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부여, 궁남지

@ 충남 부여, 사비성




궁남지 입구에서부터 펼쳐지는 범상찮은 풍경. 한껏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 그늘처럼 동그랗게 드리워진 돌섬,

그리고 떨어지는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연잎들로 가득차버린 연못.

아직 해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아침나절, 비스듬히 내려꽂히는 햇발인데도 땀방울이 굵어졌다.


저너머 보이는 선화공주와 서동의 인형, 궁남지는 서동의 홀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라 주장되는) 용과 교합하여

서동을 가진 장소라는 전설이 서려 있다고 한다. 그 서동이 신라에 염탐하러 갔다가 발견한 게 선화공주.


국적과 신분이 달라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 함께 하기 위해 지어 불렀다는 서동요의 가사말을 이렇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잔다"는, 다소 망측한 가사. 공주로서의,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조심스러움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겠다는 선화공주,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노랫말. 하긴 뒤집어 생각하면 어쩌면 의도치 않게 공주 전문 파파라치쯤에 노출되어 부끄러움을

못 견디고 신라에서 백제로 망명한 건지도.


궁남지 한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기슭과 다리로 연결해 두었다. 기슭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신선이 노니는

저 섬을 구경하면 한나절은 후딱 지날 듯 하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지만, 신선들의 '방장선산'을 향해 죽어라 풍악만 울리다가 툭툭

생명이 다해 떨궈지는 매미들.




대학 다닐 때, 갑갑증을 못 이기고 덜컥 버스 터미널에서 무작정 부여로 향했던 때가 있었다. 낙화암이나 용케

기억해 내어 둘레둘레 돌아보다가 궁남지 이 다리 위에서 하염없이 앉아있었던 기억. 마침 비가 왔댔다.




무지개가 살짝 서린 분수대. 그때도 분수가 있었던가. 뭔가 포말처럼 잔뜩 머릿속에 엉겨붙었단 느낌에 어디로던

나가서 바람을 쐬고 싶었던 거 같다. 여기를 다녀오고 나서 머릿속에 드라마틱한 무지개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부여라는 이름이 꽤나 낭만적이고 포근한 뭔가가 되었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빗자루로 환생했다면, 아마 이들이 아닐까. 굉장히 다정하게 서있는 한 쌍의 빗자루.

약간 크고 빗자루 숱도 많은 왼쪽 녀석이 서동, 약간 작고 아담한 데다가 숱도 단정한 오른쪽 녀석이 선화랄까.

"선화공주 빗자루는 남몰래 빗질하며 서동빗자루를 밤이면 몰래 털어준다." 정도로 노랫말을 바꿔 불러주면

둘의 못다한 사랑이 빗자루로 태어난 이번 생에나마 이어질 수 있을까.




새끼 오리가 무섬증도 없이 사람들 앞길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종종걸음을 친다. 그 재빠른 발놀림이나 발랄한

움직임은 태생이 그런 거지 딱히 겁을 집어먹어서는 아닌 거다. 평화로움 게이지에 플러스 십 쯤.

공주박물관에 있는 무령왕, 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백제인이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를 알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백제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불꽃무늬 왕관은 오늘에도 그대로 남아 분명한

형체를 남기지만, 그 왕관 아래 얼굴과 분위기는 대부분 상상의 영역에 남겨진 것. 그저 문헌상 '온유하다'거나

'따뜻한 성품'이라거나 따위 몇 개 키워드로 상상해낸 분위기를 어슴푸레 더듬을 뿐이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진 않다. 공주박물관에서 발견한 백제인의 생생한 얼굴, 그리고 전신의 형체. 어느 정도

중국풍이 가미된 걸 감안하더라도 꽤나 귀티나게 그려놓았다. 자신만만한 눈매, 당당한 태도의 잘 갖춰진

의관까지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풀풀.


기원후 500여년쯤 중국 남조 양나라 때 그려진 두루마리 그림 '양직공도'에 남아있던 그림으로, 중국 황제에게

사신으로 방문한 외국 사람들이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양나라(혹은 중국)과의 우호도나 관계에 따라 어느 정도

이미지가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었겠다고는 생각되지만, 아무리 중국인 입맛대로 그렸다고 해도 이건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

또 다른 버전의 백제사신을 봐도 그렇다. 똘망똘망하고 귀티나게 생겼다. 의복 역시 허투루 대충

걸치고 다니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세련되고 당당한 느낌.

