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쌌댄다. MB,ㅡㅠ.

이제 누가 누구를 '전쟁광'이라며 손가락질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그룹으로 묶인다 쳤을 때, 여태까지는 '좌/우'니 '진보/보수', '서울/지방',

'기독교/기타종교', '강남/비강남', '남/여', '현역/비현역' 따위의 구별법이 힘을 발휘했지만,


전쟁 위기 앞에서는 다르다. 그런 모든 건전하고 상식적인 구별 대신 지극히 기본적이지만

우리 안에 들어있는 개돼지들을 분간해낼 수 있는 구별선이 하나 생겨난다.


전쟁과 평화.


대체 전쟁하자고 총구를 들이밀며 북한을 자극하고 국민을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들은

두개골 속에 뇌가 들어있긴 한 걸까.(진중권 말마따나.)


전쟁나면, 예비군 소집하면 지구끝까지 도망다닐 테다.

아놔 진짜.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있으려고 해도 죽도록 짜증나게 만든다.

불과 한달 전에 예비군 훈련을 받았던 것 같은데, 또다시 '소집통지서'가 왔다.

이번 건 여태 받아왔던 하루짜리, 혹은 며칠짜리 통지서와는 달리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소집점검훈련'만 한다는

네시간짜리, 반일짜리 훈련이었다.


여러 모로 정신없는 회사에선 살짝 미안하기도 했고, 예비군 훈련을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아 또 간다고 얘기하는

게 좀 뻘쭘하기도 했지만, 오전만 근무하고 옷 갈아입고 훈련장까지 갈 수도 없는 일이고 걍 과감히 하루를 제꼈다.

뭐...이런 경우 보통 회사에 '공가' 신청을 하면 된다고 하는데, 여태 난 모르고 있었다는..


결국 네 시간짜리 훈련 가서 세시간동안 출석 체크하고 멍하니 있다가 돌아왔다. 한 거라곤 출석 체크에 증빙용

쪽지 하나 작성하고 도장찍은 거. 이게 뭐하는 짓이냐..


12시 30분, 훈련소 도착
 
왜냐믄 통지서 상에는 13:00 10분전까지 입소시간을 지키라고 해놓았었고, 저번 예비군 훈련 때도 지각했던

예비군들은 따로 남아서 한두시간 보충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길이 안 막혀서 일찍 도착한 탓도

있었다. 사실 나 역시 늘 시간에 아슬아슬 맞춰서 도착하곤 했다.


12시 30-50분, 오침(자체 실시)

역시나 항상 그렇듯 시작시간 삼십분 이후까지 슬슬 모이는 예비군들, 한산한 예비군훈련소에서 적당한 그늘을

찾아 벌렁 누워 엠피쓰리를 꼽고 잠이 들었다. 군복을 입으면 왠지 몸이 무겁고 한없이 피곤해진다. 게다가 전혀

행동에 거침이 없어서 흙바닥이든 시멘트바닥이든 사지를 뻗고 누울 수 있다.


12시 50분-13시 30분, 하릴없이 대기

하나둘 모이는 예비군들을 기다리며 햇빛을 피해 사열대에 모여 앉았다. 더이상 누워서 편히 쉬기는 불가능하고,

또 그렇다고 빡빡하게 누군가 챙겨주지도 않는...버려진 상태. 이건 그간 예비군 훈련을 잘못 '길들여온' 훈련소의

탓이 크다. 무엇을 하던 어쨌든 시간만 채우면 되니까, 어차피 늦게 시작하니까, 라는 식의 마인드.


13시 30분-13시 50분, 지루한 반복설명

애초 시간을 삼십분이나 넘겨 훈련을 설명하기 시작한 중사 아저씨는, 중언부언, 횡설수설, 어젯밤에 술을 과하게

하고 여태 깨지 않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계속해서 협조를 요청했는데, 기실 누구도 그의 말을 막지도, 협조

안하겠다고 뻗대지도 않았다. "그니까 강남/서초 지역에서 온 분들 명단을 확인하고 유사시 동원부대가 어딘지

불러줄 테니 필증을 직접 작성해라"라는 간단한 내용인데, 그것도 능력이라 간단한 이야기를 20분동안 A, A', A''...

로 무한 반복, 오토리버스.


13시 50분-14시 30분, 강남지역 예비군 명단 확인

오늘 강남/서초 지역 훈련인원은 약 150여명, 강남지역 예비군 명단은 약 350명. 중사가 델꼬 온 따까리는 병사

하나, 하사 하나. 가용인원은 셋인데 써먹을 줄을 모른다. 가나다 순으로 350명의 명단을 하나하나 부를 테니

대답을 하랜다. 이 시간에 강남과 서초를 쪼개서 두팀으로 나눠 동시에 인원을 확인하거나 가나다순의 허리쯤을

뚝 잘라서 역시 두팀으로 나눠 동시에 확인하면 시간이 얼마나 절약된 텐데..했지만, 그러려니 한다. 군대니까.

