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할 수 없는 악인 캐릭터, 아니 차라리 그는 현대 도시에 뜬금없이 내던져진 정글소년 아니었을까." ytzsche.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그렇지만 그렇게 앞뒤 동강난 짧은 망상에 이야기가 붙어선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세상과 유리된 채 필요에 따라 조금 한숟가락 얹을 뿐인 초능력자. 일신에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에 비해 참 단촐하고

소박하다 싶을 정도로 존재감없이 살고 있단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그의

비극적 운명을 헤아려보면 등장부터 연민이 울컥 치미는 캐릭터인 거다.


초능력.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린 초능력을 지닌 자, 초능력자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분명 일반의 수준에선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초능력임에

분명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본인은 그로 인해 부모의 보살핌을 잃었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으며, 변변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막막한 도시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던 거다. 배트맨에 나오는 악역 펭귄맨 같기도 하고, 혹은

어쩌면 현대 도시에 나타난 '정글소년 모글리'같은 캐릭터인지 모른다.


분명 '정글소년 모글리'를 연상시킨 이유의 팔할은 강동원의 덕이다. 작고 갸냘픈 체구에, 상처받은 눈빛을 불안하게

흔드는 그의 표정이나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한채 줄곧 바깥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이방인의 그것 같다.

사실 그는 자신의 특수한 능력 때문에 사회화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 내에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근근이

전당포나 털어가며 살았던 거다. 그에 비하면 무작정 그를 뒤쫓는 고수의 캐릭터는 그래도 준수한 삶을 살고 있달까.

그에겐 피부색이 다른-그렇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친구도 여럿 있고, 허름하나마 직장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강동원이 연기한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영화가 후줄근해진다고 느끼는 건,

전적으로 그의 탓이다. 그가 왜 그토록 강동원을 잡는데 집착하는지, 그가 다른 이들에게 보였던 연민과 따뜻함이

강동원에 이입될 수는 없었던 건지, 그리고 심지어 강동원을 잡아서 뭘 어쩔 건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단서도,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둘의 조우가 반복될수록 고수가 왜 강동원을 쫓는지, 왜 그의 분노게이지는 떨어질 줄

모르고 무작정 상승하기만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거다.


차라리 강동원이 조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그의 능력으로 확실히 고수를 종결짓지 않고 불씨를 남겨두는 건

이해가 간다. 여태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않고 제대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을 그에게, 비록 맹렬한 분노일지언정

본인의 존재를 그토록 크게 인식하고 반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쾌감이자 행복, 혹은

그에 가까운 감정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둘만의 생존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승패 여부에 관계없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한껏 뿜어내며 고수와 대적해 나가는 거다.


가끔 그런 해외토픽 기사가 뜨곤 한다. 무성한 밀림에서 홀로 자라난 어린 아이가 문득 발견되어 도시로

이송되어서는 병원 치료도 받고 교육도 받는다는 기사 말이다. 강동원이 그렇듯 문득 도시로 떠밀려온

정글소년과 같다면, 그는 초능력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장애자',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고 해외토픽의 짧막한 후속보도가 그렇듯, 그렇게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며 사회화의 기회를 놓치고 만

사람들은 대개 죽어버리고 만다. 강동원이 그랬듯.









#1. 암기 강요

부대에 배치받고 내무실이 정해지자마자, 바로 위 고참은 '몇월 군번'인지 서열에 따라 왼쪽 상단부터

오른쪽 하단으로 내려가는 군홧장 앞으로 데려갔었다. 몇 월에 입대했는지를 외우고, 이름을 외우고,

보직이 뭔지를 외우고, 30분을 줄 테니 전부 외우라고 했었다. 그게 편한 군생활을 시작하는 길이라고.

당연히 한번에 외우지는 못했고 그때마다 얼빵하다느니, 그것밖에 안 되냐느니 따위 비아냥과 갈굼을

들어야 했었다. 필사적으로 외우고 났더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다른 내무실도 전부 외워야했다.


#2. 각잡고 앉아있기

내무실 맨 끄트머리에 더블백을 풀고는 이내 자세를 잡고 앉았다. 허리를 바싹 세우고 책상 다리를

하곤 두 팔을 빳빳이 펴서 양쪽 무릎 위에 올려두는 자세, 자연스레 양 어깨가 귓볼까지 와닿는

바싹 주눅든 채 굳어버린 모양새가 나오는 거다. 그야말로 신병의 기본자세, 갈기거나 할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닥다닥 붙어서 그 자세로 앉아있다가 옆에서 발차기라도 날아오면 속절없이

우르르 넘어졌다가 후다닥 다시 모양새를 잡아야 했다.