고구려 사신의 모습도 있었다. 나름 화려한 복색과 깃털관의 모양이 특징적이지만 무엇보다 털이 복슬복슬,

뭐랄까, 짐승남의 매력이 풀풀.

신라, 조금 다른 나라에 비해 앳된 듯한 동안의 사신이다. 백제 사신도 그랬지만 다른 주변국에 비해 뽀얀 피부,

붉은 입술,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까지.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살짝 퇴폐적인 눈매까지.

왜국의 사신, 뭔가 헐겁게 걸친 옷가지들, 그리고 새까만 피부색, 그리고 바로 옆 고구려 사신과는 다른 느낌으로

북실거리는 털들. 그렇지만 색감이나 감각은 훌륭하다. 나름의 의관과 맞춘 의복에 팔다리귀에 꿴 고리들까지.

다른 버전으로는, 조금은 피부가 하얗게 나온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 사신에 비해 약간 키가 작게 나오는 게

'왜(倭)'라는 글자의 연원을 떠올리게 한다. 왜소하다, 작다, 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한자 倭.


조금 자극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루저'였던 왜나라 왜국인들이였달까. 뭐 그떄가 요새처럼 키높이를 가지고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여 정림사지, 왠지 그렇게만 이름부르고 끝내면 어색해지고 만다. 뭔가 더 이어서 할 말이 있는데 중간에 덜컥

끊어버린 느낌이랄까.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이렇게 한단어로 덩어리지어 기억되던 그곳. 부여에 도읍을

정한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란 것이 머리에 꾹꾹 눌러박혀있는 거다.


그렇지만 몇 년전 대학 섭을 째고 무작정 버스터미널 가서 바로 출발하는 티켓을 사서 달렸던, 그 때의 부여,

그때의 정림사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들어서는 길에 만난 벤치, 봉황이 활개치며 금세라도 하늘로 뛰쳐오를 듯한 율동감이 충만해 있다. 반대편엔

다소곳이 깃을 가다듬고 서 있는 봉황.

정림사지 5층석탑의 위엄. 600년 경 만들어져 이렇게 단단히 섰다고 하니 대략 1400년쯤 되었겠다. 단정하면서도

심심하지 않은 모습, 살짝살짝 들린 끄트머리가 은근하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이 석탑에다가 명문을 조각해 남겼다고 했다.

1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렴풋하나마 글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탑신. 기록의 힘이다. 더불어 용케도 천여년을

무사히 살아남은 이 탑의 힘이기도 하고.

예전에도 이런 게 있었던가, 싶도록 생경한 연못이 탑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품고 있었다. 어렸을 때 뭔가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를 다룬 전래동화를 읽었었는데, 무영탑의 설화던가. 와이프가 탑의 완성을 기다리며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길 마냥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는. (넘 거칠게 요약해 버린데다가 '와이프'란 표현이

전래동화의 격을 확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림사지박물관은 조금 심심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복원중인 정림사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엔 조금 발굴된

소재가 모자랄 수 밖에 없을 거다. 그래도 이런 장면은 꽤 흥미로웠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땠을지, 우뚝 선 완성태의 모습이 아니라 이게 어떤 식으로 하나씩 다져지며 올라갔을지를 상상케 해주는

몇 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해주는 전시들.

그 외에 부여 시대 백제의 암막새와 수막새(기와)를 지붕위에 얹는 장인들의 모습도, 첨에 아무생각없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던 시선에 저 사람들이 잡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었다.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그치만 정림사지에서 만났던 가장 깜놀했던 장면은 바로 화장실 표식. 눈알이 그려지지 않은 채 흰자가 있어야할

부분까지 온통 살색으로 메꿔지고 만 이 젊은 처자는, 왠지 복수심에 불타 입술을 앙다물만큼 절절한 사연이

있어 보였다. 이래서야 화장실 들어가기 무서워서 원.

