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인 왕궁, 그 거대한 정사각형 형태의 성벽 외곽으로 한바퀴를 돌고 나니 이제는 안으로 돌아다녀볼 차례.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은 근 이천년 가까이 숱한 사람들의 발걸음에 쓸려 광택에 광택을 더했음이 틀림없고, 온통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들의 위로는 그 오랜 세월의 현현인 것처럼 두텁고 육중한 벽돌들이 벽을 이루고 공간을 쌓았다.

 

 

 

두터운 외벽과 내벽 사이의 공간, 이 빈 틈새로 수백년이 지난 폐허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거처를 구하고, 그렇게 잊혀졌던 곳이라 했다.

 

그러다가 다시 스플릿과 이 왕궁이 주목을 받은 건 1차 세계대전 시기 항구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라고.

 

 

여전히 골목은 말그대로 미로와 같고, 곳곳에서 막다른 길 앞에 나를 멈춰세우지만, 그렇게 잠시 잦아든 발걸음 앞에 놓인 게

 

이런 비감하면서도 다정한 풍경이라면. 저런 대리석 받침은 대체 몇백년을 이곳에 버티고 있던 걸까. 누가 저리로 옮겨놨을까.

 

 

빼곡히 건물들로 이루어진 골목과 골목 사이를 뱅글뱅글 감아나가다 보면 그래도 곳곳에서 확 숨이 트이는 광장들을 만나게 된다.

 

동상 너머로 온통 벽을 지탱하기 위한 조임쇠들이 벽면 곳곳에 박혀 있는 오랜 건물이 보인다. 아마도 저건 무슨 행정관청이었으려나.

 

 

 

 

광장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골목들을 따라 둥둥 흘러나온 사람들,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건물들과 대리석에 눈이 부신다.

 

 

 

 

 

미로공원의 대체적인 이미지는 그런 거다. 회양목류의 정원수를 키가 넘도록 길러서는 도톰하게 관리해서

이리저리 휘어지고 갈라지는 길을 뱅글뱅글 만들어두는 것. 다만 그게 어려워봐야 얼마나 어렵겠나, 그냥

애기들이나 재밌다며 돌아볼 그런 난이도의 가벼운 미로일 거라고 생각했고, 미로보다는 잘 다듬어졌을

그 정원 자체가 볼 것이 더 크지 않을까 했었다. 오산이었다. 최근에 본 네이버 웹툰에서 미로를 빠져나가는

'좌수법'이니 '우수법'이니를 배워두길 잘 했다 싶었다.

비슷한 테마파크들이 서로를 복제하며 우후죽순처럼 들어선다 싶은 제주도, 미로공원 역시 여러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오래 된 곳은 이곳 '김녕미로공원'이다. 제주도 동북부의 김녕해수욕장이랑 바싹

인접해 있기도 하고, 제주시에서부터 차로 달려도 채 한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 입구 매표소에선 미로를

다 통과하면 종을 울리면 된다며, 아무리 헤매도 한시간내로는 다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 미로 패스하고

난 기념 선물은 아이들에게만 준다고도 했다.)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푯말 하나. 대개가 30분 안에 종을 울린다는 이야기인데, 좀체 방향감각이나 길찾는 능력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저 80% 안에 들을 수 있을지 슬쩍 의구심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1시간이 넘도록 헤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했는데 막상 미로 속에 들어서니 설마가 역시나가 될 듯한 분위기.

키를 훌쩍 넘어까지 올라간 미로의 수풀 담벼락, 길도 두사람이 동시에 지나기 힘들정도로 좁은 데다가

이리저리 격하게 휘어지고 갈라져 있어서 좀체 한치 앞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렇게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둔 모양조차 올려다보아야 하는 높이의 커다란 사이즈로 미로 속 인간들을 압박하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세갈래길,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얄미워 보였지만 뭐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하나씩 차례로 뚫어보기로 하고 우선은 오른쪽 길로 고고.

길이 좀 아닌 거 같다. 몇걸음 지나지 않아 덤불 저 너머로는 시체라도 파묻을 듯 붉게 드러난 흙무더기

위로 삽 두자루가 꽂혀 있는 모습이 살벌했다. 미로공원에 함께 들어왔던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수가

그리 적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주위에 인기척은 없고, 미로의 벽들이 소리를 전부 흡수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괴괴한 분위기가 살짝. 뭐, 0.5초 만에 앞의 코너에서 불쑥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긴 했지만.

여하간 중간중간 사람들의 인적이 뚝 끊긴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있는 데다가, 길이 막다르거나 혹은 조금

급하게 휘어져돌아간다 싶은 곳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표지가 필요하겠다. 뽀뽀금지. 연인들이 손붙잡고

이쪽저쪽을 상의하며 가다가, 어딘가에서 불쑥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둘만 있다고 느낄 때 인지상정인 거다.

이렇게 덜컥 막다른 길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눈높이로 보이는 건 온통 초록색 담벼락인데다가 담 너머

저쪽에는 뭔가 기준으로 삼을 만한 표식도 없어서, 망망대해에서 둥둥 속절없이 떠다니는 느낌이다.

