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 감각을 잃고서는 하늘을 바다라고, 바다를 하늘이라고 착각하게 된다거나 수평 비행중에도 비행기가

상승 혹은 하강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게 흔히 이야기하는 버티고(Vertigo) 현상. 말만 듣고서는 대체

어떻게 저런 착각에 빠질 수 있을까 싶지만, 땅 위에서도 비슷한 착각에서 허우적대는 공간들이 있다.

제주도의 이곳저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깨비도로'가 바로 그런 버티고의 공간.

사진이 저쪽에서부터 슬슬 올라오는 오르막길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저 '시작점'에서부터

슬슬 내려가는 내리막길이라는 게, 내 몸이 받아들이는 위치감각과의 부조화를 갖고 온다.

올라가는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거. 여기서부터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서는 기어를 중립으로 놓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거다. 승용차던 관광버스던 그렇게 슬슬슬 굴러내려가는 신비의 체험.

길 주변 풍경은 아무래도 살짝 오르막을 타는 느낌인데 둥그런 차 바퀴는 뒤가 아닌 앞으로 슬슬 굴러가니까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이질감과 묘한 부조화를 감지하게 되는 거다.

내 신체의 감각기관, 귀의 반고리관과 달팽이관이 협업하고 시각이 보완해서 만들어지는 평형감각기관들이

아우성치며 여기는 내리막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굳이 수평계 어플을 다운받아서 아이폰을 바닥에

살풋 내려놓았더니 예측을 완연히 배신하고 말았다. 인간의 감각 따위, 역시 하찮고도 미미한 거였다.


사진상으로는 차들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거 같은데, 수평계 어플이나 슬슬 굴러오는 차바퀴는 이곳이

내리막길임을 흔들림없이 가리키고 있었다.

'신비의 도로'가 끝나는 지점, 도깨비휴게실이 있어 차들이 잠시 쉬어가기도 하고 차에서 내려 도깨비도로를

직접 걸어보기도 하고. 몇걸음 걷다보니 어지러워져서 걷다가 말았는데, 귓가가 멍멍해지고 약간 토쏠리는

기분이 도는 것이 무슨 뱅뱅 도는 놀이기구를 타고 내린 기분.


옆에 '캐나다 삼촌집'은 뭘까. 제주도에 와서 저런 뜬금없는 간판을 보게 될 줄이야. 근데 확 꽂히긴 한다.ㅋ





벤야멘타 하인학교 - 10점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문학동네

하인, 누군가를 위해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 보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로는 "남의 집에 매여 일을 하는 사람".

한자로는 더욱 웃긴다. 그야말로 하인이라도 알 수 있을 법한 쉬운 한자들, 下人. 아랫사람.


학교가 있다. 그런 하인이 되라며, 누구보다 하인다운 하인을 키워낸다는 하인양성학교가 있다.

의외로 그런 학교에도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또 한명이 입학하겠다고 학교 문안에 들어선다.


시대는 19세기 후반. 앙시앙레짐의 귀족들이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들이 기계 문명과 함께 떠오르는 시기,

예술과 소비의 주체가 특정의 '고귀한 핏줄'만이 아닌 '대중'으로 확장되었다 믿어지기 시작한 시기.


아마도 그는 몰락귀족의 핏줄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동시에 오만해진 대중과 배나온 부르주아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발버둥치기를 거부하고자 했다. 귀족의 오랜 피는 이미 잔뜩 안정되고 녹슬었음을 알아챘고, 또한

부르주아와 대중의 치기어린 범속함을 알아채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고귀해지기 위한 경쟁'의 링 위에

올라서기를 거부해 버렸다.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올라서길 열망하며 위를 바라볼 때, 그는 차라리

충직한 하인이 되어 주인님의 반짝이는 구두와 지팡이를 맡아 놓기 위한 예의바르고 순종적인 태도와 더불어,

의심하지 않는 마음, 한결같은 복종과 주인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마음을 갈고 닦으려 한다. 시니컬하고

독립적이며 재기발랄한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하강'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그의 사유가 자동기술식으로 기록된 궤적을 가만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Vertigo에 빠지고 만다. 어디가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 (당위적으로) 뭐가

옳고 발전적인 방향인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스스로를 혼란 속에 던져놓고 스물스물 삐져나오려

버둥대어 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그리고 실은, 그들의 하인학교는 지금의 세상과 뭐가 크게 다른지 곰곰 따져보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단순하게만 뒤집어보아도 하인이 되기를 자처한 그가 빠져드는 모순과 욕망의 좌절들은 외려 세상에

적응해가며 겪는 그것들과 과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  vertigo (영어).  물리적 감각이 두뇌에 상충하는 신호를 보내 발생하는 공간 방향 감각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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