남자라고 별반 다를 거 없다. 뭐 나름 전통 의복을 입혀 놓은 건 좋은데, 역시 눈알이 안 찍힌데다가 흰자위까지

온통 살색이다. 표정 역시 완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 사실 따지려면 한량없다. 저 의관은 백제식으로 갖춰

입혀놓은 건지, 아님 그냥 조선식으로 입혀놓은 건지.

그리고 석불좌상. 5층석탑 너머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또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정림사지는

엄밀하게는 고려의 문화유산, 그 원래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5층석탑만 백제의 것인 셈. 미처 몰랐다. 어쨌든,

번쩍이는 안광에 힘이 빡 들어간 도깨비의 억센 이빨이 손잡이를 물고 있고 연꽃무늬가 장식된 문을 지났다.

뭐랄까, 온몸이 완전히 닳고 닳아버렸다.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니 아무리 멀리 잡아도 천년인데, 5층석탑이

저렇게 세밀한 부분까지 고대로 남아있는데 반해 이 부처님 좌상은 무슨 바위덩이처럼 변해 버리다니.

두 돌덩어리는 각기 다른 시간을 넘어 오늘에 이른 걸까. 그렇다고 이 석불좌상의 느낌이 죽어버린 것도 아니다.

다소 죄송스런 맘을 담아 표현하자면, 지하철이나 터미널같은 데서 많이 뵐 수 있는, 몸이 불편하여 땅에 일부를

끌고 다니시는 그런 분들을 닮은 부처다. 팔도 다리도, 온몸이 둥글둥글 지워져 버렸지만 왠지 모를 위엄과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일견 엄한 것 같은 표정이지만 슬몃 웃음이 물려있는 듯 하기도 하고.

돌아나오는 길, 이번엔 석탑 대신 소나무 한 그루가 연못에 그려졌다.

정림사지는 여전히 발굴 중, 잔디만 무성한 한쪽 벌판 끄트머리에 뜬금없이 자리잡은 돌계단,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돌들이 어깨맞댄 틈바구니에서 풀들만 무성하다.

이런 거 좋다. 지역의 역사문화적 이미지를 이렇게 적극 활용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박물관에서 뽀얀 뽀샵 조명받고 손도 못대게 박제시켜 두는 것이 아니라, 2010년 현재에서 1400년전 사람들이

창조해내고 즐기던 미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여름 한 철 그악스럽게 울어제끼던 매미가 툭, 하고 벤치에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을 거다.

비는 내리고 어머니는 시집간다지만, 그야말로 매미는 떨궈지고 여름은 지나간다.




@ 부여, 궁남지.
부여사비궁, 궁궐의 중심에 섰던 천정전을 향한 대로에 놓인 벽돌 포석들. 처음 느낌은, 뭐야, 이 문양은 왜이리

이질적이야. 하는 것이었다. 어줍잖은 지식이나마 내가 갖고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 이미지에 이런 식의 용문양이

쓰였던 건 못 봤던 거 같아서.

근데, 아니었다. 백제의 문화유산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부여와 공주의 땅을 밟으며 온갖 곳에서 그 흔적과 변용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던 것. 당장 박물관에서 여기저기 흔하게 눈에 띄던 용무늬 벽돌. 이런 문양이 친숙하게

쓰이고 사방에서 쉽게 쓰이던 때가 있던 것이었다. 1400년전.

정림사지석탑을 보러가는 길 울타리에도 있었다. 연꽃을 밟고 올라선 도깨비 문양, 연꽃 문양, 그리고 용 문양.

부여의 어느 음식점 앞, 부여궁(사비궁)에 있던 그 문양 비슷한 그림이 길가의 흔한 포석에서 다시 보였다.

용이 아니라 봉황, 인 듯 한데 그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지는 모습이나 간결하지만 화려한 모양새가 멋지다.

길가의 어느 벤치, 널빤지를 지탱하는 양 끄트머리 대리석에 봉황 무늬가 선명하다.

안타까운 건, 길가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보도블럭의 모양새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그것의 오리지널 모양새는

많이 닮았으면서도 은근히 다르다는 거다. 왠지 이전의 것들이 훨씬 기품이 느껴지고 깊이있어 보인다.