이렇게 휘휘 감아 돌아가는 길에서 그냥 무작정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그래서, 딱히 내 의지가 실렸다기보단

그저 되는대로 가보자, 언젠가는 길이 뚫리겠지, 라는 식의 체념과 멍때림의 상태. 아이들 눈높이에 딱 맞는

수준의 미로일 거라 지레 짐작했던 걸 반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 닿은 곳은 어이없게도 입구. 차분한 맘으로 다시 미로를 재출발하기로 했다. 알고 보니 사람들이

한번씩은 다시 입구까지 돌아와서 출발한 경험이 있어서 딱히 내가 멍청한 건 아니..라고 자기 위안.

이번에 새로 밟는 길에선 드문드문 해골이 깔려있기도 했다. 여름철 야간개장을 한다고 밤 9시반까지 미로를

개방한다더니 혹시 저 해골들은 밤에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야광해골은 아닐지. 깜깜해진 어둠 속에서 미로를

헤매는 건 음...살짝 스릴 넘칠 거 같단 생각도 든다.

종이 매달려 있는 도착점이 눈앞인데, 좀체 저기로 나가는 길을 모르겠단 말이다. 그 와중에 아까 봤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엇갈려 마주치고, 정말 두세번 만나는 게 낯설지 않았다.


해골과 키스하지 말란 표지판. 뭔가 으스스하면서도 달콤한 분위기가 풍기는 미로공원이다.

겨우 발견한 길, 미로 위로 올라서는 계단이길래 다 왔구나 했다. 근데 아직. 갈 길이 좀더 남았더라는.

이쪽에서 저쪽 종이 있는 곳까지 다시 또 미로를 헤쳐나가야 한다니, 더구나 이렇게 위에서 바라봐도

좀체 꼬불꼬불한 길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미로가 생각보다 훨씬 크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떻게 이리저리 길을 휘휘 돌다 보니까 불쑥 미로의 끝에 도달했다. 다시 걸어보라면 또다시 헤매며

좀체 학습이 이뤄지지 않은 그 길이었지만 어떻든 도착점은 예고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덜컥 다가왔다.

이미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하니 사람들 표정이 다들 환하다. 


종을 울리고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기 전 한번 휘휘 눈으로 온 길을 되짚어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모르겠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시작점과 도착점을 아무런 방황없이 통과할 수 있을까. 그치만 사실 미로는 좀

그렇게 헤매고, 뒤로 돌기도 하고, 왔던 길 또 가기도 하라고 만들어둔 거니까 대충 삼십분쯤 헤매면 미로가

가진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인 거 같다. 바로 한큐에 왔다면 글쎄, 한 5분 걸리려나.

미로 밖으로 내려섰더니 이제야 미로 앞의 잘 꾸며진 정원도 눈에 좀 들어온다. 정원도 길이 꼬불꼬불하니

또다른 미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선이 야릇했지만, 그래도 잘 다듬어진 관목들과 꽃나무들이 보기 좋다.

아래는 그 정원에서 찍은 꽃들.

확실히 제주도는 따뜻한 남녘땅이어서 그런지 화려하고 커다란 꽃들도 많은 거 같고, 위에서 못 봤던

품종들도 많은 거 같다. 아니면 내가 '위쪽'에서 보았던 게 대부분 콘크리트 사이에서 비리비리한 한계절용

조경들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어떤 미로든 그 곳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굉장히 친절하다.

길을 잃게 되는 길을 알려주는 이상한 표지가 커다랗게 놓인 그곳에서 시작이니까.

그러고 보면 유원지의 '유령의 집' 같은 곳도 마찬가지다.

눈에 잘 띄고 절대 놓칠 수 없는 그 입구, 를 지나치고 나면 정신이 혼미한채 이리저리 쫓기는 거다.


출구는 어디일까. 출구는, 출구는 어디일까...입구는 어디였을까.

블랙박스의 시꺼먼 내부 같은 그 안에서 술취한 듯 갈지자로 헤매다보면 차라리

입구를 다시 찾아서, 그 표시가 가리키는 반대로 내닫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지는 때도 있었다.

결코 찾을 수 없는 뫼비우스의 실마리를 찾듯 결국 내딛는 걸음걸음은 제자리걸음이 되지만.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해서는, 대체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뒤로 멀어지고 있는 건지 따위를 하나도 알 수 없게 되버리는 순간.

누군가 날아올라 내가 어디 있는지를,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고 말해줄 수 있으면 했다.

그럴 때가 아마도 죽어버렸다는 신의 손끝이 움찔움찔 경련하는 순간일 거다.


날아올라 무찔러라 메칸더의 용사들아,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일본의 방사능 물질이 둥그런 지구를 휘감아 도는데, 2012년에는 지구가 망한다는데 여전히

나는 차마 어쩌지 못할 내 신변잡기와 하찮은 일상을 견디지 못하고 심호흡을 뱉는다.

뫼비우스의 대지 위에서 비둘기의 날개를 부러워한다.




@ 서울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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