그가 데리고 온 병사 하나는 책상에 앉아 손가락 장난을 하고 있고, 다른 하사 하나는 멍하니 서있다.


14시 30분-14시 55분, 반강제적 쉬는 시간

이미 사람들은 지쳤다. 예비군 5, 6년차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이 '소집점검훈련'에 작년에 왔다던 6년차 예비군에

따르면 작년에는 인원점검을 훨씬 일찍 해치웠고, 세시간도 안 걸려 돌아갈 수 있었다 했다. 강남지역 명단을

확인하는데 계속해서 잡소리를 집어넣고 잔소리를 해대느라 이미 두시간 가까이 흘렀으니 예비군들의 말소리에

잔뜩 짜증이 실렸다. 이미 중사나부랭이가 화장실 다녀오라 하기 전에도 대오는 흐트러졌고, 예비군들은 저마다

담배를 피고, 전화통화를 하고, DMB를 보고 있었다.

애초 10분이라 했던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이 지켜지는 건 무리였다. 화장실은 연병장 너머 저 멀리에 있었고,

이미 앞에 선 중사에 대한 비호감, 내지 '무시'는 들끓고 있었다. 그걸 굳이 마지막 한 명이 올 때까지 기다려서야

시작하는 건 또 뭐냐. 그러려니 하자, 군대니까.


14시 55분-15시 25분, 서초지역 예비군 명단 확인

마지막 한 명이 전부 원래 자리에 돌아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명단을 쥐고 다시 호명을 시작하는가 했던 중사,

다시 일장연설이다. 어쩌구저쩌구, 협조 부탁 운운, 지금도 시간은 가고 있어요 운운. 그런 얘기는 사람들 기다릴

때 하던가, 그때는 입닫고 가만히 있더니 다 오고 나서 그런다. 그렇게 잔소리로 시간 까먹고, 또다시 가나다순으로

약 300명의 서초지역 명단 확인. 또다시 놀고 있는 나머지 두 명. 그리고 이미 150여명의 예비군 중 절반 이상은

자신이 어딘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멍때리기. "떠들지 말고 차라리 자요"랬다. 지가 학교에서 배웠을 일제군국주의

교육의 잔재, 그게 다시 군대에서 되풀이되는 말투 아닐까 싶다. "떠드느니 차라리 방해말고 자라."


15시 25분-15시 35분, 누락 예비군 명단 확인

가뜩이나 윙윙 울리는 마이크에 입을 콕 처박고, 종종 지가 어디까지 했는지 까먹고 허둥대던 중사님인지라

아직도 이름이 불리지 않았거나 자신의 유사시 동원부대가 어딘지 헷갈리는 예비군들이 꽤나 있었나보다.

강남의 ㄱ으로 시작하는 사람부터 나오라고 했다가(여전히 나머지 두 명은 놀리고 있다가), 지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명을 더 활용하기 시작해 강남의 ㄱ, 서초의 ㄱ을 동시에 돌리기 시작했다. 아...여긴 군대다.

내가 밖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말이 잘 통하고 합리적이었는지,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15시 35분-15시 55분, 소집점검필증에 도장찍기

각자의 유사시 동원부대까지 기입된 필증을 전부 다 걷어가더니, 하사가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중사는 그렇게

도장이 찍힌 필증을 한장씩 받아서 꼭 쥐고 있고, 병사는 바람에 나부끼는 프로젝터용 스크린이 흔들리지 않도록

화면 뒤에서 두 손으로 잡고 있다. 그들이 도장을 찍는 사이 150여명의 예비군들을 위해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영상물을 틀어놓은 탓이다. 하얀 스크린 뒤로 병사가 멍청히 두 팔 들고 서있다가, 어느순간 똥싸는 포즈로

주저앉는게 다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장이 찍히면 바로바로 주고 보내던가, 혹은 조금씩 모아서

나눠주던가, 그걸 병사한테 시키고 중사는 전체 상황을 통제하는 게 맞을 텐데, 아니다. 최면을 건다, 여긴 군대,

여긴 군대..


15시 55분-16시 05분, 배포

150여명이래봐야 종이 쪼가리 한장씩 금방 나눠줄 수 있다. 어차피 번호순으로 앉아있었으니 옆으로 돌리면

순식간에 각자 주인을 찾는다. 그런데 이 중사님, 거의 본인이 직접 돌아다니며 나눠주는 식이다. 그리고도 받고

가만히 있으랜다. 아직 움직이지 말라고, 무슨 깊은 의미가 있나 했다. 그렇게 십분동안 답답해서 속에 천불이

이는 걸 느끼며 참고 앉았다.


16시 10분, 해방

마지막 한 장이 주인을 찾고 나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휘휘 돌아보고는, "됐습니다."랜다. 가랜다. 허무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빨리 해 뛰쳐나가는 무질서한 예비군 대오의 머릿춤에 선다. 주차해둔 차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빠지려면 역시 또 시간이 지체될 테니, 한시라도 이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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