조명의 탓이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당장 같은 형상의 봉황이라고는 해도 뭔가 저급의 봉황과 고급의 봉황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 같달까. 내가 밟는 보도블럭도 조금은 더 고급스런 문양을 가진 거였으면 좋겠는데.

백제의 연꽃무늬 기와들은 그나마 눈에 좀 익은 편에 속하는 거다. 워낙 백제의 '우아한' 문화를 소개하는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대표적인 이미지이기도 하고, 그 고상하고 단정한 분위기는 워낙 인상적이기도 하고.

사비궁 벽돌 대로의 가장자리를 마감하고 있는 연꽃무늬 포석들은 그래서 한결 쉽게 다가왔다.

그리고 공주박물관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난 백제의 문양들. 사방으로 금가있고 깨져있는 벽돌들이었지만,

형체는 분명했다. 불꽃이 수레바퀴 주변에서 돌아가는 듯한 형체의 문양. 근데 어떻게 니들은 1400년을 지낸

유물들보다도 더 오래되어 보이고 힘들어 보이니.

확실히 오리지널이 좀더 문양도 깊고 뚜렷하게 파여 있고, 세련됨의 정도로는 훨씬 더 세련된 느낌. 보도블럭이

핑크빛으로 칠해진 게 문제인 걸까. 예산이 없니 뭐니 하지말고, 아예 한 두께 20센티 정도의 벽돌이나 자연석을

가공해서 몇십년은 갈만한 보도블럭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차피 매년 바꾸는 보도블럭 관련 예산이나

제대로 되어 몇십년 버텨낼 꺼로 바꾸는 예산이나.


도깨비 문양들, 연꽃을 타고 올라서 있기도 하고 산경치를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기도 하고.

아마도 고대 '치우천황'의 이미지에서부터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은 전혀 근거없는 상상. 이런 문양들도 좀더

많이 활용되면 충분히 백제의 얼굴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부여궁 앞마당에 커다랗게 그려져있는 그림은, 너무 커다래서 한눈에 와닿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 원전이 되는

그림에 대한 이미지가 사전에 박혀 있지 않고서야 더더욱.

산경무늬 벽돌. 뫼산(山)자를 꾸역꾸역 먹이고 사육시켜서 토실하게 살찌워놓은 듯한 모양의 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둥그스름한 형체도 그렇고, 듬성듬성 표현된 나무들도 그렇고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불꽃무늬 왕관장식,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이 문화유산은 왕관에서 떨어져나와 그 자체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경의 한구절 표현을 빌자면 '쉬지 않고 불타오르는 떨기나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 같기도 하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으로부터 '백제의 미술'을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세계대백제전, 그리고 부여나 공주의

백제 문화유산들을 돌아보려면 우선 백제 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훨씬 깊게 보일 것 같았으니

정말 좋았던 기회였던 셈이다. 여행 그 자체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재미가 더 크다는 말도 있듯이,

그곳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고 일정을 잡아보고 어떤 문화적 배경이나 특징이 있는지 하나씩 알게 되는

재미를 놓치고 봐서야 영 밍숭맹숭하기만 하기 십상이다. 백제를 돌아보기 전, 그야말로 든든한 가이드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한국미술사는 고사하고, 백제미술사에 대해 정리된 책 한권이 없다." 강연 말머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분이니

회화니 조각을 개별적으로 다룬 책들은 있지만 총체적으로 백제의 미술은 이렇다, 라고 정리한 책이 없단 거다.

백제 문화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고작 중고등학교 때 배운 단편적 지식과 몇 개 이미지에서 멈춰

있는 중요한 이유겠다. 사실 그렇다. '백제'의 이미지란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불분명한 뉘앙스일 뿐이다.

사실 삼국시대의 세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대개 그렇다. 고구려는 강인하고, 백제는 우아하며, (통일전)신라는

소박하다는 정도.

유홍준 전 청장으로부터 한 두시간 반, 강연을 듣고 나서 바로 부여박물관의 유물들을 보았다. 뭔가 조금은

눈이 뜨이는 느낌, 이래서 백제의 문화를 두고 "儉而不褸,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음)"이라고 표현한 거구나 싶었다. 그야말로 문화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표현할

극상의 표현 아닌가. 검소와 누추 사이, 화려와 사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내는 미감이란.