#3. 코골이.

원래 코를 안 고는데, 노란 따까리를 붙이고 긴장한 채 뛰어다니는 신병 생활인지라 밤에 조금 코를

골았나보다. 슬리퍼가 날아오고 군화가 날아오더니, 씨발씨발거리며 내 자리로 와서 따귀를 철썩

갈기고 다시 잠들던 말년 병장이 있었다. 담날부터 베개를 안 베거나 엎드려 자거나 심지어 휴지를

돌돌 말아 코피날 때처럼 양쪽에 박아두기도 했지만 별무소용, 일주일 후인가 그는 한밤중에 내무실

전체 인원을 깨우더니 전부 머리박게 시키며 소리를 쳤다. "신병을 얼마나 풀어놨길래 잘 때도

긴장 하나 안하고 코를 고냐!!" 내게 하이바를 씌우고는 소총으로 머리를 때리고 발로 걷어차다가,

자기부터 차례차례 하나씩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자도록 했었다. 이후에도 방독면을 쓰고 자기도 하고,

군대가면 철든다는 건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코고는 습관은 확실히 고쳤으니.


#4. 뻗치기 등 직접적인 구타행위

내무실 관물함과 벽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었는데, 일과 이후 취침 점호 때까지 거기에 들어가 있으란

것도 하나의 처벌이었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요새 군기가 빠졌어'란 말로 축약될

그런 애매모호한 것들이었다. 벽을 바라본 채 똑바로 서서 두세시간씩 버티고 있는 건 눈앞이 핑핑

돌고 귀가 멍멍해지는 일이었지만, 귀로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티비소리에 정신을 집중해서 버티곤 했다.

그 밖에 너무도 흔해 오히려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들, 식당 뒤로 집합시켜서는 머리박기, 엎드려뻗쳐,

쪼인트까기, 따귀 때리고 발로 밟는 따위. 사실 초등학교 때 보이스카웃 단장을 겸했던 선생님에게부터

단련된 것들이니 새삼 군대 구타가혹행위라 하기도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5. 빨래해주기, 말리고 개어서 관물함에 넣어주기

병장이 되면 세탁기와 세제를 쓸 수 있었고, 조금 잘 보이면 상병 5호봉이 되고도 쓸 수 있는 게 내가

이병 때의 룰이었던 거다. 착한 고참은 자신의 빨래를 해주는 대신 내 빨래도 함께 슬쩍 돌릴 수 있게

배려를 해주었고, 나쁜 고참은 그냥 자기 빨래만 세탁기 돌리도록 했었다. 이후 빨랫줄에 널거나

건조기를 돌리고 찾아오고 각잡아 개어서 각자의 관물함에 넣어주는 건 막내들의 몫.


#6. 사제 용품 금지

상병이 되면 샴푸, 린스를 쓸 수 있었고, 병장이 되면 폼클렌징과 바디워시를 쓸 수 있었다. 그 전까진

초록빛 비누 한장으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하고. 어느 내무실에서 이병이 샴푸, 린스를

휴가다녀오며 들고 왔을 때 전 내무실장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아랫것들 군기 제대로 잡자는 방침을 천명하고 이후 강고한 구타와 정신교육으로 '밥대가리 없는

것들의 정신나간 행위'를 박멸했던 적이 있었던 거다.


#7. 삐엑스, 독서실, 헬스장, 피씨방 등 출입금지

보통 피엑스라 하는 매점, 공군은 삐엑스라 하는데 거긴 상병 이상만 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독서실과 헬스장은 병장 이후, 피씨 세대가 놓인 피씨방은 사실상 유명무실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책 한권 보거나 아령 하나 들어볼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군기빠진 생각이자 건방지기 짝이없는

불순한 생각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던 거다.




