우주와도 같은 그 허무를 메꾸기 위한 벽돌이자 시멘트가 되어 서로의 훼손을 감내한 소통의 기초가 되는 게 아닌가를 생각한다. 말글은, 그 빈약하고 거친 표현으로 인해 서로를 '일반화된 양식'으로 변형시키고-깎아내린단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보이지만-그로부터 다시 서로의 '고유한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한 양대 도구-몸과 언어-이다. 그렇지만, 모두 서로를 자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들이기 꺼리고, 타인의 고유한 영역에 들어가길 꺼린다면. 그저 각자 언어화된 형태로 자신의 그릇내에 안전히 존재할 뿐이라면, 그렇게 그저 세워져 있을 뿐이라면 이건 그저 그림자 놀이일 뿐이다. 제각기의 달팽이껍질 속에서 그 언어가 다중에게 노출되고 의미가 명확치 않은 익명속으로 증발해버리지 않으려면, 최소한 '일반화된 모두'를 위한 중첩적인 아크로폴리스가 필요하단 이야기. 방어선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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