부여박물관은 주로 백제의 사비(부여) 시대의 유물을 품고 있다. 백제의 수도는 한성과 공주를 거쳐 부여로,

그렇게 옮겨 다닌 게 백제의 유물이 신라 유물에 비해 적게 발견되는 하나의 이유라고 했다. 물론 계속된

전란과 정복자의 역사 왜곡/지우기 노력도 한 몫했겠지만.

아마 교과서에는 한 줄 이렇게 실렸을 게다. '백제는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교류했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들은 그 '왕성한 교류'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중국의 영향,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통점, 왜와의 교류 흔적 등등. 나름 도식화되고 형식적인 그림 하나가 박물관에서 보였다.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대관계와 교류관계를 선명히 구분했겠지만, 사실 당시의 외교란 게 오늘날 미국 편향의 외교같지도

않은 외교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서 저렇게 국제관계가 굳어있었을 리 없는 거다. 뭐, 근초고왕 때의

분위기에 한정한 그림이라니 단순화를 무릅쓰고 저렇게 표현했겠지만.

전시품 중 동선의 앞머리에서 눈에 띄던 전시품 하나. 백제시대에 이걸 어떻게 세워놓고 활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후대의 '장승'이 어쩌면 여기서 기원한 걸 아닐까 싶어졌다. 어느 지역이나 고대로 갈수록

남근이라거나 성적 뉘앙스가 잔뜩 담긴 예술품이 많아 보인다. 그게 왕성한 생명력의 근원 혹은 상징처럼

고대인들 사이에 공유되는 이미지였을 거다.

최근 발견되어 기사에도 꽤나 심심치 않게 떴던 백제시대 면직물의 유물이 여기에 있었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붓뚜껑에 담아왔다던 목화씨 신화 이전에도 이미 면직물을 한반도에서 직조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유홍준 청장이

말한 것처럼, 유물 하나가 발견되려면 정말정말 억세게 운이 좋아야 한다. 하필 그 자리에 떨어져서, 우연찮게

보존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고, 이후 수백수천년간 전란이나 화마, 홍수 따위 자연재해를 이겨내고, 근래에

들어서는 제대로 조사도 없이 갈아엎고 콘크리트를 부어대는 우악스런 손길을 벗어나야 하는 거다. 그리고도

발견되기란 더욱 기적과도 같은 일.


그래서 그나마 우리에게 남겨진 문화유산은 '죽음의 문화', 고분이나 무덤에 고이 매장된 것들이라 한다. 아무래도

'삶의 문화', 일상 생활에서 쓰이고 계속 변화하는 것들은 일상생활 중 파괴되거나 소모되기 십상이니까. 뭔가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 이것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 백제에서 만든 게 아닐 거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전까지 우리가 갖던 백제의 이미지란 막연하고 어설픈 것이었다. 발톱이 다섯개 달린 용이 연꽃봉오리를

입에 물고 버티고 있는 모양새라거나, 연꽃 위에 나타난 산수문양과 음악가들, 동물들의 형체, 그리고 맨 위에

버티고 선 봉황의 날아오르려는 듯한 모습까지. 이렇게 화려하고 우아한 대향로에 걸맞는 공간을 꾸미고 있었을

온갖 장식품과 치장들은 또 얼마나 화려했을까. 이 향로만 덜렁 놓였을 리 없는 거니까.

유홍준 청장에 따르면, 이런 백제의 공예 문화가 발달한 건 장인에 대한 예우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종을 만드는 주종(鑄鐘) 박사, 기와를 만드는 와(瓦)박사, 그렇게 기술인을 우대하고 적극 지원하는 정책,

오늘날 한국의 기술이나 디자인이 고전해온 이유도 그렇지 않을까. 장인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장인 정신을 북돋을 정책적, 사회적 토양이 없어서.

서산 마애삼존석불은 매 계절, 매 시간, 매 순간 표정이 달라진다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씌여있었다.

그걸 보여주려는 걸까, 사방에서 조명이 움직이며 그에 따라 변하는 표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마터에서 발굴되었다는 거대한 좌대. '상현좌'라 하여 부처님의 옷자락이 좌대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사이즈가 거의 킹사이즈 침대만하다. 부처님상까지 다 남아있었다면 정말 멋졌을 텐데,라고

유홍준 청장이 탄식했던 그 유물이다.