별로 오랜 이야기는 아니다. 2002년부터 2004년 8월, 2년 5개월 1주일동안 공군으로 복무했던 시절의

앞부분 이야기니까. 2002년 한국의 월드컵 경기 직전마다 전 내무실을 돌며 '대한민국~ 짝짝짝' 응원을

홀로 목청껏 외치고서야 경기를 볼 수 있었던 때쯤의 이야기니까. 새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요새

'숨소리가 크다'느니 따위의 이유로 벌어진다는 전의경들 사이의 구타가혹행위가 그야말로 '새삼'

이슈가 되고 있는 게 웃겨서다. 여태까지 그런 게 없었던 것처럼 새삼 부각시키는 이유는 뭐지, 그리고

전의경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체 군대의 문제임은 왜 끝내 외면하려 드는 거지 싶어서.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이러저러한 피해자였던 동시에 누군가에게 가해자이기도 했다. 아무리 내가

'밥이 차고' '힘이 생긴' 후에 평소 생각하던대로 각종 금지를 풀고 암기니 뭐니 하지 말도록 했지만

그 이전에 어느 순간에는 밑의 후임을 갈궈야 했던 거다. 위에서부터 차곡차곡 내려오는 갈굼 쓰나미에

휩쓸렸다고 자위하기에는, 내 머리와 손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는지

어쨌는지, 어느새 나도 조금은 군대물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누군가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욕설을

내뱉는 그 기분은 처음보다는 두번째가 덤덤했고, 두번째보다 세번째가 덤덤해졌었다.


반성부터 해야 할 일이다. 피해자로만 자처하기에는, 그 군대라는 시스템 하에서 시간이 흘러가며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맡겨졌던 악역과 가해자 역할의 시간 역시 짧지 않았다. 좀더 철저했더라면

자신이 맞는 것을 거부하는 만큼이나 자신이 때리는 상황에 처하는 것 역시 거부했어야 했다. 고작

이년여의 시간만 지나면 끝나버릴 병정놀이였는데 너무 진지하게 몰입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좀더

폭력에 민감한 채 유지했어야 했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두번 다시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원치 않는 역할을 맡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생각보다 바깥 사회와 군대 내의 사회는 비슷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요새는 점점 더 비슷해진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이로 밀어붙이는 꼰대들은 여전하고, 한발 떨어져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은 권력과

위세를 부리며 못살게 구는 '가해자'들의 유치함과 폭력성도 비슷하다. 게다가 웬만한 폭력은 전혀

폭력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불감증이 온사회에 만연해 버린 느낌도 여전하다. 지금의 치유불가능한

꼰대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해결될까.


더욱 무서운 사실 하나, 나름대로 부대 내에서 입지를 쥐고 난 이후 모든 부당한 차별과 불평등한

제한들을 풀어버렸지만 오래 가지 못했던 거 같다. 군대란 원래 그런 조직이며, 군대에서 배워야 할 건

그런 인내심과 '사회생활'이라는 식의 생각, 그 이면에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질시나

배아픔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대하고 난 이후 다시 원상으로 복귀했다고 들었다. 길고

긴 군생활을 재밌게 하려면 처음부터 다 풀어주면 안 된다고 했다던가.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에

박정희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복지확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와 비교해서.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사회화', 그게 모범답안인 양 사회 전체에 횡행하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상 군대를 이야기하는 건 사회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군대 내의

구타가혹행위의 가해자들이 아무런 가책이나 반성없이 똑같은 마인드를 가진 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결코 근거없지 않은) 상상, 혹은 자신은 그저 군대의 선한 피해자였을 뿐이라고 맘대로

기억을 재구성하듯 지금도 숨죽인 채 사회 시류에 휩쓸리는 모습을 정당화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노라면, 많이 우울해지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배우고 있다.



생각보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빈곤하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철학 위에서 세워진 시스템을 상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주류 언론, 거물급 정치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되풀이하며 선전선동을 일삼는 상황에선.


'This is not America!'라는 외침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니컬한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예측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인종차별, 보이지 않는 계급 WASP(white-anglosaxon-protestantist), 총기, 마약, 시장주의,

패권주의, 제국주의적 속성까지. 미국에 대한 빈정거림과 비난은 하늘을 찌르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노출하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솔직히 까놓고, 미국의 인종차별이 심하다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미국의

정치판과 대통령이 대놓고 전세계의 놀림감이 되지만 한국의 그것들은 어떤가. 그게 미국의 저력이다.


마이클 무어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아무런 배경지식도 관심도 없던 사람들에게 딱딱한 사회 시스템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현학적이거나, 반대로 감정적이지도 않다. 눈높이를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올려가는,

능란한 요리사가 부식재료를 다루듯, 그는 냉소적이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멘트들로 포커스를 한 점에 모은다.