이 파격적이고 생생한 얼굴 묘사라니. 그런데 제목은 무려 '나한(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성자)'랜다. 문득

현대미술을 전시한 미술전에 온 건지, 고대 문화유산을 전시한 박물관에 온 건지 헷갈리는 순간.

고대 삼국이 고분을 축조하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던 시대에는 부장용 금관, 불교가 국교로 자리매김한 시대에는

사리함, 그렇게 일국 차원에서 문화적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대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의 出자형 금관이

전자의 예라면 백제의 이런 사리함이 후자의 예. 권력층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한다는 궤는 같지만.




백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연꽃무늬 기와. 그렇지만 연꽃도깨비무늬니, 산경치도깨비무늬니

하는 것들도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그전까지는 '연화귀형문전', '산경귀형문전'이란 함축적인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어 딱딱하고 어려워보였는데, 그렇게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하니 훨씬 정감이 간다.

칠지도.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들을 담고 있어 이를 소재로 하여 상상력을

마구 발휘한 소설들도 나왔던 바로 그 '칠지도'다. 진품은 일본의 왕실에 보관한 채 비공개를 고수하고 있다고

하던데, 칼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인상적이다.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흠뻑 서려있다.

나뿐 아니라 이 박물관을 둘러본 아이들의 눈에도 역시 그래보였나보다. 박물관 한쪽 벽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들엔 칠지도를 그린 그림들이 참 많았다. 문화시설이니 볼만한 전시회니 따위가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2010년 한국, 그렇지만 1400여년 전 백제의 고대문화유산을 둘러보기엔 이 근처사는 아이들이 오히려 꽤나

유리한 점도 있겠다 싶어 조금은 다행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유홍준 청장의 말솜씨도 그렇고 이런 편안한 분위기도 그렇고. 그리고

듣고 나서 뭔가 세상에 뿌려진 흔적들을 조금은 더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유쾌함도 그렇고.

비록 그게 당장 살아가는 데 도움은 안 되는 거라 할지라도, 막연하기만 하던 '백제'에 조금은 더 단단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면 꽤나 멋진 일 아닐지.



*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하니 선택과목으로 하니 말이 많지만, 어쩜 그런 건 정말 중요한 논점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몇가지 형식적이고 막연한 설명과 문화에 대한 표현어구를 외울 뿐인 식으로

공부시킨다면 그건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계승하고 느끼도록 하는 데는 실패하는 거다. '우아하다'라는

표현방식에 맞추어 백제의 유물 사진 몇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백제의 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본인이

'우아하다'라는 표현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역사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10 세계대백제전'을 준비중인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대백제전이라니,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하나씩 들고 나오는 무분별한 지역 행사 중의 하나는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출발해

부여에 
도착했다. 최근 성남시가 재정 악화로 모라토리엄 선언을 했듯 그간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남발했던
지역 행사들도 상당수 지지부진한 채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상황, '대백제전'은 부디 그런

'나쁜 예'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취재 전에 '대백제전', '안희정'에 대해 미리 검색해보고 조사하는 것은 필수, 여러 정보 중에서도 최근

시사지에서
봤던 기사 한 꼭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기획해 심대평 지사 시절 시작했고 올해 축제를 앞두고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완구

전 지사는
이 축제를 국제 행사로 키워놓았고 안희정 지사가 마무리를 하게 된 것이다."

"
안희정이 백제에 빠진 까닭(시사IN, 151호)".

라는 내용이 있을 만큼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세계대백제전, 안희정 지사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2010 세계대백제전이 펼쳐질 부여의 '백제문화단지', 그 중에서도 고대 국가의 궁궐을 최초로 복원했다는

부여궁(사비궁)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능사를 복원한 공간을 안희정 지사와 함께 돌아보며 '대백제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눠보기 전, 간단한 브리핑이 있었다. 4000여 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어 330만㎡

(100만 평)
대지에 건립된 아시아 최대의 역사 테마파크라는 백제문화단지, 1994년에서부터 근 20년 걸려

지어진 셈이다.


아시아 최대니 뭐니, 그런 거창하고 알맹이없는 수사보다, 무엇보다 놀랐던 사실 하나는 세계대백제전은 기껏

몇년 된 다른 지자체 행사와는 달리 올해로 57회를 맞는 연원깊은 행사라는 것. 일제시기 낙화암에서 나라잃은

백성의 비애를 달래던 부여/공주 지역행사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안희정 지사는 그런 역사적 연원을 강조하며

이 행사가 여느 지자체 주관의 행사들과는 다르게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성원과 지지가 있음을 강조했다.

사비궁에 들어서며 설명을 듣고 있는 안희정 지사. 그는 백제 문화와 역사가 그저 피상적인 암기와 이해에

머물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실 '백제'라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야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에 걸맞는 이미지나

깊이있는 지식이 있었던가. 북한과 남한이 각각 국가 정통성의 연원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적으로

부각하던 사이, 1400년 전의 이 화려한 고대국가는 점점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었던 거다.

그런 점에서 세계대백제전을 통해 잊혀졌던 역사를 다시금 기억해내고, 재구성해내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문화적 저력을 재발견하려는 것이 대백제전의 목적이라 한다. 외국에 나갔을 때 고작 삼성 반도체, 현대

자동차 따위 최근의 공산품 제조능력만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저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나 자신의 한국인으로서의 품격이 존중받길 바랍니다"라는 게 안희정 지사의 바람이다.


들으면서 꽤나 거창한, 그렇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지구촌 유지'의 일원이

되었음에 천박한 황금이빨을 드러내며 으스대기 바쁜 게 지금 한국의 문화적 소양이랄까, 수준인 터다.

그에 더해 필요한 건 문화적 자존감과 정체성의 풍요로움. 백제는 분명 그 중요한 수원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담이불루 화이불치'라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문화의 정수를 찬탄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에 잘 살려내는 건 우리 후손들의 몫.

사비궁은 삼국시대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것으로, 아무런 잔존 건물이나 흔적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영향을 주고 받았던 수, 당, 남송은 물론 왜의 당대 자취를

추적하고 고증을 거치면서 탄생한 궁전이지만 당연히 원래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거다.

역사도 마찬가지, 지금 우리가 불러내는 '백제'의 기억이란 지금 이시대의 요구와 필요성에 의해 제약받을

거다. 당장 낙화암 인근에서 대백제전 기간에 벌어진다는 '수상공연'이 4대강 정세와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안희정 지사도 그런 부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한국의 토담 문화가 벽돌이나 석재를 위주로 한

여타 문화에 비해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지워지기 쉬우나, 가능한 한 기록과 보전을 통한 역사문화의

계승은 꼭 필요하다는 것. 20세기식의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를 극복하며, 동시에 현시대의 정치적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사비궁을 돌아보고 점심까지 함께 하며 좀더 심도 있는 질문들을 나눴다. 내가 했던 첫 질문은, 대백제전을

이렇게
커다란 규모로 준비하고 있는데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백제문화, 조금 좁혀 대백제전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해 준다면 무엇인지
였다.


안희정 지사의 답.

백제의 키워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백제전의 키워드는 첫 번째로 역사무대를 소재로 한 지역의 축제이고, 두 번째로는 백제의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이번의 가장 큰 목표이다.

해상왕국으로서의 백제, 아시아권 질서내에서의 백제, 불교문화의 중심으로서의 백제, 향후 대백제전이 어떠한 주제의 컨셉을 가지고 볼것이냐가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역사문화축제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국가중심의 역사로부터 땅의 사람의 역사에 대한 문화에 대한 관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가의 역사로부터 백제의 역사는 있지만 한반도 어느 한 지역을 차지했던 이 땅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체계적으로 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백제문화제의 초창기 55년, 56년 백제문화가 열렸던 초반기에는 국가의 패망을 애석해하는 유민의 심정으로 연민의 마음으로 행사를 치루었다면 올해 세계대백제전은 이 지역사로서의 백제의 지역역사에 대한 주목이 첫 번째 컨셉이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온조 이야기를 주제로 한 사마(왕) 이야기, 사비미르 (부여의 용) 의자왕을 주제로 한 수상공연과 삼국시대의 궁터, 백제의 궁터 재현단지가 이번 축제기간에 주목받는 컨텐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비궁과 능사를 둘러보던 옷차림은 참 편안했다. 등산객들이 흔히 쓰는 편한 모자, 그리고 한 손에는

플라스틱 부채를 쥔 채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의 말투 역시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맛이 느껴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성과 열정이 전해지게 만드는 그런 느낌.