미국 의료보험업계 로비스트와 결탁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시스템이 포인트다. 그는 응급실에서 돈 얘기부터 하는 의사의 야박함을 탓하지도, 티비에 나와 캐나다의

의료보장제도를 욕하는 정치인들의 뻔뻔함을 비난하지도, '의료 손실'이라는 손익의 개념으로 접근해 최소한의

보험을 제공하려는 보험업계의 비인간성을 타박하지도 않는다. 물론 야유와 조소는 아낌없이 던져지지만,

문제는 사람들을 그렇게 상상하고 움직이도록 틀지워주는 시스템이란 걸 그가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거다.


시스템이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그는 캐나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심지어 쿠바의 사례까지

풍부하게 제시한다. 그 모든 장면에서, 의사와 마주해선 'How much..?'부터 조바심치며 묻는 미국인들은

그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시선 앞에서 완전히 당황하고 만다. 미국에서 120불짜리 약이 그들의 적국

쿠바에서는 겨우 5센트라니, 미국의 시스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 앞에서는 완전한 배신감에 망연해지고 말았던 그들.


나라마다 시스템의 각론은 약간씩 다르지만, 'This is not America. System pays it'. 대답은 한결같고

그 대답이 깔고 있는 마인드도 한결같다. 돈이 아니라 환자가 우선이라는 거다. 누군가 자신의 지갑이 아닌

건강에 신경을 써주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준다는 것. 적절한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이며, 더욱 부강해지자는 주문을 쉼없이 외우는 정치인들의 목적은 더욱 국민들을 잘 돌보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상식과 의지가 모여 시스템을 만든다. 상식의 힘은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는 데에 있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미국은 최소한 의료보장제도에 있어서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최근

오바마가 다시 전국민을 수혜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지만 두고 볼 일이고..


미국의 그들이 '시스템'과 '상식'의 가면을 빌어 하는 이야기는 뻔하다. 사회화의 비효율성, 비용 문제,

세금폭탄..사회화(socialization)와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전체주의 국가 사이에 은근슬쩍 이퀄(=) 표시를

꼽아두고는 사회화나 국가적 차원의 복지 시스템을 절대악으로 몰아간다. 한국과 같다.


한국의 그들은 미국의 의료제도를 따라 영리 의료법인 설립을 독려하고, 의료서비스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거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선진시스템',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 국가가 운영하던 인천공항도, 한전이니 철도니 도로니

따위의 것들처럼 민영화한다는 이야기가 스물스물 나오는 판이지만, 한박자씩 뒤늦게 따르는 그들의 지독한

박자감각은 어쩔꺼나. 이미 시행됐고 문제가 잔뜩 불거져서 고칠려는 판에, 우리는 그 '정통 오리지널' 버전을

수입하겠다니.


아무리 그래도, '상식과 시스템'을 둘러싼 전투에서 한국의 그들은 줄곧 승리해 왔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는, 상식을 조작하고 의지를 분쇄한다. IMF 이후 급격히 무너진 공공 영역, 공공 부문에 들이대진 효율과

수익성의 잣대로 민영화는 곧 지고선이 되었고. 하나하나 무너져내려 이젠 정말 돈 있는 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유료로 지키는 경찰과 소방관들이 나온대도 딱히 이상해지진 않을 만큼 '상식'과 '시스템'이란 게 후퇴하고

있는 거 같다.


식코에 등장한 9/11 자원봉사자들, 한때 미국의 영웅으로 떠받들리다가 건축 폐자재 따위로 인한 신체적

손상이나 심리적 스트레스로 정신적 손상을 입은 채 내버려진 그들을 보고 중첩되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가해 선박의 이름으로 보통 기억되곤 하는 해상 기름유출 사고지만, 마치 누군가 본능 깊숙이 인셉션한 것처럼

'서해기름유출사태'로만 기억날 뿐인, 2007년의 "삼성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건".


아이들의 고사리손까지 끌고 가서 국민들은 돌덩이의 기름띠를 닦아냈지만, 사실 그 원유는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던 데다가 변변한 안전장비조차 갖추지 않은 채였던 거다. 거기서 국가나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그 '자원봉사'를 영웅화하고 애국마케팅으로 소모해버릴 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의 건강과 안위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상식'을 지켜야 했던 건 아닐까. 이놈의 나라 국민들은 너무 순해빠진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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