그리고 두번째 질문, 외국인 관광객을 20만명으로 잡고 있었는데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구체적인

복안이
준비되어 있는 건지. 주로 어떤 국가의 관광객이 타겟이 될지.


안희정 지사의 대답.

20만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대다수는 일본인 관광객이 차지할 것이다. 주미대사가 열심히 홍보대사 역할을 해주실 것이다. 샤프 사령관등 주한미군 가족들이 백제역사 축제에 많이 참여를 할 것이고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미국인들의 관광도 예상하고 있다.

일반 기업인들도 한국 내에 들어와 있는 많은 외국인 바이어들을 실질적으로  대접을 잘하고 싶다면 백제재현단지 문화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400년 전 패망했던 백제유민의 심정으로 역사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반도가 아시아의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우리의 조상들이 어떠한 생활반경을 가졌는지를 주목해 본다면 아시아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본다.


안희정 지사는 2010 세계대백제전이 가진 커다란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무엇보다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또다시 이 시대의 기록을 쌓고 추억을 만들어가려면 재미있고 내실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했다. 그가 가장 자신있게 추천하는 공연은 바로 '사비미르 수상공연'. 꼭 한번 다시 와서 1400년 전

백제의 문화와 분위기를 흠뻑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백제전 홈페이지 : www.baekje.org/html/kr )



덧댐. 백제문화전과는 상관없이, 안희정 지사에게 궁금한 점 하나가 있어 트윗 친구를 빌어 질문을 했다.

안희정 지사(@steelroot)는 평소 활발한 트윗을 하는 걸로 유명한데 요새 트윗 세계와 바깥 세계와의

온도차가 심하게 나는 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대체 왜 그럴까, 하고. 대답이 궁금하신 분은 그에게

다시 물어보셔도 좋을 듯.




 

네발 달린 짐승이 슬쩍 고개를 돌린 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자태다. 이것은 뭐에 쓰는 물건인고, 묻고 싶게

만드는 이 물건의 이름은 호자(虎子), 백제 시대의 남성용 변기라고 한다. 아하. 그러고 보니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 있는 데다가 등언저리에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게 보인다.


위트있게 슬쩍 뒤로 뺀 엉덩이하며, 몸통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그 은근한 곡선미하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버티고 선 균형감하며, 집에 저런 거 하나 있으면 따로 화장실 안 쓸 거 같다. 게다가 휴대하기도 편하잖아.

변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없이 페트병이나 들고 다니던 현대인들에겐 없는 고졸한 운치와 미감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이름은 '호자'라니, 왠지 볼 일을 보면서 호랑이처럼 울부짖어야 할 것 같은 충만함.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체의 구조와 용변의 자세가 다르니 남자와는 달라야 하는 건 사실 당연한 건데,

내가 봐왔던 휴대용 변기, 요강의 형태는 남녀에 무차별했던 것들 뿐이었다. 앞으로 길게 뻗어나온 입술이

편안한 배변을 돕기에 맞춤한 백제 여성들을 위한 변기, 신기하게 이름은 변기(便器) 그대로다.


이런 한자이름으로 백제 때도 불리웠을지는 모르겠지만, 변기(便器)라는 단어는 새겨보면 뭔가 의미심장하다.

지린내와 똥내가 섞여있는 단어라기보다는 '편리한 기구'라는 담백하고 호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단어랄까.


분명 장담하지만 이런 변기는 밤새 안녕하라는 의미로 방안에 들이는 일종의 '요강' 기능을 수행했을 테고,

일반 가정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체높으신 분들을 위한 물품이었을 터. 일반 백성들은 뭐, 집밖의 큰 나무아래

성별에 따른 편한 자세를 취하고는 대충 풀잎사귀 한줌 뜯어다가 닦고 덮어두고, 그랬을 거다.



@ 국립부여박물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